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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3009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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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성찰하는 지식인의 필독서를 모토로 대안적 지식과 담론을 소개하는 ‘한겨레지식문고’의 신간이 나왔다. <인권은 정치적이다> <기후변화의 정치경제학> <중동 전쟁이 내 출근길에 미치는 영향은>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 <미국인도 잘 모르는 미국 선거 이야기> 에 이어 유럽연합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 <EU 매뉴얼-유럽연합이란 무엇인가>와 함께 출간된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군주론 너머 진짜 마키아벨리를 만나다>를 소개한다.
마키아벨리는 표리부동과 부도덕함의 대명사인가
‘마키아벨리’ 하면 많은 이들이 정치꾼의 교활함, 표리부동, 부도덕함 등을 떠올린다. 어떤 이는 그를 폭력과 권력의 문제를 처음으로 정치 담론의 중심으로 끌고 온 인물이라 평한다. 또 어떤 이는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새로운 덕목의 핵심은 군주가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고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마키아벨리의 저서들은 많은 도덕주의자, 보수주의자, 혁명가 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 한편,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건, 그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의 견해에 담긴 의미를 세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정치권력이나 리더십과 관련된 쟁점이 거론될 때마다 왜 그의 이름이 여전히, 그토록 자주 회자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스키너는 마키아벨리가 본질적으로 인문주의 정치사상가라고 본다. 마키아벨리가 지닌 정치 비전의 가장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면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물려받았고 또 계속 유지했던 인문주의적 가정에 대한 일련의 논쟁적인, 때로는 풍자적인 반응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키너는 자신의 관점과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키아벨리의 저서인 《서한집》 《외교문서집》 《군주론》 《로마사 논고》 《피렌체사》 등을 인용하고 각 인용구 뒤에는 괄호를 붙여 쪽수까지 정확히 표기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마키아벨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온전히 마키아벨리의 생각과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에서 비롯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 언급된 다양한 자료들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 저서들이 처음 저술된 경위, 즉 고전 철학과 르네상스 철학의 지적 맥락은 물론, 16세기 초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정치적 배경 등을 살피는 데 유용하게 활용된다. 정식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이 어떻게 피렌체공화국의 공무원이 되었는지, 그가 외교 사절로 활동하면서 무엇을 보고 깨달았는지, 그리고 그 깨달은 바를 다시 공무원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어떻게 책으로 구현했는지를 자세히 다루면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마키아벨리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덕마저 무시하는 냉혹한 모략가이자 ‘악의 교사’, ‘폭력과 기만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선물할 것이다.
공화국의 외교관에서 군주의 조언자로,
또 자유의 이론가, 피렌체의 역사가로,
마키아벨리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다
14세기 피렌체인 사이에서는 ‘인문주의적 학문’의 개념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그들은 지도적 인문주의자를 시 정부의 중요한 자리에 앉히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마키아벨리는 정부 요직에 앉을 수 있었다. 피렌체공화국 시뇨리아의 제1서기장 밑에 있는 6인의 비서 가운데 한 명이자 제2서기국장 자리에 앉게 된 마키아벨리는 1500년 7월 첫 외교 사절 임무를 맡게 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러 교황과 황제, 군주들을 만나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파악하고 기록해나간다. 그리고 이 기록이 나중에 그의 저서들에 그대로 기술된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시뇨리아를 위협하던 체사르 보르자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한 저서 《군주론》에서 보르자가 책략을 실행해나가는 과정이 그의 인물됨 못지않게 인상적이라는 견해를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즉, 보르자는 “자리를 잡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조치를 취했고”, 그 짧은 기간에 “후일의 권력을 위한 강력한 토대”를 용케 마련했으며, 만일 운이 그를 저버리지 않았더라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물론 “교황의 아들로 태어난 운에 너무 의존했다”라는 차가운 평가도 함께 내린다.
이 밖에도 마키아벨리는 외교 사절 자격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 등 각국의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으며, 그들의 인물됨과 행동방식을 그리스-로마 고전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교해가면서 통치술, 국제 정세, 정치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차곡차곡 다져나갔다. 그리고 이런 견해와 시각은 메디치가에 헌정하기 위해 쓰였다는 《군주론》에 오롯이 담겨 있다.
