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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단행본트랜스 소시올-로지 005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대등서명
In defense of lost causes
발행사항
서울 : 그린비출판사, 2009
형태사항
711 p. ; 23 cm
ISBN
9788976827296 9788976827173(세트)
청구기호
169.929947 지73ㅇ
일반주기
색인수록 원저자명: Slavoj ?i?ek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1989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1989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보편적 해방을 위한 지젝의 마니페스토!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며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한다!!



헤겔과 맑스, 라캉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사유로 전 세계의 지적 담론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i?ek). 그가 이번에는 ‘차이’와 ‘미시적 담론’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부드러운 사유”를 비판하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되찾자!’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감행하면서, 이 책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를 내놓았다. 따라서 이 책은 인류의 보편적 해방이라는 가치를 설파하는 지젝의 (이론적) ‘투쟁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 ‘박애’와 ‘평화’ 같은 가치들은 거대 담론을 거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에 휘말려 사라져 버렸다. 또한 실패한 과거의 혁명들은 이러한 가치들을 불온한 것으로, 또 ‘전체주의’나 ‘폭력’, ‘테러’ 같은 부정적 단어들을 연상케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혁명의 ‘참혹한 폭력’이라는 더러운 물과 함께 ‘보편적 가치’라는 아이까지 버리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바로 이 ‘불온한’ 지점에서 시작한다. 인류가 해방의 대의(Causes)를 상실한 채 가치의 상대주의를 인정하고 거대 담론을 포기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안주한 것을 비판하며,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서려 하는 것이다. 현재의 인류는 (평등 없는) 자유민주주의에 멈춰서 있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적 욕망과 철학을 주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진정한 ‘평등-민주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실패한 혁명에서 잃어버린 보편적 가치들을 되찾고, 그 혁명들이 멈춘 지점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를 위해 프랑스 혁명에서의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연방, 마오쩌둥의 중국 문화혁명, 나치 파시즘을 옹호한 하이데거 등 ‘위대한 실패’의 역사를 재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혁명적 시도들은 자기 나름의 역사적인 실패이자 괴물이지만 그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이것들 안에는 자유민주주의자의 거부와 부정 속에서 사라진 ‘부활’의 계기가 존재한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따라서 잃어버린 대의의 옹호는 모든 폭력을 동원하여 대의의 완전한 실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만약 불가피하다면 파국적인 재앙까지도 무릅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경제 위기는 모든 인간적?사회적 가치를 해체하여 ‘경제’의 문제로 환원한다. 현재의 한국 사회 역시 국민의 ‘대의’(representation)와 생존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경제 논리에 복속되고 있다. 즉 ‘정치’가 실종된 ‘정치 위기’의 시기인 것이다. 지젝은 이때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정치’를 복원해 자본주의적 관계를 넘어서고, 사회적 욕망의 양식을 뒤바꿔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경제 위기’이자 ‘정치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며, 이를 돌파해야 하는 지금-여기의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보편적 해방으로!>

오늘날 이데올로기의 무대에는 헤게모니를 다투는 여러 입장들이 난립해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거대 담론의 시대가 끝났으므로 우리는 일체의 근본주의에 반대하여 ‘부드러운 사유’를 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며,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더 이상 거대 담론에 매달리지 말고 미시적인 담론들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문화주의의 시대에서는 인류의 보편적 해방은 요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해방을 주장하는 이 책은 그 기획에서부터 포스트모더니즘과 명확한 대칭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젝은 ‘최신’ 포스트모던 좌파 담론을 이끌어가는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와 대립각을 세우며 비판하고 있다. 네그리는 노동조합의 계급적 권리를 보호하고 국가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하는 수정주의적 구좌파와 혁명주의적 구좌파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말한다. 오늘날 착취의 지배적인 형태는 지식노동의 착취로서 구좌파들이 고려하길 거부하는 새로운 ‘포스트모던’한 사회적 발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네그리의 생각대로라면 좌파는 자기 혁신을 위해 들뢰즈와 네그리를 읽어야 하고, 유목적인 저항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문제 규정 자체가 문제의 일부분이라고 반론을 편다.
지젝은 랑시에르, 바디우와 함께 정치 본연의 적대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둘의 순수 정치론이 경제 영역에서의 투쟁을 등한시하고 민주주의적 투쟁에만 초점을 맞출 때 지젝은 그들이 맑스주의를 벗어났다고 비판한다. 맑스에게 있어서 적대는 노동과정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경제는 단순히 재화를 공급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간의 적대적인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나 바디우와 달리 지젝에게 있어서 진정한 정치란 경제 영역과 분리된 정치 영역에서가 아니라 생산관계 자체에서 일어나는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칭점에서 지젝의 ‘보편적 해방’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지젝은 과거의 실패한 혁명을, 그 전체주의와 폭력을 그저 반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혁명들이 ‘더 밀고 나가지 못한’ 것들을 더욱 철저하게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근대적 혁명은 불가능하거나 위험하다고 간주하면서 그 대신 자본과 국가권력 외부에서 비자본주의적인 생활형식을 실험하자든가,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그 자체로 이미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를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그저 부르주아 계급이 그것을 깨닫게 만드는 다중의 투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젝이 보기에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장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는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카페인 없는 커피를 원하는 것처럼 혁명의 혁명성이 없는 혁명, 즉 가짜 혁명을 소비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카페인 없는 커피를 원하듯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가?

