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트랜스 소시올-로지 006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 대등서명
- Goodbye Mr. socialism
- 개인저자
-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 박상진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 그린비, 2009
- 형태사항
- 279 p. ; 23 cm
- 총서사항
- 트랜스 소시올-로지
- ISBN
- 9788976827272
- 청구기호
- 301.4 네18ㄱ
- 일반주기
- 색인수록 원저자명: Antonio Negri 표제관련정보: 네그리 대담록 : 사회주의 이후, 좌파운동을 말하다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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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1843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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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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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자료실
책 소개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좌파의 중립화를 겪으며 전 세계 좌파운동에 실망하게 된 세계적인 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와 이탈리아의 진보적 지식인 랄프 발볼라 셸시가 사회주의 이후의 민주주의와 다중의 출현에 대해 심도 깊게 이야기를 나눈 기록이다. 두 사람은 프랑스, 이란, 이라크, 브라질, 멕시코, 스페인 등 전 세계의 좌파운동을 되짚으며 그 운동들을 비판과 반성의 시각으로 진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이 지구 곳곳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가를 구체적이고 비판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이 책은, 이민자와 실업(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있는 전 세계적 현상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방식을 모색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좌파와 자본에 대한
새로운 윤리학을 세운다!!”
―낡은 사회주의를 넘어 새롭게 출현한 다중의 민주주의!
혹자는 시청광장과 분향소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또 다른 ‘정부’조직의 배후를 운운했고, 국가권력은 그렇게 튀어나오는 사람들을 진압하며 터져 나오는 분노를 가리기에 급급했다. 단순히 자발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능동적이었고, 그냥 시민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기에는 조금, 혁명가에 가까웠던 사람들. 이제 막 분노하는 법을 배워 거리로 나간 사람들. 네그리(Antonio Negri)는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다중’(多衆)이라 불렀다. 작년 촛불시위에는 중학생부터 아기 유모차를 끌고 나온 어머니들, 온라인 동호회의 회원 등 세대와 성격을 아우르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고, 올해 한국 민주주의의 종언을 상징하는 한 인물의 죽음 앞에는 600만 명의 국민이 움직였다. 대한민국에서 다중은 그렇게 스스로 구성되어 가면서, 권위적인 정권에게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는 맥 빠진 좌파운동에 실망한 이후, 스스로 구성되어 가는 다중의 발견에 흥분한 네그리와 이탈리아의 진보적 지식인 라프 발볼라 셸시(Raf Valvola Scelsi)의 대담록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의 기억에서 대담을 시작하며 현실 사회주의의 끝과, 새로운 운동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은 전 세계(프랑스·이란·이라크·브라질·멕시코·중국·스페인·이탈리아)좌파운동을 되짚으며, 그 운동을 비판과 반성의 시각으로 진단하고 있다. 반자본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을 둘러싸고 지구 곳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피며 새로운 방식으로 체제에 저항하는 실천을 모색하는 그들의 대담은, 비정규직 양산·이주 노동자의 급증·집회와 표현에 대한 감시와 통제·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문제 등으로 거꾸로 달리고 있는 한국사회에 많은 영감과 참조점을 주며 우리를 촉발하고 있다.
전 세계 민주주의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막다른 곳에 선 사람들, 권력에 물음표를!
정권 퇴진을 외치며 서울 시청을 가득 메운 사람들, 혹은 대선의 부정 의혹을 문제 삼으며 이란을 전 세계 핫이슈로 만든 이란의 성난 민중들. 민주주의가 삭제된 자리를 채운 건, 민주화를 열망하며 권력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진 대중, 곧 다중이었다.
