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폭력의 시대
- 대등서명
- Globalisation, democracy and terrorism
- 개인저자
- 에릭 홉스봄 [지음] ; 이원기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민음사,,2008
- 형태사항
- 190 p. ; 23 cm
- ISBN
- 9788937426407
- 청구기호
- 349.9 홉58ㅍ
- 일반주기
- 원저자명: Eric J. Hobsbawm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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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1514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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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00011514
- 상태/반납예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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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극단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20세기의 특징으로 유례없는 대형학살, 물질문화의 비약적 발달, 인류 역량의 확대를 꼽는다. 그렇다면 이 ‘극단의 시대’로부터 탄생한 21세기를 우리는 어떻게 내다봐야 할까?
FTA 반대 등 반세계화 시위에서 보듯 세계화가 희망이 아니라 불안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경제 세계화와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정치 세계화 사이에 생긴 균열과 부작용에서 연유한다. 이처럼 혼란한 21세기를 조망하기 위해 홉스봄은 다섯 가지 핵심 쟁점을 살피고 있는데, 21세기 전쟁과 평화의 개념, 과거 대영제국과 미국 제국의 차이, 세계화의 영향과 민족주의, 자유 민주주의의 전망, 정치적 폭력과 테러리즘이 그것이다. 이 책은 세 번째 천년의 시발점에서 세계의 상황과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문제를 조망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한 역사가의 시도다. 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고 민주주의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홉스봄은 정부가 국민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홉스봄은 또한 지금의 테러리즘이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은 허물어져 가는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테러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도 안 된다. 이제 제국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우리는 21세기의 세계화된 지구촌을 관리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늘의 모든 현상은 세계화라는 수레바퀴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데, 먼저 자유시장의 세계화로 말미암은 20세기의 경제적 불평등은 21세기의 사회, 정치적 긴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둘째, 20세기에 진행된 세계화의 악영향은 그 혜택을 가장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와 닿기 때문에 세계화에 대한 21세기의 평가는 극단으로 갈릴 수밖에 없다. 셋째, 경제 세계화에 비해 정치·문화적인 사회 세계화의 물결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비롯되는 혼란을 피할 수 없다. 홉스봄은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노골적인 보호주의 정책이 부활할 가능성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저항이 향후 10-20년 동안 자유시장 세계화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진단한다.
세계화라는 큰 흐름의 격랑을 맞고 있는 21세기를 조망하기 위해 홉스봄은 20세기가 지금의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을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국제정치라는 밑그림부터 시작하기 위해 홉스봄은 먼저 허우적거리고 있는 미국 제국의 위상과 미국이 더 이상 세계 패권을 유지할 수 없는 이유를 꼼꼼히 설파하고는, 그 대안 모색의 필요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제 제국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홉스봄은 이렇게 묻고 있다. “미국은 이것을 깨칠 것인가, 아니면 군사력만 믿고 허물어져 가는 세계 패권을 유지하려고 억지를 쓸 것인가?”
그렇다면 21세기의 가장 큰 흐름은 무엇일까? 홉스봄은 국민국가의 약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꼽고 있다. 민주주의를 떠받치고 있던 국민 중심주의가 시장 주권주의와 세계화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국민’은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이 남긴 유산이다. 그러나 국민국가는 아직도 강한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 점점 더 약해지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아직도 만사형통 특약처럼 통하고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한 지 오래되었고, 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란 표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졌다. 하지만 홉스봄은 아무리 국민의 의지가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해도 정부와 국민 간에는 쌍방향 교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가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 똑같은 실수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정부와 국민 간의 교감 없이 자유방임주의적으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소외된 백성에게 기회와 동참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0세기에 테러와 폭력이 증가한 것은 ‘사악함의 만연’보다는 도덕적 개념, 즉 자신을 선(善)으로,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하는 이념적 확신이 절대적인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정치적 폭력은 완전히 세계화되었다. 하지만 정치 테러는 현 시대의 증상일 뿐 결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힘은 못 된다. 우리의 당면 과제는 현실의 변화를 이해하고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세계화의 영향: 국민국가의 위기인가, 국가의 역할이 달라지는 것인가?
