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 개인저자
-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 변광배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 프로네시스, 2008
- 형태사항
- 459 p.; 24 cm
- ISBN
- 9788901082929
- 청구기호
- 340.2 레49ㄱ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
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0751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0751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20세기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통렬히 고발했던
우리 시대 ‘우울한 좌파’ 베르나르 앙리 레비,
21세기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를 절절히 애도하다!
1977년, 데뷔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 교조적인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신철학’의 기수로 나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꼭 30년이 지난 2007년,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를 내놓았다.(프로네시스 동시 복간 및 출간) 그 냉소와 독설은 여전하나, 비관주의로 일관하던 화법에는 다소 힘이 들어갔다.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CE GRAND CADAVRE A LA RENVERSE”(원제인 이 말은 1960년 사르트르가 폴 니장의 소설 『아덴 아라비』의 서문에서 알제리 전쟁이 끝난 후 암울했던 시기 좌파를 표현한 것)로 은유한 좌파를 자처하며, “일어나 다시 걸을 것”을 주문하는 그의 목소리는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 사르코지와의 통화에서 출발한 레비의 이 긴급한 호소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흔히 2007년 5월의 프랑스 대선과 2007년 12월 대한민국 대선의 양상이 비슷했다고들 한다.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와 ‘한국의 사르코지’라 불렸던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함께 언론의 주목을 받아왔다. 둘 모두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했다거나, 각각 서울시장 시절과 내무부장관 시절의 강력한 추진력을 대선 발판으로 삼았다는 것 외에도 어눌한 말투나 잦은 말실수 등의 닮은 이미지들이 기사화되곤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공통점은 ‘실용주의’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마치 ‘좌파에 대한 심판’(프랑스 68세대와 대한민국 386세대에 대한)처럼 압도적 지지율로 승리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분배’나 ‘복지’라는 가치보다 ‘성장’과 ‘경쟁’이 우선시되는 사회를 국민이 선택했다는 자신감 속에서 공공부문 사유화, 노동시장 구조조정, 사회보험 개혁 등 신자유주의적 시장 재편을 밀어붙여 곳곳에서 사회적 저항에 부딪치고 있는 상황도 유사하다. 그리고 불안과 분노 속에 시민들은 거리로 내몰리는데 전통적으로 저항의 구심이었던 진보진영(소위 좌파)은 사분오열 무기력한 현실까지도. 도발적이고도 전방위적인 그간의 행적답게 레비가 던지는 즉각적이고도 신랄한 질문들을 이 땅으로 가져와본다.
이념이 사라진 시대, 좌파의 유산을 돌아보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기도 전부터 그에 드리운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성토하며 자유주의를 재조명했던 레비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철학자로서의 면면보다는 친미 지식인 또는 미디어 노출을 즐기는 ‘지식-언론인’(부르디외)으로만 부각된 감이 있다. 하지만 보스니아.수단.앙골라.부룬디.스리랑카.콜롬비아 등 전 세계 지역분쟁에 뛰어들어 현장을 보도하고 서구 사회에 적극적 관심을 호소해온 그는, ‘앙가주망(engagement)’ 전통의 계승자인 현실참여 지식인의 면모를 지니기도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서구 제국주의와 제3세계 군부독재, 부시와 사담 후세인 등을 싸잡아 거침없이 공격하여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가 언급하지 않은 이슈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질’ 정도로 성역 없는 비판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렇다면 스스로도 ‘가족’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마피아 같은 냄새를 혐오한다고 잘라 말하는 자유주의자 레비가, “좌파는 나의 가족”이라고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해체주의와 상대주의 물결에 이어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새삼스런 이념고백이라니 말이다.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 지지를 호소한 사르코지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왜 좌파 후보(세골렌 루아얄)에게 투표를 했는지에 대한 레비의 변이자, 사르코지 내각으로 투항한 구좌파를 비롯해 선거에서 패배한 중도좌파 그리고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한 극좌파에게 던지는 청원서이다. 좌파의 몰락을 직시하고 좌파의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왜 진정한 좌파 정신의 회복을 제안하는가
