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벤야민 평전
- 대등서명
- Walter Benjamin
- 개인저자
- 하워드 아일런드, 마이클 제닝스 저; 김정아 역
- 발행사항
- 파주 : 글항아리, 2018
- 형태사항
- 934p. ; 사진 ; 23 cm
- ISBN
- 9788967355111
- 청구기호
- 850.99 아69ㅂ
- 일반주기
- 원저자명: Howard Eiland, Michael W. Jennings
- 서지주기
- 참고문헌과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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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6464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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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00016464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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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벤야민 평전의 가장 종합적이고도 결정적인 판본!
20세기 지성사의 난해한 몇몇 인물 중에서도 우뚝 솟아 있는 발터 벤야민을 다루는 책은 여러 권 출간된 바 있다. 이들 2차 문헌은 벤야민을 다루면서 서로의 내용과 입장이 만장일치를 이룬 게 한 편도 없을 만큼 벤야민은 수렴될 수 없는 다면적, 다층적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수천 명의 선행 연구자의 어깨를 딛고 선 이 평전의 저자들은 그러나 앞선 책들에서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기나 비평을 막론하고 취사선택적인 경향, 즉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고 나머지를 배제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벤야민의 초상은 편파적으로 그려졌고, 그를 신화화하거나 곡해하는 방식들도 나타났다.
영미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벤야민 연구자들인 아일런드와 제닝스의 이 평전은 벤야민의 전체적인 윤곽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엄밀한 연대기적 접근법을 취했고, 벤야민 작업들의 숨은 무대였던 일상에 주목하면서 그가 남긴 주저들의 학문적, 역사적 맥락들을 밝히고자 한다. 이런 접근법은 벤야민 삶의 각 단계와 작업들의 역사성을 조명할 수 있도록 하면서, 평전을 쓰는 저자들이 파악하는 벤야민의 학문적 궤적에 신뢰성을 담보해주기도 한다.
이 책은 가령 벤야민의 어린 시절이 한 개인의 사적 자취로 사라지지 않으며 경험과 기억의 비평적 대상으로 남는 면모를 추적해가는 가운데, 그의 삶을 온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기적 요소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객관적 접근과 동시에 연민·이해의 잣대이며, 다른 한편 한 개인의 삶을 철저히 학술과 비평의 관점에서 꿰어내는 점이다. 즉 단락 하나하나, 페이지 한 쪽 한 쪽이 그의 논문과 에세이들을 인용·압축하고 그에 대한 비평적 서술을 곁들여 삶에 대한 평전이면서 텍스트에 대한 서평이나 비평에세이의 성격을 갖는다.
벤야민은 지식인의 글쓰기에서 ‘가독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하지만 2차 문헌으로서 이 책은 벤야민의 해독되지 않는 난해함을 좀더 명료한 초상으로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물론 그럼으로써 벤야민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거나 그의 모순된 모습들을 하나로 용해시키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의 이해 불가능의 면모들을 좀더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그 원인이나 배경이나 의미를 조금 더 풀어놓고자 했다. 이것이 이 평전에 학술적 깊이를 부여한다.
삶의 예술가, 비평과 결합된 삶
연대기적 서술을 택한 이 책은 벤야민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한다. 알다시피 그의 유년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을 통해 한 개인의 유년이 무반성적 신화 공간이 아닌 역사 공간으로 용해되고, 아이의 안도감이 어른의 위기의식으로 용해되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경험’과 ‘기억’은 벤야민에게 중요한 개념이었다. “옛 도시들이 묻혀 있는 매체인 것처럼, 기억은 지나간 경험이 묻혀 있는 매체다. 자신의 과거에 다가가고자 하는 이는 무덤을 파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벤야민에게 기억한다는 것은 사라진 순간의 의미를 여러 지층에서 현전화하는 것이었다. 1929년작 「프루스트의 이미지」에서 “경험된 사건은 유한하지만 기억된 사건은 무한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벤야민의 경험과 기억들은 그 의미의 지층을 캐내야 하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독자에게 다가온다.
벤야민 삶의 가장 독특했던 것 중 하나는 ‘우정’의 방식이었다. 그는 탁월함과 치열함을 통해 어마어마한 지식인들을 자기 자장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우정의 궤적은 순탄치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벤야민은 절친들과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절대적 프라이버시를 지켰다. 둘째, 그는 자기 친구들끼리 교류하는 것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왜 그랬는가? 그가 고수했던 친구에 대한 완벽한 예의는 알고 보면 복잡한 거리두기의 기제였고, 친구끼리의 접촉을 막았던 것은 각각의 친구를 상대로 자신의 논의를 시험하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그런 벤야민을 두고 “속을 알 수 없는 친구”라고 했는데, 벤야민이 신중한 태도로 여러 가면과 우회 전략을 동원한 것은 자기 내면을 지키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결혼 전이나 후나 성애 모험적인 면을 강하게 드러냈던 벤야민은 지성적, 성애적 에너지를 아우르는 삶의 에너지를 모두 작품에 옮겨 담았다. 벤야민의 학문과 글쓰기를 한결같이 지지했던 아내 도라는 남편과의 육체적 관계를 포기할지언정, 그의 강력한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 부부관계에서 놀라운 점이었다. 아들 하나를 낳고 훗날 이혼으로 갈라서지만, 도라는 여전히 전남편이 쓰는 모든 글,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쓰는 모든 글을 읽었으며, 벤야민은 그녀의 의견을 변함없이 중시했다. 도라의 의견이 자신과 어긋나면 벤야민은 일을 진척시키기를 꺼렸다.
