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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바다의 늑대: 바이킹의 역사

대등서명
Sea wolves
발행사항
서울 : 에코리브르, 2018
형태사항
352 p. : 지도 ; 22 cm
ISBN
9788962631845
청구기호
923 B885s
일반주기
권말부록 수록 원저자명: Lars Brownworth
서지주기
참고문헌: p. 351-352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7129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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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7129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침략자이자 탐험가이며 교역자로서 바이킹의 뒤를 쫓는 유럽 역사 기행

‘바이킹(Viking)’ 하면 흔히 무자비한 침략·싸움·약탈을 일삼으며 스칸디나비아반도를 근거지로 둔 ‘해적’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서구에서는 용 모양의 배에서 뛰어내려 수도원을 약탈한 금발의 야만인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한다. 이는 300년의 바이킹 시대가 서구 기독교 세계에 안겨준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이렇듯 793년 노르드 전사들은 잉글랜드의 린디스판섬을 공격해 쑥대밭을 만들었다. 이후 영국제도의 섬 상당수를 굴복시키고 유럽 본토의 파리와 아헨 등 수도를 차례로 습격했다. 이들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부 유럽으로 나아가 키예프를 함락하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바이킹의 이야기에는 잔혹한 폭력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이들은 법을 만들고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는 참신한 제도를 잉글랜드에 도입했다. 또한 훌륭한 상인이었으며, 아이슬란드에 정착해 더블린을 건설하고 바그다드에서 북미 연안에 이르는 정교한 교역망을 구축한 탐험가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위대한 바이킹의 이야기를 통해 서사시인, 영웅, 여행자로 이루어진 빼어난 북유럽 세계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특히 신세계를 발견한 ‘행운의 레이프’, 프랑스의 골칫덩어리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요크를 지배한 에리크 피도끼왕, 술수에 뛰어난 하랄 하르드라다 등은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바이킹 시대의 사가를 한층 더 빛내준다. 특히 당시 지도와 인명·지명 등 사전을 실어 이해를 돕는다.

바이킹이라는 단어의 기원
‘바이킹’이라는 단어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인 9세기의 기록에서는 이 침략자들을 ‘북방인(Northmen)’, ‘데인인(Danes)’, ‘노르드인(Norse)’, ‘이교도(Heathen)’라 불렀다. 이들이 주로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앵글로색슨족은 ‘바다 침략자’라는 뜻의 ‘wic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이 단어는 11세기가 되어서야 처음 등장한다. 더 나은 설명은 바이킹에게서 나왔다. 옛 스칸디나비아어 ‘vic’은 후미 혹은 만이라는 뜻이고, 오슬로피오르 부근의 만 지역은 칼을 주조하는 데 쓰는 철의 주요 생산지였다. ‘바이킹’이라는 단어는 그 만의 지역민을 일컫던 데서 비롯되어 점차 모든 스칸디나비아의 침략자를 아우르는 의미로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바이킹의 본거지
오늘날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로 나뉜 당시의 스칸디나비아는 극한의 땅이었다. 이들 중 기후가 가장 좋은 나라는 덴마크였다. 덴마크는 서부 연안을 오늘날의 독일과 공유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서쪽 방향으로 탐험에 나섰다. 덴마크 바이킹은 저지대 국가와 프랑스 각지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영국해협을 건너 영국으로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거기에서부터 에스파냐·이탈리아도 공략했다.
오늘날 노르웨이·스웨덴이 자리한 스칸디나비아반도는 덴마크보다 기후가 한층 더 험악하다. 이 지역의 동부 해안은 러시아 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스웨덴 바이킹은 대부분 러시아 쪽으로 항해했다. 침략이 아닌 통상을 위해서였다.
바이킹의 땅에서 가장 험준한 곳은 영토의 약 3분의 1이 북극권보다 더 높은 지역에 위치한 노르웨이다. 노르웨이의 기다란 서부 연안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섬들, 배를 타고 북극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안 항로, 즉 ‘북쪽 길〔northern way: 노르웨이(Norway)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됐다〕’을 만들어주는 절묘한 피오르들이 마치 장벽처럼 차가운 대서양의 파도를 막아준다. 당연히 노르웨이 바이킹은 북해로 모험을 나설 때면 서쪽을 택했다. 이들은 그린란드에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1000년경 신세계에 도착했다.

