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휴전
- 대등서명
- La tregua
- 개인저자
-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발행사항
- 파주: 돌베게, 2010
- 형태사항
- 368 p.; 21 cm
- ISBN
- 9788971994092
- 청구기호
- 883 레49ㅎ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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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2875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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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00012875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프리모 레비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또 다른 대표작
『이것이 인간인가』 이후의 이야기
“아우슈비츠가 있다. 그러므로 신은 있을 수 없다.” 증언문학의 백미 『이것이 인간인가』로 국내에 잘 알려진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의 또 다른 대표작 『휴전』이 출간됐다. 『휴전』은 레비의 두번째 작품이자 『이것이 인간인가』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첫번째 작품이 저자가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어 해방되기까지의 10개월간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수용소에서 해방된 저자가 고향 토리노로 돌아가기까지 9개월 동안의 고난에 찬 귀환의 여정을 그린다. 저자는 전작『이것이 인간인가』를 쓰고 난 뒤 15년이 흘러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페인트 생산 공장에서 임원으로 일하며 퇴근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집필, 거의 1년여에 걸쳐 완성시켰다. 『휴전』은 레비가 친구들에게 자신의 귀향담을 들려주는 과정에서 이미 어느 정도는 구상된 것이라고 한다. 전작을 통하여 비로소 글쓰기의 기쁨을 맛본 저자는,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춰지자 그 이야기를 한데 끌어 모아 빼어난 글 솜씨를 발휘하여 또 한 권의 책으로 풀어놓았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나 자신을 완전한 작가로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말해야 했던 것을 말했고, 화학자로서의 일을 재개했다. 나에게 펜을 쥐도록 강요한 그 필요성을, 이야기해야 할 그 필연성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내 일상적인 직업의 세계에서는 너무 생소한 것이었다. 쓴다는 체험, 무에서의 창조, 올바른 말을 찾고 발견하는 일, 균형 잡힌 표현력이 넘치는 어떤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행복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그런 시도를 하고 싶어졌다. 나는 아직 해야 할 말을 한참 가지고 있었다.” (「작가의 말」12쪽)
『휴전』은 전작 『이것이 인간인가』와 따로 떼어서 이야기하기 힘든 쌍둥이와 같은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날카로운 관찰, 인간의 존재에 관한 통렬한 성찰, 암흑 가운데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유머와 재치 등 프리모 레비의 작가적 매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한 수용소 해방 이후의 이야기라는 내용의 연속성이나 한 편 시(詩)로 시작하여 17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지는 구성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작품이 한 쌍을 이룬다. 다만 작품을 지배하는 분위기와 톤은 뚜렷하게 차별된다. 전작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면서 펼쳐지는 지옥의 여정을 마치 단테의 『신곡』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휴전』은 아우슈비츠가 해방되는 순간부터 토리노로 돌아오기까지의 긴 여정을 『오디세이아』에 빗대어 펼쳐내고 있다. 또한 전작이 아우슈비츠를 중심으로 한 ‘독일인’적인 차가운 규율의 세계를 그려냈다면, 이 작품은 무질서하고 무정부적인 러시아적 혼돈의 세계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혼란 속의 유럽의 모습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확실히 전작과 비교했을 때 좀더 가볍고 명랑해진 인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런 크고 작은 차이를 떠나 두 작품이 모두 독자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과 죽고 스러져간 인물들의 ‘증언’으로서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휴전』에서 레비가 “아우슈비츠의 자식” 후르비넥의 존재를 증언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후르비넥은 아무도 아니었다. 죽음의 자식, 아우슈비츠의 자식이었다. 아이는 세 살가량 되어 보였고 아무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아이는 말할 줄 몰랐고 이름도 없었다. (……) 어린아이가 가끔씩 내뱉는 분명치 않은 소리들 가운데 하나를 후르비넥으로 해석하여 그에게 붙여준 것이었다. 아이는 허리 아래로 마비가 되었고 위축된 두 다리는 꼬챙이처럼 가늘었다. 그러나 수척한 삼각형의 얼굴 속에 푹 꺼진 아이의 두 눈은 끔찍하리만치 생생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요구와 주장들로, 침묵의 무덤을 깨부수고 나오려는 의지로 가득했다.” (본문 33~34쪽)
