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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흔히 학계에서는 중국 근대를 1840~1949년, 아편전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사이로 규정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근대란 이전의 전통이 파괴되고, 새로운 사유 체계와 사회 제도가 표면으로 떠올라 부글거리는 때다. 전통이 제공한 시험대 위에서 각종 사상 자원이 실험되며 구(舊)사상과 신(新)사상이 만나 새로운 전통뿐 아니라 전통의 의미 자체를 재형성한다. 근대 중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아편전쟁(1840)에서 무술변법(1898)까지 신(新)사상은 경학의 틀 가운데서 출현했다. 이를 이어받은 불학은 무술변법 전후 평소와 달리 세속으로 내려와 강력한 현실 변혁의 도구로 변화하며 사상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오랑캐의 장기(長技)를 배운다”는 구호가 나왔을 때 근대 무대에 오른 서학은 위세가 날로 굳세졌다. 신해혁명 시기에 이르러서, 특히 5·4신문화운동 때는 그야말로 주류가 되었고 맹주의 지위를 확보했다. 서학은 새로운 전통을 구성하는 데 가장 유력한 역량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경학→불학→서학의 사상사 흐름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급변하는 시대에 좌표를 찾으려고 온 힘을 다한 근대 중국 사상가들의 발자취를 재평가한다.
근대 중국의 사상 전통을 압축적으로 해석한다!
경학·불학·서학의 큰 흐름으로 본 근대 중국 사상사론
이 책의 제목은 ‘중국 근대 사상사’가 아니라 『근대 중국사상사 약론』이다. ‘근대’라는 사상 전통이 중국에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압축적으로 논한다는 뜻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근대란 이전의 전통이 파괴되고, 새로운 사유 체계와 사회 제도가 표면으로 떠올라 부글거리는 때다. 전통이 제공한 시험대 위에서 각종 사상 자원이 실험되며 구(舊)사상과 신(新)사상이 만나 새로운 전통뿐 아니라 전통의 의미 자체를 재형성한다. 근대 중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아편전쟁(1840)에서 무술변법(1898)까지 신(新)사상은 경학의 틀 가운데서 출현했다. 이를 이어받은 불학은 무술변법 전후 평소와 달리 세속으로 내려와 강력한 현실 변혁의 도구로 변화하며 사상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오랑캐의 장기(長技)를 배운다”는 구호가 나왔을 때 근대 무대에 오른 서학은 위세가 날로 굳세졌다. 신해혁명 시기에 이르러서, 특히 5·4신문화운동 때는 그야말로 주류가 되었고 맹주의 지위를 확보했다. 서학은 새로운 전통을 구성하는 데 가장 유력한 역량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경학→불학→서학의 사상사 흐름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급변하는 시대에 좌표를 찾으려고 온 힘을 다한 근대 중국 사상가들의 발자취를 재평가한다.
‘개혁개방’ 세대의 참신한 서술 방식
이 책의 저자 천샤오밍·단스롄·장융이는 각각 1958년, 1962년, 1966년생이다. 이 책의 전신인 『해석되는 전통』을 처음 발간한 1995년에는 홍안의 학자들이었다. 1970년대 리쩌허우가 1950~1960년대에 인물 중심으로 연구한 논문을 토대로 『중국 근대 사상사론』(한국어판은 2005년 출간)을 출판할 때와는 시대도, 사회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리쩌허우(李澤厚)가 역사적 사실 소개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 시대의 한계를 보였다면, ‘개혁개방’ 이후에 성장한 젊은 학자들은 좀더 보편적이고도 세련된 관점 위에서 자유로운 서술 방식을 구사한다. 근대 중국 사상사는 선·진 시대, 양한과 위·진·남북조, 송명 이학과 청학 등 5000년 중국 사상의 구전통(유학)과 질풍노도의 시대 속에 흥기한 이단(불학)과 외래 사상(서학) 등이 어우러진 큰 강물이다. 저자들은 이 거대한 물줄기를 시대별, 사상별 키워드로 엮어 사상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한다. 서술 자체도 탈이데올로기적, 정확히 말하면 탈-맑스주의적이다. 한편으론 비판 이론의 영향도 엿보인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총체적으로 재구성되는 사상 전통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근대 중국의 ‘사유’가 실제로 사회과학·철학 면에서 거둔 어떤 이론적 성취를 심도 깊게 통찰해 낸다.
