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
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4572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4572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주목하라! 중국 대륙 경제의 조타수 리커창
시진핑과 리커창을 정점으로 한 중국 5세대 지도부의 출범 1주년에 때맞춰 각국 언론은 이른바 시·리 체제의 지난 1년 성적표를 내놓기 바쁘다. 여기에 중국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의 폐막이 맞물리면서 세계의 눈은 유독 한 사람의 행보를 좇기에 여념이 없다. ‘리커창’. ‘중국의 입’이라 불리는 중국의 경제수장 리커창 총리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의 정책 방향에 따라 향후 중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가 막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입체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리커창’에 대한 평가를 내놓아 정작 중국에서는 판매 금지된 책 ≪리커창―중국 대륙 경제의 조타수≫(원제: 他將是中國大管家─李克强傳)가 리커창의 오랜 지기이자 북경대 동문인 구천서 한반도미래재단 이사장의 편역으로 출간됐다. 2010년 뉴욕에서 출간된 원서에 당시와는 많이 달라진 현재 상황을 반영하고, 1994년부터 리커창을 관찰해온 구 이사장의 남다른 식견이 더해져 원서를 전면 편역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연대기적 과거만을 지루하게 나열하는 정치인들의 평전류나, 충분한 근거 없이 제5세대 중국을 점치는 데 급급한 전략서와는 거리가 멀다. 거의 알려진 게 없는 리커창의 과거 행적을 들여다보고 현재 행보를 다각도로 살펴 중국의 미래를 내다보는 이 책은 G2시대 중국을 이해하는 필수 지침서가 될 만하다.
총서기 서열 다툼에서 시진핑에 밀리다
≪리커창≫의 전반부는 오늘날 중국 ‘시진핑 시대’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리커창의 과거 정치적 행보를 살피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리커창 총리는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이라는 굳건한 버팀목이 있어 시진핑 주석을 능가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세계 언론들은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리커창을 꼽아왔으며,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기 한 달 전인 2007년 9월까지도 리커창이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낙점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2004년 리커창이 요령성 당서기로 부임했을 때, 눈치 빠른 사람들은 후진타오가 리커창을 크게 신임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홍콩·대만을 비롯한 해외 매체는 리커창이 제5세대 지도부의 선두주자이며 후진타오의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중국 정부가 국내 사이트에서 ‘리커창’의 인명 검색을 차단하고 그의 이름을 민감한 단어로 분류한 것을 발견한 영국 ≪타임스≫는 이때 벌써 낌새를 알아차리고 “인터넷 봉쇄는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를 예언하는 단서Internet ban is clue to China’s Leaders”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23쪽)
리커창이 총서기 서열 다툼에서 시진핑에게 밀린 것은 지방 업무 당시 발생한 많은 대형 사건 사고 탓일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로 인해 하남성과 요령성에서 쌓은 치적들이 퇴색되었고, 정치적 입지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대형 악재가 리커창의 발목을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뛰어난 위기 대처 능력을 중국 사회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형 사건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그 원인과 책임을 규명해 언론에 가감 없이 공개하고, 보상 문제와 재발 방지 대책을 신속하게 처리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후에도 리커창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총서기 후보자 서열 다툼에서 시진핑에게 밀린 이후 차기 총리 적임자의 자질을 가늠하는 첫 시험 무대에서도 리커창은 씁쓸한 실패를 맛본다. ‘작은 정부’를 핵심으로 한 ‘대부제 개혁’을 실시했지만, 각 부처 간의 이해관계와 관료들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2009년에는 인민의 큰 관심을 끈 ‘의약위생체제 개혁’을 추진했다. 의약위생체제의 시장화를 포기하고 공공의료로 전환하여 도시와 농촌 주민들이 기본 의료 보장의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1년 동안 진전은 더디기만 했고,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두 개혁의 실패로 리커창의 정치적 입지는 적잖이 흔들렸다. 반면 경쟁 상대인 시진핑은 해외와 지방을 빈번하게 방문, 시찰하면서 차세대 중국 최고 지도자로서의 패기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계속된 리커창의 개혁
리커창은 같은 안휘성 출신인 후진타오 주석에 의해 철저하게 ‘준비된 지도자’로 키워져왔다고 이 책은 말한다. 후 주석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일하던 1983년 말, 리커창은 후보서기로 그와 인연을 맺어 사제 겸 동지 관계를 유지해왔다. 리커창이 1993년 38살에 장관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오른 것도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던 후진타오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년 후 리커창은 ‘농업 대성’인 하남성으로 내려가 성장과 당서기를 지냈고, 2004년 12월부터는 ‘동북진흥’의 핵심 지역인 요령성의 당무를 주관했다.
