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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2072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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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그게 내 꿈이었다.”
나는 학교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에도 무엇에도 누구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 나는 완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가장 두려웠던 건 내 두려움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아마도 그걸 찾는 데 난 젊음을 통째로 소모하고 있었다. 그러느라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도, 친구를 사귈 수도, 가족들에게 애정을 쏟거나 연애를 하거나 돈을 벌 수도 없었던 거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가 있었는데, 그건 내가 실패한 소설가라는 것이었다.
소설가가 된 것은 대학에 온 뒤 내가 얻은 유일한 성과였다. (……) 그러고 나선 아무것도 안 했다. 사실 나는 그 짧은 소설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확신했다. 그땐 내게도 야심이라는 게 있었던 것이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 글을 마음에 들어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손에 돈을 쥐여주며 격려의 박수를 쳐준 거라고 생각했다. 혁명을 일으키라고, 세상을 바꾸어놓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쓴 글은 바닷속 플랑크톤 한 마리만큼의 영향력도 없었다. 나에게 돌아온 것은 몇 푼의 돈과 지하벙커처럼 견고한 침묵뿐이었다.(13~14쪽)
독특한 개성의 젊은 작가 김사과가 두번째 장편을 선보인다. 단편 「영이」를 통해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 경쾌하고 과감한 어법과 예민한 시선을 통해 고립과 결핍의 심리를 절실하게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등단, “한국문단에서 지금껏 만나본 적 없는 충격적이고 생생한 성장담”이었던 장편소설 『미나』에 이어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 장편 『풀이 눕는다』는 한 젊은 예술가의 정신적인 성장기로 읽힌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삶을 불확실성 속으로 완전히 밀어넣을 것.
우리 자신조차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 것.”
어디에도 무엇에도 누구에도 적응하지 못한 “실패한 소설가”인 ‘나’는 하루 종일 내키는 대로 걸어다닐 뿐이다. 그렇게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할 거라는 절망 속에서 또 길을 걷던 어느 날, ‘나’는 앞서 걸어가는 ‘그’의 등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를 쫓아간다. 굽은 채 천천히 흔들리는 ‘그’의 등이 ‘나’에게 이상한 슬픔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풀’이다. ‘나’가 ‘그’를 ‘풀’이라고 호명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풀을 좋아하고 또,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여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통과한다. 시간이 멈추기보다는 마치 음악처럼 사라져버리기를 바라면서. 결국 ‘나’는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 나와 ‘풀’과 함께 살기로 한다.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혼자서 그림을 그려왔던 ‘풀’은,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하는 ‘나’ 때문에 그나마 이어오던 일도 다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만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풀’에게 영감을 받아 비로소 글을 써나간다. ‘나’와 ‘풀’은 돈보다도 둘이 함께하는 시간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이들만의 삶의 방식도 ‘나’의 알코올 중독과 ‘풀’을 독점하고자 하는 집착 때문에 오래가지 못한다. 술에 취한 ‘나’가 ‘풀’의 그림을 망쳐놓으면서 결국 이들의 관계는 파탄난다.
계절이 바뀔 때쯤 ‘나’는 ‘풀’을 다시 만난다. 하지만 ‘풀’은 어딘가 조금 이상해져 있다. 그리고…… 바로 내 눈앞에서 ‘풀’은 사라져버린다.
나는 여전히 풀을 사랑한다. 나는 그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걸. 날씨가 좋고 쥐처럼 검은 어둠이 있는, 매일 같이 춤을 출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나는 그곳으로 간다. 아니 나는 벌써 그곳으로 가고 있다. 매일매일 풀을 생각하며 조금씩 그곳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더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난 웃으며 풀을 기다릴 것이다. 춤을 추며 풀을 기다릴 것이다. 풀이 돌아올 때까지. 풀이 나에게 돌아올 때까지. 영원히 그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우리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294쪽)
“그리고 우리는 함께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모든 예술가들이 선보이는 작품들은 그 자체로 작가들이 독자/관객/청중에게 전하는 말이겠지만, 김사과의 작품들은 그 메시지가 유독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곧장 속엣말을 내뱉는 소설 속 인물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작가가 직접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풀과의 만남, 사랑, 그리고 두 번의 헤어짐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졌을 ‘나’의 방황과 성장의 이야기인 『풀이 눕는다』를 덮고 나면, 절로 김사과라는 한 작가의 성장을 기대/예감하게 된다. 불확실한 삶, 그 혼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삶을 그 불확실성 속으로 완전히 밀어넣”겠다는 ‘나’의 독백이 오히려 미더운 까닭이다.