“1945년 3월 초, 후르비넥은 자유롭지만 진정 구원받지는 못한 채 죽었다. 그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렇게 나의 말을 통해 증언한다.” (본문 36쪽)
레비의 증언을 통해 비로소 “아무도 아닌” 후르비넥이 하나의 존재로 의미를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 작가는 라거 카포의 졸개로 정신착란에 걸린 클라이네 키푸라, 스무 살도 안 되어 디프테리아로 눈을 감은 앙드레와 앙투안 두 젊은 농부 등의 존재를 증언한다. 이들이 왜 그렇게 망가져갔으며, 어떻게 죽어갔는지 레비는 그의 기억과 사실적 기록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휴전』은 확실히 레비에게 전작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전작이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이 목격하고 감내한 공포를 세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증언문학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다면, 15년의 간극을 두고 집필된 『휴전』은 단순히 증언적 성격을 뛰어넘어 문장, 구성, 이야기성 등 여러 측면에서 진정한 문학 작품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휴전』이야말로 레비를 진정한 작가로 인정받게 한 첫번째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레비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첫 작품과 비교해가면서 각 장의 행 수, 각 페이지의 단어 수를 조사하고 그 단어들의 사용빈도까지 계산하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그의 본업이기도 한 화학자로서의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됨으로써 그의 글쓰기에 개성을 만들어 준 것이다.
레비에게 언어는 단어라는 재료들을 엄선하고 정제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것으로, 실험재료처럼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것이자 객관화되는 대상이다. 그의 문체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간결하며 객관적인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의 과학자적인 자질에 있다. 레비에게 있어 글쓰기는 실험실에서의 작업과 같이 고도의 정교함과 치밀함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작가는 실험을 즐기는 화학자에 다름 아니다. (이소영 「옮긴이의 말」 333쪽)
결국 『휴전』을 끝으로 레비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밝힌다. “내가 말해야 했던 것은 모두 말했”고 “더 이상 쓸 게 없다”는 것이다. 두 권의 책을 통해 아우슈비츠의 증언자로서의 임무는 다했다고 여긴 것일까. 레비는 그 후 『휴전』의 문학적 성취를 발판으로 다양한 작품에 도전하며 『주기율표』,『멍키스패너』등과 같은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휴전』, 바로 이 작품은 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룬 두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고향 토리노로
러시아의 광활한 대륙에서 벌어지는 오디세이아
“나는 이 해설을 쓰기 위해서 이 책을 다시금 읽었지만 이전에 몇 번이나 읽었음에도 이번에 또 그 재미에 빠져들어 몇 군데에서는 읽으면서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잔학, 기아, 죽음, 나쁜 짓, 범죄……, 인간이 지닌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을 묘사하고 있는데도 이만큼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은 왜일까?” (서경식 「작품해설」 361쪽)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러시아군에 의해서 해방되었다. 그 시점까지 살아남은 포로 중 5만 8,000명은 철군하는 독일군에 의해 연행되어 대부분 ‘죽음의 행진’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에 의해 구출된 사람은 중병 때문에 수용소에 남겨졌던 약 7,000명에 불과했고, 레비는 그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레비는 곧장 토리노로 귀향할 수 없었다. 러시아군에 인계된 레비는 간호사로 일하며 이동캠프에서 생활하게 된다. 드디어 6월 귀향을 위한 이동이 시작되지만 이 열차 여행은 터무니없게도 10월까지 이어진다. 전쟁으로 끊어진 선로를 만날 때마다 열차에서 열차로 갈아타기를 반복하고,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 행정적 절차로 몇 시간씩 지체되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 고통스럽고 지난한 귀환의 여정은 레비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개성 강한 동료들과의 동행과 러시아와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 그들에 얽힌 사연들과 수많은 사건들이 피카레스크식으로 펼쳐진다.
특히 레비의 포로 동료들의 면면이 인상적인데 소설 곳곳에서 활약하는 체사레의 사기행각은 압권이다. 체사레는 낭종에 물을 채운 암탉을 속아서 샀다가, 거기서 힌트를 얻어 러시아군으로부터 보급받은 생선의 부레에 주사기로 물을 채워 비싸게 팔 궁리를 한다.
