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부랑청년 전성시대: 근대 청년의 문화 풍경
- 개인저자
- 소영현 지음
- 발행사항
- 서울 : 푸른역사, 2008
- 형태사항
- 319 p. : 삽화, 지도, 초상 ; 22 cm
- ISBN
- 9788991510722
- 청구기호
- 331.23 소64ㅂ
- 일반주기
-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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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4010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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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00014010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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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청구기호(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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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문학청년의 탄생》(소영현 지금)과 동시에 출간된 이 책에서는 역동의 시공간과 그 주인공인 청년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고 자기를 규율하고자 했는가, 청년이 근대를 어떻게 내면화했는가를 ‘근대 청년의 문화풍경’으로 그려보았다. 이 작업을 통해 현대 청년인 우리의 지향을 둘러싼 유의미한 질문을 던져보고자 했다.《문학청년의 탄생》이 ‘청년 담론’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보여주는 학술적 논의라면, 《부랑청년 전성시대》는 거기에서 좀 더 구체적인 살을 붙이고, 당대 현실 생활을 복원함으로써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를 통해 분과 학문을 넘어선 소통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열 네 개의 작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00년대 전후에서 1920년대에 걸친 시기에 근대의 대표적 인간형으로 선택되었던 ‘청년’을 중심으로, 청년이 불려나오고 만들어지며 분류되어갔던 구체적 장면들을 둘러본다.
‘청년 만들기’와 ‘청년 되기’-근대적 청년이라는 것은 무엇이었나
문화적 인간의 출현 ― ‘청년’이라는 말에 미래의 희망이자 가능성의 무한 지대라는 뜻을 아로새긴 근대 이후, 문화 청년은 시대의 극명한 단절의 지점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따라서 근대적 인간이 된다는 것, 그 대표적 표상인 청년이 된다는 것은 문화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화적 인간형으로서 근대 청년은 무엇을 먹고 입으며, 무엇을 보고 어디에 가는가. 근대의 ‘청년-만들기’와 ‘청년-되기’는 패션의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안경을 쓰고, 세비루 양복을 입으며, 칼포담배를 피우는 등의 외형의 변화는 그들이 근대적 청년임을 대변해 주었다. 이처럼 ‘근대화’와 ‘근대적 청년 되기’는 외모와 패션의 변화로부터 시작된 신체의 재편 과정이었으나, 그것만이 사회적 정체성의 표지인 것만은 아니었다. 의식의 미세한 영역에서 일상생활의 소소한 지점까지 근대적 지향을 향해 활짝 열려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의 풍경이 곧 근대의 풍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랑청년 전성시대 ― 근대의 뉴-아이콘인 청년이 사실 부랑청년(불량청년)론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는 것. 반대로 말하면 부랑청년을 분류해가는 과정에서 청년론이 정교화되었다. 당시 청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 규정은 모호했으나, 부랑청년에 대한 규정은 명확했다. 이를테면, 부랑청년은 화려한 양복을 입고 금테 두른 안경을 쓰고 시계를 찬다. 당시 경성에서는 매우 드물던 자동차를 타고 데이트를 다니며 서양음식에도 익숙하다. 대개 학생 신분이기는 하지만 학교 생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술먹는 법, 기생과 입 맞추는 법, 춤추는 법 등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처럼 부랑청년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를 통해 역설적으로 청년에 대한 규정을 강화시켜나갔다. 그러니까 부랑청년 전성시대란 곧 청년의 전성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부랑청년론을 들여다보면 왜 이 시기에 청년론이 급격하게 부상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청년론을 둘러싼 신화들-‘개천에서 용난’인물 신화의 근원은 어디인가
입신출세의 시대 ― 우리에게 친숙한 입신출세의 내러티브가 등장한 기원은 어디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이 입신출세주의의 신화에 사로잡혀왔는가. 원래 빈한한 집에서 생장했으나 학문을 닦아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고 경성(동경, 미국)에 올라와 낮에는 일을 하고 야학교를 통학하면 검소하고 소박한 노력적 생활을 하고 결국 성공해서 금의환향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입신출세의 신화는 학업의 중요성을 강화시켰으며, 유학이 붐을 이루는 사회현상을 낳았다. 나아가 입시열풍과 시험공포증을 생겨나게 했다. 이를 통해 실제로는 근대 초기 내내 학생 인구는 많지 않았으며 특권층이었음에도 이런 신화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 그들을 움직인 힘이 자신들의 현재의 노력 여하가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낙과적 희망론이었음을 밝혀주고자 했다. 