“대중이 있는 곳에 에너지가 있다는 말은, 아인슈타인의 공식을 비틀어 빌려 오지 않아도 진실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개념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공동체는 맡겨 놓은 것이 아니라 에너지며 권력입니다. 표현의 능력입니다.” (본문 41쪽)
대중에게 에너지와 권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네그리는 일찍이 세계와 존재는 파괴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대로 그것을 온전하게 건설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68혁명과 90년대의 시애틀, 멕시코 사파티스타의 투쟁, 이란과 이라크에서의 쿠데타, 파리에서의 대파업……. 네그리가 언급하는 각국의 운동들은 위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투쟁이었다. 정당운동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학생들이, 아줌마들이 해냈다. 프랑스에서는 학생들의 자율적인 조직으로 극악한 비정규직법을 저지했고, 온 시민의 힘으로 민영화를 막아냈다. 68혁명은 대중을 발견할 수 있었던 그야말로 ‘사건’이었으며, 시애틀 투쟁은 반세계화를 상상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중은 무한하며, 그 힘은 지속적인 운동”이라 했던 네그리의 다중 개념을 현실에서 구현한 전 세계의 다양한 사건들은 물리적으로 엮이고 조합되며, 결합되고 분리되며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유사 혁명의 모습으로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정치의 세계는 행동의 세계임을 이 책,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속 정치사상과 운동의 흐름을 통해 우리는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좌익척결? 지겹게 되풀이되는 희극 또는 비극
1976년 아르헨티나에 비델라(Jorge Rafa?l Videla)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수만 명이 사라졌다. 파나마 군사학교에서 미국의 훈련을 받은 군인들은 반체제 인사들을 바닷속에 밀어넣었고, 임신 5개월인 젊은 여자며, 15세 학생이며 가리지 않고 납치하여 고문하고 죽게 했다. 비델라 군사정권이 소위 ‘좌익척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추악한 전쟁에서 사라진 사람은 모두 3만 명이었다.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고 절망한 어머니들은 대통령궁 앞 5월 광장에 모였고, 국가폭력에 대항하며 정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미 희극처럼 받아들이게 된 ‘좌익척결’이라는 정부의 구호는 전 세계에서 지겹도록 되풀이되고 있는 코미디이자 비극이었던 것. 1977년부터 30년이 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아르헨티나 5월 광장의 시위, 그리고 이제는 아르헨티나 민주화의 상징이 된 5월 광장의 어머니들을 보며 네그리는 “아마도 이제는 5월 광장 어머니들의 행위를 통해 전체 인류는 이러한 혐오스러운 폭력의 반복으로부터 보호받고 구조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09년 한국 정부도 과연 시민의 힘으로 구원될 수 있을까?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의 힘!
-이란과 위구르, 그리고 트위터
일국의 대통령까지도 ‘로그인’하게 만든 트위터(twitter)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이란 시위에서 쫓겨나는 기자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고 위구르 유혈 사태에서는 어떤 방송보다도 먼저 사건을 알리며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사진을 실어날랐다. 90년대 사파티스타들의 활동에 질적 도약을 가져온 것이 인터넷의 발전 덕이었다면, 이제 2000년대 운동을 도약하게 하는 촉매는 트위터가 될 참이다. 68혁명 이후 70년대 이탈리아에서 ‘자유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능하게 했던 것은, 비단 방송뿐이 아니라 자율주의 운동과 정치운동의 결합이었다(본문 82쪽). 네그리는 바로 그 매체와 매체를 통한 네트워크에서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그 네트워크는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고, 혁명 그 자체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중요한 정서적 분위기를 이제는 집단적이고 일반적인 단계에서 명쾌하게 포착하는 사회성의 형식들이 인터넷에서 재현되는 것을 간과할 수 없어요. 거기에는 교환이 있어요. 새롭고 놀라운 관계들의 발견에서 오는 행복이 있고 지식의 발견에서 오는 행복이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역동성 내에 있는 모든 것은 소통의 수평성의 분위기를 점점 더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83쪽)
네그리는 이 책에서 이러한 네트워킹으로부터 시작하여 의미를 생성해 내는 사람들에게서 정치적 주도권이 현실화되는 가능성을 본다. 처음에는 운동으로, 나중에는 정당으로 결론을 냈던 낡은 모델들을 다시 취하지 않고서 말이다. 만일 우리 각자가 존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구성해 나가는 존재들의 사회 속에서가 될 것이라고 했던 네그리의 전망이 바로 인터넷 속에서, 다른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밤새 채팅한 사람과 함께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인터넷이 운동의 도구가 되었던 90년대를 지나, 시위의 현장을 사진과 동영상과 기사로 실어나르고 트위터에 로그인하는 중딩·고딩·백수·아줌마는 그야말로 진정한 발화의 주체였다. 그러나 네그리의 말마따나 다중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체 ‘내’에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의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다중은 우리도 모르는 새 어쩌면,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분노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해방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한 비정규직,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가능하게 한 것!
