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L7
복잡성 사고 입문
- 개인저자
- 에드가 모랭 지음, 신지은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 에코리브르, 2012
- 형태사항
- 207 p. ; 24 cm
- ISBN
- 9788962630626
- 청구기호
- 181.3 모232ㅂ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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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3517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3517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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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또는 그것을 극복하는 사유의 한 방법
1
에드가 모랭의 이 책 《복잡성 사고 입문》은 현대 문명에 지친 저자가 어떻게 하면 현대 문명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하나의 사유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집필된 책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현대 문명의 위기가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16∼17세기 이후 시작된 과학의 발견 이후 인간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된 이성과 과학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이성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근대 문명은 19세기까지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인간 역사를 지배하다가 드디어 20세기에 그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한 사실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인간 생활을 끊임없이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환원하고 분리하고 단순화했는데,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온갖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저자는 이 책의 서두를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근대 이성에 대한 비판이며, 그 비판의 방법이 바로 ‘복잡성 패러다임’이다. 다시 말해 저자는 그 대안으로 반(反)이성을 제시하는 또 하나의 단순한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복잡한 대안을 제시한다. 이 복잡성 패러다임은 외부 세계와 인간 정신이 함께 작동하며 구성하는 다차원적인 현실, 경제적 ·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영적인 것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태로 직조되어 구성된 현실을 해석해내려 한다. 즉 복잡한 현실을 복잡한 방식으로 보는 패러다임이다.
사실 근대 과학의 발전은 복잡성과 애매모호함을 제거하고 단순성과 명료함을 추구하면서 발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이 어떤 측면에서는 지나치게 폭력적이었고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거대하고 복잡한 현실을 협소하고 단순한 틀 속에 집어넣고 공식화하고 절단하는 이것이야말로 근대 이성의 폭력이다. 모랭은 이러한 지식의 맹목성과 폭력을 비판하면서 이성의 오류와 착각, 맹목의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
모랭은 특히 합리성과 합리화를 구분하면서 합리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성이란 개방적인 것으로, 비합리적이거나 애매모호한 것과 협상하며, 자기비판적인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합리성은 논리의 한계와 결정주의의 한계, 기계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또한 인간 정신이 전지전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이 미스터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반면 합리화는 폐쇄적인 것으로, 자신에게 저항하는 현실과 대화할 줄 모르고, 기계론적이고 결정적인 모델에 지배되며, 존재와 주관성, 감성, 삶을 무시하는 합리주의로 귀착된다. 합리화는 합리성과 동일한 원천에서 출발하지만, 오류와 착각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 혼돈과 불신의 시대에 우리는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개방적이고 합리적이며 자기 비판적이고 성찰적이면서 동시에 끝없이 자기개혁을 해나가는 진정한 이성과 문명이다. 자기 안에 갇힌 이성은 바로 광기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합리화의 예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편집광이나 자기 속에 갇혀 자신의 진리성을 철저하게 확신하면서 자신의 오류를 비판하는 일체의 공격에도 끄덕하지 않는 맹신, 정형화한 인식 틀, 우매한 신앙, 순응주의적 자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성을 통해 이런 광기와 순응주의, 편집광과 맞서 싸워야 한다.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즉 우리는 이성과 관념의 신격화에 대항해 싸워야 하지만, 이성과 관념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싸움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합리화와 관념론에 저항하는 합리성과 이성은 논리적 망상과 편협함을 교정하고 경험적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자기비판적인 확장된 형태의 이성이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진 시대에 우리는 합리성과 합리화의 경계에 끊임없이 주의하며 신화와 무의식, 상상의 영역, 존재의 주관성, 감성을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 이성을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와 삶은 결코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계약적인 방식으로 정의되진 않는다. 인력과 척력, 감정과 열정으로 구성된 하나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력과 척력, 감정과 열정으로 구성된 하나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공통감(cum-sensualis)’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시켜 ‘미학(aisth?sis)’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즉 우리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의 합의, 격앙된 감각의 소통, 마술과 신화, 상상력 등의 공통 특징이라 할 ‘함께 느끼고 함께 전율함’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부로 존재한다. 우리가 이런 부분을 이성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무시하고 억누르고 배제한다면 복잡성 사고로 이행하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2
단순성 패러다임은 현상과 사건, 인간의 맥락과 총체성, 다차원성과 복잡성, 현상에 개입하는 우연성 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이 속에서 전체의 의미는 파편화하고 개별 정보와 사건은 분절된다.