이 책은 아시아의 눈으로 과거·현재·미래의 쟁점들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아이아 총서’(Agendas in Asia)의 둘째 권이다. 과거 중국인들의 사유, 그 사유를 통해 급변하는 현실과 대결했던 다양한 움직임을 포착함으로써 현대 중국을 만드는 데 사상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확인시켜 주는 이 책은 사유 전통에 대한 연구가 척박한 한국 학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경학: 전통 사회의 붕괴 속에 새로움을 얻다
고대 경서(육경, 사서 등)를 해석하는 학문인 경학은 전통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전도체다. 경의 ‘원형’(역사적 문헌)과 나중에 획득한 성질(합법성의 근거)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때문에, 명분을 바로 세우는 것, 곧 ‘정명’(正名)을 본질로 하는 경학은 고문, 금문 및 송학(宋學)이 각각 대표하는 정치(경세), 고증(역사), 철학(의리)의 세 가지 해석 방식으로 논리적으로 연장됐다. 청대에 부활한 경학의 복고적 경향은 그것이 전통 사회와 마찬가지로 생사의 기로에 접어들었음을 보여 준다.
복고운동의 끝자락쯤 등장한 캉유웨이(康有爲, 1853~1927)는 금문경학의 전통 위에서 고전 경전을 새로이 해석함으로써 제도를 개혁하려 했다[탁고개제托古改制]. 그는 또한 서구 사상을 접목해 사회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한 합법성(legitimacy)의 재건을 시도했다. 하지만 급격한 역사 변동 가운데 캉유웨이의 노력은 전통의 부흥을 촉진하기는커녕 오히려 경학의 종결을 앞당겼다. 변법자강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된 그의 유신 경학과 동시에 잉태된 대동세계라는 이상은 현실을 초월하려는 사상적 시도로서 결코 오지 않을 허구적 미래의 긍정이 아니라 전통과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부정에 그 가치가 있었다.
캉유웨이의 경세 수단이 금문경학이었다면, 장타이옌(章太炎, 1868~1936)은 고문경학에서 경세의 도를 찾고자 했다. 그는 캉유웨이의 탁고개제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역사 의식을 선보인다. 경전 내용을 진리가 아니라 역사로 간주한 그는 소학[小學; 전통 문자학]과 사학(史學)부터 제자학까지 다방면에서 확고한 업적을 이룬 대학자였다. 그는 역사이성을 이야기하지 않고 역사 영역에서 경험이성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의 경전 해석은 현대 철학이 아니라 현대 사학으로 발전했다. 장타이옌의 경세 정신은 만주족 반대와 한족의 광복을 제창하는 동시에 유럽화 사조에 반대했다. 그의 이러한 민족주의는 학술 전통을 보존하고, 연구의 열기를 키우는 데는 도움을 주었지만, 한편으론 국수주의라는 한계를 보였다.
청말 민초 근대화 과정에서 과거제와 독경[경전 학습]이 폐지되자 경학은 정치 기능을 상실했다. 사회 개입 기능에서 물러난 대신 고증과 의리 두 측면에서 경학의 학술적 가치는 더욱 커졌다. 경학과 서구 사상을 결합한 현대 신유가(량수밍, 슝스리)의 출현은 경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포스트경학 시대로 이어졌다. 중국 고대사에 관한 강한 회의와 역사적 사건의 진위 검증을 특징으로 하는 고사변운동은 여기에서 확장된 현대 학술 유파이다. 고증학 방면에서는 한학의 변위[辯爲; 고전의 진위 변별]를 과제로 받아들였고, 의리 방면에서는 송학의 의리를 기치로 다시 내걸었다. 둘은 전통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취했지만 모두 나름의 성과를 통해서 사상사에서 한 자리를 얻었다. 제자학이나 경학과 비교해서 말하면 포스트경학 시대는 형식상으로는 서학의 시대이고 정신상으로는 이성의 시대였다.