그(체사레)는 빨대 주둥이에 넣고 물을 채우려고 시도해보았지만 물은 전부 도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체사레는 주사기를 생각했다. 주사기로는 몇 번은 어느 정도의 진전이 있었으나 주사를 놓는 지점에 따라 달랐다. 그 지점에 따라 물이 금방 또는 잠시 뒤에 도로 나오거나 아니면 지속적으로 안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조그만 칼로 생선 여러 마리를 해부한 끝에, 체사레는 영구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부레에 주사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체사레가 파는 생선들은 보통 생선들에 비해 무게가 20~30퍼센트 더 나갔고, 게다가 훨씬 매력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처치를 받은 ‘립바’(큰 생선)를 같은 고객에게 두 번 팔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쪽을 향하여 도로를 지나가는 징집 해제된 러시아 군인들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야 비로소 이 속임수에 대해 알게 될 것이므로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팔 수 있었다. (본문 225쪽)
또한 스타리예 도로기의 러시아군 캠프에 머물던 레비와 그의 동료들은, 전쟁이 끝난 뒤 귀환하는 러시아인의 이주 행렬에서 이탈한 말들을 잡아먹기 위해 사냥꾼과 도살자 조를 결성하기도 한다.
이어서 전문 사냥꾼과 도살자로 이루어진 조가 여럿 결성되었는데, 그들은 병들거나 무리에서 떨어진 말들을 쓰러뜨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가장 살진 말들을 골라 의도적으로 무리에서 벗어나게 만들고는 숲 속에서 도살했다. (……) 한 사람이 천으로 짐승의 눈을 가리면 다른 사람이 목덜미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기가 막힐 만큼 풍요로운 시기였다. 무제한으로, 공짜로 모두에게 말고기가 돌아갔다. 사냥꾼들은 죽은 말 한 마리당 최대한 두세 명분의 배급용 타바코를 요구할 정도였다. 숲의 구석이란 구석에서는 모두, 그리고 비가 올 때에는 붉은 집의 복도와 계단 밑에서도 버섯을 넣은 거대한 말고기 스테이크를 요리하느라 바쁜 남녀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말고기 스테이크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아우슈비츠의 생환자들은 수개월이 더 지나서야 겨우 원기를 회복했을 것이다. (본문 245쪽)
이런 말 사냥은 어느 동료 포로 하나가 캠프에 “진짜 정육점”을 차려 러시아 사령부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처럼 너무나 유쾌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은 레비의 열차 여정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주인공이 처한 극악한 조건, 작품의 주제가 주는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 마치 한 편의 로드무비처럼 읽히는 것은 이것이 매순간 트로이 전쟁에서 귀환하는 오디세우스 일행의 여정처럼 예측 불가능한 모험과 사건들이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이야기성’에 있다. 레비 일행의 슬프고도 기괴한 여행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놀라운 사건들과 그에 대한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대처들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연달아 터지는 웃음을 참기 힘들 것이다.
전쟁은 끝났는가?
우리는 아직 ‘휴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레비가 자신의 “스승”이자 “현인”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인 모르도 나훔. 레비는 해방 직후의 혼란 속을 이 그리스인과 얼마 동안 함께한다. 굉장히 현실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나훔은 낡은 구두가 찢어져 곤란을 겪고 있던 레비를 질책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두이며, 그다음이 먹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구두가 없으면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다”라고 대답하는 레비에게 나훔은 “전쟁은 늘 있다”고 일갈한다.
