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자본주의의 기원과 서양의 발흥: 세계체제론과 리오리엔트를 재검토한다
- 대등서명
- Origins of capitalism and the \"rise of the West\"
- 개인저자
- 에릭 밀란츠 지음 ; 김병순 옮김
- 발행사항
- 파주 : 글항아리, 2012
- 형태사항
- 383 p. ; 23 cm
- ISBN
- 9788967350369
- 청구기호
- 320.92 밀231ㅈ
- 일반주기
- 원저자명: Eric H. Mielants
- 서지주기
- 참고문헌(p. 299-372)과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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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4756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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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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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각 장 소개
1장 | 유럽 상업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관점
- 세계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적 관점의 문제는 무엇인가
“근대화 이론, 정통 마르크스주의, 브레너주의, 세계-체제론은 모두 중세에 자본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일정한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논의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주제는 중세의 ‘후진성’이다. (…) 이러한 주제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봉건’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빠지기 십상이다. (…) 우리는 이제 중세를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보려고 애써야 한다.” (53~54쪽)
에릭 밀란츠에 따르면 세계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적 관점은 크게 네 가지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브레너주의라고 부르는 네오-마르크스주의, 근대화 이론, 세계-체제론이 이에 해당된다. 밀란츠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부터 세계-체제론까지 각 이론적 관점의 중요한 특성을 개괄하면서 이런 관점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간다.
먼저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발전 과정을 결정론적이고 단계적으로 본다는 상식적인 문제의식부터 시작해 유럽 중심의 용어, 예를 들어 아시아적 생산양식 같은 것을 써서 역사를 고정화시켜버린다는 점, 근대 사회의 기원을 산업혁명과 더불어 18세기로 거슬러올라가 잡으면서 16세기를 간단하게 처리하고 넘어간 점을 지적한다.
뒤이어 브레너주의의 문제는 이 논의가 중세를 주목했다는 장점은 있지만, 피착취계급(농민)과 착취계급(귀족) 간의 계급투쟁 및 생산양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도시 중심의 생산보다는 농업 생산 문제에만 몰두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브레너주의는 이런 관점을 통해 봉건 농민이 시장의 명령에 종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문화와 교역에 대한 의존을 거부하는 인물이라고 단정지어버렸으며, 시장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그다음 비판적으로 살펴본 근대화 이론의 문제점은, 이 이론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중세 상인 단체와 동업조합이 마치 사회경제적 침체, 쇠퇴, 옛날 유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밀란츠는 상인 단체와 동업조합이 근대화 이론을 통해 잘못된 역사적 인식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면서, 이들을 낡은 중세의 유물이자 사회적으로 비효율적인 담합을 추구한 주체로만 묘사한다고 비판한다. 밀란츠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산업혁명을 근대성의 기점으로 본 근대화 이론의 가장 큰 약점은 봉건제와 중세를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에서 부정적으로만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중세는 산업혁명 이전의 음울하고 무기력한 망각의 구렁으로 묘사되면서 자유방임주의 경제가 모든 것을 휩쓸리고 가버리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단순한 시기로 처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체제론 비판은 세계-체제론의 주창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적인 것처럼 보이는 시기를 정확하게 적시한 듯한 역사 기술을 선보임으로써 마치 비자본주의적 행동양식으로 추정되는 사례들이 이제 없어졌으며 자본주의로 완벽하게 이 세계가 이행되었다는 오류를 범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1300년과 1500년 사이에 유럽에 존재했던 매우 중요한 자본주의와 관련된 역사적 지점 및 1150년과 1130년 사이에 발생한 주요 사건들이 자본주의 등장에 영향을 미쳤던 의의들을 놓치고 말았다고 강조한다. 밀란츠의 이런 날선 비판은 결국 “자본주의가 서유럽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말부터였다는 새로운 이론적 틀을 제안”(43쪽)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체제론자들이 따르는 16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현상(임금 노동, 산업의 전문화, 복잡한 분업, 계급투쟁, 무역을 통한 이윤 획득, 복잡한 금융 기법, 더 많은 자본 축적을 위한 철저한 주변부 약탈 체제 구축 등)은 이미 1100년 이후부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일이었다.
