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공자와《논어》
- 대등서명
- 孔子と論語
- 개인저자
- 기무라 에이이치 지음; 나종석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 에코리브르, 2020
- 형태사항
- 792 p. : 삽화 ; 23 cm
- ISBN
- 9788962632149
- 청구기호
- 152.212 목815ㄱ
- 일반주기
- 원저자명: 木村英一
- 서지주기
- 참고문헌과 색인 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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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8551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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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00018551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공자와 《논어》에 대한 더없는 연구서!
“옮긴이의 글”에서 밝히고 있듯, 역자가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첫 계기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논어》 해설서에서 이 책의 문헌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덕이었다. 그 이후 공자와 《논어》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여러 저술에서 이 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접하고 마침내 번역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자는 이 책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역자가 직접 쓴 이 책의 학술적 평가는 다음과 같다.
역자가 직접 쓴 《공자와 《논어》》의 학술적 가치
이 책이 지니는 학술적 가치를 구구하게 설명하지는 않아도 될 듯하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은 꼭 강조하고 싶다. 우선 공자의 생애에 대한 저자의 아주 치밀한 재구성은 단연 독보적이다. 저자 기무라 에이이치는 공자의 출생부터 청·장년기, 노나라를 떠나 50대 후반부터 10여 년간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 시기는 물론이고, 만년에 고국 노나라로 돌아와 학교를 개설해 제자를 양성하던 시절에 이르는 공자 생 전반의 모습을 다양한 원전을 통해 명확하게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는 사마천 《사기》의 〈공자세가〉 외에도 《논어》, 《좌전》, 《공자가어》 등 공자의 생애에 관련한 여러 원전을 섭렵하고 이를 상호 대조하는 방법을 통해 공자의 생애를 면밀하게 추적하면서 〈공자세가〉 기록이 지니는 한계점 등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공자의 생애 전반에 대한 이토록 치밀한 재구성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공자와 《논어》》의 학문적 탁월성은 《논어》라는 책의 형성사와 《논어》 각 편의 형성 과정에 대해 치밀하게 문헌학적으로 고증해나가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논어》가 성립하게 된 과정에 대해 20세기 일본학계가 이룩한 두 가지 대표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학문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저자가 주목하는 두 가지 학설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전반 10편 상론(上論)과 후반 10편 하론(下論)이 문체와 사상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상론을 옛날 《논어》로 비정하고 하론은 그 보유로서 후에 덧붙여졌을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한 에도 시대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齊, 1627∼1705) 외에도, 청나라 최술(崔述, 1740∼1816)의 설을 이어받아 상론 및 하론이 거듭 각각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내세운 다케우치 요시오(武?義雄, 1886~1966)의 학설이다. 다른 하나는 《논어》는 기원전 3세기 말 전국 시대 말엽에 그 원형이 완성되었고, 대부분 맹자 시대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기에 사실 공자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견해를 제창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의 학설이다.
저자는 이 양대 학자와 비판적으로 대결한다. 이런 대결을 통해 저자는 《논어》라는 저서가 나름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저서라는 점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다케우치 요시오와 쓰다 소키치는 《논어》가 공자의 사상과 생애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사료로서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한계가 있음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다. 이는 기무라 에이이치의 탁견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수 있는 이 책의 학술적 가치는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논어》 20편의 각 편을 분석해 각 편 내부를 구성하는 장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연관성을 보여주는 데 기인한다. 이와 더불어 각 편이 어떤 시기에 어느 학파에 의해 편집되었는지를 보여주려는 저자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논어》의 형성 과정에 대한 귀중한 학문적 통찰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점만으로 이 책의 학술적 의의를 남김없이 다 드러낼 수는 없다. 텍스트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 텍스트를 접하는 독자와 텍스트의 생산적 대화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접하는 독자가 공자의 생애 및 《논어》와 관련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이런 인식의 확장으로 이 책의 생명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책의 내용
이 책은 크게 공자의 전기와 《논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 사상사와 문화사 연구에서 공자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면,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를 깊이 연구해 밝힐 필요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루는 공자의 생애와 《논어》의 내용을 개관해보려 한다.
공자의 전기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걸쳐서 73~74세의 생애를 살았다. 당시 중국은 고대 봉건 국가인 주(周)왕국이 붕괴하던 시기로 이른바 춘추 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즉 공자 시대에 중국 전통의 우수한 문화는 하·은·주 삼대를 이어 전해진 문화로 인식되었는데, 당시는 이 문화를 받아들인 주가 붕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역사상으로는 춘추 시대 말기로 곧 구질서가 완전히 붕괴하고 전국 시대가 시작하는 시기였다.