말하자면 그 시대의 청년들은 “비단옷, 시체時體 양복, 금강석 반지, 자동차 탄 젊은 내외, 양옥집, 앞뒤로 둘린 정원,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살 것이냐, “갑갑한 단간살이집, 손수 밥 짓느라고 연기에 눈물 흘리는 여자, 경황없는 얼굴, 무색한 의복, 필경은 대문 맞은 집 전당국에 드나드는” 삶을 살 것이냐, 적어도 그 시대에는 그들의 미래의 청사진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고학생을 둘러싼 몇 가지 신화 ― ‘개천에서 용난’ 청년들을 둘러싼 신화 역시 입신출세주의 신화만큼이나 오랜 시간 우리를 사로잡아왔다. 이 신화의 출발은 어디일까. 또한 당시 고학생의 구체적인 생활은 어떠했는가, 낮에는 어떤 일을 했고 힘든 생활과 학업을 어떻게 병행했는가, 그들의 눈물나는 고학은 정말 성공하여 신화가 되었는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과거 고학생 이야기를 살펴보다보면 단순히 흥밋거리를 넘어 실제 그들의 삶과 현실과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결국 고학생이 등장하게 된 데에는 입신출세주의의 영향력이 컸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신화가 탄생했고 그것은 결국 현실과 얼마간의 간극이 존재했다.
청년론이 누락시킨 청년들의 복원-조선의 청년은 모두 민족주의자였나
에스페란티스토이거나 아나키스트이거나 ― 근대 청년들이 모두 민족주의자였던 것도 모두가 맑스보이였던 것도 아니다. 미래를 예견할 수 없는 식민지적 불투명이 조선 민족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당시 영향력이 있었던 국제 공통어인 에스페란토로 향했던 일군의 조선 청년들이다. 이들은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약육강식의 국제 정세 속에서 폭력주의를 넘어선 현실 타개의 가능성을 그들은 에스페란토의 정신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자선+모럴=조선식 모럴 ― 자선과 음악회라는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문화가 ‘자선음악회’라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 과정이 청년 주체의 분화가 불러온 갈등 즉 예술의 실현과 현실 참여 사이의 갈등 등을 해결하기 위한 모색에서 마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자선, 동정, 상호부조론 등의 다양한 청년군이 새로운 시대 윤리, 근대적 윤리 형식을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청년을 만들어낸 토양-지역감정과 청년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
기독교와 청년의 상관성 ― 관서지방의 상인들로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기독교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혈기 넘치는 청년을 불러 모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예술가 청년까지 탄생시켰다.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기독교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한국 사회의 총체적 재구성 작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근대적 주체 구성(청년 주체) 작업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청년의 지방의식은 애국심보다 강하다? ― 근대 이후 민족과 민족 이념, 민족 감정은 우리의 피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과 감정은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된 이후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인의 무의식에 각인된 자동적이고 자발적인 감정이 아니었다는 점이 새롭게 드러난다. 지역 분파주의를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일제 강점기 판본으로 과장하면서 이 문제 자체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들이는 방식에도 반성이 요청되지만, 무엇보다 ‘민족’/‘민족의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갈등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는, 역사적 실상을 다시 곱씹을 필요가 있다. 지역감정의 이면에는 근대적 주체 형성 과정이 불러온 갈등, 각기 다른 국가(/민족) 상을 가졌던 청년들 간의 헤게모니 쟁투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젠더 문제로 본 청년-여성은 청년이 아니다?
청년은 남성이더라 ― 청년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소년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소년이나 청년의 성별 구분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청년이라는 말을 남성적 이미지와 함께 떠올리고, 강건하고 진취적이며 민족의 전위가 될 수 있는 존재로 청년을 상상하는데, ‘신분과 성별, 지위와 재산과 무관한 청년은 왜 남성적 표상을 덧입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청년이 남성적 젠더를 획득해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성청년이 아니라 신여성인 이유 ― 청년이라는 용어에는 익숙하지만 여성청년이라는 말은 왠지 어색하다. 신여성과 여학생이라는 말은 친숙하지만 굳이 남학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는 청년이라는 이름이 지워버린 흔적들이다. 이런 용어들이 자리잡고 사라지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장들에서는 온전한 의미의 청년론 안에 자리매김되지 못했던 이름들을 다시 호출해보고자 했다.