역시 프랑스였다. 2006년 프랑스를 불태웠던 최초고용계약(CPE: 26세 미만 청년 고용시, 2년 안에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한 법안) 투쟁은 참으로 뜨거웠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매주 반복해서 대대적인 데모를 벌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경찰이 도착하면 학생들은 주변의 자동차를 태워 버렸고, 그들은 단순한 데모참가가 아니라 철길이나 고속도로를 막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학생운동이자, 비정규직 투쟁이었던 이 CPE 투쟁은 전면적인 사회적 재구성을 위한 강력한 엔진이었다. 지역을 가로지르고, 세대를 가로지르며, 정치적인 동시에 문화적인 운동이었다.
“이러한 젊은 사람들과 덜 젊은 사람들은 생명정치적 사회에서 임금 투쟁이란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어요. 그들은 그들이 원할 때 집을 마련하고 먹고 배우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요. 그들은 다양한 정보와 다양한 문화를 생산하거나 이용하길 원하고, 지식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교환하려 하고, 그들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어떤 모종의 부를 창조하며, 자유롭게 정착하거나 이사하고, 도시의 삶에 참여하고 새로운 공적 공간이나 새로운 사회적 생활방식들을 창안하길 원합니다. 요컨대, 그들은 그들의 삶이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249쪽)
단순히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구호가 아니라, 사장들이 이윤을 취하는 한 노동자들의 비참함은 증대할 뿐인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삶의 문제로 접근하려는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상상하고 삶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비정규직 문제가 시발이 되었지만, 사회운동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스(Piqueteros: 카를로스 메넴 정부, 위기가 폭발하던 90년대의 아르헨티나에서, 공장과 회사를 점거하고 본질적으로 자기관리의 원리에 따라 운영하던 실업자 행동가 집단)는 이미 대안 사회운동과 참여 민주주의에 있어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에서 네그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상한 비정규직 운동과 그 네트워크는, 한국을 들끓게 하는 비정규직 문제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풀어 나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면한 위기가 단순히 비정규직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의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더 이상 자본주의 질서를 기능적이고 도구적으로 극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행, 즉 생명정치적 전망에서 연대로 이행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연대’라고 말할 때, 그것은 주체성을 공동체로 접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평등주의입니다. 유기적인 것, 무차별적인 것과 하등 관련이 없는 평등주의죠. 반대로 그것은 공통적인 네트워크 내에서 살아 있고 생산하는 개별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평등하다는 것은 실질적이고, 다중의 활동의 총체 내에서 존재하는, 평등한 가능성과 평등한 표현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생산과 자유는 네트워크에서 태어납니다. 네트워크는 언제나 개별성과 표현, 그리고 차이들의 생산의 네트워크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앞으로 도래할 시대의 종교 아닐까요?” (270쪽)
혁명적 민주주의와 공동체 네트워크로 탄생할 새로운 자유의 공간!
-네그리의 촌철살인 좌파 비판!
딱히 좌파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죄송한 비우파 정권들만 남은 지금, 사회주의는 붕괴했고 좌파는 자본주의화된 지 오래다. 그래서 네그리는 오히려 우리에게 되묻는다. 도대체 오늘날 좌파는 무엇이냐고. 좌파는 자본의 관리, 자본주의적 권력구조를 관리하는 하나의 형태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하는 네그리는 결국 말하고야 만다. “자본의 관리자로서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사회주의자는 없습니다.”(본문 153쪽) 이윤추구가 없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진보’의 탈을 쓴 자본가가 되고 싶었던 좌파를 비판하는 네그리는 지금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단지 사변적인 형태로만 좌파일 뿐이라고 말한다. 제국주의적으로 벌어지는 전쟁에는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범람하는 이민자(이주 노동자)에 대해서도 쉬쉬한다. 좌파는 직업을 생애 전체 동안 갖게 될 개념으로 보고 고용의 문제와 함께 근본적으로 풀어 가고자 하기 때문에 이민자 수용 문제를 적절하게 발전시키지 못할 것이 분명할뿐더러, 고용의 문제가 체제의 역학보다 더 중요한 이상, 좌파는 이민자 노동력이 밀어닥치는 현상을 언제까지라도 두려워할 것이라는 것이다(123쪽).