“그의 인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자신의 이러한 철의 세계를 거부하는 자는 눈멀고 비겁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라거(수용소)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도래했다. 그런데 나는 라거를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의 어떤 추악한 변형으로, 괴물스러운 뒤틀림으로 인식한 반면, 그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슬픈 확인으로 인식했다. ‘전쟁은 늘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는 바로 인간이다’라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2년에 대해서는 나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다.” (본문 78~79쪽)
레비는 전쟁의 경험,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인류 역사의 특수한 무엇, 일어나지 말아야 할 어떤 일이 일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반면, 그리스인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평화란 일시적인 것이고 인간의 삶 자체가 전쟁이라는 사실, 그리스인에게 아우슈비츠의 2년은 바깥세상의 2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이 ‘휴전’인 것은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전쟁은 늘 존재하며,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명랑하고 밝은 세계는 한순간 붕괴하기 쉬운 ‘휴전’ 동안의 세계일 뿐이며, 다음 전쟁은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레비가 왜 역사적 기억과 증언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전쟁의 기억을 잊는다면, 또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언제든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다. 레비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것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 각각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 아우슈비츠에 대해, 자기 집 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상적으로 자행된 조용한 대학살에 대해 ‘그들’은 알고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고 교회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들은 경건하게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모든 것을 당장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 그들 각자가 우리에게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얼굴에서 읽을 것이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고 (……) 자신들의 폐허 속에 피신해 방어하고 있었다. (본문 323~324쪽)
귀향의 과정에서 뮌헨에 들른 레비는 자신들을 절멸의 수용소로 보낸 독일인들이 자신에게 무언가 질문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거리의 독일인들은 레비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입을 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단단히 답변할 준비를, 마구 쏟아내야 할 증언을 준비하고 있던 레비는 그들의 철저한 무관심에 경악한다. 절멸의 수용소에서 돌아온 그들의 이야기를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레비는 그런 상황에 혼란과 고통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온 직후 펜을 든다. 바로 두 편의 아우슈비츠 생환기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은 역사를 왜,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레비식의 가장 진지한 문학적 답변일 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아픔을 경험한 우리나라도 1954년 남북 간에 휴전이 이뤄진 이후 벌써 5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당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시기를 경험한 전쟁의 목격자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남북 간의 긴장은 그 시간적 간극이 무색하게 여전히 우리 사회의 정치적·사회적 발전을 가로막는 덫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지난 역사를 돌아봤을 때 남과 북이 그 ‘전쟁의 기억과 증언들’을 레비의 것처럼 성찰적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오히려 진실된 증언과 목소리에는 눈감고 분노의 목소리로만 귀기울여온 시간이 아니었는지, 왜곡되고 허황된 증언을 마치 진실인 양 싸움을 부추기는 수단으로 사용해왔던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지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레비의 말처럼 우리는 그 아픈 경험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시대의 증언자’로서 레비가 남긴 글들을 오늘날 우리가 왜곡 없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읽어낼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후의 이야기
“아우슈비츠가 있다. 그러므로 신은 있을 수 없다.” 증언문학의 백미 『이것이 인간인가』로 국내에 잘 알려진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의 또 다른 대표작 『휴전』이 출간됐다. 『휴전』은 레비의 두번째 작품이자 『이것이 인간인가』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첫번째 작품이 저자가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어 해방되기까지의 10개월간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수용소에서 해방된 저자가 고향 토리노로 돌아가기까지 9개월 동안의 고난에 찬 귀환의 여정을 그린다. 저자는 전작『이것이 인간인가』를 쓰고 난 뒤 15년이 흘러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페인트 생산 공장에서 임원으로 일하며 퇴근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집필, 거의 1년여에 걸쳐 완성시켰다. 『휴전』은 레비가 친구들에게 자신의 귀향담을 들려주는 과정에서 이미 어느 정도는 구상된 것이라고 한다. 전작을 통하여 비로소 글쓰기의 기쁨을 맛본 저자는,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춰지자 그 이야기를 한데 끌어 모아 빼어난 글 솜씨를 발휘하여 또 한 권의 책으로 풀어놓았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나 자신을 완전한 작가로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말해야 했던 것을 말했고, 화학자로서의 일을 재개했다. 나에게 펜을 쥐도록 강요한 그 필요성을, 이야기해야 할 그 필연성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내 일상적인 직업의 세계에서는 너무 생소한 것이었다. 쓴다는 체험, 무에서의 창조, 올바른 말을 찾고 발견하는 일, 균형 잡힌 표현력이 넘치는 어떤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행복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또다시 그런 시도를 하고 싶어졌다. 나는 아직 해야 할 말을 한참 가지고 있었다.” (「작가의 말」12쪽)
