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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텔레비전, ‘부재’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환경’
2008년 5월, 광우병 사태와 촛불집회는 올드 미디어로 밀려난 듯 보이던 텔레비전의 위력을 다시금 체감케 한 사건이었다. 'PD수첩'의 결정적 역할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상황 전개가 가능했을 거라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8년 10월,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미인도'를 찾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도 여러 번 전시되었던 이 그림이 이번 전시 개막 첫날에만 2만여 명을 불러 모을 만큼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영향임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은 이렇듯 화려한 유혹으로 사람들 삶을 움직이는 텔레비전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이다. 저자 노명우는 “극단적으로 매개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세련된 미디어가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흡입하는 이 위력적인 시대에, 거대화된 힘으로 조직된 사회 속 개인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나를 만들고 또한 여전히 만들어가고 있는 텔레비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텔레비전 없는 유년과 신기술 이후의 삶을 불연속적으로 경험한 1세대와는 달리, 텔레비전과 함께 성장한 2세대 텔레비전 키드이자 텔레비전 없인 살 수 없는 평범한 시청자”임을 자인하면서, “소란스럽게 신기술의 경이로움에 대해 떠들던 수다스러운 담론이 사그라지고, 텔레비전 자체보다는 그 미디어 속 프로그램이라는 작은 단위로 관심이 옮아간 현실”에 의문과 아쉬움을 던지며, “사라져버린 시청자의 관점에서, 관습이 발휘하는 착시 효과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텔레비전이라는 전자 창문 속에 담겨진 문화형식의 결을 발견하려 한다”는 포부를 밝힌다. 이 책은 그렇게 가정에 침투한 낯선 문명의 이기가 ‘또 하나의 가족’으로 정상화된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그 ‘또 하나의 가족’을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텔레비전을 버려라? 미디어는 인간의 운명!
저자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의 또 다른 표현은 ‘인간은 매개된 존재’라며, 이렇듯 매개된 삶이 인간의 현실적 운명이라면 직접성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매개된 삶을 거부하기보다는 ‘미디어’를 이해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제안한다. 그렇기에 그는 “텔레비전을 버려라”는 선동에 동의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아이가 담긴 욕조와도 같아서, 더러워진 목욕물만을 버릴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의 틀 아래에서 바보상자 텔레비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 치중했던 초창기 텔레비전 ‘연구자’들의 태도에서 한 발 비껴나 ‘시청자’로서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성찰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이다.
이러한 텔레비전 이해를 위해 저자는 미디어 역사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에서 출발한다. 동굴벽화.성상.성화 등 이미지 시대와 알파벳.필사.인쇄 등 텍스트 시대의 오랜 경쟁을 지나 사진과 영화의 기술복제 시대 그리고 텔레비전 시대와 뉴 미디어 시대까지, 미디어 발전의 단절과 불연속에 주목한 탐색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미디어 역사의 단절은 근절적 계승이 아니라, 병렬적 동시성의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책이라는 미디어와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 사이에는 분명 단절이 있지만, 책 이후 등장한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사회를 지배해도 이전의 미디어인 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즉 여기서 단절은 곧 지배권의 단절을 뜻하며, 현재 우리는 텔레비전과 뉴 미디어가 지배권 다툼을 벌이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말없는 의사소통
이어지는 볼륨과 채널 챕터는 텔레비전 시대와 문화 변동의 사회학적 해부가 전개된다. 우선 질과 무관하게 소리의 양을 통제할 뿐인 볼륨 장치를 통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내재된 포드주의적 속성을 살펴본다. 봉건지배가 끝나고 부르주아 지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의 촉매제로 탄생했던 신문에 정치지향성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면,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포드주의적 방식으로 탄생하여 그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텔레비전은 경제적 이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면에서 경제 지향적 태도를 확산시키는 신자유주의의 예고편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문 혹은 책과 같은 문자 미디어가 상당한 교육 기간을 전제하는 데 반해, 별다른 훈련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텔레비전은 이전의 그 어떤 미디어도 해내지 못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이상에 도달해 있다.