불학: 부정 정신으로 일으킨 변혁의 폭풍
불학은 본래 외래 문화다. 하지만 도래한 지 이미 2000년, 서구 사상에 빗대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전통의 큰 부분이다. 그렇지만 중국 사상사에서 불교는 내내 정통이 아니라 이단이자 주변이었다. 한나라 때 동중서 이후 유학은 정통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불교를 공격했다. 윤리 면에서 보자면 불학의 반세속 관념은 정통 유학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무력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 선종(禪宗)과 심학(心學)의 조우는 정통 유학을 부식하기도 했다. 근대에 접어들어 전통이라는 틀이 동요하자 유교와 불교의 긴장 관계는 곧 파열했다. 낮은 포복 중이던 이단은 정통을 공격할 기회를 포착했다. 어지러운 시대는 불학에게 출세간(出世間; 탈세속)이 아니라 입세간(入世間; 세속 지향)을 지향하고 서학과 접목할 것을 요구했다. 량치차오는 불학과 칸트의 철학을 비교하여, 근대 과학의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하고 인생관 문제에서 근대에 불학이 맡을 역할을 깨닫게 했다.
탄쓰퉁(譚嗣同, 1866~1898)의 ‘응용불학’이 그 대표다. 중생평등을 인류평등에 결합시켜 심력(心力)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세속 초월적 숙명론을 중생 계도의 사명감으로 바꿔 놓았고 군신·부자 관계에 기반한 유학의 강상윤리를 비판하였다. 탄쓰퉁은 캉유웨이보다도 거침 없는 언설로 변법을 주도했고, 서태후의 쿠데타로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에도 기꺼이 혁명의 제단에 목을 바쳤다.
고문경학자 장타이옌은 불학에서도 업적을 이룬다. 그는 오직[唯] ‘앎’(識)이 있을 있을 뿐이라며 본체(존재, 신)를 기각하는 불교 유식론(唯識論)을 부각시키며, 탄쓰퉁에 비해 훨씬 완성된 (무신론) 체계를 구성했다. 그의 의도는 “종교를 이용해서 신심을 일으켜” 사회를 변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탄쓰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불학을 철저하게 수용한 결과 ‘오무론’[五無論; 무정부, 무취락, 무인류, 무중생, 무세계]을 제시하고서 철저한 현실 부정으로 향했다. 이러한 무신교 이론은 그만큼 큰 현실 비판력을 보였지만, 동시에 불학의 입세 지향도 곧 소멸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제 정치 체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학이 근대 변혁의 사상적 장애였다면, 불학은 중국 사회의 정체와 낙후가 품고 있던 비관적인 정서를 주체의 자각을 통한 책임과 정감의 체험으로 내면화해 혁명의 신념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영혼으로의 귀향과 생명 중심의 불학 사상은 본래 공리와 물질을 중시하는 근대 정신과 전혀 상반되었다. 불학의 허무주의는 중국의 특수한 조건 아래서 현실 세계를 개조할 만한 가치 근거를 제공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유교에서 불교로 들어선 슝스리(熊十力, 1884~1968) 역시 불학이 현실세계를 개조할 만한 가치 근거를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유교로 돌아왔다.
서학: 과학주의의 힘으로 전통이 되다.
서학(西學)은 중국에서 이질적 문화다. 17세기 중국은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지나친 요구(제사 금지 등)에 대한 옹정제의 거부로 서교(西敎; 서양 종교)는 축출되었고, 부분적으로 과학 지식(서학)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백년 뒤 아편전쟁과 뒤이은 청일전쟁의 연패로, 외세 침략의 위기를 맞은 중국인들은 부국강병에 열을 올렸고, 이런 현실은 다시 서학의 유입을 요구했다. 서학이 다시 중국에 들어왔을 때, 그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다. 서구의 일신교 전통에서 생겨난 일련의 이원론적 문화, 예를 들어 천국과 인간, 본체와 현상, 이성과 신앙, 지식과 가치 등등은 인륜 질서를 중심으로 고도로 정합성을 갖춘 채 이데올로기로 기능해 온 중국 문화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결국 이런 차이는 서학에 대한 근대 중국인의 특수한 태도와 처리 방식(동도서기, 중체서용 등)을 규범화했다. 캉유웨이는 서학을 중국에 끌어들인 대표 인물이었지만, 무술변법에서 5·4신문화운동 때까지 줄곧 두 가지 경향을 가지고 서학을 이해하고 취사선택했다.