공자는 당시 전통 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된 소국인 노(魯)나라의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가난한 하급 사족(士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공자는 당시 사족의 기초 교양인 육예〔六藝: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익혔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15세 무렵부터 스스로 고급 위정자의 교양인 시·서·예·악의 연구에 뜻을 두었을 뿐 아니라 국가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군자(君子)의 인간상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주 건국의 위인인 주공(周公)을 깊이 존경하면서 30세에 이르러 이미 독자적인 학풍을 세운 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공자의 학문은 지식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 달리 말해 위정자로서 좋은 정치를 실천하는 일과 교양인이자 인격자인 군자로서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은 학자로서 해야 할 정치·문화·도덕에 대한 지식의 추구와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는 몸소 공직을 받아들여 위정자로서 입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노나라의 혼란한 사정과, 여전히 뿌리 깊은 봉건적 신분제도 때문에 그가 바란 취직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오랜 연구와 수양과 구직 시기를 보내고 50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나라의 정공(定公)을 섬길 수 있었다.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관리에 임용된 것이 공자가 얻은 최초의 공직이다. 그러나 과연 그는 인격과 학식과 수완에서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제(齊)나라와의 중요한 외교 교섭인 협곡(夾谷)의 회(會)에 상(相) 신분으로 정공을 수행했을 때 그 임무를 성공리에 마쳐, 그의 수완을 안팎에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공자는 하대부(下大夫)로 발탁되어 국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로부터 2∼3년간이 현직에 있었다고 말하는 의미에서 볼 때 공자의 생애에서 최고로 자랑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공자의 전 생애에 걸친 사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최초의 시련기이자 제일보를 내딛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공자의 사업은 이때 비로소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혼란의 시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아무리 학식과 덕망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하급 사족으로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개혁에 실패해 직을 그만두고 타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공자의 나이 55세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14년간에 걸쳐 북으로는 위나라로부터 남으로는 진(陳)·채(蔡)에 이르기까지 난관으로 가득 찬 방랑의 세월이 전개된다. 이것은 그가 심사숙고 후에 결행한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천하 어디서든 자신을 받아주기만 하면 그곳에서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지만 이 계획도 모두 실패로 끝난다. 무엇보다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그는 직접 천하의 실정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고, 그의 주의(主義)를 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그때마다 전향적으로 잘 대처해 굴하지 않았다. 이로써 인생 경험이 더욱 깊어지고 인격이 더욱 고매해졌으며, 사상은 점점 원숙해졌다. 이것은 그의 만년의 교육 사업, 문화 사업에서 비교할 수 없는 빛을 발하는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이 14년간의 고난에 가득 찬 유력(遊歷) 시대는 공자의 생애에서 위대한 한 시기로 소위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았다”는 정권 참여 시대 이후를 이어받는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다”(《논어》 〈위정〉편 제4장)고 하는, 고생 끝에 세상 물정에 통달한 공자를 만들어냈다.
공자가 14년에 걸친 천하유력(天下遊歷)을 마치고 노나라로 되돌아온 것은 68∼69세 때다. 불퇴전의 결의를 품고 끈기 있게 계속한 유세의 여행을 끝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 당초의 목적을 끝내 이룰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과 관련해서 공자도 점차 나이가 들어 남은 생이라도 보람 있게 살아 사후에라도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는 노나라를 도망쳐 나올 때 거기에 여러 제자를 남겨두었고, 유력 시대에도 늘 제자와 함께했으며 계속해서 불어났다. 게다가 우수한 제자를 한 사람이라도 많이 양성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사명을 장래에 거는 최고로 충실한 방법이 된다. 더구나 노나라로 돌아가도 정치에 종사하지만 않는다면 더 이상 정적과 대립할 일도 사회에 혼란을 일으킬 염려도 없다. 오히려 노나라에서 공자의 귀국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돌아가 교육과 문화 사업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소신에 최선이자 최후의 길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공자가 죽은 때는 기원전 479년으로 그의 나이 73~74세였다. 따라서 이 최후의 사업은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공자가 귀국한 후 노나라는 천하 학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때 공자는 나이와 덕행이 높아 인물로나 학문으로나 명실공히 최고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공자는 중국 학문의 창시자이고 도덕의 개발자이며 정치학의 아버지이자 학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특히 중국 전통문화를 집대성해 그것이 후세에 잘 전수될 수 있도록 기초를 확립했다. 마침내 공자는 중국의 문화사와 사상사, 나아가서는 세계 문화사와 사상사에서 위대한 지위를 차지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논어》에 대하여
《논어》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형태로 성립했는지를 알려주는, 신뢰할 만한 자료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하는 것 모두 후세의 억측일 뿐이다. 그렇다면 억측의 근거는? 무엇보다도 《논어》라는 책이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현존하는 《논어》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그 책의 성립 사정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둘째, 한나라 이후의 것들이긴 하지만 문헌이 적게나마 남아 있다. 이에 상상력을 동원해 현존하는 《논어》와 비교 분석함으로써 《논어》의 성립을 추측할 수밖에는 없다.