자연?사회 현상과 인간 행위의 복잡성을 복잡한 그대로 보려는 복잡성 사고는 필연적으로 학문 간의 통합, 통섭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러한 분과 학문들 간의 통합이 복잡한 조직 현상들을 단순한 수준으로 환원시키며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실패로 끝날 것이고, 오직 통일성과 다양성, 지속과 단절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랭이 지적했듯이 물리학, 생물학, 인류학 등이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물리학주의, 생물학주의, 인류학주의를 무력하게 만들면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는 않은 채 통합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본문 78쪽). 다시 말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등으로 분절된 분과 학문은 사실 대단히 한정된 진리(혹은 해석)만을 가지게 되며, 이는 각 영역 간 관점의 충돌과 갈등, 경청과 인내를 통해서만 상호보완, 수정, 발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합학문이 오늘날 학문의 주요 형식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배적인 학문편제 방식으로 군림하던 분과적 종합이라는 방식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분과 학문 간의 공동연구가 추진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학제간 연구, 통섭, 통합, 융합 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 경향은 거스르기 힘든 대세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이것을 인지하면서 지식을 어떻게 편성하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새로운 지식의 통합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지 쉽게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1979년 에스파냐 코르도바에서 있었던 학술대회를 살펴봄으로써 통합 학문을 향해 가는 한 가지 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대회의 제목은 ‘과학과 의식’이었는데, 5일 동안 전 세계에서 온 60여 명의 과학자, 인문학자들이 과학과 정신성에 대해 토론했다. 코르도바가 학술대회 장소로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중세 유럽에 전한 이븐 루슈드(Ibn Rushd)가 활약했던 곳이다. 이븐 루슈드에 의해 서구는 신비적인 종교와 정신성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그리고 단순한) 세계 인식에 몰두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도시는 동양과 서양, 합리성과 비합리성(종교, 신비주의)이 분열되고 단순성 패러다임이 부흥한 상징적 장소인 것이다. 이 학술대회는 그후 여러 차례 이어졌고, 1986년 베네치아 모임에서 ‘베네치아 선언문’으로 결실을 맺는데, 이 선언문은 가장 발전된 형태의 (정밀)과학과 정신성을 결합하려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주된 내용은 기계적 결정론 비판, 실증주의와 허무주의 비판, 과학과 의식의 상보성, 정밀과학과 인문과학 간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 예술과 전통의 결합, 총체화하려는 기획 비판 및 폐쇄된 사유 시스템 거부 등이다. 이는 교육의 근본적 개혁에 대한 요청, 연구 발의 및 연구 결과의 적용 과정에서 과학자들의 책임감 고취, 의식 있는 과학에 대한 촉구 등으로 이어졌다(이 책의 6장에 이 학술대회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3
지금까지 논의한 이 복잡성 사고의 패러다임은 결국 세계와 인간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위한 것인데,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무엇보다도 우선 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의 복잡한 영역, 예컨대 상상과 무의식, 감각적인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의식이 있고 창조적이지만 동시에 비이성적이고 무의식적이며 통제되지 않고 파괴적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이고 경험적인 사유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주관적이고 환상적이며 마법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모랭이 분명하게 말했듯 “삶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자율성을 생산해내는 극단적으로 복잡한 자기환경조직 현상임이 분명하다”(본문 21쪽). 이러한 사실의 수용은 모랭에게서 ‘복잡성 윤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모랭의 《방법》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인 제6권의 제목은 《윤리》이다). 모랭은 복잡성 윤리를 도덕의 원칙과 근본을 성찰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도덕이란 단순한 것으로서 선/악, 정의/부정의 등의 이분법적 코드에 흔히 종속되어 있지만, 윤리는 복잡한 것으로서 선이 악을, 악이 선을 품을 수 있고, 정의가 부정의를, 부정의가 정의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인간의 활동은 결코 단순하지도 명백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연적이고 불확실하다. 따라서 복잡성 윤리가 요청되는데, 이는 도덕주의와 허무주의를 넘어서고, 삶·사회·개인 속에 도덕적 정언명령을 세우겠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거부하며 삶 속의 원천을 갱생할 방법을 모색한다. 이 윤리는 개인 ↔ 사회 ↔ 인류의 관계로 이루어진 인간과 세계의 조건을 고려함으로써 윤리와 정치, 윤리와 과학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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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모랭의 이 책 《복잡성 사고 입문》은 현대 문명에 지친 저자가 어떻게 하면 현대 문명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하나의 사유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집필된 책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현대 문명의 위기가 무엇이라고 진단하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16∼17세기 이후 시작된 과학의 발견 이후 인간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된 이성과 과학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이성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근대 문명은 19세기까지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인간 역사를 지배하다가 드디어 20세기에 그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한 사실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인간 생활을 끊임없이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환원하고 분리하고 단순화했는데,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온갖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저자는 이 책의 서두를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근대 이성에 대한 비판이며, 그 비판의 방법이 바로 ‘복잡성 패러다임’이다. 다시 말해 저자는 그 대안으로 반(反)이성을 제시하는 또 하나의 단순한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복잡한 대안을 제시한다. 이 복잡성 패러다임은 외부 세계와 인간 정신이 함께 작동하며 구성하는 다차원적인 현실, 경제적 ·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영적인 것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태로 직조되어 구성된 현실을 해석해내려 한다. 즉 복잡한 현실을 복잡한 방식으로 보는 패러다임이다.
