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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화이트 리스트 제외 조치로부터 2년,
한일 전문기자가 바라보는 지난 갈등의 모든 것
불의의 일격이었다. 2019년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A4 한 장 분량의 짤막한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첫째는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절차에 들어간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오는 4일부터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만들 때 꼭 필요한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소재를 포괄수출허가제도의 대상에서 제외해 수출규제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심장에 비수를 들이댄 일본의 습격에 모두 할 말을 잃었고, 놀란 시민들은 거리로 달려나와 “반(反)아베” 구호를 외쳤다. “(일본 제품을) 사지 않습니다, (일본에) 가지 않습니다”, “보이콧 재팬” 등 불매운동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편의점에서는 ‘아사히 맥주’가 놓인 자리가 사라졌고, 인스타그램에서는 ‘#일본여행’이라는 해시태그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여기, “사지 않고, 가지 않겠다는 약속”에서 나아가 지난 한일전의 진상을 철저하고도 집요하게 파헤치는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 길윤형은 약 3년 반만의 〈한겨레〉 도쿄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2017년 10월에 펴낸 책 《아베는 누구인가》에서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 이어진 한일 갈등이 “앞으로 닥칠 거대한 불화의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즉 역사 갈등이 시작이었지만 이면에서 꿈틀대던 또 다른 거대한 움직임을 눈치챈 것이다. 저자는 이를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 개발’이라는 두 개의 지정학적 충격이 가지고 온 “동아시아의 신냉전화”라고 표현한다. 《신냉전 한일전》은 이렇듯 동아시아 신냉전 시대에 마주한 결정과 갈등과 대립의 순간들을 담았다.
김정은 위원장 신년사(2018년 1월), 평창겨울올림픽(2018년 2월), 판문점 회담(2018년 4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2018년 6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2018년 10월), 한일 초계기 갈등(2018년 1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2019년 2월), 화이트 리스트 제외 방침 결정(2019년 7월), 지소미아 종료 결정(2019년 8월), 지소미아 종료 결정 철회(2019년 11월) 등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한국과 일본은 뒤치락엎치락 외교전을 벌였다. 이 흐름에 끈질기게 따라붙은 저자는 한 장면 한 장면 차분하고 냉정한 복기를 통해 현상의 본질에 바짝 다가섰고, 정확하고 날카로운 분석으로 독자에게 낱낱이 전한다. 그리고 뼈아프게도 이 처절한 외교전에서 한국이 패배했다고 평한다. 책은 2015년 12·28 합의를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일 갈등의 모든 대목을 말한다. 사상 최악의 관계로 치달은 양국의 구조적 갈등을 분석하고, 어렵지만 해법을 모색하는 시도도 잊지 않는다. 일본의 보복 조치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얼마나 제대로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마주 대할 시간이 다가왔다.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만큼 가슴 아픈 순간들을 기록하면서도 되도록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 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해 동아시아의 냉전 체제를 허물 기회가 우리에게 언제 다시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지난 실패를 복기하는 이 책이 향후 대일정책을 세우는 데 반면교사가 되길 기원한다.”(21쪽)
‘좋았던 옛 시절’을 지나
양보 없는 정면 대결에 이르기까지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관계는 크게 세 시기를 거쳐왔다. 살벌한 냉전 질서 아래,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일치했던 1기(1965~1980년대 말)가 있었고, 이어서 냉전이 해체된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기 전인 2000년대 말까지로 구분되는 2기가 있었다.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맺은 한일 파트너십 선언(1998년) 등으로 대표되는 ‘좋았던 옛 시절’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3기, 동아시아의 신냉전에 관해 힘주어 말한다.
중국의 부상에 맞서고자 미국과 동맹 강화에 나선 일본에게 ‘한미일 3각 동맹’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안보의 기본 축이었다. 지난 한일 파트너십 선언의 기본 전제였던 평화헌법과 반성적 역사 인식이라는 두 기둥을 처참히 무너뜨린 아베 신조의 등장은 우리에게 심히 좋지 않은 징조였지만, 신냉전의 거센 흐름 속에서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3각 동맹을 중시하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낼 수 없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렇게 2015년 위안부 문제를 12·28 합의로 봉합했고, 그 기반 위에 2016년 지소미아를 체결했다. 이 시점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 사태가 발생한다. 2016년 말 촛불혁명이었다.