레비는 우선 프랑스의 뿌리 깊은 좌파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그 유산을 되돌아볼 것을 제안한다.(제1부) 드레퓌스사건, 비시정부, 알제리전쟁, 68혁명…… 좌파에 속한다는 것은 이 네 가지 유산 위에서, 사회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드레퓌스사건의 인권수호 정신, 비시정부의 반파시즘 교훈, 알제리전쟁에서의 반식민주의 운동, 68혁명의 반권위주의 저항 등 “기억과 사유 및 역사 속에서 각인된 지식의 덩어리로서의 반사작용”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서로 교차시키고 조화시켜 함께 작동시켜야 한다”는 것이 레비의 당부이다. 즉 반제국주의를 말하지만 제3세계 인권문제는 등한시하는 공동체주의적 태도나 반파시즘 정신이 결여된 68정신으로 다양성과 개별성만을 강조하는 관점주의적 태도 등, 균형 잃은 반쪽 ‘반사작용’을 경계할 때라야 제대로 좌파의 각을 세우고 날을 벼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사르코지, 그는 정체성이 와해된 자이다”라고 단언하며 좌파를 자임하는 것은 이렇듯 “유대인과 알제리인에 대해 아무런 부채의식이 없”으며 “68년 5월혁명의 모든 가치를 일거에 청산하자”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하는 대통령 앞에서, “아직도 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뜻 받아들일 결심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현기증을 일으키는 좌파”에게 프랑스 정치를 구획해온 좌파와 우파의 정체성을 흔들고 약화시키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적인 그러나 전 지구적인 질문들
“좌파의 학문보다는 좌파의 도덕을 믿는다”는 레비 자신의 말처럼, 사유를 넘어서는 태도 혹은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이 책은 이렇듯 다소 프랑스적인 구체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좌파가 넘어야 할 과제로 제시하는 그의 화두들은 오늘날 세계적 지성들이 던지는 문제의식과도 첨예하게 맞닿아 있다.(제3부) 현재 전 지구적인 세계화 공세에 대응하는 ‘반자유주의’ 움직임, 이와 연동한 경제지역주의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자민족중심주의’, 진보주의 진영의 악의 축일지도 모를 ‘반미주의’와 ‘반제국주의’,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화하며 배회하는 유령 ‘반유대주의’ 그리고 새로이 떠도는 유령 ‘파쇼이슬람주의’, 마지막으로 철학사에서 지속적으로 공격받아온 ‘보편성’의 위기까지, 모두가 인종갈등과 종교전쟁 그리고 생존권 위협이 전면화한 오늘날 외면할 수 없는 명제들이다.
반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질문은, ‘자유주의’의 실체가 ‘시장’보다는 ‘계약’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를 되짚는 데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노정했던 카를 슈미트의 정치사상과 이를 원용하고 있는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의 행보를 겨냥하는 데 이른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비틀어 물으며 전체주의를 지나치게 경계하는 강박이 자유민주주의의 문제점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근본적 사유를 매도하고 억압해왔다고 지적한 지젝의 논의일 터다.
미국 혹은 제국에 세계의 모든 악을 종속시키는 반미.반제국주의의 나이브한 태도를 비판하면서는 네그리와 하트가 재규정한 중심 없는 ‘제국’을 상기시키는 한편, 반대급부로서 “비극은 그 지역 주체들의 몫으로 남겨져야 한다”는 불간섭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히 비판한다. 또한 반미.반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이슬람근본주의자들과 한 배를 탄 좌파의 위험한 동거를 그 뿌리부터 더듬어 지적하며, 종교적 선과 정치적 선을 명확히 구분하고 ‘파쇼이슬람주의’를 꿰뚫어보아야 종교는 관용하되 파시즘은 경계하는 올바른 좌파로 거듭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특수주의.차별주의.상대주의 등이 품고 있는 해독성을 세계주의.인권.자유 등 보편성에의 접근으로 해소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할 때 이슬람 여성의 비참한 현실이, 무차별적인 테러가, 비인간적 사형제도가 사라질 수 있을 거라는 그의 희망은, 다시 알랭 바디우의 ‘보편적 개별성’ 개념과 만나기도 한다.
