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우리 시대의 이슈 01
세계 시민주의: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
- 대등서명
- Cosmopolitanism
- 발행사항
- 서울 : 바이북스, 2008
- 형태사항
- 330 p. ; 22 cm
- 총서사항
- 우리 시대의 이슈
- ISBN
- 9788992467193
- 청구기호
- 193.8 애849ㅅ
- 일반주기
- 색인수록 원저자명: Kwame Anthony Appiah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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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2561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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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우리는 왜 이방인에게 친절해야 하는가!”
철학자 콰메 애피아가 제시하는 ‘글로벌 시대를 위한 윤리학’
노턴의 “Issues of Our Time” 시리즈의 한국어판 첫 책 출간!
정치·경제·문화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세계가 점점 조밀해지고 있는 이 ‘글로벌 시대’에는 다른 사회와 문화, 지역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의 대화가 불가피하며, 더 나아가 우리 모두에겐 “이방인에 대한 의무”가 있음을 역설한 책.
그 사상적 근거를 국적이나 민족, 종교 등의 경계를 초월해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시민주의’에 두고 있으나, 지역적 공동체나 문화를 배제하는 완고한 세계시민주의와는 달리, 지역적·문화적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이방인과의 대화나 다른 문화에 대한 비교문화적인 이해를 가로막는 방해 요소가 무엇인지 살피고, 우리가 이방인을 볼 때, 혹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볼 때 갖는 시각에 어떠한 오류와 모순, 고정관념 등이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철학적 논증과 흥미진진한 예시들로 채워져 있다.
지은이인 미국의 철학자 콰메 앤터니 애피아는 언어철학과 윤리학, 아프리카 문화 등에 관심을 보여 왔으며, 명확하고 간결하면서도 재치 있는 철학 서술로 유명하다. 애피아의 책으로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이슈’ 총서의 첫 책으로 미국 노턴(W. W. Norton) 출판사의 동명의 시리즈(‘Issues of Our Time’)의 제1권으로 출간되었다. 미국 외교협회 선정 ‘2007 아서 로스 상’ 수상작.
“우리에겐 이방인에 대한 의무가 있다”
한국 사회의 낯선 이방인들… 우리는 어떠한 준비가 돼 있는가?
지난해 8월 국내 체류 외국인이 100만 명을 돌파했다. 동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한국을 찾아오고 있다. 이제 지하철에서, 버스 안에서 피부색이 다른 사람 한두 명쯤 보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과거, 일자리와 기회를 찾아 우리가 해외로 나가던 시대로부터, 거꾸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를 찾아오는 시대다. ‘다문화 사회’란 말도 점차 쓰임이 많아진다. 그러나 오랫동안 ‘단일민족’을 ‘자부심’의 또 다른 표현으로 여겨왔던 우리들은 아직 이런 상황에 충분한 마음가짐이 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일부에서는 이 ‘이방인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외환위기 이후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경제적·심리적으로 위축되다 보니 외국인 근로자들이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TV 뉴스에는 밀린 몇 달치 월급을 받으러 갔다가 악덕 고용주의 신고로 출입국 관리소 단속반에 잡힌 불법 체류자의 모습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불법 체류자의 모습이 동시에 나온다. 그래서 이 낯선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에는 이성보다는 동정심과 적대감 등의 감정이 우선하는 것 같다. 비단 피부색 다른 외국인만이 아니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는 전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디아스포라를 낳았다. 아직 남측에 생존해 있는 혈육을 둔 북쪽 이산가족이나 독립운동가의 후손일 수도 있는 고려인, 재중동포(조선족), 재일 조선인, 새터민(탈북자) 등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가? 우리는 같은 민족인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동질감을 갖고 있을까?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이들과 맞닥뜨렸을 때 이질감을 느끼지는 않을지? 그렇다면 이들은 이방인일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전례 없이 민족과 인종, 국적, 종교, 그리고 경제 양극화에 따라 분화되는 사회 계층 등 온갖 경계가 복잡다단하게 겹겹이 줄을 치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경계는 점차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가고 있다.
이방인과 공존하는 글로벌 시대,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되는가?
냉전이 무너지고, 세계 경제의 자본 종속이 더욱 심화되면서 세계는 유가와 같은 원자재 가격 상승이나 미국발 금융 위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등 점차 유기적인 거대 단일 경제권으로 점점 압축돼 가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인터넷과 텔레비전 등의 정보통신 발달로 세계는 점점 조밀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구촌 각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어딘가에 우리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개개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일말의 책임의식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러한 물음이 이 책 『세계시민주의 ―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의 지은이 콰메 앤터니 애피아(Kwame Anthony Appiah, 1954~)가 제기하는 문제다. 세계화의 촉진과 인터넷의 보급은 그동안 서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문화권의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제 그동안 이방인으로 여겨왔던 ‘낯선’ 사람들의 생활권이 손 내밀면 닿을 곳까지 다가와 있다.
애피아는 묻는다. “그러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애피아는 세계화(globalization)도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도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말한다. 세계시민주의란 모든 시민들이 (나라이든 민족이든) 하나의 ‘지역적’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거부하고 ‘세계’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세계정부’의 필요성과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을 제시한 책인가? 그렇지 않다. 애피아가 정치 제도나 교육 시스템을 바꾸는 식의 세계시민주의적 이상을 설파하려는 게 아니다. 이방인이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사는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실체로 존재할 때, 우리가 사회의 일원이자 개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갖는 것이 좋을지를 논하는 것이다. 즉 애피아는 ‘글로벌’ 시대를 위한 ‘윤리학’의 원천이자 영감을 세계시민주의에서 찾고 있다.
책의 논점들
애피아는 우리가 다른 문화나 사회를 바라볼 때 사용하는 사고의 틀과 도덕적 기준이 실제는 얼마나 많은 오류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철학적 논증들을 통해 밝히고 있다.
① 도덕적 진리란 ‘조각난 거울’과도 같다
서로 다른 사회,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만나게 될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경험하게 된다. 특정 종교의 관행에 대해 타 종교인들이 가지는 입장이라든가,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성 할례에 대한 입장 등에서 사람들은 심각한 ‘불일치’를 느낄 수 있다. 이는 동일 사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같이, 낙태나 동성애에 관해 구성원들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특히 도덕과 관련된 문제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애피아는 나의 관점에서 나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남의 관점에서 남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도덕과 관련해서는 단 하나의 ‘진리’라는 게 없을 것이다. 애피아는 진리를 ‘조각난 거울’에 비유한다. 우리는 진리의 일부분을 각각 반영하고 있는 거울 조각들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전체 진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조각난 거울도 단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거울이 있을 수 있으며 도덕적 진리 역시 이와 같다. 우리는 기껏해야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만 ‘동의’할 수 있을 뿐이다.
② 상대주의가 위험한 까닭
그렇다면 문화란 상대적인 것이라거나,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입장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인 태도는 어떤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위해 다른 사회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상대주의는 타인을 배려한 것이므로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애피아는 상대주의, 특히 윤리나 도덕과 관련한 상대주의가 사람들 간의 소통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인간의 기본 가치,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한번 보자. 예를 들어, ‘친절’을 보편적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친절을 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역시 친절을 원하기를 바란다. 즉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기를 바라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권하고 장려하기를 바란다. 도덕적 가치는 개인에게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즉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친절함이나 잔인함과 같은 개념은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함축돼 있다. ‘친절하다’, ‘잔인하다’, ‘인간적이다’와 같은 가치 평가적 언어들 역시 우리 자신에게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상대방에게 말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가치 언어를 사용하며 대화하고 토론할 경우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정서를 확인하게 되고 공통된 이해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결국 공동의 가치 언어를 강화한다면 우리는 서로 동의하지 않던 것에도 더욱 쉽게 동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상대주의에서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요원하다. 윤리와 도덕에 관한 상대주의가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내가 있는 곳에선 내가 옳고, 네가 있는 곳에선 네가 옳다”라고밖에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상대주의를 권고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관용’을 일깨울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오히려 우리의 소통에 한계선을 그어버릴 수가 있다. 상대주의에 대한 애피아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옳은지 서로에게서 배울 수 없다면, 우리 사이의 대화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런 상대주의는 대화를 장려하기는커녕 단지 우리를 침묵하게 할 뿐이다.”