바이킹 역사에 관한 부족한 자료
8세기에 바이킹이 왜 본거지에서 벗어나 침략을 일삼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추측이 난무한다.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 정치적 압력에서부터 기후 변화와 기술 혁신에 이르기까지 온갖 설이 분분하다. 바이킹은 공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결코 단일한 민족이 아니었으며, 바이킹 시대에도 스칸디나비아에서 살아가던 이들 대다수는 결코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모험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모종의 이유를 가진 다소 수상쩍은 소수의 무리였다. 한층 복잡한 문제는 바이킹의 이야기가 그 피해자들이 기록한 역사, 좀더 오래되고 문명화한 국가들의 기록이 들려주는 이야기고, 고고학이 말해주는 것 역시 몹시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바이킹 유적이 변변찮은 데는 바이킹 예술가들이 나무로 작업을 한 탓도 있다. 이들은 여름에 나무를 잘라 처음에는 연회장이나 배를 만들고 나중에는 그들의 문명을 이루는 목조교회(stave church)를 세웠다. 이 가운데 비교적 원형을 잃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유적은 목조교회뿐으로, 여기에는 바이킹 세계의 쇠락기가 반영되어 있다.
바이킹은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의 룬 문자는 서사시나 역사 기록보다는 마술적 주문이나 푯돌을 표기하는 데 더 알맞았다.

바이킹 시대의 시작
린디스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홀리아일랜드, 6세기에 번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나 영적 피난처를 구하던 일군의 수도사들이 이 섬에 터를 잡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못 되어 섬 남쪽 곶에 소(小)수도원이 들어섰다. 8세기 말의 새로운 자신감을 이 수도원보다 더 잘 보여주는 곳은 없었다.
대왕국 4개와 소왕국 3개 등 7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잉글랜드는 8세기에 전역이 번영을 구가했는데, 특히 북부 지역은 문화적으로 크게 융성했다. 787년 앵글로색슨족 연대기는 잉글랜드 농부들이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게” 일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불길한 전조가 드러났다. 웨섹스 남부 포틀랜드섬 연안해에서 경비병이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배 세 척을 발견한 것이다.
배를 발견하면 일단 왕이 파견한 지방 행정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해안 경비병의 의무였다. 포틀랜드섬의 지방 행정관 비두허드는 그들을 안내하려 말을 타고 해안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이 비두허드를 향해 화살을 쏘아댔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비두허드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바이킹과 접촉한 비운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었다.
이들의 습격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은 방어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이킹은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머잖아 영국의 대비책은 터무니없이 허술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793년 마침내 바이킹은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재난은 유럽 전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영국 기독교 사회의 심장부가 무너졌다면 어딘들 안전하겠는가. 이러한 사태가 터진 것은 영국 교회의 도덕적 해이 탓이라는 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에 교회의 개혁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뒤따랐다. 그러나 제아무리 치열한 자기 성찰도 당시의 도도한 흐름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이듬해에는 동부 연안의 자로 수도원과 서쪽의 스카이섬이 피해를 입었으며, 795년에는 아이오나 수도원이 약탈당했다. 바이킹 시대의 시작이었다.