사실 근대 과학의 발전은 복잡성과 애매모호함을 제거하고 단순성과 명료함을 추구하면서 발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이 어떤 측면에서는 지나치게 폭력적이었고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거대하고 복잡한 현실을 협소하고 단순한 틀 속에 집어넣고 공식화하고 절단하는 이것이야말로 근대 이성의 폭력이다. 모랭은 이러한 지식의 맹목성과 폭력을 비판하면서 이성의 오류와 착각, 맹목의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
모랭은 특히 합리성과 합리화를 구분하면서 합리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성이란 개방적인 것으로, 비합리적이거나 애매모호한 것과 협상하며, 자기비판적인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합리성은 논리의 한계와 결정주의의 한계, 기계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또한 인간 정신이 전지전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이 미스터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반면 합리화는 폐쇄적인 것으로, 자신에게 저항하는 현실과 대화할 줄 모르고, 기계론적이고 결정적인 모델에 지배되며, 존재와 주관성, 감성, 삶을 무시하는 합리주의로 귀착된다. 합리화는 합리성과 동일한 원천에서 출발하지만, 오류와 착각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 혼돈과 불신의 시대에 우리는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개방적이고 합리적이며 자기 비판적이고 성찰적이면서 동시에 끝없이 자기개혁을 해나가는 진정한 이성과 문명이다. 자기 안에 갇힌 이성은 바로 광기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합리화의 예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편집광이나 자기 속에 갇혀 자신의 진리성을 철저하게 확신하면서 자신의 오류를 비판하는 일체의 공격에도 끄덕하지 않는 맹신, 정형화한 인식 틀, 우매한 신앙, 순응주의적 자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성을 통해 이런 광기와 순응주의, 편집광과 맞서 싸워야 한다.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즉 우리는 이성과 관념의 신격화에 대항해 싸워야 하지만, 이성과 관념의 도움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싸움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합리화와 관념론에 저항하는 합리성과 이성은 논리적 망상과 편협함을 교정하고 경험적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자기비판적인 확장된 형태의 이성이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진 시대에 우리는 합리성과 합리화의 경계에 끊임없이 주의하며 신화와 무의식, 상상의 영역, 존재의 주관성, 감성을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 이성을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와 삶은 결코 전적으로 합리적이고 계약적인 방식으로 정의되진 않는다. 인력과 척력, 감정과 열정으로 구성된 하나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인력과 척력, 감정과 열정으로 구성된 하나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공통감(cum-sensualis)’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시켜 ‘미학(aisth?sis)’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텐데, 즉 우리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의 합의, 격앙된 감각의 소통, 마술과 신화, 상상력 등의 공통 특징이라 할 ‘함께 느끼고 함께 전율함’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부로 존재한다. 우리가 이런 부분을 이성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무시하고 억누르고 배제한다면 복잡성 사고로 이행하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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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성 패러다임은 현상과 사건, 인간의 맥락과 총체성, 다차원성과 복잡성, 현상에 개입하는 우연성 등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이 속에서 전체의 의미는 파편화하고 개별 정보와 사건은 분절된다.
