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모리스) 블랑쇼 선집 9
정치평론: 1953~1993
- 대등서명
- Ecrits politiques
- 개인저자
- 모리스 블랑쇼 지음 ; 고재정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 그린비, 2009
- 형태사항
- 255 p. ; 22 cm
- 총서사항
- (모리스) 블랑쇼 선집
- ISBN
- 9788976823229 9788976823205(세트)
- 청구기호
- 340.4 블231ㅈ
- 일반주기
- 원저자명: Maurice Blanchot
- 서지주기
- \"모리스 블랑쇼 연보\" 및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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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2133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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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00012133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정치평론 1953~1993』(?crits politiques 1953~1993, Gallimard, 2008)은 2009년 2월 출범한 ‘모리스 블랑쇼 선집’의 두번째 책이다. 세계대전 직후의 전후 서구 사회의 발전과 이어진 68혁명이라는 국면에서 블랑쇼는 정치를 어떻게 본질적으로 사유할 것인지, 꾸준한 발언을 토해 냈다. 그의 언어는 복잡한 이론적인 논의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보다는 우리 각자의 삶에 직접 호소한다. 스스로 극우 저널리스트에서 좌파 사상가로 변신했던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사유는 학술 담론을 넘어서서 여러 삶의 양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블랑쇼의 사유는 또한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적 틀을 거부하고, 강력한 탈?프로그래밍, 탈?코드화의 힘을 발휘한다. 블랑쇼의 언어 앞에서 단순히 통계학상의 인구로서 파악되고 통치 대상으로 취급될 뿐인 국민과, 역사의 진보를 담당한 유일한 주체라는 단순화된 계급의 이미지는 깨어진다. 우리를 에워싼 시장전체주의와 경제 유일사상에 난 그 균열은 이어 수없이 작은 파편들로 쪼개진다. 그리고 남은 것은 우리 각자의 욕망과 가치가 살아 있는 수많은 단편들, 그 단편들로 이루어진 공동의 목소리이다. 『정치평론』은 그 목소리 안에서 열림과 소통의 열망이 바로 정치의 본질임을 일깨운다.
정치의 본질은 통치가 아닌 소통이다!
-전체주의의 야만에 저항하는 공동의 익명적 목소리
“따라서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을 정의(正義)의 로고스와 결부시키지 않고 정의해야만 한다. 무엇으로 ‘휴머니즘’을 정의해야 하는가? ‘휴머니즘’을 언어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절규로, 궁핍의 절규 또는 이의제기의 절규, 단순한 침묵도 아니고 단어들로 표현되지도 않는 절규로, 비천한 절규, 또는 엄밀히 말해, 벽에 그려진 낙서로.”_모리스 블랑쇼.
정치란 그저 잘 먹고 살게 해주는 문제가 아니다. 정치가들은 인간을 그저 경제학적인 동물로 환원하면서, 당신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환상적인 약속을 남발한다. 그 대신 얌전히 살라는 억압과 통제와 함께. 합리성의 외양을 띤 그 약속은 사실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언제나 안정과 통합만을 추구하는 통치일 뿐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타협이나 묵인이 불가능한 순간이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그 순간 최대한의 익명적인 움직임에 의해, 본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에게서 시작되는 매우 빈약한 움직임으로부터 단호한 거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러한 순간을 한국 사회에서도 여러 번 마주쳤고, 그때마다 대규모 군중의 형체로서 본질적인 변화의 열망을 표현해 왔다.