현존하는 《논어》는 500개에 이르는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의 길이는 단지 몇 글자로 이루어진 것들도 있지만, 어떤 장은 300자가 넘는 것(〈선진편〉의 끝 장)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50~60자 이하, 20~30자 또는 10여 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그 어느 것이나 시공간을 초월해 만인에게 호소하는 힘이 있다. 진실로 인류 문화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현재 《논어》는 이 500에 가까운 장군(章群)을 어느 정도 분할·편성하여 20편(각 제목은 22쪽 참조)으로 구성돼 있다.
현존하는 《논어》를 자세히 읽어보면 적어도 대부분이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공문(公門)의 언행록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리고 대부분 제자는 자(字)로 불리고 스승인 공자는 “스승/선생님(子)”으로 불린 데서 보듯이 이것은 공자 만년의 학교에 모였던 공자에게서 직접 배운 직제자들로부터 나온 전문(傳聞) 말투를 그대로 기술한 모습으로 되어 있다. 물론 약간의 변화는 있었겠지만 결국 원류는 공자의 직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으로, 그것을 후학이 전송(傳誦)했을 것이다. 이것이 《논어》의 주요 부분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공자가 공문 외의 사람과 대화하거나 교류한 기사(記事)가 있는데, “공자왈(孔子曰)……”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공문 외의 세간에 전해온 전설이나 혹은 편찬자가 채용한 것일 테다. 그리고 그 출처가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은 공자 및 공자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直門諸子)의 언행을 모아 기록하는 것은 그것이 추억을 위한 것이든지 아니면 격언과 법행(法行)으로서든 아무리 빨라야 손제자 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논어》 몇몇 장에서 “증자(曾子)왈”·“유자(有子)왈”·“민자(閔子)”·“염자(?子)”와 같이 직제자를 스승으로 부르는 예가 있는데, 명확하게 재전의 제자로부터 나왔으리라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음으로 《논어》의 기사는 《상서(尙書)》에 기초를 둔 고대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주서(周書)》만이 아니라 《상서(商書)》, 《하서(夏書)》, 《우서(虞書)》에 걸쳐 있다. 생각건대 공자 학교에서는 시·서·예·악이 교과목이었던 것 같으므로 사제의 문답에서 《상서》의 지식을 언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자는 본래 주공을 존경한 사람으로 하나라와 은나라의 사항은 문헌이 충분치 않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팔일〉편), 공자 시기의 《상서》는 주로 《주서》의 일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순·우·탕 등의 《우서》, 《하서》, 《상서(商書)》의 내용을 많이 언급하는 것은 적어도 현존하는 문헌으로는 《묵자(墨子)》와 《맹자》 등의 이후다. 따라서 《논어》에서 이들 부분은 그 시기 이후에 첨가한 게 아닌가 짐작한다.
또 《논어》 20편의 편집을 보면 모두 잡다한 것을 모아놓은(雜集) 형태여서 어떤 한 사람이 한때에 편집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몇 번에 걸쳐 정리를 반복한 느낌이 있다. 그나마 그것들 각 편의 원형은 막연하지만 어떤 목표하에 이루어진 편집 같은 것과 약간의 편집이 이루어진 후에 남은 자료를 모아 보존한 듯한 속집(續集) 같은 것도 있다.