『휴전』은 전작 『이것이 인간인가』와 따로 떼어서 이야기하기 힘든 쌍둥이와 같은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날카로운 관찰, 인간의 존재에 관한 통렬한 성찰, 암흑 가운데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유머와 재치 등 프리모 레비의 작가적 매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또한 수용소 해방 이후의 이야기라는 내용의 연속성이나 한 편 시(詩)로 시작하여 17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지는 구성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두 작품이 한 쌍을 이룬다. 다만 작품을 지배하는 분위기와 톤은 뚜렷하게 차별된다. 전작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면서 펼쳐지는 지옥의 여정을 마치 단테의 『신곡』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휴전』은 아우슈비츠가 해방되는 순간부터 토리노로 돌아오기까지의 긴 여정을 『오디세이아』에 빗대어 펼쳐내고 있다. 또한 전작이 아우슈비츠를 중심으로 한 ‘독일인’적인 차가운 규율의 세계를 그려냈다면, 이 작품은 무질서하고 무정부적인 러시아적 혼돈의 세계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혼란 속의 유럽의 모습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확실히 전작과 비교했을 때 좀더 가볍고 명랑해진 인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런 크고 작은 차이를 떠나 두 작품이 모두 독자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과 죽고 스러져간 인물들의 ‘증언’으로서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휴전』에서 레비가 “아우슈비츠의 자식” 후르비넥의 존재를 증언하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후르비넥은 아무도 아니었다. 죽음의 자식, 아우슈비츠의 자식이었다. 아이는 세 살가량 되어 보였고 아무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아이는 말할 줄 몰랐고 이름도 없었다. (……) 어린아이가 가끔씩 내뱉는 분명치 않은 소리들 가운데 하나를 후르비넥으로 해석하여 그에게 붙여준 것이었다. 아이는 허리 아래로 마비가 되었고 위축된 두 다리는 꼬챙이처럼 가늘었다. 그러나 수척한 삼각형의 얼굴 속에 푹 꺼진 아이의 두 눈은 끔찍하리만치 생생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요구와 주장들로, 침묵의 무덤을 깨부수고 나오려는 의지로 가득했다.” (본문 33~34쪽)
“1945년 3월 초, 후르비넥은 자유롭지만 진정 구원받지는 못한 채 죽었다. 그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렇게 나의 말을 통해 증언한다.” (본문 36쪽)
레비의 증언을 통해 비로소 “아무도 아닌” 후르비넥이 하나의 존재로 의미를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 작가는 라거 카포의 졸개로 정신착란에 걸린 클라이네 키푸라, 스무 살도 안 되어 디프테리아로 눈을 감은 앙드레와 앙투안 두 젊은 농부 등의 존재를 증언한다. 이들이 왜 그렇게 망가져갔으며, 어떻게 죽어갔는지 레비는 그의 기억과 사실적 기록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휴전』은 확실히 레비에게 전작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전작이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이 목격하고 감내한 공포를 세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증언문학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다면, 15년의 간극을 두고 집필된 『휴전』은 단순히 증언적 성격을 뛰어넘어 문장, 구성, 이야기성 등 여러 측면에서 진정한 문학 작품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휴전』이야말로 레비를 진정한 작가로 인정받게 한 첫번째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레비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첫 작품과 비교해가면서 각 장의 행 수, 각 페이지의 단어 수를 조사하고 그 단어들의 사용빈도까지 계산하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그의 본업이기도 한 화학자로서의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됨으로써 그의 글쓰기에 개성을 만들어 준 것이다.
레비에게 언어는 단어라는 재료들을 엄선하고 정제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것으로, 실험재료처럼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것이자 객관화되는 대상이다. 그의 문체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간결하며 객관적인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의 과학자적인 자질에 있다. 레비에게 있어 글쓰기는 실험실에서의 작업과 같이 고도의 정교함과 치밀함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작가는 실험을 즐기는 화학자에 다름 아니다. (이소영 「옮긴이의 말」 333쪽)
결국 『휴전』을 끝으로 레비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밝힌다. “내가 말해야 했던 것은 모두 말했”고 “더 이상 쓸 게 없다”는 것이다. 두 권의 책을 통해 아우슈비츠의 증언자로서의 임무는 다했다고 여긴 것일까. 레비는 그 후 『휴전』의 문학적 성취를 발판으로 다양한 작품에 도전하며 『주기율표』,『멍키스패너』등과 같은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휴전』, 바로 이 작품은 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룬 두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고향 토리노로
러시아의 광활한 대륙에서 벌어지는 오디세이아
“나는 이 해설을 쓰기 위해서 이 책을 다시금 읽었지만 이전에 몇 번이나 읽었음에도 이번에 또 그 재미에 빠져들어 몇 군데에서는 읽으면서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잔학, 기아, 죽음, 나쁜 짓, 범죄……, 인간이 지닌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을 묘사하고 있는데도 이만큼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은 왜일까?” (서경식 「작품해설」 361쪽)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러시아군에 의해서 해방되었다. 그 시점까지 살아남은 포로 중 5만 8,000명은 철군하는 독일군에 의해 연행되어 대부분 ‘죽음의 행진’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에 의해 구출된 사람은 중병 때문에 수용소에 남겨졌던 약 7,000명에 불과했고, 레비는 그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레비는 곧장 토리노로 귀향할 수 없었다. 러시아군에 인계된 레비는 간호사로 일하며 이동캠프에서 생활하게 된다. 드디어 6월 귀향을 위한 이동이 시작되지만 이 열차 여행은 터무니없게도 10월까지 이어진다. 전쟁으로 끊어진 선로를 만날 때마다 열차에서 열차로 갈아타기를 반복하고, 국경을 통과할 때마다 행정적 절차로 몇 시간씩 지체되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 고통스럽고 지난한 귀환의 여정은 레비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개성 강한 동료들과의 동행과 러시아와 유럽 각국을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 그들에 얽힌 사연들과 수많은 사건들이 피카레스크식으로 펼쳐진다.