알다시피 벤야민은 다자적 연애관계를 즐겼는데, 복잡한 삼각관계에 휘말려 짝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특히 선호했다. 친구 숄렘은 “벤야민이 사유에서는 빛나는 윤리적 아우라를 보여주면서 일상생활의 것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비양심적, 비도덕적 요소를 보여준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일반적인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대자면 그가 마약과 노름에 빠진 것 또한 비난받을 만하다. 그는 망명자의 곤궁한 삶을 살 때조차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로 노름을 했고, 해시시에 대한 환각 경험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삶의 편린을 한 가지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의 삶의 지저분한 측면들은 오히려 그가 얼마나 절박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행태를 안으로부터 이해하려면, 그가 『파사주 작업』에서 노름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도취 상태의 노름꾼의 시공간 경험이 어떠한지를 고려해야 한다. 즉 그의 삶과 글은 모순 속에서 특별한 지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서 끄집어낼 수 있는 함의는 벤야민이 자신의 “여러 내면적 존재 양태”를 현실화하는 것을 일관된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즉 두드러진 다면성의 소유자였지만, 그렇다 해도 내면의 체계적 일관성이나 텍스트로서의 일관성을 잃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의식을 가리켜 “원심적”으로 통합되는 특이한 의식, 곧 사방으로 확산됨으로써 정립되는 의식이라고 말했다.
벤야민의 작품을 읽는 눈: 스케치
연대기적으로 진로를 변경하는 사유의 궤적 속에서(물론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지만) 이 책은 중요한 학술적 논의, 즉 벤야민의 글이 당대와 이후에 미치는 영향, 그를 둘러싼 토론과 논박, 글이 완성되어가는 와중의 문제의식들을 연결 짓는다.
벤야민은 청년 시절 한때 낭만주의적 사유를 한다. 그러다가 그 달떴던 시절의 정신적·정치적 술렁임은 덜 중뿔난 급진주의로 변형되고 유물론적·인류학적 성향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러면서도 벤야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항상 근본적인 의미에서 떠돌이 학생이었고, 언제나 시작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생애를 몇 년씩 끊어 살펴보는 이 책에서 그의 글쓰기는 단계별 진보를 보여주고 때마다 새로운 사유를 열어젖힌다.
가령 20세기 초반 낭만주의적 반자본주의를 설파하는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쓰면서 이후 마르크스주의로 가는 경로를 암시한다. “자본주의라는 숭배종교는 빚을 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한다.” 교리도 신학도 없이 오로지 구매와 소비라는 끊임없는 제례를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의 시간은 평일은 없고 오직 축제일만 있는 시간으로서 재구성된다.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빚과 죄를 떠안기면서 존재를 부숴버리는 측면에 주목한다. “자본주의가 종교가 되면서, 존재는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분쇄된다. 절망은 끊임없이 퍼져나가고, 결국은 절망이 종교적 현상태가 되기에 이른다.”
1923년의 「번역가의 과제」는 결코 번역 요령을 밝히는 책이 아니고, 오히려 예술작품 비평의 일반론으로서 벤야민의 사유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글의 출발점은 예술작품이 수용자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시는 읽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림은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며, 교향곡은 들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은 번역이 원작과 독자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비평과 아울러 작품의 ‘사후생’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일 뿐 아니라 원작의 생을 사실상 대신한다는 사유를 펼친다. “원작이 가장 새롭고 폭넓은 삶을 살게 되는 곳은 번역이다.”
벤야민의 논문 중 편파적으로 읽혀왔던 두 편의 글을 잠깐 살펴보자. 지금까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부당한 낙관을 보여주는 글로 비난받곤 했다면, 「이야기꾼」은 벤야민이 과거의 것들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널리 퍼뜨려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두 비판이 맡겨진 과제를 자기 목적에 맞게 이용할 줄 아는 벤야민의 기묘한 능력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오히려 「이야기꾼」은 파리에서 도시 상품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생했는가와 무관해 보이는 주제에서 출발해 매체와 장르의 형식이 인간의 경험이라는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라는 벤야민 특유의 관심사에 이르는 데 성공한다.