『정치평론 1953~1993』(?crits politiques 1953~1993, Gallimard, 2008, 이하 『정치평론』)은 지난 2월 출범한 ‘모리스 블랑쇼 선집’의 두번째 책(프랑스어판 출간년도를 따라 매긴 총서 번호로는 9번)이다. 세계대전 직후의 전후 서구 사회의 발전과 이어진 68혁명이라는 국면에서 블랑쇼는 정치를 어떻게 본질적으로 사유할 것인지, 꾸준한 발언을 토해 냈다. 그의 언어는 복잡한 이론적인 논의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보다는 우리 각자의 삶에 직접 호소한다. 스스로 극우 저널리스트에서 좌파 사상가로 변신했던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사유는 학술 담론을 넘어서서 여러 삶의 양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블랑쇼의 사유는 또한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적 틀을 거부하고, 강력한 탈?프로그래밍, 탈?코드화의 힘을 발휘한다. 블랑쇼의 언어 앞에서 단순히 통계학상의 인구로서 파악되고 통치 대상으로 취급될 뿐인 국민과, 역사의 진보를 담당한 유일한 주체라는 단순화된 계급의 이미지는 깨어진다. 우리를 에워싼 시장전체주의와 경제 유일사상에 난 그 균열은 이어 수없이 작은 파편들로 쪼개진다. 그리고 남은 것은 우리 각자의 욕망과 가치가 살아 있는 수많은 단편들, 그 단편들로 이루어진 공동의 목소리이다. 『정치평론』은 그 목소리 안에서 열림과 소통의 열망이 바로 정치의 본질임을 일깨운다.
‘파시즘 이후의 파시즘’에 대한 거부
『정치평론』은 문학적 평가 뒤에 가려졌던 블랑쇼의 정치적 열정을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문학?정치?철학적 관심이 합류하는 한 지점으로서 타자 혹은 소통의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평론』에 실린 글들은 시기적으로 1958년부터 1968년 사이, 그리고 1987년 전후로 쓰인 것으로, 잡지 『7월 14일』(1~3호 발행, 1958), 기획에만 머문 ‘국제잡지’(1960~1964), 68혁명 시기에 1호만 나온 『위원회』 등에 게재된 글을 모은 것이다.
프랑스 현대사의 ‘태풍의 눈’
이 책에 실린 글이 집중적으로 쓰인 시기들은 유럽인들에게 근대성의 폐해가 정점에 이르렀던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문제, 즉 군부의 정치권력화, 식민지 독립, 나치 전력 청산, ‘68’로 규정되는 전후 세대의 ‘혁명’이 모두 터져 나온 때이다. 『정치평론』에는 1950년대 후반의 프랑스와 알제리,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1961년의 독일, 1968년 5월 학생 운동이 뒤흔든 파리, 같은 해에 일어난 ‘프라하의 봄’과 뒤이은 소련군 탱크의 프라하 진주 등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남다른 통찰이 있다. 전후 프랑스 최고의 선언문이라는 1960년의 「알제리전쟁에서의 불복종의 권리선언」(39~44쪽)이 『정치평론』에 실려 있으며, 68혁명 당시 학생들이 점거한 소르본 대학가에 뿌려진 전단들, ‘학생?작가 행동위원회’의 회보 등도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프랑스 현대사에 몰아친 두 개의 대형 태풍인 알제리전쟁과 68혁명, 그 태풍의 눈이 이 작은 책 속에 들어 있는 셈이다. 국가권력과 제도의 폭력성, 혁명과 법, 혁명과 문학의 관계가 이 ‘태풍의 눈’이 주시하는 지점이다.
