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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도서

벽 속의 요정: 천의 얼굴 김성녀 life story

개인저자
김성녀
발행사항
서울 : 문학세계사, 2015
형태사항
284 p. :. 삽화, 초상 ;. 23 cm
ISBN
9788970756042
청구기호
680.99 김53ㅂ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G0015838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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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G0015838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천千의 얼굴을 가진 우리 시대의 진정한 배우
‘마당놀이의 여왕’ 김성녀가 처음 쓰는 “나의 삶, 나의 무대”


지난 40여 년간 연극, 뮤지컬, 창극, 영화, 마당놀이, TV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천의 얼굴’, ‘마당놀이의 여왕’, ‘벽 속의 요정’ 등의 수식어를 얻게 된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65)이 처음으로 열정 가득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서전격인 이번 책에는 다섯 살 꼬마부터 할머니 역할까지 천의 얼굴로 변신했던 배우 김성녀와, 「국립창극단」예술감독,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 극단 「미추」대표 등을 역임하는 등 무대와 현실에서 1인 다역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김성녀 감독은 1950년 서울에서 어머니인 여성국극 스타 박옥진(1935~2004) 명창과 ‘춘향전’을 최초로 영화화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아버지 김향(1921~1999) 사이에서 5녀 1남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어머니의 아역으로 천막극장 무대에 오르기 시작하였고,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인 박귀희 선생 문하에서 사사받았다. 1976년 극단 「민예」의 <한네의 승천>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연극 무대에 정식으로 데뷔, 이후 뮤지컬,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무대에서 탄탄한 연기력을 펼쳐 배우 김성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남편인 연출가 손진책 씨와 함께 1986년 극단 「미추」를 창단하고 우리나라 전통 연희를 바탕으로 한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연극을 선보였는데, 1981년 시작된 ‘마당놀이’는 30년 동안 관객 250만 명을 동원하면서 공연예술 분야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김 감독의 최고 대표작은 2005년 초연된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으로, 1인 32역을 해내며 배우의 모든 것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0년이 넘은 지금도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1. 배우는 나의 운명

어린 나이에 무대에 올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김성녀는 여배우로서 살아왔다. 먼지 쌓인 극장이 그녀에겐 어머니의 품이고, 요람이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연기하고 춤추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고, 배우 생활은 그렇게 지금까지 평생의 업이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1950~1960년대를 풍미한 여성 국극의 프리마돈나 박옥진 여사이다. ‘여성 국극’은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우리 고유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악극인데, 배우들이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도령이나 심봉사 같은 배역들도 모두 여자 배우들이 연기하였다. 임춘앵, 조금앵, 김경수 등 남자 역할을 주로 하던 배우들은 여성임에도 여자 팬들의 열성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이들이 한번 공연에 나서면 동네가 들썩일 정도였다.
‘눈물의 여왕’이라 불렸던 박옥진은 남자가 아닌 여자 주인공을 도맡아 했다. 그래서 ‘프리마돈나’로 통했다. 흔히 프리마돈나 하면, 모두가 선망하는 화려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상상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호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박옥진은 여성 국극 작가이자 연출자인 남편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 이처럼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던 부모님을 따라 김성녀와 그녀의 남매들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지냈다. 무대와 극장은 그들의 집이자 놀이터였고, 배우들의 무대 의상을 가득 담아 둔 바구니는 요람이 되었다. 그녀는 당시를 아래처럼 회고한다.

“다섯 살 때 엄마의 아역으로 무대에 오를 때 무엇보다 나를 흥분시킨 건 나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반짝거리는 눈빛, 그리고 내가 무대에서 내려올 때 등 뒤로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박수 소리였다. 그 눈빛과 박수 소리만 있으면 언제든 나는 무대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어린 나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무대 위에 서야 한다고 누군가 신호를 보내면 먹던 밥그릇도 내팽개치고 냉큼 달려가 노래하고 춤을 췄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박수 소리가 어린 내게는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2. 벽 속의 요정