그녀는 풀과 함께이기 때문에 단숨에 쓰레기가 되는 삶을 가속화시키고 단순한 쓰레기를 넘어서 쓰레기가 아닌 것은 아닌 삶,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의 삶에 진입할 수 있다. 그녀는 풀과 함께이기 때문에 안정된 삶에 이르는 모든 장치들을 제거하면서 바로 거기에서 “진짜 삶” “순수한 삶”을, 사랑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풀의 죽음으로 끝난다고 해서 완전히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풀’과의 사랑은 신종플루 시대의 어떤 것을 구제한다. 구제되는 것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단순히 살아가는 것을 뺀 그 나머지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그녀와 풀은 패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러나 그 시간으로부터 남겨지는 시간, 메시아적 시간 속에 신종플루 시대의 사랑의 가능성은 보존된다. 그것이 김사과가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는, 희미한, 인간쓰레기들을 위한 메시아주의이다. 권희철(문학평론가)
능글능글한 세계 속에서 부드럽게 굴러다니는 기술을 연마하기 전에 윤리부터 갖추겠노라고 혼잣말로 다짐을 하는 이 작가는, 영화 작업을 하는 또래의 나를 가끔씩 뜨끔하게 한다. 본질적인 것들이 환영받지 않는 시대에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이 아이가 인간들 사이의 괴물일지, 아니면 괴물들 사이의 인간일지 생각해볼 일이다. 남궁선(영화감독)
그게 내 꿈이었다.”
나는 학교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뿐만이 아니었다. 어디에도 무엇에도 누구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 나는 완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가장 두려웠던 건 내 두려움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아마도 그걸 찾는 데 난 젊음을 통째로 소모하고 있었다. 그러느라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도, 친구를 사귈 수도, 가족들에게 애정을 쏟거나 연애를 하거나 돈을 벌 수도 없었던 거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가 있었는데, 그건 내가 실패한 소설가라는 것이었다.
소설가가 된 것은 대학에 온 뒤 내가 얻은 유일한 성과였다. (……) 그러고 나선 아무것도 안 했다. 사실 나는 그 짧은 소설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확신했다. 그땐 내게도 야심이라는 게 있었던 것이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 글을 마음에 들어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손에 돈을 쥐여주며 격려의 박수를 쳐준 거라고 생각했다. 혁명을 일으키라고, 세상을 바꾸어놓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쓴 글은 바닷속 플랑크톤 한 마리만큼의 영향력도 없었다. 나에게 돌아온 것은 몇 푼의 돈과 지하벙커처럼 견고한 침묵뿐이었다.(13~14쪽)
독특한 개성의 젊은 작가 김사과가 두번째 장편을 선보인다. 단편 「영이」를 통해 “전통적인 소설문법에서 벗어나 경쾌하고 과감한 어법과 예민한 시선을 통해 고립과 결핍의 심리를 절실하게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등단, “한국문단에서 지금껏 만나본 적 없는 충격적이고 생생한 성장담”이었던 장편소설 『미나』에 이어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 장편 『풀이 눕는다』는 한 젊은 예술가의 정신적인 성장기로 읽힌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삶을 불확실성 속으로 완전히 밀어넣을 것.
우리 자신조차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 것.”