거부: 양보할 수 없는 권리
1958년, 블랑쇼는 20년 동안의 정치적 침묵을 깨고 잡지 『7월 14일』에 「거부」(19~21쪽)라는 글을 게재한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알제리 독립을 반대하는 군부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드골 장군이 문제였다. 프랑스 구국의 영웅인 드골의 복귀에 반대하여 거부를 표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표면적 해결책, 단기적 이익이 가능해 보일지라도 “본질적인 것을 배반하면서는 그 무엇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군부가 권력화하고 지도자는 구세주로 나서는 그 상황에서 파시즘의 전조를 감지하는 블랑쇼에게 그 순간은 더 이상의 동의나 무관심이 불가능한 한계상황,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다. ‘거부’는 양보할 수 없는 정치적 권리이자 지식인의 책무이다. 블랑쇼에 의하면, 세상에 대해 관심과 거리를 동시에 유지하며, 그렇게 확보된 거리를 전망대 삼아, “자신에 대한 근심보다는 다른 이들에 대한 근심”을 가지고 세상을 주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다. 따라서 지식인은 정치권력을 행사하거나 정치행위에 직접 관계하지 않을수록 더욱 강력한 행동력과 거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항체, 혁명적 문학의 글쓰기
아우슈비츠 이후
아우슈비츠는 블랑쇼에게 절대적 분계선이다.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있을 뿐이다. “다시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생각하고 행동할 것”, 이것은 생애 마지막까지 그가 저버리지 않은 원칙이 되었다. 유태인 학살은 뿌리를 통한 특권화, 혹은 차별화의 논리가 부른 참극이다. 집단의 뿌리에 신화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막강한 통합력을 발휘하는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는 타자를 차별하기 위한 동일자들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1930년대까지 우파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블랑쇼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다시 정치적 글을 쓴다면 무엇을 위한 것이겠는가. 모든 사회적 통합 장치 뒤에 숨어 있는 배제와 억압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자폐적 주체의 한계를 허물어 소통의 가능성을 열기 위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정치적 입장이 극우 시절의 대척점으로 이동한 것, 국가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반유태주의에서 유태주의로 옮겨간 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아우슈비츠의 차별적 논리가 생존의 권리까지 차등화하면서 집단학살의 참극을 불러왔지만(190~197쪽, 「종말을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차별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분리정책이나 모두 타자에 대한 집단적 차별이라는 점에서는 나치즘의 본질을 공유한다. “유태인 집단학살은 서구를 향해, 바로 그 서구의 본질을 폭로한 사건”이라는 단언은 블랑쇼에게는 그것이 ‘나’를 향해 ‘나’의 본질을 폭로한 사건임을 의미한다. 요컨대, ‘타자’와 관계 맺지 못하는 ‘주체’의 문제, 이것이 1930년대 블랑쇼 자신의 문제였으며 아우슈비츠가 노정한 서구의 본질이었다.
‘바깥’과 ‘조각’의 사유
익명성, 비인칭성, 불가능성, 단절, 불연속성과 파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전체를 넘치는 것, “전체의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한 관심, 터전과 뿌리로부터 벗어남. 이 모든 것이 주체, 이성, 국가의 전체주의적 통합에 균열을 가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블랑쇼의 주제들이다. 압축적으로 말하면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통합적 체제에 길항하며 열림과 균열을 작동시키는 ‘바깥’과 ‘조각’의 사유를 찾아낸다. 달성과 성취, 구축과 완성을 지향하는 현실의 다른 영역들과 달리 문학은 부단히 단절과 불연속성, 무위(無爲)와 불가능성을 환기시킨다. 현재의 토대를 흔들고, 경계를 허물고, 전체를 무너뜨리는 말, 전체주의적 사고의 상극인 ‘조각의 사유’의 생성지대로서 문학은 언제나 혁명적 공간이다.
1960년대 초, ‘국제잡지’ 기획(64~104쪽)에서 블랑쇼는 글쓰기에 있어서 “조각이라는 의도적 선택”이 뜻하는 바를 명시한다. 1960년대 이후 블랑쇼 글은 단상(fragment, ‘조각’)이라는 형태의 시학을 보여 준다. 완결성을 배제하는 것이 조각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블랑쇼의 문학은 ‘조각’으로 ‘완결’되었다. 모든 진정한 문학은 길이와 무관하게 조각이라고 블랑쇼는 말한다. 문학의 언어는 전체를 구축하지 않으며, 통일성만을 유일한 가치로 추구하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며, “본질적인 불연속성을 요구하는 말”인 까닭이다.
‘바깥’, ‘조각’과 함께 나타나는 블랑쇼 글쓰기의 고유한 리듬은 반복이다. 조각은 “우리 언어와 사유의 깊은 모자람”, 다 말할 수 없음, 끝내 도달할 수 없음이라는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에 끝없는 반복과 무한한 재시작을 요구한다. 반복은 매우 근원적인 어떤 불가능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블랑쇼의 글이 ‘조각’의 형태, 반복의 리듬을 통해서 도달하려는 ‘바깥’은 원초적 불가능성의 공간이다. 원초적 불가능성은 모든 가능성의 바탕에 있는 것, 삶의 바탕으로서의 죽음, 법이나 질서 이전의 혼돈, 주체 이전의 익명성, 의미 이전의 무의미가 속해 있는 영역이다. 이 원초적 불가능성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의 급소이며 폐부이다.