이어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12·28 합의를 무력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국면 전환에 나선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며, 동아시아 냉전 구조를 깨트리는 ‘현상변경’ 전략을 취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하고, 그 힘으로 북한과 중국을 억제해야 한다는 일본의 ‘현상유지’ 전략과 충돌한다.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 문제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화해하기 힘든 전략적 관점 차이.”(20쪽) 이것이 바로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2018년 이후의 파국을 가져온 크고 주요한 요인이다.
국가의 위신을 걸고 벌인 외교전,
한국은 어째서 패배하고 말았나
2019년 8월 8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진행한 제64차 통일전략포럼 ‘한일 관계 어떻게 풀어야 하나?’에 토론자로 참석한 저자는 “아베 총리는 히틀러의 길을 가고 있다”(11쪽)는 말을 필두로 한 김민석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을 듣고 만감이 교차한다. 이번 사태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이해가 정확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음모론적 오해’에 그친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집권 여당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책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어긋나기 마련이다. 실제로 정부는 일본의 보복 조치를 ‘침략의 전 단계’로 인식했고, 곧바로 지소미아 연장 문제와 연결 지으며 정면 대결로 치달았다. 이를 두고 저자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정세 변화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맥락을 거세한 판단이었다고 비판한다. 또한 “상대의 의도를 지나치게 악마화했고 흥분했으며, 그래서 불리한 전쟁터에 전 병력을 쏟아붓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14쪽)고 지적한다.
책은 지난 외교전에서 일관되게 드러난 ‘재팬 패싱’ 기조에 관해서도 꼬집는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 대치하는 ‘북핵(안보)’과 ‘위안부(역사)’라는 두 개 전선 모두에서 현상변경을 시도했다. 먼저 북핵과 관련해서는 평창겨울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만들어 남북 대화의 기회로 삼고, 한반도 평화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그림을 그렸다. 이 호소에 북한이 화답하면서 2018년 초부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동아시아의 냉전 질서를 단숨에 걷어낼 기세로 급물살을 탄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며 미국과 대화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자, 평창을 통해 시작된 남북 대화는 미국을 끌어들이는 전 세계적 이벤트로 격상한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던 기적이 연출된 것을 두고, 저자는 “남북 대화를 주도하고 북미 접근을 유도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야겠다는 흥남 출신 탈북민의 아들인 문 대통령의 ‘집념’, 국가 핵무력을 완성한 뒤 경제개발에 나서고 싶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욕심’, 오바마 대통령을 좌절시킨 미국 최대의 외교 난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허영’이 하나의 거대한 화학 작용을 일으켰다”(72쪽)고 분석한다. 그리고 첫 대결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따낸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반응이 냉담하기 그지없는 데 주목한다.
한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문재인 정부는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를 만든다. 그리고 지난 12·28 합의에 대해 “피해자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정치적 합의이며 일본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균형한 합의”였다고 그해 12월 27일 결론 낸다. 이를 두고 일본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힌다. 이어지는 한반도 비핵화 흐름에서도 일본은 북한과의 안이한 타협을 경계하며 북핵에 대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뜻하는 CVID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3대 요구조건(핵·미사일·납치 문제 해결)을 내세우며 ‘훼방꾼’ 역할을 맡는다. 이후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나는 데 직접적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넨 ‘비핵화 정의 문서’가 미국과 일본 사이에 합의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미루어보아도 우리가 북미 핵 협상에서 ‘일본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은 실책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하노이 결렬’을 통해 자신들의 승리를 확인한 일본은 막힘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1965년 이후 한일 관계의 기본 틀로 작용해온 ‘65년 체제’를 사실상 허무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국의 심장에 비수를 날린 것이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향해야 하는가
저자는 총 16장에 걸쳐, 문재인 정부가 등장한 이후 한일 갈등의 원인과 전개 양상을 객관적이고도 꼼꼼히 뜯어본다. 한일 문제 전문기자로서 오랜 시간 취재와 글쓰기에 전념해온 자신만의 경험을 살려, 당시의 긴박하고 치열했던 상황을 그간 어디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풍부하고 두툼한 일화들과 함께 르포르타주처럼 밀도 높고 생생하게 지면 위로 옮겨냈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따라가다 보면,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부딪쳐 엉켜 붙은 수많은 정념의 순간들이 괴롭게 다가온다. 무심하게 놓쳐버린, 혹은 의도적으로 비껴갔던 선택들이 나중에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는지 속속들이 확인하는 일은 무척이나 가슴 쓰리고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업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것이 저자가 책을 쓴 이유다.