③ 실증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대주의는 이방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다른 문화에 열광하는 문화인류학자들도 자주 동의하는 방법론이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우리가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 대부분이 단순히 우리의 지역적 관습이나 선호도가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애피아는 이러한 상대주의는 헤로도토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오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나 가치에 관한 담론은 ‘과학적 확실성’의 잣대를 들이대 볼 경우 ‘개념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실증주의적 세계관으로 고착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애피아는 현대의 상대주의가 사실(facts)과 가치(values)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과학적 세계관인 ‘실증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 20세기에 논리실증주의가 절정을 이루게 되면서 크게 유행하게 된 실증주의는 ‘관찰 가능한 사실이 곧바로 진리’라며 ‘사실’을 과대평가하는 반면에, ‘가치’는 과학적·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평가절하하고 배제해 버린다. 실증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가치들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립시켜 주는 합리적 토대는 전혀 없다. 즉 우리가 어떠한 도덕적 가치를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합리적 논증도 없다는 관점이다. 결국 실증주의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 다른 문화의 가치 선택을 존중하는 ‘관용’이란 것은 자기모순이 돼버린다. 관용 역시 또 다른 가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애피아는 이런 실증주의적 세계상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고,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사회 사이에 대화의 단절을 가져와 우리의 비교문화적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④ 과학적으로 우월하다 해서 우리의 가치가 다른 사회의 가치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방인, 혹은 다른 사회, 다른 문화를 평가할 때 과학적 발전상을 하나의 잣대로 삼을 때가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세계종교로서 공인된 종교를 믿는 사회가 전통적인 미신이나 신령을 믿는 사회보다 합리적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주술에 대한 믿음은 비합리적인가? 애피아는 그렇게 말할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합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과 이전부터 알고 있는 관념에 의존한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믿음의 합리성을 검증하려면 언제나 또 다른 믿음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뜻이며, ‘모든’ 믿음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한다. 우리는 가족과 사회의 소속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혼자서는 개발해 내지 못했을 수많은 믿음이 이미 갖춰진 상태에서 출발한다. 주술을 믿는 사람들도 기존의 사회와 조상에게서 주술에 대한 믿음을 물려받은 것이며, 우리도 그들의 믿음과 함께 자라고 경험을 공유했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믿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주술에 대한 믿음이 비합리적이라고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주술과 같은 것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서구의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적 설명이란 것도 과학자들이 이미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따른 것이다. 애피아는 이를 논하기 위해 ‘뒤앙의 테제’를 예로 든다.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뒤앙(Pierre Duhem, 1861~1916)은 어떤 이론을 설명하는 자료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자료를 똑같이 잘 설명해 주는 다른 이론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의 사실에 수많은 이론과 가설이 대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 과학적 탐구가 아무리 많이 이루어져도 사물의 본질을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음을 뜻한다. 실증주의는 ‘가치’보다 ‘사실’이 낫다고 전제하지만, 뒤앙의 테제에서와 같이 ‘사실’ 또한 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탄탄하지 않은 것이다. 과학은 더 합리적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이 아니라, ‘사실’을 파악하고 현실에 개입하는 데 있어 더 나은 도구가 돼준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다. 과학이 ‘사실’ 파악에 있어 진보를 가져다 준 것은 맞다. 그러나 ‘가치’에 대한 이해는 증진시키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과학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가치가 다른 사회의 가치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이유다.
⑤ 도덕적 가치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은 가치 평가적 언어에도 원인이 있다
‘서로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간의 대화에서 ‘가치 문제에 관한 불일치’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도덕적 충돌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원인은 무엇일까? 애피아는 우선, 우리가 가치를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가 매우 다의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국의 정치 이론가 마이클 월처(Michael Walzer, 1935~)의 ‘두꺼움’과 ‘얇음’의 개념을 빌려 왔다. 월처는 ‘특수’와 ‘보편’을 설명하면서 그 메타포로서 ‘두꺼움’과 ‘얇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즉 모든 사회는 각각의 특수함을 지닌 ‘두꺼운’ 사회이며, 이런 여러 사회의 특수함(두꺼움)의 일부가 겹쳐 공통의 보편성(얇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애피아는 가치 평가적 언어 중에서도 ‘좋다’라거나 ‘옳다’ 등의 단어들은 ‘얇은’ 용어로서 상당히 무제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무례하다’와 같은 단어는 특정 사회적 맥락과 복잡한 현실에 얽혀 있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사용돼야 하는 제약이 따르는 ‘두꺼운’ 용어다. 애피아는 우리가 타인이나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두꺼운 개념들 속에 잠재해 있을 ‘얇은’ 개념들을 추상해 낸다고 말한다. 또 두 집단 간의 토론에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는 전혀 없는 어떤 개념을 끌어들이면, 두 집단 간에는 가장 근본적인 불일치가 발생하며, 이런 불일치는 논쟁을 통해 합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애피아에 따르면, 가치 평가적 언어들에 대해 불일치가 생기고 논쟁이 많은 것은 가치 용어들의 ‘열린 구조’ 때문이다. ‘용기’라든지 ‘잔인’과 같은 가치 용어들은 일상적이고 익숙한 경우에서는 잘 맞더라도, 어떤 특정한 측면이나 상황에서는 그 용어의 적용 범위를 두고 사람들 간에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 평가적인 언어의 목적은 우리들의 행위뿐 아니라 사고와 감정까지도 이끌어내는 데 있다. 그래서 ‘도덕’과 관련한 어휘들을 공유하고 있는 동일 사회 내의 구성원들이라도, 그 어휘들이 ‘본질적으로 논쟁적’이고 ‘열린 구조’이기 때문에 서로 싸울 일이 많아지게 된다.
⑥ 우리가 정치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데는 ‘관행’의 역할이 크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가치에 관해 대화하자면 결국에는 불일치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애피아는 이런 결론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그 행위를 하는 것 자체에는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가 동료 시민들과 정치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애피아는 바로 ‘관행’에 있다고 말한다.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서로 공유하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함께 사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익숙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이웃들 역시 대체로 자신들에게 익숙한, 그런 안정된 삶의 형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지, 동료 시민들이 자신에게 반드시 동의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즉 우리는 함께 사는 것을 유익하게 해주는 공존의 가치에 대해 서로 합의하지 않고서도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관행이 정당한지 서로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그 관행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역적인 합의에 있어서도 이렇다면, 서로 다른 사회 간의 대화에서는 어떨까?