열림과 소통, 타자에 대한 긍정에서 시작되는 정치적 혁명
정치 영역에서 대규모 시위 군중의 물결은 원초적 불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무언가를 행하기 위한 가능성으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한한 위력, “그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고, 위치시킬 수도 없는” “힘 아닌 힘”, 즉 원초적 불가능성이다. 소속도 지휘체계도 없이, 어디로부터인지도 모르게 모여들어 제어할 수 없는 힘의 원형으로 존재하다가 어디론가 흩어져 버리는 민중들의 존재. 그것이야말로 모든 권력의 원형이자 바탕이다. 정치가 자신의 뿌리인 ‘힘없는 민중의 힘’, 그 원초적 불가능성을 망각할 때, 거부의 목소리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지식인의 몫이다. 원초적 불가능성은 언제나 문학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힘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힘으로 정치의 막힘을 열어 보려는 열망이 블랑쇼의 정치 참여를 특징짓는다.
책으로 출간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닌 글들, 운동 현장의 전단이나 회보, 선언서나 설문의 답변을 책으로 엮은 『정치평론』이 수많은 글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은 당연하다. 정치적 글이 공동적, 나아가 익명적 목소리여야 한다는 생각은 블랑쇼에게 그토록 실제적이고 절실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움직임을 위해, 함께 모여, 공동의 목소리를 내도록 허락하는 잡지라는 형태는” 블랑쇼의 정치적 글들이 존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40년에 걸쳐 나온 그 많은 글들에서 우리가 한결같은 단 하나의 열망, 열림과 소통의 열망을 만나는 것은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인간의 관계가 힘이 작용하는 역학관계이기를 그치고 타자의 불가능성이 받아들여지는 소통이 되게 하려는 결정, 그것을 블랑쇼는 가장 강력한 의미에서 “정치적 긍정”이라고 부른다. 정치의 본질은 통치가 아니라 소통이라는 사실, 소통은 언제나 가장 힘없는 자, 타자와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정치적 혁명의 시작이다.
블랑쇼의 사유는 또한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적 틀을 거부하고, 강력한 탈?프로그래밍, 탈?코드화의 힘을 발휘한다. 블랑쇼의 언어 앞에서 단순히 통계학상의 인구로서 파악되고 통치 대상으로 취급될 뿐인 국민과, 역사의 진보를 담당한 유일한 주체라는 단순화된 계급의 이미지는 깨어진다. 우리를 에워싼 시장전체주의와 경제 유일사상에 난 그 균열은 이어 수없이 작은 파편들로 쪼개진다. 그리고 남은 것은 우리 각자의 욕망과 가치가 살아 있는 수많은 단편들, 그 단편들로 이루어진 공동의 목소리이다. 『정치평론』은 그 목소리 안에서 열림과 소통의 열망이 바로 정치의 본질임을 일깨운다.
정치의 본질은 통치가 아닌 소통이다!
-전체주의의 야만에 저항하는 공동의 익명적 목소리
“따라서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휴머니즘을 정의(正義)의 로고스와 결부시키지 않고 정의해야만 한다. 무엇으로 ‘휴머니즘’을 정의해야 하는가? ‘휴머니즘’을 언어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절규로, 궁핍의 절규 또는 이의제기의 절규, 단순한 침묵도 아니고 단어들로 표현되지도 않는 절규로, 비천한 절규, 또는 엄밀히 말해, 벽에 그려진 낙서로.”_모리스 블랑쇼.