1930년대 벤야민이 최고의 성과를 내놓는 것은 보들레르 번역과 연구다. 보들레르는 현대적 삶의 가장 저질적인 부산물에 철저하게 감응한 인물로서, 역사의 ‘폐품’에 주목했던 벤야민이 모더니티의 논의에서 운명처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벤야민의 글이 형식과 테마를 발전시켜갈 때는 보들레르적 모더니티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고, 그의 후기 작업에서는 보들레르가 여러모로 초점으로 작용하게 되는 과정을 이 책은 망명생활의 고됨과 연결하며 잘 보여주고 있다.
벤야민이 마지막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단연 『파사주 작업』이다. 망명 10년 동안 썼던 많은 글은 『파사주 작업』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이었다. 이 책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출현한 도시 상품자본주의의 문화사라고 할 수 있는데, 끝내 미완성의 육중한 작품이었지만 이를 위해 행해진 연구와 성찰로부터 일련의 혁신적 저술이 나왔다.
이처럼 벤야민은 뛰어난 비평가이자 혁명적 이론가로서 방대한 업적을 남겼는데, 다른 한편 그는 픽션, 르포, 문화분석, 회고록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당한 분량의 작업을 남기기도 했다. 그중 “몽타주 책”이라고 할 수 있는 1928년에 나온 『일방통행로』와 앞서 언급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은 그야말로 현대의 명저다.
벤야민 이미지 콜라주: 지인들의 회고
이 책은 생애 연대에 따라 벤야민의 궤적을 쫓고 있는데, 동원되는 수많은 자료는 벤야민이 주고받은 편지들과 지인들의 회고록인 만큼 그의 이미지는 제각각 불완전하게 나타나지만, 저자들은 충돌하는 면모를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좀더 주목할 인물들은 옛 친구들보다는 학적 인맥이기도 하다. 제도권 내로 들어가 대학교수가 되고자 평생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마는 벤야민은 그의 불안정한 지위와 관계없이 타인에게 끊임없는 학문적 자극을 주며 동시대인들을 강력하게 끌어들였다.
이 평전은 그동안 벤야민의 자료를 발굴해온 수천 명 연구자의 일차 사료를 인용함으로써 벤야민의 조각들을 이어붙인다. 그중 주목할 만한 인물들은 벤야민의 학문과 삶에 누구보다 밀착하며 시온주의자로서의 입장을 설파했던 게르숌 숄렘, 이혼 전이든 후든 실질적 가장 역할을 했던 아내 도라, 벤야민에게 ‘거친 사유’의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까봐 친구들이 위험인물로 여긴 브레히트, 벤야민이 끊임없이 구애를 펼쳤던 애인 아샤 라치스, 평생 학문적 파트너였지만 벤야민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전용당할까봐 경계했던 아도르노, 아도르노보다 더 심했던 블로흐, 인품과 자신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던 에른스트 쇤 등 수없이 많다.
숄렘이 『한 우정의 역사』에서 그리는 청년 벤야민은 마력을 뿜어내는 존재였다. 그는 벤야민과의 관계를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경험”으로 회상한다. 숄렘의 1916~1919년 일기를 보면 친구의 지적 존재감과 그로 인한 자신의 감정적 동요가 기록되어 있다. “역사를 새롭고도 놀라운 방식으로 보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목소리가 있다. 그의 구체적인 의견들도 그렇지만, 정작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의 정신적 존재 자체다.” 숄렘의 히브리 전통 관련 지식이 벤야민의 사유에 영향을 미치고 벤야민의 사유가 다시 숄렘에게 해방적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언어철학 영역에서였다. 숄렘에게 벤야민은 “절대적, 압도적”일뿐더러 “내 삶의 중심에는 그 사람뿐”이라는 고백을 자아내는 인물이었다. “발터에게는 스스로를 소진함으로써 자기 글의 질서가 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다.” 물론 그들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음을 고통스럽게 깨달아나가는 쪽은 거의 언제나 숄렘으로, 그는 때로 퇴짜 맞는 애인 역할을 맡았다.