옌푸(嚴復, 1851~1921)와 후스(胡適, 1891~1962)는 과학 정신과 과학적 방법론을 선전해서 광범하게 유행시켰다. 과학 만능론은 단순한 지식 차원을 넘어서 중국인의 관념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되었다. 근대 과학은 중국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단번에 부수었고, 심지어 사회 변혁 이론이 되었다.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사회주의자가 되기 이전의] 천두슈(陳獨秀, 1880~1942)는 오히려 민주, 개성 등의 구호로 민지(民智)의 계발[계몽운동]을 시도했다.
시간이 흐르자, 서학을 받아들인 지식인들 사이에도 분화가 일어났다. 옌푸와 후스는 주로 영미 경험론의 전통을 계승했고 량치차오와 천두슈, 루쉰은 유럽 대륙의 낭만주의 기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루쉰은 량치차오나 천두슈가 말하는 근대적 계몽 자체를 초월했다. 그는 전통의 비루함도 알았지만 근대적 계몽의 기만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인류 정신의 보편적 인성을 탐사했다. 반(反)전통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과학주의자는 신도덕의 옹호자와 동맹을 맺었지만, 전통이 이론적인 면에서 파괴되고 새로운 정신 신념이 건립될 때, 느슨한 연맹은 와해됐다.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는 루쉰하고는 다른 맥락에서 근대를 초월했다. 그는 정치가 학술이나 철학을 압도하여 그것들을 왜곡하는 것에 반대했다. 1920년대에 벌어진 과현(科玄)논쟁(과학과 인생관 논쟁)은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이나 가치의 문제를 과학이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뒤엉켜 싸웠지만 이 논쟁을 실제 가격한 것은 맑스주의였다. 천두슈 등은 진정한 과학은 바로 유물사관이라고 선언하고 과학파와 현학파 양쪽 모두를 공격했다. 이데올로기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자유주의, 맑스주의 그리고 신전통주의(주요하게는 현대 신유가) 세 유파를 낳았다. 1930년대 전통 본위의 보수주의는 현대 신유학이라는 옷을 입고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후스가 대표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자와 맑스주의자의 협공을 받아서 거의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 5·4신문화운동 끝 무렵 한 줌의 추종자로 출발한 맑스주의는 1920년대 말이 되자 러시아혁명의 성공에 힘입어 중국 사상계를 주도했다. 맑스주의는 빈곤과 독재 속에서 허우적대던 중국 인민에게 해방의 무기를 선물했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근대 중국 사상사의 최종 답안은 결코 아니다. 그저 마지막 주인공이었을 뿐이다.
사론으로 읽는 현대 중국 사상의 기원
1980년대 중국에서는 ‘전통에 대한 열기’가 한 차례 지나갔다. 열기가 식어 버리자, 별다른 성과도 없이 토론은 중단되었다. 저자들은 그 까닭을 전통 일반과 특정한 전통을 뒤섞어서 이야기한 데서 찾는다. 근대라는 전통 일반을 구체화한 게 아니라 특정한 전통을 추상화해 버렸다고. “우리가 부수거나, 아니면 보호하고 혹은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저 전통, 즉 객관적 존재로 취급하고 설계를 시도하는 저 대상은 사실 전통 가운데 어떤 층위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 일반과 특정한 전통을 구분하고, 오히려 전통에 대한 구체적 연구의 특정한 대상으로서 근대를 연구한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묘사가 아니라 해석에 있다. 저자들 스스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상세하고 완전한 사상사 저술이 아니다. 504쪽에 달하는 이 책에 ‘약론’(outline)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그 서술 방식 때문이다. 저자들이 보여 주고 싶은 것은 ‘근대’라는 ‘전통’의 형성이다. 이 ‘전통’은 바로 현대 중국 문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상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제상 이 책은 편년사 혹은 사상가 평전이라기보다는 사론(史論)에 훨씬 가깝다. 저자들은 강물[長河]이라는 독특한 도식을 이용해 이를 설명한다. 강바닥은 물줄기의 방향을 결정짓지만, 때로는 강물이 강바닥의 모양을 바꾼다. 강바닥과 강물, 즉 전통의 형식과 내용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을 파악해 보면, 이 거대한 물줄기의 역동성이 생생히 드러난다. 여러 원류를 지닌 근대 사상 전통도 하나의 강물(과정)으로 보면, 완전한 전통주의도, 철저한 반전통주의도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서방화나 과학주의의 물길이 거셌지만, 전통이라는 틀의 작용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근대 사상이 현대로 넘어온 이후에도 항시 급격한 변동 가운데 있다. 그리하여 약론(略論)은 대론(大論)이 된다. 이러한 참신한 알레고리 덕분에 우리는 근·현대 중국 사상을 이해하는 데 또 하나의 방법(또한 차원)을 얻었다.