그렇다면 볼륨과 달리 시청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듯 보이는 채널은, 과연 잃어버린 능동성을 회복시켜줄 가능성을 보장할까? 저자는 이 논쟁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텔레비전을 통한 지각의 변형 과정을 완성시켜주는 기제로서의 채널이라고 말한다. 즉, 채널은 거실 외부에 구축된 모더니티의 거대한 논리가 사적 공간인 거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길이다. 시청자는 텔레비전을 통해 그 규칙과 규율을 학습하며, 텔레비전이 구축한 세계 속으로 편입된다. 때로는 국민으로 때로는 세계시민으로 때로는 붉은 악마 등으로 호명당하며 전체가 되고, 그 앞에서는 농촌 거주민도 대도시 거주민과 유사한 정신 상태를 보인다. 하지만 사회 속 수백만 상자들은 동일한 송신자와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간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렇듯 수용자들간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는 텔레비전은 결국 일방적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 단적으로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총리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텔레비전 방송국을 장악하여 이탈리아인들의 일상과 의식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렇듯 방송과 미디어의 위력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권력이 먼저 알고 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민영방송 사유화에 대한 지속적 위협, YTN의 낙하산 인사, 신문과 방송의 교차소유 허용 움직임까지…… 대중의 일상과 의식을 장악하여 여론을 독점하겠다는 노림수의 이면에는 사실 텔레비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텔레비전 조종자들이 새로운 디지털 세상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는 미국 디지털민주주의센터 간부 제프리 체스터의 경고와도 맞닿아 있다. 다양하고 진보적 여론에 목말랐으나 자본력의 한계 앞에 좌절해야 했던 대중에게 한때 축복과도 같았던 인터넷은 이제 신문과 방송 등 거대 올드 미디어 회사들의 끊임없는 인수 합병을 통한 여론 독점 현상에 대해,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조차 별다른 방어막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뉴 미디어의 활약으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한민국에서, 텔레비전 시대를 새삼 성찰하는 의미가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오프 챕터에서, 텔레비전의 전통적 수용 양식이 파괴되는 뉴 미디어와의 접점에 주목한다. 온라인에서 재탄생되는 ‘미드’와 ‘일드’는 본방의 시청률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텔레비전의 견고한 중앙집권적 매스 커뮤니케이션망에 균열을 가져왔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웹 텔레비전’은 즉각적 피드백의 잠재력과 폭발력을 보여주면서 올드 미디어의 응답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실험했다. 이렇듯 텔레비전의 오프 버튼을 찾아내는 건, 텔레비전을 내던지고 퇴행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텔레비전이 알게 모르게 체화시킨 실어증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의 시대에 텔레비전에 응답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이는 개개 프로그램에 대해서라기보다 텔레비전이라는 흐름에 대한 응답으로서, 또 다른 시청자와 대화 시도를 통해 대안적 의사소통의 흐름을 창출하거나 발신 독점을 해체하는 시도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텔레비전 시대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성찰’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오늘날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유혹과 통제의 흐름에 빠져 익사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텔레비전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텔레비전을 아는 것은 곧 자신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곧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의 회복 여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8년 5월, 광우병 사태와 촛불집회는 올드 미디어로 밀려난 듯 보이던 텔레비전의 위력을 다시금 체감케 한 사건이었다. 'PD수첩'의 결정적 역할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상황 전개가 가능했을 거라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8년 10월,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미인도'를 찾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도 여러 번 전시되었던 이 그림이 이번 전시 개막 첫날에만 2만여 명을 불러 모을 만큼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영향임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은 이렇듯 화려한 유혹으로 사람들 삶을 움직이는 텔레비전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이다. 저자 노명우는 “극단적으로 매개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세련된 미디어가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흡입하는 이 위력적인 시대에, 거대화된 힘으로 조직된 사회 속 개인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나를 만들고 또한 여전히 만들어가고 있는 텔레비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텔레비전 없는 유년과 신기술 이후의 삶을 불연속적으로 경험한 1세대와는 달리, 텔레비전과 함께 성장한 2세대 텔레비전 키드이자 텔레비전 없인 살 수 없는 평범한 시청자”임을 자인하면서, “소란스럽게 신기술의 경이로움에 대해 떠들던 수다스러운 담론이 사그라지고, 텔레비전 자체보다는 그 미디어 속 프로그램이라는 작은 단위로 관심이 옮아간 현실”에 의문과 아쉬움을 던지며, “사라져버린 시청자의 관점에서, 관습이 발휘하는 착시 효과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텔레비전이라는 전자 창문 속에 담겨진 문화형식의 결을 발견하려 한다”는 포부를 밝힌다. 이 책은 그렇게 가정에 침투한 낯선 문명의 이기가 ‘또 하나의 가족’으로 정상화된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그 ‘또 하나의 가족’을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텔레비전을 버려라? 미디어는 인간의 운명!
저자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의 또 다른 표현은 ‘인간은 매개된 존재’라며, 이렇듯 매개된 삶이 인간의 현실적 운명이라면 직접성의 유토피아를 꿈꾸며 매개된 삶을 거부하기보다는 ‘미디어’를 이해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제안한다. 그렇기에 그는 “텔레비전을 버려라”는 선동에 동의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아이가 담긴 욕조와도 같아서, 더러워진 목욕물만을 버릴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의 틀 아래에서 바보상자 텔레비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데 치중했던 초창기 텔레비전 ‘연구자’들의 태도에서 한 발 비껴나 ‘시청자’로서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성찰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이다.
