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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읽다: 세계와 대륙을 뒤흔든 핵심사건 170장면

대등서명
Trente ans qui ont change la Chine
발행사항
파주 : 푸른숲, 2012
형태사항
623 p. ; 23 cm
ISBN
9788971848739
청구기호
912.08 퓌63ㅈ
일반주기
원저자명: Caroline Puel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3512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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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3512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다시 대륙을 뒤흔들고 세계를 호령하게 된
중국의 고속 성장기 1980-2010
중국의 현재를 만든 30년을 통해 중국을 움직이는 원칙과 속마음,
그리고, 중국의 내일을 읽는다

출간 의의


세계무대에 다시 강대국으로 올라선 중국, 국제 정세를 주무르는 주인공이지만 여전히 미지의 대륙, 두려움의 대상인 중국이 다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현재 중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부터 시작해서 최근 30년의 핵심 사건들을 기록한 《중국을 읽다 1980-2010》이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발간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눈부신 성장과 함께 극심한 갈등도 겪었다. 그리고 바로 이 기간 동안 오늘날의 중국을 이해하고, 아울러 미래의 중국을 예측할 수 있는 핵심 사건들이 일어났다.
저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로 대표되는, 중국의 유례없는 시스템 실험을 저널리스트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록, 분석한다. 뿐만 아니라 개혁·개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가졌던 기대감과 불안에서부터 시행착오를 거칠 때의 당혹감, 원하는 것을 이뤄냈을 때의 성취감과 자부심 등, 굵직한 사건들이 터졌을 당시 대륙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모습-최고 수뇌부의 상황은 물론 일반인의 삶에 이르기까지-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의 실체를 사실적이며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 언론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알베르 롱드르 상’을 받은 저자 카롤린 퓌엘은 개혁·개방 초기에 <르푸앵>, <리베라시옹>의 중국 사무소를 만들고, 이후 30년간 중국 대륙에 체류하면서 개혁·개방의 여정을 고스란히 목도한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중국 전문가이며, 지금도 그 현장에서 뛰고 있는 저널리스트다.

1980-2010, 중국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도 변곡점으로 기록될 시기
이 격랑의 시대를 중국인들과 함께 고스란히 겪어낸 프랑스 중국 전문가가
구석구석 발견하고 기록한 중국 현대사


저자는 1980년부터 2010년까지 중국 개혁 30년의 주요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선별하여 중국의 변화를 살펴본다. 여기서 저자 스스로 밝히듯이 “서구 저널리스트이자 급격한 변화를 지켜본 목격자로서 오늘날의 중국에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명백한 사실들을 전달하고자” 한다. 1980년대를 다룬 1부 ‘덩샤오핑, 백 년 후 중국을 기획하다’에서는 덩샤오핑이 기획한 작은 차원의 개혁들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변화의 도화선이 된 이야기를, 1990년대를 다룬 2부 ‘중국, 세계 자본주의와 충돌하다’에서는 단기간에 경제적으로 도약한 시기에 급진적 변화를 겪고 나서 전제주의에서 벗어나 ‘하이브리드’ 정치체제를 갖추고, 계획경제에서 벗어나 시장경제를 도입하며 세계화 추세에 발맞추는 과정에서 완전히 바뀐 사회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서 2000년대를 다른 3부 ‘화평굴기’에서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의 개입 없이 순수한 자기 의지로 본격적인 세계화를 추진한 시기에 중국이 국가 이미지를 관리해가는 모습을 통해 중국의 현재 및 미래를 그려본다.
저자는 서문에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중국을 이해하는 두 가지 통찰을 제시한다. 하나는 문명의 중심이자 동아시아 절대 강대국이었던 ‘중화의 명성을 되찾겠다는 강한 집념’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공산당은 빈곤이나 인권 문제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권력 유지이기 때문에 모든 정책이 ‘안정’을 최우선으로 두고 추진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두 가지 신념을 기반으로, 개혁·개방의 매 단계마다 변형되어 실행된 핵심 원칙들이 어떻게 적용되었으며 그것의 결과는 무엇인지 밝힌다.