근대 중국의 사상 전통을 압축적으로 해석한다!
경학·불학·서학의 큰 흐름으로 본 근대 중국 사상사론
이 책의 제목은 ‘중국 근대 사상사’가 아니라 『근대 중국사상사 약론』이다. ‘근대’라는 사상 전통이 중국에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압축적으로 논한다는 뜻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그렇듯 근대란 이전의 전통이 파괴되고, 새로운 사유 체계와 사회 제도가 표면으로 떠올라 부글거리는 때다. 전통이 제공한 시험대 위에서 각종 사상 자원이 실험되며 구(舊)사상과 신(新)사상이 만나 새로운 전통뿐 아니라 전통의 의미 자체를 재형성한다. 근대 중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아편전쟁(1840)에서 무술변법(1898)까지 신(新)사상은 경학의 틀 가운데서 출현했다. 이를 이어받은 불학은 무술변법 전후 평소와 달리 세속으로 내려와 강력한 현실 변혁의 도구로 변화하며 사상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오랑캐의 장기(長技)를 배운다”는 구호가 나왔을 때 근대 무대에 오른 서학은 위세가 날로 굳세졌다. 신해혁명 시기에 이르러서, 특히 5·4신문화운동 때는 그야말로 주류가 되었고 맹주의 지위를 확보했다. 서학은 새로운 전통을 구성하는 데 가장 유력한 역량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경학→불학→서학의 사상사 흐름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급변하는 시대에 좌표를 찾으려고 온 힘을 다한 근대 중국 사상가들의 발자취를 재평가한다.
‘개혁개방’ 세대의 참신한 서술 방식
이 책의 저자 천샤오밍·단스롄·장융이는 각각 1958년, 1962년, 1966년생이다. 이 책의 전신인 『해석되는 전통』을 처음 발간한 1995년에는 홍안의 학자들이었다. 1970년대 리쩌허우가 1950~1960년대에 인물 중심으로 연구한 논문을 토대로 『중국 근대 사상사론』(한국어판은 2005년 출간)을 출판할 때와는 시대도, 사회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리쩌허우(李澤厚)가 역사적 사실 소개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 시대의 한계를 보였다면, ‘개혁개방’ 이후에 성장한 젊은 학자들은 좀더 보편적이고도 세련된 관점 위에서 자유로운 서술 방식을 구사한다. 근대 중국 사상사는 선·진 시대, 양한과 위·진·남북조, 송명 이학과 청학 등 5000년 중국 사상의 구전통(유학)과 질풍노도의 시대 속에 흥기한 이단(불학)과 외래 사상(서학) 등이 어우러진 큰 강물이다. 저자들은 이 거대한 물줄기를 시대별, 사상별 키워드로 엮어 사상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을 정립한다. 서술 자체도 탈이데올로기적, 정확히 말하면 탈-맑스주의적이다. 한편으론 비판 이론의 영향도 엿보인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총체적으로 재구성되는 사상 전통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근대 중국의 ‘사유’가 실제로 사회과학·철학 면에서 거둔 어떤 이론적 성취를 심도 깊게 통찰해 낸다.
이 책은 아시아의 눈으로 과거·현재·미래의 쟁점들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아이아 총서’(Agendas in Asia)의 둘째 권이다. 과거 중국인들의 사유, 그 사유를 통해 급변하는 현실과 대결했던 다양한 움직임을 포착함으로써 현대 중국을 만드는 데 사상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확인시켜 주는 이 책은 사유 전통에 대한 연구가 척박한 한국 학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경학: 전통 사회의 붕괴 속에 새로움을 얻다
고대 경서(육경, 사서 등)를 해석하는 학문인 경학은 전통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전도체다. 경의 ‘원형’(역사적 문헌)과 나중에 획득한 성질(합법성의 근거)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때문에, 명분을 바로 세우는 것, 곧 ‘정명’(正名)을 본질로 하는 경학은 고문, 금문 및 송학(宋學)이 각각 대표하는 정치(경세), 고증(역사), 철학(의리)의 세 가지 해석 방식으로 논리적으로 연장됐다. 청대에 부활한 경학의 복고적 경향은 그것이 전통 사회와 마찬가지로 생사의 기로에 접어들었음을 보여 준다.