《군주론》의 완성과 함께 군주의 조언자로서 공직에 복귀하고자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 마키아벨리는 낙담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 스스로를 문필가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로마사 논고》의 집필로 이어진다. 《로마사 논고》는 《군주론》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마키아벨리의 독창적인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역작이다. 《로마사 논고》는 리비우스의 《로마사》의 처음 열 권에 대한 주석서의 형식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생각을 펼치고 있다.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로마사 논고》는 1권에서는 자유로운 국가의 정체(政體), 2권에서는 군사력의 효과적 유지, 3권에서는 지도력(리더십)을 주로 다룬다. “경험상 도시들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영토와 부를 증가시킬 수 없었다”라는《로마사 논고》2권의 앞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자유’에 대해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가 추구한 지도력은 결국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지도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필가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로마사 논고》를 집필한 후, 마키아벨리는 드디어 메디치가로부터 관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외교나 정치에 대한 업무는 아니었다. 1520년 11월,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로부터 피렌체사를 저술하라는 공식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남은 생의 대부분을 《피렌체사》를 집필하는 데 바친다.
운명의 수레바퀴 앞에 선 인간 마키아벨리
이 책에서 스키너는 마키아벨리를 ‘폭력과 기만’의 화신이 아닌, 다시 공직으로 돌아가고자 메디치가에 책을 헌정하고, 친구에게 자리를 부탁하며, 소일거리로 토론회에 나갔다가 본격적으로 책을 써보기로 마음먹은 정치사상가로 표현하고 있다. 즉, 외교 사절로서 자신이 만난 지도자들의 성공과 실패를 지켜보면서 피렌체공화국의 번영을 생각하고, 메디치가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고 있던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을 통해 마키아벨리라는 정치사상가에 대한 정치적ㆍ사상적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어렵고 까다롭다는 선입관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마키아벨리와 《군주론》 그리고 위대한 저서인 《로마사 논고》에 보다 쉽게 접근하게 되길 바란다.
마키아벨리는 표리부동과 부도덕함의 대명사인가
‘마키아벨리’ 하면 많은 이들이 정치꾼의 교활함, 표리부동, 부도덕함 등을 떠올린다. 어떤 이는 그를 폭력과 권력의 문제를 처음으로 정치 담론의 중심으로 끌고 온 인물이라 평한다. 또 어떤 이는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새로운 덕목의 핵심은 군주가 도덕적 제약을 받지 않고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마키아벨리의 저서들은 많은 도덕주의자, 보수주의자, 혁명가 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 한편,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건, 그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의 견해에 담긴 의미를 세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정치권력이나 리더십과 관련된 쟁점이 거론될 때마다 왜 그의 이름이 여전히, 그토록 자주 회자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스키너는 마키아벨리가 본질적으로 인문주의 정치사상가라고 본다. 마키아벨리가 지닌 정치 비전의 가장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면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물려받았고 또 계속 유지했던 인문주의적 가정에 대한 일련의 논쟁적인, 때로는 풍자적인 반응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키너는 자신의 관점과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키아벨리의 저서인 《서한집》 《외교문서집》 《군주론》 《로마사 논고》 《피렌체사》 등을 인용하고 각 인용구 뒤에는 괄호를 붙여 쪽수까지 정확히 표기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마키아벨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온전히 마키아벨리의 생각과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에서 비롯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 언급된 다양한 자료들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 저서들이 처음 저술된 경위, 즉 고전 철학과 르네상스 철학의 지적 맥락은 물론, 16세기 초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정치적 배경 등을 살피는 데 유용하게 활용된다. 정식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마키아벨리라는 사람이 어떻게 피렌체공화국의 공무원이 되었는지, 그가 외교 사절로 활동하면서 무엇을 보고 깨달았는지, 그리고 그 깨달은 바를 다시 공무원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어떻게 책으로 구현했는지를 자세히 다루면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마키아벨리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덕마저 무시하는 냉혹한 모략가이자 ‘악의 교사’, ‘폭력과 기만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선물할 것이다.
