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 상소문 해설: 후대에 창작된 한글 창제 역사
- 개인저자
- 정인택 지음
- 발행사항
- 서울 : 민중의소리 : 알다, 2016
- 형태사항
- 308 p. ; 21 cm
- ISBN
- 9791185253428
- 청구기호
- 911.052 정69ㅊ
- 주제
- 소(상소문)[疏], 조선 시대[朝鮮時代], 한글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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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7257 | 대출가능 | - |
- 등록번호
- 00017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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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자료실
책 소개
집현전 한글 창제설은 후대에 창작된 역사이자 터무니없는 허구입니다.
후대에 창작된 역사가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현대 한국인들은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창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집현전 학사 창제설은 조선 후기에 창작된 역사입니다. 한글 창제, 보급과 관련된 역사는 지금부터 새로 써야 합니다. 창작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글이 공개된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장 생생하고 풍부한 정보를 지닌 최만리 상소문을 제대로 해석하자는 것입니다. 최만리 상소문은 아래 두 가지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첫째, 언문정국 시기 한양 사대부들의 냉랭한 반응. 둘째, 한글을 보급하려는 세종의 주도면밀한 준비. 첫째도 둘째도 현대 한국인의 역사 상식과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그 딴판의 세계로 한글의 혜택을 날마다 누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초대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기 참 심란한 시기,
최만리 상소문에 나타난 세종의 준비성이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최순실정국은 민주주의시대 대통령이 헌법을 망각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그 대통령은 사사로운 은혜를 갚는 과업을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은인에게라면 무엇이든 넘기려 했습니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기밀문서도 덜컥.
우리네 역사에는 언문(諺文)정국도 있었습니다. 언문정국은 봉건왕조시대의 임금이 백성에게 쉬운 문자를 보급하려 했던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재위 25년 12월 세종은 느닷없이 한글을 공개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새로운 문자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조선에 문자는 한자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대부사회의 충격이 컸습니다. 사대부들의 한자 숭배의식으로 하여 언문정국이 형성됐습니다.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의 현직학사 7인이 상소문을 제기한 바탕도 한자 숭배의식이었습니다.
9세기에 일본, 10세기에 거란, 11세기에 서하, 12세기에 여진, 13세기에 몽고에서 고유문자를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그 사실을 익히 알았으면서 조선 고유의 문자를 만들자는 말을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한자 숭배의식.
세종이 취한 전략은, 비밀리에 만들어 별안간 공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쉬운 문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한글의 편리한 혜택을 누리게 되면, 사대부사회에 계속 쓰자는 여론이 형성되리라고 타산한 결과였습니다.
여론의 반발을 줄이려,
세종은 치밀하게 준비하고 한글을 공개했습니다.
목차
들어가며 - 최만리 상소문을 해설하는 이유
1부 최만리 상소문에 들어가기 전
한글이 등장하는 첫 번째 기사 해설
한글이 등장하는 두 번째 기사 해설
최만리 상소문에 뜻을 함께 한 7인 중 상소문 작성자로 추정되는 인물
후대에 창작된 역사의 몇 가지 사례
2부 최만리 상소문 내용
서두
전자(篆字)를 모방했다는 세종의 주장에 대한 불신
중화로 문명화한 조선은 한자로 충분
설총의 이두는 야비하지만 학문에 도움 되는 것
공개 당시에는 27자
학문 풍토에 대한 우려
위항이어(委巷俚語)와 호칭 언문의 관계
한글은 한낱 기예(技藝)에 불과한 것
문자와 백성들의 억울함, 그 상관관계
재상들도 까맣게 몰랐던 문자 창제
세종이 직접 한글을 가르쳐 익히도록 했다는 이배(吏輩) 10여 인의 정체
<운회> 번역 사업에 관한 불만
공개 당시의 <예의>를 언급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
공개 당시에는 <동국정운>식이 아니었다는 증거
어두자음군(語頭子音群)의 실제 발음
쉬운 문자를 어렵게 만든 <해례>
세종의 초수리 약수터 행
세자와 한글
말미
3부 언쟁
상소문에 대한 세종의 반박
세종의 반박에 대한 최만리 등의 재반박
김문, 정창손을 지목한 질책
징계
상소문 파동의 마무리
4부 언문정국을 무탈하게 넘기기 위한 세종의 준비
세종 25년 2월에 출발한 통신사의 소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던 서장관 신숙주의 역할
관인 개량 사업
황희의 사직청원
한글을 처음 가르친 현장의 풍경
한글을 공개한 날의 의정부
한글을 공개한 다음날의 주자소
신인손, 신석조 부자의 엇갈린 행보
최만리의 마지막 소임은 집현전의 정상화
황희의 장수와 한글
세종 27년 4월에 완성된 <용비어천가> 원고가 출간되지 못한 사유
5부 아직도 집현전 학사 창제설이 통하는 까닭
고려 말 사대부들의, 한족 왕조 천자만이 진정한 천자라는 착각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의, 사대주의가 조선 망국의 사유였다는 착각
현대 역사가들의, 조선 전기가 후기보다 더 자주적이었다는 착각
여러 착각이 겹쳐 최만리 상소문보다 집현전 학사 창제설을 더 믿게 된 착각
6부 글의 정리
최만리 상소문 전문
언쟁 부분 전문
나가며 - 학계에서 창작한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