복고운동의 끝자락쯤 등장한 캉유웨이(康有爲, 1853~1927)는 금문경학의 전통 위에서 고전 경전을 새로이 해석함으로써 제도를 개혁하려 했다[탁고개제托古改制]. 그는 또한 서구 사상을 접목해 사회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한 합법성(legitimacy)의 재건을 시도했다. 하지만 급격한 역사 변동 가운데 캉유웨이의 노력은 전통의 부흥을 촉진하기는커녕 오히려 경학의 종결을 앞당겼다. 변법자강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된 그의 유신 경학과 동시에 잉태된 대동세계라는 이상은 현실을 초월하려는 사상적 시도로서 결코 오지 않을 허구적 미래의 긍정이 아니라 전통과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부정에 그 가치가 있었다.
캉유웨이의 경세 수단이 금문경학이었다면, 장타이옌(章太炎, 1868~1936)은 고문경학에서 경세의 도를 찾고자 했다. 그는 캉유웨이의 탁고개제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역사 의식을 선보인다. 경전 내용을 진리가 아니라 역사로 간주한 그는 소학[小學; 전통 문자학]과 사학(史學)부터 제자학까지 다방면에서 확고한 업적을 이룬 대학자였다. 그는 역사이성을 이야기하지 않고 역사 영역에서 경험이성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의 경전 해석은 현대 철학이 아니라 현대 사학으로 발전했다. 장타이옌의 경세 정신은 만주족 반대와 한족의 광복을 제창하는 동시에 유럽화 사조에 반대했다. 그의 이러한 민족주의는 학술 전통을 보존하고, 연구의 열기를 키우는 데는 도움을 주었지만, 한편으론 국수주의라는 한계를 보였다.
청말 민초 근대화 과정에서 과거제와 독경[경전 학습]이 폐지되자 경학은 정치 기능을 상실했다. 사회 개입 기능에서 물러난 대신 고증과 의리 두 측면에서 경학의 학술적 가치는 더욱 커졌다. 경학과 서구 사상을 결합한 현대 신유가(량수밍, 슝스리)의 출현은 경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포스트경학 시대로 이어졌다. 중국 고대사에 관한 강한 회의와 역사적 사건의 진위 검증을 특징으로 하는 고사변운동은 여기에서 확장된 현대 학술 유파이다. 고증학 방면에서는 한학의 변위[辯爲; 고전의 진위 변별]를 과제로 받아들였고, 의리 방면에서는 송학의 의리를 기치로 다시 내걸었다. 둘은 전통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취했지만 모두 나름의 성과를 통해서 사상사에서 한 자리를 얻었다. 제자학이나 경학과 비교해서 말하면 포스트경학 시대는 형식상으로는 서학의 시대이고 정신상으로는 이성의 시대였다.
불학: 부정 정신으로 일으킨 변혁의 폭풍
불학은 본래 외래 문화다. 하지만 도래한 지 이미 2000년, 서구 사상에 빗대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전통의 큰 부분이다. 그렇지만 중국 사상사에서 불교는 내내 정통이 아니라 이단이자 주변이었다. 한나라 때 동중서 이후 유학은 정통이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불교를 공격했다. 윤리 면에서 보자면 불학의 반세속 관념은 정통 유학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로 무력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 선종(禪宗)과 심학(心學)의 조우는 정통 유학을 부식하기도 했다. 근대에 접어들어 전통이라는 틀이 동요하자 유교와 불교의 긴장 관계는 곧 파열했다. 낮은 포복 중이던 이단은 정통을 공격할 기회를 포착했다. 어지러운 시대는 불학에게 출세간(出世間; 탈세속)이 아니라 입세간(入世間; 세속 지향)을 지향하고 서학과 접목할 것을 요구했다. 량치차오는 불학과 칸트의 철학을 비교하여, 근대 과학의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하고 인생관 문제에서 근대에 불학이 맡을 역할을 깨닫게 했다.