2005년 국내에선 처음으로 막을 올린 연극 <벽 속의 요정>은 배우 김성녀의 연기 인생이 집약된, 그녀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남편이자 연극 연출가인 손진책 씨가 연기 인생 30주년을 맞는 아내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남편은 ‘김성녀가 가장 돋보이는 연극’이 목표였다. 이를테면 30년 간 쌓아 온 연기 공력이 한꺼번에 다 드러나는 무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 극작가의 동명 희곡을 각색한 <벽 속의 요정>은 좌우 대립이 극심하던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살아남기 위해 평생 벽 속에 숨어 지내야 했던 한 남자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모노드라마인 이 작품 속에서, 김성녀는 어린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32명에 달하는 배역을 혼자서 자유자재로 오가며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벽 속의 요정>은 2005년, ‘올해의 예술상’과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했으며 그해 평론가 협회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연극 베스트3’, 2006년에는 ‘월간 한국연극 공연베스트 7’에 선정되기도 했다.
김성녀는 이 작품을 통해 30여 년의 세월 동안 무대 위에서 쌓아온 내공을 유감없이 선보여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오랫동안 연극배우로 활약해 왔음에도 관객들에게 마당놀이의 얼굴로 기억되어 온 김성녀에게 <벽 속의 요정>은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대중들은 김성녀를 진정한 연극배우로 인지하게 되었다.

3. 마당놀이의 여왕

1980년 MBC 창사기념 공연 <허생전>을 시작으로 세상에 태어난 ‘마당놀이’는 30여 년 간 수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새로운 공연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김성녀는 남편인 연출가 손진책, 배우 김종엽, 윤문식 등과 함께 마당놀이를 성공시킨 주역이다.
마당놀이는 우리의 전통연희를 바탕으로 한국 고유의 춤과 소리, 연기를 한데 버무려 만든 새로운 공연 장르로, 한국 고유의 춤과 노래, 해학과 풍자를 가득 담고 있다. 김성녀는 무대 위에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관객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30년을 보냈다.
1980년대 서슬 퍼런 독재정권에 억눌려 있던 청춘들의 언로言路가 되어 주었던 마당놀이는 1990년대를 거치며 온가족이 함께 손잡고 공연장을 찾는,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공연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심청전>, <배비장전>, <별주부전>, <삼국지>, <이춘풍 난봉기>, <춘향전>, <흥보전>, <봉이 선달전>, <쾌걸 박씨전>, <홍길동전>, <마포 황부자> 등 지난 30년 동안 우리 고전 소설을 각색한 마당놀이로 신명나는 연극판을 펼쳤다. 판소리 다섯 마당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모두 무대 위에 올렸고, 판소리 열두 마당에 속하는 작품도 모두 공연하였다. 윤문식의 애드립과 김종엽의 탈춤, 그리고 김성녀의 멋드러진 소리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마당놀이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판소리나 고전 등 우리 것만 고집하지 않고 서양의 고전을 우리 정서에 어울리게 각색하는 등 새로운 시도도 했다. 『베니스의 상인』을 각색해 <마포 황부자>로 만들었고, 『삼국지』의 한 대목을 다루는 <적벽가>를 마당놀이로 만들어 초등학생을 비롯해 청소년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매해 1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이 찾아 그동안 250여만 명이 마당놀이를 즐겼는데 공연 횟수로는 3,000회를 훌쩍 넘긴 것이었다. 더군다나 <삼국지>는 중국으로 역수출되기도 하였다.
마당놀이가 잠시 휴식기를 갖고 있는 지금, 김성녀는 앞으로 마당놀이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얼굴들을 키워내는 한편, 마당놀이를 새 시대에 걸맞는 모습으로 새 단장하기 위한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