하남성과 요령성 당서기를 거쳐 중국 총리에 오르기까지 리커창의 정치 행보를 꿰뚫고 있는 기조는 한결같다. 압축하면 ‘개혁’. 리커창은 개혁 과정에서 생기는 사회적 진통과 걸림돌에 구애받지 말고, 중국 사회 전체가 개혁 실천의 전선에 서기를 호소했다. “개혁이 중국의 최대 보너스다. 오로지 개혁만이 중국의 성장 엔진이다. 개혁하지 않는 자는 편하게 살지 몰라도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리커창은 고루한 회의 주재 방식부터 깨뜨렸다고 한다. 원고만 달랑 들고 회의에 들락거리는 관료들의 행태에 철퇴를 가했고, 전문적 지식 없이 틀에 박힌 대로 일하는, 인민과 동떨어진 융통성 없는 관료들이 더 이상 발붙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 그의 개혁 의지는 부총리 시절, 국가 곡물 창고 문제와 관련해 국가 보조금 편취를 노리는 관료들의 불법 행위가 성행하자,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조사원을 동원해 대대적 점검에 나섰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리커창은 ‘시장과 사회가 역할을 잘 발휘하는 영역은 과감하게 시장과 사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라는 신념으로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줄여나가는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성장 일변도의 경제 정책에 가려진 폐단을 지적하고 내수 진작과 분배 정의를 거론하며 ‘도시화와 농촌 현대화’ 개혁을 통해 중국 경제의 체질 강화를 도모할 것을 천명했다. 이를 통해 최근 리커창이 외치고 있는 중국 경제 개혁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리커창의 18대 보고와 시정 강령에서 우리는 개혁에 대한 그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과거 중앙 정부에 비해, 그가 추진하는 개혁의 강도와 깊이는 보기 드물게 강하고 깊다. 리커창의 연설을 두 글자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바로 ‘개혁’이며 네 글자로 압축한다면 ‘개혁, 개혁’이며 여섯 글자로 압축하면 ‘개혁, 개혁, 개혁’이다. ……
개혁 방향에 대해 리커창은 “시장의 자원 배분 기능을 강화하고 역할을 잘 발휘하는 영역은 과감하게 시장과 사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46쪽)
리커창의 정치적 뿌리 공청단과 북경대
리커창은 후야오방에 의해 착공돼 후진타오가 완공한 공청단 세력의 계승자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그가 ‘시진핑 시대’의 단순한 참여자가 아닌, 또 다른 권력이자 경쟁자가 될 가능성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실제 이렇다 할 지지 세력이 없었던 원자바오와는 달리 리커창은 엄청난 브레인과 힘을 갖추고 있다. 이 책의 후반부는 리커창의 성장 과정과 공청단과 북경대라는 그의 정치적 배경을 파헤친다.