탄쓰퉁(譚嗣同, 1866~1898)의 ‘응용불학’이 그 대표다. 중생평등을 인류평등에 결합시켜 심력(心力)으로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세속 초월적 숙명론을 중생 계도의 사명감으로 바꿔 놓았고 군신·부자 관계에 기반한 유학의 강상윤리를 비판하였다. 탄쓰퉁은 캉유웨이보다도 거침 없는 언설로 변법을 주도했고, 서태후의 쿠데타로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에도 기꺼이 혁명의 제단에 목을 바쳤다.
고문경학자 장타이옌은 불학에서도 업적을 이룬다. 그는 오직[唯] ‘앎’(識)이 있을 있을 뿐이라며 본체(존재, 신)를 기각하는 불교 유식론(唯識論)을 부각시키며, 탄쓰퉁에 비해 훨씬 완성된 (무신론) 체계를 구성했다. 그의 의도는 “종교를 이용해서 신심을 일으켜” 사회를 변혁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탄쓰퉁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불학을 철저하게 수용한 결과 ‘오무론’[五無論; 무정부, 무취락, 무인류, 무중생, 무세계]을 제시하고서 철저한 현실 부정으로 향했다. 이러한 무신교 이론은 그만큼 큰 현실 비판력을 보였지만, 동시에 불학의 입세 지향도 곧 소멸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제 정치 체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학이 근대 변혁의 사상적 장애였다면, 불학은 중국 사회의 정체와 낙후가 품고 있던 비관적인 정서를 주체의 자각을 통한 책임과 정감의 체험으로 내면화해 혁명의 신념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영혼으로의 귀향과 생명 중심의 불학 사상은 본래 공리와 물질을 중시하는 근대 정신과 전혀 상반되었다. 불학의 허무주의는 중국의 특수한 조건 아래서 현실 세계를 개조할 만한 가치 근거를 제공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유교에서 불교로 들어선 슝스리(熊十力, 1884~1968) 역시 불학이 현실세계를 개조할 만한 가치 근거를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유교로 돌아왔다.
서학: 과학주의의 힘으로 전통이 되다.
서학(西學)은 중국에서 이질적 문화다. 17세기 중국은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지나친 요구(제사 금지 등)에 대한 옹정제의 거부로 서교(西敎; 서양 종교)는 축출되었고, 부분적으로 과학 지식(서학)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백년 뒤 아편전쟁과 뒤이은 청일전쟁의 연패로, 외세 침략의 위기를 맞은 중국인들은 부국강병에 열을 올렸고, 이런 현실은 다시 서학의 유입을 요구했다. 서학이 다시 중국에 들어왔을 때, 그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다. 서구의 일신교 전통에서 생겨난 일련의 이원론적 문화, 예를 들어 천국과 인간, 본체와 현상, 이성과 신앙, 지식과 가치 등등은 인륜 질서를 중심으로 고도로 정합성을 갖춘 채 이데올로기로 기능해 온 중국 문화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결국 이런 차이는 서학에 대한 근대 중국인의 특수한 태도와 처리 방식(동도서기, 중체서용 등)을 규범화했다. 캉유웨이는 서학을 중국에 끌어들인 대표 인물이었지만, 무술변법에서 5·4신문화운동 때까지 줄곧 두 가지 경향을 가지고 서학을 이해하고 취사선택했다.
옌푸(嚴復, 1851~1921)와 후스(胡適, 1891~1962)는 과학 정신과 과학적 방법론을 선전해서 광범하게 유행시켰다. 과학 만능론은 단순한 지식 차원을 넘어서 중국인의 관념을 지배하는 세계관이 되었다. 근대 과학은 중국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단번에 부수었고, 심지어 사회 변혁 이론이 되었다.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사회주의자가 되기 이전의] 천두슈(陳獨秀, 1880~1942)는 오히려 민주, 개성 등의 구호로 민지(民智)의 계발[계몽운동]을 시도했다.
