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연구원 전자도서관

로그인

통일연구원 전자도서관

소장자료검색

  1. 메인
  2. 소장자료검색
  3. 전체

전체

단행본

부르주아의 지배: 원천·매커니즘·매개·효과

개인저자
이종영 지음
발행사항
서울 : 새물결, 2008
형태사항
431 p.: 삽화; 23 cm
ISBN
9788955592542
청구기호
332.6 이756ㅂ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1230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1230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정치는 욕망과 지배와는 무관한가?

그동안 우리는 ‘정치’ 하면 으레 70~80년대식의 폭력이나 독재와 관련된 무시무시한 이미지 아니면 90년대식의 ‘개혁’과 ‘문민’ 등의 허구적 수사를 떠올려왔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 ‘정치’는 여의도의 제도 정치에 갇히고 ‘경제’는 청와대가 독점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선거의 투표율은 매번 최저치를 갱신 중이며 심지어 최근에는 20%도 안 되는 투표율로 당선된 교육감이 서울시 교육 전체를 ‘대표’하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독재도, 민주주의도, 그렇다고 대의 제도도 아닌 기묘한 진공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또는 더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는 완전히 파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통령 선거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 살리기를 내세운 ‘CEO 대통령’을 뽑는 식으로 이러한 기형적 정치 부재를 기만적으로 회피해버렸다. “신물 나는 정치는 그만, 이제부터는 경제 살리기만!”이라는 터무니없는 수사에 국민들은 깜박 넘어갔지만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미국과 벌인 ‘협상 아닌’ 소고기 협상은 거리에서의 국민들의 ‘정치’를 불러들였다.
이는 우리의 정치,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대한 인식이 과거의 패러다임으로는 더이상 포착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것은 모두 부정되었지만 미래의 것은 하나도 긍정되고 있지 않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리어 왕의 고뇌어린 질문을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자는 누구인가”로 바꾸어 질문하는 것이 ‘위기에 빠진’ 인문학의 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래와 같은 저자의 문제의식은 우리 시대의 핵심적 고민에 바로 가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운명을 집합적으로 결정하기 원한다면, 사회의 자기인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사회의 자기인식을 결여한 상태에서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의 운명을 집합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부르주아의 지배에 대한 나의 이 연구는 부르주아 사회에 자기인식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의 운명을 집합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이 저서에서 중요한 점은 저자가 ‘자기인식’을 생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구성체’니 ‘역사’니 ‘탈주’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거대 이론적인, 하지만 결국에는 외재적인 인식이 아니라 ‘나는 왜 지배를 욕망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정치와 사랑과 저항과 소유에 대한 인식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지배하려는 ‘욕망’에 뿌리는 둔 것인데도 민주 대 반민주식의 허구적 슬로건에 갇혀 한 번도 그 뿌리가 제대로 포착되지 않았다. 이러한 ‘모르고자 하는 욕망’에 맞서 저자는 ‘정치’와 ‘지배’라는 현상의 심리적 원천, 역사·사회적 메커니즘, 그 효과를 밝힘으로써 과학적 인식을 생산하려 한다.

우리는 왜 사랑하고, 소유하고, 지배하고 누리[享有]려고 하는가?