4. 남편과의 사랑

배우 김성녀는 1976년, 지금의 남편인 손진책 연출가를 처음 만났다. 박귀희 명창에게 가야금 병창을 배우며 한창 소리에 빠져 지내던 김성녀에게 함께 소리를 배우던 김동애 씨가 극단 「민예」를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김성녀는 당시의 일을 아래처럼 회상한다.
“극단 「민예」는 아현동 고갯마루턱 허름한 건물 4층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표(허규, 전 국립극장장)는 소주 한 병을 옆에 놓고 탈을 깎고 있었고, 그 옆에는 머리숱이 많고 까만 눈동자를 가진 해맑은 청년(손진책)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연출자라고 소개를 하면서 이 작품이 입문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디션을 볼 것도 없이 그냥 배역을 맡으라면서 대본을 내게 덜컥 건넸다.”
<한네의 승천>은 김성녀에게 데뷔작이자, 남편과 사랑의 인연을 맺어 준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손진책과 김성녀는 이후 많은 작품을 함께하며 연출가와 배우로 호흡을 맞춰 왔고, 그런 만큼 부부라기보다는 동료로서 많은 시간을 보내 왔다. 남편과 연애를 막 시작하던 무렵의 회상이 재미있다.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은 엉뚱한 곳에서 표가 났다. 연극을 준비하노라면 동료들과 수도 없이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나는 원래 잘 웃는 사람이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터라 그 자리가 늘 즐거웠다. 그런데, 한참 웃고 떠들고 있을 때면 어디선가 잘게 부서진 성냥개비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저쪽 자리에 앉은 그가 나를 향해 성냥개비를 잘라서 던지고 있는 것이다. 너무 웃고 떠들지 말라는 사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게 불쾌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그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게 그가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있는 것 같아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연출가로서 날카로운 지적을 서슴치 않는 남편과, 배우로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고 주장해 온 아내. 두 사람은 때로 티격태격 하며 싸우기도 하고 의견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끈끈한 동지애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오랜 시간, 행복하게 가정을 지켜오고 있다.

5. 사람, 소중한 인연들

1976년에 데뷔해, 오늘날까지 무대 위에 오르고 있는 배우 김성녀. 그녀는 연극, 뮤지컬, 창극, 영화와 TV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 왔고, 수많은 동료 배우, 연출가와 함께 호흡을 맞춰 왔다.
극단 「민예」에서 주로 활동하던 김성녀는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며 김동애, 안숙선 씨를 만났다. 서로 라이벌이기도 하고, 절친한 선후배 사이기도 했던 그들과 함께 해외 공연 등 무수한 공연을 함께 했다. 그리고 「국립창극단」을 그만두고, 「국립극단」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당시 「국립극단」은 그야말로 배우의 산실이었다. 장민호, 백성희, 정애란, 손숙 등 쟁쟁한 실력을 가진 배우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때문에 「국립극단」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연극 배우로서의 이력을 인정받는 길이기도 했다.
김성녀는 「국립극단」 소속 배우로 활동하면서 <바리더기>, <돈 주앙>, <어떤 날>, <한만선>을 비롯해 여러 작품에 출연했는데, 특히 이해랑, 오태석 등 기라성 같은 연출자들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창극단에서 단원으로 처음 만나, 훗날 창극 <서편제>에서 예술감독과 배우로 재회하게 된 안숙선 명창, 국립극단에서 동고동락하였고 지금은 한국 연극계를 함께 이끌어 나가고 있는 배우 손숙, 존경할 만한 선배로서 본보기가 되어준 백성희, 장민호 선생, 권성덕, 이호재 배우에 이르기 까지, 김성녀와 함께 작품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한국 공연예술계의 역사와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김성녀가 그만큼 긴 시간 동안 배우로서 무대 위를 지켜 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6.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2012년, 「국립창극단」예술감독 일을 시작하면서 김성녀 감독은 창극이라는 고여 있는 물을 다시 흐르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전에 없었던 새로운 시도, 파격을 통해 창극을 이 시대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도록 새 단장하고자 하였다.
그녀가 「국립창극단」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며 준비한 <장화홍련>은 판소리 <장화홍련전>을 현대적인 스릴러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독특한 무대미술, 공포스러운 장면 연출 등 기존 창극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매력을 선보이며 관객과 평단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뒤이어 막을 올린 <배비장전>은 창극의 기본기에 충실하면서도, 코믹한 요소들을 대거 부각시켜 ‘유쾌하고 재밌는 창극’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김성녀 예술감독이 세 번째로 제작한 <서편제>는 소설가 이청준의 연작소설을 창극으로 재창조해낸 작품이다. 소리꾼의 일대기를 다룬 이 작품은, 명창 안숙선이 주인공 소화 역으로 출연, 열연을 펼쳐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2013년 막을 올린 <메디아>는 고대 그리스 비극 ‘메디아’를 창극으로 소화한 작품으로, ‘오페라의 위기’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관객과 평단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냈다.
<장화홍련>에서 <메디아>에 이르기까지, 김성녀 예술감독이 제작한 모든 작품은 매진 행렬을 기록했다. 이는 김성녀 예술감독이 젊은 시절 배우로서 「국립창극단」에 몸담으며 자연스레 체득한 창극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 창극의 미래에 대한 혁신적인 비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국립창극단」 50주년을 맞아 부임한 김 감독은 새로운 시도로 창극의 새바람을 일으켰고 창극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 결과물인 <장화홍련>, <배비장전>, <서편제>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다른 춘향> 등은 대한민국 창극사史를 새로 썼다는 평을 받으며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 공적을 인정받은 김성녀 감독은 3년 임기를 마치고 지난 3일 연임되며 3년 간의 새로운 임기를 시작하였다.
공연이 내내 만원(매진)을 이루면 배우와 스태프에게 ‘만원 사례’ 봉투를 나누어 주는 것은 공연계의 오래된 전통이다. 하지만 창극단에는 그 동안 ‘남의 이야기’였다. 「국립창극단」창단 이후 만원 사례 봉투를 나눠 가진 적이 없었지만 김성녀 감독이 취임한 뒤에는 무대에 올린 작품마다 거의 다 ‘만원 사례’ 봉투를 나눠 갖게 되었다.

