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핵무기와 국제 정치
Nuclear weapons and international politics
- 개인저자
- 안준호 지음
- 발행사항
- 파주 :,열린책들,,2011
- 형태사항
- 325 p. : 삽화, 도표, 초상 ; 23 cm
- ISBN
- 9788932910949
- 청구기호
- 349.9 안77ㅎ
- 일반주기
-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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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4839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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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자료실
책 소개
국제 원자력 기구에서 30년간 활동한 한국인 핵 사찰관이 분석한 핵무기의 현대사
1980년부터 2010년까지 30년간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서 선임 핵 사찰관, 기술 자문 위원 등으로 활동한 안준호 박사가 핵무기를 둘러싼 국제 정치의 현실을 냉정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원자의 발견에서부터 핵무기가 개발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과 그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정치 무대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한 핵무기를 둘러싼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세계 각국의 현대사는 내부적으로는 경제 발전, 민주화, 과학기술 혁명 등이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 대결, 자원 확보 경쟁, 국제 간 무역 등이 굵직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난 세계사의 이런 흐름 뒤에는 국제 관계의 역학 관계를 한번에 뒤집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현재와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무기, 곧 <핵>이 있었다. 1938년 핵분열이 이론적으로 규명된 이후의 세계사는 가히 핵무기의 역사라 할 만하고, 현재도 국제 정치에서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국제 경제와 더불어 바로 이 핵무기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의 흐름을 핵무기를 통해 재조명하고자 한 이 책에는 핵이 현대사를 지배하게 되기까지의 역사적, 정치적 과정은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한 핵의 기술적 특징이 심도 있게 서술되어 있다.
세기의 과학자들이 창조해 낸 괴물, 원자 핵폭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추앙받는 아인슈타인. 그러나 말년에 그는 원자 핵폭탄을 탄생시킨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죄책감에 시달여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8년, 스웨덴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가 우라늄 핵분열을 이론적으로 규명해 냈고, 헝가리 출신 유대인 물리학자 실라르드는 중성자가 우라늄 원자핵을 타격할 때 여분의 중성자가 나올 수 있으며, 두 개의 중성자는 다시 다른 원자핵을 타격하고 이렇게 해서 핵분열 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면 허버트 웰스의 소설 『우주 전쟁』에 나오는 <원자 폭탄>이 공상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56쪽) 그 공상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독일이 원자 폭탄을 먼저 만들게 될 것을 우려한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을 종용하는 서신을 보냈고, 결국 미국은 원자 핵무기 개발 임무를 부여한를 가동한다. 이 프로젝트는 수개월 후 군부의 손으로 넘어가 맨해튼 프로젝트로 탈바꿈했고, 1945년 7월 16일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 성공하기에 이른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위력을 목격한 인류는 세계 대전을 종식시킨 미국의 신무기에 찬사를 던지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 업적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냉정을 찾기 시작했다. 핵폭탄이 계속 사용될 경우, 인류의 종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트라우마로 시작된 강대국의 핵무기 개발 경쟁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소련과 영국, 프랑스, 중국도 서둘러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40명의 과학자들을 독일의 동부 전선에 투입해, 그동안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원자 핵무기에 대한 막대한 자료와 함께 관련 과학자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겼다.(120쪽) 20세기 초에 영국은 원자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최강이었다. 원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J. J. 톰슨과 러더퍼드가 영국에 포진해 있었다. 이들이 배출한 제자들이 영국의 핵무기 개발 비밀 프로젝트인 <튜브 알로이스>의 조직을 가능케 했다.(131쪽) 원자 물리학의 선구자였던 베크렐과 퀴리 부인을 배출한 프랑스는 퀴리 가족과 수많은 물리학자들을 동원해 핵폭탄 연구를 위한 파리 그룹을 결성했다.(138쪽) 중국 대륙을 평정한 마오쩌둥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는 세계 강국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가장 먼저 우라늄광을 찾아내도록 지시했다. 넓은 중국 대륙에는 우라늄 광산이 풍부했고, 마오쩌둥은 우라늄을 소련에 제공하는 대가로 중국 학생들을 소련에 보내 기초 과학 훈련을 받게 했다.(142쪽)
전쟁 없이 미소의 냉전 상태를 유지시킨 보이지 않는 힘, 핵무기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이것은 로마 시대 때부터 내려온 라틴어 격언이다. 로마와 같은 강대국이 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은 군사력을 길러야 했고, 핵무기는 당시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새로운 무기였다.(103쪽) 양국은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지난 45년간 냉전이라는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수만 기에 달하는 핵무기를 개발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들의 주장은 핵무기를 선제공격에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핵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원자 핵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의 말로 함축될 수 있다. <서로를 죽일 능력이 있지만 상대를 죽이면 자신의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한 병 속에 들어 있는 두 마리의 전갈과 같다.>(103쪽)