시간이 흐르자, 서학을 받아들인 지식인들 사이에도 분화가 일어났다. 옌푸와 후스는 주로 영미 경험론의 전통을 계승했고 량치차오와 천두슈, 루쉰은 유럽 대륙의 낭만주의 기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루쉰은 량치차오나 천두슈가 말하는 근대적 계몽 자체를 초월했다. 그는 전통의 비루함도 알았지만 근대적 계몽의 기만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인류 정신의 보편적 인성을 탐사했다. 반(反)전통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과학주의자는 신도덕의 옹호자와 동맹을 맺었지만, 전통이 이론적인 면에서 파괴되고 새로운 정신 신념이 건립될 때, 느슨한 연맹은 와해됐다.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는 루쉰하고는 다른 맥락에서 근대를 초월했다. 그는 정치가 학술이나 철학을 압도하여 그것들을 왜곡하는 것에 반대했다. 1920년대에 벌어진 과현(科玄)논쟁(과학과 인생관 논쟁)은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이나 가치의 문제를 과학이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뒤엉켜 싸웠지만 이 논쟁을 실제 가격한 것은 맑스주의였다. 천두슈 등은 진정한 과학은 바로 유물사관이라고 선언하고 과학파와 현학파 양쪽 모두를 공격했다. 이데올로기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은 자유주의, 맑스주의 그리고 신전통주의(주요하게는 현대 신유가) 세 유파를 낳았다. 1930년대 전통 본위의 보수주의는 현대 신유학이라는 옷을 입고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후스가 대표한 자유주의는 보수주의자와 맑스주의자의 협공을 받아서 거의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 5·4신문화운동 끝 무렵 한 줌의 추종자로 출발한 맑스주의는 1920년대 말이 되자 러시아혁명의 성공에 힘입어 중국 사상계를 주도했다. 맑스주의는 빈곤과 독재 속에서 허우적대던 중국 인민에게 해방의 무기를 선물했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근대 중국 사상사의 최종 답안은 결코 아니다. 그저 마지막 주인공이었을 뿐이다.
사론으로 읽는 현대 중국 사상의 기원
1980년대 중국에서는 ‘전통에 대한 열기’가 한 차례 지나갔다. 열기가 식어 버리자, 별다른 성과도 없이 토론은 중단되었다. 저자들은 그 까닭을 전통 일반과 특정한 전통을 뒤섞어서 이야기한 데서 찾는다. 근대라는 전통 일반을 구체화한 게 아니라 특정한 전통을 추상화해 버렸다고. “우리가 부수거나, 아니면 보호하고 혹은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저 전통, 즉 객관적 존재로 취급하고 설계를 시도하는 저 대상은 사실 전통 가운데 어떤 층위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통 일반과 특정한 전통을 구분하고, 오히려 전통에 대한 구체적 연구의 특정한 대상으로서 근대를 연구한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묘사가 아니라 해석에 있다. 저자들 스스로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상세하고 완전한 사상사 저술이 아니다. 504쪽에 달하는 이 책에 ‘약론’(outline)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그 서술 방식 때문이다. 저자들이 보여 주고 싶은 것은 ‘근대’라는 ‘전통’의 형성이다. 이 ‘전통’은 바로 현대 중국 문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상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제상 이 책은 편년사 혹은 사상가 평전이라기보다는 사론(史論)에 훨씬 가깝다. 저자들은 강물[長河]이라는 독특한 도식을 이용해 이를 설명한다. 강바닥은 물줄기의 방향을 결정짓지만, 때로는 강물이 강바닥의 모양을 바꾼다. 강바닥과 강물, 즉 전통의 형식과 내용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을 파악해 보면, 이 거대한 물줄기의 역동성이 생생히 드러난다. 여러 원류를 지닌 근대 사상 전통도 하나의 강물(과정)으로 보면, 완전한 전통주의도, 철저한 반전통주의도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서방화나 과학주의의 물길이 거셌지만, 전통이라는 틀의 작용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근대 사상이 현대로 넘어온 이후에도 항시 급격한 변동 가운데 있다. 그리하여 약론(略論)은 대론(大論)이 된다. 이러한 참신한 알레고리 덕분에 우리는 근·현대 중국 사상을 이해하는 데 또 하나의 방법(또한 차원)을 얻었다.
목차
옮긴이 서문
서론_ 해석되는 전통
1부 | 고대 경서를 새롭게 해석하다
1장 정치 문화로서의 경학
2장 유신 경학과 유토피아
3장 역사, 이성 그리고 국수
4장 포스트경학 시대를 향하여
2부 | 불법이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5장 전통 틀 속의 불학
6장 『인학』과 응용불학
7장 무신교의 건립
8장 불학에서 유학으로
3부 | 서쪽의 파도가 동쪽을 뒤덮다
9장 서학: 가치의 전환
10장 세계관으로서의 과학
11장 정치와 도덕의 계몽
12장 신념 체계의 분열
13장 출구는 어디인가
후주
인명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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