다음으로 《논어》가 성립한 장소가 문제다. 공자가 만년에 노나라에서 학교를 열었을 때 그곳에서 집적된 사제의 언행을 전송하고 기술한 것이 《논어》의 주요 내용이고, 손제자 시대에 편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노나라에서일 것이다. 공자 사후에 제자들 중 일부는 천하 각지로 흩어졌지만 원래 노나라 사람으로 노나라에 머문 문인도 많다. 증삼(曾參)을 비롯하여 몇몇은 노나라에서 사설 학교를 열어 유학을 전하고 제자를 육성하지 않았을까. 이 전통은 노나라에서 적어도 전국 시대 말까지 계속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논어》의 편집·속집은 노나라에서 계속 행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일부에 증자의 제자와 후학이 참여한 듯한 흔적이 있다. 그런데 노나라 외에 주의해야 할 곳은 제나라다. 직제자 증자의 제자 자사(子思)의 2전(二傳) 제자로서 공자를 사숙한 맹자가 제나라에 머물던 시기(전국 시대 중기, 기원전 4세기 중엽)부터 직하(稷下)가 이른바 천하 학술의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그때부터 맹자·순자(荀子) 등 다수의 탁월한 유자(儒者)가 제나라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나라와 제나라가 나란히 천하의 유학 중심지가 되었다. 무엇보다 맹자 이전에 공자의 고제(高弟)이자 외교관이면서 부호(富豪)로서 천하에 명성을 날리던 자공(子貢)이 제나라에서 객사했기 때문에 공자의 손제자 시대에는 이미 유학이 어느 정도 제나라에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제나라에서는 직제자의 말년 무렵부터 2전 제자 시대에는 이미 자공에 의해 유학의 영향을 적게나마 받았을 가능성이 있고, 4전(四傳) 제자 시대에는 맹자에 의해 증자·자사 계통을 받아들인 유학이 전해졌고, 그로부터 수년 뒤에 순자에 의해 전개된 유학이 제나라에서 유행했지만 그때는 자장·자하·자유 등의 후학도 제나라에 존재했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노나라에서 시작된 《논어》의 편집·속집은 동시에 어느 때인가 제나라로도 흘러 들어갔을 것은 당연하고 그것에 자극받아 제나라에서도 《논어》의 윤색·속집이 행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한나라 초기 《논어》에는 《노론(魯論)》·《제론(齊論)》·《고론(古論)》의 삼론(三論)이 있고, 《고론》은 노나라 공씨(孔氏)의 벽 속에서 발견된 것이므로, 결국 《노론》과 《고론》이 노나라 사람이 전한 《논어》, 《제론》은 제나라 사람이 전한 《논어》인 셈이다. 그런데 삼론은 서로 텍스트에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논어》의 세 가지 이본(異本)으로, 내용은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노론》과 《제론》은 금문(今文: 중국 한대에 쓰던 문자)이기 때문에 제각기 한나라 초의 노유(魯儒) 및 제유(齊儒)가 한대에 통행한 문자를 갖고 사정(寫定)한 텍스트다. 〈예문지〉에 열거된 《노론》과 《제론》의 전수자 이름이 모두 무제(武帝) 이후의 학자라는 것도 넌지시 그런 사실을 증명한다. 《고론》은 한나라 초에 발굴된 선진(先秦)의 고문논어로 노나라에서 발굴되었다손 쳐도 당연히 한유(漢儒)의 사정을 거치지 않은 텍스트일 것이므로, 한(漢)·위(魏)·육조(六朝)의 단편적인 기술(記述)로 미루어 검증해 보면 《고론》과 제·노 이본(二本)의 차이가 많은 것은 제·노가 서로 다른 점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크게 보면 삼론은 결국 대동소이한 것으로 하나의 《논어》의 세 가지 이본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재전 제자 시대 이후 선진 말기까지 노나라와 제나라 두 곳에서 《논어》는 점차 틀을 갖추어갔다. 그렇지만 한나라 초에 노유 및 제유의 사정에 의해 이른바 《노론》 및 《제론》이 출현하기 이전 선진 말기에 이미 노와 제에서 이룬 기록을 대부분 집성하여 하나의 《논어》를 성립했을 것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밝히고 있듯, 역자가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첫 계기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논어》 해설서에서 이 책의 문헌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덕이었다. 그 이후 공자와 《논어》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여러 저술에서 이 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접하고 마침내 번역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자는 이 책에 대한 학술적 가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역자가 직접 쓴 이 책의 학술적 평가는 다음과 같다.