『극단의 시대』에서 20세기 중반, 인류는 세계 역사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한 홉스봄이 21세기의 흐름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첫째, 국가 그 자체의 위상이 변해 간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기반으로 활동 범위를 확대했던 정부는 복지국가에서 최고점에 달했고 국민은 기꺼이 세금을 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전쟁에서 목숨을 바쳤다. 지금은 국가의 법과 세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다국적기업을 기반으로 경제 세계화가 추진 중이다. 또한 비교적 안정된 강대국들조차 오랫동안 퇴치 불가능한 폭력 단체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던 시대도 지났다. 두 번째는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간다는 점이다. 19-20세기 제국주의는 유효하게 들어선 정권이든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든 외국 점령군 정권이든 간에 대다수 인구가 그 정통성을 기꺼이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나, 이제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정부의 권위와 법을 무조건 따르려 들지 않는다. CCTV나 도청 같은 감시 형태가 개인의 자유를 잠식할 뿐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은 본질적으로 불평들을 안고 있는 세계화의 가속도를 타고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패권과 대영제국의 차이: 미국이 왜 패권국이 될 수 없을까?
미국이 확립하려고 애쓰는 세계 패권을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는 말이 바로 제국주의다. 그러나 신제국주의학파 역사가 닐 퍼거슨도 미국의 세계 패권 확립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퍼거슨은 그런 사실을 아쉬워한다는 게 홉스봄과 다른 점이다.) 팍스아메리카나의 모델은 팍스브리태니카지만, 19세기 대영제국과 20세기 미국의 패권은 다르다. 첫째, 영토 규모가 다르다. 영국은 늘어나는 인구를 제국 곳곳에 파견하는 이민 공급원이었으나 미국은 이민을 받아들여서 텅 빈 국토를 채워야 했다. 따라서 미국은 식민지를 개척하기보다는 연합체를 이룰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영국처럼 독자적으로 운용하는 세계적인 군사 기지망을 가질 수 없었다. 둘째, 미국은 혁명의 산물이다. 반면 영국은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우월한 체제를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식민지를 자신의 정치 제도로 바꾸거나 개신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구세주적 사명감은 없었다. 셋째, 영국은 법을 기초로 발전한 강력하고 오래된 국민국가다. 반면 미국은 자유가 중앙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국과 미국의 차이는 ‘역사의 길이’다.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은 “대물림받은 타자”가 있어서 자신들은 수세기 동안 싸워 온 그 나라들과는 다르다고 규정해 왔지만, 역사도 전쟁도 없던 미국의 적은 관념적으로 규정, 즉 세계 어디에 있든지 간에 미국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세력이 바로 미국의 적이 되었다.
이렇듯 미국과 영국의 국가적인 차이는 제국의 차이로 이어진다. 영국은 작은 섬나라로서 바다를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갔지만 미국은 초기 목표처럼 아메리카 대륙 땅덩어리를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데 급급하다. 또 영국은 19세기 세계의 공장으로서 경제 발전의 핵심 원동력이었다. 영국과 관계를 맺었던 라틴아메리카는 번창을 구가했지만, 멕시코는 미국에게 값싼 노동력을 대 주는 것 외에는 얻은 게 없다. 영국은 세계 경제에서 물러났다 해도 아직 국제 운송 체계의 핵심이며 증권거래소와 금융 허브로 성장했다. 미국은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는 있으나 세계 경제와 과거 대영제국처럼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비슷한 나라들 간의 교역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었고 또 자유시장 세계화의 급진전으로 인해 미국 같은 대국조차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미국이 영국처럼 미국의 산업화에 직면하여 다른 영토로 시장과 자본 투자를 옮길 수 없는 이유는 자국에서 생산할 수 없는 상품을 수입하느라 세계 산업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국가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역사상 유일하게 어마어마한 제국이면서 동시에 어마어마한 빚을 진 채무국이다.