지역적 합의의 문제를 보건대, 우리와 이방인의 대화에서도 가치들에 대해 서로가 이성적인 합의에 도달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합의, 즉 ‘정당성’을 논하면서 불일치가 있을 수는 있어도, 관행 자체에 대해서는 이해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애피아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많은 것들을 옳다고 생각하는 데는 바로 그것들이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여성 할례나 한때 풍미했던 중국의 전족 풍습 등은 그것이 사람들이 평소에 하는 ‘익숙한’ 관습이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런 것들이 변화하려면, 그 관행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는 이성적인 논증이나 가치에 대한 긴 토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점진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지위는 100년 전과 지금이 판이하게 다르다. 애피아는 만약 낡은 성차별주의적 관행의 정당성이 문제였다면, 여성운동은 2~3주 만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여성운동이 바로 우리의 습관을 변화시켜 우리가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고, 그 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행과 관습의 성립이나 폐지는 이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애피아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가 평화롭게 모여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논증이나 원리가 아니라 ‘관행’이라고. 결국 애피아가 말하는 대화의 취지는 어떤 것에 대한 합의, 특히 가치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다. 따라서 애피아는 우리가 가치에 대해 서로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로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⑦ 문화적 순수보다는 ‘혼성’이 낫다
세계화가 각 지역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모든 것을 동질화해 버린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이제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지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의 고유한 문화가 사라진다는 명분으로 그 젊은이들에게 농촌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에 필요한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 애피아는 본래의 문화적 관행과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해서, 사람들이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지역적 정체성’ 속에 그들을 가두고 다양성을 ‘강제’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 오늘날 문화의 보호를 말하고, 본래의 생활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본래’의 문화, 본래의 생활 방식이란 것이 과연 본래의 것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전통이라 여기는 것도 한때는 혁신이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란 지속과 변화를 동시에 거치면서 형성되고, 한 사회의 정체성도 이런 변화를 통해 존속한다. 애피아는 본래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며 ‘문화적 순수성’이라는 ‘이상’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볼 때면 오히려 반대로 ‘혼성(contamination)’이라는 개념에 더욱 끌린다고 고백한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정착하기 위해 동질적인 문화와 가치 체계를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음을 지적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거대 제국, 몽골 제국, 무굴 제국, 아프리카에 정착한 반투족, 기독교와 불교의 전파 등등, 역사적으로 대규모의 ‘혼성’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오늘날 문화의 과정이었거나 기원이 되었다.
애피아는 ‘문화적 순수’라는 말이 모순어법이라고 말한다. 월드컵 축구나 힙합, 리바이스 청바지 등, 문화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이미 세계시민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곳에서 들어오고 많은 것들의 영향을 받는 문학이나 예술, 영화 등이 그런 세계시민주의적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즉 애피아는 ‘차이’에 대한 존중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조화시킬 수 있는 세계시민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⑧ 문화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 예술은 공유되어야 한다
세계시민주의에 입각한 애피아는 문화유산의 소유자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문화유산’으로 보호하려고 하는 대상은 상당수가 현대 국가 체제가 성립하기 이전에, 즉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애피아에 따르면, 그들의 피를 생물학적으로 이어받은 후손들이 살고 있더라도, 현대 국가의 국민들이 유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데 명확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서아프리카 초기 철기 시대 문화인 노크 문명의 조각품들이 나이지리아에서 발견되었을 경우, 지금의 나이지리아 국민들이 (설령 노크족의 직계 후손이 나이지리아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조각품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다만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발견되었고 누구도 현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경우이므로, 나이지리아 정부가 소유권을 결정하거나 그 유물을 보존한 특별한 책임을 갖는 것은 합당할 것이다. 애피아는 문화유산을 ‘민족’의 관점이 아닌 ‘인류 모두’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나이지리아 정부가 노크 문명의 조각품을 관리하는 것은 ‘인류의 수탁자’로서의 직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며, 노크의 조각품들이 나이지리아 국민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애피아의 이런 세계시민주의적 관점은 오늘날 첨예하게 대두된 문제인 ‘지적 재산권’에 대한 얘기로까지 이어진다. 애피아는 현시대 문화의 특징이 불가피하게 잡종이고 혼성인데, 지적 재산권을 새롭게 보호하려는 시도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이 오히려 보호되어야 할 관습들 자체를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법적인 규제는 법인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철저하게 집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애피아는 그러한 법인 이해관계가 아닌 ‘인류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⑨ 관용 없는 보편주의는 위험하다 - 반세계시민주의자들
‘국가를 초월해 인간의 존엄성을 믿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세계주의적인 집단들이 있다. 프랑스 학자 올리비에 루아(Olivier Roy, 1949~)가 “신근본주의자”라고 부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다(이들을 ‘지하드’를 외치는 “급진적 신근본주의자”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애피아는 이 신근본주의자들이 전통적 종교 권위를 거부하고 『쿠란』과 전통 신앙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신근본주의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보편적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으며 “종교의 개인화”를 지향하고 있다. 또 폭력적이든 그렇지 않든, 신근본주의자들은 어쨌든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애피아는 이들의 보편주의, 정확히 말해 ‘관용 없는 보편주의’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유럽의 종교전쟁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보편적 진리에 관해 ‘하나’의 해석만을 주장하는 보편주의는 살인으로 쉽게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의 많은 기독교도들은 비기독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십계명을 모든 법원과 낙태와 동성애에 적용하고 진화론을 배제한 생물학 교과서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정부와 사회를 더욱 기독교화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애피아는 더 나아가 애틀랜타 올림픽 기간에 일어난 공원 파이프 폭탄 사건(1996)이나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 폭파 사건(1995)과 같은 기독교 테러리스트들의 사례도 예시하고 있다. 애피아는 신근본주의자들과 같이 세계시민주의적인 구상에 역행하는 이들을 ‘반세계시민주의자’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보편주의는 세계시민주의와 어떻게 다를까? 반세계시민주의자들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방식이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오직 사소한 부분에서만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는 ‘다원주의’를 포함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많은 가치들이 있지만 그 가치들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고 보기에,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가 다양한 가치들을 구현하기를 기대한다. 또 우리의 지식이 불완전하고 잠정적이므로 새로운 증명을 통해 개정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오류가능주의’다. 반세계시민주의자들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편에 서기를 원하지만, 세계시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 배울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반세계시민주의자들이 말하는 보편주의는 획일성인 것이다.
⑩ 우리에겐 이방인에 대한 의무가 있다
세계시민주의자들이 고수하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 바로 모든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과 친척처럼 혈연으로 맺어진 이들과의 유대나 시민적 유대를 넘어서는 ‘타인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증을 하기 위해 애피아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품위를 가지고 살기 위해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기본적인 욕구들, 즉 건강이나 음식, 집, 교육 등이 있다. 또 아이를 갖거나 거주지를 이동하거나 생각을 표현하거나 하는 선택권들도 마땅히 가져야 하며, 반대로 불필요한 고통이나 신체 훼손 등을 강제당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애피아는 묻는다. 우리가 이런 기본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를 위해 어떤 것을 기본적인 의무로 감수해 왔는가?
애피아는 이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할 때는 몇몇 제약 사항들이 따르게 된다고 말한다. 첫째, 이런 권리를 보장해 주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은 ‘민족국가(nation-state)’에 있다(이런 점에서 애피아는 ‘세계정부’를 외치는 ‘정치적’인 세계시민주의자들과 다르다). 둘째, 우리의 의무는 전체의 짐을 홀로 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몫을 공평하게 져야 하지만, 자신의 몫 이상을 지도록 요구받아서는 안 된다(여기서 애피아는 “우리는 재산을 거의 모두, 가능한 한 즉시 유니세프나 옥스팜과 같은 자선 단체에 보내야 한다”는 철학자 피터 엉거의 논리를 반박한다). 셋째, 우리의 기본 의무가 무엇이든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즉 가족, 친구, 민족에 대한 우리의 1차적인 편애와 조화되어야 한다.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기본 의무가 무엇이든, 우리 가족,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을 넘어설 만큼 충분할 리 없기 때문이다.
⑪ 감정보다는 이성의 실천이 요구된다
애피아는 이 세상에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세계적인 빈곤’이 존재하는 이때, 애피아는 ‘돈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발경제학자들은 1950~1995년에 엄청난 규모의 대외 원조가 진행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돈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 경우라고 본다. 세계에서 대외 원조 예산을 가장 많이 책정하지만 GDP 비율로 보자면 부유한 원조 국가 중 가장 밑바닥 수준인 미국은 지난 2004년 지진해일 피해를 입은 나라들에 구호 기금으로 내놓았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인 약 18억 달러를 관세로 매겼다. 단순히 감정이 폭발해 도와주는 지원이 아닌, ‘이성을 실천하는’ 원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굶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전반적으로 풍족하게 만들어서 그 아이들을 도와야지, 비과세 곡물을 원조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그 지역 농부를 도산시키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구한다면, 이는 좋은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더 큰 해악을 낳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기부’를 했을 때, 그 돈이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한두 번 정도 알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애피아는 우리가 내 나라 또는 내 지역의 일자리를 보호해 준다는 이유로 지지했던 정책들 때문에 그 아이들이 죽어간 것일 수도 있음을 인식하라고 요구한다.