역자가 직접 쓴 《공자와 《논어》》의 학술적 가치
이 책이 지니는 학술적 가치를 구구하게 설명하지는 않아도 될 듯하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은 꼭 강조하고 싶다. 우선 공자의 생애에 대한 저자의 아주 치밀한 재구성은 단연 독보적이다. 저자 기무라 에이이치는 공자의 출생부터 청·장년기, 노나라를 떠나 50대 후반부터 10여 년간 천하를 두루 돌아다닌 시기는 물론이고, 만년에 고국 노나라로 돌아와 학교를 개설해 제자를 양성하던 시절에 이르는 공자 생 전반의 모습을 다양한 원전을 통해 명확하게 재구성해내고 있다. 그는 사마천 《사기》의 〈공자세가〉 외에도 《논어》, 《좌전》, 《공자가어》 등 공자의 생애에 관련한 여러 원전을 섭렵하고 이를 상호 대조하는 방법을 통해 공자의 생애를 면밀하게 추적하면서 〈공자세가〉 기록이 지니는 한계점 등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공자의 생애 전반에 대한 이토록 치밀한 재구성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공자와 《논어》》의 학문적 탁월성은 《논어》라는 책의 형성사와 《논어》 각 편의 형성 과정에 대해 치밀하게 문헌학적으로 고증해나가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논어》가 성립하게 된 과정에 대해 20세기 일본학계가 이룩한 두 가지 대표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학문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저자가 주목하는 두 가지 학설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전반 10편 상론(上論)과 후반 10편 하론(下論)이 문체와 사상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상론을 옛날 《논어》로 비정하고 하론은 그 보유로서 후에 덧붙여졌을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한 에도 시대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齊, 1627∼1705) 외에도, 청나라 최술(崔述, 1740∼1816)의 설을 이어받아 상론 및 하론이 거듭 각각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내세운 다케우치 요시오(武?義雄, 1886~1966)의 학설이다. 다른 하나는 《논어》는 기원전 3세기 말 전국 시대 말엽에 그 원형이 완성되었고, 대부분 맹자 시대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기에 사실 공자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견해를 제창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의 학설이다.
저자는 이 양대 학자와 비판적으로 대결한다. 이런 대결을 통해 저자는 《논어》라는 저서가 나름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저서라는 점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다케우치 요시오와 쓰다 소키치는 《논어》가 공자의 사상과 생애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사료로서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지 못했다는 데에서 한계가 있음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다. 이는 기무라 에이이치의 탁견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수 있는 이 책의 학술적 가치는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논어》 20편의 각 편을 분석해 각 편 내부를 구성하는 장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연관성을 보여주는 데 기인한다. 이와 더불어 각 편이 어떤 시기에 어느 학파에 의해 편집되었는지를 보여주려는 저자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논어》의 형성 과정에 대한 귀중한 학문적 통찰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점만으로 이 책의 학술적 의의를 남김없이 다 드러낼 수는 없다. 텍스트를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 텍스트를 접하는 독자와 텍스트의 생산적 대화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을 접하는 독자가 공자의 생애 및 《논어》와 관련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이런 인식의 확장으로 이 책의 생명이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책의 내용
이 책은 크게 공자의 전기와 《논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 사상사와 문화사 연구에서 공자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면,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를 깊이 연구해 밝힐 필요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다루는 공자의 생애와 《논어》의 내용을 개관해보려 한다.
공자의 전기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걸쳐서 73~74세의 생애를 살았다. 당시 중국은 고대 봉건 국가인 주(周)왕국이 붕괴하던 시기로 이른바 춘추 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즉 공자 시대에 중국 전통의 우수한 문화는 하·은·주 삼대를 이어 전해진 문화로 인식되었는데, 당시는 이 문화를 받아들인 주가 붕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역사상으로는 춘추 시대 말기로 곧 구질서가 완전히 붕괴하고 전국 시대가 시작하는 시기였다.