열 네 개의 작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00년대 전후에서 1920년대에 걸친 시기에 근대의 대표적 인간형으로 선택되었던 ‘청년’을 중심으로, 청년이 불려나오고 만들어지며 분류되어갔던 구체적 장면들을 둘러본다.
‘청년 만들기’와 ‘청년 되기’-근대적 청년이라는 것은 무엇이었나
문화적 인간의 출현 ― ‘청년’이라는 말에 미래의 희망이자 가능성의 무한 지대라는 뜻을 아로새긴 근대 이후, 문화 청년은 시대의 극명한 단절의 지점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따라서 근대적 인간이 된다는 것, 그 대표적 표상인 청년이 된다는 것은 문화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화적 인간형으로서 근대 청년은 무엇을 먹고 입으며, 무엇을 보고 어디에 가는가. 근대의 ‘청년-만들기’와 ‘청년-되기’는 패션의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안경을 쓰고, 세비루 양복을 입으며, 칼포담배를 피우는 등의 외형의 변화는 그들이 근대적 청년임을 대변해 주었다. 이처럼 ‘근대화’와 ‘근대적 청년 되기’는 외모와 패션의 변화로부터 시작된 신체의 재편 과정이었으나, 그것만이 사회적 정체성의 표지인 것만은 아니었다. 의식의 미세한 영역에서 일상생활의 소소한 지점까지 근대적 지향을 향해 활짝 열려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의 풍경이 곧 근대의 풍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랑청년 전성시대 ― 근대의 뉴-아이콘인 청년이 사실 부랑청년(불량청년)론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는 것. 반대로 말하면 부랑청년을 분류해가는 과정에서 청년론이 정교화되었다. 당시 청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 규정은 모호했으나, 부랑청년에 대한 규정은 명확했다. 이를테면, 부랑청년은 화려한 양복을 입고 금테 두른 안경을 쓰고 시계를 찬다. 당시 경성에서는 매우 드물던 자동차를 타고 데이트를 다니며 서양음식에도 익숙하다. 대개 학생 신분이기는 하지만 학교 생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술먹는 법, 기생과 입 맞추는 법, 춤추는 법 등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처럼 부랑청년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를 통해 역설적으로 청년에 대한 규정을 강화시켜나갔다. 그러니까 부랑청년 전성시대란 곧 청년의 전성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부랑청년론을 들여다보면 왜 이 시기에 청년론이 급격하게 부상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청년론을 둘러싼 신화들-‘개천에서 용난’인물 신화의 근원은 어디인가
입신출세의 시대 ― 우리에게 친숙한 입신출세의 내러티브가 등장한 기원은 어디일까. 언제부터 우리는 이 입신출세주의의 신화에 사로잡혀왔는가. 원래 빈한한 집에서 생장했으나 학문을 닦아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고 경성(동경, 미국)에 올라와 낮에는 일을 하고 야학교를 통학하면 검소하고 소박한 노력적 생활을 하고 결국 성공해서 금의환향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입신출세의 신화는 학업의 중요성을 강화시켰으며, 유학이 붐을 이루는 사회현상을 낳았다. 나아가 입시열풍과 시험공포증을 생겨나게 했다. 이를 통해 실제로는 근대 초기 내내 학생 인구는 많지 않았으며 특권층이었음에도 이런 신화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 그들을 움직인 힘이 자신들의 현재의 노력 여하가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는 낙과적 희망론이었음을 밝혀주고자 했다. 말하자면 그 시대의 청년들은 “비단옷, 시체時體 양복, 금강석 반지, 자동차 탄 젊은 내외, 양옥집, 앞뒤로 둘린 정원,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살 것이냐, “갑갑한 단간살이집, 손수 밥 짓느라고 연기에 눈물 흘리는 여자, 경황없는 얼굴, 무색한 의복, 필경은 대문 맞은 집 전당국에 드나드는” 삶을 살 것이냐, 적어도 그 시대에는 그들의 미래의 청사진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고학생을 둘러싼 몇 가지 신화 ― ‘개천에서 용난’ 청년들을 둘러싼 신화 역시 입신출세주의 신화만큼이나 오랜 시간 우리를 사로잡아왔다. 이 신화의 출발은 어디일까. 또한 당시 고학생의 구체적인 생활은 어떠했는가, 낮에는 어떤 일을 했고 힘든 생활과 학업을 어떻게 병행했는가, 그들의 눈물나는 고학은 정말 성공하여 신화가 되었는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과거 고학생 이야기를 살펴보다보면 단순히 흥밋거리를 넘어 실제 그들의 삶과 현실과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결국 고학생이 등장하게 된 데에는 입신출세주의의 영향력이 컸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신화가 탄생했고 그것은 결국 현실과 얼마간의 간극이 존재했다.