저자는 지난 1993년 귀국한 이후 지배, 권력, 사랑, 정치 등 인간적 삶의 가장 기본적인 내면적 양상임에도 가장 깊숙이, 본격적으로 탐구되지 않는 영역들을 지배 양식과 생산 양식 등의 구조적 층위와 결합하는 작업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이러한 저자의 독창적 업적을 종합하고 있는 이 저서에서 저자의 고민은 마침내 한 단계 더 진보한 성취를 이루어냈을 뿐만 아니라 라캉과 마르크스, 스피노자, 헤겔에 대한 우리만의 정확하고 독창적인 해석이 어떻게 가능한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질문은 마치 칸트의 질문처럼 단순하지만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고, 그럼에도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질문되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1.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 왜 사랑은 항상 한 통속극의 제목처럼 ‘사랑과 전쟁’으로 이어질까? 왜 모든 비극은 사랑을 둘러싸고 벌어질까? 왜 사랑은 소유와 지배로 이어지는가? 더 나아가 왜 폭력은 항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될까?
2. 우리는 왜 소유하려고 하는가? 인간에 대한 지배와 사물에 대한 소유의 뿌리에는 과연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 예를 들어 상대방의 승인을 원하지만 상대방을 노예로 만들지 않고는 승인이 불가능한 인간적 비극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없을까?
3. 우리는 왜 지배하려고 하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무엇을 지배하려고 하는가? 왜 지배의 다른 한쪽에는 사랑과 폭력이 함께 존재하는가?
4. 우리는 무엇을, 왜 누리려고 하는가? 타자에 대한 전일적 지배에 기반한 정치적 향유는 왜 그토록 강렬할까? 하지만 그것은 왜 항상 사람을 ‘타락’시킬까? 온갖 유혹과 쾌락과 향유가 대중들을 마취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향유, 사랑의 향유, 더 나아가 공동존재적 향유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아주 소박하지만 동시에 우리 시대의 고통과 문제에 곧바로 맞닿아 있는 것이다. 나아가 더 중요한 것은 칸트적 질문들은 각기 따로 질문되고 대답되고 있는 반면 저자는 위와 같은 질문들이 실제로는 하나의 회로를 구성하면서 서로 이어져 있다고 보고, 그것들의 짜임새를 인식론적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이처럼 다소 원론적인 탐구가 단순히 추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우리 시대의 고민에 바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세간에서는 IMF보다 더 살기 힘들다는 말이 회자되지만 막상 인문학은 위기를 타개할 아무런 방안도 내지 못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이 저작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와 곧바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과 청와대 비서관들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재산공개 내역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이제 ‘공(公)’적인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의 자본주의가 돈으로 행복을 사는 시대를 지나 권력이 돈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또한 영어 몰입 교육으로 대표되는 온갖 ‘묻지마’ 열풍은 우리 사회가 이제 ‘자기인식’을 완전히 포기하고 광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서구 사상가들은 오독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문제의식을 겨냥하는 동시에 이론적 혁신 또한 겨냥하고 있는 저자는 당연히 우리의 현실뿐 아니라 서양의 고전에 대해서도 정밀한 독해를 제시하며, 후자는 그것 자체로 이 책의 커다란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지성계에서 마르크스는 신처럼 숭배되거나 아니면 악마처럼 백안시되다가 오늘날에는 죽은 개 취급되거나 장황한 사망 선고만 받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했는지,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천착은 등한시되고 있으며, 특히 그의 이론적 뿌리인 가치이론(노동가치론)과 잉여가치론을 당시의 이론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이 저서는 서구 사상에 대한 독창적 해석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이 점은 마르크스주의의 쇠퇴 이후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른 서양의 지적 맥락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져온 우리 지식 사회에 중요한 이론적 해갈을 가져다줄 터인데, 특히 스피노자와 헤겔, 마르크스, 라캉 등 현재 일부 지식계의 집중적인 관심 대상이 되고 있는 이론가들이 책 속에서 날카롭게 재해부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부터 크게 관심을 받고 잇는 네그리와 스피노자, 그리고 네그리의 주요 개념인 ‘다중’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자연적 자유 개념을 끝까지 견지하지 않는다. 네그리가 읽은 것과는 반대로 스피노자는 다중multitude의 자유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학.신학 논설>에서 다중에 대한 스피노자의 입장은 경멸적이고 부정적이다. 그는 다중을 미신에 종속되어 전제정치의 토대를 이루는 존재들로 여긴다. 서문에서는 다중의 통치를 위해선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해 미신에 복속시키는 것이 가장 유효하다고 하고, 17장에선 정서에 의해 지배되는 다중의 비(非)일관적 성향을 지적한다. 18장에선 다중의 통제할 수 없는 무서운 열정이 예수의 죽음을 가져왔다고 한다. 1676∼1677년 사이에 초고가 쓰인 <정치학 논설>에서도 이 입장은 유지된다. 즉 1장 §3에서는 다중을 통치하는 것은 그들을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고, 1장 §5에서는 다중을 이성의 원칙에 따라 살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시인들의 황금시대를 꿈꾸는 것, 허구 속에서 자기 만족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네그리는 스피노자를 잘못 읽었으며, ‘다중’ 개념 역시 오독 혹은 오해의 산물이다. 이렇듯 저자는 서구의 고전을 정밀하게 독해하면서 그들과 사상적 대결을 펼칠 뿐 아니라, 그들을 원용해 자신의 이론을 펼치는 현대 사상가들과도 대결한다. 서구 사상의 위상이 아니라 오로지 정합성과 엄밀함이라는 기준으로만 그것들을 읽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저자의 태도는 지식 수입에 급급한 한국 지성계에서 흔치 않은, 실로 귀중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서구의 대가들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천착을 보면 지금 일부 지식인들이 라캉과 스피노자 같은 사상가들의 주요 시니피앙들에 대한 마치 난수표식의 글쓰기를 남발하고 있는 것은 혹시 어려운 시대에 대중을 새로운 방식으로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