특히 레비의 포로 동료들의 면면이 인상적인데 소설 곳곳에서 활약하는 체사레의 사기행각은 압권이다. 체사레는 낭종에 물을 채운 암탉을 속아서 샀다가, 거기서 힌트를 얻어 러시아군으로부터 보급받은 생선의 부레에 주사기로 물을 채워 비싸게 팔 궁리를 한다.
그(체사레)는 빨대 주둥이에 넣고 물을 채우려고 시도해보았지만 물은 전부 도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체사레는 주사기를 생각했다. 주사기로는 몇 번은 어느 정도의 진전이 있었으나 주사를 놓는 지점에 따라 달랐다. 그 지점에 따라 물이 금방 또는 잠시 뒤에 도로 나오거나 아니면 지속적으로 안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조그만 칼로 생선 여러 마리를 해부한 끝에, 체사레는 영구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부레에 주사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체사레가 파는 생선들은 보통 생선들에 비해 무게가 20~30퍼센트 더 나갔고, 게다가 훨씬 매력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처치를 받은 ‘립바’(큰 생선)를 같은 고객에게 두 번 팔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쪽을 향하여 도로를 지나가는 징집 해제된 러시아 군인들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야 비로소 이 속임수에 대해 알게 될 것이므로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팔 수 있었다. (본문 225쪽)
또한 스타리예 도로기의 러시아군 캠프에 머물던 레비와 그의 동료들은, 전쟁이 끝난 뒤 귀환하는 러시아인의 이주 행렬에서 이탈한 말들을 잡아먹기 위해 사냥꾼과 도살자 조를 결성하기도 한다.
이어서 전문 사냥꾼과 도살자로 이루어진 조가 여럿 결성되었는데, 그들은 병들거나 무리에서 떨어진 말들을 쓰러뜨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가장 살진 말들을 골라 의도적으로 무리에서 벗어나게 만들고는 숲 속에서 도살했다. (……) 한 사람이 천으로 짐승의 눈을 가리면 다른 사람이 목덜미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기가 막힐 만큼 풍요로운 시기였다. 무제한으로, 공짜로 모두에게 말고기가 돌아갔다. 사냥꾼들은 죽은 말 한 마리당 최대한 두세 명분의 배급용 타바코를 요구할 정도였다. 숲의 구석이란 구석에서는 모두, 그리고 비가 올 때에는 붉은 집의 복도와 계단 밑에서도 버섯을 넣은 거대한 말고기 스테이크를 요리하느라 바쁜 남녀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말고기 스테이크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아우슈비츠의 생환자들은 수개월이 더 지나서야 겨우 원기를 회복했을 것이다. (본문 245쪽)
이런 말 사냥은 어느 동료 포로 하나가 캠프에 “진짜 정육점”을 차려 러시아 사령부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처럼 너무나 유쾌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은 레비의 열차 여정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주인공이 처한 극악한 조건, 작품의 주제가 주는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 마치 한 편의 로드무비처럼 읽히는 것은 이것이 매순간 트로이 전쟁에서 귀환하는 오디세우스 일행의 여정처럼 예측 불가능한 모험과 사건들이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이야기성’에 있다. 레비 일행의 슬프고도 기괴한 여행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놀라운 사건들과 그에 대한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대처들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연달아 터지는 웃음을 참기 힘들 것이다.