애피아는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터무니없는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며, 우리더러 삶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방인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방인들이 겪는 고통에 우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슴속에 자리 잡은 이성, 원칙, 양심”(애덤 스미스) 들에 우리가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치와 특징
①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기존 담론의 한계를 뛰어넘다
국가나 민족, 지역, 계급, 성,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자는 세계시민주의는 그동안 반(反)애국주의·반민족주의의 ‘혐의’를 받아왔다. 실제로 세계시민주의를 둘러싼 논점들은 인류에 대한 충성과 애국·애족 중의 양자택일과 같은 이분법적인 논쟁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학교 교육 문제로까지 번져, 과연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는 지역이나 국가보다도 인류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하는가와 같이, 가치 부여의 우선권을 가지고도 논쟁이 있어왔다. 그런데 애피아가 그리는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에게 국가나 민족과 같은 소중한 가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국가나 민족, 사회에 앞서 개인의 이성과 윤리적 태도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피아는 자신이 말한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보장할 수 있는 건 현재의 민족국가 메커니즘이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으며, 그런 의무도 가족이나 민족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애피아의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와 ‘그들(이방인)’, 인류와 민족(혹은 국가), 세계와 지역 등의 “양 요소가 조화롭게 번영할 수 있는 윤리적 지대”(존 아이켄베리의 ‘추천사’ 중)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국가 체제나 제도적인 측면이 먼저 떠오를 법한 세계시민주의를 세계 윤리적 관점에서 전개해 나간 이 책은 이런 면에서 역설적으로 세계시민주의를 다룬 책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뛰어난 글일 것이다. ‘환상에 지나지 않다’고까지 치부되던 세계시민주의에 실천적 가능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윤리적 실천의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②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를 꿈꾸다
애피아가 옹호하는 세계시민주의를 요약하자면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다.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는 인간의 사회적·문화적 다양성과 차이에 가치를 둔다. 그러한 다양성과 차이가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적 제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기꺼이 놔두고자 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이방인과의 대화는 이방인을 이방인이 되게 한 요소, 즉 ‘차이’를 존중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지, 그 차이를 해소하여 서로 일치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코르넬리우스여, 당신은 나의 아주 사소한 것을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대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말로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뿐 아니라 특수한 삶의 가치까지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 이것이 애피아의 세계시민주의다.
③ 글로벌 시대에 요구되는 윤리학을 논하다
세계화의 결과이든 인터넷 보급에 따른 것이든, 이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을 만날 수 있고 이질적인 문화를 접할 수 있다. 여전히 총을 겨누는 군사적 대치 상태인 지역도 있고, 종교 분쟁·민족 분쟁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전례 없이 도덕적 가치와 문화의 충돌이 곳곳에서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존하는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모든 차이와 경계를 가로지르는 통찰적인 사고의 틀을 제시하여 세계 윤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이 책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책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세계시민주의”라는 주제목보다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이라는 부제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
④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전제들을 들추어내다
애피아는 이방인과의 대화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개인 혹은 집단의 정체성과 관련해 잘못 알고 있는 전제들을 하나씩 들춰낸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혹은 사회에 대해 옳다고 생각하고 있던 많은 것들이 실은 우연적이며 모순되기도 하고 오류를 담고 있거나 확인될 수 없는 것들임을 밝힌다. 그래서 작가이자 영미문학 전문가인 윌리엄 맥페런(William McPheron)은 이런 애피아를 “분석철학의 언어와 스타일로 소크라테스적 질문을 던진다”고 평하면서 “우리 시대의 포스트모던 소크라테스”라고 했다. 물론 애피아의 이런 문제 제기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세계상이 인종과 국가, 민족, 계급, 종교 등의 경계를 초월하여 이방인과의 공존을 모색하려는 데 장애가 되고 위협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⑤ 설득력과 매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독특한 대화체의 글
철학자 고(故)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는 이 책을 “설교적이기보다는 대화적인 성격을 지닌” 글이라고 평가했다. 애피아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아프리카 가나와 나이지리아 등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는 비교문화적인 예시와 지은이 개인의 생생한 경험이 담긴 일화들을, 어렵지 않은 철학적 논증과 함께 버무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글을 전개해 나간다. 현학적이거나 학자연하지 않는 그의 글은 언뜻 온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때론 급진적이기도 하고 시종일관 긴장의 강도를 유지하고 있다.
왜 애피아인가 ― 한국에 소개되는 애피아의 첫 책
글로벌 시대의 윤리학을 말하는 데 콰메 애피아만큼 적임자를 찾기도 힘들다. 그는 가나인 변호사 아버지와 영국인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가나의 쿠마시에서 자라고 영국 케임브리지의 클레어 칼리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프린스턴 대학 교수로 미국에 살고 있다(그는 미국철학회의 동부 지부장도 맡고 있다). 그에겐 레바논인 당고모부와 미국인, 프랑스인, 케냐인, 태국인 사촌들이 있으며, 그의 여동생들은 각각 노르웨이인, 나이지리아인, 가나인과 결혼했다. 애피아 자신이 이렇게 민족적·문화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환경에서 자라났기에, “세계시민주의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거부하는 것이 어렵다”는 그의 말은 당연하게 들린다.
이 책 『세계시민주의 ―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은 『아버지의 집에서(In My Father’s House)』(1992), 『정체성의 윤리학(The Ethics of Identity)』(2005) 등 윤리학과 언어철학,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사상사 분야에 걸친 광범위하고 다양한 저서를 써온 애피아의 책으로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책이다.
차이와 경계를 가로지르는 세계시민적 연대를 꿈꾸며
오늘날 우리는 유력 정치인들이 차이를 과장하고 극단화하여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애피아는 이런 때에 이웃이 됐든 이방인이 됐든 모든 사람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반자를 원하고 생존을 위해 상호 의존해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는 반드시 합의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이방인’들이 외국인 근로자나 동남아시아 출신 새댁 등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와 한국 사회의 일원을 구성하고 있는 오늘날, 애피아가 전하는 윤리학이야말로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던 윤리적 나침반이 아닐까? 경계를 초월한 대화는 유쾌할 수도 있고 불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피아의 말처럼, 대화는 불가피하다.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코스모폴리터니즘)
개인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자신을 세계 사회의 일원으로 파악하는 사상 및 양식. ‘세계주의’라고도 한다. 어원적으로는 그리스어의 ‘코스모스(kosmos, 세계)와 ‘폴리테스(polites, 시민)의 합성어로,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의 키니코스(Cynicos)학파가 ‘세계시민(kosmopolites)’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철학자 콰메 애피아가 제시하는 ‘글로벌 시대를 위한 윤리학’
노턴의 “Issues of Our Time” 시리즈의 한국어판 첫 책 출간!
정치·경제·문화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세계가 점점 조밀해지고 있는 이 ‘글로벌 시대’에는 다른 사회와 문화, 지역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과의 대화가 불가피하며, 더 나아가 우리 모두에겐 “이방인에 대한 의무”가 있음을 역설한 책.
그 사상적 근거를 국적이나 민족, 종교 등의 경계를 초월해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시민주의’에 두고 있으나, 지역적 공동체나 문화를 배제하는 완고한 세계시민주의와는 달리, 지역적·문화적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이방인과의 대화나 다른 문화에 대한 비교문화적인 이해를 가로막는 방해 요소가 무엇인지 살피고, 우리가 이방인을 볼 때, 혹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볼 때 갖는 시각에 어떠한 오류와 모순, 고정관념 등이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철학적 논증과 흥미진진한 예시들로 채워져 있다.