공자는 당시 전통 문화가 비교적 잘 보존된 소국인 노(魯)나라의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가난한 하급 사족(士族)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공자는 당시 사족의 기초 교양인 육예〔六藝: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익혔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15세 무렵부터 스스로 고급 위정자의 교양인 시·서·예·악의 연구에 뜻을 두었을 뿐 아니라 국가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군자(君子)의 인간상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주 건국의 위인인 주공(周公)을 깊이 존경하면서 30세에 이르러 이미 독자적인 학풍을 세운 학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공자의 학문은 지식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았다. 달리 말해 위정자로서 좋은 정치를 실천하는 일과 교양인이자 인격자인 군자로서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은 학자로서 해야 할 정치·문화·도덕에 대한 지식의 추구와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는 몸소 공직을 받아들여 위정자로서 입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노나라의 혼란한 사정과, 여전히 뿌리 깊은 봉건적 신분제도 때문에 그가 바란 취직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오랜 연구와 수양과 구직 시기를 보내고 50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나라의 정공(定公)을 섬길 수 있었다.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관리에 임용된 것이 공자가 얻은 최초의 공직이다. 그러나 과연 그는 인격과 학식과 수완에서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제(齊)나라와의 중요한 외교 교섭인 협곡(夾谷)의 회(會)에 상(相) 신분으로 정공을 수행했을 때 그 임무를 성공리에 마쳐, 그의 수완을 안팎에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공자는 하대부(下大夫)로 발탁되어 국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로부터 2∼3년간이 현직에 있었다고 말하는 의미에서 볼 때 공자의 생애에서 최고로 자랑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공자의 전 생애에 걸친 사업의 관점에서 보자면 최초의 시련기이자 제일보를 내딛는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공자의 사업은 이때 비로소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혼란의 시기였던 당시 상황에서 아무리 학식과 덕망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하급 사족으로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개혁에 실패해 직을 그만두고 타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공자의 나이 55세 무렵이었다. 그로부터 14년간에 걸쳐 북으로는 위나라로부터 남으로는 진(陳)·채(蔡)에 이르기까지 난관으로 가득 찬 방랑의 세월이 전개된다. 이것은 그가 심사숙고 후에 결행한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천하 어디서든 자신을 받아주기만 하면 그곳에서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지만 이 계획도 모두 실패로 끝난다. 무엇보다 이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그는 직접 천하의 실정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고, 그의 주의(主義)를 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그때마다 전향적으로 잘 대처해 굴하지 않았다. 이로써 인생 경험이 더욱 깊어지고 인격이 더욱 고매해졌으며, 사상은 점점 원숙해졌다. 이것은 그의 만년의 교육 사업, 문화 사업에서 비교할 수 없는 빛을 발하는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이 14년간의 고난에 가득 찬 유력(遊歷) 시대는 공자의 생애에서 위대한 한 시기로 소위 “쉰 살에 천명(天命)을 알았다”는 정권 참여 시대 이후를 이어받는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다”(《논어》 〈위정〉편 제4장)고 하는, 고생 끝에 세상 물정에 통달한 공자를 만들어냈다.
공자가 14년에 걸친 천하유력(天下遊歷)을 마치고 노나라로 되돌아온 것은 68∼69세 때다. 불퇴전의 결의를 품고 끈기 있게 계속한 유세의 여행을 끝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 당초의 목적을 끝내 이룰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과 관련해서 공자도 점차 나이가 들어 남은 생이라도 보람 있게 살아 사후에라도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는 노나라를 도망쳐 나올 때 거기에 여러 제자를 남겨두었고, 유력 시대에도 늘 제자와 함께했으며 계속해서 불어났다. 게다가 우수한 제자를 한 사람이라도 많이 양성하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사명을 장래에 거는 최고로 충실한 방법이 된다. 더구나 노나라로 돌아가도 정치에 종사하지만 않는다면 더 이상 정적과 대립할 일도 사회에 혼란을 일으킬 염려도 없다. 오히려 노나라에서 공자의 귀국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돌아가 교육과 문화 사업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소신에 최선이자 최후의 길이었다. 마침내 그는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공자가 죽은 때는 기원전 479년으로 그의 나이 73~74세였다. 따라서 이 최후의 사업은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공자가 귀국한 후 노나라는 천하 학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때 공자는 나이와 덕행이 높아 인물로나 학문으로나 명실공히 최고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공자는 중국 학문의 창시자이고 도덕의 개발자이며 정치학의 아버지이자 학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특히 중국 전통문화를 집대성해 그것이 후세에 잘 전수될 수 있도록 기초를 확립했다. 마침내 공자는 중국의 문화사와 사상사, 나아가서는 세계 문화사와 사상사에서 위대한 지위를 차지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논어》에 대하여
《논어》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형태로 성립했는지를 알려주는, 신뢰할 만한 자료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하는 것 모두 후세의 억측일 뿐이다. 그렇다면 억측의 근거는? 무엇보다도 《논어》라는 책이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현존하는 《논어》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그 책의 성립 사정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둘째, 한나라 이후의 것들이긴 하지만 문헌이 적게나마 남아 있다. 이에 상상력을 동원해 현존하는 《논어》와 비교 분석함으로써 《논어》의 성립을 추측할 수밖에는 없다.
