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국가처럼 보기: 왜 국가는 계획에 실패하는가
- 대등서명
- Seeing like state: how certain schemes to improve the human condition have failed
- 개인저자
- 제임스 C. 스콧, 전상인 옮김
- 발행사항
- 서울:,에코리브르,,2010
- 형태사항
- 685 p.; 24 cm
- ISBN
- 9788962630428
- 청구기호
- 342 스825ㄱ
- 서지주기
- 찾아보기 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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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3013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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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1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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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자료실
책 소개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자 한 국가 주도형 공공 계획들은 왜 실패하는가
이 책은 20세기에 전성시대를 구가한 국민국가가 사회와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독해했으며 이에 기초해서 세상을 어떻게 변형시키고자 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시도들이 왜 대부분 실패로 끝났는지를 밝힌다. ≪국가처럼 보기: 왜 국가는 계획에 실패하는가≫라는 책 제목과 부제는 근대국가의 의도와 그 결과를 함축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국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국가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지만, 그 목적한 바를 현실에서 이루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에 엄청난 해악을 초래했다.
이 책의 키워드를 크게 두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가독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더 결정적인 ‘하이 모더니즘’이다.
‘가독성’은 국가가 통치를 위해 공간과 사람들을 읽기 쉽게 만들었다. 역사를 통해서 국가가 보다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해 이용해왔던 도구들을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토지 소유의 제도화, 각종 도량형의 정비 혹은 통일, 성씨 창제, 토지 구획, 표준어 지정, 도시 설계, 이동하는 사람들을 항구적으로 붙잡아두려는 노력(이를테면 정착화), 교통 체계화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더욱 중요한 키워드인 ‘하이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스콧은 이것을 “대략 1830년대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서유럽과 북미 지역이 경험한 산업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과학적?기술적 진보에 대한 신념의 강력한(근육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형태”로 설명한다. 이러한 하이 모더니즘은 20세기 국가 대부분이 도입하고 선호했다. 그것은 각 나라가 처한 역사적 조건과도 무관했고 좌우 이념의 스펙트럼도 초월한 이데올로기였다. 이는 이 책이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서유럽, 구소련, 미국, 동남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에 걸쳐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회공학적 발상이 고의적인 악의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제임스 스콧은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 권력의 진정성 자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 결과는 낭패 혹은 대재앙인 경우가 많았다. 소련의 집단농장이 그러했고, 탄자니아나 에티오피아 등지의 강제 촌락화가 그러했다. 브라질리아나 찬디가르의 신도시 건설이 그랬고, 제3세계 국가들의 수많은 개발 계획이 그러했으며, 미국의 산업 영농도 그런 점에서는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청난 인명 손실, 인권 유린과 폭력의 만연, 환경 파괴와 공동체의 붕괴는 변명의 여지없이 하이 모더니즘으로 무장한 20세기 근대 국민국가의 부산물이다.
물론 저자가 하이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측면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전근대 사회의 보통사람들이 감내한 희생과 고통을 감안할 경우 근대 국민국가는 분명히 해방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고 하이 모더니즘은 법 앞의 평등, 만인을 위한 시민권, 그리고 생존?건강?교육?주거의 권리 측면에서 인류 문명에 나름대로 기여를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책의 목적이 더욱 뚜렷해진다. 곧 “인간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선의로 시작한 유토피아적 계획이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분명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결정적인 패착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두 가지 면을 그 근거로 삼는다. 하나는 이러한 하이 모더니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강압적 권력을 한껏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갖춘 권위주의적 국가다. 즉 ‘권위주의적 하이 모더니즘’인 것이다. 근대주의나 공공 계획 자체가 원인 제공자라기보다 그것의 과용과 오용과 남용이 비극의 씨앗이라는 주장이다. 권위주의적 하이 모더니즘은 인간의 창의성을 억압했고, 지역적 다양성을 간과했으며, 무엇보다 현장이나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전통적?토착적?구체적 지식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저자는 메티스라고 하는데, 그것은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과업을 오랫동안 수행할 때만 얻어지는 지식이며 (이 책에서 실행지(實行智)라고 번역한) 실천적 혹은 실용적 지식을 의미한다.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 건설을 ‘임기응변’과 ‘창조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규정하면서 호소했던 지식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와 같은 메티스는 제도권 지식의 패권주의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가려져왔고 짓밟혀왔다.
결정적 패착의 다른 하나는 국가의 이러한 계획에 저항할 능력을 상실한 기진맥진한 시민사회다. 전쟁이나 혁명 그리고 경제적 파탄은 종종 시민사회를 극단적으로 약화시킬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통치 제도를 한결 쉽게 수용하게끔 만든다. 과거 식민지 통치는 그 사회공학적 열망과 대중의 반대에 대한 막강한 통제 능력과 더불어 이와 같은 조건을 잘 충족시킨다.