책에서 말하는 지난 갈등의 두 주인공은 한국과 일본이지만,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은 같은 시기에 진행됐던 북한과 미국 간의 치열한 비핵화 협상이었다. 돌이켜보면 북미 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2018년 여름, 한미일 세 나라 모두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일종의 장밋빛 환상에 빠져 있었다고 냉정하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반도에서 숨 가쁘게 진행되는 상황 전개를 한발 비켜난 곳에서 냉정하게 지켜보며 대응했던 중국도 있었다. 저자는 “이 길고 복잡한 연극의 진짜 주인공은 어쩌면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아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일지도 모른다”(21쪽)고 말한다. 그리하여 ‘신냉전 한일전’이라 이름 붙은 이 연극을 2인극이 아닌, 여러 등장인물이 쉼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다인극으로 그려내기 위해 찬찬하고 치밀한 노력을 거듭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향해야 할까. 먼저 북한과 동아시아의 미래상에 대해 두 나라가 품고 있는 화해하기 힘든 전략적 관점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시급하다. 2·28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한반도 비핵화의 구체적 실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북미 간에 벌인 ‘세기의 담판’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한 한국이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놓고 일본을 상대로 벌인 치열한 ‘간접 외교전’이기도 했다(254쪽). 저자는 역사와 안보 각각의 측면에서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역사 면에서는 두 가지 쟁점, 즉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판결 문제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전자는 한국 정부가 원고들과 활발히 소통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전시하 여성에 대한 씻을 수 없는 국가 범죄라는 원칙을 굽힘 없이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또한 실로 난제라 할 수밖에 없는 강제동원 판결 문제는 ‘피고 기업의 사과’를 입구로 하는 한일의 역사적 화해에서 그 방안을 찾는다. 마지막으로 안보협력 면에서는 일본의 지난 ‘한국 지우기’ 시도가 진심으로 한국과 안보협력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음을 힘주어 말한다. 한일 관계가 악화한 상황에서 한국의 협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고 보고, 잠시 이를 ‘공백’으로 방치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2021년 5월 2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드러난 바이든 행정부의 초기 선택에 관한 분석도 잊지 않는다. 이날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서약을 담은 6·12 싱가포르 공동선언뿐 아니라 “남북이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긴다”는 내용을 담은 4·27 판문점 선언까지 수용했다. 또 전임 트럼프 행정부가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남북 관계의 자율성을 일정 부분 인정했는데, 이를 두고 저자는 한국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대북정책의 ‘독자성’을 바이든 행정부가 대폭 받아들인 것이라 평가한다. 일본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자신들의 국익을 훼손하는 방향을 향한다면 지난 외교전에서 그러하였듯, 마찬가지로 맹렬히 저항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한국이 재팬 패싱을 통해 동아시아의 현상을 변경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2017년 이후 양국은 다시금 팽팽하고도 살벌한 시간을 보냈다. 지난 갈등이 이전의 갈등과 어떻게 달랐는지, 우리는 이제 뼈아픈 복기를 끝냈다. 2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 것인가. 그때 한국과 일본은 심연과도 같은 견해차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분노와 부끄러움의 시간을 건너온《신냉전 한일전》이 묻는다.