이러한 전 지구적 질문들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도 반복된다. 경제지상주의에 함몰되어 국가가 사라지고 점점 기업화.사유화되어가는 사회는 ‘반자유주의’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눈앞에 들이민다. 기층 노동을 외국인 노동자에게 떠넘기며 희망 없는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현실이나 심각한 실업 문제는 ‘자민족중심주의’나 ‘인종주의’ 갈등이 곧 우리에게도 닥칠 문제임을 예고한다. 반미나 반일 등의 사라지지 않는 해묵은 민족주의 문제 혹은 이라크 파병과 같은 반전평화 등의 이슈 또한 ‘반미주의’나 ‘파쇼이슬람주의’에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21세기의 완전히 새로운 시대적 현실 앞에서 레비가 직설적인 화법으로 던지는 동시대의 질문들은 우리에게도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감상적 좌파에 맞서는 우울한 좌파
“자유와 인권”을 최상위 가치로 여기며 “혁명은 과연 바람직한가”를 되묻고(제2부), “나는 책임 있는 사회주의자가 좋은 자유주의와 나쁜 자유주의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창조적인 정치적 텍스트를 양산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하는 레비는, 말하자면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깝다.
물론 대표적 극우주의자 장마리 르펜부터 레비가 좌파 속 우파라고 경계하는 장피에르 슈벤망 그리고 최근 급부상한 올리비에 브장세노 같은 급진적 반자본주의자까지, 즉 극우파-중도우파-중도파-중도좌파-극좌파의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을 제도권 내에 갖춘 프랑스와 대한민국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뮈와 사르트르 그리고 장 물랭 등을 회고하면서, “감상적 좌파에 맞서는 우울한 좌파” 즉 회의적이었지만 투쟁하고 염세적이었지만 엄격하며 실천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좌파(에필로그)를 찾는 레비의 절망과 희망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좌파를 좌파라 제대로 부를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도,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기 위한 본격적이고 현실적인 성찰과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우울한 좌파’ 베르나르 앙리 레비,
21세기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를 절절히 애도하다!
1977년, 데뷔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 교조적인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신철학’의 기수로 나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꼭 30년이 지난 2007년,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를 내놓았다.(프로네시스 동시 복간 및 출간) 그 냉소와 독설은 여전하나, 비관주의로 일관하던 화법에는 다소 힘이 들어갔다.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CE GRAND CADAVRE A LA RENVERSE”(원제인 이 말은 1960년 사르트르가 폴 니장의 소설 『아덴 아라비』의 서문에서 알제리 전쟁이 끝난 후 암울했던 시기 좌파를 표현한 것)로 은유한 좌파를 자처하며, “일어나 다시 걸을 것”을 주문하는 그의 목소리는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 사르코지와의 통화에서 출발한 레비의 이 긴급한 호소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흔히 2007년 5월의 프랑스 대선과 2007년 12월 대한민국 대선의 양상이 비슷했다고들 한다.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와 ‘한국의 사르코지’라 불렸던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함께 언론의 주목을 받아왔다. 둘 모두 가난을 딛고 자수성가했다거나, 각각 서울시장 시절과 내무부장관 시절의 강력한 추진력을 대선 발판으로 삼았다는 것 외에도 어눌한 말투나 잦은 말실수 등의 닮은 이미지들이 기사화되곤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공통점은 ‘실용주의’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마치 ‘좌파에 대한 심판’(프랑스 68세대와 대한민국 386세대에 대한)처럼 압도적 지지율로 승리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분배’나 ‘복지’라는 가치보다 ‘성장’과 ‘경쟁’이 우선시되는 사회를 국민이 선택했다는 자신감 속에서 공공부문 사유화, 노동시장 구조조정, 사회보험 개혁 등 신자유주의적 시장 재편을 밀어붙여 곳곳에서 사회적 저항에 부딪치고 있는 상황도 유사하다. 그리고 불안과 분노 속에 시민들은 거리로 내몰리는데 전통적으로 저항의 구심이었던 진보진영(소위 좌파)은 사분오열 무기력한 현실까지도. 도발적이고도 전방위적인 그간의 행적답게 레비가 던지는 즉각적이고도 신랄한 질문들을 이 땅으로 가져와본다.