전쟁은 끝났는가?
우리는 아직 ‘휴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레비가 자신의 “스승”이자 “현인”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인 모르도 나훔. 레비는 해방 직후의 혼란 속을 이 그리스인과 얼마 동안 함께한다. 굉장히 현실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나훔은 낡은 구두가 찢어져 곤란을 겪고 있던 레비를 질책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두이며, 그다음이 먹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구두가 없으면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다”라고 대답하는 레비에게 나훔은 “전쟁은 늘 있다”고 일갈한다.
“그의 인생은 전쟁으로 점철되었고 자신의 이러한 철의 세계를 거부하는 자는 눈멀고 비겁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라거(수용소)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도래했다. 그런데 나는 라거를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의 어떤 추악한 변형으로, 괴물스러운 뒤틀림으로 인식한 반면, 그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슬픈 확인으로 인식했다. ‘전쟁은 늘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는 바로 인간이다’라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2년에 대해서는 나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다.” (본문 78~79쪽)
레비는 전쟁의 경험,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인류 역사의 특수한 무엇, 일어나지 말아야 할 어떤 일이 일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반면, 그리스인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평화란 일시적인 것이고 인간의 삶 자체가 전쟁이라는 사실, 그리스인에게 아우슈비츠의 2년은 바깥세상의 2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이 ‘휴전’인 것은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전쟁은 늘 존재하며,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명랑하고 밝은 세계는 한순간 붕괴하기 쉬운 ‘휴전’ 동안의 세계일 뿐이며, 다음 전쟁은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레비가 왜 역사적 기억과 증언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전쟁의 기억을 잊는다면, 또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언제든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올 수 있다. 레비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것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 각각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 아우슈비츠에 대해, 자기 집 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상적으로 자행된 조용한 대학살에 대해 ‘그들’은 알고 있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길을 가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고 교회의 문턱을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아니라면 그들은 경건하게 우리에게서, 나에게서 모든 것을 당장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 (……) 그들 각자가 우리에게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얼굴에서 읽을 것이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고 (……) 자신들의 폐허 속에 피신해 방어하고 있었다. (본문 323~324쪽)
귀향의 과정에서 뮌헨에 들른 레비는 자신들을 절멸의 수용소로 보낸 독일인들이 자신에게 무언가 질문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거리의 독일인들은 레비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입을 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단단히 답변할 준비를, 마구 쏟아내야 할 증언을 준비하고 있던 레비는 그들의 철저한 무관심에 경악한다. 절멸의 수용소에서 돌아온 그들의 이야기를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레비는 그런 상황에 혼란과 고통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온 직후 펜을 든다. 바로 두 편의 아우슈비츠 생환기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은 역사를 왜,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레비식의 가장 진지한 문학적 답변일 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아픔을 경험한 우리나라도 1954년 남북 간에 휴전이 이뤄진 이후 벌써 5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당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시기를 경험한 전쟁의 목격자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남북 간의 긴장은 그 시간적 간극이 무색하게 여전히 우리 사회의 정치적·사회적 발전을 가로막는 덫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지난 역사를 돌아봤을 때 남과 북이 그 ‘전쟁의 기억과 증언들’을 레비의 것처럼 성찰적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오히려 진실된 증언과 목소리에는 눈감고 분노의 목소리로만 귀기울여온 시간이 아니었는지, 왜곡되고 허황된 증언을 마치 진실인 양 싸움을 부추기는 수단으로 사용해왔던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지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레비의 말처럼 우리는 그 아픈 경험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시대의 증언자’로서 레비가 남긴 글들을 오늘날 우리가 왜곡 없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읽어낼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목차
작가의 말
해빙
대수용소
그리스인
카토비체
체사레
승리의 날
꿈꾸는 사람들
남으로
북으로
쿠리제타
옛 길들
숲과 길
휴가
연극
스타리예 도로기에서 이아시로
이아시에서 국경선으로
다시 깨어나기
옮긴이의 말
부록1 프리모 레비와 『일 조르노』지의 인터뷰
부록2 프리모 레비 연보
부록3 작품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