밀란츠는 1장을 마무리하면서 유럽의 사회경제적 발전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다름 아닌 도시국가의 정치 체제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할 때 늘 나오는 중세 유럽의 내재적 발전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유럽의 내적·외적 발전을 균형 있게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장| 중국과 유럽의 정치경제 비교
- 중국 내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만들어가는 시장경제와 경제 성장을 둘러싼 입장
“중국 관료들이 상업 거래를 지원한 것은 맞지만 상인들이 부를 축적하도록 도와주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중국은 토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유지되고 상인계급의 이익에 대해서는거의 관심이 없는 관료들이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시장 거래의 원칙은 지원하면서 시장의 독점 세력으로부터 구매자를 보호하려고 애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서유럽에서처럼 남을 희생시켜서 부를 축적하려는 상인들의 열망은 좌절되고 말았다.”(86~87쪽)
1장이 자본주의 기원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수행했다면, 2장부터 4장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기원에 대한 역사 쓰기를 극복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2장에서 밀란츠가 선보이는 의도는 단순하다. 즉, “1000년경 사회경제, 국사, 기술의 발전 면에서 중세 중국과 유럽 국가를 비교한다면 중국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인정”(57쪽)한다면, 이후 “중국 제국이 왜 당시에 서유럽이 주변부를 정복하고 종속시키고 철저하게 수탈했던 것처럼(사회경제적, 군사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는지, 혹은 그럴 의지는 있었는지”(57쪽)를 확인하고 되묻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밀란츠는 먼저 송나라 시대의 사회경제 혁명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송나라 시대는 항해술의 끊임없는 향상, 정부의 대규모 조선 사업 계획 결정 등이 상품 구성의 변화와 더불어 교역의 증가를 부추겼다. 이를 통해 송나라 백성들은 점점 시장에 팔기 위한 농업에 눈을 돌리거나 농업 이외의 영리를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제 상업에 대한 정부 관료들의 태도는 비난하는 쪽에서 찬성하는 쪽으로 바뀌어나갔다. 밀란츠는 송나라 시대 부의 원천을 상공업으로 꼽으면서, 두드러졌던 국제 교역의 급성장을 유목민족의 점증하는 위협에서 찾았다. 아울러 이런 유목민족의 위협은 중국의 해군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곧 해상·해외 무역의 번성을 통한 11~12세기 중국 상업혁명의 도래를 알렸다.
다만 이 과정에서 개입된 몽골 세력의 부상과 송나라 정복은 중국이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유일한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변수임은 틀림없었다. 여기서 밀란츠는 “누가 몽골 제국의 세계 지배로 이익을 봤는가”(65쪽)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는 곧 서양 상인들이라고 말한다. 몽골에 이어 명나라의 사회경제적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밀란츠는 중국 상인들이 국가로부터 군사력을 지원받을 만큼 중요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밝힌다. 관료들은 차라리 농업에 지원하겠다는 생각이 팽배했으며 외국 일에 개입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명나라 시대 해상무역 금지 정책은 민간 상인들에게 많은 제약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유럽 국가들이 막 해외로 확장하려던 것과 달리 15세기 중반부터 중국 내 상업 활동은 점점 작은 지역으로 한정되어갔다. 유럽이 중국보다 더 도시화되고 상업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상인-기업가들이 군주에게 끼치는 정치적 영향력은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밀란츠는 좀 더 디테일한 시선으로 접근하고자 페르낭 브로델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그의 의견을 비판한다. 밀란츠의 견해인즉슨, 브로델은 자신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보론』에서 중국 정부가 전제적 국가 통치 때문에 자본주의가 확산되는 것에 끊임없이 적개심을 보였다고 했지만, 이 당시 중국은 근대적 의미에서 전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밀란츠는 중국 정부가 시장경제와 경제 성장에 대한 지원이 매우 확고했다고 본다. 다만 그는 일부 비서구 해양 세력의 자국 해외상인에 대한 지원 의지 미약, 능력 부재가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인도양 해안을 따라 포진해 있던 소규모 상업과 군사 전략 거점들을 차지하게 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3장| 남아시아와 유럽의 정치경제 비교
- 남아시아 아대륙의 제국 형성 과정에서 주목할 사회 구조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전략
“남아시아 지역은 전혀 정태적이거나 침체되어 있지 않았고 어느 모로 보나 경제적, 기술적으로 유럽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 통치 체제가 종교적 군사 엘리트층이 지배하는 전형적인 조공국가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토착 상인이 생겨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이 장기화되면서 결국 서유럽 열강들은 서서히 수출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도 상인들은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38쪽)
3장에서 밀란츠는 “남아시아는 유럽 열강들이 침입하기 전에 과연 어느 정도까지 상업자본주의 체제에 근접했을까?”(102쪽)라고 묻는다. 실제로 1250년에서 1650년까지 유럽은 대부분의 아시아 시장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지배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물론 예전보다 많은 유럽 상인이 동양의 시장을 왕래했지만 아시아 국가들을 만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행위는 극도로 제한되었고 남아시아 아대륙의 경우에도 서양 상인들이 제공하는 상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 아래 남아시아 국가의 정치 체제가 가진 고유한 특성과 이를 둘러싼 사회계층 간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살펴보는 일은 곧, ‘동양적 전제’라 부르는 시선들을 극복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이를 통해 밀란츠는 책 속에서 특히 남아시아 사람들을 연구한 기존 학계의 시선을 강력히 비판하는데, “남아시아 사람들을 유럽의 경제적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류학적 인간”(104쪽)으로 묘사하면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라는 이분법을 전제”로 한 남아시아 연구를 수긍하지 않는다.