도대체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9/11 사태 이후 정치적인 열광자 그룹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는 오랜 꿈을 이루겠다고 나서게 됐을까? 저자는 그것이 미국 사회 내부의 위기를 말해 준다고 본다. 미국에선 남북전쟁 이래 가장 심한 정치·문화적 분열, 경제적으로 세계화된 동·서부 해안과 불만에 찬 거대한 중부 내륙 지방 사이의 격차, 문화적으로 개방된 대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미국이 여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아무리 크고 무섭다고 해도 미국의 대외 정책은 내부 지향적일 뿐 외부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위대한 제국이나 효과적인 패권이 나올 수 없다.
다른 나라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대책은 세계 곳곳, 특히 중동과 동아시아에서 군사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미국의 정책에 동참해 달라는 권유를 확고히, 그러나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야 미국이 소외당한다고 느끼고 자기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국제 사회의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미국이 과대망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외교 정책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우리가 좋든 싫든 미국은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강대국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이 좀 더 위험하지 않은 초강대국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민주주의의 위기: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국민 중심주의를 무너뜨릴 것인가?
‘국민’ 중심주의는 20세기의 유산이다. 하지만 21세기에도 ‘국민’이 정체의 기초가 될까? 홉스봄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발달의 현 단계에서 국민 중심주의의 기본이 무너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세계화는 또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에 이미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민주 정치의 기본이 되고 있는 전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가는 첫째, 정부는 영토 내의 다른 어떤 조직보다 더 힘이 강하다는 전제, 둘째, 정부의 권위를 국민이 어느 정도 자진해서 수용한다는 전제, 셋째, 법과 질서 같은 서비스는 정부가 가장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운용된다. 그러나 첫째, 안정되고 효율적인 나라들조차 강제력에 대한 절대 독점권을 잃었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삶은 갑자기 사소한 혼란에도 극도로 취약해지고 있다. 둘째, 국가에 대한 자발적인 충성과 봉사 정신이 흔들리고 있으며, 이제 그 누구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울 사람은 없다. 셋째, 1970년대 이후 작은 정부를 지향하여 모든 공공 분야의 민영화가 추진되면서 교도소, 우체국, 학교, 심지어 복지 서비스와 전쟁 용병까지 민영화되고 있다. 그 결과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을지는 몰라도 ‘시장 주권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를 보완해 주는 제도가 아니라 대안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국민이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는 의욕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기존 방식, 즉 선거의 효과도 떨어졌다. 민주주의에서는 유권자들이 듣기 원치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리석을 따름이다. 만약 정부가 세금 인상을 주장하면 표를 잃는다고 확신한다면 국가의 재정이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그럴 경우 선거운동은 예산을 둘러싼 거짓말의 경연장이 되고, 국가 예산을 대충 결정해 버릴 수밖에 더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 ‘국민의 의지’가 어떤 식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것을 기초로 정부의 업무를 결정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이론가 시드니와 비어트리스 웨브 부부가 지적했듯이, 국민의 의지는 정부의 업무 자체는 심판할 수 없으며 단지 그 업무의 결과만 심판할 수 있을 뿐이다. 국민은 찬성보다는 반대를 훨씬 더 잘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봄은 그래도 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정부는 국민을 위해 한 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의 의지’가 아무리 세상 물정을 감안하지 않고 어리석다고 해도, 또 그 의지를 수렴하는 방식이 아무리 부적절하다고 해도, 국민의 의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국민의 의지’를 무시한다면 인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무리 전문적이고 기술적으로 만족스럽다고 해도 실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는가? 소련 체제가 실패한 것은 ‘국민의 이익’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과 그 결정을 수용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쌍방향 교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의 자유방임적인 세계화도 똑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 세계화는 각국 정부의 작품이었다. 그들은 가장 권위 있고 뛰어난 경제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세계화의 발목을 잡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했다. 세계은행은 지난 20년 동안 족쇄 풀린 세계화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와 인류에 끼친 악영향에 관심을 쏟지 않다가 이제야 ‘세계화’라는 단어가 세계 인구 대다수에게 ‘기회와 동참’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정’을 의미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폭력의 시대: 무엇이 문제이며 공공질서는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
20세기 말의 세계는 정치적인 폭력이 급속이 늘어났다는 점이 특징이다. ETA나 IRA도 초기에는 과격한 폭력 행동을 자제했었고, 이슬람권에서도 1970년대 초가 되서야 과격 알카에다의 전신이 등장하면서 테러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폭력의 전반적인 증가는 1차 세계대전 이래 세계 도처에서 진행돼 온 야만화 과정의 일부다. 한편 미디어의 생생한 폭력 묘사에 제한이 사라지면서 사회적인 자제 장치도 고장 나 버렸다. 그러나 폭력을 부르는 가장 큰 요인은, 이념적 확신이다. 즉 자신을 선(善),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명분은 너무도 정당하고 상대의 명분은 완전히 틀렸기 때문에,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그 어떤 것도 동원해야 하고, 동원되는 모든 수단은 정당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그렇다면 폭력의 시대에 경찰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첫째, 이상주의자가 돼서는 안 된다. 범죄를 완전히 뿌리 뽑으려 애쓰기보다는 범죄를 줄이고 통제하고 민간인들에게 피해만 가지 않도록 하면 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일부가 부패에 빠져 들기도 한다. 둘째, 경찰은 범법용의자들을 고립시키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선량한 시민들의 반감을 사서는 안 된다. 특히 집단에 대한 지나치거나 노골적인 강제력은 국민 전체는 아니더라도 소외 계층을 포함하는 대집단의 반발을 부르기 십상이다.