바이킹의 문화
스칸디나비아인은 서로 싸우지 않을 때에는 더러 동물들을 싸움 붙이곤 했다. 이런 식의 취향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지막지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바이킹은 그 외 다른 점에서는 매우 현대적이었다.
바이킹 문화에서는 남성과 동등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여성도 서구 기독교 사회의 그 어느 곳보다 많은 권리를 누렸다. 많은 소녀가 열두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혼례를 치렀지만, 남편이 없을 적에는 부인이 가정의 대소사를 모두 챙기고 온갖 중대사를 직접 결정했다.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와 달리 아내는 재산을 상속받고, 남편과 이혼하고, 파경을 맞았을 때 결혼 지참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또 이들은 아이들에게 부모를 도와 가사를 거들도록 장려했다.
사회 질서는 혹독한 처벌을 통해 유지했다. 간통을 저지르다 걸린 남성에게는 거꾸로 매달아놓거나 말에게 짓밟히는 형벌을 내렸으며, 방화범은 화형에 처했다. 그런가 하면 이 같은 폭력적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바이킹은 문화인이라면 응당 음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바이킹은 신을 모시기는 하나 ‘종교’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예배를 올리는 ‘공식적’ 방법도 보편적 교리도 중앙 교회도 따로 없었다. 대신 이들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일련의 일반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얼음에 뒤덮인 대재앙으로부터 몸을 피할 곳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바이킹은 끊임없이 신들, 특히 바다의 신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바이킹의 세계는 바다의 세계였다.

바이킹과 조선술
바다를 중시한 바이킹은 남쪽으로 가는 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는 펠트·호박·철광상 같은 방대한 자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9세기경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남부나 동부 지역과 활발하게 교역하고 있었다. 로마인과 접촉한 초기 몇 백 년 동안 이 ‘이상하게 생긴 배’가 내려온 이유 역시 약탈이 아니라 통상을 위해서였다.
최초의 ‘바이킹’ 침략은 육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8세기 말, 대대적인 바이킹의 침략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술의 혁신적인 발달 덕분이었다.
초기의 바이킹 선박은 로마와 켈트족의 디자인을 본뜬 것이었다. 여느 선박과 마찬가지로 바이킹의 배도 속도가 느리고 거친 바다에서 잘 뒤집혔다. 그러던 8세기 어느 때쯤 이들은 용골을 창안해냈다. 이 단순한 구조물이야말로 항해술의 발전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육지를 벗어나 멀리까지 모험을 나서는 유럽인이 거의 없던 시절에 바이킹은 목재·동물·식량 따위의 화물을 싣고 대서양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화물선, 연락선, 어선 등 수많은 배가 앞다퉈 개발되었다. 하지만 특히 군함, 즉 롱십(longship)은 힘·유연성·속도가 기막히게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해수면에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도록 고안된 롱십은 특수 기술 없이도 지역에서 확보한 재료만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이 배는 참나무 널빤지를 겹붙여서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배가 파도 속에서 방향을 틀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바이킹의 롱십은 해양을 횡단하는 큰 배에 달린 용골이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흘수가 얕아서 깊은 항구가 필요한 다른 선박들과 달리 사실상 어느 뭍에든 댈 수 있었다. 따라서 롱십은 강 위쪽까지 항해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일부 롱십은 들고 나를 수 있을 만큼 가볍기까지 했다.
바이킹 시인들은 롱십을 ‘파도 타는 준마’라고 불렀지만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늑대’라고 표현하는 게 더 알맞았다. 하지만 롱십과 관련하여 가장 놀라운 점은 속도였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4노트로 항해했으며, 최대 8∼10노트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 덕에 바이킹은 거의 실패 없이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