정치란 그저 잘 먹고 살게 해주는 문제가 아니다. 정치가들은 인간을 그저 경제학적인 동물로 환원하면서, 당신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환상적인 약속을 남발한다. 그 대신 얌전히 살라는 억압과 통제와 함께. 합리성의 외양을 띤 그 약속은 사실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언제나 안정과 통합만을 추구하는 통치일 뿐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타협이나 묵인이 불가능한 순간이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그 순간 최대한의 익명적인 움직임에 의해, 본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에게서 시작되는 매우 빈약한 움직임으로부터 단호한 거부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러한 순간을 한국 사회에서도 여러 번 마주쳤고, 그때마다 대규모 군중의 형체로서 본질적인 변화의 열망을 표현해 왔다.
『정치평론 1953~1993』(?crits politiques 1953~1993, Gallimard, 2008, 이하 『정치평론』)은 지난 2월 출범한 ‘모리스 블랑쇼 선집’의 두번째 책(프랑스어판 출간년도를 따라 매긴 총서 번호로는 9번)이다. 세계대전 직후의 전후 서구 사회의 발전과 이어진 68혁명이라는 국면에서 블랑쇼는 정치를 어떻게 본질적으로 사유할 것인지, 꾸준한 발언을 토해 냈다. 그의 언어는 복잡한 이론적인 논의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보다는 우리 각자의 삶에 직접 호소한다. 스스로 극우 저널리스트에서 좌파 사상가로 변신했던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사유는 학술 담론을 넘어서서 여러 삶의 양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블랑쇼의 사유는 또한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적 틀을 거부하고, 강력한 탈?프로그래밍, 탈?코드화의 힘을 발휘한다. 블랑쇼의 언어 앞에서 단순히 통계학상의 인구로서 파악되고 통치 대상으로 취급될 뿐인 국민과, 역사의 진보를 담당한 유일한 주체라는 단순화된 계급의 이미지는 깨어진다. 우리를 에워싼 시장전체주의와 경제 유일사상에 난 그 균열은 이어 수없이 작은 파편들로 쪼개진다. 그리고 남은 것은 우리 각자의 욕망과 가치가 살아 있는 수많은 단편들, 그 단편들로 이루어진 공동의 목소리이다. 『정치평론』은 그 목소리 안에서 열림과 소통의 열망이 바로 정치의 본질임을 일깨운다.
‘파시즘 이후의 파시즘’에 대한 거부
『정치평론』은 문학적 평가 뒤에 가려졌던 블랑쇼의 정치적 열정을 확인시켜 주는 동시에 문학?정치?철학적 관심이 합류하는 한 지점으로서 타자 혹은 소통의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평론』에 실린 글들은 시기적으로 1958년부터 1968년 사이, 그리고 1987년 전후로 쓰인 것으로, 잡지 『7월 14일』(1~3호 발행, 1958), 기획에만 머문 ‘국제잡지’(1960~1964), 68혁명 시기에 1호만 나온 『위원회』 등에 게재된 글을 모은 것이다.
프랑스 현대사의 ‘태풍의 눈’
이 책에 실린 글이 집중적으로 쓰인 시기들은 유럽인들에게 근대성의 폐해가 정점에 이르렀던 세계대전 이후의 정치적 문제, 즉 군부의 정치권력화, 식민지 독립, 나치 전력 청산, ‘68’로 규정되는 전후 세대의 ‘혁명’이 모두 터져 나온 때이다. 『정치평론』에는 1950년대 후반의 프랑스와 알제리,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1961년의 독일, 1968년 5월 학생 운동이 뒤흔든 파리, 같은 해에 일어난 ‘프라하의 봄’과 뒤이은 소련군 탱크의 프라하 진주 등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남다른 통찰이 있다. 전후 프랑스 최고의 선언문이라는 1960년의 「알제리전쟁에서의 불복종의 권리선언」(39~44쪽)이 『정치평론』에 실려 있으며, 68혁명 당시 학생들이 점거한 소르본 대학가에 뿌려진 전단들, ‘학생?작가 행동위원회’의 회보 등도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프랑스 현대사에 몰아친 두 개의 대형 태풍인 알제리전쟁과 68혁명, 그 태풍의 눈이 이 작은 책 속에 들어 있는 셈이다. 국가권력과 제도의 폭력성, 혁명과 법, 혁명과 문학의 관계가 이 ‘태풍의 눈’이 주시하는 지점이다.