정치 테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영국의 경우 아일랜드인을 모두 잠재적인 IRA의 구성원으로 보고픈 유혹을 용케 견뎌 냈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의 상황은 정상이 아니었다. 해외에서 발생한 미지의 위험에 대해 광적인 흥분, 이름을 잘못 붙인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실체가 모호한 외부의 적과 내부의 테러 분자들로부터 우리 생활양식을 수호하는 방법에 관한 말잔치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건 테러를 막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국민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하려는 게 목적이다. 그러나 살상 자체가 아니라 이 공포 유발이야말로 바로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이다. 현실적으로도 테러리즘의 실질적인 위험은 소수 익명의 광신자들의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유발하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에 있다. 요즘의 언론과 어리석은 정부가 모두 그런 두려움을 부채질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커다란 위험 중의 하나이며 소규모 테러 집단보다 더 큰 위험임이 분명하다.
FTA 반대 등 반세계화 시위에서 보듯 세계화가 희망이 아니라 불안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경제 세계화와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정치 세계화 사이에 생긴 균열과 부작용에서 연유한다. 이처럼 혼란한 21세기를 조망하기 위해 홉스봄은 다섯 가지 핵심 쟁점을 살피고 있는데, 21세기 전쟁과 평화의 개념, 과거 대영제국과 미국 제국의 차이, 세계화의 영향과 민족주의, 자유 민주주의의 전망, 정치적 폭력과 테러리즘이 그것이다. 이 책은 세 번째 천년의 시발점에서 세계의 상황과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문제를 조망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한 역사가의 시도다. 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고 민주주의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홉스봄은 정부가 국민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홉스봄은 또한 지금의 테러리즘이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은 허물어져 가는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테러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도 안 된다. 이제 제국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우리는 21세기의 세계화된 지구촌을 관리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늘의 모든 현상은 세계화라는 수레바퀴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데, 먼저 자유시장의 세계화로 말미암은 20세기의 경제적 불평등은 21세기의 사회, 정치적 긴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둘째, 20세기에 진행된 세계화의 악영향은 그 혜택을 가장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와 닿기 때문에 세계화에 대한 21세기의 평가는 극단으로 갈릴 수밖에 없다. 셋째, 경제 세계화에 비해 정치·문화적인 사회 세계화의 물결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비롯되는 혼란을 피할 수 없다. 홉스봄은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노골적인 보호주의 정책이 부활할 가능성은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저항이 향후 10-20년 동안 자유시장 세계화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진단한다.
세계화라는 큰 흐름의 격랑을 맞고 있는 21세기를 조망하기 위해 홉스봄은 20세기가 지금의 우리에게 남긴 유산들을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국제정치라는 밑그림부터 시작하기 위해 홉스봄은 먼저 허우적거리고 있는 미국 제국의 위상과 미국이 더 이상 세계 패권을 유지할 수 없는 이유를 꼼꼼히 설파하고는, 그 대안 모색의 필요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제 제국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 홉스봄은 이렇게 묻고 있다. “미국은 이것을 깨칠 것인가, 아니면 군사력만 믿고 허물어져 가는 세계 패권을 유지하려고 억지를 쓸 것인가?”