이념이 사라진 시대, 좌파의 유산을 돌아보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기도 전부터 그에 드리운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성토하며 자유주의를 재조명했던 레비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철학자로서의 면면보다는 친미 지식인 또는 미디어 노출을 즐기는 ‘지식-언론인’(부르디외)으로만 부각된 감이 있다. 하지만 보스니아.수단.앙골라.부룬디.스리랑카.콜롬비아 등 전 세계 지역분쟁에 뛰어들어 현장을 보도하고 서구 사회에 적극적 관심을 호소해온 그는, ‘앙가주망(engagement)’ 전통의 계승자인 현실참여 지식인의 면모를 지니기도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서구 제국주의와 제3세계 군부독재, 부시와 사담 후세인 등을 싸잡아 거침없이 공격하여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가 언급하지 않은 이슈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질’ 정도로 성역 없는 비판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렇다면 스스로도 ‘가족’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마피아 같은 냄새를 혐오한다고 잘라 말하는 자유주의자 레비가, “좌파는 나의 가족”이라고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해체주의와 상대주의 물결에 이어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새삼스런 이념고백이라니 말이다.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 지지를 호소한 사르코지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왜 좌파 후보(세골렌 루아얄)에게 투표를 했는지에 대한 레비의 변이자, 사르코지 내각으로 투항한 구좌파를 비롯해 선거에서 패배한 중도좌파 그리고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한 극좌파에게 던지는 청원서이다. 좌파의 몰락을 직시하고 좌파의 희망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왜 진정한 좌파 정신의 회복을 제안하는가
레비는 우선 프랑스의 뿌리 깊은 좌파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그 유산을 되돌아볼 것을 제안한다.(제1부) 드레퓌스사건, 비시정부, 알제리전쟁, 68혁명…… 좌파에 속한다는 것은 이 네 가지 유산 위에서, 사회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드레퓌스사건의 인권수호 정신, 비시정부의 반파시즘 교훈, 알제리전쟁에서의 반식민주의 운동, 68혁명의 반권위주의 저항 등 “기억과 사유 및 역사 속에서 각인된 지식의 덩어리로서의 반사작용”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서로 교차시키고 조화시켜 함께 작동시켜야 한다”는 것이 레비의 당부이다. 즉 반제국주의를 말하지만 제3세계 인권문제는 등한시하는 공동체주의적 태도나 반파시즘 정신이 결여된 68정신으로 다양성과 개별성만을 강조하는 관점주의적 태도 등, 균형 잃은 반쪽 ‘반사작용’을 경계할 때라야 제대로 좌파의 각을 세우고 날을 벼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사르코지, 그는 정체성이 와해된 자이다”라고 단언하며 좌파를 자임하는 것은 이렇듯 “유대인과 알제리인에 대해 아무런 부채의식이 없”으며 “68년 5월혁명의 모든 가치를 일거에 청산하자”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하는 대통령 앞에서, “아직도 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뜻 받아들일 결심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현기증을 일으키는 좌파”에게 프랑스 정치를 구획해온 좌파와 우파의 정체성을 흔들고 약화시키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적인 그러나 전 지구적인 질문들
“좌파의 학문보다는 좌파의 도덕을 믿는다”는 레비 자신의 말처럼, 사유를 넘어서는 태도 혹은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이 책은 이렇듯 다소 프랑스적인 구체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좌파가 넘어야 할 과제로 제시하는 그의 화두들은 오늘날 세계적 지성들이 던지는 문제의식과도 첨예하게 맞닿아 있다.(제3부) 현재 전 지구적인 세계화 공세에 대응하는 ‘반자유주의’ 움직임, 이와 연동한 경제지역주의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자민족중심주의’, 진보주의 진영의 악의 축일지도 모를 ‘반미주의’와 ‘반제국주의’,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화하며 배회하는 유령 ‘반유대주의’ 그리고 새로이 떠도는 유령 ‘파쇼이슬람주의’, 마지막으로 철학사에서 지속적으로 공격받아온 ‘보편성’의 위기까지, 모두가 인종갈등과 종교전쟁 그리고 생존권 위협이 전면화한 오늘날 외면할 수 없는 명제들이다.