밀란츠는 점점 확대되고 있는 세계 분업 체계 안에서 서유럽이 중심부 지역으로 들어간 것은 ‘상인 권력’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곧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같은 국가와 상인의 이해관계가 결합된 ‘유럽적 융합’의 형태가 인도로 대변되는 남아시아 세력에는 구현될 수 없었다는 점과 이어진다. 아울러 식민지 전략을 통해 세력을 키우던 유럽의 상황을 살펴볼 때, “주변부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되 산업화를 막는 치밀한 정책은 서구 열강들이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133쪽).
이 장을 통해 밀란츠는 남아시아가 유럽과 같은 사회경제적 역동성이 없었다는 주류 학계의 유럽중심주의적 전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 두 지역이 서로 분기되는 분명한 차이점은 존재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4장| 서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정치경제 비교
- 북아프리카 내 정치-경제 현실의 한계와 유럽 중상주의 권력의 발전
“북아프리카에서는 상인들이 유럽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정치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상에서의 좌절은 결국 이슬람의 통치 체제의 약화와 유럽과 유사한 경제 확대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169쪽)
4장에서 밀란츠는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수단 지역의 여러 국가의 정치경제를 서유럽과 비교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가 왜 아프리카 대륙에서 열매를 맺지 못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141쪽)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보면 이는 곧 유럽에서 자본주의를 발생시킨 모든 요인이 이 지역의 특성인 이슬람 세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금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 세계의 매개가 되어주는 품목이었으며, 금괴는 중세 유럽 경제 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경제는 10~12세기 사이에 비약적 발전을 이뤘는데, 새로운 경작 방식과 관개기술의 발달이 한몫했다. 다만 해군력이 날로 쇠퇴하기 시작해 12세기~16세기까지 서유럽과의 경제적 격차가 점점 벌어졌다.
밀란츠는 자본주의적 특성이 북아프리카의 정치경제 구조에 확실히 존재했지만, 그 발전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부르주아 계층의 많은 개인이 국가 최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계급으로서 정치권력을 얻진 못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중요한데 즉 개별 상인이 안전 보장, 시장 접근, 자본 자체를 제공하는 국가의 지원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환경 자체가 북아프리카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당시 북아프리카 정치경제를 통해 본 중세 이슬람 사회에, 유럽 상인과 비견되는 자본가라 부를 만한 주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밀란츠는 자본가의 존재 여부만이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그 노력이 제도화되어 정착되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유럽 세력은 도시국가 내에서 이른바 ‘중상주의’ 권력을 다져감으로써 상업 제국주의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다져나가고 있었다.
결론| 중세 서유럽 도시국가는 정말 유럽의 기적을 이뤘는가?