실제 대량 핵무기를 미국과 소련이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국지적인 전쟁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을지라도 지난 수십년 동안 대규모의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핵무기가 한번 사용되면 엄청난 파괴력을 보인다는 확실한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전쟁에 대한 억제력은 상당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103쪽)
1950년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북한과 중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가 철회한 사례가 있었고, 냉전 시대에 쿠바 위기와 여러 차례 대만 위기에서도 그러했다. 상대방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욕구가 마지막 단계에서 상실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과 소련은 결코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었고, 적국의 핵무기 수를 뛰어넘는 대량의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가 되었다. 그 결과 1966년 미국의 핵무기 보유수는 31,700기(114쪽), 1986년 소련의 핵무기 보유수는 40,700기(128쪽)에 달했다. <지구 마지막 날의 시계>는 종말 2분 전까지 가리키고 있었다.(287쪽)
강대국이 되기 위한 제3세계 국가의 가장 빠른 대안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은 과학자 출신인 바이츠만. 1948년 이스라엘이 아랍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뒤 바이츠만은 아랍국에 둘려 싸여 있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고려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5년 결정적인 계기가 발생했다. 수에즈 운하 분쟁에서 시작된 이집트와의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이 4백만 명의 인구로 주변의 아랍권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핵무기였다.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영토 분쟁으로 1947년, 1965년, 1971년 세 차례 전쟁을 치렀다. 중국과도 1962년 영토 분쟁으로 소규모 전쟁을 겪어야 했다. 미소의 개입으로 전쟁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카시미르 지역에 인접한 아크사이친 지역을 지금도 중국이 강점하고 있는 데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다. 인도는 중국과 거의 맞먹는 크기의 영토와 인구를 가졌음에도 중국처럼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 이는 인도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인도 정부는 영국에서 독립하자마자 1년 뒤에 원자력법을 만들었으며, 법의 시행에 맞춰 네루 수상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우리는 전쟁과는 거리가 먼 원자력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 진정으로 나는 평화적 목적에 이용할 원자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다른 목적에 쓰이도록 인도가 강요를 받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없을 것이다.>(204쪽) 인도는 지금도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 가입을 거부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인도와 적대 관계에 있던 파키스탄의 부토 수상은 1968년 인도가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인도가 핵무기를 가질 경우, 우리는 나무와 풀로 연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자신의 것을 하나 만들거나 아니면 사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현재 파키스탄은 50~100기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이라고 보고되고 있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성공은 중국의 도움이 많이 작용했다. 중국은 핵무기를 보유한 인도와 경쟁 관계에 있는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힘의 균형에서 나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218쪽)
“만약 미국의 핵 우산 보호가 철수되면 한국은 생존을 위해서 핵무기 개발을 포함한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단행하겠다”
베트남전에서 큰 상처를 입은 미국은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들의 손에 맡긴다는 1969년 닉슨 대통령의 독트린에 따라 1970년부터 1971년 6월까지 1만 8천 명의 주한 미군의 감축을 단행했다. 이에 대응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무력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자립 경제와 함께 자주 국방을 주창하면서 핵무기 보유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약속한 한국에 대한 안보 정책에 강한 불신을 나타냈고, <비 오는 날을 위해 반드시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핵개발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미사일 개발 등에서 미국의 협력을 얻지 못할 경우 제3국의 도움이라도 얻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229쪽)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도 강했지만, 미국의 입장 또한 강경했다. 미국은 한국의 핵 개발이 인접 국가, 특히 북한과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또한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대해 유사시 핵무기 지원을 보장해 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한국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한미 안보 관계에 불가피하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등을 강조했다. 20년이 지난 후 공개된 미국의 비밀 외교 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 국무성은 <한국이 10년 이내에 핵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고 기본적으로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한국의 핵무장을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노력했다. 1974년 말부터 1976년 초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과 미국의 국무성, 백악관 사이에 비밀리에 오고 간 총 15건의 비밀 외교 문서는 한국의 핵 개발과 미국의 압력을 보여 주는 극적인 장면들을 담고 있다.(232쪽)
미국의 압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한국 정부는 1976년 1월 프랑스의 SGN사와 맺었던 재처리 시험 공장 건설 계약을 취소하고, 그 대신 핵무기 개발과는 전혀 무관한 핵 물질 변환 시험 공장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재처리 시설에서 나오는 플루토늄을 이용하려던 벨기에 BN사와의 혼합 핵연료 가공 시험 시설도 1977년 11월 취소하고 말았다.