북경대 법학과에 입학한 리커창은 교수와 교우들이 두 손을 치켜들어 인정할 만큼 덕과 재능을 겸비한 준재였다. 당시 북경대의 출중한 인재들이 대부분 미국 유학길을 선택한 것과 달리 리커창은 북경대에 남아 공청단 간부의 길을 걷는다. 그의 의외의 선택을 ‘권력욕’이라고 치부하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지만, 북경대 공천단 서기를 맡은 리커창은 뛰어난 업무 수행 능력을 보이며 조직을 효율적으로 재정비했다. 리커창이 북경대 공청단 단위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자 이를 눈여겨보던 중공이 그를 공청단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리커창은 1993년 5월에 공청단 중앙 제1서기로 승진한다. 리커창은 듬직한 성품과 능수능란한 일 처리가 후진타오와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당 중앙과 정세를 절대적으로 따른다는 것인데, 전임 공청단 중앙 제1서기였던 후진타오와 쑹더부 때부터 이어온 ‘안정 속에서 진보를 추구한다’는 방침을 계승했고 당 중앙의 노선, 방침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외부에서는 리커창이 주관하던 시기의 공청단 중앙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사상 해방이나 재능 발휘라는 면에서 1980년대 왕자오궈가 공청단 중앙을 주관하던 때보다 못하고 건국 초기 후야오방 때의 생기발랄함이나 청춘의 활력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6·4 사건으로 많은 공청단파 관리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부는 파면을 당했다. 리커창은 6·4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북경대를 떠났기 때문에 강경 진압의 최전선에 있지 않았다. 만약 그때 리커창이 최전선에 있었다면 무척 난감했을 것이다. 어느 편을 지지하는지 명확히 표명해야 했고 어느 편에 줄을 서도 군중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커창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두리뭉실하게 이 관문을 통과했다. (228쪽)
리커창의 공청단에 대한 일부 세력의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리커창이 공청단을 떠나 하남성의 성장과 서기의 중임을 맡게 된 것은 공청단 시절, 그가 주축이 되어 벌인 ‘희망공정’, ‘세기 도약 청년문명공정’과 ‘세기 도약 청년인재공정’ 사업 등이 중공 지도부에서 높은 평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왜 지금 리커창인가―‘made with China’를 향해
리코노믹스, 리커창 풋·콜·지수 …. 최근 세계 경제 뉴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자칫 우스갯소리로도 들리는 이 단어들은 세계 경제의 엔진이 중국임을, 그리고 그 방향의 키를 잡은 주인공이 리커창임을 알려주는 뚜렷한 신호다.
이 책은 편역자 구천서가 본 ‘리커창’의 모습과 앞으로의 한중 관계, 시진핑을 비롯한 현 중국의 권력 실세들과 관련된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중국이 한국 경제와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국·일본에 버금갈 정도의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 정부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향후 10년, 중국의 경제를 책임지게 된 리커창이 아시아 경제 협력 방안, 특히 한국과의 경제 협력 방식에 대해 어떤 청사진을 품고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리커창과 한국의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과 중국 수교 2년 후, 한중 양국의 교류 확대와 청년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1994년 리커창은 공청단 제1서기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중국 공청단의 역할과 파워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던 한국에서 리커창은 일반 청년대표단 정도의 조용하고 조촐한 환영과 대접을 받았다. 훗날 그가 중국 최고 지도자로 성장할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구천서 이사장은 “당시 한국 정치권은 공청단에서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탄생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라며 “그들이 서서히 중국 최고 지도부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공청단이 전국 규모의 인재풀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라고 털어놓았다.
구 이사장은 리커창과의 첫 만남에서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그의 방문 일정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서 구 이사장은 리커창이 토론을 매우 즐기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토론 주제는 경제 분야에 집중되었다. 중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 한국 경제의 미래 등 70퍼센트 이상이 경제 문제였다. 경제학 박사답게 그는 지식이 풍부했고 화술이 뛰어났다. 그러나 모임은 일종의 상견례 성격을 띠어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
만찬 석상에서도 다른 중국 대표들은 술을 과하게 마셨지만 그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주량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절제하는 습관이 몸에 밴 정치인이었다. (293쪽)
첫 방한 이후 12년 만인 2006년, 리커창은 중국 요령성 당서기로 다시 방한했고 2011년에는 중국 국무원 부총리로서 남북한을 잇달아 방문해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2011년 당시 리커창의 방문은 중국 외교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리커창은 중국이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 수호를 바란다는 점을 명확히 했고, 한중 FTA 구축 촉진과 인적 교류 및 협력 확대를 골자로 한 여섯 가지 제안을 발표했다. 리커창은 찬사를 한몸에 받고 한국 방문을 마쳤다.
