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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장애운동 현장과 ‘사회적 장애이론’의 접속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은 1970년대 영국에서 처음 태동하여 외국에서는 이미 하나의 학문적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단어는 기껏해야 ‘재활’의 측면에서나 종종 언급될 뿐 하나의 정규 학문으로 도입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의 사회적 측면에 주목한 본격적인 장애학 서적이 국내 최초로 출간되었다.
씁쓸한 것은, 혹은 고무적인 것은 ‘제도권’이 아닌 ‘현장’에서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2007년 출간된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를 통해 장애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함으로써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 김도현은 이 책 <장애학 함께 읽기>를 통해 현대 장애학의 가장 유력하고 결정적인 개념 틀인 ‘사회적 장애이론’(Social Theory of Disability)을 소개하는 한편(제1부), 이와 관련하여 현장에서 부딪히고 고민해 온 여러 쟁점들에 대한 담론을 폭넓게 펼쳐 보이고 있다(제2부).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이론서라기보다는 ‘실천적 문제의식과 이론적 근거의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몸으로 느끼는 절실함에 의해 추구된 지식의 밀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 장애 문제를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연구가 전무하여 마땅히 읽을거리가 없었던 장애인 당사자, 장애인 부모, 장애인단체 및 복지단체 종사자, 나아가 장애 문제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은 저자가 ‘발 딛고 선 바로 그곳’에서부터 약동해 오는 지식을 통해 장애에 대한 색다른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린비출판사는 이처럼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려는 저자의 노력에 공감하며 이 책을 ‘그린비 함께읽기 시리즈’의 첫 권으로 삼았다. 평화학, 여성학 등으로 이어질 이 시리즈를 통해 현장의 실천적 고민들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다시 실천 영역의 역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장애는 사회경제적 관계의 산물이다
?사회적 장애이론의 핵심 테제 :손상과 장애의 연결고리를 끊어라!
마이클 올리버(Michael Oliver)는 영미권을 중심으로 발달해 온 장애학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인 <장애의 정치>(The Politics of Disablement, 1990)를 통해 사회적 장애이론을 개념화함으로써 장애학 발전에 결정적인 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 책 <장애학 함께 읽기>는 올리버의 논의와 그로부터 파생된, 혹은 그것을 둘러싼 여러 이슈들을 다룸으로써 장애를 ‘개인적 비극’이자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한국 사회의 유구한(?) 장애 인식에 새롭고도 필수불가결한 시각을 제공한다.
‘사회적 장애이론’의 핵심은 장애를 특정한 역사적 맥락 내에서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관계의 산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손상’과 ‘장애’의 구분을 통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여성학에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영국의 장애인단체 ‘분리에저항하는신체장애인연합’(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gregation, UPIAS)에 따르면, 손상(impairment)은 “사지의 일부나 전부가 부재한 것, 또는 사지?기관?몸의 작동에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장애(disability)는 “손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거의 또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사회활동의 주류적 참여로부터 배제시키는 당대의 사회조직에 의한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한”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손상과 장애는 인과관계의 연속선상에 놓일 수 없으며, “손상이 곧 장애”라는 인식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좋은 사례 중 하나가 바로 미국 뉴잉글랜드 해안가의 마서즈 비니어드 섬이다. 이 섬에서는 농(聾) 유전자가 두드러진 집단 내에서 결혼이 반복됨에 따라 농인 인구의 비율이 비교적 높았지만, 마치 오늘날 2개 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회에서처럼 모든 사람들이 음성언어와 수화를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농인들은 특별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았다. 즉, 이 섬에서는 ‘농’이라는 ‘손상’이 다른 대부분의 사회에서처럼 ‘장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바호족, 마사이족 등에 대한 연구들 역시 비슷한 결과를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손상을 지닌 사람들은 모든 사회와 모든 시대 속에 존재해 왔지만 그러한 손상이 장애화되는 맥락(혹은 장애화되지 않는 맥락)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손상을 (너무도 당연스럽게) 장애로 간주하는 사회는 변혁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장애학의 실천 지향적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그리고 ‘신성한 노동’ 관념의 해체