- 균형 있는 세계사 쓰기를 위한 어떤 지점들
밀란츠는 결론에서 유럽이 비유럽 세력에 비해 역동적인 기술 전략을 꾀하거나, 중국·이슬람·힌두 문화 지도자들의 독선적 보수주의와 대조되는 활발한 호기심을 가졌다고 운운하는 일부 학자들의 평가에 의문을 던지면서 좀 더 신중하게 중세 서유럽 도시국가의 발흥을 따져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제안이 중요한 이유는 유럽연합이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통합을 정당화하고자 유럽이 오래전부터 역사적 단일체임을 강조하는 연구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시점에서 비판적 지점으로 삼을 만하기 때문이다. 밀란츠는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는 정신은 유럽뿐 아니라 다른 문명에서도 똑같이 존재했음을 강변한다. 다만 중세 말 서유럽 내 상업자본주의 체제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그는 유럽만이 갖고 있는 변수를 간과하지 않는다. 그 변수는 바로 ‘시민권’이다. 그리고 이 시민권은 이 책에서 밀란츠가 주목했던 ‘도시국가’라는 개념과 이어진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건 유럽의 도시국가가 동아시아,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역과 달리 도시와 자신을 동일시한 시민들이 심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한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13세기부터 서양의 발흥에 결정적 역할을 한 도시국가의 국력 증대로 나타나기도 했다. “유럽의 도시국가는 지속적인 교역과 상업 확대의 표현이자 그것을 보증하는 실체였다.”(181쪽)
밀란츠는 마지막으로 서양을 다룬 학문적 논의 자체는 “서양의 지식이 서양 이외의 세계를 머릿속으로뿐 아니라 실제로 통제하고 식민지화하고 지배해온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다”(183)고 경고한다. 가령 정통 마르크스주의 연구마저 시대와 장소 구분 없이 과거, 현재, 미래의 조건을 특정한 유럽 중심주의 패러다임에 맞게 주조하고 있으며, 19세기 부르주아 국민국가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역사학은 이러한 분석 단위를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밀란츠는 자본주의의 영향력 증가로 세계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이 시기에 경제사 분야가 편향적인 문화 연구와 정체성 문제로 방향을 맞춘 것이 과연 우연일까라는 질문으로 균형 있는 비교사회과학 연구를 거듭 촉구한다.
1장 | 유럽 상업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관점
- 세계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적 관점의 문제는 무엇인가
“근대화 이론, 정통 마르크스주의, 브레너주의, 세계-체제론은 모두 중세에 자본주의가 등장했다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일정한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논의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주제는 중세의 ‘후진성’이다. (…) 이러한 주제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봉건’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빠지기 십상이다. (…) 우리는 이제 중세를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보려고 애써야 한다.” (53~54쪽)
에릭 밀란츠에 따르면 세계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론적 관점은 크게 네 가지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브레너주의라고 부르는 네오-마르크스주의, 근대화 이론, 세계-체제론이 이에 해당된다. 밀란츠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부터 세계-체제론까지 각 이론적 관점의 중요한 특성을 개괄하면서 이런 관점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간다.
먼저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발전 과정을 결정론적이고 단계적으로 본다는 상식적인 문제의식부터 시작해 유럽 중심의 용어, 예를 들어 아시아적 생산양식 같은 것을 써서 역사를 고정화시켜버린다는 점, 근대 사회의 기원을 산업혁명과 더불어 18세기로 거슬러올라가 잡으면서 16세기를 간단하게 처리하고 넘어간 점을 지적한다.
뒤이어 브레너주의의 문제는 이 논의가 중세를 주목했다는 장점은 있지만, 피착취계급(농민)과 착취계급(귀족) 간의 계급투쟁 및 생산양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도시 중심의 생산보다는 농업 생산 문제에만 몰두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브레너주의는 이런 관점을 통해 봉건 농민이 시장의 명령에 종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문화와 교역에 대한 의존을 거부하는 인물이라고 단정지어버렸으며, 시장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그다음 비판적으로 살펴본 근대화 이론의 문제점은, 이 이론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중세 상인 단체와 동업조합이 마치 사회경제적 침체, 쇠퇴, 옛날 유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밀란츠는 상인 단체와 동업조합이 근대화 이론을 통해 잘못된 역사적 인식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면서, 이들을 낡은 중세의 유물이자 사회적으로 비효율적인 담합을 추구한 주체로만 묘사한다고 비판한다. 밀란츠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함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산업혁명을 근대성의 기점으로 본 근대화 이론의 가장 큰 약점은 봉건제와 중세를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에서 부정적으로만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중세는 산업혁명 이전의 음울하고 무기력한 망각의 구렁으로 묘사되면서 자유방임주의 경제가 모든 것을 휩쓸리고 가버리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단순한 시기로 처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체제론 비판은 세계-체제론의 주창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적인 것처럼 보이는 시기를 정확하게 적시한 듯한 역사 기술을 선보임으로써 마치 비자본주의적 행동양식으로 추정되는 사례들이 이제 없어졌으며 자본주의로 완벽하게 이 세계가 이행되었다는 오류를 범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1300년과 1500년 사이에 유럽에 존재했던 매우 중요한 자본주의와 관련된 역사적 지점 및 1150년과 1130년 사이에 발생한 주요 사건들이 자본주의 등장에 영향을 미쳤던 의의들을 놓치고 말았다고 강조한다. 밀란츠의 이런 날선 비판은 결국 “자본주의가 서유럽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말부터였다는 새로운 이론적 틀을 제안”(43쪽)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체제론자들이 따르는 16세기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현상(임금 노동, 산업의 전문화, 복잡한 분업, 계급투쟁, 무역을 통한 이윤 획득, 복잡한 금융 기법, 더 많은 자본 축적을 위한 철저한 주변부 약탈 체제 구축 등)은 이미 1100년 이후부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일이었다.
