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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 어느 잊혀진 월북미술가와의 해후

발행사항
파주 : 돌베개, 2015
형태사항
338 p. : 삽화(일부천연색) ; 23 cm
ISBN
9788971995075
청구기호
650.99 신57ㅅ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7138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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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7138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잊혀진, 그러나 기억해야 할 이름 월북미술가 정현웅

1988년 월북, 납북 문화예술인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 우리는 그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거나 표기할 수 없었다. 그는 늘 정○웅, 또는 정×× 등, 복자(伏字)로 이름의 일부가 감취어진 채 등장해야 했다. 해금이 된 이후에도 그를 떠올려 기억하는 사람보다는 잊고 산 사람들이 많아 그는 그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건너가 사라져 가는 듯했다. 그러나 18세의 나이로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1927)에 입선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하며 서양화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신문사의 삽화가로, 수많은 책의 표지화와 장정을 도맡아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접점을 자유자재로 오갔고, 나아가 잡지의 편집자이자 수많은 예술비평을 발표했던 종합적이고 전방위적인 예술인 정현웅이 우리 앞에 다시 등장했다.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은 바로 이러한 예술인 정현웅의 삶과 예술세계를 그가 펼친 각 분야의 대표적 활동을 중심으로 정리한 책으로서, 두 명의 젊은 연구자가 약 3년여에 걸쳐 그에 관한 자료와 작품 등을 토대로 서술한 것이다. 특히 아직 생존해있는 정현웅의 아내 남궁요안나 여사와의 구술채록을 통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기억으로 존재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저자에게나 독자, 나아가 우리 문화예술사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술평론가 최열은 “정현웅의 생애를 되살린다는 것은 단지 한 인물을 되살리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정현웅의 복권은 지난 김복진, 이쾌대, 김용준의 복권에 뒤이은 네 번째 사건이다.”라고 이 책의 출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격동의 시대, 이 땅에서 경계인처럼 살았던 한 사람

정현웅에게는 또하나의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정현웅은 군국주의 체제가 강화되던 1940년대 들어 친일잡지 『반도의 빛』, 『방송의 벗』, 『신시대』, 『소국민』 등의 표지화와 삽화를 그렸다. 이런 행적은 “일제 말기시국미술가로 변절하여 친일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지적과 함께 한때 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다. 실제로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발간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경력을 문제 삼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이것이 전문삽화가로서 먹고사는 생계의 문제였으며, 정현웅은 일제 말기 친일미술단체와 전람회 등에 일체 참여하지 않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는 유족의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져 그의 이름의 수록이 보류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2009년 10월 21일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취소했다. 아울러 지난 11월 2일 열린 제2회 정현웅기념사업회 연구기금 수여식장에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정현웅에 관하여 “화가이자 삽화가, 표지 장정가, 만화가, 아동화가, 역사화가였던 선생은 근현대 한국 화단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미술계의 지도급 인사였다. 이 훌륭한 화가의 업적과 작품이 재현된 것은 우리 미술계의 경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삽화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고 했던 그가 꺼림칙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재능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던 점은 시대의 아픔이자 식민지 지식인의 안타까운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에게는 시대의 아픔 속에서 겪은 고통의 흔적이 또하나 남아 있다. 1943년《조선미전》에 입선한〈흑외투〉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궁지에 몰린 일제의 핍박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정현웅은 비록 총독부의 강요에 의해, 혹은 생계를 위해 친일잡지에 표지화를 그렸지만 《조선미전》에 출품할 작품만큼은 신중을 기해 제작했다. 그는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고통받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화폭에 담으려 애썼다. 그런 작품이 철거되는 아픔을 겪고 난 뒤 정현웅은 더 이상 유화 작품을 제작하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담은 사실주의 미술이《조선미전》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 일제의 핍박에 대한 항의로 붓을 꺾어 버린 이러한 행동은 그동안 서양화가로서 쌓아온 명성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단이었다.
일본 식민지 시기 예술가로서 순수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들고, 해방 이후 우익과 좌익의 혼돈 속에서 미술가들의 조직을 꾸려 조선 미술인들의 동맹을 위해 노력했던 그는 6.25전쟁 당시,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그러했듯, 잠시 다녀오리라 생각하고 길을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북한 땅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예술의 다양한 경계를 넘나든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일일지 모르나, 남한과 북한의 경계를 넘어간 것은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격동의 시대에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예술가 정현웅의 삶과 예술세계를 종합적으로 다룬 책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은 정현웅이라는 한 사람의 월북미술가를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 일제강점기 문학과 미술 등 예술계 전반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양화가이자 삽화가로, 장정가이자 편집자로, 만화가이자 비평가로,
조선화가이자 역사화가, 아동화가로 살았던 전방위 예술가