새로운 정부의 경제 사령탑으로서 향후 10년간 리커창은 아시아의 경제 협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 · 아세안 자유 무역 지대, 한·중·일 경제 무역 협력, 중국 · 인도 경제 무역 협력 등에서 큰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새 정부가 꾸려졌다. 양쪽 모두 새 정부가 들어선 만큼 향후 한중 관계는 크게 변화할 것이며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의 미래는 중국에 달렸다”고까지 말한다. 또한 G2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중국은 시진핑 집권 중에 미국의 경제 규모에 근접할 것이다. 즉 앞으로 점점 높아질 중국의 위상이 우리에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10년간 리커창이 경제 정책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하고 대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10년 안에 중국에서 큰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예측한다. 이처럼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는 한편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맞이할 것이다. 우리가 이를 기회로 삼아 도약할지, 변화에 휩쓸려 침몰할지는 현실을 직시하고 분석하며 통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 대륙 경제의 조타수 리커창을 바로 아는 것은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그리고 이젠 ‘made in China’가 아닌 ‘made with China’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시진핑과 리커창을 정점으로 한 중국 5세대 지도부의 출범 1주년에 때맞춰 각국 언론은 이른바 시·리 체제의 지난 1년 성적표를 내놓기 바쁘다. 여기에 중국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의 폐막이 맞물리면서 세계의 눈은 유독 한 사람의 행보를 좇기에 여념이 없다. ‘리커창’. ‘중국의 입’이라 불리는 중국의 경제수장 리커창 총리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의 정책 방향에 따라 향후 중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가 막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입체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리커창’에 대한 평가를 내놓아 정작 중국에서는 판매 금지된 책 ≪리커창―중국 대륙 경제의 조타수≫(원제: 他將是中國大管家─李克强傳)가 리커창의 오랜 지기이자 북경대 동문인 구천서 한반도미래재단 이사장의 편역으로 출간됐다. 2010년 뉴욕에서 출간된 원서에 당시와는 많이 달라진 현재 상황을 반영하고, 1994년부터 리커창을 관찰해온 구 이사장의 남다른 식견이 더해져 원서를 전면 편역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연대기적 과거만을 지루하게 나열하는 정치인들의 평전류나, 충분한 근거 없이 제5세대 중국을 점치는 데 급급한 전략서와는 거리가 멀다. 거의 알려진 게 없는 리커창의 과거 행적을 들여다보고 현재 행보를 다각도로 살펴 중국의 미래를 내다보는 이 책은 G2시대 중국을 이해하는 필수 지침서가 될 만하다.
총서기 서열 다툼에서 시진핑에 밀리다
≪리커창≫의 전반부는 오늘날 중국 ‘시진핑 시대’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리커창의 과거 정치적 행보를 살피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태자당과 상하이방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리커창 총리는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이라는 굳건한 버팀목이 있어 시진핑 주석을 능가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세계 언론들은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리커창을 꼽아왔으며, 제17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기 한 달 전인 2007년 9월까지도 리커창이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낙점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2004년 리커창이 요령성 당서기로 부임했을 때, 눈치 빠른 사람들은 후진타오가 리커창을 크게 신임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홍콩·대만을 비롯한 해외 매체는 리커창이 제5세대 지도부의 선두주자이며 후진타오의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중국 정부가 국내 사이트에서 ‘리커창’의 인명 검색을 차단하고 그의 이름을 민감한 단어로 분류한 것을 발견한 영국 ≪타임스≫는 이때 벌써 낌새를 알아차리고 “인터넷 봉쇄는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를 예언하는 단서Internet ban is clue to China’s Leaders”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23쪽)