이를 위해 저자는 종횡무진 역사와 여러 분야를 넘나든다. 예를 들어 도시 계획가와 혁명가들의 하이 모더니즘 사고와 관행을 과정과 복잡성 그리고 끝없는 개방성을 강조하는 견해와 대조한다. 르코르뷔지에와 레닌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제인 제이콥스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통해 실행한다. 또한 생산과 사회 질서에 대한 도식적? 권위주의적 해결 방법이 현장 관습 속에 용해되어 있는 귀중한 지식을 배제할 경우에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저자는 소련의 집단화와 탄자니아의 강제 촌락화를 설명한다.
현대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저자는 이 책의 비판이 자본주의 승리라는 1989년 이후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낡은 고고학처럼 비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저자가 비판한 국가들이 거의 모두 사라졌거나 아니면 그 야망을 극단적으로 접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스콧은 과학적 농경이나 산업적 영농,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 일반을 검토하며 분명히 지적한 것처럼 동질화, 획일성, 격자, 용감무쌍한 단순화의 조직이라는 점에서 대규모 자본주의와 국가는 사실상 똑같은 존재임을 분명히 밝힌다. 다만 자본주의에서는 단순화의 비용을 자본가들이 지불한다. 오늘날에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동질화를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힘일 것이다. 이때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국가가 지역적 차이와 다양성의 옹호자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곧 사회공학이라는 근대적 계획의 실패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관료주의적 동질화에 적용되는 것만큼 시장 주도적 표준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책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나 일본 혹은 중국에 대한 분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국가처럼 보기’에 관한 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하이 모더니즘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연장선 위에 네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다섯 차례의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도 ‘국가처럼 보기’의 관행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렇다면 공공 계획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고 슬기롭게 잘하라는 제임스 스콧의 주장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필요하고 가능한 것은 하이 모더니즘의 역할을 축소하고 궤도를 수정함으로써 근대를 완성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시적 발상의 자제, 점진주의적인 접근, 다양성과 자율성의 증진, 역사와 관습의 존중, 의사소통의 활성화, 분권화와 민주주의 심화,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처럼 보지 않는’ 지식이나 지혜의 수용을 통해 가능하다.
이 책은 20세기에 전성시대를 구가한 국민국가가 사회와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독해했으며 이에 기초해서 세상을 어떻게 변형시키고자 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시도들이 왜 대부분 실패로 끝났는지를 밝힌다. ≪국가처럼 보기: 왜 국가는 계획에 실패하는가≫라는 책 제목과 부제는 근대국가의 의도와 그 결과를 함축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국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국가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지만, 그 목적한 바를 현실에서 이루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에 엄청난 해악을 초래했다.
이 책의 키워드를 크게 두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가독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더 결정적인 ‘하이 모더니즘’이다.
‘가독성’은 국가가 통치를 위해 공간과 사람들을 읽기 쉽게 만들었다. 역사를 통해서 국가가 보다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해 이용해왔던 도구들을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토지 소유의 제도화, 각종 도량형의 정비 혹은 통일, 성씨 창제, 토지 구획, 표준어 지정, 도시 설계, 이동하는 사람들을 항구적으로 붙잡아두려는 노력(이를테면 정착화), 교통 체계화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더욱 중요한 키워드인 ‘하이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스콧은 이것을 “대략 1830년대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서유럽과 북미 지역이 경험한 산업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과학적?기술적 진보에 대한 신념의 강력한(근육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형태”로 설명한다. 이러한 하이 모더니즘은 20세기 국가 대부분이 도입하고 선호했다. 그것은 각 나라가 처한 역사적 조건과도 무관했고 좌우 이념의 스펙트럼도 초월한 이데올로기였다. 이는 이 책이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서유럽, 구소련, 미국, 동남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에 걸쳐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회공학적 발상이 고의적인 악의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제임스 스콧은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 권력의 진정성 자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 결과는 낭패 혹은 대재앙인 경우가 많았다. 소련의 집단농장이 그러했고, 탄자니아나 에티오피아 등지의 강제 촌락화가 그러했다. 브라질리아나 찬디가르의 신도시 건설이 그랬고, 제3세계 국가들의 수많은 개발 계획이 그러했으며, 미국의 산업 영농도 그런 점에서는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청난 인명 손실, 인권 유린과 폭력의 만연, 환경 파괴와 공동체의 붕괴는 변명의 여지없이 하이 모더니즘으로 무장한 20세기 근대 국민국가의 부산물이다.