바이킹 시대의 종언: 하랄 하르드라다
노르웨이 남동부에 있는 소왕국의 두 왕과 혼인한 아스타 구드브란드대테르(?sta Gudbrandsdatter)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하랄 하르드라다는 거구(225센티미터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였는데 체구만큼이나 대담한 인성을 지녔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교활한 마음과 함께 아이답지 않은 야심을 물려받았다.
하랄이 자신의 야심에 걸맞은 명성을 원한다면 그것을 충족할 만한 장소는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하랄은 부하들을 이끌고 드네프르강의 급류를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역할이 간절히 필요하고 또 자신에게 무한한 자금을 지원해줄 주인을 만났다. 비잔틴 제국 사람들은 스칸디나비아인 왕족이 바랑기안 친위대에 합류하는 걸 꺼렸으나 미카엘은 까다롭게 굴 처지가 아니었다.
비잔틴 해군에게는 지중해 동쪽에서 아랍 해적을 무찌르라는 과업이 주어졌다. 하랄은 롱십을 이끌고 수많은 공격을 지휘했다. 그런 다음 소아시아로 건너가 아랍인을 비잔틴 영토에서 몰아냈다. 같은 해 미카엘 4세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야심 찬 군사 작전에 착수했다. 시칠리아섬 침공이었다.
하랄은 대규모 군대 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시칠리아 군사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고, 간질을 앓던 미카엘 4세는 1041년 12월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뒤를 이은 미카엘 5세는 하랄에 대한 후원을 내켜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랄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허약한 미카엘 5세는 넉 달 만에 유혈 쿠데타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때쯤 하랄은 비잔티움을 상당 부분 차지한 상태였다. 빛나는 명성을 등에 지고 키예프로 돌아온 그는 거절했던 야로슬라프에게 딸을 신부로 줄 것을 요구해,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다. 이는 모두 그의 부 덕분이었다.
하랄은 유일하게 아쉬운 점을 채우기 위해 아내와 함께 노르웨이로 항해를 떠났다. 거기서는 조카 망누스가 왕위에 올라 있었다. 하랄은 왕의 보물과 영토의 절반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망누스가 거부하자 하랄은 호기롭게 육지파괴자 깃발을 펼쳐 들고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절박한 망누스는 삼촌을 제지하기 위해 잠자는 그를 살해하려 암살자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런데 망누스가 후계자도 정해놓지 않은 채 갑자기 사망하면서 내전은 불과 2년 만에 끝났다. 하랄은 너무나 손쉽게 망누스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덴마크를 자신의 왕국에 복속시키려 노력했고, 15년 가운데 상당 기간을 덴마크 왕 스벤 에스트리센과 전쟁을 치르는 데 썼다.
1064년 하랄은 전투라면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스벤은 다루기 힘든 적으로 총력전에 매달리지 않음으로써 노르웨이인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서로 상대의 영역을 인정하고 공격을 삼가기로 합의하면서 화평 조약을 맺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하랄의 관심이 이미 북해에서 잉글랜드로 옮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바이킹들은 병사 9000여 명을 나눠 실은 거대 함대 240척을 이끌고 북해를 건너 스코틀랜드를 습격한 뒤 다시 바다로 돌아와 계속해서 노섬브리아 연안을 따라갔다. 이들은 요크 시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잉글랜드 땅에 상륙했고, 거기서 10대 백작 두 명이 지휘하는, 서둘러 소집된 앵글로색슨 군대와 마주쳤다. 짧지만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두 백작은 살아남았으나 잉글랜드 군대는 궤멸했다. 하랄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육지파괴자를 앞세워 요크로 쳐들어갔다.
짧은 협의를 거친 뒤 그 도시 대표자들은 포로들을 건네주는 데 합의했다. 그러면서 필요한 공물을 모을 수 있도록 며칠 말미를 달라고 했고, 더원트강의 편리한 도하 지점인 스탬퍼드브리지 부근으로 포로들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제대로 무장하지 않은 바이킹 군대가 스탬퍼드브리지에 도착해 마주한 것은 잉글랜드 왕 해럴드 고드윈슨이 이끄는 앵글로색슨 군대였다. 스탬퍼드브리지 전투는 250년 넘게 잉글랜드와 바이킹 사이에 치러진 전투 가운데 가장 치열했다. 그랬던 만큼 양쪽 다 인정사정이 없었다. 바이킹은 제대로 무장하지 않았음에도 처음에는 끄떡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랄이 양팔로 도끼를 들었을 때 영국 측에서 날아온 화살이 목을 관통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엄격한 지배자’, ‘예루살렘 여행자’, ‘군 지도자’, 그리고 바이킹이라면 누구라도 자랑스러워할 ‘시인’ 등의 별명을 얻은 그가 수도 트론헤임에 묻히면서 바이킹의 시대는 저물었다.