리커창이 총서기 서열 다툼에서 시진핑에게 밀린 것은 지방 업무 당시 발생한 많은 대형 사건 사고 탓일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로 인해 하남성과 요령성에서 쌓은 치적들이 퇴색되었고, 정치적 입지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대형 악재가 리커창의 발목을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뛰어난 위기 대처 능력을 중국 사회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형 사건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그 원인과 책임을 규명해 언론에 가감 없이 공개하고, 보상 문제와 재발 방지 대책을 신속하게 처리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
중앙 정계에 진출한 후에도 리커창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총서기 후보자 서열 다툼에서 시진핑에게 밀린 이후 차기 총리 적임자의 자질을 가늠하는 첫 시험 무대에서도 리커창은 씁쓸한 실패를 맛본다. ‘작은 정부’를 핵심으로 한 ‘대부제 개혁’을 실시했지만, 각 부처 간의 이해관계와 관료들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2009년에는 인민의 큰 관심을 끈 ‘의약위생체제 개혁’을 추진했다. 의약위생체제의 시장화를 포기하고 공공의료로 전환하여 도시와 농촌 주민들이 기본 의료 보장의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1년 동안 진전은 더디기만 했고,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두 개혁의 실패로 리커창의 정치적 입지는 적잖이 흔들렸다. 반면 경쟁 상대인 시진핑은 해외와 지방을 빈번하게 방문, 시찰하면서 차세대 중국 최고 지도자로서의 패기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계속된 리커창의 개혁
리커창은 같은 안휘성 출신인 후진타오 주석에 의해 철저하게 ‘준비된 지도자’로 키워져왔다고 이 책은 말한다. 후 주석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일하던 1983년 말, 리커창은 후보서기로 그와 인연을 맺어 사제 겸 동지 관계를 유지해왔다. 리커창이 1993년 38살에 장관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오른 것도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던 후진타오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년 후 리커창은 ‘농업 대성’인 하남성으로 내려가 성장과 당서기를 지냈고, 2004년 12월부터는 ‘동북진흥’의 핵심 지역인 요령성의 당무를 주관했다.
하남성과 요령성 당서기를 거쳐 중국 총리에 오르기까지 리커창의 정치 행보를 꿰뚫고 있는 기조는 한결같다. 압축하면 ‘개혁’. 리커창은 개혁 과정에서 생기는 사회적 진통과 걸림돌에 구애받지 말고, 중국 사회 전체가 개혁 실천의 전선에 서기를 호소했다. “개혁이 중국의 최대 보너스다. 오로지 개혁만이 중국의 성장 엔진이다. 개혁하지 않는 자는 편하게 살지 몰라도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리커창은 고루한 회의 주재 방식부터 깨뜨렸다고 한다. 원고만 달랑 들고 회의에 들락거리는 관료들의 행태에 철퇴를 가했고, 전문적 지식 없이 틀에 박힌 대로 일하는, 인민과 동떨어진 융통성 없는 관료들이 더 이상 발붙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 그의 개혁 의지는 부총리 시절, 국가 곡물 창고 문제와 관련해 국가 보조금 편취를 노리는 관료들의 불법 행위가 성행하자,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조사원을 동원해 대대적 점검에 나섰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리커창은 ‘시장과 사회가 역할을 잘 발휘하는 영역은 과감하게 시장과 사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라는 신념으로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줄여나가는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성장 일변도의 경제 정책에 가려진 폐단을 지적하고 내수 진작과 분배 정의를 거론하며 ‘도시화와 농촌 현대화’ 개혁을 통해 중국 경제의 체질 강화를 도모할 것을 천명했다. 이를 통해 최근 리커창이 외치고 있는 중국 경제 개혁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리커창의 18대 보고와 시정 강령에서 우리는 개혁에 대한 그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과거 중앙 정부에 비해, 그가 추진하는 개혁의 강도와 깊이는 보기 드물게 강하고 깊다. 리커창의 연설을 두 글자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바로 ‘개혁’이며 네 글자로 압축한다면 ‘개혁, 개혁’이며 여섯 글자로 압축하면 ‘개혁, 개혁, 개혁’이다. ……
개혁 방향에 대해 리커창은 “시장의 자원 배분 기능을 강화하고 역할을 잘 발휘하는 영역은 과감하게 시장과 사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46쪽)
리커창의 정치적 뿌리 공청단과 북경대
리커창은 후야오방에 의해 착공돼 후진타오가 완공한 공청단 세력의 계승자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그가 ‘시진핑 시대’의 단순한 참여자가 아닌, 또 다른 권력이자 경쟁자가 될 가능성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실제 이렇다 할 지지 세력이 없었던 원자바오와는 달리 리커창은 엄청난 브레인과 힘을 갖추고 있다. 이 책의 후반부는 리커창의 성장 과정과 공청단과 북경대라는 그의 정치적 배경을 파헤친다.