“좌파의 지도자들은 공동체를 상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꼭 자본가들처럼, 몰수되는 어떤 것으로나 상상한다면 모를까요. 자본가들은……메트로폴리스를 자본의 식민지로 생각하는 것이죠.”(49쪽)
네그리가 생각하는 좌파는 이토록 무능하고 무기력하다. 프랑스에서도 노동 조직을 개선하기 위한 계약적 필요와 요구는 고용주뿐 아니라 새로운 노동력에서 제기되었는데, 그에 직면하여 좌파는 그 존재가 없었거나 심지어는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노동을 구성해야 하는 이때, 좌파는 착취의 모델을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과거의 향수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이 착취의 체제를 거부하지도 못한다. 노동 세계의 기수였던 좌파는 노동 문제는 물론이고, 정치 영역에서도 대표의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네그리가 비판하는 좌파는 바로 그런 좌파이다.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좌파, 미래를 모색하지 못하는 좌파, 그리하여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신경쇠약으로 내모는 창백한 좌파 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란은 문화의 측면에서 또 생산형식의 측면에서 탈근대성을 향해 진화하는 과정 중에 있는 큰 나라입니다. 하지만 자유가 없이는 탈근대적 생산도 없습니다. 광신적인 시아파(이들은 광신적인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흉한 괴물은 아니지요)가 이란에 구축한 장벽은 외부의 압력에 의해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그 벽은 오직 사람들의 두뇌에서 태어나는, 멈출 수 없는 충동에 의해서만 무너질 겁니다.” (230쪽)
지금 뉴스를 틀면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세계 정세에 대한 2006년도의 네그리의 전망은 2009년에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대로 나타났다. 공격적인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피곤한 민주주의를 목도하며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목격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던 네그리, 그는 어떤 갱생의 희망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고, 그 어떤 전복적인 투쟁과 비교해서도 중립화되어 있는 좌파에는 고개를 떨구었지만, 자본주의와 파시즘적 대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좌파와 사회주의를 넘어 대안 민주주의의 세력을 키워 온 다중만은 긍정했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는 그러한 다중과 세계에 대한 네그리의 간절한 소망이 가장 쉽고 간결하게 드러난 책이다. <제국>과 <다중>으로 이미 우리를 뒤흔들었던 네그리가 우리에게 내놓는 그의 대담록은, 혁명적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네트워크로 가능하게 될 새로운 자유의 세계에 대한 전망을 담고 있다. 슬픔은 곧잘 분노가 되지만 분노는 새로운 세계의 구성으로 자동이행하지 않는다. 행동하는 다중이 그 이행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좌파와 자본에 대한
새로운 윤리학을 세운다!!”
―낡은 사회주의를 넘어 새롭게 출현한 다중의 민주주의!
혹자는 시청광장과 분향소에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또 다른 ‘정부’조직의 배후를 운운했고, 국가권력은 그렇게 튀어나오는 사람들을 진압하며 터져 나오는 분노를 가리기에 급급했다. 단순히 자발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능동적이었고, 그냥 시민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기에는 조금, 혁명가에 가까웠던 사람들. 이제 막 분노하는 법을 배워 거리로 나간 사람들. 네그리(Antonio Negri)는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다중’(多衆)이라 불렀다. 작년 촛불시위에는 중학생부터 아기 유모차를 끌고 나온 어머니들, 온라인 동호회의 회원 등 세대와 성격을 아우르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고, 올해 한국 민주주의의 종언을 상징하는 한 인물의 죽음 앞에는 600만 명의 국민이 움직였다. 대한민국에서 다중은 그렇게 스스로 구성되어 가면서, 권위적인 정권에게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는 맥 빠진 좌파운동에 실망한 이후, 스스로 구성되어 가는 다중의 발견에 흥분한 네그리와 이탈리아의 진보적 지식인 라프 발볼라 셸시(Raf Valvola Scelsi)의 대담록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의 기억에서 대담을 시작하며 현실 사회주의의 끝과, 새로운 운동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은 전 세계(프랑스·이란·이라크·브라질·멕시코·중국·스페인·이탈리아)좌파운동을 되짚으며, 그 운동을 비판과 반성의 시각으로 진단하고 있다. 반자본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을 둘러싸고 지구 곳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피며 새로운 방식으로 체제에 저항하는 실천을 모색하는 그들의 대담은, 비정규직 양산·이주 노동자의 급증·집회와 표현에 대한 감시와 통제·심화되는 부의 양극화 문제 등으로 거꾸로 달리고 있는 한국사회에 많은 영감과 참조점을 주며 우리를 촉발하고 있다.
전 세계 민주주의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막다른 곳에 선 사람들, 권력에 물음표를!