밀란츠는 1장을 마무리하면서 유럽의 사회경제적 발전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다름 아닌 도시국가의 정치 체제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할 때 늘 나오는 중세 유럽의 내재적 발전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유럽의 내적·외적 발전을 균형 있게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장| 중국과 유럽의 정치경제 비교
- 중국 내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이 만들어가는 시장경제와 경제 성장을 둘러싼 입장
“중국 관료들이 상업 거래를 지원한 것은 맞지만 상인들이 부를 축적하도록 도와주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중국은 토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으로 유지되고 상인계급의 이익에 대해서는거의 관심이 없는 관료들이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시장 거래의 원칙은 지원하면서 시장의 독점 세력으로부터 구매자를 보호하려고 애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서유럽에서처럼 남을 희생시켜서 부를 축적하려는 상인들의 열망은 좌절되고 말았다.”(86~87쪽)
1장이 자본주의 기원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수행했다면, 2장부터 4장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기원에 대한 역사 쓰기를 극복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2장에서 밀란츠가 선보이는 의도는 단순하다. 즉, “1000년경 사회경제, 국사, 기술의 발전 면에서 중세 중국과 유럽 국가를 비교한다면 중국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인정”(57쪽)한다면, 이후 “중국 제국이 왜 당시에 서유럽이 주변부를 정복하고 종속시키고 철저하게 수탈했던 것처럼(사회경제적, 군사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는지, 혹은 그럴 의지는 있었는지”(57쪽)를 확인하고 되묻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밀란츠는 먼저 송나라 시대의 사회경제 혁명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송나라 시대는 항해술의 끊임없는 향상, 정부의 대규모 조선 사업 계획 결정 등이 상품 구성의 변화와 더불어 교역의 증가를 부추겼다. 이를 통해 송나라 백성들은 점점 시장에 팔기 위한 농업에 눈을 돌리거나 농업 이외의 영리를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제 상업에 대한 정부 관료들의 태도는 비난하는 쪽에서 찬성하는 쪽으로 바뀌어나갔다. 밀란츠는 송나라 시대 부의 원천을 상공업으로 꼽으면서, 두드러졌던 국제 교역의 급성장을 유목민족의 점증하는 위협에서 찾았다. 아울러 이런 유목민족의 위협은 중국의 해군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곧 해상·해외 무역의 번성을 통한 11~12세기 중국 상업혁명의 도래를 알렸다.