“국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6~8개 정도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부설 국제 안보 협력 센터 소장 지그프리드 헥커 박사는 북한에 원심 분리기 1천 대 이상이 현대식 건물 안에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고, 북한 당국자는 그 시설 안에 원심 분리기 2천 대가 설치되어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헥커 박사의 제4차 방북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2010년 11월 12일 영변 핵 개발 센터를 방문해 2009년 4월부터 건설하기 시작해 2012년 완공 목표인 100MWt급 실험용 경수로형 원자로와 기존의 핵연료 가공 시설 내에 새로 설치한 우라늄 농축 시설을 시찰했다고 한다. 헥커 박사는 현재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플루토늄의 재고량은 24~42킬로그램 정도라고 판단했다. 이 정도의 재고량은 플루토늄 원자 핵폭탄을 4~8기 정도 만들 수 있는 양이다.(254쪽) 저자는 실제로 북한이 핵무기를 6~8개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93~1994년도의 한반도 첫 번째 핵 위기 때에 북한은 이라크와 같은 벼랑 끝 전술을 펼쳐 국제 관계의 개선과 경제 지원이라는 대가를 얻어 냈다. 하지만 두 번째 핵 위기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는 그들의 전술에 넘어가지 않으려 했다. 미국은 6자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 폐기가 완전하고complete, 검증 가능하고verifiable,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여섯 번에 걸친 6자 회담의 결과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도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한 북한은 국제 사회에서 <핵 클럽>의 대우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조차 이 <핵 클럽>에 끼워 주지 않는 다섯 개 핵 보유국이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해 줄 리는 만무하다. <전략적 파괴력과 전쟁 억제력>을 갖춘 국가의 위상에 올라 주변 국가에 엄청난 위협을 주기 때문에 북한이 노리는 국제적인 대우는 대단히 큰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북한에 자극을 받은 한국과 일본, 대만 등이 핵 무장을 시도할 경우, 동북아가 <핵무기 경쟁>이라는 파괴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의 핵 무장을 막으려 하고 있다.(256쪽)
핵무기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1991년 미국과 러시아 간의 전략 핵무기 감축 조약(START)이 체결된 이래 지구상에 있는 핵무기 수는 절반 이상으로 줄었지만, 아직도 수많은 핵무기가 존재하고 있다. 한때 지구상에는 6만 기 이상의 핵무기가 존재했었고(130쪽), 현재 IAEA에서 관리하고 있는 핵 물질로 핵폭탄을 만들 경우 약 16만 기 이상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193쪽) 또한 핵무기에 관한 여러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2009년 현재 러시아는 실전에 배치된 핵무기 수가 약 4,600기, 폐기하기 위해 대기 중이거나 유보하고 있는 핵무기의 수가 4,000기 정도이며, 미국은 실전에 배치된 핵무기의 수가 약 5,200기, 폐기하기 위해 대기 중이거나 유보하고 있는 핵무기 수가 4,200기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180쪽)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4월 프라하에서 행한 대중 연설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에 대한 그의 비전을 내비쳤다. 그의 비전은 2009년 말로 끝난 START를 대신해 러시아와 합의한 New-START에서 양국의 실전 배치 핵무기 수를 1,550기로 제한하자고 합의함으로써 한발 더 나아갔음을 보여 주었다. 물론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울러 오바마는 핵 테러 방지를 국제 안보에 대한 가장 시급한 사항으로 보고 <핵 안보 정상 회의> 개최를 구상했다. 그 결과 2010년 4월 워싱턴에서 47개국 정상들, 유엔과 IAEA 등 국제기구 수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핵 안보와 관련된 국제 협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핵 안보 정상 회의가 열렸다. 미국의 주도로 처음 열린 핵 안보 정상 회의는 2012년 한국에서 다시 개최된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북핵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남북한임을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286쪽)
1980년부터 2010년까지 30년간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서 선임 핵 사찰관, 기술 자문 위원 등으로 활동한 안준호 박사가 핵무기를 둘러싼 국제 정치의 현실을 냉정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원자의 발견에서부터 핵무기가 개발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과 그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정치 무대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한 핵무기를 둘러싼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세계 각국의 현대사는 내부적으로는 경제 발전, 민주화, 과학기술 혁명 등이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 대결, 자원 확보 경쟁, 국제 간 무역 등이 굵직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난 세계사의 이런 흐름 뒤에는 국제 관계의 역학 관계를 한번에 뒤집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현재와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무기, 곧 <핵>이 있었다. 1938년 핵분열이 이론적으로 규명된 이후의 세계사는 가히 핵무기의 역사라 할 만하고, 현재도 국제 정치에서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가 국제 경제와 더불어 바로 이 핵무기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의 흐름을 핵무기를 통해 재조명하고자 한 이 책에는 핵이 현대사를 지배하게 되기까지의 역사적, 정치적 과정은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한 핵의 기술적 특징이 심도 있게 서술되어 있다.