벤야민의 문화비평이 비평인 동시에 “비평의 대상에 대한 철학”임을 일찍이 알아차린 친구는 아도르노였다. 즉 벤야민의 모든 작업에는 전통 철학의 문제 틀을 바탕으로 하는 세 가지 관심사가 존재한다. 간략히 말해 경험, 역사적 기억, 예술인데, 이 세 관심사의 기원은 칸트의 비판적 관념론, 니체의 생철학과 연결된다. 그의 작업은 통상의 철학적 형태를 띠지 않지만, 벤야민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이율배반 안팎에서 두루 사유해야 한다는 도전을 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런 작업의 이상적인 독자가 바로 아도르노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토론에는 거의 언제나 『파사주 작업』이 있었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파사주 작업』이 “철학의 중심일 뿐 아니라, 오늘날 철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과 비교할 때 단연 결정적인 발언이자 독보적인 걸작”이 될 것임을 일찍이 꿰뚫어보았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글 「프란츠 카프카」를 읽고 “즉각적, 압도적인 감격”을 표하기도 했다. “우리가 철학의 근본 문제들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이토록 온전히 느낀 것은 이 글이 처음이었습니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이 카프카의 우화에서 ‘역전된 신학’을 끌어내고자 한다는 것을 이해할뿐더러 신화와 고대가 모더니티의 내재해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장 이해력 높은 독자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긴장관계는 때로 팽팽했다. 아도르노가 벤야민의 논의를 전용함으로써 학계에서 촉망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벤야민의 신경을 긁었다. 가령 아도르노는 『철학의 현재성』에서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기원』을 인용 없이 갖다 썼고, 교수자격 청구논문인 『키르케고르』에서는 벤야민의 학적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름의 견해를 찾아가는 과정에 놓여 있는 자신을 노출시킨다. 더욱이 1930년대에 아도르노는 『파사주 작업』에 대해 난데없이 공동 소유권을 주장하는 강도 높은 간섭을 하거나, 어떤 식의 연구는 안 된다는 훈수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의 간섭은 『파사주 작업』에 해를 끼친 것은 물론이고 이 작업의 수용과정에도 해를 끼치게 된다. 벤야민의 심리 상태에 악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벤야민과 학문적 우열을 다투는 동료로는 에른스트 블로흐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신간 『이 시대의 유산』이 나온 뒤, 벤야민은 이 책이 자기 글을 도둑질했음을 알아차렸다. 이 책에서 블로흐는 몽타주 형식을 훌륭하게 차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사주 작업』의 주제와 성좌 논법을 고의적으로 전용하고 있다. 벤야민은 블로흐의 책에 대한 감상을 한 편지에서 밝힌다. “블로흐에게도 훌륭한 의도와 중요한 통찰이 있겠지만 그런 것을 구체화할 만한 분별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벤야민과 블로흐 사이에는 여전히 인간적 친밀함이 있었기에 벤야민은 “우리가 마지막 대화를 나눈 뒤로 많은 것이 피눈물로 씻겨 내려갔을 테니 다시 토론을 하게 된다면 우리 둘에게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리라 믿는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브레히트와의 우정, 원숙한 학문의 근간
언제나 친구들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맡았던 벤야민이 그 역할을 상대에게 넘긴 유일한 예외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였다. 벤야민의 걸작인 『파사주 작업』은 브레히트와의 만남(역사유물론의 관점과 초현실주의에 기원을 둔 관점의 충돌) 덕분에 틀을 갖추게 됐다. 1920년대에 브레히트는 벤야민과의 만남을 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벤야민의 사유는 바뀌어갔고, 1920년대 말부터 벤야민에게서 “마르크스주의적 억양이 더 뚜렷이” 나타난 데에는 브레히트와의 관계가 있었다. 지금 벤야민의 작업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930년대 중반에 작업한 글들이지만, 이처럼 원숙한 학문의 근간은 브레히트와의 우정에서 나왔다. 벤야민의 작업들이 급진좌파의 정치학, 유대교와 기독교의 세부 교리를 넘나드는 종교통합적 신학, 독일 철학 전통에 대한 심도 있는 지식, 급변하는 모더니티 환경 속의 다양한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문화 이론의 혼합이라는 특징을 드러낸 것은 그 이후다.
벤야민의 친구들은 브레히트와의 관계에 의혹의 시선을 던지면서도 그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숄렘은 “브레히트는 벤야민의 삶에 완전히 새로운 요소를 들여왔다”고 회상했다. 벤야민은 브레히트 서클의 일원이 되면서 토론을 벌여나갔으며, 카를 코르슈를 비롯해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브레히트는 벤야민이 쓰는 글의 중요한 제재였고, 그의 목소리는 벤야민의 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벤야민은 “내가 브레히트의 작품에 동의한다는 것은 내 입장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도 튼튼히 무장된 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가령 부르주아 작가의 프롤레타리아화의 가능성에 대한 브레히트와의 논의는 5년 뒤 벤야민의 보들레르 연구에서 거의 정확하게 반복된다. 벤야민은 성향 면에서는 신학적이었고 작업 면에서는 신중히 조율된 좌파적 사회 연구 쪽이었지만, 정치적 입장 면에서는 브레히트적(참여적) 정치학을 택하고 있었는데, 숄렘이 반대하는 것은 바로 그 정치학이었다.
* * *
벤야민 사후 70년이 지났지만 그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사유와 글쓰기가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의 가능성, 기술력을 활용하는 매체에 대한 적응과 비판, 유럽 모더니티가 처해 있는 역사적 현상에 대한 분석 등으로 기존 이해를 뒤흔들었지만, 또 하나 특유의 세밀한 언어 표현으로 문장에 있어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특히 그는 ‘사유이미지’라는 형식으로 선구적인 형식 혁신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줬다. 따라서 이 평전을 통해 독자들은 그의 사유의 밀도와 깊이를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감각적인 경험도 그에 못지않게 누릴 것이다.