본문 내용

정치: 유일무이한 시스템, 유일무이한 성과
_폐문회의,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결론은 하나다

경제 규모 세계 2위. 외환보유고 세계 1위,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세계 2위. 경제를 넘어서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력은 경이롭고 압도적이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토록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낸 주역은 누구일까? 저자는 지도부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꼽는다. 공산당이 직접선거로 선출된 지도부는 아니지만 지도력을 인정받는 이유는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이에 수반되는 시행착오를 신속하게 줄여가는 실행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그들이 어떻게 선발되고 구성되는지, 그리고 이 시스템이 지난 30년 동안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덩샤오핑은 지도부의 세력 싸움으로 개혁·개방이 지체되거나 그 궤도가 흐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정권을 잡은 70년대 말부터 동료인 혁명 원로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지도부 구성 방식을 고민했다. 지도부 안에서 개혁파와 보수파가 늘 대립했던 것을 떠올리며 국가주석은 보수파, 총리는 개혁파라는 이른바 ‘중국식 동거 정부’를 구상했다. 이러한 집단 지도 체제는 독선을 줄이는 견제 장치다. 또한 정책은 끊임없는 토론과 실험을 거쳐 지도부가 합의에 이른 후 결정되기 때문에 긴 호흡으로 추진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생긴 크고 작은 오류들도 토론과 합의를 거쳐 고쳐가며 국가 운영을 해나간다.
저자는 주요 지도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도달하기까지의 분투 과정을 살피며 그들이 어떻게 합의를 도출하고 국정을 운영하고 결과를 만들어가는지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보여준다. 한 번도 국가주석이나 총리 자리에 앉은 적이 없으면서도 ‘개혁·개방의 아버지’라 불리며 중국의 미래를 설계한 덩샤오핑, 가장 개혁적이었던 지도자 자오쯔양, 전술가적 면모를 보여준 장쩌민, 행정부인 국무원을 이끌며 ‘중국의 고르바초프’라 불린 주룽지, ‘화평굴기’를 대외적으로 천명한 후진타오, 각종 재난 현장을 직접 누비며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는 원자바오 그리고 올해 국가주석으로 오를 것이 확실시되는 차세대 지도자 시진핑까지, 이 책은 독자들에게 지도자들의 면면과 행적을 통해 중국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공산당을 이해할 수 있는 식견을 제공한다.

차세대 지도자를 키워내는 공산당 지도부의 전략
그러니까 1974년의 일이다. 공산주의 혁명 원로 쑹핑은 공산당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를 두고 걱정이 많았다. 바로 그 무렵, 그는 작은 수력발전소에서 일하고 있던 32세의 청년 후진타오를 만났다. 늘 공손하고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아 상관들의 신망이 두터운 젊은이였다. 쑹핑은 후진타오를 무척 좋게 보아 그때부터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고속 승진을 시켰고, 속히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새로운 당 서기 후야오방은 후진타오를 시험하기 위해 구이저우 성와 티베트에서 각기 까다로운 임무를 맡겼고, 이때 후진타오는 티베트 독립운동을 엄중하게 진압함으로써 자신의 결단력을 입증했다. 이로 인해 후진타오에 대한 당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1992년에 늙은 덩샤오핑이 정치무대를 완전히 떠날 준비를 하면서 쑹핑과 그 밖의 원로 위원들을 자택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체제의 존속을 위해 잠재적 후계자들을 물색했다. 그때 덩샤오핑에게 소개된 유망한 후보들이 우방궈, 원자바오, 후진타오, 리창춘이다. 이 네 명 모두 2002년도에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이름을 올린다. <’02 권력 제4세대> p.344-345

중국 특유의 집단지도체제
합의를 주도하는 국가주석과 개혁파 총리라는 2인조, 여기에 체제 내 각 파벌을 대표하는 7명의 ‘수뇌부’가 존재하는 형태가 중국의 집단지도체제이다. 이는 권력이 한 사람에 집중되는 것을, 다시 말해 전제주의적 횡포가 재현되는 것을 막는다. 최종 결정은 이들의 합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좀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위 지도자들이 5년 임기를 두 번 연임하고 일정한 절차를 밟아 권력을 승계한다는 원칙은 장기적 전략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된다. 정부가 공백기나 과도기 없이 계속 활발하게 돌아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국도 정권 교체가 일어나는 시기에는 외교 및 경제활동이 침체되긴 하지만 서구 민주사회처럼 잦은 선거운동에 수반되는 장기간의 정체기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결론: 중국의 향후 30년은 세계를 바꿀 것이다> p.576-577

경제: 세계 자본주의 세계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중국식 시장경제’만을 고수하다
_수용할 수 있는 만큼의 개방, 최소한의‘시장경제’