그렇다면 21세기의 가장 큰 흐름은 무엇일까? 홉스봄은 국민국가의 약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꼽고 있다. 민주주의를 떠받치고 있던 국민 중심주의가 시장 주권주의와 세계화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국민’은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이 남긴 유산이다. 그러나 국민국가는 아직도 강한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 점점 더 약해지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아직도 만사형통 특약처럼 통하고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한 지 오래되었고, 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란 표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졌다. 하지만 홉스봄은 아무리 국민의 의지가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해도 정부와 국민 간에는 쌍방향 교감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가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 똑같은 실수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정부와 국민 간의 교감 없이 자유방임주의적으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소외된 백성에게 기회와 동참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0세기에 테러와 폭력이 증가한 것은 ‘사악함의 만연’보다는 도덕적 개념, 즉 자신을 선(善)으로,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하는 이념적 확신이 절대적인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정치적 폭력은 완전히 세계화되었다. 하지만 정치 테러는 현 시대의 증상일 뿐 결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힘은 못 된다. 우리의 당면 과제는 현실의 변화를 이해하고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세계화의 영향: 국민국가의 위기인가, 국가의 역할이 달라지는 것인가?
『극단의 시대』에서 20세기 중반, 인류는 세계 역사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한 홉스봄이 21세기의 흐름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첫째, 국가 그 자체의 위상이 변해 간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기반으로 활동 범위를 확대했던 정부는 복지국가에서 최고점에 달했고 국민은 기꺼이 세금을 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전쟁에서 목숨을 바쳤다. 지금은 국가의 법과 세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다국적기업을 기반으로 경제 세계화가 추진 중이다. 또한 비교적 안정된 강대국들조차 오랫동안 퇴치 불가능한 폭력 단체들에게 시달리고 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던 시대도 지났다. 두 번째는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 간다는 점이다. 19-20세기 제국주의는 유효하게 들어선 정권이든 무력으로 권력을 잡은 정권이든 외국 점령군 정권이든 간에 대다수 인구가 그 정통성을 기꺼이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나, 이제는 국민이 자발적으로 정부의 권위와 법을 무조건 따르려 들지 않는다. CCTV나 도청 같은 감시 형태가 개인의 자유를 잠식할 뿐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은 본질적으로 불평들을 안고 있는 세계화의 가속도를 타고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패권과 대영제국의 차이: 미국이 왜 패권국이 될 수 없을까?
미국이 확립하려고 애쓰는 세계 패권을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는 말이 바로 제국주의다. 그러나 신제국주의학파 역사가 닐 퍼거슨도 미국의 세계 패권 확립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퍼거슨은 그런 사실을 아쉬워한다는 게 홉스봄과 다른 점이다.) 팍스아메리카나의 모델은 팍스브리태니카지만, 19세기 대영제국과 20세기 미국의 패권은 다르다. 첫째, 영토 규모가 다르다. 영국은 늘어나는 인구를 제국 곳곳에 파견하는 이민 공급원이었으나 미국은 이민을 받아들여서 텅 빈 국토를 채워야 했다. 따라서 미국은 식민지를 개척하기보다는 연합체를 이룰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영국처럼 독자적으로 운용하는 세계적인 군사 기지망을 가질 수 없었다. 둘째, 미국은 혁명의 산물이다. 반면 영국은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우월한 체제를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식민지를 자신의 정치 제도로 바꾸거나 개신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구세주적 사명감은 없었다. 셋째, 영국은 법을 기초로 발전한 강력하고 오래된 국민국가다. 반면 미국은 자유가 중앙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식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국과 미국의 차이는 ‘역사의 길이’다.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은 “대물림받은 타자”가 있어서 자신들은 수세기 동안 싸워 온 그 나라들과는 다르다고 규정해 왔지만, 역사도 전쟁도 없던 미국의 적은 관념적으로 규정, 즉 세계 어디에 있든지 간에 미국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세력이 바로 미국의 적이 되었다.