20세기 지성사의 난해한 몇몇 인물 중에서도 우뚝 솟아 있는 발터 벤야민을 다루는 책은 여러 권 출간된 바 있다. 이들 2차 문헌은 벤야민을 다루면서 서로의 내용과 입장이 만장일치를 이룬 게 한 편도 없을 만큼 벤야민은 수렴될 수 없는 다면적, 다층적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수천 명의 선행 연구자의 어깨를 딛고 선 이 평전의 저자들은 그러나 앞선 책들에서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기나 비평을 막론하고 취사선택적인 경향, 즉 하나의 주제를 설정하고 나머지를 배제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벤야민의 초상은 편파적으로 그려졌고, 그를 신화화하거나 곡해하는 방식들도 나타났다.
영미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벤야민 연구자들인 아일런드와 제닝스의 이 평전은 벤야민의 전체적인 윤곽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엄밀한 연대기적 접근법을 취했고, 벤야민 작업들의 숨은 무대였던 일상에 주목하면서 그가 남긴 주저들의 학문적, 역사적 맥락들을 밝히고자 한다. 이런 접근법은 벤야민 삶의 각 단계와 작업들의 역사성을 조명할 수 있도록 하면서, 평전을 쓰는 저자들이 파악하는 벤야민의 학문적 궤적에 신뢰성을 담보해주기도 한다.
이 책은 가령 벤야민의 어린 시절이 한 개인의 사적 자취로 사라지지 않으며 경험과 기억의 비평적 대상으로 남는 면모를 추적해가는 가운데, 그의 삶을 온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기적 요소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객관적 접근과 동시에 연민·이해의 잣대이며, 다른 한편 한 개인의 삶을 철저히 학술과 비평의 관점에서 꿰어내는 점이다. 즉 단락 하나하나, 페이지 한 쪽 한 쪽이 그의 논문과 에세이들을 인용·압축하고 그에 대한 비평적 서술을 곁들여 삶에 대한 평전이면서 텍스트에 대한 서평이나 비평에세이의 성격을 갖는다.
벤야민은 지식인의 글쓰기에서 ‘가독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하지만 2차 문헌으로서 이 책은 벤야민의 해독되지 않는 난해함을 좀더 명료한 초상으로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물론 그럼으로써 벤야민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거나 그의 모순된 모습들을 하나로 용해시키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의 이해 불가능의 면모들을 좀더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그 원인이나 배경이나 의미를 조금 더 풀어놓고자 했다. 이것이 이 평전에 학술적 깊이를 부여한다.
삶의 예술가, 비평과 결합된 삶
연대기적 서술을 택한 이 책은 벤야민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한다. 알다시피 그의 유년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을 통해 한 개인의 유년이 무반성적 신화 공간이 아닌 역사 공간으로 용해되고, 아이의 안도감이 어른의 위기의식으로 용해되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경험’과 ‘기억’은 벤야민에게 중요한 개념이었다. “옛 도시들이 묻혀 있는 매체인 것처럼, 기억은 지나간 경험이 묻혀 있는 매체다. 자신의 과거에 다가가고자 하는 이는 무덤을 파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벤야민에게 기억한다는 것은 사라진 순간의 의미를 여러 지층에서 현전화하는 것이었다. 1929년작 「프루스트의 이미지」에서 “경험된 사건은 유한하지만 기억된 사건은 무한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벤야민의 경험과 기억들은 그 의미의 지층을 캐내야 하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독자에게 다가온다.
벤야민 삶의 가장 독특했던 것 중 하나는 ‘우정’의 방식이었다. 그는 탁월함과 치열함을 통해 어마어마한 지식인들을 자기 자장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우정의 궤적은 순탄치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벤야민은 절친들과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절대적 프라이버시를 지켰다. 둘째, 그는 자기 친구들끼리 교류하는 것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왜 그랬는가? 그가 고수했던 친구에 대한 완벽한 예의는 알고 보면 복잡한 거리두기의 기제였고, 친구끼리의 접촉을 막았던 것은 각각의 친구를 상대로 자신의 논의를 시험하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그런 벤야민을 두고 “속을 알 수 없는 친구”라고 했는데, 벤야민이 신중한 태도로 여러 가면과 우회 전략을 동원한 것은 자기 내면을 지키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결혼 전이나 후나 성애 모험적인 면을 강하게 드러냈던 벤야민은 지성적, 성애적 에너지를 아우르는 삶의 에너지를 모두 작품에 옮겨 담았다. 벤야민의 학문과 글쓰기를 한결같이 지지했던 아내 도라는 남편과의 육체적 관계를 포기할지언정, 그의 강력한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들 부부관계에서 놀라운 점이었다. 아들 하나를 낳고 훗날 이혼으로 갈라서지만, 도라는 여전히 전남편이 쓰는 모든 글,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쓰는 모든 글을 읽었으며, 벤야민은 그녀의 의견을 변함없이 중시했다. 도라의 의견이 자신과 어긋나면 벤야민은 일을 진척시키기를 꺼렸다.