한일 전문기자가 바라보는 지난 갈등의 모든 것
불의의 일격이었다. 2019년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A4 한 장 분량의 짤막한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첫째는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절차에 들어간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오는 4일부터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만들 때 꼭 필요한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소재를 포괄수출허가제도의 대상에서 제외해 수출규제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심장에 비수를 들이댄 일본의 습격에 모두 할 말을 잃었고, 놀란 시민들은 거리로 달려나와 “반(反)아베” 구호를 외쳤다. “(일본 제품을) 사지 않습니다, (일본에) 가지 않습니다”, “보이콧 재팬” 등 불매운동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편의점에서는 ‘아사히 맥주’가 놓인 자리가 사라졌고, 인스타그램에서는 ‘#일본여행’이라는 해시태그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여기, “사지 않고, 가지 않겠다는 약속”에서 나아가 지난 한일전의 진상을 철저하고도 집요하게 파헤치는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 길윤형은 약 3년 반만의 〈한겨레〉 도쿄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2017년 10월에 펴낸 책 《아베는 누구인가》에서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 이어진 한일 갈등이 “앞으로 닥칠 거대한 불화의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즉 역사 갈등이 시작이었지만 이면에서 꿈틀대던 또 다른 거대한 움직임을 눈치챈 것이다. 저자는 이를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 개발’이라는 두 개의 지정학적 충격이 가지고 온 “동아시아의 신냉전화”라고 표현한다. 《신냉전 한일전》은 이렇듯 동아시아 신냉전 시대에 마주한 결정과 갈등과 대립의 순간들을 담았다.
김정은 위원장 신년사(2018년 1월), 평창겨울올림픽(2018년 2월), 판문점 회담(2018년 4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2018년 6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2018년 10월), 한일 초계기 갈등(2018년 1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2019년 2월), 화이트 리스트 제외 방침 결정(2019년 7월), 지소미아 종료 결정(2019년 8월), 지소미아 종료 결정 철회(2019년 11월) 등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한국과 일본은 뒤치락엎치락 외교전을 벌였다. 이 흐름에 끈질기게 따라붙은 저자는 한 장면 한 장면 차분하고 냉정한 복기를 통해 현상의 본질에 바짝 다가섰고, 정확하고 날카로운 분석으로 독자에게 낱낱이 전한다. 그리고 뼈아프게도 이 처절한 외교전에서 한국이 패배했다고 평한다. 책은 2015년 12·28 합의를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일 갈등의 모든 대목을 말한다. 사상 최악의 관계로 치달은 양국의 구조적 갈등을 분석하고, 어렵지만 해법을 모색하는 시도도 잊지 않는다. 일본의 보복 조치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얼마나 제대로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마주 대할 시간이 다가왔다.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만큼 가슴 아픈 순간들을 기록하면서도 되도록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 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해 동아시아의 냉전 체제를 허물 기회가 우리에게 언제 다시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지난 실패를 복기하는 이 책이 향후 대일정책을 세우는 데 반면교사가 되길 기원한다.”(21쪽)
‘좋았던 옛 시절’을 지나
양보 없는 정면 대결에 이르기까지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관계는 크게 세 시기를 거쳐왔다. 살벌한 냉전 질서 아래,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일치했던 1기(1965~1980년대 말)가 있었고, 이어서 냉전이 해체된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기 전인 2000년대 말까지로 구분되는 2기가 있었다.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맺은 한일 파트너십 선언(1998년) 등으로 대표되는 ‘좋았던 옛 시절’이었다. 그리고 저자는 3기, 동아시아의 신냉전에 관해 힘주어 말한다.
중국의 부상에 맞서고자 미국과 동맹 강화에 나선 일본에게 ‘한미일 3각 동맹’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안보의 기본 축이었다. 지난 한일 파트너십 선언의 기본 전제였던 평화헌법과 반성적 역사 인식이라는 두 기둥을 처참히 무너뜨린 아베 신조의 등장은 우리에게 심히 좋지 않은 징조였지만, 신냉전의 거센 흐름 속에서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3각 동맹을 중시하는 미국의 압박을 이겨낼 수 없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렇게 2015년 위안부 문제를 12·28 합의로 봉합했고, 그 기반 위에 2016년 지소미아를 체결했다. 이 시점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 사태가 발생한다. 2016년 말 촛불혁명이었다.
이어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12·28 합의를 무력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국면 전환에 나선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북핵 문제를 해결하며, 동아시아 냉전 구조를 깨트리는 ‘현상변경’ 전략을 취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한미일 3각 동맹을 강화하고, 그 힘으로 북한과 중국을 억제해야 한다는 일본의 ‘현상유지’ 전략과 충돌한다. “양국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 문제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화해하기 힘든 전략적 관점 차이.”(20쪽) 이것이 바로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2018년 이후의 파국을 가져온 크고 주요한 요인이다.