정권 퇴진을 외치며 서울 시청을 가득 메운 사람들, 혹은 대선의 부정 의혹을 문제 삼으며 이란을 전 세계 핫이슈로 만든 이란의 성난 민중들. 민주주의가 삭제된 자리를 채운 건, 민주화를 열망하며 권력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진 대중, 곧 다중이었다.
“대중이 있는 곳에 에너지가 있다는 말은, 아인슈타인의 공식을 비틀어 빌려 오지 않아도 진실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개념에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공동체는 맡겨 놓은 것이 아니라 에너지며 권력입니다. 표현의 능력입니다.” (본문 41쪽)
대중에게 에너지와 권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네그리는 일찍이 세계와 존재는 파괴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대로 그것을 온전하게 건설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68혁명과 90년대의 시애틀, 멕시코 사파티스타의 투쟁, 이란과 이라크에서의 쿠데타, 파리에서의 대파업……. 네그리가 언급하는 각국의 운동들은 위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투쟁이었다. 정당운동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학생들이, 아줌마들이 해냈다. 프랑스에서는 학생들의 자율적인 조직으로 극악한 비정규직법을 저지했고, 온 시민의 힘으로 민영화를 막아냈다. 68혁명은 대중을 발견할 수 있었던 그야말로 ‘사건’이었으며, 시애틀 투쟁은 반세계화를 상상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다중은 무한하며, 그 힘은 지속적인 운동”이라 했던 네그리의 다중 개념을 현실에서 구현한 전 세계의 다양한 사건들은 물리적으로 엮이고 조합되며, 결합되고 분리되며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유사 혁명의 모습으로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정치의 세계는 행동의 세계임을 이 책,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속 정치사상과 운동의 흐름을 통해 우리는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좌익척결? 지겹게 되풀이되는 희극 또는 비극
1976년 아르헨티나에 비델라(Jorge Rafa?l Videla)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수만 명이 사라졌다. 파나마 군사학교에서 미국의 훈련을 받은 군인들은 반체제 인사들을 바닷속에 밀어넣었고, 임신 5개월인 젊은 여자며, 15세 학생이며 가리지 않고 납치하여 고문하고 죽게 했다. 비델라 군사정권이 소위 ‘좌익척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추악한 전쟁에서 사라진 사람은 모두 3만 명이었다. 자식을 잃고, 남편을 잃고 절망한 어머니들은 대통령궁 앞 5월 광장에 모였고, 국가폭력에 대항하며 정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미 희극처럼 받아들이게 된 ‘좌익척결’이라는 정부의 구호는 전 세계에서 지겹도록 되풀이되고 있는 코미디이자 비극이었던 것. 1977년부터 30년이 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아르헨티나 5월 광장의 시위, 그리고 이제는 아르헨티나 민주화의 상징이 된 5월 광장의 어머니들을 보며 네그리는 “아마도 이제는 5월 광장 어머니들의 행위를 통해 전체 인류는 이러한 혐오스러운 폭력의 반복으로부터 보호받고 구조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09년 한국 정부도 과연 시민의 힘으로 구원될 수 있을까?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의 힘!
-이란과 위구르, 그리고 트위터
일국의 대통령까지도 ‘로그인’하게 만든 트위터(twitter)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이란 시위에서 쫓겨나는 기자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고 위구르 유혈 사태에서는 어떤 방송보다도 먼저 사건을 알리며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사진을 실어날랐다. 90년대 사파티스타들의 활동에 질적 도약을 가져온 것이 인터넷의 발전 덕이었다면, 이제 2000년대 운동을 도약하게 하는 촉매는 트위터가 될 참이다. 68혁명 이후 70년대 이탈리아에서 ‘자유 라디오’라는 매체가 가능하게 했던 것은, 비단 방송뿐이 아니라 자율주의 운동과 정치운동의 결합이었다(본문 82쪽). 네그리는 바로 그 매체와 매체를 통한 네트워크에서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그 네트워크는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고, 혁명 그 자체인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중요한 정서적 분위기를 이제는 집단적이고 일반적인 단계에서 명쾌하게 포착하는 사회성의 형식들이 인터넷에서 재현되는 것을 간과할 수 없어요. 거기에는 교환이 있어요. 새롭고 놀라운 관계들의 발견에서 오는 행복이 있고 지식의 발견에서 오는 행복이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역동성 내에 있는 모든 것은 소통의 수평성의 분위기를 점점 더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83쪽)
네그리는 이 책에서 이러한 네트워킹으로부터 시작하여 의미를 생성해 내는 사람들에게서 정치적 주도권이 현실화되는 가능성을 본다. 처음에는 운동으로, 나중에는 정당으로 결론을 냈던 낡은 모델들을 다시 취하지 않고서 말이다. 만일 우리 각자가 존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구성해 나가는 존재들의 사회 속에서가 될 것이라고 했던 네그리의 전망이 바로 인터넷 속에서, 다른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밤새 채팅한 사람과 함께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인터넷이 운동의 도구가 되었던 90년대를 지나, 시위의 현장을 사진과 동영상과 기사로 실어나르고 트위터에 로그인하는 중딩·고딩·백수·아줌마는 그야말로 진정한 발화의 주체였다. 그러나 네그리의 말마따나 다중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체 ‘내’에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의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다중은 우리도 모르는 새 어쩌면,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분노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해방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상한 비정규직,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가능하게 한 것!