7. 삼 대째 대를 이어가는 예술인 가족

예술인 부부 밑에서 장녀로 태어난 김성녀는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의 아역을 맡아 무대 위에 서며 자연스럽게 배우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는데, 김성녀의 남매 동생들도 예술계 각 분야에서 굵직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둘째 김성애는 판소리의 한 유파인 동초제를 사사받아 중요무형문화제 제5호 판소리 이수자가 되어 국악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넷째 김성일은 MBC 프로덕션 무용 단장을 거쳐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막식,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등 굵직굵직한 행사에서 안무가로 맹활약했다. 이후로는 뮤지컬로 방향을 돌려 2006년에는 <풀 몬티>에서 배우로 무대 위에 서기도 했고, 현재는 뮤지컬 연출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막내 김성아는 해금 연주자로 「국립국악원」민속단원으로 연주 활동을 하면서 ‘젊은 명인’으로 뽑히기도 했고, 지금은 한양대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다른 두 동생도 한때 예술계에 몸담았던 적이 있다. 셋째 김성희는 성악(소프라노)을 했고, 다섯째 김성자는 한갑득 선생님으로부터 거문고 산조를 사사받고 「중앙국악관현악단」에서 거문고 연주자로 활동했다. 김성녀와 그녀의 동생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끼와 재능을 바탕으로, 무던히 노력한 끝에 지금의 성과를 일궈 낼 수 있었다. 현재, 김성녀의 두 자녀 또한 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딸 손지원은 뮤지컬 배우 활동하였고, 아들 지형은 현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출가의 길을 걷고 있다). 삼 대째 대를 이어가는 명실상부한 예술인 집안인 것이다.

▷ 배우 김성녀의 수상 경력

1986년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뮤지컬 <돈키호테>)
1990년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뮤지컬 <영웅만들기>)
1991년 서울연극제 여자연기상 (연극 <욕탕의 여인들>)
1992년 서울연극제 여자연기상 (연극 <남사당의 하늘>)
1996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 (뮤지컬 <7인의 신부>)
2000년 춘사영화제 여우조연상 (영화 <춘향뎐>)
2004년 꽃봉지회 선정 올해의 배우상
2005년 올해의 예술상 (연극 <벽속의 요정>)
동아연극상 연기상 (연극 <벽속의 요정>)
2010년 이해랑 연극상
목차

프롤로그 - 나는 배우다

제1장 배우는 나의 운명
제2장 나의 삶이 된 연극 무대
제3장 세상의 모든 무대
제4장 마당놀이, 그리고 창극단
제5장 사람, 사랑하는 이름들
제6장 배우며 가르치며
제7장 살며 사랑하며

에필로그 - 무대, 그곳에 선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