어디에도 무엇에도 누구에도 적응하지 못한 “실패한 소설가”인 ‘나’는 하루 종일 내키는 대로 걸어다닐 뿐이다. 그렇게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할 거라는 절망 속에서 또 길을 걷던 어느 날, ‘나’는 앞서 걸어가는 ‘그’의 등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를 쫓아간다. 굽은 채 천천히 흔들리는 ‘그’의 등이 ‘나’에게 이상한 슬픔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풀’이다. ‘나’가 ‘그’를 ‘풀’이라고 호명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풀을 좋아하고 또,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함께여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통과한다. 시간이 멈추기보다는 마치 음악처럼 사라져버리기를 바라면서. 결국 ‘나’는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 나와 ‘풀’과 함께 살기로 한다.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혼자서 그림을 그려왔던 ‘풀’은,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하는 ‘나’ 때문에 그나마 이어오던 일도 다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만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풀’에게 영감을 받아 비로소 글을 써나간다. ‘나’와 ‘풀’은 돈보다도 둘이 함께하는 시간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이들만의 삶의 방식도 ‘나’의 알코올 중독과 ‘풀’을 독점하고자 하는 집착 때문에 오래가지 못한다. 술에 취한 ‘나’가 ‘풀’의 그림을 망쳐놓으면서 결국 이들의 관계는 파탄난다.
계절이 바뀔 때쯤 ‘나’는 ‘풀’을 다시 만난다. 하지만 ‘풀’은 어딘가 조금 이상해져 있다. 그리고…… 바로 내 눈앞에서 ‘풀’은 사라져버린다.
나는 여전히 풀을 사랑한다. 나는 그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걸. 날씨가 좋고 쥐처럼 검은 어둠이 있는, 매일 같이 춤을 출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나는 그곳으로 간다. 아니 나는 벌써 그곳으로 가고 있다. 매일매일 풀을 생각하며 조금씩 그곳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더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난 웃으며 풀을 기다릴 것이다. 춤을 추며 풀을 기다릴 것이다. 풀이 돌아올 때까지. 풀이 나에게 돌아올 때까지. 영원히 그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우리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294쪽)
“그리고 우리는 함께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모든 예술가들이 선보이는 작품들은 그 자체로 작가들이 독자/관객/청중에게 전하는 말이겠지만, 김사과의 작품들은 그 메시지가 유독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곧장 속엣말을 내뱉는 소설 속 인물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작가가 직접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풀과의 만남, 사랑, 그리고 두 번의 헤어짐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졌을 ‘나’의 방황과 성장의 이야기인 『풀이 눕는다』를 덮고 나면, 절로 김사과라는 한 작가의 성장을 기대/예감하게 된다. 불확실한 삶, 그 혼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 “삶을 그 불확실성 속으로 완전히 밀어넣”겠다는 ‘나’의 독백이 오히려 미더운 까닭이다.
그녀는 풀과 함께이기 때문에 단숨에 쓰레기가 되는 삶을 가속화시키고 단순한 쓰레기를 넘어서 쓰레기가 아닌 것은 아닌 삶,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의 삶에 진입할 수 있다. 그녀는 풀과 함께이기 때문에 안정된 삶에 이르는 모든 장치들을 제거하면서 바로 거기에서 “진짜 삶” “순수한 삶”을, 사랑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풀의 죽음으로 끝난다고 해서 완전히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풀’과의 사랑은 신종플루 시대의 어떤 것을 구제한다. 구제되는 것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단순히 살아가는 것을 뺀 그 나머지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그녀와 풀은 패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러나 그 시간으로부터 남겨지는 시간, 메시아적 시간 속에 신종플루 시대의 사랑의 가능성은 보존된다. 그것이 김사과가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는, 희미한, 인간쓰레기들을 위한 메시아주의이다. 권희철(문학평론가)
능글능글한 세계 속에서 부드럽게 굴러다니는 기술을 연마하기 전에 윤리부터 갖추겠노라고 혼잣말로 다짐을 하는 이 작가는, 영화 작업을 하는 또래의 나를 가끔씩 뜨끔하게 한다. 본질적인 것들이 환영받지 않는 시대에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이 아이가 인간들 사이의 괴물일지, 아니면 괴물들 사이의 인간일지 생각해볼 일이다. 남궁선(영화감독)
목차
Part... One
Part... Two
Part... Three
Part... Four
Part... F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