- 로베스피에르 없는 프랑스 혁명
로베스피에르는 평화주의자로서 위선이나 휴머니즘적 감수성 때문이 아니라, 국가 간 전쟁은 보통 개별 국가 내부의 혁명적 투쟁을 봉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한다. ‘전쟁에 대한’ 로베스피에르의 발언은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그의 발언은 그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비록 전쟁이 혁명의 방어로 처방될지라도, 그것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자들이 혁명적 과정의 급진화를 완화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전쟁에 대한 애국적 호소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입장은 사회생활을 군사화하여 독재적인 통제를 수행하기 위해 전쟁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정확히 반대된다. (본문 243쪽)

숱한 정적(政敵)들을 단두대 위에 세웠지만 결국 자신 역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얼음처럼 냉혹한 푸른 눈의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대명사로서, 또 혁명의 폭력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증거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피 냄새 풍기는 그의 혁명에서 인류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폭력적인 혁명’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뿐인가? 지젝은 로베스피에르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라는 현상은 혁명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혁명 자체의 한계 지표라고 말한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의 극단적 ‘폭력’에 대한 의존은 사적 소유와 같은 근본적인 경제 질서를 바꿀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일종의 히스테리적인 행위-표출인 것이다.
지젝은 일관되게 “이전까지 혁명적 시도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충분히 극단적이지 못해서 그런 혁명적 시도 자체의 전제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데 있다”라고 말한다. 기존의 경제 질서를 바꾸지 못한 데서 오는 불화가 결국 폭력으로 분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카페인 없는 혁명’(decaffeinated revolution)을 꿈꾸는 이들과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그러한 혁명일수록 오히려 더욱 큰 폭력을 부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로베스피에르가 온건주의자들에 대해 그들이 원하는 것은 ‘혁명 없는 혁명’일 뿐이라고 비난하면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테러가 일치하는 과잉의 지점이 제거된 혁명, 사회적 규칙들을 존중하는 혁명, 기존의 규칙에 종속된 혁명, 폭력의 신적인 차원이 제거되고 오직 엄격하게 제한된 목표를 향한 전략적 개입으로 축소된 혁명을 원하는 것이다.

- 자본주의로의 길을 연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마오쩌둥의 제창에 의해 1966년에 시작된 중국의 문화혁명에는 분명 대약진운동의 파멸적인 결과라는 자신의 실책을 덮기 위해 ‘혁명’을 동원한 마오쩌둥의 정치적 목적이 감추어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화혁명을 매도하기만 해야 하는가? 문화혁명의 위대함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중국의 자본주의적 폭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마오 문화혁명의 최종 결과가 오늘날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대미문의 자본주의적 동력의 분출이라는 사실에는 일종의 시적 타당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완전한 전개와 함께 특히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혁명, 역전, 붕괴와 재창안 속에서 ‘카니발화’되는 것은 지배적인 ‘규범적’ 생활 방식이다. (본문 298쪽)