중국은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있지만 전폭적인 개방을 한 적은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중국은 정치,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 규모도 거대하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서구에 경제 주권을 뺏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에 정책은 늘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개방의 폭도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절대 넘지 않는다. 또한 개방 정책의 파트너가 되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정확히 필요한 것만 취한다.
중국의 단계적인 개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현상은 기술 고도화를 꼽을 수 있다. 자본이 필요했던 80년대와 90년대에는 중국 파트너와 합작을 한 기업이라면 업종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본보다 기술이 더 중요해진 2000년대에 들어서자 선진 산업 위주로 투자와 기술 이전을 선별하여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이때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세계 M&A 시장의 큰 손이 되었다. 두 번째 현상은 개방 지역 확대이다. 90년대 초 덩샤오핑이 중국 남부 연안 5개 도시를 경제특구로 지정하여 개방의 물꼬를 텄고, 이제 ‘서부대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대륙 중서부까지 개방 지역을 넓혔다. 세 번째 현상은 학습이다. 80년대부터 꾸준히 외국 기업들의 진출을 승인한 중국 정부는 그들의 기업 활동을 면밀히 주시했다. 90년대 말에 들어서야 이런 학습과 경험을 국유 기업 개혁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금융·통화 부문 정책을 살펴보면 경제 주권에 대한 중국의 강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세계화의 첨병이었던 서구와 세계화에 휩쓸린 국가들은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유로존에 속한 스페인, 그리스는 통화 주권이 없어 경제 위기를 주도적으로 헤쳐 나가지 못하고 다른 국가들의 지원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중국은 오랫동안 위안화 절상 압박을 견디며 개방은 하되 경제 주권은 지키겠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 결과 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도 무사히 넘겼고,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때도 성장률 9%대를 기록했다. 전면적인 세계화라는 세계 경제 흐름과 거리를 둔 것이 오히려 중국에게는 유리했던 것이다. 나아가 달러 중심의 세계 경제 체제를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키우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과 통화 SWAP 협정을 연이어 체결하고 있다. 이는 세계 금융·통화 시장의 새로운 질서가 생겨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움직임이다.

중국이 중화권 형제들의 마음을 사는 방법
홍콩이 반환된 후, 중국 정부는 처음으로 홍콩인들의 마음을 살 방법을 찾았다. 아시아 경제위기 때 투기 세력의 공격을 받는 홍콩 달러를 중앙은행이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홍콩 행정장관 둥젠화는 임시국회에서 홍콩의 이익을 강조하며,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위대한 붉은 용’의 보호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그렇게 차츰 세력을 강화하고 홍콩 언론 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심지어 6개월 전까지 홍콩 반환을 우려하거나 마뜩찮게 여기던 홍콩 시민들조차 상황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97 장쩌민 시대> p.270

외교: 우리는 더 이상 국제적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_탄탄한 경제력이 뒷받침된 외교력, 힘을 드러내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중국은 제1세계인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거니와 제3세계의 아프리카, 남미 국가들까지 세계 구석구석을 주무르는 화려한 외교술을 선보인다. 제1세계 서구 국가들은 티베트 문제나 인권 문제 등으로 중국을 외교 석상에서 공격하지만, 막상 자국의 생존과 성장이 걸린 경제 현안 문제와 마주치면 지금까지 제기했던 문제들에 입을 다물고 중국과의 협력을 추진한다. 프랑스가 달라이 라마와 대통령의 회담을 추진했다가 고속철도 사업권을 모조리 독일에게 뺏기고 이후 몇 년간 주요 사업권을 수주하지 못했던 사건,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경쟁시켜 원전의 원천 기술을 얻어낸 사건들은 외교 석상에서 중국이 거대한 시장이라는 무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현장으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또한 중국은 미국이나 유럽이 내전이나 인권을 문제 삼아 인도적 지원을 미루고 있던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SOC 건설 사업권과 원유를 비롯한 천연자원 개발권을 확보한다. 2006년에는 그간 아프리카에 공들인 노력을 보상이라도 받는 듯 ‘중국-아프리카 정상회의’를 개최해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을 모두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중국 패권 확대를 우려하던 나라들을 한층 더 큰 불안에 떨게 했다. 이처럼 중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끝내 얻어내고야 마는 외교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저자는 오랜 시간 취재하고 경험한 사건들을 바탕으로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무력 확장이 아닌 경제·무역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인근 국가들이 중국을 강대국으로 좀 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하겠다”는 중국 외교 활동 이면의 속내를 밝혀낸다. 미, 일, 영, 프, 독에 이어 전 세계 6위 규모로 국제통화기금 분담금을 내고 있으며, 다보스 포럼이나 G20 같은 국제 회담에서도 예전보다 목소리를 더 높이고 있다. 이처럼 중국은 앞으로도 외교적으로 세를 확장하는 정책을 펼칠 것이 예상된다.
저자는 중국에서 북한, 동남아시아 등지에 대한 기사도 써왔다. 중국은 마지막 남은 북한의 동맹국이긴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 북한 난민을 받아주어야 하는 상황도 싫고, 그렇다고 한국이 통일이 되어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것은 더욱 싫다. 그래서 중국은 남북 문제에 대해서는 늘 한발 물러서 있는 자세를 취한다.