지은이인 미국의 철학자 콰메 앤터니 애피아는 언어철학과 윤리학, 아프리카 문화 등에 관심을 보여 왔으며, 명확하고 간결하면서도 재치 있는 철학 서술로 유명하다. 애피아의 책으로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이슈’ 총서의 첫 책으로 미국 노턴(W. W. Norton) 출판사의 동명의 시리즈(‘Issues of Our Time’)의 제1권으로 출간되었다. 미국 외교협회 선정 ‘2007 아서 로스 상’ 수상작.
“우리에겐 이방인에 대한 의무가 있다”
한국 사회의 낯선 이방인들… 우리는 어떠한 준비가 돼 있는가?
지난해 8월 국내 체류 외국인이 100만 명을 돌파했다. 동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한국을 찾아오고 있다. 이제 지하철에서, 버스 안에서 피부색이 다른 사람 한두 명쯤 보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과거, 일자리와 기회를 찾아 우리가 해외로 나가던 시대로부터, 거꾸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를 찾아오는 시대다. ‘다문화 사회’란 말도 점차 쓰임이 많아진다. 그러나 오랫동안 ‘단일민족’을 ‘자부심’의 또 다른 표현으로 여겨왔던 우리들은 아직 이런 상황에 충분한 마음가짐이 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일부에서는 이 ‘이방인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외환위기 이후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경제적·심리적으로 위축되다 보니 외국인 근로자들이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TV 뉴스에는 밀린 몇 달치 월급을 받으러 갔다가 악덕 고용주의 신고로 출입국 관리소 단속반에 잡힌 불법 체류자의 모습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불법 체류자의 모습이 동시에 나온다. 그래서 이 낯선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에는 이성보다는 동정심과 적대감 등의 감정이 우선하는 것 같다. 비단 피부색 다른 외국인만이 아니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는 전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디아스포라를 낳았다. 아직 남측에 생존해 있는 혈육을 둔 북쪽 이산가족이나 독립운동가의 후손일 수도 있는 고려인, 재중동포(조선족), 재일 조선인, 새터민(탈북자) 등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가? 우리는 같은 민족인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동질감을 갖고 있을까?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이들과 맞닥뜨렸을 때 이질감을 느끼지는 않을지? 그렇다면 이들은 이방인일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전례 없이 민족과 인종, 국적, 종교, 그리고 경제 양극화에 따라 분화되는 사회 계층 등 온갖 경계가 복잡다단하게 겹겹이 줄을 치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경계는 점차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가고 있다.
이방인과 공존하는 글로벌 시대,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되는가?
냉전이 무너지고, 세계 경제의 자본 종속이 더욱 심화되면서 세계는 유가와 같은 원자재 가격 상승이나 미국발 금융 위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등 점차 유기적인 거대 단일 경제권으로 점점 압축돼 가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인터넷과 텔레비전 등의 정보통신 발달로 세계는 점점 조밀해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구촌 각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어딘가에 우리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개개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일말의 책임의식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러한 물음이 이 책 『세계시민주의 ―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의 지은이 콰메 앤터니 애피아(Kwame Anthony Appiah, 1954~)가 제기하는 문제다. 세계화의 촉진과 인터넷의 보급은 그동안 서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문화권의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제 그동안 이방인으로 여겨왔던 ‘낯선’ 사람들의 생활권이 손 내밀면 닿을 곳까지 다가와 있다.
애피아는 묻는다. “그러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가?” 애피아는 세계화(globalization)도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도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를 말한다. 세계시민주의란 모든 시민들이 (나라이든 민족이든) 하나의 ‘지역적’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거부하고 ‘세계’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세계정부’의 필요성과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덕목을 제시한 책인가? 그렇지 않다. 애피아가 정치 제도나 교육 시스템을 바꾸는 식의 세계시민주의적 이상을 설파하려는 게 아니다. 이방인이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사는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실체로 존재할 때, 우리가 사회의 일원이자 개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갖는 것이 좋을지를 논하는 것이다. 즉 애피아는 ‘글로벌’ 시대를 위한 ‘윤리학’의 원천이자 영감을 세계시민주의에서 찾고 있다.
책의 논점들
애피아는 우리가 다른 문화나 사회를 바라볼 때 사용하는 사고의 틀과 도덕적 기준이 실제는 얼마나 많은 오류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지 철학적 논증들을 통해 밝히고 있다.
① 도덕적 진리란 ‘조각난 거울’과도 같다
서로 다른 사회,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만나게 될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경험하게 된다. 특정 종교의 관행에 대해 타 종교인들이 가지는 입장이라든가,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성 할례에 대한 입장 등에서 사람들은 심각한 ‘불일치’를 느낄 수 있다. 이는 동일 사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같이, 낙태나 동성애에 관해 구성원들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 특히 도덕과 관련된 문제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애피아는 나의 관점에서 나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남의 관점에서 남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도덕과 관련해서는 단 하나의 ‘진리’라는 게 없을 것이다. 애피아는 진리를 ‘조각난 거울’에 비유한다. 우리는 진리의 일부분을 각각 반영하고 있는 거울 조각들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전체 진리’는 발견하지 못한다. 조각난 거울도 단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거울이 있을 수 있으며 도덕적 진리 역시 이와 같다. 우리는 기껏해야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만 ‘동의’할 수 있을 뿐이다.
② 상대주의가 위험한 까닭
그렇다면 문화란 상대적인 것이라거나,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입장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인 태도는 어떤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위해 다른 사회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상대주의는 타인을 배려한 것이므로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애피아는 상대주의, 특히 윤리나 도덕과 관련한 상대주의가 사람들 간의 소통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인간의 기본 가치,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한번 보자. 예를 들어, ‘친절’을 보편적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친절을 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역시 친절을 원하기를 바란다. 즉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기를 바라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권하고 장려하기를 바란다. 도덕적 가치는 개인에게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즉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친절함이나 잔인함과 같은 개념은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함축돼 있다. ‘친절하다’, ‘잔인하다’, ‘인간적이다’와 같은 가치 평가적 언어들 역시 우리 자신에게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상대방에게 말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가치 언어를 사용하며 대화하고 토론할 경우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정서를 확인하게 되고 공통된 이해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결국 공동의 가치 언어를 강화한다면 우리는 서로 동의하지 않던 것에도 더욱 쉽게 동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상대주의에서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요원하다. 윤리와 도덕에 관한 상대주의가 진리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내가 있는 곳에선 내가 옳고, 네가 있는 곳에선 네가 옳다”라고밖에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상대주의를 권고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관용’을 일깨울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오히려 우리의 소통에 한계선을 그어버릴 수가 있다. 상대주의에 대한 애피아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행하는 것이 옳은지 서로에게서 배울 수 없다면, 우리 사이의 대화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런 상대주의는 대화를 장려하기는커녕 단지 우리를 침묵하게 할 뿐이다.”