고교생 화가로 시작, 삽화계의 혜성으로 등장하다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고성」의 입선으로 세상에 등장한 정현웅은 이후 수차례 입선과 특선으로 작품을 출품했으나 서양화가로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정현웅이 활발히 활동했던 1930∼40년대는 언론문화의 전성기였다. 일본이 1919년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조선일보』,『 동아일보』등의 민영신문이 발행되었고, 이 신문사에서 발간하는 다양한 잡지가 등장하면서 대중매체가 가지는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던 시대다. 이런 분위기 속에 등장한 신문과 잡지의 삽화와 표지화는 새로운 시각문화로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평생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살고 싶어했지만 정현웅은 먹고살기 위해 1935년 신문사에 취직해 삽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비록 생계의 방편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의 재능이 가장 잘 발휘되고, 말년까지 계속되었던 분야는 바로 삽화였다. 그는 삽화를 텍스트의 보조장치로서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예술장르로 인식하고 작업을 해나갔다. 그로 인해 그는 우리나라 삽화계에 혜성 같은 존재가 되었고, ‘손기정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이 된 뒤 옮긴 조선일보사에서도 삽화가로서의 그의 활약은 수많은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를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우리 근대사의 책 장정과 표지화 그는 또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꾸준히 발행하던 우리나라 잡지의 수많은 표지화를 그린 주역이기도 했다. 『문장』, 『소년』, 『여성』, 『조광』 등 당시 발간되던, 우리 잡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이 잡지들의 표지화에 정현웅의 손길이 미쳤다. 표지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는 오늘날의 북디자인이라 할 수 있는 장정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실제로 많은 문인들이 그가 자신의 책을 장정해주기를 희망했고, 그의 손을 통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 김광섭의 『동경』, 이광수의 『사랑』, 오기영의 『사슬이 풀린 뒤』와 『삼면불』, 한하운의 『한하운 시초』 등의 책들을 비롯한 수많은 단행본과 전집 등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벽초 홍명희, 그에게 편집자의 길을 권하다 책의 외형을 만들어내는 것이 장정가의 역할이라면 그는 아울러 책의 내용을 만드는 편집자이기도 했다. 해방 후 서울신문사에서 펴내기 시작한 『신천지』의 편집을 맡기 시작한 것은 평소 돈독했던 벽초 홍명희의 권유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신천지』는 좌우익의 이념논쟁 속에서 지식인의 갈증을 풀어준 잡지로 평가받았고,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통해 글을 발표하면서 우리 문학의 방향과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런 균형잡힌 『신천지』의 방향을 초기에 자리잡는 데 정현웅, 그의 역할이 컸다.
잡지와 책을 만들면서 정현웅은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할 기회를 자주 갖게 되었다. 비평가로서 그의 예술관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표현해주는 것을 꼽자면 1948년 12월 『주간서울』에 발표한 아래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이란 결코 고원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을 인민의 손이 다다를 수 없는 고원한 자리에 모셔 놓고 고매한 이론으로 신비의 ‘베일’을 씌워놓은 것은 이념론자와 형식주의자의 소행이었다. 예술은 항상 인민의 생활 속에서 생활하고, 인민의 감정과 더불어 호흡해야 한다.”
화가로, 삽화가로, 표지화로, 장정가로, 편집자로서 여러 역할을 동시에 감당했던 것도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예술 본연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예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직접 실천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이를 사랑한 정현웅, 한국 만화계의 선구자로 꼽히다 평소 어린이를 사랑했던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만화책을 직접 그리고 만들어주기도 했다. 해방 후 각 방면의 서적이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출판 환경이 점점 안정되었지만 만화책은 대부분 일본 만화를 그대로 베끼는 등 내용이 극히 빈약했다.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 했던 그는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한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만화 단행본을 본격적으로 제작했다. 정현웅이 그린 만화를 보며 자랐던 많은 어린이들이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고, 그가 그린 만화책을 지금까지 애장하고 있을 정도로 만화가로서도 긴 파장을 남겼다. 그런 그의 활동은 월북 이후에도 이어져 북한에서 그는 아동화가로서 면모를 적극적으로 발휘하였다.