세기의 과학자들이 창조해 낸 괴물, 원자 핵폭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추앙받는 아인슈타인. 그러나 말년에 그는 원자 핵폭탄을 탄생시킨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죄책감에 시달여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8년, 스웨덴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가 우라늄 핵분열을 이론적으로 규명해 냈고, 헝가리 출신 유대인 물리학자 실라르드는 중성자가 우라늄 원자핵을 타격할 때 여분의 중성자가 나올 수 있으며, 두 개의 중성자는 다시 다른 원자핵을 타격하고 이렇게 해서 핵분열 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면 허버트 웰스의 소설 『우주 전쟁』에 나오는 <원자 폭탄>이 공상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56쪽) 그 공상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독일이 원자 폭탄을 먼저 만들게 될 것을 우려한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을 종용하는 서신을 보냈고, 결국 미국은 원자 핵무기 개발 임무를 부여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위력을 목격한 인류는 세계 대전을 종식시킨 미국의 신무기에 찬사를 던지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 업적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냉정을 찾기 시작했다. 핵폭탄이 계속 사용될 경우, 인류의 종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트라우마로 시작된 강대국의 핵무기 개발 경쟁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소련과 영국, 프랑스, 중국도 서둘러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40명의 과학자들을 독일의 동부 전선에 투입해, 그동안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원자 핵무기에 대한 막대한 자료와 함께 관련 과학자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겼다.(120쪽) 20세기 초에 영국은 원자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 최강이었다. 원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J. J. 톰슨과 러더퍼드가 영국에 포진해 있었다. 이들이 배출한 제자들이 영국의 핵무기 개발 비밀 프로젝트인 <튜브 알로이스>의 조직을 가능케 했다.(131쪽) 원자 물리학의 선구자였던 베크렐과 퀴리 부인을 배출한 프랑스는 퀴리 가족과 수많은 물리학자들을 동원해 핵폭탄 연구를 위한 파리 그룹을 결성했다.(138쪽) 중국 대륙을 평정한 마오쩌둥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는 세계 강국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가장 먼저 우라늄광을 찾아내도록 지시했다. 넓은 중국 대륙에는 우라늄 광산이 풍부했고, 마오쩌둥은 우라늄을 소련에 제공하는 대가로 중국 학생들을 소련에 보내 기초 과학 훈련을 받게 했다.(142쪽)
전쟁 없이 미소의 냉전 상태를 유지시킨 보이지 않는 힘, 핵무기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이것은 로마 시대 때부터 내려온 라틴어 격언이다. 로마와 같은 강대국이 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은 군사력을 길러야 했고, 핵무기는 당시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새로운 무기였다.(103쪽) 양국은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지난 45년간 냉전이라는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수만 기에 달하는 핵무기를 개발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들의 주장은 핵무기를 선제공격에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핵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원자 핵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의 말로 함축될 수 있다. <서로를 죽일 능력이 있지만 상대를 죽이면 자신의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한 병 속에 들어 있는 두 마리의 전갈과 같다.>(103쪽)
실제 대량 핵무기를 미국과 소련이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국지적인 전쟁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을지라도 지난 수십년 동안 대규모의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핵무기가 한번 사용되면 엄청난 파괴력을 보인다는 확실한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전쟁에 대한 억제력은 상당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103쪽)
1950년 한국 전쟁에서 미국이 북한과 중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가 철회한 사례가 있었고, 냉전 시대에 쿠바 위기와 여러 차례 대만 위기에서도 그러했다. 상대방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욕구가 마지막 단계에서 상실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미국과 소련은 결코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었고, 적국의 핵무기 수를 뛰어넘는 대량의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가 되었다. 그 결과 1966년 미국의 핵무기 보유수는 31,700기(114쪽), 1986년 소련의 핵무기 보유수는 40,700기(128쪽)에 달했다. <지구 마지막 날의 시계>는 종말 2분 전까지 가리키고 있었다.(287쪽)