③ 실증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상대주의는 이방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다른 문화에 열광하는 문화인류학자들도 자주 동의하는 방법론이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우리가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 대부분이 단순히 우리의 지역적 관습이나 선호도가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애피아는 이러한 상대주의는 헤로도토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오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나 가치에 관한 담론은 ‘과학적 확실성’의 잣대를 들이대 볼 경우 ‘개념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실증주의적 세계관으로 고착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애피아는 현대의 상대주의가 사실(facts)과 가치(values)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과학적 세계관인 ‘실증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 20세기에 논리실증주의가 절정을 이루게 되면서 크게 유행하게 된 실증주의는 ‘관찰 가능한 사실이 곧바로 진리’라며 ‘사실’을 과대평가하는 반면에, ‘가치’는 과학적·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평가절하하고 배제해 버린다. 실증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가치들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립시켜 주는 합리적 토대는 전혀 없다. 즉 우리가 어떠한 도덕적 가치를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떠한 합리적 논증도 없다는 관점이다. 결국 실증주의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 다른 문화의 가치 선택을 존중하는 ‘관용’이란 것은 자기모순이 돼버린다. 관용 역시 또 다른 가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애피아는 이런 실증주의적 세계상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고,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사회 사이에 대화의 단절을 가져와 우리의 비교문화적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④ 과학적으로 우월하다 해서 우리의 가치가 다른 사회의 가치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방인, 혹은 다른 사회, 다른 문화를 평가할 때 과학적 발전상을 하나의 잣대로 삼을 때가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세계종교로서 공인된 종교를 믿는 사회가 전통적인 미신이나 신령을 믿는 사회보다 합리적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주술에 대한 믿음은 비합리적인가? 애피아는 그렇게 말할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합리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믿고 있는 것과 이전부터 알고 있는 관념에 의존한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믿음의 합리성을 검증하려면 언제나 또 다른 믿음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뜻이며, ‘모든’ 믿음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뜻한다. 우리는 가족과 사회의 소속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혼자서는 개발해 내지 못했을 수많은 믿음이 이미 갖춰진 상태에서 출발한다. 주술을 믿는 사람들도 기존의 사회와 조상에게서 주술에 대한 믿음을 물려받은 것이며, 우리도 그들의 믿음과 함께 자라고 경험을 공유했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믿게 될 것이다. 따라서 주술에 대한 믿음이 비합리적이라고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주술과 같은 것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서구의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적 설명이란 것도 과학자들이 이미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따른 것이다. 애피아는 이를 논하기 위해 ‘뒤앙의 테제’를 예로 든다.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뒤앙(Pierre Duhem, 1861~1916)은 어떤 이론을 설명하는 자료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자료를 똑같이 잘 설명해 주는 다른 이론들이 많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의 사실에 수많은 이론과 가설이 대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 과학적 탐구가 아무리 많이 이루어져도 사물의 본질을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음을 뜻한다. 실증주의는 ‘가치’보다 ‘사실’이 낫다고 전제하지만, 뒤앙의 테제에서와 같이 ‘사실’ 또한 실증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만큼 탄탄하지 않은 것이다. 과학은 더 합리적일 수 있게 만든다는 점이 아니라, ‘사실’을 파악하고 현실에 개입하는 데 있어 더 나은 도구가 돼준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다. 과학이 ‘사실’ 파악에 있어 진보를 가져다 준 것은 맞다. 그러나 ‘가치’에 대한 이해는 증진시키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과학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가치가 다른 사회의 가치보다 낫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이유다.
⑤ 도덕적 가치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은 가치 평가적 언어에도 원인이 있다
‘서로 다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간의 대화에서 ‘가치 문제에 관한 불일치’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도덕적 충돌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원인은 무엇일까? 애피아는 우선, 우리가 가치를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가 매우 다의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국의 정치 이론가 마이클 월처(Michael Walzer, 1935~)의 ‘두꺼움’과 ‘얇음’의 개념을 빌려 왔다. 월처는 ‘특수’와 ‘보편’을 설명하면서 그 메타포로서 ‘두꺼움’과 ‘얇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즉 모든 사회는 각각의 특수함을 지닌 ‘두꺼운’ 사회이며, 이런 여러 사회의 특수함(두꺼움)의 일부가 겹쳐 공통의 보편성(얇음)을 이룬다는 것이다. 애피아는 가치 평가적 언어 중에서도 ‘좋다’라거나 ‘옳다’ 등의 단어들은 ‘얇은’ 용어로서 상당히 무제약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무례하다’와 같은 단어는 특정 사회적 맥락과 복잡한 현실에 얽혀 있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사용돼야 하는 제약이 따르는 ‘두꺼운’ 용어다. 애피아는 우리가 타인이나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두꺼운 개념들 속에 잠재해 있을 ‘얇은’ 개념들을 추상해 낸다고 말한다. 또 두 집단 간의 토론에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는 전혀 없는 어떤 개념을 끌어들이면, 두 집단 간에는 가장 근본적인 불일치가 발생하며, 이런 불일치는 논쟁을 통해 합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애피아에 따르면, 가치 평가적 언어들에 대해 불일치가 생기고 논쟁이 많은 것은 가치 용어들의 ‘열린 구조’ 때문이다. ‘용기’라든지 ‘잔인’과 같은 가치 용어들은 일상적이고 익숙한 경우에서는 잘 맞더라도, 어떤 특정한 측면이나 상황에서는 그 용어의 적용 범위를 두고 사람들 간에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치 평가적인 언어의 목적은 우리들의 행위뿐 아니라 사고와 감정까지도 이끌어내는 데 있다. 그래서 ‘도덕’과 관련한 어휘들을 공유하고 있는 동일 사회 내의 구성원들이라도, 그 어휘들이 ‘본질적으로 논쟁적’이고 ‘열린 구조’이기 때문에 서로 싸울 일이 많아지게 된다.
⑥ 우리가 정치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데는 ‘관행’의 역할이 크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가치에 관해 대화하자면 결국에는 불일치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애피아는 이런 결론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그 행위를 하는 것 자체에는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가 동료 시민들과 정치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애피아는 바로 ‘관행’에 있다고 말한다.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서로 공유하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함께 사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익숙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이웃들 역시 대체로 자신들에게 익숙한, 그런 안정된 삶의 형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지, 동료 시민들이 자신에게 반드시 동의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즉 우리는 함께 사는 것을 유익하게 해주는 공존의 가치에 대해 서로 합의하지 않고서도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다. 어떤 관행이 정당한지 서로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그 관행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역적인 합의에 있어서도 이렇다면, 서로 다른 사회 간의 대화에서는 어떨까?
지역적 합의의 문제를 보건대, 우리와 이방인의 대화에서도 가치들에 대해 서로가 이성적인 합의에 도달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성적인 합의, 즉 ‘정당성’을 논하면서 불일치가 있을 수는 있어도, 관행 자체에 대해서는 이해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애피아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많은 것들을 옳다고 생각하는 데는 바로 그것들이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여성 할례나 한때 풍미했던 중국의 전족 풍습 등은 그것이 사람들이 평소에 하는 ‘익숙한’ 관습이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런 것들이 변화하려면, 그 관행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는 이성적인 논증이나 가치에 대한 긴 토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점진적으로 습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지위는 100년 전과 지금이 판이하게 다르다. 애피아는 만약 낡은 성차별주의적 관행의 정당성이 문제였다면, 여성운동은 2~3주 만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여성운동이 바로 우리의 습관을 변화시켜 우리가 새로운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고, 그 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행과 관습의 성립이나 폐지는 이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애피아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가 평화롭게 모여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논증이나 원리가 아니라 ‘관행’이라고. 결국 애피아가 말하는 대화의 취지는 어떤 것에 대한 합의, 특히 가치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다. 따라서 애피아는 우리가 가치에 대해 서로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로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⑦ 문화적 순수보다는 ‘혼성’이 낫다
세계화가 각 지역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모든 것을 동질화해 버린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이제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지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의 고유한 문화가 사라진다는 명분으로 그 젊은이들에게 농촌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에 필요한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 애피아는 본래의 문화적 관행과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해서, 사람들이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지역적 정체성’ 속에 그들을 가두고 다양성을 ‘강제’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 오늘날 문화의 보호를 말하고, 본래의 생활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본래’의 문화, 본래의 생활 방식이란 것이 과연 본래의 것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전통이라 여기는 것도 한때는 혁신이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란 지속과 변화를 동시에 거치면서 형성되고, 한 사회의 정체성도 이런 변화를 통해 존속한다. 애피아는 본래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며 ‘문화적 순수성’이라는 ‘이상’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볼 때면 오히려 반대로 ‘혼성(contamination)’이라는 개념에 더욱 끌린다고 고백한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정착하기 위해 동질적인 문화와 가치 체계를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음을 지적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거대 제국, 몽골 제국, 무굴 제국, 아프리카에 정착한 반투족, 기독교와 불교의 전파 등등, 역사적으로 대규모의 ‘혼성’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오늘날 문화의 과정이었거나 기원이 되었다.