거부: 양보할 수 없는 권리
1958년, 블랑쇼는 20년 동안의 정치적 침묵을 깨고 잡지 『7월 14일』에 「거부」(19~21쪽)라는 글을 게재한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알제리 독립을 반대하는 군부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드골 장군이 문제였다. 프랑스 구국의 영웅인 드골의 복귀에 반대하여 거부를 표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표면적 해결책, 단기적 이익이 가능해 보일지라도 “본질적인 것을 배반하면서는 그 무엇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군부가 권력화하고 지도자는 구세주로 나서는 그 상황에서 파시즘의 전조를 감지하는 블랑쇼에게 그 순간은 더 이상의 동의나 무관심이 불가능한 한계상황,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다. ‘거부’는 양보할 수 없는 정치적 권리이자 지식인의 책무이다. 블랑쇼에 의하면, 세상에 대해 관심과 거리를 동시에 유지하며, 그렇게 확보된 거리를 전망대 삼아, “자신에 대한 근심보다는 다른 이들에 대한 근심”을 가지고 세상을 주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다. 따라서 지식인은 정치권력을 행사하거나 정치행위에 직접 관계하지 않을수록 더욱 강력한 행동력과 거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항체, 혁명적 문학의 글쓰기
아우슈비츠 이후
아우슈비츠는 블랑쇼에게 절대적 분계선이다.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있을 뿐이다. “다시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생각하고 행동할 것”, 이것은 생애 마지막까지 그가 저버리지 않은 원칙이 되었다. 유태인 학살은 뿌리를 통한 특권화, 혹은 차별화의 논리가 부른 참극이다. 집단의 뿌리에 신화적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막강한 통합력을 발휘하는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는 타자를 차별하기 위한 동일자들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1930년대까지 우파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블랑쇼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다시 정치적 글을 쓴다면 무엇을 위한 것이겠는가. 모든 사회적 통합 장치 뒤에 숨어 있는 배제와 억압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자폐적 주체의 한계를 허물어 소통의 가능성을 열기 위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정치적 입장이 극우 시절의 대척점으로 이동한 것, 국가주의에서 국제주의로, 반유태주의에서 유태주의로 옮겨간 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아우슈비츠의 차별적 논리가 생존의 권리까지 차등화하면서 집단학살의 참극을 불러왔지만(190~197쪽, 「종말을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차별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분리정책이나 모두 타자에 대한 집단적 차별이라는 점에서는 나치즘의 본질을 공유한다. “유태인 집단학살은 서구를 향해, 바로 그 서구의 본질을 폭로한 사건”이라는 단언은 블랑쇼에게는 그것이 ‘나’를 향해 ‘나’의 본질을 폭로한 사건임을 의미한다. 요컨대, ‘타자’와 관계 맺지 못하는 ‘주체’의 문제, 이것이 1930년대 블랑쇼 자신의 문제였으며 아우슈비츠가 노정한 서구의 본질이었다.
‘바깥’과 ‘조각’의 사유
익명성, 비인칭성, 불가능성, 단절, 불연속성과 파편적인 것에 대한 추구, 전체를 넘치는 것, “전체의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한 관심, 터전과 뿌리로부터 벗어남. 이 모든 것이 주체, 이성, 국가의 전체주의적 통합에 균열을 가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블랑쇼의 주제들이다. 압축적으로 말하면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통합적 체제에 길항하며 열림과 균열을 작동시키는 ‘바깥’과 ‘조각’의 사유를 찾아낸다. 달성과 성취, 구축과 완성을 지향하는 현실의 다른 영역들과 달리 문학은 부단히 단절과 불연속성, 무위(無爲)와 불가능성을 환기시킨다. 현재의 토대를 흔들고, 경계를 허물고, 전체를 무너뜨리는 말, 전체주의적 사고의 상극인 ‘조각의 사유’의 생성지대로서 문학은 언제나 혁명적 공간이다.