해방과 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 세상의 한복판에 서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기장으로, 조선미술동맹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해방된 지 사흘 만에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는 각 분야 미술가 187명이 가입한 대규모 미술단체였다. 여기에서 노골적인 친일미술인들 10여 명을 제명하기도 한 이 단체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회’의 산하단체로서, 이곳은 좌익문인들이 중심이 된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이러한 사상과 관계없이 건국에 협조하고 일제 잔재 청산, 민족미술 건설을 목적으로 했다. 이곳에서 서기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그러나 조선미술건설본부를 계승한 조선미술가협회가 점차 친미우익노선을 걷자 이를 비판하고 탈퇴한 뒤 다시 조선조형예술동맹에 맹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무차별 검속과 즉결 처분이 단행되는 와중에 그는 잠시 다녀오겠다는 생각으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월북, 그곳에서도 여전했던 예술가 정현웅의 삶 북에서의 그의 활동은 대개의 월북예술인들과 마찬가지로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유족의 평양 방문과『조선미술』,『조선예술』과 같은 잡지, 북한의 미술가들에대한 소개서인『조선력대미술가 편람』등을 통해 북한에서 제작한 그의 작품들과 행적이 서서히 확인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자료들을 통해 발견한 그의 행적은 자신의 신념을 작품 속에 풀어내는 그의 예술관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북한에 정착해 처음 한 일은 고구려고분 벽화의 모사 작업이었다. 안악3호분을 비롯해 남아있는 고구려고분의 벽화를 역사적인 고증을 통해 재현해냈던 그의 모사 작업은 북한 미술계가 내세우는 최고의 업적이다. 또한 정현웅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고분벽화에 드러나는 전통 회화기법을 발전시켜 새로이 조선화 작업으로 이어갔다. 그는 또한 북한에서 출판미술의 개척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출판화분과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평생 동안 추구했던 미술과 대중의 소통을 중시한 대중미술을 북한 미술계에서 펼쳤다. 삽화를 출판화로 발전시켰고, 북한의 획일화된 체제 속에서도 사상보다 대중과의 소통과 교류에 더 주목했다.