애피아는 ‘문화적 순수’라는 말이 모순어법이라고 말한다. 월드컵 축구나 힙합, 리바이스 청바지 등, 문화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이미 세계시민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곳에서 들어오고 많은 것들의 영향을 받는 문학이나 예술, 영화 등이 그런 세계시민주의적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즉 애피아는 ‘차이’에 대한 존중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조화시킬 수 있는 세계시민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⑧ 문화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 예술은 공유되어야 한다
세계시민주의에 입각한 애피아는 문화유산의 소유자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문화유산’으로 보호하려고 하는 대상은 상당수가 현대 국가 체제가 성립하기 이전에, 즉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애피아에 따르면, 그들의 피를 생물학적으로 이어받은 후손들이 살고 있더라도, 현대 국가의 국민들이 유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데 명확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서아프리카 초기 철기 시대 문화인 노크 문명의 조각품들이 나이지리아에서 발견되었을 경우, 지금의 나이지리아 국민들이 (설령 노크족의 직계 후손이 나이지리아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조각품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다만 나이지리아 영토에서 발견되었고 누구도 현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경우이므로, 나이지리아 정부가 소유권을 결정하거나 그 유물을 보존한 특별한 책임을 갖는 것은 합당할 것이다. 애피아는 문화유산을 ‘민족’의 관점이 아닌 ‘인류 모두’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나이지리아 정부가 노크 문명의 조각품을 관리하는 것은 ‘인류의 수탁자’로서의 직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며, 노크의 조각품들이 나이지리아 국민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애피아의 이런 세계시민주의적 관점은 오늘날 첨예하게 대두된 문제인 ‘지적 재산권’에 대한 얘기로까지 이어진다. 애피아는 현시대 문화의 특징이 불가피하게 잡종이고 혼성인데, 지적 재산권을 새롭게 보호하려는 시도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이 오히려 보호되어야 할 관습들 자체를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법적인 규제는 법인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철저하게 집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애피아는 그러한 법인 이해관계가 아닌 ‘인류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⑨ 관용 없는 보편주의는 위험하다 - 반세계시민주의자들
‘국가를 초월해 인간의 존엄성을 믿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세계주의적인 집단들이 있다. 프랑스 학자 올리비에 루아(Olivier Roy, 1949~)가 “신근본주의자”라고 부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다(이들을 ‘지하드’를 외치는 “급진적 신근본주의자”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애피아는 이 신근본주의자들이 전통적 종교 권위를 거부하고 『쿠란』과 전통 신앙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신근본주의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보편적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으며 “종교의 개인화”를 지향하고 있다. 또 폭력적이든 그렇지 않든, 신근본주의자들은 어쨌든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애피아는 이들의 보편주의, 정확히 말해 ‘관용 없는 보편주의’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유럽의 종교전쟁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보편적 진리에 관해 ‘하나’의 해석만을 주장하는 보편주의는 살인으로 쉽게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의 많은 기독교도들은 비기독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십계명을 모든 법원과 낙태와 동성애에 적용하고 진화론을 배제한 생물학 교과서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정부와 사회를 더욱 기독교화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애피아는 더 나아가 애틀랜타 올림픽 기간에 일어난 공원 파이프 폭탄 사건(1996)이나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 폭파 사건(1995)과 같은 기독교 테러리스트들의 사례도 예시하고 있다. 애피아는 신근본주의자들과 같이 세계시민주의적인 구상에 역행하는 이들을 ‘반세계시민주의자’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보편주의는 세계시민주의와 어떻게 다를까? 반세계시민주의자들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방식이 하나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오직 사소한 부분에서만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세계시민주의는 ‘다원주의’를 포함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많은 가치들이 있지만 그 가치들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고 보기에,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가 다양한 가치들을 구현하기를 기대한다. 또 우리의 지식이 불완전하고 잠정적이므로 새로운 증명을 통해 개정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오류가능주의’다. 반세계시민주의자들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편에 서기를 원하지만, 세계시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 배울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반세계시민주의자들이 말하는 보편주의는 획일성인 것이다.
⑩ 우리에겐 이방인에 대한 의무가 있다
세계시민주의자들이 고수하는 하나의 진리가 있다. 바로 모든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 대한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족과 친척처럼 혈연으로 맺어진 이들과의 유대나 시민적 유대를 넘어서는 ‘타인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증을 하기 위해 애피아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품위를 가지고 살기 위해 반드시 충족시켜야 할 기본적인 욕구들, 즉 건강이나 음식, 집, 교육 등이 있다. 또 아이를 갖거나 거주지를 이동하거나 생각을 표현하거나 하는 선택권들도 마땅히 가져야 하며, 반대로 불필요한 고통이나 신체 훼손 등을 강제당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애피아는 묻는다. 우리가 이런 기본 욕구가 충족돼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를 위해 어떤 것을 기본적인 의무로 감수해 왔는가?
애피아는 이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할 때는 몇몇 제약 사항들이 따르게 된다고 말한다. 첫째, 이런 권리를 보장해 주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은 ‘민족국가(nation-state)’에 있다(이런 점에서 애피아는 ‘세계정부’를 외치는 ‘정치적’인 세계시민주의자들과 다르다). 둘째, 우리의 의무는 전체의 짐을 홀로 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몫을 공평하게 져야 하지만, 자신의 몫 이상을 지도록 요구받아서는 안 된다(여기서 애피아는 “우리는 재산을 거의 모두, 가능한 한 즉시 유니세프나 옥스팜과 같은 자선 단체에 보내야 한다”는 철학자 피터 엉거의 논리를 반박한다). 셋째, 우리의 기본 의무가 무엇이든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즉 가족, 친구, 민족에 대한 우리의 1차적인 편애와 조화되어야 한다.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기본 의무가 무엇이든, 우리 가족,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을 넘어설 만큼 충분할 리 없기 때문이다.
⑪ 감정보다는 이성의 실천이 요구된다
애피아는 이 세상에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세계적인 빈곤’이 존재하는 이때, 애피아는 ‘돈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발경제학자들은 1950~1995년에 엄청난 규모의 대외 원조가 진행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돈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 경우라고 본다. 세계에서 대외 원조 예산을 가장 많이 책정하지만 GDP 비율로 보자면 부유한 원조 국가 중 가장 밑바닥 수준인 미국은 지난 2004년 지진해일 피해를 입은 나라들에 구호 기금으로 내놓았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인 약 18억 달러를 관세로 매겼다. 단순히 감정이 폭발해 도와주는 지원이 아닌, ‘이성을 실천하는’ 원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굶고 있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전반적으로 풍족하게 만들어서 그 아이들을 도와야지, 비과세 곡물을 원조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그 지역 농부를 도산시키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구한다면, 이는 좋은 일이라기보다 오히려 더 큰 해악을 낳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기부’를 했을 때, 그 돈이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한두 번 정도 알아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애피아는 우리가 내 나라 또는 내 지역의 일자리를 보호해 준다는 이유로 지지했던 정책들 때문에 그 아이들이 죽어간 것일 수도 있음을 인식하라고 요구한다.