다만 이 과정에서 개입된 몽골 세력의 부상과 송나라 정복은 중국이 자본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유일한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변수임은 틀림없었다. 여기서 밀란츠는 “누가 몽골 제국의 세계 지배로 이익을 봤는가”(65쪽)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는 곧 서양 상인들이라고 말한다. 몽골에 이어 명나라의 사회경제적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밀란츠는 중국 상인들이 국가로부터 군사력을 지원받을 만큼 중요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음을 밝힌다. 관료들은 차라리 농업에 지원하겠다는 생각이 팽배했으며 외국 일에 개입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명나라 시대 해상무역 금지 정책은 민간 상인들에게 많은 제약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유럽 국가들이 막 해외로 확장하려던 것과 달리 15세기 중반부터 중국 내 상업 활동은 점점 작은 지역으로 한정되어갔다. 유럽이 중국보다 더 도시화되고 상업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상인-기업가들이 군주에게 끼치는 정치적 영향력은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밀란츠는 좀 더 디테일한 시선으로 접근하고자 페르낭 브로델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그의 의견을 비판한다. 밀란츠의 견해인즉슨, 브로델은 자신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보론』에서 중국 정부가 전제적 국가 통치 때문에 자본주의가 확산되는 것에 끊임없이 적개심을 보였다고 했지만, 이 당시 중국은 근대적 의미에서 전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밀란츠는 중국 정부가 시장경제와 경제 성장에 대한 지원이 매우 확고했다고 본다. 다만 그는 일부 비서구 해양 세력의 자국 해외상인에 대한 지원 의지 미약, 능력 부재가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인도양 해안을 따라 포진해 있던 소규모 상업과 군사 전략 거점들을 차지하게 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
3장| 남아시아와 유럽의 정치경제 비교
- 남아시아 아대륙의 제국 형성 과정에서 주목할 사회 구조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전략
“남아시아 지역은 전혀 정태적이거나 침체되어 있지 않았고 어느 모로 보나 경제적, 기술적으로 유럽에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 통치 체제가 종교적 군사 엘리트층이 지배하는 전형적인 조공국가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토착 상인이 생겨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이 장기화되면서 결국 서유럽 열강들은 서서히 수출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도 상인들은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38쪽)
3장에서 밀란츠는 “남아시아는 유럽 열강들이 침입하기 전에 과연 어느 정도까지 상업자본주의 체제에 근접했을까?”(102쪽)라고 묻는다. 실제로 1250년에서 1650년까지 유럽은 대부분의 아시아 시장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지배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물론 예전보다 많은 유럽 상인이 동양의 시장을 왕래했지만 아시아 국가들을 만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행위는 극도로 제한되었고 남아시아 아대륙의 경우에도 서양 상인들이 제공하는 상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 아래 남아시아 국가의 정치 체제가 가진 고유한 특성과 이를 둘러싼 사회계층 간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살펴보는 일은 곧, ‘동양적 전제’라 부르는 시선들을 극복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이를 통해 밀란츠는 책 속에서 특히 남아시아 사람들을 연구한 기존 학계의 시선을 강력히 비판하는데, “남아시아 사람들을 유럽의 경제적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른 인류학적 인간”(104쪽)으로 묘사하면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라는 이분법을 전제”로 한 남아시아 연구를 수긍하지 않는다.
밀란츠는 점점 확대되고 있는 세계 분업 체계 안에서 서유럽이 중심부 지역으로 들어간 것은 ‘상인 권력’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곧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같은 국가와 상인의 이해관계가 결합된 ‘유럽적 융합’의 형태가 인도로 대변되는 남아시아 세력에는 구현될 수 없었다는 점과 이어진다. 아울러 식민지 전략을 통해 세력을 키우던 유럽의 상황을 살펴볼 때, “주변부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되 산업화를 막는 치밀한 정책은 서구 열강들이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133쪽).
이 장을 통해 밀란츠는 남아시아가 유럽과 같은 사회경제적 역동성이 없었다는 주류 학계의 유럽중심주의적 전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 두 지역이 서로 분기되는 분명한 차이점은 존재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4장| 서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정치경제 비교
- 북아프리카 내 정치-경제 현실의 한계와 유럽 중상주의 권력의 발전
“북아프리카에서는 상인들이 유럽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정치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상에서의 좌절은 결국 이슬람의 통치 체제의 약화와 유럽과 유사한 경제 확대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169쪽)
4장에서 밀란츠는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수단 지역의 여러 국가의 정치경제를 서유럽과 비교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가 왜 아프리카 대륙에서 열매를 맺지 못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141쪽)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보면 이는 곧 유럽에서 자본주의를 발생시킨 모든 요인이 이 지역의 특성인 이슬람 세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금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 세계의 매개가 되어주는 품목이었으며, 금괴는 중세 유럽 경제 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경제는 10~12세기 사이에 비약적 발전을 이뤘는데, 새로운 경작 방식과 관개기술의 발달이 한몫했다. 다만 해군력이 날로 쇠퇴하기 시작해 12세기~16세기까지 서유럽과의 경제적 격차가 점점 벌어졌다.