그의 삶속에서 엿보는 우리 문화계의 뒷풍경

정현웅이 활동한 분야가 미술계 한곳에만 머물지 않았던 탓에 그의 족적을 살피다보면 그의 생애만이 아니라 당시 그가 몸 담았던 우리 문화예술계 전반의 풍경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특히 정현웅은 문인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윤석중을 비롯해 정지용, 박목월, 황순원 등 한국 근현대문학사를 수놓은 많은 문학가들과의 일화는 정현웅이라는 인물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의 전모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채 신문을 내보낸 일장기 말살사건은 유명하다. 이 일로 『동아일보』는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 일과 연루된 기자들은 모두 동아일보사에서 해직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신문에 실리는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들 사이에서는 큰 건물의 낙성식이나 준공식처럼 꼭 있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가급적 신문에서 일장기를 싣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지우자는 것은 체육부 기자 이길용의 제안으로 시작되었고, 이 일은 맡은 정현웅은 우선 손 선수의 월계관을 풍성하게 손질하고, 흐릿한 사진을 군데군데 손을 봤다. 그러던 중 점심시간이 되었다. 밥 먹고 와서 마무리를 할 생각으로 일장기 부분을 남겨둔 채 밥을 먹으러 간 사이 옆자리에 앉은 청전 이상범이 간단히 일장기를 지워 편집실로 넘겼다. 그런데 총독부에서 이 일을 문제삼아 이길용과 이상범을 비롯한 기자 10여 명이 종로경찰서에 소환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현웅은 두고두고 정작 자기가 끝냈어야 하는 일인데 자기 대신 이상범이 안해도 될 고생을 하게 되었다며 내내 미안해했다.

아동문학가 윤석중, 소설가 홍명희 부자, 시인 정지용, 백석과의 만남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뒤 정현웅은 조선일보사에 들어가 일하게 됐다. 이곳에서 아동문학가 윤석중과 만난 그는 둘다 ‘어린이’에 관한 공통의 관심사로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윤석중이 시를 쓰면 정현웅이 그림을 그리고, 함께 잡지 『소년』을 만들어갔다. 조선일보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은 벽초 홍명희 부자와의 만남이다. 아버지 홍명희는 정현웅을 신뢰했고, 그의 아들 홍기문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이들 부자와는 월북 이후에도 인연이 계속되었다. 시인 정지용은 정현웅보다 열 살이나 위였지만 함께 술을 마시면 헤어지기 아쉬워 서로 집을 데려다주겠노라는 핑계로 밤새도록 두 집 사이를 오고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시인 백석과의 우정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의 시에 삽화를 그리면서 친하게 된 두 사람은 이후 정현웅이 결혼하여 백석과 같은 동네인 뚝섬에 신접살림을 차릴 만큼, 훗날 훌쩍 만주로 떠난 백석이 그곳에서 정현웅을 떠올리며 시를 썼을 만큼 각별한 것이었다. 이 두 사람 역시 북한에서 다시 만났고, 그곳에서도 백석의 시에 정현웅이 삽화를 그리면서 우정을 이어갔다.

소설가 황순원, 시인 박목월과 한하운과의 인연 아동문학가 윤석중과 함께 만든 잡지 『소년』에는 투고된 원고가 많았고, 그 가운데 원고를 선별하여 잡지에 싣는 일은 윤석중과 정현웅이 즐겁게 해온 일이었다. 이 지면을 시인 박목월이 동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정현웅은 친분이 깊었던 정지용에게 박목월을 소개했다. 박목월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40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단을 한다. 해방 이후 서울신문사에서 만들고, 정현웅이 편집을 맡은 『신천지』 에도 많은 문인들의 활발한 참여가 이어졌다. 당시 평양에서 월남해온 황순원이 남한에서 작품을 발표할 곳을 찾던 중 정현웅와 인연이 닿아 『신천지』에 글을 싣게 됐고, 훗날 『목넘이 마을의 개』의 작가와 장정가로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또한 나환자들의 애절한 외로움과 고통을 노래한 한하운 시인의 작품 역시 『신천지』에 실려 많은 호응을 받았고, 역시 두 사람은 작가와 장정가로서 함께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정현웅 鄭玄雄 1910~1976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미술가의 한 사람 정현웅은 1910년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에서 태어나, 매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18세의 나이로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으며,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하며 화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35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면서 신문 삽화를 그리기 시작, 1936년 조선일보사로 자리를 옮긴 후에는 『조선일보』와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 『조광』, 『여성』, 『소년』 등의 잡지에 수많은 삽화와 표지화를 그리며 1930~40년대 대표적인 삽화가로 활동했다. 또한 신문과 잡지에 다양한 평론을 게재하며 뚜렷한 예술관을 드러내기도 했던 그는 벽초 홍명희와의 인연으로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시사교양지 『신천지』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선구적인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북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기 많은 문인들의 책의 장정을 도맡아 했고, 어린이 만화와 시사만화 등을 그려 초창기 한국 현대만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등 문화예술계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해방이 된 뒤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조형예술동맹, 조선미술동맹 등에 참여하다 6ㆍ25전쟁 이후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1950년 9월 26일 북한으로 올라갔다. 북한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사업을 주도하였으며, 조선미술가동맹 출판화분과 위원장을 맡아 삽화를 위시한 출판미술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사상성이 배제된 역사화, 조선화, 아동화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여 대중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1976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목차