북경대 법학과에 입학한 리커창은 교수와 교우들이 두 손을 치켜들어 인정할 만큼 덕과 재능을 겸비한 준재였다. 당시 북경대의 출중한 인재들이 대부분 미국 유학길을 선택한 것과 달리 리커창은 북경대에 남아 공청단 간부의 길을 걷는다. 그의 의외의 선택을 ‘권력욕’이라고 치부하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지만, 북경대 공천단 서기를 맡은 리커창은 뛰어난 업무 수행 능력을 보이며 조직을 효율적으로 재정비했다. 리커창이 북경대 공청단 단위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자 이를 눈여겨보던 중공이 그를 공청단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리커창은 1993년 5월에 공청단 중앙 제1서기로 승진한다. 리커창은 듬직한 성품과 능수능란한 일 처리가 후진타오와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당 중앙과 정세를 절대적으로 따른다는 것인데, 전임 공청단 중앙 제1서기였던 후진타오와 쑹더부 때부터 이어온 ‘안정 속에서 진보를 추구한다’는 방침을 계승했고 당 중앙의 노선, 방침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외부에서는 리커창이 주관하던 시기의 공청단 중앙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사상 해방이나 재능 발휘라는 면에서 1980년대 왕자오궈가 공청단 중앙을 주관하던 때보다 못하고 건국 초기 후야오방 때의 생기발랄함이나 청춘의 활력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6·4 사건으로 많은 공청단파 관리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부는 파면을 당했다. 리커창은 6·4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북경대를 떠났기 때문에 강경 진압의 최전선에 있지 않았다. 만약 그때 리커창이 최전선에 있었다면 무척 난감했을 것이다. 어느 편을 지지하는지 명확히 표명해야 했고 어느 편에 줄을 서도 군중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커창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두리뭉실하게 이 관문을 통과했다. (228쪽)
리커창의 공청단에 대한 일부 세력의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리커창이 공청단을 떠나 하남성의 성장과 서기의 중임을 맡게 된 것은 공청단 시절, 그가 주축이 되어 벌인 ‘희망공정’, ‘세기 도약 청년문명공정’과 ‘세기 도약 청년인재공정’ 사업 등이 중공 지도부에서 높은 평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왜 지금 리커창인가―‘made with China’를 향해
리코노믹스, 리커창 풋·콜·지수 …. 최근 세계 경제 뉴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자칫 우스갯소리로도 들리는 이 단어들은 세계 경제의 엔진이 중국임을, 그리고 그 방향의 키를 잡은 주인공이 리커창임을 알려주는 뚜렷한 신호다.
이 책은 편역자 구천서가 본 ‘리커창’의 모습과 앞으로의 한중 관계, 시진핑을 비롯한 현 중국의 권력 실세들과 관련된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중국이 한국 경제와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국·일본에 버금갈 정도의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 정부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향후 10년, 중국의 경제를 책임지게 된 리커창이 아시아 경제 협력 방안, 특히 한국과의 경제 협력 방식에 대해 어떤 청사진을 품고 있는지 가늠해 보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리커창과 한국의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과 중국 수교 2년 후, 한중 양국의 교류 확대와 청년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1994년 리커창은 공청단 제1서기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중국 공청단의 역할과 파워에 대해 인식이 부족했던 한국에서 리커창은 일반 청년대표단 정도의 조용하고 조촐한 환영과 대접을 받았다. 훗날 그가 중국 최고 지도자로 성장할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구천서 이사장은 “당시 한국 정치권은 공청단에서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탄생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라며 “그들이 서서히 중국 최고 지도부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공청단이 전국 규모의 인재풀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라고 털어놓았다.