알다시피 벤야민은 다자적 연애관계를 즐겼는데, 복잡한 삼각관계에 휘말려 짝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특히 선호했다. 친구 숄렘은 “벤야민이 사유에서는 빛나는 윤리적 아우라를 보여주면서 일상생활의 것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비양심적, 비도덕적 요소를 보여준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일반적인 도덕성의 잣대를 들이대자면 그가 마약과 노름에 빠진 것 또한 비난받을 만하다. 그는 망명자의 곤궁한 삶을 살 때조차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로 노름을 했고, 해시시에 대한 환각 경험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삶의 편린을 한 가지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의 삶의 지저분한 측면들은 오히려 그가 얼마나 절박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행태를 안으로부터 이해하려면, 그가 『파사주 작업』에서 노름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도취 상태의 노름꾼의 시공간 경험이 어떠한지를 고려해야 한다. 즉 그의 삶과 글은 모순 속에서 특별한 지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서 끄집어낼 수 있는 함의는 벤야민이 자신의 “여러 내면적 존재 양태”를 현실화하는 것을 일관된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즉 두드러진 다면성의 소유자였지만, 그렇다 해도 내면의 체계적 일관성이나 텍스트로서의 일관성을 잃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의식을 가리켜 “원심적”으로 통합되는 특이한 의식, 곧 사방으로 확산됨으로써 정립되는 의식이라고 말했다.
벤야민의 작품을 읽는 눈: 스케치
연대기적으로 진로를 변경하는 사유의 궤적 속에서(물론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지만) 이 책은 중요한 학술적 논의, 즉 벤야민의 글이 당대와 이후에 미치는 영향, 그를 둘러싼 토론과 논박, 글이 완성되어가는 와중의 문제의식들을 연결 짓는다.
벤야민은 청년 시절 한때 낭만주의적 사유를 한다. 그러다가 그 달떴던 시절의 정신적·정치적 술렁임은 덜 중뿔난 급진주의로 변형되고 유물론적·인류학적 성향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러면서도 벤야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항상 근본적인 의미에서 떠돌이 학생이었고, 언제나 시작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의 생애를 몇 년씩 끊어 살펴보는 이 책에서 그의 글쓰기는 단계별 진보를 보여주고 때마다 새로운 사유를 열어젖힌다.
가령 20세기 초반 낭만주의적 반자본주의를 설파하는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쓰면서 이후 마르크스주의로 가는 경로를 암시한다. “자본주의라는 숭배종교는 빚을 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한다.” 교리도 신학도 없이 오로지 구매와 소비라는 끊임없는 제례를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의 시간은 평일은 없고 오직 축제일만 있는 시간으로서 재구성된다.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빚과 죄를 떠안기면서 존재를 부숴버리는 측면에 주목한다. “자본주의가 종교가 되면서, 존재는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분쇄된다. 절망은 끊임없이 퍼져나가고, 결국은 절망이 종교적 현상태가 되기에 이른다.”
1923년의 「번역가의 과제」는 결코 번역 요령을 밝히는 책이 아니고, 오히려 예술작품 비평의 일반론으로서 벤야민의 사유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글의 출발점은 예술작품이 수용자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시는 읽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림은 보라고 있는 것이 아니며, 교향곡은 들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은 번역이 원작과 독자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비평과 아울러 작품의 ‘사후생’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일 뿐 아니라 원작의 생을 사실상 대신한다는 사유를 펼친다. “원작이 가장 새롭고 폭넓은 삶을 살게 되는 곳은 번역이다.”
벤야민의 논문 중 편파적으로 읽혀왔던 두 편의 글을 잠깐 살펴보자. 지금까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부당한 낙관을 보여주는 글로 비난받곤 했다면, 「이야기꾼」은 벤야민이 과거의 것들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널리 퍼뜨려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두 비판이 맡겨진 과제를 자기 목적에 맞게 이용할 줄 아는 벤야민의 기묘한 능력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오히려 「이야기꾼」은 파리에서 도시 상품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생했는가와 무관해 보이는 주제에서 출발해 매체와 장르의 형식이 인간의 경험이라는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라는 벤야민 특유의 관심사에 이르는 데 성공한다.
1930년대 벤야민이 최고의 성과를 내놓는 것은 보들레르 번역과 연구다. 보들레르는 현대적 삶의 가장 저질적인 부산물에 철저하게 감응한 인물로서, 역사의 ‘폐품’에 주목했던 벤야민이 모더니티의 논의에서 운명처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벤야민의 글이 형식과 테마를 발전시켜갈 때는 보들레르적 모더니티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고, 그의 후기 작업에서는 보들레르가 여러모로 초점으로 작용하게 되는 과정을 이 책은 망명생활의 고됨과 연결하며 잘 보여주고 있다.
벤야민이 마지막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단연 『파사주 작업』이다. 망명 10년 동안 썼던 많은 글은 『파사주 작업』이라는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이었다. 이 책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출현한 도시 상품자본주의의 문화사라고 할 수 있는데, 끝내 미완성의 육중한 작품이었지만 이를 위해 행해진 연구와 성찰로부터 일련의 혁신적 저술이 나왔다.