물론 저자가 하이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측면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전근대 사회의 보통사람들이 감내한 희생과 고통을 감안할 경우 근대 국민국가는 분명히 해방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고 하이 모더니즘은 법 앞의 평등, 만인을 위한 시민권, 그리고 생존?건강?교육?주거의 권리 측면에서 인류 문명에 나름대로 기여를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책의 목적이 더욱 뚜렷해진다. 곧 “인간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선의로 시작한 유토피아적 계획이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확실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바로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분명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주장하는 결정적인 패착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두 가지 면을 그 근거로 삼는다. 하나는 이러한 하이 모더니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강압적 권력을 한껏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갖춘 권위주의적 국가다. 즉 ‘권위주의적 하이 모더니즘’인 것이다. 근대주의나 공공 계획 자체가 원인 제공자라기보다 그것의 과용과 오용과 남용이 비극의 씨앗이라는 주장이다. 권위주의적 하이 모더니즘은 인간의 창의성을 억압했고, 지역적 다양성을 간과했으며, 무엇보다 현장이나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전통적?토착적?구체적 지식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저자는 메티스라고 하는데, 그것은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과업을 오랫동안 수행할 때만 얻어지는 지식이며 (이 책에서 실행지(實行智)라고 번역한) 실천적 혹은 실용적 지식을 의미한다.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 건설을 ‘임기응변’과 ‘창조성’을 요구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규정하면서 호소했던 지식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와 같은 메티스는 제도권 지식의 패권주의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가려져왔고 짓밟혀왔다.
결정적 패착의 다른 하나는 국가의 이러한 계획에 저항할 능력을 상실한 기진맥진한 시민사회다. 전쟁이나 혁명 그리고 경제적 파탄은 종종 시민사회를 극단적으로 약화시킬 뿐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통치 제도를 한결 쉽게 수용하게끔 만든다. 과거 식민지 통치는 그 사회공학적 열망과 대중의 반대에 대한 막강한 통제 능력과 더불어 이와 같은 조건을 잘 충족시킨다.
이를 위해 저자는 종횡무진 역사와 여러 분야를 넘나든다. 예를 들어 도시 계획가와 혁명가들의 하이 모더니즘 사고와 관행을 과정과 복잡성 그리고 끝없는 개방성을 강조하는 견해와 대조한다. 르코르뷔지에와 레닌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제인 제이콥스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통해 실행한다. 또한 생산과 사회 질서에 대한 도식적? 권위주의적 해결 방법이 현장 관습 속에 용해되어 있는 귀중한 지식을 배제할 경우에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저자는 소련의 집단화와 탄자니아의 강제 촌락화를 설명한다.
현대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저자는 이 책의 비판이 자본주의 승리라는 1989년 이후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낡은 고고학처럼 비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저자가 비판한 국가들이 거의 모두 사라졌거나 아니면 그 야망을 극단적으로 접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스콧은 과학적 농경이나 산업적 영농,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 일반을 검토하며 분명히 지적한 것처럼 동질화, 획일성, 격자, 용감무쌍한 단순화의 조직이라는 점에서 대규모 자본주의와 국가는 사실상 똑같은 존재임을 분명히 밝힌다. 다만 자본주의에서는 단순화의 비용을 자본가들이 지불한다. 오늘날에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동질화를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힘일 것이다. 이때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국가가 지역적 차이와 다양성의 옹호자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곧 사회공학이라는 근대적 계획의 실패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관료주의적 동질화에 적용되는 것만큼 시장 주도적 표준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책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나 일본 혹은 중국에 대한 분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국가처럼 보기’에 관한 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하이 모더니즘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연장선 위에 네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다섯 차례의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도 ‘국가처럼 보기’의 관행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렇다면 공공 계획을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고 슬기롭게 잘하라는 제임스 스콧의 주장은 우리에게 아주 소중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필요하고 가능한 것은 하이 모더니즘의 역할을 축소하고 궤도를 수정함으로써 근대를 완성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시적 발상의 자제, 점진주의적인 접근, 다양성과 자율성의 증진, 역사와 관습의 존중, 의사소통의 활성화, 분권화와 민주주의 심화,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처럼 보지 않는’ 지식이나 지혜의 수용을 통해 가능하다.
목차
1부 가독성과 단순화의 국가 프로젝트
01 자연과 공간
02 도시, 사람 그리고 언어
2부 변혁적 비전들
03 권위주의적 하이 모더니즘
04 하이 모더니즘 도시: 실험과 비평
05 혁명당: 계획과 진단
3부 촌락과 생산의 사회공학
06 소련의 집단화, 자본주의적 야망
07 탄자니아의 강제 촌락화: 미학과 모형화
08 자연 길들이기: 가독성과 단순성의 농업
4부 사라진 고리
09 얇은 단순화와 실행지: 메티스
10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