반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질문은, ‘자유주의’의 실체가 ‘시장’보다는 ‘계약’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를 되짚는 데에서 출발한다. 나아가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노정했던 카를 슈미트의 정치사상과 이를 원용하고 있는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의 행보를 겨냥하는 데 이른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비틀어 물으며 전체주의를 지나치게 경계하는 강박이 자유민주주의의 문제점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근본적 사유를 매도하고 억압해왔다고 지적한 지젝의 논의일 터다.
미국 혹은 제국에 세계의 모든 악을 종속시키는 반미.반제국주의의 나이브한 태도를 비판하면서는 네그리와 하트가 재규정한 중심 없는 ‘제국’을 상기시키는 한편, 반대급부로서 “비극은 그 지역 주체들의 몫으로 남겨져야 한다”는 불간섭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히 비판한다. 또한 반미.반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이슬람근본주의자들과 한 배를 탄 좌파의 위험한 동거를 그 뿌리부터 더듬어 지적하며, 종교적 선과 정치적 선을 명확히 구분하고 ‘파쇼이슬람주의’를 꿰뚫어보아야 종교는 관용하되 파시즘은 경계하는 올바른 좌파로 거듭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특수주의.차별주의.상대주의 등이 품고 있는 해독성을 세계주의.인권.자유 등 보편성에의 접근으로 해소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할 때 이슬람 여성의 비참한 현실이, 무차별적인 테러가, 비인간적 사형제도가 사라질 수 있을 거라는 그의 희망은, 다시 알랭 바디우의 ‘보편적 개별성’ 개념과 만나기도 한다.
이러한 전 지구적 질문들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서도 반복된다. 경제지상주의에 함몰되어 국가가 사라지고 점점 기업화.사유화되어가는 사회는 ‘반자유주의’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눈앞에 들이민다. 기층 노동을 외국인 노동자에게 떠넘기며 희망 없는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현실이나 심각한 실업 문제는 ‘자민족중심주의’나 ‘인종주의’ 갈등이 곧 우리에게도 닥칠 문제임을 예고한다. 반미나 반일 등의 사라지지 않는 해묵은 민족주의 문제 혹은 이라크 파병과 같은 반전평화 등의 이슈 또한 ‘반미주의’나 ‘파쇼이슬람주의’에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21세기의 완전히 새로운 시대적 현실 앞에서 레비가 직설적인 화법으로 던지는 동시대의 질문들은 우리에게도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감상적 좌파에 맞서는 우울한 좌파
“자유와 인권”을 최상위 가치로 여기며 “혁명은 과연 바람직한가”를 되묻고(제2부), “나는 책임 있는 사회주의자가 좋은 자유주의와 나쁜 자유주의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창조적인 정치적 텍스트를 양산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하는 레비는, 말하자면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깝다.
물론 대표적 극우주의자 장마리 르펜부터 레비가 좌파 속 우파라고 경계하는 장피에르 슈벤망 그리고 최근 급부상한 올리비에 브장세노 같은 급진적 반자본주의자까지, 즉 극우파-중도우파-중도파-중도좌파-극좌파의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을 제도권 내에 갖춘 프랑스와 대한민국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뮈와 사르트르 그리고 장 물랭 등을 회고하면서, “감상적 좌파에 맞서는 우울한 좌파” 즉 회의적이었지만 투쟁하고 염세적이었지만 엄격하며 실천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좌파(에필로그)를 찾는 레비의 절망과 희망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좌파를 좌파라 제대로 부를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도,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기 위한 본격적이고 현실적인 성찰과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목차
프롤로그
제1부 좌파의 유산
1.좌파의 몰락에 대하여
2.원초적 장면들
3.우리의 원초적 장면들
4.행동하라,그리고 귀를 기울여라
5.방화에 대한 설명
제2부 삼십 년 후
1.좌파는 어떤 점에서 덜 경건한가
2.21세기의 역사에 도움이 될 비밀 일정표
3.신철학의 연대기
4.루아얄 후보의 실험실
제3부 신진보주의적 이성비판
1.자유주의,이것이 그들의 적이다
2.옛날 옛적에 유럽이 있었다
3.바보들의 또 다른 사회주의
4."제국"에 대한 반격
5.새로운 반유대주의가 진보인가
6.파쇼이슬람주의
7.보편에 대한 새로운 전쟁
에필로그
주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