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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역사 앞에서

대등서명
한 사학자의 6·25일기
판사항
개정판
발행사항
파주 : 창비, 2009
형태사항
523 p. ; 23 cm
ISBN
9788936471675
청구기호
816.6 김53ㅇ
서지주기
작가 연보 수록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2608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2608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1993년 초판이 발행된 후 스테디쎌러로 꾸준히 읽혀온 『역사 앞에서』가, 한국현대사 전공자이자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이화여대 정병준 교수의 자세한 해제와 본문 교주(校註)가 새롭게 추가돼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두툼한 해제에서 정 교수는 김성칠 삶을 전반적으로 개관하면서, 일기에 대한 문헌비판적 검토와 정리뿐 아니라 그의 일기에 그려진 격동하던 해방 후 모습과 급박하던 한국전쟁 초기 1년여의 실체를 객관적·역사적으로 파헤친다. 50여년 전 한반도에서 펼쳐진 미소(美蘇)·남북(南北)·좌우(左右)의 갈등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한 지식인의 ‘진실한’ 일기를 따라가다보면, 2009년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념투쟁’과 ‘편가르기’ 같은 우리의 슬픈 자화상과 마주하게 된다.

김성칠의 삶과 한국 현대사의 굴곡
해제자는 김성칠이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삶과 한국 현대사를 추적·재구성해나간다. 191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김성칠은 식민지기인 1928년 대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민족적 현실을 자각하고 좌익독서회의 세례를 받는다. 이후 대구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사건으로 1년간 미결수로 구금된 생활을 한 후,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공부한다. 이때 당대 지식인의 유일한 등용문이던 신문의 논문 현상공모(1932년 7월 동아일보 주최)에서 1등에 당선된다. 이후 늦은 나이에 일본 토요꾸니(豊國)중학을 졸업하고 식민지시대 조선 엘리뜨들의 양성소이던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졸업 후 식민지하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가 선택가능한 최고 직업이던 조선금융조합연합에 입사해 조합이사가 된다. 당시 이 직종은 농촌지역 3대 기관장으로 꼽힐 정도로 식민지 엘리뜨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을 뿐 아니라 일제의 지배체제와 포섭되기 쉬운 위치였다고 정 교수는 평가한다.
김성칠은 1942년 경성제대 사학과에 입학해 직업적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때쯤 그는 『조선역사』라는 역사 대중서를 한달여 만에 써낸다. 당시 이 책은 6만 6000여부가 판매된 해방 후 최초의 베스트쎌러였다. 책 자체가 대중적 통사로 쉽고 잘 읽히는 문장으로 구성된 데다 해방된 한국에서 한국역사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 요구, 지방에 수많은 판매처를 가진 금융조합 조직망이 잘 결합된 결과였다. 이후 금융조합연합회를 그만둔 김성칠은 서울대 동양사 합동연구분실에 들어가 연행사(燕行使)와 북학파, 고전번역과 한글연구 등에 매진했다. 1946년 경성대학을 졸업하고 1947년 서울대 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한 후, 1951년 한국전쟁을 피해 온 영천 고향집에서 괴한의 저격으로 서른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일기 속 한국전쟁
해방 후 서울의 모습과 한국전쟁의 발발, 북한점령 시기의 서울생활, 남한의 서울수복이라는 일기 속 한반도에 대한 저자의 섬세하면서도 ‘진실한’ 묘사는 정부측 공식문서와 학계의 역사논문으로 밝히기 어려운 내밀한 진실을 담고 있다. 특히 북한점령기 식량부족 문제와 광범한 의용군 강제모집, 화급히 시행된 토지개혁의 문제점, 규율이 잘 갖춰진 인민군에 대한 인상, 짜인 각본대로 연출된 거수투표식 인민위원회선거, 6월 30일 발생한 서울대병원 국군 학살사건 등을 통찰력있게 담아낸 글은 당대의 역사적 소용돌이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특히 북한점령기 서울대의 문리대의 변화는 매우 자세하고 흥미롭다. 서울대는 일제하 경성제국대학으로 출발해 20여년 동안 불과 300여명의 한국인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해방 후 경성대학·서울대학으로 바뀌면서 좌우·남북의 갈등 속에서 표류했다. 김성칠 일기에는 북한점령 후와 남한정부의 수복 후의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다. 북한에 점령됐을 때는 좌익교수와 학생들이 이력서와 자서전 작성·심사 같은 검열과 통제를 일상적으로 주도했으며, 남한정부의 서울 수복 후에는 북한에 대한 부역혐의 심사가 또한 펼쳐졌다. 그 결과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미처 피란 가지 못한 서울대 학자들은 북한이 북쪽으로 밀려가면서 월북하거나 납북됐으며 남아 있는 교수들은 부역혐의로 처벌받아야 했다. 결국 한국전쟁을 거치고 제대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불행한 역사와 모멸의 시대가 한국의 미래 인적 자원을 모욕하고 빼앗아 갔다. 이처럼 이 일기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기에 이르는 동안의 한국 최고학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넘어서
매듭짓지 못한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50여년 전 한반도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김성칠의 일기 속 내용은 지금 여기의 우리들 문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우선 김성칠이 올바른 일기쓰기를 거론하면서 언급한 올바른 신문보도행위는 지금의 언론권력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 “신문기사의 허위보도라고 하면 반드시 어떠한 사실을 날조한 경우에만 한하지 않고 어떠한 사건의 연속 중에서 일부분을 고의로 묵살해버린다거나 그와 반대로 강조해서 표현하는 것은 독자의 판단을 어긋나게 함에 있어서 허위보도와 조곰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일기 1946년 4월 22일)
이와 더불어, 해방 후 한반도 분단과 동족상잔이라는 처참한 전쟁을 겪었고 남북관계가 북한 핵문제 등의 문제 때문에 난항을 거듭하는 현 시점에서 묘사된 북한군에 대한 김성칠의 언급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들(북한군)이 상냥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는다. 이건 내가 유독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심이 적기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어제 본 국군과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다르다면 그들의 복장이 약간 이색질 뿐, 왜 그 하나만이 우리 편이고 그 하나는 적으로 돌려야 한단 말이냐. 언제부터 그들의 사이에 그렇듯 풀지 못할 원수가 맺히어 총검을 들고 죽음의 마당에서 서로 대하여야 하는 것이냐. 서로 얼싸안고 형이야 아우야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그들이 오늘날 누굴 위하여 무엇 때문에 싸우는 것이냐.”(일기 1950년 6월 28일)
목차
○개정판을 펴내며 김성칠 선생의 일기에 부쳐·긴경림 일러두기 제1부 1945년 12월 1946년 1~4월 1950년 1월 제2부 1950년 6월 1950년 7월 1950년 8월 제3부 1950년 9월 1950년 10월 1950년 11월 1950년 12월 1951년 3~4월 김성칠을 기억하며 사람답게 사는 길·강신항 조국 수난의 동반자·이남덕 군계일학의 외삼촌·정기돈 동양사연구실과 김성칠 선생·고병익 해제|김성칠의 삶과 한국전쟁·정병준 주 김성칠 연보 김성칠 저작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