사회가 손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다양성을 뭉개 버리고 장애를 오늘날과 같은 의료적 문제로 환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단연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노동 규율을 준수하며 생산량의 효율적 달성에 매진할 노동계층을 필요로 했던 자본권력은 ‘일을 할 수 있는 자’, ‘일을 할 수 있으나 하지 않으려는 자’, ‘일을 할 수 없는 자’를 세밀히 구분하여 선별적으로 포섭, 훈육, 격리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들 대부분이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자리 매김되었으며, 이는 인간의 노동력마저 상품으로서 존재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장애인이 일종의 ‘불량품’으로 간주되는 현실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장애를 사회적 문제로 볼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장애이론이 그 맑스주의적 기반을 고수한다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장애의 진정한 적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맑스주의가 공유하는 ‘신성한 노동’의 관념일 수 있다.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 파악하는 고전적 맑스주의 사회이론의 속성상 손상된 몸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애벌리(Paul Abberley), 폴라니(Karl Polanyi), 벡(Ulrich Beck) 등 다양한 논자들을 끌어와 이러한 전통적 역사유물론의 노동관이 혁신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진정으로 장애인이 해방될 수 있는 사회는 노동에 대한 정의, 즉 특정한 활동이 노동으로 계열화되는 조건 그 자체가 혁신된 사회임을 주장한다. 저자가 장애학과 사회적 장애이론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자 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애 해방을 넘어 연대와 진보를 추구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시끄럽다. 사무총장 내정자를 둘러싼 잡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지난 9월 14일부터 시작된 ‘장애인예산확보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의 점거 농성 때문이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등 전국의 주요 장애인단체들이 참여한 공동행동은 도입을 약속했다가 점점 예산 규모가 축소되어 장애수당보다 고작 1천 원이 인상된 장애인연금의 기만성, 2013년까지 전국 시내버스의 50%를 저상버스로 교체하는 법안이 있음에도 내년의 관련 예산을 8분의 1 수준으로 깎아 버리려는 정부의 무책임함 등에 분노하고 있다. 이들이 이번 공동행동에서 요구하는 예산의 총액은 ‘고작’ 1조 원이 채 안 된다. 이러한 예산의 삭감 및 방치가 우리 사회의 장애 인식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보여 주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전히 장애 문제를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고려하지 못하고 ‘개인이 알아서 할 문제’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손상을 ‘철저하게’ 장애화하고 있는 것이다.
소수자이자 약자인 장애인들에게까지 투입될 예산은 부족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마서즈 비니어드 섬의 농인과 청인의 비율이 1: 155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도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장애인의 권리 확대’라는 차원의 접근법이 갖는 한계를 절감할 수 있다. 이 사회의 분배구조가 바뀌지 않고서는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은 언제까지나 우선순위의 하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장애인의 삶에 대한 개선 및 변혁은 사회 전체의 진보와 연계되어 고려해야 한다는 것,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를 통한 ‘사회구조적 변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이 “단지 장애학 일반의 문이 아니라……무엇보다 소수성 정치학의 최전선으로 이어진 문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추천사는 적절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야기하는 연대가 ‘소수자 집단의 네트워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주장이 제도화되었을 때의 성과와 그렇지 못했을 때의 한계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할 수밖에 없을 장애인운동 활동가로서 저자는 ‘제도 정치’의 영역을 간과하지 않는다. 사실 제도 정치에의 개입은 양날의 칼이다.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실질적 개선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반면, 기존의 담론 체계 내에 포섭될 위험성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의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은 칠레의 사회학자 아르네케르(Marta Harnecker)의 시각이다. 좌파 정권의 집권이 이어졌던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그녀가 제시하는 것은 ‘당 좌파와 사회운동 좌파 간의 연합’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이 그들의 자율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며, 당도 사회운동 조직을 흡수하거나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 좌파와 함께 전국적인 변혁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실천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7장 ‘장애 정치’, 203~208쪽 참조).
따라서 이 책이 도입하는 장애학은 국내에 최초로 정식 소개된다는 점에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의의를 갖지만, 현장활동가의 실천적 고민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장애 해방의 이상을 그리고 있되 그것을 장애라는 단일 이슈에 한정시키지 않고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의 다음 추천사가 의미하는 바도 바로 이러한 지점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 정치와 진보적 삶을 고민하는 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여성학을 읽고 젠더가 배제된 정치는 진보일 수 없음을 깨우쳤듯이, 이제 우리는 장애학을 함께 읽고 장애가 배제된 정치 또한 진보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은 1970년대 영국에서 처음 태동하여 외국에서는 이미 하나의 학문적 흐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단어는 기껏해야 ‘재활’의 측면에서나 종종 언급될 뿐 하나의 정규 학문으로 도입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의 사회적 측면에 주목한 본격적인 장애학 서적이 국내 최초로 출간되었다.