바이킹이 남긴 창조적 밑거름
바이킹이 남겨놓은 세계는 그들이 약 300년 전 덮치러 온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그들이 맡은 역할은 파괴자였다. 이들이 폭력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파괴는 결과적으로 창조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들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정치적·경제적 풍광을 바꿔놓았고, 아일랜드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서유럽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제멋대로 뻗어나간 샤를마뉴 제국을 세상에 선보인 것도 바이킹이었다. 바이킹의 공격에 따른 잿더미 위에 중세 서유럽의 위대한 강국 네 나라가 들어섰다. 프랑스,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칠리아 왕국이다.
스코틀랜드 역시 장기적으로는 바이킹의 약탈로 이득을 누렸다.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던 토착의 픽트인·스트래스클라이드인·노섬브리아인이 모두 붕괴함으로써 스코트족, 즉 게일어를 쓰는 아일랜드 이주민이 영국의 북쪽 3분의 1을 통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프랑스에서는 바이킹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움으로써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도록 만들었다. 하랄 하르드라다가 숨지고 불과 이틀 뒤 바이킹 롤로의 5대손 윌리엄 정복왕이 잉글랜드 땅을 밟았다.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고드윈슨을 물리치고 잉글랜드의 왕이 됨으로써 그 섬을 좀더 넓은 서유럽 권역으로 통합시켰다. 그의 계승자들은 바이킹의 공격으로 수도원 문화가 완전히 파괴된 바 있는 아일랜드를 침공했으며, 스코틀랜드와 그 인근 섬들을 서유럽의 정치권에 합류시켰다. 다른 노르만족은 서쪽과 남쪽으로 진출했고,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군사 작전을 펼쳤다. 이들은 시칠리아로 건너가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하며, 막강한 콘스탄티노플에 필적하는 중세 왕국을 건설했다. 더불어 동쪽의 바이킹 교역자들은 비잔티움과 함께 시장 도시를 건설하고 교역로를 구축함으로써 고대 로마 제국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곳까지 로마의 제도를 퍼뜨렸다. 이들이 세운 중앙집권 국가는 결국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벨라루스·러시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바이킹의 특성은 군사적 기량이나 항해술이 아니라 그들의 놀라운 적응력이다. 바이킹은 자신이 경험하는 지역의 전통을 그때그때 흡수하는 놀라운 재능을 지녔으며, 그렇게 흡수한 전통을 새롭고도 역동적인 형태 속에 결합할 줄 알았다. 오늘날 바이킹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 것 역시 어느 면에서 그들이 정말 잘 적응한다는 반증이다. 이들의 고향인 오늘날의 북유럽 국가들은 안정감, 질서, 침착한 시민들로 유명한 모범적인 사회민주주의 국가다. 이들의 국기에는 하나같이 자랑스럽게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이들은 이제 약탈과 침략을 일삼는 게 아니라 세상에 평화상을 나누어주고 있다.
그럼에도 사라진 시대를 떠오르게 하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바이킹’이라는 이름을 단 크루즈 선박과 NASA의 우주탐사선, 일반적인 항해 용어, 프랑스의 ‘-벡(-bec)’·영국의 ‘-비(-by)’로 끝나는 지명 등이 그것이다. 또 요일 가운데 세 개는 바이킹 신의 이름을 딴 것이고〔수요일(Wednesday)은 오딘(Odin), 목요일(Thursday)은 토르(Thor), 금요일(Friday)은 프레이(Frey)에서 따온 것이다〕, 전화기와 컴퓨터를 연결해주는 유비쿼터스 무선 기술인 블루투스(블로탄)도 바이킹 왕의 이름이다.
목차

지도
머리말: 북방의 망치
서문: 바이킹의 시대가 열리다

침략자
01 본국의 바이킹
02 샤를마뉴의 눈물
03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04 악마 토르길스
05 이교도 대군세
06 사면초가의 잉글랜드
07 잉글랜드 최후의 왕
08 아일랜드해의 바이킹 왕국
09 클론타프 전투
10 걷는 자 롤로

탐험가
11 리비에라 지역의 바이킹
12 아이슬란드
13 웨스턴아일스와 그린란드
14 빈란드

교역자
15 루스인 류리크
16 미클라가르드
17 비잔티움의 매혹
18 루스인에서 러시아인으로

북유럽 본국
19 바이킹 왕들
20 하랄 블로탄
21 영국 은의 유혹
22 북방의 황제
23 바이킹 시대의 종언

맺음말: 바이킹의 유산
부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