강대국이 되기 위한 제3세계 국가의 가장 빠른 대안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은 과학자 출신인 바이츠만. 1948년 이스라엘이 아랍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뒤 바이츠만은 아랍국에 둘려 싸여 있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고려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5년 결정적인 계기가 발생했다. 수에즈 운하 분쟁에서 시작된 이집트와의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이 4백만 명의 인구로 주변의 아랍권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핵무기였다.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영토 분쟁으로 1947년, 1965년, 1971년 세 차례 전쟁을 치렀다. 중국과도 1962년 영토 분쟁으로 소규모 전쟁을 겪어야 했다. 미소의 개입으로 전쟁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카시미르 지역에 인접한 아크사이친 지역을 지금도 중국이 강점하고 있는 데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다. 인도는 중국과 거의 맞먹는 크기의 영토와 인구를 가졌음에도 중국처럼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 이는 인도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인도 정부는 영국에서 독립하자마자 1년 뒤에 원자력법을 만들었으며, 법의 시행에 맞춰 네루 수상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우리는 전쟁과는 거리가 먼 원자력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 진정으로 나는 평화적 목적에 이용할 원자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다른 목적에 쓰이도록 인도가 강요를 받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없을 것이다.>(204쪽) 인도는 지금도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 가입을 거부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인도와 적대 관계에 있던 파키스탄의 부토 수상은 1968년 인도가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인도가 핵무기를 가질 경우, 우리는 나무와 풀로 연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자신의 것을 하나 만들거나 아니면 사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현재 파키스탄은 50~100기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이라고 보고되고 있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성공은 중국의 도움이 많이 작용했다. 중국은 핵무기를 보유한 인도와 경쟁 관계에 있는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힘의 균형에서 나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218쪽)
“만약 미국의 핵 우산 보호가 철수되면 한국은 생존을 위해서 핵무기 개발을 포함한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단행하겠다”
베트남전에서 큰 상처를 입은 미국은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들의 손에 맡긴다는 1969년 닉슨 대통령의 독트린에 따라 1970년부터 1971년 6월까지 1만 8천 명의 주한 미군의 감축을 단행했다. 이에 대응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무력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자립 경제와 함께 자주 국방을 주창하면서 핵무기 보유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약속한 한국에 대한 안보 정책에 강한 불신을 나타냈고, <비 오는 날을 위해 반드시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핵개발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미사일 개발 등에서 미국의 협력을 얻지 못할 경우 제3국의 도움이라도 얻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229쪽)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도 강했지만, 미국의 입장 또한 강경했다. 미국은 한국의 핵 개발이 인접 국가, 특히 북한과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또한 소련과 중국이 북한에 대해 유사시 핵무기 지원을 보장해 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한국이 핵무기를 갖게 되면 한미 안보 관계에 불가피하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등을 강조했다. 20년이 지난 후 공개된 미국의 비밀 외교 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 국무성은 <한국이 10년 이내에 핵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고 기본적으로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한국의 핵무장을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노력했다. 1974년 말부터 1976년 초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과 미국의 국무성, 백악관 사이에 비밀리에 오고 간 총 15건의 비밀 외교 문서는 한국의 핵 개발과 미국의 압력을 보여 주는 극적인 장면들을 담고 있다.(232쪽)
미국의 압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한국 정부는 1976년 1월 프랑스의 SGN사와 맺었던 재처리 시험 공장 건설 계약을 취소하고, 그 대신 핵무기 개발과는 전혀 무관한 핵 물질 변환 시험 공장으로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재처리 시설에서 나오는 플루토늄을 이용하려던 벨기에 BN사와의 혼합 핵연료 가공 시험 시설도 1977년 11월 취소하고 말았다.