현존하는 《논어》는 500개에 이르는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의 길이는 단지 몇 글자로 이루어진 것들도 있지만, 어떤 장은 300자가 넘는 것(〈선진편〉의 끝 장)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50~60자 이하, 20~30자 또는 10여 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들은 그 어느 것이나 시공간을 초월해 만인에게 호소하는 힘이 있다. 진실로 인류 문화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현재 《논어》는 이 500에 가까운 장군(章群)을 어느 정도 분할·편성하여 20편(각 제목은 22쪽 참조)으로 구성돼 있다.
현존하는 《논어》를 자세히 읽어보면 적어도 대부분이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공문(公門)의 언행록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리고 대부분 제자는 자(字)로 불리고 스승인 공자는 “스승/선생님(子)”으로 불린 데서 보듯이 이것은 공자 만년의 학교에 모였던 공자에게서 직접 배운 직제자들로부터 나온 전문(傳聞) 말투를 그대로 기술한 모습으로 되어 있다. 물론 약간의 변화는 있었겠지만 결국 원류는 공자의 직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으로, 그것을 후학이 전송(傳誦)했을 것이다. 이것이 《논어》의 주요 부분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공자가 공문 외의 사람과 대화하거나 교류한 기사(記事)가 있는데, “공자왈(孔子曰)……”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공문 외의 세간에 전해온 전설이나 혹은 편찬자가 채용한 것일 테다. 그리고 그 출처가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은 공자 및 공자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直門諸子)의 언행을 모아 기록하는 것은 그것이 추억을 위한 것이든지 아니면 격언과 법행(法行)으로서든 아무리 빨라야 손제자 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논어》 몇몇 장에서 “증자(曾子)왈”·“유자(有子)왈”·“민자(閔子)”·“염자(?子)”와 같이 직제자를 스승으로 부르는 예가 있는데, 명확하게 재전의 제자로부터 나왔으리라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다음으로 《논어》의 기사는 《상서(尙書)》에 기초를 둔 고대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주서(周書)》만이 아니라 《상서(商書)》, 《하서(夏書)》, 《우서(虞書)》에 걸쳐 있다. 생각건대 공자 학교에서는 시·서·예·악이 교과목이었던 것 같으므로 사제의 문답에서 《상서》의 지식을 언급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자는 본래 주공을 존경한 사람으로 하나라와 은나라의 사항은 문헌이 충분치 않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팔일〉편), 공자 시기의 《상서》는 주로 《주서》의 일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순·우·탕 등의 《우서》, 《하서》, 《상서(商書)》의 내용을 많이 언급하는 것은 적어도 현존하는 문헌으로는 《묵자(墨子)》와 《맹자》 등의 이후다. 따라서 《논어》에서 이들 부분은 그 시기 이후에 첨가한 게 아닌가 짐작한다.
또 《논어》 20편의 편집을 보면 모두 잡다한 것을 모아놓은(雜集) 형태여서 어떤 한 사람이 한때에 편집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몇 번에 걸쳐 정리를 반복한 느낌이 있다. 그나마 그것들 각 편의 원형은 막연하지만 어떤 목표하에 이루어진 편집 같은 것과 약간의 편집이 이루어진 후에 남은 자료를 모아 보존한 듯한 속집(續集) 같은 것도 있다.