역시 프랑스였다. 2006년 프랑스를 불태웠던 최초고용계약(CPE: 26세 미만 청년 고용시, 2년 안에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한 법안) 투쟁은 참으로 뜨거웠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매주 반복해서 대대적인 데모를 벌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경찰이 도착하면 학생들은 주변의 자동차를 태워 버렸고, 그들은 단순한 데모참가가 아니라 철길이나 고속도로를 막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학생운동이자, 비정규직 투쟁이었던 이 CPE 투쟁은 전면적인 사회적 재구성을 위한 강력한 엔진이었다. 지역을 가로지르고, 세대를 가로지르며, 정치적인 동시에 문화적인 운동이었다.
“이러한 젊은 사람들과 덜 젊은 사람들은 생명정치적 사회에서 임금 투쟁이란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어요. 그들은 그들이 원할 때 집을 마련하고 먹고 배우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요. 그들은 다양한 정보와 다양한 문화를 생산하거나 이용하길 원하고, 지식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교환하려 하고, 그들 자신의 건강을 돌보고, 어떤 모종의 부를 창조하며, 자유롭게 정착하거나 이사하고, 도시의 삶에 참여하고 새로운 공적 공간이나 새로운 사회적 생활방식들을 창안하길 원합니다. 요컨대, 그들은 그들의 삶이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249쪽)
단순히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구호가 아니라, 사장들이 이윤을 취하는 한 노동자들의 비참함은 증대할 뿐인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삶의 문제로 접근하려는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상상하고 삶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비정규직 문제가 시발이 되었지만, 사회운동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스(Piqueteros: 카를로스 메넴 정부, 위기가 폭발하던 90년대의 아르헨티나에서, 공장과 회사를 점거하고 본질적으로 자기관리의 원리에 따라 운영하던 실업자 행동가 집단)는 이미 대안 사회운동과 참여 민주주의에 있어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에서 네그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상한 비정규직 운동과 그 네트워크는, 한국을 들끓게 하는 비정규직 문제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풀어 나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면한 위기가 단순히 비정규직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의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더 이상 자본주의 질서를 기능적이고 도구적으로 극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행, 즉 생명정치적 전망에서 연대로 이행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연대’라고 말할 때, 그것은 주체성을 공동체로 접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평등주의입니다. 유기적인 것, 무차별적인 것과 하등 관련이 없는 평등주의죠. 반대로 그것은 공통적인 네트워크 내에서 살아 있고 생산하는 개별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평등하다는 것은 실질적이고, 다중의 활동의 총체 내에서 존재하는, 평등한 가능성과 평등한 표현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생산과 자유는 네트워크에서 태어납니다. 네트워크는 언제나 개별성과 표현, 그리고 차이들의 생산의 네트워크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앞으로 도래할 시대의 종교 아닐까요?” (270쪽)
혁명적 민주주의와 공동체 네트워크로 탄생할 새로운 자유의 공간!
-네그리의 촌철살인 좌파 비판!