씁쓸한 것은, 혹은 고무적인 것은 ‘제도권’이 아닌 ‘현장’에서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2007년 출간된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메이데이)를 통해 장애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함으로써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 김도현은 이 책 <장애학 함께 읽기>를 통해 현대 장애학의 가장 유력하고 결정적인 개념 틀인 ‘사회적 장애이론’(Social Theory of Disability)을 소개하는 한편(제1부), 이와 관련하여 현장에서 부딪히고 고민해 온 여러 쟁점들에 대한 담론을 폭넓게 펼쳐 보이고 있다(제2부).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이론서라기보다는 ‘실천적 문제의식과 이론적 근거의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몸으로 느끼는 절실함에 의해 추구된 지식의 밀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 장애 문제를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연구가 전무하여 마땅히 읽을거리가 없었던 장애인 당사자, 장애인 부모, 장애인단체 및 복지단체 종사자, 나아가 장애 문제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은 저자가 ‘발 딛고 선 바로 그곳’에서부터 약동해 오는 지식을 통해 장애에 대한 색다른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린비출판사는 이처럼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려는 저자의 노력에 공감하며 이 책을 ‘그린비 함께읽기 시리즈’의 첫 권으로 삼았다. 평화학, 여성학 등으로 이어질 이 시리즈를 통해 현장의 실천적 고민들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다시 실천 영역의 역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장애는 사회경제적 관계의 산물이다
?사회적 장애이론의 핵심 테제 :손상과 장애의 연결고리를 끊어라!
마이클 올리버(Michael Oliver)는 영미권을 중심으로 발달해 온 장애학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인 <장애의 정치>(The Politics of Disablement, 1990)를 통해 사회적 장애이론을 개념화함으로써 장애학 발전에 결정적인 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 책 <장애학 함께 읽기>는 올리버의 논의와 그로부터 파생된, 혹은 그것을 둘러싼 여러 이슈들을 다룸으로써 장애를 ‘개인적 비극’이자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한국 사회의 유구한(?) 장애 인식에 새롭고도 필수불가결한 시각을 제공한다.
‘사회적 장애이론’의 핵심은 장애를 특정한 역사적 맥락 내에서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관계의 산물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손상’과 ‘장애’의 구분을 통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여성학에서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영국의 장애인단체 ‘분리에저항하는신체장애인연합’(Union of the Physically Impaired Against Segregation, UPIAS)에 따르면, 손상(impairment)은 “사지의 일부나 전부가 부재한 것, 또는 사지?기관?몸의 작동에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장애(disability)는 “손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거의 또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사회활동의 주류적 참여로부터 배제시키는 당대의 사회조직에 의한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한”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손상과 장애는 인과관계의 연속선상에 놓일 수 없으며, “손상이 곧 장애”라는 인식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좋은 사례 중 하나가 바로 미국 뉴잉글랜드 해안가의 마서즈 비니어드 섬이다. 이 섬에서는 농(聾) 유전자가 두드러진 집단 내에서 결혼이 반복됨에 따라 농인 인구의 비율이 비교적 높았지만, 마치 오늘날 2개 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회에서처럼 모든 사람들이 음성언어와 수화를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농인들은 특별한 존재로 취급되지 않았다. 즉, 이 섬에서는 ‘농’이라는 ‘손상’이 다른 대부분의 사회에서처럼 ‘장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바호족, 마사이족 등에 대한 연구들 역시 비슷한 결과를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손상을 지닌 사람들은 모든 사회와 모든 시대 속에 존재해 왔지만 그러한 손상이 장애화되는 맥락(혹은 장애화되지 않는 맥락)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손상을 (너무도 당연스럽게) 장애로 간주하는 사회는 변혁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장애학의 실천 지향적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그리고 ‘신성한 노동’ 관념의 해체
사회가 손상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다양성을 뭉개 버리고 장애를 오늘날과 같은 의료적 문제로 환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단연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노동 규율을 준수하며 생산량의 효율적 달성에 매진할 노동계층을 필요로 했던 자본권력은 ‘일을 할 수 있는 자’, ‘일을 할 수 있으나 하지 않으려는 자’, ‘일을 할 수 없는 자’를 세밀히 구분하여 선별적으로 포섭, 훈육, 격리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들 대부분이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자리 매김되었으며, 이는 인간의 노동력마저 상품으로서 존재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장애인이 일종의 ‘불량품’으로 간주되는 현실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흥미로운 것은 장애를 사회적 문제로 볼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장애이론이 그 맑스주의적 기반을 고수한다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장애의 진정한 적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맑스주의가 공유하는 ‘신성한 노동’의 관념일 수 있다.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 파악하는 고전적 맑스주의 사회이론의 속성상 손상된 몸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애벌리(Paul Abberley), 폴라니(Karl Polanyi), 벡(Ulrich Beck) 등 다양한 논자들을 끌어와 이러한 전통적 역사유물론의 노동관이 혁신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진정으로 장애인이 해방될 수 있는 사회는 노동에 대한 정의, 즉 특정한 활동이 노동으로 계열화되는 조건 그 자체가 혁신된 사회임을 주장한다. 저자가 장애학과 사회적 장애이론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제기되는 쟁점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비판적으로 사유하고자 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애 해방을 넘어 연대와 진보를 추구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시끄럽다. 사무총장 내정자를 둘러싼 잡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지난 9월 14일부터 시작된 ‘장애인예산확보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의 점거 농성 때문이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등 전국의 주요 장애인단체들이 참여한 공동행동은 도입을 약속했다가 점점 예산 규모가 축소되어 장애수당보다 고작 1천 원이 인상된 장애인연금의 기만성, 2013년까지 전국 시내버스의 50%를 저상버스로 교체하는 법안이 있음에도 내년의 관련 예산을 8분의 1 수준으로 깎아 버리려는 정부의 무책임함 등에 분노하고 있다. 이들이 이번 공동행동에서 요구하는 예산의 총액은 ‘고작’ 1조 원이 채 안 된다. 이러한 예산의 삭감 및 방치가 우리 사회의 장애 인식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보여 주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전히 장애 문제를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고려하지 못하고 ‘개인이 알아서 할 문제’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손상을 ‘철저하게’ 장애화하고 있는 것이다.