“국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6~8개 정도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부설 국제 안보 협력 센터 소장 지그프리드 헥커 박사는 북한에 원심 분리기 1천 대 이상이 현대식 건물 안에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고, 북한 당국자는 그 시설 안에 원심 분리기 2천 대가 설치되어 가동 중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헥커 박사의 제4차 방북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2010년 11월 12일 영변 핵 개발 센터를 방문해 2009년 4월부터 건설하기 시작해 2012년 완공 목표인 100MWt급 실험용 경수로형 원자로와 기존의 핵연료 가공 시설 내에 새로 설치한 우라늄 농축 시설을 시찰했다고 한다. 헥커 박사는 현재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플루토늄의 재고량은 24~42킬로그램 정도라고 판단했다. 이 정도의 재고량은 플루토늄 원자 핵폭탄을 4~8기 정도 만들 수 있는 양이다.(254쪽) 저자는 실제로 북한이 핵무기를 6~8개 정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히기도 했다.
1993~1994년도의 한반도 첫 번째 핵 위기 때에 북한은 이라크와 같은 벼랑 끝 전술을 펼쳐 국제 관계의 개선과 경제 지원이라는 대가를 얻어 냈다. 하지만 두 번째 핵 위기에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는 그들의 전술에 넘어가지 않으려 했다. 미국은 6자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 폐기가 완전하고complete, 검증 가능하고verifiable,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여섯 번에 걸친 6자 회담의 결과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도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한 북한은 국제 사회에서 <핵 클럽>의 대우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조차 이 <핵 클럽>에 끼워 주지 않는 다섯 개 핵 보유국이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해 줄 리는 만무하다. <전략적 파괴력과 전쟁 억제력>을 갖춘 국가의 위상에 올라 주변 국가에 엄청난 위협을 주기 때문에 북한이 노리는 국제적인 대우는 대단히 큰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북한에 자극을 받은 한국과 일본, 대만 등이 핵 무장을 시도할 경우, 동북아가 <핵무기 경쟁>이라는 파괴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북한의 핵 무장을 막으려 하고 있다.(256쪽)
핵무기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1991년 미국과 러시아 간의 전략 핵무기 감축 조약(START)이 체결된 이래 지구상에 있는 핵무기 수는 절반 이상으로 줄었지만, 아직도 수많은 핵무기가 존재하고 있다. 한때 지구상에는 6만 기 이상의 핵무기가 존재했었고(130쪽), 현재 IAEA에서 관리하고 있는 핵 물질로 핵폭탄을 만들 경우 약 16만 기 이상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193쪽) 또한 핵무기에 관한 여러 보고서를 종합해 보면, 2009년 현재 러시아는 실전에 배치된 핵무기 수가 약 4,600기, 폐기하기 위해 대기 중이거나 유보하고 있는 핵무기의 수가 4,000기 정도이며, 미국은 실전에 배치된 핵무기의 수가 약 5,200기, 폐기하기 위해 대기 중이거나 유보하고 있는 핵무기 수가 4,200기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180쪽)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4월 프라하에서 행한 대중 연설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에 대한 그의 비전을 내비쳤다. 그의 비전은 2009년 말로 끝난 START를 대신해 러시아와 합의한 New-START에서 양국의 실전 배치 핵무기 수를 1,550기로 제한하자고 합의함으로써 한발 더 나아갔음을 보여 주었다. 물론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아울러 오바마는 핵 테러 방지를 국제 안보에 대한 가장 시급한 사항으로 보고 <핵 안보 정상 회의> 개최를 구상했다. 그 결과 2010년 4월 워싱턴에서 47개국 정상들, 유엔과 IAEA 등 국제기구 수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핵 안보와 관련된 국제 협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핵 안보 정상 회의가 열렸다. 미국의 주도로 처음 열린 핵 안보 정상 회의는 2012년 한국에서 다시 개최된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북핵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남북한임을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286쪽)
목차
추천사
프롤로그
1부 핵무기가 만들어지기까지
1 원자의 모습
2 방사능 물질
3 E = MC2
4 핵분열
5 맨해튼 프로젝트
6 핵폭발의 참상과 핵겨울
2부 핵무기 경쟁과 감축, 그리고 국제 정치
7 미소 간의 핵무기 경쟁
8 뒤늦게 출발한 영국, 프랑스, 중국
9 IAEA와 NPT
10 강대국이 되기 위해
11 도전받고 있는 NPT
12 핵무기 없는 세상
부록
부록 I. 핵연료 주기와 핵무기 제조 경로
부록 II.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 전문
부록 III. 러셀-아인슈타인 선언 전문
에필로그: 감사의 글과 참고 자료
용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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