이처럼 벤야민은 뛰어난 비평가이자 혁명적 이론가로서 방대한 업적을 남겼는데, 다른 한편 그는 픽션, 르포, 문화분석, 회고록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당한 분량의 작업을 남기기도 했다. 그중 “몽타주 책”이라고 할 수 있는 1928년에 나온 『일방통행로』와 앞서 언급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은 그야말로 현대의 명저다.
벤야민 이미지 콜라주: 지인들의 회고
이 책은 생애 연대에 따라 벤야민의 궤적을 쫓고 있는데, 동원되는 수많은 자료는 벤야민이 주고받은 편지들과 지인들의 회고록인 만큼 그의 이미지는 제각각 불완전하게 나타나지만, 저자들은 충돌하는 면모를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좀더 주목할 인물들은 옛 친구들보다는 학적 인맥이기도 하다. 제도권 내로 들어가 대학교수가 되고자 평생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마는 벤야민은 그의 불안정한 지위와 관계없이 타인에게 끊임없는 학문적 자극을 주며 동시대인들을 강력하게 끌어들였다.
이 평전은 그동안 벤야민의 자료를 발굴해온 수천 명 연구자의 일차 사료를 인용함으로써 벤야민의 조각들을 이어붙인다. 그중 주목할 만한 인물들은 벤야민의 학문과 삶에 누구보다 밀착하며 시온주의자로서의 입장을 설파했던 게르숌 숄렘, 이혼 전이든 후든 실질적 가장 역할을 했던 아내 도라, 벤야민에게 ‘거친 사유’의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까봐 친구들이 위험인물로 여긴 브레히트, 벤야민이 끊임없이 구애를 펼쳤던 애인 아샤 라치스, 평생 학문적 파트너였지만 벤야민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전용당할까봐 경계했던 아도르노, 아도르노보다 더 심했던 블로흐, 인품과 자신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던 에른스트 쇤 등 수없이 많다.
숄렘이 『한 우정의 역사』에서 그리는 청년 벤야민은 마력을 뿜어내는 존재였다. 그는 벤야민과의 관계를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경험”으로 회상한다. 숄렘의 1916~1919년 일기를 보면 친구의 지적 존재감과 그로 인한 자신의 감정적 동요가 기록되어 있다. “역사를 새롭고도 놀라운 방식으로 보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목소리가 있다. 그의 구체적인 의견들도 그렇지만, 정작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의 정신적 존재 자체다.” 숄렘의 히브리 전통 관련 지식이 벤야민의 사유에 영향을 미치고 벤야민의 사유가 다시 숄렘에게 해방적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언어철학 영역에서였다. 숄렘에게 벤야민은 “절대적, 압도적”일뿐더러 “내 삶의 중심에는 그 사람뿐”이라는 고백을 자아내는 인물이었다. “발터에게는 스스로를 소진함으로써 자기 글의 질서가 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다.” 물론 그들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음을 고통스럽게 깨달아나가는 쪽은 거의 언제나 숄렘으로, 그는 때로 퇴짜 맞는 애인 역할을 맡았다.
벤야민의 문화비평이 비평인 동시에 “비평의 대상에 대한 철학”임을 일찍이 알아차린 친구는 아도르노였다. 즉 벤야민의 모든 작업에는 전통 철학의 문제 틀을 바탕으로 하는 세 가지 관심사가 존재한다. 간략히 말해 경험, 역사적 기억, 예술인데, 이 세 관심사의 기원은 칸트의 비판적 관념론, 니체의 생철학과 연결된다. 그의 작업은 통상의 철학적 형태를 띠지 않지만, 벤야민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이율배반 안팎에서 두루 사유해야 한다는 도전을 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런 작업의 이상적인 독자가 바로 아도르노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토론에는 거의 언제나 『파사주 작업』이 있었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파사주 작업』이 “철학의 중심일 뿐 아니라, 오늘날 철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다른 모든 것과 비교할 때 단연 결정적인 발언이자 독보적인 걸작”이 될 것임을 일찍이 꿰뚫어보았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글 「프란츠 카프카」를 읽고 “즉각적, 압도적인 감격”을 표하기도 했다. “우리가 철학의 근본 문제들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이토록 온전히 느낀 것은 이 글이 처음이었습니다.” 아도르노는 벤야민이 카프카의 우화에서 ‘역전된 신학’을 끌어내고자 한다는 것을 이해할뿐더러 신화와 고대가 모더니티의 내재해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장 이해력 높은 독자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긴장관계는 때로 팽팽했다. 아도르노가 벤야민의 논의를 전용함으로써 학계에서 촉망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벤야민의 신경을 긁었다. 가령 아도르노는 『철학의 현재성』에서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기원』을 인용 없이 갖다 썼고, 교수자격 청구논문인 『키르케고르』에서는 벤야민의 학적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름의 견해를 찾아가는 과정에 놓여 있는 자신을 노출시킨다. 더욱이 1930년대에 아도르노는 『파사주 작업』에 대해 난데없이 공동 소유권을 주장하는 강도 높은 간섭을 하거나, 어떤 식의 연구는 안 된다는 훈수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의 간섭은 『파사주 작업』에 해를 끼친 것은 물론이고 이 작업의 수용과정에도 해를 끼치게 된다. 