이렇듯 미국과 영국의 국가적인 차이는 제국의 차이로 이어진다. 영국은 작은 섬나라로서 바다를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갔지만 미국은 초기 목표처럼 아메리카 대륙 땅덩어리를 하나의 나라로 만드는 데 급급하다. 또 영국은 19세기 세계의 공장으로서 경제 발전의 핵심 원동력이었다. 영국과 관계를 맺었던 라틴아메리카는 번창을 구가했지만, 멕시코는 미국에게 값싼 노동력을 대 주는 것 외에는 얻은 게 없다. 영국은 세계 경제에서 물러났다 해도 아직 국제 운송 체계의 핵심이며 증권거래소와 금융 허브로 성장했다. 미국은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는 있으나 세계 경제와 과거 대영제국처럼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비슷한 나라들 간의 교역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었고 또 자유시장 세계화의 급진전으로 인해 미국 같은 대국조차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미국이 영국처럼 미국의 산업화에 직면하여 다른 영토로 시장과 자본 투자를 옮길 수 없는 이유는 자국에서 생산할 수 없는 상품을 수입하느라 세계 산업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국가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역사상 유일하게 어마어마한 제국이면서 동시에 어마어마한 빚을 진 채무국이다.
도대체 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9/11 사태 이후 정치적인 열광자 그룹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라는 오랜 꿈을 이루겠다고 나서게 됐을까? 저자는 그것이 미국 사회 내부의 위기를 말해 준다고 본다. 미국에선 남북전쟁 이래 가장 심한 정치·문화적 분열, 경제적으로 세계화된 동·서부 해안과 불만에 찬 거대한 중부 내륙 지방 사이의 격차, 문화적으로 개방된 대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미국이 여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아무리 크고 무섭다고 해도 미국의 대외 정책은 내부 지향적일 뿐 외부를 향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위대한 제국이나 효과적인 패권이 나올 수 없다.
다른 나라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대책은 세계 곳곳, 특히 중동과 동아시아에서 군사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미국의 정책에 동참해 달라는 권유를 확고히, 그러나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그래야 미국이 소외당한다고 느끼고 자기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국제 사회의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미국이 과대망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외교 정책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우리가 좋든 싫든 미국은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강대국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이 좀 더 위험하지 않은 초강대국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민주주의의 위기: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국민 중심주의를 무너뜨릴 것인가?
‘국민’ 중심주의는 20세기의 유산이다. 하지만 21세기에도 ‘국민’이 정체의 기초가 될까? 홉스봄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발달의 현 단계에서 국민 중심주의의 기본이 무너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세계화는 또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에 이미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민주 정치의 기본이 되고 있는 전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가는 첫째, 정부는 영토 내의 다른 어떤 조직보다 더 힘이 강하다는 전제, 둘째, 정부의 권위를 국민이 어느 정도 자진해서 수용한다는 전제, 셋째, 법과 질서 같은 서비스는 정부가 가장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운용된다. 그러나 첫째, 안정되고 효율적인 나라들조차 강제력에 대한 절대 독점권을 잃었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삶은 갑자기 사소한 혼란에도 극도로 취약해지고 있다. 둘째, 국가에 대한 자발적인 충성과 봉사 정신이 흔들리고 있으며, 이제 그 누구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울 사람은 없다. 셋째, 1970년대 이후 작은 정부를 지향하여 모든 공공 분야의 민영화가 추진되면서 교도소, 우체국, 학교, 심지어 복지 서비스와 전쟁 용병까지 민영화되고 있다. 그 결과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을지는 몰라도 ‘시장 주권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를 보완해 주는 제도가 아니라 대안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국민이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는 의욕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기존 방식, 즉 선거의 효과도 떨어졌다. 민주주의에서는 유권자들이 듣기 원치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리석을 따름이다. 만약 정부가 세금 인상을 주장하면 표를 잃는다고 확신한다면 국가의 재정이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그럴 경우 선거운동은 예산을 둘러싼 거짓말의 경연장이 되고, 국가 예산을 대충 결정해 버릴 수밖에 더 있는가? 