딱히 좌파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죄송한 비우파 정권들만 남은 지금, 사회주의는 붕괴했고 좌파는 자본주의화된 지 오래다. 그래서 네그리는 오히려 우리에게 되묻는다. 도대체 오늘날 좌파는 무엇이냐고. 좌파는 자본의 관리, 자본주의적 권력구조를 관리하는 하나의 형태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하는 네그리는 결국 말하고야 만다. “자본의 관리자로서 자신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사회주의자는 없습니다.”(본문 153쪽) 이윤추구가 없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진보’의 탈을 쓴 자본가가 되고 싶었던 좌파를 비판하는 네그리는 지금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단지 사변적인 형태로만 좌파일 뿐이라고 말한다. 제국주의적으로 벌어지는 전쟁에는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범람하는 이민자(이주 노동자)에 대해서도 쉬쉬한다. 좌파는 직업을 생애 전체 동안 갖게 될 개념으로 보고 고용의 문제와 함께 근본적으로 풀어 가고자 하기 때문에 이민자 수용 문제를 적절하게 발전시키지 못할 것이 분명할뿐더러, 고용의 문제가 체제의 역학보다 더 중요한 이상, 좌파는 이민자 노동력이 밀어닥치는 현상을 언제까지라도 두려워할 것이라는 것이다(123쪽).
“좌파의 지도자들은 공동체를 상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꼭 자본가들처럼, 몰수되는 어떤 것으로나 상상한다면 모를까요. 자본가들은……메트로폴리스를 자본의 식민지로 생각하는 것이죠.”(49쪽)
네그리가 생각하는 좌파는 이토록 무능하고 무기력하다. 프랑스에서도 노동 조직을 개선하기 위한 계약적 필요와 요구는 고용주뿐 아니라 새로운 노동력에서 제기되었는데, 그에 직면하여 좌파는 그 존재가 없었거나 심지어는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노동을 구성해야 하는 이때, 좌파는 착취의 모델을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과거의 향수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이 착취의 체제를 거부하지도 못한다. 노동 세계의 기수였던 좌파는 노동 문제는 물론이고, 정치 영역에서도 대표의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네그리가 비판하는 좌파는 바로 그런 좌파이다.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좌파, 미래를 모색하지 못하는 좌파, 그리하여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신경쇠약으로 내모는 창백한 좌파 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란은 문화의 측면에서 또 생산형식의 측면에서 탈근대성을 향해 진화하는 과정 중에 있는 큰 나라입니다. 하지만 자유가 없이는 탈근대적 생산도 없습니다. 광신적인 시아파(이들은 광신적인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흉한 괴물은 아니지요)가 이란에 구축한 장벽은 외부의 압력에 의해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그 벽은 오직 사람들의 두뇌에서 태어나는, 멈출 수 없는 충동에 의해서만 무너질 겁니다.” (230쪽)
지금 뉴스를 틀면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세계 정세에 대한 2006년도의 네그리의 전망은 2009년에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대로 나타났다. 공격적인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피곤한 민주주의를 목도하며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목격하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던 네그리, 그는 어떤 갱생의 희망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지고, 그 어떤 전복적인 투쟁과 비교해서도 중립화되어 있는 좌파에는 고개를 떨구었지만, 자본주의와 파시즘적 대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좌파와 사회주의를 넘어 대안 민주주의의 세력을 키워 온 다중만은 긍정했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는 그러한 다중과 세계에 대한 네그리의 간절한 소망이 가장 쉽고 간결하게 드러난 책이다. <제국>과 <다중>으로 이미 우리를 뒤흔들었던 네그리가 우리에게 내놓는 그의 대담록은, 혁명적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네트워크로 가능하게 될 새로운 자유의 세계에 대한 전망을 담고 있다. 슬픔은 곧잘 분노가 되지만 분노는 새로운 세계의 구성으로 자동이행하지 않는다. 행동하는 다중이 그 이행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목차
대담을 시작하며
1.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2. 모두 함께!: 메트로폴리스의 파업에서 공동체의 정치적 발견으로
3. 좌파, 평화, 비폭력: 풀리지 않은 논쟁의 핵심들
4. 시애틀: 다중의 출현
5. 치아파스와 인터넷 안에서의 정치적 작업
6. 제노바: 새로움의 현현
7. 이주자들, 혹은 노동자 국제주의의 종말
8. 이라크: 제국 내부에서의 쿠데타
9. 마드리드 공동체
10. 룰라: 운동들로 협치하기
11. 다보스: 전 지구적 자본의 공동체주의
12. 중국이 가깝다!
13. 이란: 그런데 신은 아마 죽지 않았을까요?
14. 노동절: 이상한 비정규직이 생겨나고 있다
15. 이탈리아: 평범한 변칙
대담을 마치며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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