책머리에 | 우리 근대미술사의 아주 특별한 존재 정현웅, 그를 만나다

서장 | 시대와 예술의 경계를 넘나든 미술가, 정현웅
분단이 만든 상처, 월북예술가│다양한 경계를 넘나들다│다양성을 대중성으로│미술의 틀을 깨다

제1부 | 소년, 화가가 되다 그림자놀이를 즐기던 소년│화가로의 첫걸음│바뀌어 가는 풍경의 기록│정현웅 예술의 근원│매동공립보통학교 시절│경성제2고보의 스승들│스크린을 통해서 만나는 세상│6개월간의 일본 유학과 무대미술│생명감 넘치는 온실 풍경│독학으로 일궈낸《조선미전》입선작들│드디어 특선에 오르다

제2부 | 삽화계의 혜성 다재다능한 문학청년│동아일보사 광고부에 입사│혜성처럼 등장한 삽화가│일장기말살사건의 진실과 오해│시간과 양심의 딜레마│쓰레기 속의 미술, 삽화│조선일보사에서 만난 사람들│시인 백석과의 만남과 우정

제3부 | 책을 디자인하는 화가 탄탄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한 표지화│책에 옷을 입히는 작업, 장정│다정하지만 단호한 비평│멋을 내지 않아도 멋있는 노총각│여성 패션의 조언, 연애 색채학│그녀를 향한 프러포즈│검소한 결혼식을 꿈꾸며│동양의 전통과 고전의 계승『조광』의 표지화

제4부 | 격동의 시대, 예술가로 산다는 것 우수 어린 자화상, 「아코디언 악사」│뚝섬에서의 신혼생활│사랑이 꽃피는 가정│생계의 방편이 된 삽화와 표지화│식민지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철거된 「흑외투」│광복의 기쁨│적산가옥의 불하를 거절하다│궁정동으로 이사하다│미술조직의 중심에 서서│살기 위한 선택

제5부 | 잡지의 편집자로, 한국 만화의 선구자로 어린이를 사랑한 화가│아동미술에 관심을 갖다│한국 만화의 선구자│벽초 홍명희가 제안한『신천지』의 편집인│『신천지』, 해방 후 지식인의 종합교양지│『신천지』를 거쳐 간 문인들│“기자는 만인의 교사다”252│주선이라 불리던 애주가│돌아오지 못할 땅으로 떠나다

제6부 | 월북 그리고 조선 예술의 재발견 꿈에도 생각 못한 이별│미술가로서의 새 출발│고구려고분 벽화의 모사를 시작하다│숙청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남다│새로운 가정을 꾸리다│출판미술의 개척자│고전소설을 희화화한 삽화│정확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역사화│기지와 위트로 가득한 아동화│조선화의 시도와 성취│ 북한 미술계의 삼정│조선미술박물관에 작품이 걸리다│생애 마지막 나날

책의 일독을 권하며 | 다시, 우리 앞에 돌아온 정현웅, 그. _최열(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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