구 이사장은 리커창과의 첫 만남에서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그의 방문 일정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서 구 이사장은 리커창이 토론을 매우 즐기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토론 주제는 경제 분야에 집중되었다. 중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 한국 경제의 미래 등 70퍼센트 이상이 경제 문제였다. 경제학 박사답게 그는 지식이 풍부했고 화술이 뛰어났다. 그러나 모임은 일종의 상견례 성격을 띠어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
만찬 석상에서도 다른 중국 대표들은 술을 과하게 마셨지만 그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주량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절제하는 습관이 몸에 밴 정치인이었다. (293쪽)
첫 방한 이후 12년 만인 2006년, 리커창은 중국 요령성 당서기로 다시 방한했고 2011년에는 중국 국무원 부총리로서 남북한을 잇달아 방문해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2011년 당시 리커창의 방문은 중국 외교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리커창은 중국이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 수호를 바란다는 점을 명확히 했고, 한중 FTA 구축 촉진과 인적 교류 및 협력 확대를 골자로 한 여섯 가지 제안을 발표했다. 리커창은 찬사를 한몸에 받고 한국 방문을 마쳤다.
새로운 정부의 경제 사령탑으로서 향후 10년간 리커창은 아시아의 경제 협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 · 아세안 자유 무역 지대, 한·중·일 경제 무역 협력, 중국 · 인도 경제 무역 협력 등에서 큰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새 정부가 꾸려졌다. 양쪽 모두 새 정부가 들어선 만큼 향후 한중 관계는 크게 변화할 것이며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의 미래는 중국에 달렸다”고까지 말한다. 또한 G2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중국은 시진핑 집권 중에 미국의 경제 규모에 근접할 것이다. 즉 앞으로 점점 높아질 중국의 위상이 우리에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10년간 리커창이 경제 정책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예측하고 대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10년 안에 중국에서 큰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예측한다. 이처럼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는 한편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맞이할 것이다. 우리가 이를 기회로 삼아 도약할지, 변화에 휩쓸려 침몰할지는 현실을 직시하고 분석하며 통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렸다. 대륙 경제의 조타수 리커창을 바로 아는 것은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그리고 이젠 ‘made in China’가 아닌 ‘made with China’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목차
옮긴이 서문
1. 세계가 주시한 중국의 라이벌전
칼을 품고 손을 잡다
대륙의 새로운 조율사 등장
2. 리커창의 적토마, 개혁
개혁이 알파요 오메가
원고를 버리고 인민의 입으로 말하라
석유는 국가를, 식량은 인류를 장악한다
인민의 행복은 수치가 아니다
개혁의 물꼬는 인민에게 흐른다
스티브 잡스가 필요하다
3. 파죽지세의 원동력, 민생 정치
황제의 고을, 그러나 인육을 먹는 비참한 인민
책상을 버려야 인민이 산다
판자촌을 날려 지렛대로 삼다
병원 문턱은 중국의 고질병
울고 넘는 인민의 제일 악산惡山
4. 가는 곳마다 곳간이 차다
하남의 사위,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
회심의 카드로 중앙 무대에 나서다
가난뱅이 모자를 벗겨 버리다
병든 노마老馬가 참 주인을 만나다
아는 만큼 보였고 배운 만큼 행했다
재건의 명수, 성의 심장이 뛴다
세계를 향해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다
째깍거리는 중국의 시한폭탄
5. 화로를 이고 천 리 길을 나서다
길게 드리운 재난의 그림자
밥 그릇 싸움에 밥상을 엎다
앞에서 누르고 뒤에서 붙잡고
6. 리커창의 정치적 모태, 공청단
기로에 서서 비상하는 중국을 보다
리커창의 공청단에 청춘이 없다
어려운 자들에게 가장 좋은 땔감은 교육
억만 청년에게 도약의 발판이 되다
7. 리커창의 학구열과 그를 이끈 스승들
혁명의 폭풍 속에도 덮지 않은 책
10년 만에 열린 문, 기상이 하늘을 찌르다
헌법 위에 신도 없다
시간의 티끌을 모아 박사에 이르다
나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책을 목숨처럼, 시간을 금싸라기처럼
8. 리커창과 한국
잠룡을 알아보지 못하다
큰형님 노릇은 그만
경제 협력의 알맹이를 노리다
아시아 황금시대, 중국은 열려 있다
9. 중국을 이끄는 지도자들
시진핑 / 장더장 / 위정성 / 류윈산 / 왕치산 / 장가오리 / 후춘화
부록: 중국 신임 총리 리커창의 첫 내외신 기자 회견 전문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