자연?사회 현상과 인간 행위의 복잡성을 복잡한 그대로 보려는 복잡성 사고는 필연적으로 학문 간의 통합, 통섭에 대한 요구로 이어진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러한 분과 학문들 간의 통합이 복잡한 조직 현상들을 단순한 수준으로 환원시키며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실패로 끝날 것이고, 오직 통일성과 다양성, 지속과 단절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랭이 지적했듯이 물리학, 생물학, 인류학 등이 근본주의를 지향하는 물리학주의, 생물학주의, 인류학주의를 무력하게 만들면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는 않은 채 통합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와 같다(본문 78쪽). 다시 말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등으로 분절된 분과 학문은 사실 대단히 한정된 진리(혹은 해석)만을 가지게 되며, 이는 각 영역 간 관점의 충돌과 갈등, 경청과 인내를 통해서만 상호보완, 수정, 발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합학문이 오늘날 학문의 주요 형식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지배적인 학문편제 방식으로 군림하던 분과적 종합이라는 방식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분과 학문 간의 공동연구가 추진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학제간 연구, 통섭, 통합, 융합 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 경향은 거스르기 힘든 대세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이것을 인지하면서 지식을 어떻게 편성하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새로운 지식의 통합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지 쉽게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1979년 에스파냐 코르도바에서 있었던 학술대회를 살펴봄으로써 통합 학문을 향해 가는 한 가지 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대회의 제목은 ‘과학과 의식’이었는데, 5일 동안 전 세계에서 온 60여 명의 과학자, 인문학자들이 과학과 정신성에 대해 토론했다. 코르도바가 학술대회 장소로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도시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중세 유럽에 전한 이븐 루슈드(Ibn Rushd)가 활약했던 곳이다. 이븐 루슈드에 의해 서구는 신비적인 종교와 정신성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그리고 단순한) 세계 인식에 몰두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도시는 동양과 서양, 합리성과 비합리성(종교, 신비주의)이 분열되고 단순성 패러다임이 부흥한 상징적 장소인 것이다. 이 학술대회는 그후 여러 차례 이어졌고, 1986년 베네치아 모임에서 ‘베네치아 선언문’으로 결실을 맺는데, 이 선언문은 가장 발전된 형태의 (정밀)과학과 정신성을 결합하려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주된 내용은 기계적 결정론 비판, 실증주의와 허무주의 비판, 과학과 의식의 상보성, 정밀과학과 인문과학 간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 예술과 전통의 결합, 총체화하려는 기획 비판 및 폐쇄된 사유 시스템 거부 등이다. 이는 교육의 근본적 개혁에 대한 요청, 연구 발의 및 연구 결과의 적용 과정에서 과학자들의 책임감 고취, 의식 있는 과학에 대한 촉구 등으로 이어졌다(이 책의 6장에 이 학술대회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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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논의한 이 복잡성 사고의 패러다임은 결국 세계와 인간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위한 것인데,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무엇보다도 우선 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의 복잡한 영역, 예컨대 상상과 무의식, 감각적인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의식이 있고 창조적이지만 동시에 비이성적이고 무의식적이며 통제되지 않고 파괴적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객관적이고 논리적이고 경험적인 사유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주관적이고 환상적이며 마법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모랭이 분명하게 말했듯 “삶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자율성을 생산해내는 극단적으로 복잡한 자기환경조직 현상임이 분명하다”(본문 21쪽). 이러한 사실의 수용은 모랭에게서 ‘복잡성 윤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모랭의 《방법》 시리즈 중 가장 마지막인 제6권의 제목은 《윤리》이다). 모랭은 복잡성 윤리를 도덕의 원칙과 근본을 성찰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도덕이란 단순한 것으로서 선/악, 정의/부정의 등의 이분법적 코드에 흔히 종속되어 있지만, 윤리는 복잡한 것으로서 선이 악을, 악이 선을 품을 수 있고, 정의가 부정의를, 부정의가 정의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인간의 활동은 결코 단순하지도 명백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연적이고 불확실하다. 따라서 복잡성 윤리가 요청되는데, 이는 도덕주의와 허무주의를 넘어서고, 삶·사회·개인 속에 도덕적 정언명령을 세우겠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거부하며 삶 속의 원천을 갱생할 방법을 모색한다. 이 윤리는 개인 ↔ 사회 ↔ 인류의 관계로 이루어진 인간과 세계의 조건을 고려함으로써 윤리와 정치, 윤리와 과학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목차
서문
1 맹목적 지성
2 복잡한 구상과 계획
3 복잡성 패러다임
4 복잡성과 행동
5 복잡성과 기업
6 복잡성 인식론
주
옮긴이의 글
<로컬리티 번역총서>를 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