이러한 텔레비전 이해를 위해 저자는 미디어 역사에 대한 계보학적 탐색에서 출발한다. 동굴벽화.성상.성화 등 이미지 시대와 알파벳.필사.인쇄 등 텍스트 시대의 오랜 경쟁을 지나 사진과 영화의 기술복제 시대 그리고 텔레비전 시대와 뉴 미디어 시대까지, 미디어 발전의 단절과 불연속에 주목한 탐색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미디어 역사의 단절은 근절적 계승이 아니라, 병렬적 동시성의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책이라는 미디어와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 사이에는 분명 단절이 있지만, 책 이후 등장한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사회를 지배해도 이전의 미디어인 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즉 여기서 단절은 곧 지배권의 단절을 뜻하며, 현재 우리는 텔레비전과 뉴 미디어가 지배권 다툼을 벌이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말없는 의사소통
이어지는 볼륨과 채널 챕터는 텔레비전 시대와 문화 변동의 사회학적 해부가 전개된다. 우선 질과 무관하게 소리의 양을 통제할 뿐인 볼륨 장치를 통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내재된 포드주의적 속성을 살펴본다. 봉건지배가 끝나고 부르주아 지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의 촉매제로 탄생했던 신문에 정치지향성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면,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포드주의적 방식으로 탄생하여 그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텔레비전은 경제적 이윤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면에서 경제 지향적 태도를 확산시키는 신자유주의의 예고편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문 혹은 책과 같은 문자 미디어가 상당한 교육 기간을 전제하는 데 반해, 별다른 훈련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텔레비전은 이전의 그 어떤 미디어도 해내지 못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궁극적 이상에 도달해 있다.
그렇다면 볼륨과 달리 시청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듯 보이는 채널은, 과연 잃어버린 능동성을 회복시켜줄 가능성을 보장할까? 저자는 이 논쟁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텔레비전을 통한 지각의 변형 과정을 완성시켜주는 기제로서의 채널이라고 말한다. 즉, 채널은 거실 외부에 구축된 모더니티의 거대한 논리가 사적 공간인 거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길이다. 시청자는 텔레비전을 통해 그 규칙과 규율을 학습하며, 텔레비전이 구축한 세계 속으로 편입된다. 때로는 국민으로 때로는 세계시민으로 때로는 붉은 악마 등으로 호명당하며 전체가 되고, 그 앞에서는 농촌 거주민도 대도시 거주민과 유사한 정신 상태를 보인다. 하지만 사회 속 수백만 상자들은 동일한 송신자와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간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렇듯 수용자들간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는 텔레비전은 결국 일방적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 단적으로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총리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텔레비전 방송국을 장악하여 이탈리아인들의 일상과 의식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렇듯 방송과 미디어의 위력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권력이 먼저 알고 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민영방송 사유화에 대한 지속적 위협, YTN의 낙하산 인사, 신문과 방송의 교차소유 허용 움직임까지…… 대중의 일상과 의식을 장악하여 여론을 독점하겠다는 노림수의 이면에는 사실 텔레비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텔레비전 조종자들이 새로운 디지털 세상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는 미국 디지털민주주의센터 간부 제프리 체스터의 경고와도 맞닿아 있다. 다양하고 진보적 여론에 목말랐으나 자본력의 한계 앞에 좌절해야 했던 대중에게 한때 축복과도 같았던 인터넷은 이제 신문과 방송 등 거대 올드 미디어 회사들의 끊임없는 인수 합병을 통한 여론 독점 현상에 대해,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조차 별다른 방어막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뉴 미디어의 활약으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한민국에서, 텔레비전 시대를 새삼 성찰하는 의미가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오프 챕터에서, 텔레비전의 전통적 수용 양식이 파괴되는 뉴 미디어와의 접점에 주목한다. 온라인에서 재탄생되는 ‘미드’와 ‘일드’는 본방의 시청률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텔레비전의 견고한 중앙집권적 매스 커뮤니케이션망에 균열을 가져왔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웹 텔레비전’은 즉각적 피드백의 잠재력과 폭발력을 보여주면서 올드 미디어의 응답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실험했다. 이렇듯 텔레비전의 오프 버튼을 찾아내는 건, 텔레비전을 내던지고 퇴행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텔레비전이 알게 모르게 체화시킨 실어증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의 시대에 텔레비전에 응답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이는 개개 프로그램에 대해서라기보다 텔레비전이라는 흐름에 대한 응답으로서, 또 다른 시청자와 대화 시도를 통해 대안적 의사소통의 흐름을 창출하거나 발신 독점을 해체하는 시도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텔레비전 시대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성찰’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내는 이유가 오늘날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유혹과 통제의 흐름에 빠져 익사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텔레비전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텔레비전을 아는 것은 곧 자신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곧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의 회복 여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목차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 텔레비전 카드, 학자가 되다
ON 텔레비전을 켜다
1.매개된 삶은 인간의 운명이다
2.이미지와 텍스트의 경쟁 시대
3.누가 스크린을 살해했는가
VOLUME 텔레비전과 포드주의
1.포드주의의 학습장
2.볼륨 장치와 매스 커뮤니케이션
3.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경제학
CHANNEL 텔레비전과 모더니티의 시공간
1.채널, 거대한 일방통행로
2.사적 공간에 공적 공간이 침투하는 길
3.시청자가 호명당하는 통로
4.거실 속의 외부 세계
5.거실로 모더니티의 시간이 쏟아지다
OFF 텔레비전을 끄다
1.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나타내는 문화적 징후들
2.뉴 미디어, 상충하는 의사소통 형식
3.왜 오프 버튼을 찾아내야 하는가
에필로그 - 텔레비전 시대, 살 것인가 살아질 것인가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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