즉 문화혁명의 문제는 그 ‘폭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 잠재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의 전면적인 혁명에 실패한 것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재생산을 위해 모든 생활양식을 영속적으로 해체한 ‘진정한 문화혁명’에 비하면 문화혁명의 폭력, 혹은 문화혁명에 사로잡힌 홍위병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과열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문화혁명의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 혁명의 초점이 어떤 대리자도, 국가질서도, 자본도 없는 생산적 표현의 완전한 지배라는 유토피아적 목표로부터 “어떤 종류의 대의가 기존의 자유민주주의적 대의국가를 대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전환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실패에는 또 하나의 훨씬 중요한 측면이 있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또 총체적인 혁명적 기획으로서의 정치적 진리를 형성했던 것이 가능했던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측면이다. 이 역사적 패배의 여파 속에서 오늘날의 정치적 진리는 오직 국지적인 사건, 국지적인 투쟁, 개별적인 배치로의 개입으로만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역사적 진보라는 시간관 속에서 혁명적 사건의 ‘정확한 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조건은 결코 혁명적 행동에 충분할 만큼 성숙할 수 없고, 혁명적 행동은 언제나 미성숙할 수밖에 없다. 성숙함이란 성숙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객관적인 환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패배들을 축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이 오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당연히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결코 혁명을 볼 수 없다. 달리 말해 혁명적 잠재력은 저기 바깥에서 발견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사실이 아니다. 1917년 여름, 혁명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에 반대한 멘셰비키들은 혁명을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보지 않았고’, 아직 ‘때가 오직 않았다’고 반대했다. 그들은 단지 혁명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젝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이 민주주의를 넘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대적 형식에 근접해 있다고 평가한다. 차베스는 수많은 운동 세력이나 정치 행위자들과 상호 작용하며 그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내고 있는 동시에 빈민촌의 ‘가난한 자들’과도 특권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차베스는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존중하지만, 그가 내세운 이상과 공약이 정당성을 갖게 된 원천은 선거가 아니라 그의 권력 뒤에서 그를 지배하는 힘인 ‘가난한 자들’에게 있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 형식 안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구현한 사례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처럼 좌파들의 선거를 통한 집권이 ‘르네상스의 징후’가 되는 것은 그들이 ‘규칙을 바꾸는’ 활동을 할 때, 단지 선거나 여타 국가장치들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 공간의 전체 논리를 바꿀 때, 다시 말해서 그들의 계급적 기반이 헤게모니를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민주주의적 형식의 ‘계급적 편향성’에 입각하여 정확한 직관에 의해 지도받을 때인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차베스 정권에 대해 높은 기대를 품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전 지구적 배치 속에서 이 새로운 실험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뮈엘 베케트의 문구를 인용하며 지젝은 인류가 보편적 해방의 길로 나서야 한다고 주문한다. 혁명적 시도의 실패는 실패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인류는 유토피아적 에너지를 축적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관련하여, ‘탈-존재보다 재앙이 낫다’라고 말할 때 그는 옳다. 사건에 무관심한 비-존재보다는 사건에 충실한 재앙이 낫다. 앞으로 자주 인용할 베케트의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면, 무관심은 우리를 아둔한 존재의 늪에 빠뜨리는 반면,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잘 실패할 것이다. (본문 16~17쪽)
목차
서문 _ 대의가 말하면 로마는 끝난다 1부 사물들의 상태 1장 무조음의 세계에서 행복과 고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교양의 스크린│선물과 교환│오디세우스의 현실정치│무조음의 세계│세르브스키 연구소, 말리부│증상으로서의 폴란드│고문의 행복? 2장 이데올로기의 가족 신화 ‘자본주의적 리얼리즘’│할리우드의 커플 생산……│……과 바깥에서의 커플 생산│실재적인 할리우드 좌파│프랑켄슈타인의 역사와 가족│자기 목적지에 도달한 편지 3장 급진적 지식인들, 혹은 왜 하이데거는 1933년 (비롯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딘 걸까 숲속에 나무 감추기│니체 길들이기│미셸 푸코와 이란 사건│하이데거의 문제│존재론적 차이│하이데거의 연기나는 총?│반복과 새로움│하이데거부터 충동까지│하이데거의 ‘신성한 폭력’ 2부 과거로부터의 교훈 4장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 “무엇을 원하는가?”│비인간적인 것을 주장하기│맑스주의의 실체변환│마오 변증법의 한계│문화혁명과 권력 5장 다시 방문한 스탈린주의, 혹은 어떻게 스탈린은 인간의 인간성을 구원했는가 스탈린주의의 문화적 반-혁명│(어쩌면 세상을 구할지도 모를) 자기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은 편지│크렘린학│객관적 유죄로부터 주관적 유죄로│「카사블랑카」속의 쇼스타코비치│스탈린주의적 카니발……│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에서│최소한의 차이 6장 포퓰리즘이 실천에서는 (가끔씩) 옳지만, 이론에서는 옳지 않은 이유 실천적으로는 좋다│……하지만 이론에서는 좋지 않다│‘경제의 지배적 역할’: 맑스와 함께 프로이트를│선 긋기│행위│실재│향락의 정치의 공허함 3부 무엇을 할 것인가? 7장 규정적 부정의 위기 유머러스한 초자아……│……그리고 그 저항의 정치│“굿바이, 저항하는 유목민 씨”│다보스 속의 네그리│네그리 없는 들뢰즈│협치와 운동 8장 알랭 바디우, 혹은 빼기의 폭력 민주주의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사건에 응답하기│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원하는가?│문화혁명의 교훈들│어떤 빼기?│프롤레타리아 독재에게 기회를! 9장 자연 속의 불만 후쿠야마를 넘어│두려움에서 전율로│자연에 대립한 생태주의│하이데거의 이용과 오용들│무엇을 할 것인가? 옮긴이 후기_ 지젝과 함께 다시 맑스로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