밀란츠는 자본주의적 특성이 북아프리카의 정치경제 구조에 확실히 존재했지만, 그 발전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부르주아 계층의 많은 개인이 국가 최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계급으로서 정치권력을 얻진 못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중요한데 즉 개별 상인이 안전 보장, 시장 접근, 자본 자체를 제공하는 국가의 지원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환경 자체가 북아프리카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당시 북아프리카 정치경제를 통해 본 중세 이슬람 사회에, 유럽 상인과 비견되는 자본가라 부를 만한 주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밀란츠는 자본가의 존재 여부만이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그 노력이 제도화되어 정착되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유럽 세력은 도시국가 내에서 이른바 ‘중상주의’ 권력을 다져감으로써 상업 제국주의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다져나가고 있었다.
결론| 중세 서유럽 도시국가는 정말 유럽의 기적을 이뤘는가?
- 균형 있는 세계사 쓰기를 위한 어떤 지점들
밀란츠는 결론에서 유럽이 비유럽 세력에 비해 역동적인 기술 전략을 꾀하거나, 중국·이슬람·힌두 문화 지도자들의 독선적 보수주의와 대조되는 활발한 호기심을 가졌다고 운운하는 일부 학자들의 평가에 의문을 던지면서 좀 더 신중하게 중세 서유럽 도시국가의 발흥을 따져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제안이 중요한 이유는 유럽연합이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통합을 정당화하고자 유럽이 오래전부터 역사적 단일체임을 강조하는 연구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시점에서 비판적 지점으로 삼을 만하기 때문이다. 밀란츠는 자본을 축적하고자 하는 정신은 유럽뿐 아니라 다른 문명에서도 똑같이 존재했음을 강변한다. 다만 중세 말 서유럽 내 상업자본주의 체제의 출현이라는 맥락에서 그는 유럽만이 갖고 있는 변수를 간과하지 않는다. 그 변수는 바로 ‘시민권’이다. 그리고 이 시민권은 이 책에서 밀란츠가 주목했던 ‘도시국가’라는 개념과 이어진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건 유럽의 도시국가가 동아시아, 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역과 달리 도시와 자신을 동일시한 시민들이 심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한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13세기부터 서양의 발흥에 결정적 역할을 한 도시국가의 국력 증대로 나타나기도 했다. “유럽의 도시국가는 지속적인 교역과 상업 확대의 표현이자 그것을 보증하는 실체였다.”(181쪽)
밀란츠는 마지막으로 서양을 다룬 학문적 논의 자체는 “서양의 지식이 서양 이외의 세계를 머릿속으로뿐 아니라 실제로 통제하고 식민지화하고 지배해온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다”(183)고 경고한다. 가령 정통 마르크스주의 연구마저 시대와 장소 구분 없이 과거, 현재, 미래의 조건을 특정한 유럽 중심주의 패러다임에 맞게 주조하고 있으며, 19세기 부르주아 국민국가의 존재를 정당화하고자 역사학은 이러한 분석 단위를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다. 밀란츠는 자본주의의 영향력 증가로 세계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이 시기에 경제사 분야가 편향적인 문화 연구와 정체성 문제로 방향을 맞춘 것이 과연 우연일까라는 질문으로 균형 있는 비교사회과학 연구를 거듭 촉구한다.
목차
서문
1장 | 유럽 상업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관점
정통 마르크스주의 | 브레너주의(브레너식 접근 방식) | 근대화 이론 | 세계-체제론 |
시간적 전제조건 | 공간적 전제조건 | 중세의 도시국가간 체제 | 잠정 결론
2장 | 중국과 유럽의 정치경제 비교
송나라 시대의 중국 사회경제 혁명(900~1280년경) | 중국과 몽골 |
명나라 시대의 중국과 유럽: 갈림길 | 유럽 자본주의에 대한 결론
3장 | 남아시아와 유럽의 정치경제 비교
남아시아 지역의 무역과 상품의 흐름 | 남아시아의 국가와 국가 구조 |
남아시아와 유럽 엘리트들의 전략 | 위태로운 변경의 충격 | 결론
4장 | 서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정치경제 비교
북아프리카와 수단 지역의 여러 국가(1200~1500년경) |
북아프리카의 도시와 국가, 그리고 지중해 지역의 힘의 균형 | 결론
5장 | 결론: 중세 서유럽 도시국가는 정말 유럽의 기적을 이뤘는가?
감사의 말
주
참고문헌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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