국가의 위신을 걸고 벌인 외교전,
한국은 어째서 패배하고 말았나
2019년 8월 8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진행한 제64차 통일전략포럼 ‘한일 관계 어떻게 풀어야 하나?’에 토론자로 참석한 저자는 “아베 총리는 히틀러의 길을 가고 있다”(11쪽)는 말을 필두로 한 김민석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을 듣고 만감이 교차한다. 이번 사태가 발생한 원인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이해가 정확한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음모론적 오해’에 그친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집권 여당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책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어긋나기 마련이다. 실제로 정부는 일본의 보복 조치를 ‘침략의 전 단계’로 인식했고, 곧바로 지소미아 연장 문제와 연결 지으며 정면 대결로 치달았다. 이를 두고 저자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정세 변화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맥락을 거세한 판단이었다고 비판한다. 또한 “상대의 의도를 지나치게 악마화했고 흥분했으며, 그래서 불리한 전쟁터에 전 병력을 쏟아붓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14쪽)고 지적한다.
책은 지난 외교전에서 일관되게 드러난 ‘재팬 패싱’ 기조에 관해서도 꼬집는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과 대치하는 ‘북핵(안보)’과 ‘위안부(역사)’라는 두 개 전선 모두에서 현상변경을 시도했다. 먼저 북핵과 관련해서는 평창겨울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만들어 남북 대화의 기회로 삼고, 한반도 평화의 기틀을 마련한다는 그림을 그렸다. 이 호소에 북한이 화답하면서 2018년 초부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동아시아의 냉전 질서를 단숨에 걷어낼 기세로 급물살을 탄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며 미국과 대화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자, 평창을 통해 시작된 남북 대화는 미국을 끌어들이는 전 세계적 이벤트로 격상한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던 기적이 연출된 것을 두고, 저자는 “남북 대화를 주도하고 북미 접근을 유도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야겠다는 흥남 출신 탈북민의 아들인 문 대통령의 ‘집념’, 국가 핵무력을 완성한 뒤 경제개발에 나서고 싶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욕심’, 오바마 대통령을 좌절시킨 미국 최대의 외교 난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허영’이 하나의 거대한 화학 작용을 일으켰다”(72쪽)고 분석한다. 그리고 첫 대결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따낸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의 반응이 냉담하기 그지없는 데 주목한다.
한편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문재인 정부는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를 만든다. 그리고 지난 12·28 합의에 대해 “피해자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정치적 합의이며 일본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균형한 합의”였다고 그해 12월 27일 결론 낸다. 이를 두고 일본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힌다. 이어지는 한반도 비핵화 흐름에서도 일본은 북한과의 안이한 타협을 경계하며 북핵에 대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뜻하는 CVID라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3대 요구조건(핵·미사일·납치 문제 해결)을 내세우며 ‘훼방꾼’ 역할을 맡는다. 이후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나는 데 직접적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진,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건넨 ‘비핵화 정의 문서’가 미국과 일본 사이에 합의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미루어보아도 우리가 북미 핵 협상에서 ‘일본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은 실책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하노이 결렬’을 통해 자신들의 승리를 확인한 일본은 막힘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1965년 이후 한일 관계의 기본 틀로 작용해온 ‘65년 체제’를 사실상 허무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국의 심장에 비수를 날린 것이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향해야 하는가
저자는 총 16장에 걸쳐, 문재인 정부가 등장한 이후 한일 갈등의 원인과 전개 양상을 객관적이고도 꼼꼼히 뜯어본다. 한일 문제 전문기자로서 오랜 시간 취재와 글쓰기에 전념해온 자신만의 경험을 살려, 당시의 긴박하고 치열했던 상황을 그간 어디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풍부하고 두툼한 일화들과 함께 르포르타주처럼 밀도 높고 생생하게 지면 위로 옮겨냈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따라가다 보면,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부딪쳐 엉켜 붙은 수많은 정념의 순간들이 괴롭게 다가온다. 무심하게 놓쳐버린, 혹은 의도적으로 비껴갔던 선택들이 나중에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는지 속속들이 확인하는 일은 무척이나 가슴 쓰리고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업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것이 저자가 책을 쓴 이유다.