단적으로 말해 ‘국민의 의지’가 어떤 식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것을 기초로 정부의 업무를 결정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이론가 시드니와 비어트리스 웨브 부부가 지적했듯이, 국민의 의지는 정부의 업무 자체는 심판할 수 없으며 단지 그 업무의 결과만 심판할 수 있을 뿐이다. 국민은 찬성보다는 반대를 훨씬 더 잘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봄은 그래도 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정부는 국민을 위해 한 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의 의지’가 아무리 세상 물정을 감안하지 않고 어리석다고 해도, 또 그 의지를 수렴하는 방식이 아무리 부적절하다고 해도, 국민의 의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국민의 의지’를 무시한다면 인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무리 전문적이고 기술적으로 만족스럽다고 해도 실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는가? 소련 체제가 실패한 것은 ‘국민의 이익’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과 그 결정을 수용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쌍방향 교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의 자유방임적인 세계화도 똑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 세계화는 각국 정부의 작품이었다. 그들은 가장 권위 있고 뛰어난 경제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세계화의 발목을 잡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했다. 세계은행은 지난 20년 동안 족쇄 풀린 세계화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와 인류에 끼친 악영향에 관심을 쏟지 않다가 이제야 ‘세계화’라는 단어가 세계 인구 대다수에게 ‘기회와 동참’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정’을 의미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폭력의 시대: 무엇이 문제이며 공공질서는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
20세기 말의 세계는 정치적인 폭력이 급속이 늘어났다는 점이 특징이다. ETA나 IRA도 초기에는 과격한 폭력 행동을 자제했었고, 이슬람권에서도 1970년대 초가 되서야 과격 알카에다의 전신이 등장하면서 테러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폭력의 전반적인 증가는 1차 세계대전 이래 세계 도처에서 진행돼 온 야만화 과정의 일부다. 한편 미디어의 생생한 폭력 묘사에 제한이 사라지면서 사회적인 자제 장치도 고장 나 버렸다. 그러나 폭력을 부르는 가장 큰 요인은, 이념적 확신이다. 즉 자신을 선(善), 상대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명분은 너무도 정당하고 상대의 명분은 완전히 틀렸기 때문에,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그 어떤 것도 동원해야 하고, 동원되는 모든 수단은 정당하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그렇다면 폭력의 시대에 경찰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첫째, 이상주의자가 돼서는 안 된다. 범죄를 완전히 뿌리 뽑으려 애쓰기보다는 범죄를 줄이고 통제하고 민간인들에게 피해만 가지 않도록 하면 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일부가 부패에 빠져 들기도 한다. 둘째, 경찰은 범법용의자들을 고립시키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선량한 시민들의 반감을 사서는 안 된다. 특히 집단에 대한 지나치거나 노골적인 강제력은 국민 전체는 아니더라도 소외 계층을 포함하는 대집단의 반발을 부르기 십상이다.
정치 테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영국의 경우 아일랜드인을 모두 잠재적인 IRA의 구성원으로 보고픈 유혹을 용케 견뎌 냈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의 상황은 정상이 아니었다. 해외에서 발생한 미지의 위험에 대해 광적인 흥분, 이름을 잘못 붙인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실체가 모호한 외부의 적과 내부의 테러 분자들로부터 우리 생활양식을 수호하는 방법에 관한 말잔치의 물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건 테러를 막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국민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하려는 게 목적이다. 그러나 살상 자체가 아니라 이 공포 유발이야말로 바로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이다. 현실적으로도 테러리즘의 실질적인 위험은 소수 익명의 광신자들의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유발하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에 있다. 요즘의 언론과 어리석은 정부가 모두 그런 두려움을 부채질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커다란 위험 중의 하나이며 소규모 테러 집단보다 더 큰 위험임이 분명하다.
목차
서문: 세계화, 민주주의 그리고 테러리즘
1장 20세기의 전쟁과 평화
2장 21세기 초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패권
3장 미국의 패권이 대영제국과 다른 이유
4장 제국의 종언
5장 새로운 세기의 민족과 민족주의
6장 민족주의의 앞날
7장 민주주의의 전파
8장 테러의 확산
9장 폭력 시대의 공공질서
10장 더욱더 확장되는 제국
해제: 새로운 세기와 낡은 정치 체제
/김동택(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