애피아는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터무니없는 것도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며, 우리더러 삶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방인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방인들이 겪는 고통에 우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슴속에 자리 잡은 이성, 원칙, 양심”(애덤 스미스) 들에 우리가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치와 특징
①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기존 담론의 한계를 뛰어넘다
국가나 민족, 지역, 계급, 성,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자는 세계시민주의는 그동안 반(反)애국주의·반민족주의의 ‘혐의’를 받아왔다. 실제로 세계시민주의를 둘러싼 논점들은 인류에 대한 충성과 애국·애족 중의 양자택일과 같은 이분법적인 논쟁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학교 교육 문제로까지 번져, 과연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는 지역이나 국가보다도 인류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하는가와 같이, 가치 부여의 우선권을 가지고도 논쟁이 있어왔다. 그런데 애피아가 그리는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에게 국가나 민족과 같은 소중한 가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국가나 민족, 사회에 앞서 개인의 이성과 윤리적 태도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피아는 자신이 말한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보장할 수 있는 건 현재의 민족국가 메커니즘이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으며, 그런 의무도 가족이나 민족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애피아의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와 ‘그들(이방인)’, 인류와 민족(혹은 국가), 세계와 지역 등의 “양 요소가 조화롭게 번영할 수 있는 윤리적 지대”(존 아이켄베리의 ‘추천사’ 중)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국가 체제나 제도적인 측면이 먼저 떠오를 법한 세계시민주의를 세계 윤리적 관점에서 전개해 나간 이 책은 이런 면에서 역설적으로 세계시민주의를 다룬 책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뛰어난 글일 것이다. ‘환상에 지나지 않다’고까지 치부되던 세계시민주의에 실천적 가능성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윤리적 실천의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②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를 꿈꾸다
애피아가 옹호하는 세계시민주의를 요약하자면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다.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는 인간의 사회적·문화적 다양성과 차이에 가치를 둔다. 그러한 다양성과 차이가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적 제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기꺼이 놔두고자 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이방인과의 대화는 이방인을 이방인이 되게 한 요소, 즉 ‘차이’를 존중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지, 그 차이를 해소하여 서로 일치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코르넬리우스여, 당신은 나의 아주 사소한 것을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대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말로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뿐 아니라 특수한 삶의 가치까지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 이것이 애피아의 세계시민주의다.
③ 글로벌 시대에 요구되는 윤리학을 논하다
세계화의 결과이든 인터넷 보급에 따른 것이든, 이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방인을 만날 수 있고 이질적인 문화를 접할 수 있다. 여전히 총을 겨누는 군사적 대치 상태인 지역도 있고, 종교 분쟁·민족 분쟁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전례 없이 도덕적 가치와 문화의 충돌이 곳곳에서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존하는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모든 차이와 경계를 가로지르는 통찰적인 사고의 틀을 제시하여 세계 윤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이 책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책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세계시민주의”라는 주제목보다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이라는 부제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
④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전제들을 들추어내다
애피아는 이방인과의 대화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개인 혹은 집단의 정체성과 관련해 잘못 알고 있는 전제들을 하나씩 들춰낸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혹은 사회에 대해 옳다고 생각하고 있던 많은 것들이 실은 우연적이며 모순되기도 하고 오류를 담고 있거나 확인될 수 없는 것들임을 밝힌다. 그래서 작가이자 영미문학 전문가인 윌리엄 맥페런(William McPheron)은 이런 애피아를 “분석철학의 언어와 스타일로 소크라테스적 질문을 던진다”고 평하면서 “우리 시대의 포스트모던 소크라테스”라고 했다. 물론 애피아의 이런 문제 제기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세계상이 인종과 국가, 민족, 계급, 종교 등의 경계를 초월하여 이방인과의 공존을 모색하려는 데 장애가 되고 위협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⑤ 설득력과 매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독특한 대화체의 글
철학자 고(故)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는 이 책을 “설교적이기보다는 대화적인 성격을 지닌” 글이라고 평가했다. 애피아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아프리카 가나와 나이지리아 등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는 비교문화적인 예시와 지은이 개인의 생생한 경험이 담긴 일화들을, 어렵지 않은 철학적 논증과 함께 버무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글을 전개해 나간다. 현학적이거나 학자연하지 않는 그의 글은 언뜻 온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때론 급진적이기도 하고 시종일관 긴장의 강도를 유지하고 있다.
왜 애피아인가 ― 한국에 소개되는 애피아의 첫 책
글로벌 시대의 윤리학을 말하는 데 콰메 애피아만큼 적임자를 찾기도 힘들다. 그는 가나인 변호사 아버지와 영국인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가나의 쿠마시에서 자라고 영국 케임브리지의 클레어 칼리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프린스턴 대학 교수로 미국에 살고 있다(그는 미국철학회의 동부 지부장도 맡고 있다). 그에겐 레바논인 당고모부와 미국인, 프랑스인, 케냐인, 태국인 사촌들이 있으며, 그의 여동생들은 각각 노르웨이인, 나이지리아인, 가나인과 결혼했다. 애피아 자신이 이렇게 민족적·문화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환경에서 자라났기에, “세계시민주의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거부하는 것이 어렵다”는 그의 말은 당연하게 들린다.
이 책 『세계시민주의 ― 이방인들의 세계를 위한 윤리학』은 『아버지의 집에서(In My Father’s House)』(1992), 『정체성의 윤리학(The Ethics of Identity)』(2005) 등 윤리학과 언어철학,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사상사 분야에 걸친 광범위하고 다양한 저서를 써온 애피아의 책으로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책이다.
차이와 경계를 가로지르는 세계시민적 연대를 꿈꾸며
오늘날 우리는 유력 정치인들이 차이를 과장하고 극단화하여 대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애피아는 이런 때에 이웃이 됐든 이방인이 됐든 모든 사람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반자를 원하고 생존을 위해 상호 의존해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는 반드시 합의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이방인’들이 외국인 근로자나 동남아시아 출신 새댁 등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와 한국 사회의 일원을 구성하고 있는 오늘날, 애피아가 전하는 윤리학이야말로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던 윤리적 나침반이 아닐까? 경계를 초월한 대화는 유쾌할 수도 있고 불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피아의 말처럼, 대화는 불가피하다.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 코스모폴리터니즘)
개인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자신을 세계 사회의 일원으로 파악하는 사상 및 양식. ‘세계주의’라고도 한다. 어원적으로는 그리스어의 ‘코스모스(kosmos, 세계)와 ‘폴리테스(polites, 시민)의 합성어로,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의 키니코스(Cynicos)학파가 ‘세계시민(kosmopolites)’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목차
머리말 - 대화하기
1. 조각난 거울
어느 여행자 이야기 | 거울을 넘어서
2. 실증주의에서 벗어나기
직업적 상대주의 | 가치의 추방 | 실증주의의 문제들 | 가치의 회복
3.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신령들과 함께 살아가기 | 아코수아와 논하기 | 뒤앙의 발견
4. 도덕적 불일치
두꺼움과 얇음 | 가계 문제들 | 수요일에는 빨간 고추를 | 진정 역겨운 것은 무엇인가 | 논쟁이 되는 용어들 | 바보의 황금 | 어떤 가치들이 가장 중요한가? | 이방인과 논쟁하기
5. 관행의 우선성
지역적 합의 | 우리의 생각 바꾸기 | 선을 위해 투쟁하기 | 승자와 패자
6. 상상의 이방인들
왕을 기다리며 | 고향 가기 | 우리에게 보편적인 것이 필요한가?
7. 세계시민주의적 혼성
지구촌 | 결코 바꾸려고 하지 마라 | ‘문화제국주의’의 문제점 | 혼성 예찬
8. 그래서 누구의 문화란 말인가?
전쟁의 전리품 | 유산의 역설 | 귀한 독약 | 예술과 더불어 살기 | 문화TM | 인류의 이해관계 | 상상의 유대 관계
9. 반세계시민주의자들
국경 없는 신자들 | 경쟁하는 보편성 | 사피네와 함께한 이드 알피트르 축제 | 작은 집단
10. 이방인에게 친절을
중국 관리 죽이기 | 얕은 연못 | 기본 욕구 | 결정들, 결정들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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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