소수자이자 약자인 장애인들에게까지 투입될 예산은 부족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마서즈 비니어드 섬의 농인과 청인의 비율이 1: 155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도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장애인의 권리 확대’라는 차원의 접근법이 갖는 한계를 절감할 수 있다. 이 사회의 분배구조가 바뀌지 않고서는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은 언제까지나 우선순위의 하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장애인의 삶에 대한 개선 및 변혁은 사회 전체의 진보와 연계되어 고려해야 한다는 것,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를 통한 ‘사회구조적 변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이 “단지 장애학 일반의 문이 아니라……무엇보다 소수성 정치학의 최전선으로 이어진 문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추천사는 적절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야기하는 연대가 ‘소수자 집단의 네트워크’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주장이 제도화되었을 때의 성과와 그렇지 못했을 때의 한계에 대해 누구보다 민감할 수밖에 없을 장애인운동 활동가로서 저자는 ‘제도 정치’의 영역을 간과하지 않는다. 사실 제도 정치에의 개입은 양날의 칼이다. 일정한 성과를 거두어 실질적 개선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반면, 기존의 담론 체계 내에 포섭될 위험성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의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은 칠레의 사회학자 아르네케르(Marta Harnecker)의 시각이다. 좌파 정권의 집권이 이어졌던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그녀가 제시하는 것은 ‘당 좌파와 사회운동 좌파 간의 연합’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이 그들의 자율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며, 당도 사회운동 조직을 흡수하거나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운동 좌파와 함께 전국적인 변혁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실천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7장 ‘장애 정치’, 203~208쪽 참조).
따라서 이 책이 도입하는 장애학은 국내에 최초로 정식 소개된다는 점에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의의를 갖지만, 현장활동가의 실천적 고민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장애 해방의 이상을 그리고 있되 그것을 장애라는 단일 이슈에 한정시키지 않고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의 다음 추천사가 의미하는 바도 바로 이러한 지점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 정치와 진보적 삶을 고민하는 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여성학을 읽고 젠더가 배제된 정치는 진보일 수 없음을 깨우쳤듯이, 이제 우리는 장애학을 함께 읽고 장애가 배제된 정치 또한 진보일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목차
책을 내며
제1부 장애학과 사회적 장애이론
1장 _장애학이란 무엇인가?
1. 장애학의 기본적 성격과 특징 | 2. 장애학 등장의 배경과 발전 | 3. 다양한 장애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 틀
2장 _ 사회적 장애이론의 성립과 장애 정의
1. 사회적 장애이론의 성립 | 2. 장애의 정의
3장 _ 사회적 장애이론의 기본적 이해
1. 장애의 사회문화적 구성 | 2. 자본주의의 등장과 장애 | 3.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장애
4장 _ 장애이론 내의 비판과 논쟁들
1. 손상과 장애의 관계 | 2. 장애인 내부의 공통성과 차이 | 3. 장애 및 장애차별주의의 형성과 문화
제2부 진보적 장애인운동과 장애학의 쟁점들
5장 _ 장애와 지구화
1. 지구화를 바라보는 관점 | 2. 복지국가 위기론과 사회투자국가 | 3.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장애 정책
6장 _ 장애와 노동
1. 시민권, 노동, 사회적 배제 | 2. 기능주의의 설명과 맑스주의적 관심 | 3. 애벌리의 주장이 제기하는 현실적·이론적 쟁점들 | 4. 노동 중심 사회의 극복인가, 새로운 노동 사회의 구축인가
7장 _ 장애 정치
1. 신사회운동으로서의 장애 정치 | 2. 제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장애 정치 | 3. ‘당 좌파와 사회운동 좌파 간의 연합’이라는 문제 설정 | 4. 정치의 이중성 테제 | 5. 확장된 정치의 이중성 테제와 장애 정치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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