1960년대 초, ‘국제잡지’ 기획(64~104쪽)에서 블랑쇼는 글쓰기에 있어서 “조각이라는 의도적 선택”이 뜻하는 바를 명시한다. 1960년대 이후 블랑쇼 글은 단상(fragment, ‘조각’)이라는 형태의 시학을 보여 준다. 완결성을 배제하는 것이 조각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블랑쇼의 문학은 ‘조각’으로 ‘완결’되었다. 모든 진정한 문학은 길이와 무관하게 조각이라고 블랑쇼는 말한다. 문학의 언어는 전체를 구축하지 않으며, 통일성만을 유일한 가치로 추구하는 사고방식으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며, “본질적인 불연속성을 요구하는 말”인 까닭이다.
‘바깥’, ‘조각’과 함께 나타나는 블랑쇼 글쓰기의 고유한 리듬은 반복이다. 조각은 “우리 언어와 사유의 깊은 모자람”, 다 말할 수 없음, 끝내 도달할 수 없음이라는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에 끝없는 반복과 무한한 재시작을 요구한다. 반복은 매우 근원적인 어떤 불가능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블랑쇼의 글이 ‘조각’의 형태, 반복의 리듬을 통해서 도달하려는 ‘바깥’은 원초적 불가능성의 공간이다. 원초적 불가능성은 모든 가능성의 바탕에 있는 것, 삶의 바탕으로서의 죽음, 법이나 질서 이전의 혼돈, 주체 이전의 익명성, 의미 이전의 무의미가 속해 있는 영역이다. 이 원초적 불가능성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의 급소이며 폐부이다.
열림과 소통, 타자에 대한 긍정에서 시작되는 정치적 혁명
정치 영역에서 대규모 시위 군중의 물결은 원초적 불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무언가를 행하기 위한 가능성으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한한 위력, “그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고, 위치시킬 수도 없는” “힘 아닌 힘”, 즉 원초적 불가능성이다. 소속도 지휘체계도 없이, 어디로부터인지도 모르게 모여들어 제어할 수 없는 힘의 원형으로 존재하다가 어디론가 흩어져 버리는 민중들의 존재. 그것이야말로 모든 권력의 원형이자 바탕이다. 정치가 자신의 뿌리인 ‘힘없는 민중의 힘’, 그 원초적 불가능성을 망각할 때, 거부의 목소리로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지식인의 몫이다. 원초적 불가능성은 언제나 문학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힘이라는 점에서 문학의 힘으로 정치의 막힘을 열어 보려는 열망이 블랑쇼의 정치 참여를 특징짓는다.
책으로 출간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닌 글들, 운동 현장의 전단이나 회보, 선언서나 설문의 답변을 책으로 엮은 『정치평론』이 수많은 글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것은 당연하다. 정치적 글이 공동적, 나아가 익명적 목소리여야 한다는 생각은 블랑쇼에게 그토록 실제적이고 절실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움직임을 위해, 함께 모여, 공동의 목소리를 내도록 허락하는 잡지라는 형태는” 블랑쇼의 정치적 글들이 존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40년에 걸쳐 나온 그 많은 글들에서 우리가 한결같은 단 하나의 열망, 열림과 소통의 열망을 만나는 것은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인간의 관계가 힘이 작용하는 역학관계이기를 그치고 타자의 불가능성이 받아들여지는 소통이 되게 하려는 결정, 그것을 블랑쇼는 가장 강력한 의미에서 “정치적 긍정”이라고 부른다. 정치의 본질은 통치가 아니라 소통이라는 사실, 소통은 언제나 가장 힘없는 자, 타자와의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정치적 혁명의 시작이다.
목차
『모리스 블랑쇼 선집』을 간행하며
1장 공산주의와 반드골주의 1953~1959
2장 알제리전쟁, 「121인 선언문」을 중심으로 1960
3장 국제잡지 기획 1960~1964
4장 5월 운동 9168
5장 활동적 은거 1970~2003
옮긴이 해제_열림과 소통을 위한 거부와 혁명의 정치사상
모리스 블랑쇼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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