책에서 말하는 지난 갈등의 두 주인공은 한국과 일본이지만,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은 같은 시기에 진행됐던 북한과 미국 간의 치열한 비핵화 협상이었다. 돌이켜보면 북미 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2018년 여름, 한미일 세 나라 모두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일종의 장밋빛 환상에 빠져 있었다고 냉정하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반도에서 숨 가쁘게 진행되는 상황 전개를 한발 비켜난 곳에서 냉정하게 지켜보며 대응했던 중국도 있었다. 저자는 “이 길고 복잡한 연극의 진짜 주인공은 어쩌면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아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일지도 모른다”(21쪽)고 말한다. 그리하여 ‘신냉전 한일전’이라 이름 붙은 이 연극을 2인극이 아닌, 여러 등장인물이 쉼 없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다인극으로 그려내기 위해 찬찬하고 치밀한 노력을 거듭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향해야 할까. 먼저 북한과 동아시아의 미래상에 대해 두 나라가 품고 있는 화해하기 힘든 전략적 관점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시급하다. 2·28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한반도 비핵화의 구체적 실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북미 간에 벌인 ‘세기의 담판’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한 한국이 동아시아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놓고 일본을 상대로 벌인 치열한 ‘간접 외교전’이기도 했다(254쪽). 저자는 역사와 안보 각각의 측면에서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역사 면에서는 두 가지 쟁점, 즉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판결 문제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전자는 한국 정부가 원고들과 활발히 소통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전시하 여성에 대한 씻을 수 없는 국가 범죄라는 원칙을 굽힘 없이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또한 실로 난제라 할 수밖에 없는 강제동원 판결 문제는 ‘피고 기업의 사과’를 입구로 하는 한일의 역사적 화해에서 그 방안을 찾는다. 마지막으로 안보협력 면에서는 일본의 지난 ‘한국 지우기’ 시도가 진심으로 한국과 안보협력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음을 힘주어 말한다. 한일 관계가 악화한 상황에서 한국의 협력을 얻기가 쉽지 않다고 보고, 잠시 이를 ‘공백’으로 방치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2021년 5월 2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드러난 바이든 행정부의 초기 선택에 관한 분석도 잊지 않는다. 이날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서약을 담은 6·12 싱가포르 공동선언뿐 아니라 “남북이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긴다”는 내용을 담은 4·27 판문점 선언까지 수용했다. 또 전임 트럼프 행정부가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남북 관계의 자율성을 일정 부분 인정했는데, 이를 두고 저자는 한국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대북정책의 ‘독자성’을 바이든 행정부가 대폭 받아들인 것이라 평가한다. 일본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자신들의 국익을 훼손하는 방향을 향한다면 지난 외교전에서 그러하였듯, 마찬가지로 맹렬히 저항할 것이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라도 한국이 재팬 패싱을 통해 동아시아의 현상을 변경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2017년 이후 양국은 다시금 팽팽하고도 살벌한 시간을 보냈다. 지난 갈등이 이전의 갈등과 어떻게 달랐는지, 우리는 이제 뼈아픈 복기를 끝냈다. 2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 것인가. 그때 한국과 일본은 심연과도 같은 견해차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분노와 부끄러움의 시간을 건너온《신냉전 한일전》이 묻는다.
목차
프롤로그
1장 정념의 충돌: 기묘한 밀월이 파탄에 이르다
2장 갈등의 서막: 서로의 진짜 속내를 확인하다
3장 급물살: 집념과 욕심과 허영이 만들어낸 세기의 사건
4장 문제적 인물들: 볼턴-야치의 회담이 핵협상을 파국으로 내몰다
5장 싱가포르 정상회담: 합의서 혹은 짧은 문서
6장 재팬 패싱: 불안한 아베, 접근을 시도하다
7장 협상 교착: 북한, 영변 카드로 맞서다
8장 대법원 판결: 촛불 정권, 일본과 숙명적 갈등에 돌입하다
9장 불신의 늪: 뒤치락엎치락 이어지는 진실 공방
10장 재충돌: 하노이 길목에서 다시 충돌한 한국과 일본
11장 비극의 전조: 비핵화 정의 없는 비핵화 회담
12장 하노이의 실패: 한국,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지다
13장 전략 수정: 북한, 한국의 약점을 드러내며 방향을 틀다
14장 보복: 아베, 한국의 심장에 비수를 들이대다
15장 허무한 결렬: 마지막 기대였던 스톡홀름의 반전 카드
16장 다시 냉전으로: 한국, 익숙한 냉전 관성에 휩쓸리다
에필로그
감사의 말
미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