다음으로 《논어》가 성립한 장소가 문제다. 공자가 만년에 노나라에서 학교를 열었을 때 그곳에서 집적된 사제의 언행을 전송하고 기술한 것이 《논어》의 주요 내용이고, 손제자 시대에 편집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노나라에서일 것이다. 공자 사후에 제자들 중 일부는 천하 각지로 흩어졌지만 원래 노나라 사람으로 노나라에 머문 문인도 많다. 증삼(曾參)을 비롯하여 몇몇은 노나라에서 사설 학교를 열어 유학을 전하고 제자를 육성하지 않았을까. 이 전통은 노나라에서 적어도 전국 시대 말까지 계속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논어》의 편집·속집은 노나라에서 계속 행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일부에 증자의 제자와 후학이 참여한 듯한 흔적이 있다. 그런데 노나라 외에 주의해야 할 곳은 제나라다. 직제자 증자의 제자 자사(子思)의 2전(二傳) 제자로서 공자를 사숙한 맹자가 제나라에 머물던 시기(전국 시대 중기, 기원전 4세기 중엽)부터 직하(稷下)가 이른바 천하 학술의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그때부터 맹자·순자(荀子) 등 다수의 탁월한 유자(儒者)가 제나라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나라와 제나라가 나란히 천하의 유학 중심지가 되었다. 무엇보다 맹자 이전에 공자의 고제(高弟)이자 외교관이면서 부호(富豪)로서 천하에 명성을 날리던 자공(子貢)이 제나라에서 객사했기 때문에 공자의 손제자 시대에는 이미 유학이 어느 정도 제나라에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제나라에서는 직제자의 말년 무렵부터 2전 제자 시대에는 이미 자공에 의해 유학의 영향을 적게나마 받았을 가능성이 있고, 4전(四傳) 제자 시대에는 맹자에 의해 증자·자사 계통을 받아들인 유학이 전해졌고, 그로부터 수년 뒤에 순자에 의해 전개된 유학이 제나라에서 유행했지만 그때는 자장·자하·자유 등의 후학도 제나라에 존재했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노나라에서 시작된 《논어》의 편집·속집은 동시에 어느 때인가 제나라로도 흘러 들어갔을 것은 당연하고 그것에 자극받아 제나라에서도 《논어》의 윤색·속집이 행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한나라 초기 《논어》에는 《노론(魯論)》·《제론(齊論)》·《고론(古論)》의 삼론(三論)이 있고, 《고론》은 노나라 공씨(孔氏)의 벽 속에서 발견된 것이므로, 결국 《노론》과 《고론》이 노나라 사람이 전한 《논어》, 《제론》은 제나라 사람이 전한 《논어》인 셈이다. 그런데 삼론은 서로 텍스트에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논어》의 세 가지 이본(異本)으로, 내용은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노론》과 《제론》은 금문(今文: 중국 한대에 쓰던 문자)이기 때문에 제각기 한나라 초의 노유(魯儒) 및 제유(齊儒)가 한대에 통행한 문자를 갖고 사정(寫定)한 텍스트다. 〈예문지〉에 열거된 《노론》과 《제론》의 전수자 이름이 모두 무제(武帝) 이후의 학자라는 것도 넌지시 그런 사실을 증명한다. 《고론》은 한나라 초에 발굴된 선진(先秦)의 고문논어로 노나라에서 발굴되었다손 쳐도 당연히 한유(漢儒)의 사정을 거치지 않은 텍스트일 것이므로, 한(漢)·위(魏)·육조(六朝)의 단편적인 기술(記述)로 미루어 검증해 보면 《고론》과 제·노 이본(二本)의 차이가 많은 것은 제·노가 서로 다른 점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크게 보면 삼론은 결국 대동소이한 것으로 하나의 《논어》의 세 가지 이본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재전 제자 시대 이후 선진 말기까지 노나라와 제나라 두 곳에서 《논어》는 점차 틀을 갖추어갔다. 그렇지만 한나라 초에 노유 및 제유의 사정에 의해 이른바 《노론》 및 《제론》이 출현하기 이전 선진 말기에 이미 노와 제에서 이룬 기록을 대부분 집성하여 하나의 《논어》를 성립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서론
제1편 공자의 전기
제1장 공자의 가계·출생·유소년 시대
제2장 공자의 청소년 시기
제3장 공자의 직업 이력
제4장 공자의 천하 유세
제5장 공자의 만년과 그 사업
제1절 만년의 공자
제2절 공자 학교
부록 공자 이전의 학교
제2편 《논어》의 성립
제1장 《논어》의 성립에 대한 서설
제2장 제노의 기록과 삼론
제3장 장군과 장군연관
제4장 《논어》 20편의 구성
제1절 〈학이〉편의 성격과 구조
제2절 〈위정〉편의 성격과 구조
제3절 〈팔일〉편의 성격과 구조
제4절 〈이인〉편의 성격과 구조
제5절 〈공야장〉편의 성격과 구조
제6절 〈옹야〉편의 성격과 구조
제7절 〈술이〉편의 성격과 구조
제8절 〈태백〉편의 성격과 구조
제9절 〈자한〉편의 성격과 구조
제10절 〈향당〉편의 성격과 구조
제11절 〈선진〉편의 성격과 구조
제12절 〈안연〉편의 성격과 구조
제13절 〈자로〉편의 성격과 구조
제14절 〈헌문〉편의 성격과 구조
제15절 〈위령공〉편의 성격과 구조
제16절 〈계씨〉편의 성격과 구조
제17절 〈양화〉편의 성격과 구조
제18절 〈미자〉편의 성격과 구조
제19절 〈자장〉편의 성격과 구조
제20절 〈요왈〉편의 성격과 구조
제5장 《논어》의 편집
한글 번역본 참고문헌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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