공화국의 외교관에서 군주의 조언자로,
또 자유의 이론가, 피렌체의 역사가로,
마키아벨리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다
14세기 피렌체인 사이에서는 ‘인문주의적 학문’의 개념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그들은 지도적 인문주의자를 시 정부의 중요한 자리에 앉히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마키아벨리는 정부 요직에 앉을 수 있었다. 피렌체공화국 시뇨리아의 제1서기장 밑에 있는 6인의 비서 가운데 한 명이자 제2서기국장 자리에 앉게 된 마키아벨리는 1500년 7월 첫 외교 사절 임무를 맡게 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러 교황과 황제, 군주들을 만나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파악하고 기록해나간다. 그리고 이 기록이 나중에 그의 저서들에 그대로 기술된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시뇨리아를 위협하던 체사르 보르자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리더십을 분석한 저서 《군주론》에서 보르자가 책략을 실행해나가는 과정이 그의 인물됨 못지않게 인상적이라는 견해를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즉, 보르자는 “자리를 잡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조치를 취했고”, 그 짧은 기간에 “후일의 권력을 위한 강력한 토대”를 용케 마련했으며, 만일 운이 그를 저버리지 않았더라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물론 “교황의 아들로 태어난 운에 너무 의존했다”라는 차가운 평가도 함께 내린다.
이 밖에도 마키아벨리는 외교 사절 자격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 등 각국의 지도자들을 두루 만났으며, 그들의 인물됨과 행동방식을 그리스-로마 고전에 나오는 인물들과 비교해가면서 통치술, 국제 정세, 정치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차곡차곡 다져나갔다. 그리고 이런 견해와 시각은 메디치가에 헌정하기 위해 쓰였다는 《군주론》에 오롯이 담겨 있다.
《군주론》의 완성과 함께 군주의 조언자로서 공직에 복귀하고자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 마키아벨리는 낙담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 스스로를 문필가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로마사 논고》의 집필로 이어진다. 《로마사 논고》는 《군주론》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마키아벨리의 독창적인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역작이다. 《로마사 논고》는 리비우스의 《로마사》의 처음 열 권에 대한 주석서의 형식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생각을 펼치고 있다.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로마사 논고》는 1권에서는 자유로운 국가의 정체(政體), 2권에서는 군사력의 효과적 유지, 3권에서는 지도력(리더십)을 주로 다룬다. “경험상 도시들은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영토와 부를 증가시킬 수 없었다”라는《로마사 논고》2권의 앞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자유’에 대해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가 추구한 지도력은 결국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지도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필가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로마사 논고》를 집필한 후, 마키아벨리는 드디어 메디치가로부터 관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외교나 정치에 대한 업무는 아니었다. 1520년 11월,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로부터 피렌체사를 저술하라는 공식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남은 생의 대부분을 《피렌체사》를 집필하는 데 바친다.
운명의 수레바퀴 앞에 선 인간 마키아벨리
이 책에서 스키너는 마키아벨리를 ‘폭력과 기만’의 화신이 아닌, 다시 공직으로 돌아가고자 메디치가에 책을 헌정하고, 친구에게 자리를 부탁하며, 소일거리로 토론회에 나갔다가 본격적으로 책을 써보기로 마음먹은 정치사상가로 표현하고 있다. 즉, 외교 사절로서 자신이 만난 지도자들의 성공과 실패를 지켜보면서 피렌체공화국의 번영을 생각하고, 메디치가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고 있던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을 통해 마키아벨리라는 정치사상가에 대한 정치적ㆍ사상적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어렵고 까다롭다는 선입관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마키아벨리와 《군주론》 그리고 위대한 저서인 《로마사 논고》에 보다 쉽게 접근하게 되길 바란다.
목차
머리말
들어가며
1장 - 외교관 마키아벨리
2장 - 군주의 조언자 마키아벨리
3장 - 자유의 이론가 마키아벨리
4장 - 피렌체의 역사가 마키아벨리
옮긴이의 말
본문에 인용된 마키아벨리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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