벤야민의 심리 상태에 악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벤야민과 학문적 우열을 다투는 동료로는 에른스트 블로흐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신간 『이 시대의 유산』이 나온 뒤, 벤야민은 이 책이 자기 글을 도둑질했음을 알아차렸다. 이 책에서 블로흐는 몽타주 형식을 훌륭하게 차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사주 작업』의 주제와 성좌 논법을 고의적으로 전용하고 있다. 벤야민은 블로흐의 책에 대한 감상을 한 편지에서 밝힌다. “블로흐에게도 훌륭한 의도와 중요한 통찰이 있겠지만 그런 것을 구체화할 만한 분별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벤야민과 블로흐 사이에는 여전히 인간적 친밀함이 있었기에 벤야민은 “우리가 마지막 대화를 나눈 뒤로 많은 것이 피눈물로 씻겨 내려갔을 테니 다시 토론을 하게 된다면 우리 둘에게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리라 믿는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브레히트와의 우정, 원숙한 학문의 근간
언제나 친구들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맡았던 벤야민이 그 역할을 상대에게 넘긴 유일한 예외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였다. 벤야민의 걸작인 『파사주 작업』은 브레히트와의 만남(역사유물론의 관점과 초현실주의에 기원을 둔 관점의 충돌) 덕분에 틀을 갖추게 됐다. 1920년대에 브레히트는 벤야민과의 만남을 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벤야민의 사유는 바뀌어갔고, 1920년대 말부터 벤야민에게서 “마르크스주의적 억양이 더 뚜렷이” 나타난 데에는 브레히트와의 관계가 있었다. 지금 벤야민의 작업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930년대 중반에 작업한 글들이지만, 이처럼 원숙한 학문의 근간은 브레히트와의 우정에서 나왔다. 벤야민의 작업들이 급진좌파의 정치학, 유대교와 기독교의 세부 교리를 넘나드는 종교통합적 신학, 독일 철학 전통에 대한 심도 있는 지식, 급변하는 모더니티 환경 속의 다양한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문화 이론의 혼합이라는 특징을 드러낸 것은 그 이후다.
벤야민의 친구들은 브레히트와의 관계에 의혹의 시선을 던지면서도 그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숄렘은 “브레히트는 벤야민의 삶에 완전히 새로운 요소를 들여왔다”고 회상했다. 벤야민은 브레히트 서클의 일원이 되면서 토론을 벌여나갔으며, 카를 코르슈를 비롯해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브레히트는 벤야민이 쓰는 글의 중요한 제재였고, 그의 목소리는 벤야민의 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벤야민은 “내가 브레히트의 작품에 동의한다는 것은 내 입장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도 튼튼히 무장된 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가령 부르주아 작가의 프롤레타리아화의 가능성에 대한 브레히트와의 논의는 5년 뒤 벤야민의 보들레르 연구에서 거의 정확하게 반복된다. 벤야민은 성향 면에서는 신학적이었고 작업 면에서는 신중히 조율된 좌파적 사회 연구 쪽이었지만, 정치적 입장 면에서는 브레히트적(참여적) 정치학을 택하고 있었는데, 숄렘이 반대하는 것은 바로 그 정치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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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사후 70년이 지났지만 그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사유와 글쓰기가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의 가능성, 기술력을 활용하는 매체에 대한 적응과 비판, 유럽 모더니티가 처해 있는 역사적 현상에 대한 분석 등으로 기존 이해를 뒤흔들었지만, 또 하나 특유의 세밀한 언어 표현으로 문장에 있어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특히 그는 ‘사유이미지’라는 형식으로 선구적인 형식 혁신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줬다. 따라서 이 평전을 통해 독자들은 그의 사유의 밀도와 깊이를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감각적인 경험도 그에 못지않게 누릴 것이다.
목차
서론
1장 베를린의 유년: 1892~1912
2장 청년의 형이상학: 베를린, 프라이부르크, 1912~1914
3장 비평의 개념: 베를린, 뮌헨, 베른, 1915~1919
4장 친화력: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1920~1922
5장 학계의 유목민: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이탈리아, 1923~1926
6장 바이마르 시대의 지식인: 베를린, 모스크바, 1925~1928
7장 파괴적 성격: 베를린, 파리, 이비사, 1929~1932
8장 망명: 파리, 이비사, 1933~1934
9장 파리의 길, 파리의 글: 파리, 산레모, 스코우스보스트란, 1935~1937
10장 보들레르, 그리고 파리의 길바닥: 파리, 산레모, 스코우스보스트란, 1938~1940
11장 역사의 천사: 파리, 느베르, 마르세유, 포트보우, 1939~1940
에필로그
옮긴이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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