청년론이 누락시킨 청년들의 복원-조선의 청년은 모두 민족주의자였나
에스페란티스토이거나 아나키스트이거나 ― 근대 청년들이 모두 민족주의자였던 것도 모두가 맑스보이였던 것도 아니다. 미래를 예견할 수 없는 식민지적 불투명이 조선 민족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당시 영향력이 있었던 국제 공통어인 에스페란토로 향했던 일군의 조선 청년들이다. 이들은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약육강식의 국제 정세 속에서 폭력주의를 넘어선 현실 타개의 가능성을 그들은 에스페란토의 정신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자선+모럴=조선식 모럴 ― 자선과 음악회라는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문화가 ‘자선음악회’라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 과정이 청년 주체의 분화가 불러온 갈등 즉 예술의 실현과 현실 참여 사이의 갈등 등을 해결하기 위한 모색에서 마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자선, 동정, 상호부조론 등의 다양한 청년군이 새로운 시대 윤리, 근대적 윤리 형식을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청년을 만들어낸 토양-지역감정과 청년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
기독교와 청년의 상관성 ― 관서지방의 상인들로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기독교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혈기 넘치는 청년을 불러 모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예술가 청년까지 탄생시켰다.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기독교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한국 사회의 총체적 재구성 작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근대적 주체 구성(청년 주체) 작업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청년의 지방의식은 애국심보다 강하다? ― 근대 이후 민족과 민족 이념, 민족 감정은 우리의 피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과 감정은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된 이후 상당 기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인의 무의식에 각인된 자동적이고 자발적인 감정이 아니었다는 점이 새롭게 드러난다. 지역 분파주의를 조선시대 ‘사색당파’의 일제 강점기 판본으로 과장하면서 이 문제 자체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들이는 방식에도 반성이 요청되지만, 무엇보다 ‘민족’/‘민족의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갈등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는, 역사적 실상을 다시 곱씹을 필요가 있다. 지역감정의 이면에는 근대적 주체 형성 과정이 불러온 갈등, 각기 다른 국가(/민족) 상을 가졌던 청년들 간의 헤게모니 쟁투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젠더 문제로 본 청년-여성은 청년이 아니다?
청년은 남성이더라 ― 청년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소년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소년이나 청년의 성별 구분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청년이라는 말을 남성적 이미지와 함께 떠올리고, 강건하고 진취적이며 민족의 전위가 될 수 있는 존재로 청년을 상상하는데, ‘신분과 성별, 지위와 재산과 무관한 청년은 왜 남성적 표상을 덧입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청년이 남성적 젠더를 획득해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여성청년이 아니라 신여성인 이유 ― 청년이라는 용어에는 익숙하지만 여성청년이라는 말은 왠지 어색하다. 신여성과 여학생이라는 말은 친숙하지만 굳이 남학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는 청년이라는 이름이 지워버린 흔적들이다. 이런 용어들이 자리잡고 사라지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장들에서는 온전한 의미의 청년론 안에 자리매김되지 못했던 이름들을 다시 호출해보고자 했다.
목차
머리말
호모쿨트라의 출현
부랑청년 전성시대
입신출세의 시대
고학생을 둘러싼 몇 가지 신화
자선+음악회=조선식 모럴
에스페란티스토이거나 아나키스트이거나
경성 스켓취
도회와 청년, 동경-경성-평양
그것은 참말 안해가 아니었다
여성청년이 아니라 신여성인 이유
청년 바깥의 청년, 여학도
청년은 남성이더라
청년의 지방의식은 애국심보다 강하다?
청년의 기원을 돌아보며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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