세계의 빈 곳을 찾아간다
“중국인들은 2, 3달만에 뚝딱 병원부터 지어놓습니다. 그러고 나서 석유라든가 다른 천연자원을 대가로 요구하지요. 중국인들은 그런 원자재를 수송하는 고속도로까지 자기들이 알아서 만듭니다. 그 도로는 아프리카 국가에 계속 남아서 지역 발전에 도움을 주고요!” <’06 중국 방식의 세계 평화> p.398

한국과 북한, 사실 중국은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
사실 중국 정부는 이 야단스러운 동맹국의 핵무기 프로그램 추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중국은 이제 북한의 유일한 동맹국이었다. 평양의 독재 정권은 고립에서 벗어나 미국과 수교하기 원했지만 워싱턴은 단칼에 거절했다. 중국은 자신들과 국경을 접한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 북한 난민을 받아주어야 하는 상황도 싫었고, 그렇다고 한국이 미국의 비호 하에 강력한 통일국가로 성장하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이제 전략을 바꿔야 할 때였다. <’03 베이징 사스 사태> p.358

소프트 파워: 자랑스러운 중국을 위하여
_성취감과 자만 사이에서

급격한 성장에는 지역 간, 계층 간 불균형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중국에도 농민공과 구조조정의 희생자들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갈 길이 멀다. 분배를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며, 일인당 GDP는 아직도 개도국 수준이다. 이 무렵부터 중국 정부는 인민들의 관심사를 돌리고 애국심을 높일 거대한 이벤트를 연이어 터트린다. 미국과 소련이 70년대에 그만둔 우주개발에 박차를 가해 2004년 달로 우주인을 쏘아 보냈고(이는 우주개발에 손을 놓고 있던 미국을 다시 끌어들이는 촉매가 되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다.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라는,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길한 숫자 ‘8’이 들어간 날짜를 받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강대국들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정상을 모두 안방으로 불러들였음은 물론이다. 이는 ‘이렇게 중국이 강해졌으니 조금만 더 인내하자, 웅비하는 조국을 위한다면 지금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메시지를 인민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2010년에 개최된 상하이 만국박람회도 자랑스러운 중국의 위상을 만천하에 과시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준비 과정 중에 중국관의 건축 양식이 너무 위화감을 준다는 유럽연합 대사의 의견을 중국 정부 관리들은 지도부에 바로 전달했다. 이에 후진타오 주석은 화합을 유난히 강조하는 개회 연설을 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중국이 인민의 애국심과 타 국가들의 경계심 모두를 고려한 세련된 제스처를 고민하게 된 시점이다. 중국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드 파워’가 아닌 ‘소프트 파워’를 키울 방식을 연구하게 된다. 중국 전통을 더욱더 강조하고, 전통 의학이나 쿵푸를 알리고, 세계 각지에 ‘공자 학원’을 설립하여 중국어 보급에 힘쓰는 것도 미국의 ‘소프트 파워(코카콜라, 록큰롤 등)’ 전략을 본뜬 것이다.

상하이 만국박람회, 중국이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주중 유럽연합 대사 세르주 아부는 베이징에서 열린 오찬 자리에서 정부 대변인이 중국관에 대한 감상을 청하자 솔직하게 말했다.
“중국관은 근사합니다만 중국이 우리를 너무 짓누릅니다! 우리는 위대한 중국과 나란히 선 머나먼 친척쯤 된 기분이었어요. 중국은 만국박람회에서 애초의 기대와 정반대되는 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우호적인 뜻을 전 세계에 알리기보다는 강대국의 야망으로 겁을 줄 위험이 있으니까요!”
사실 크고 웅장한 것을 지향하는 태도는 계산된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인들의 본능에 가깝다. 오찬이 끝난 후 중국 정부 대변인은 한참 말이 없었으나 빨리 윗선에 보고를 올리겠다고 했다. 전시관의 배치는 변하지 않았으나 5월 1일 후진타오 주석의 개회 연설은 세계와 화합하고자 하는 중국의 의도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10 G2 시대> p.547-548

우주 개발: 잠자던 미국을 깨운 중국
2004년에 중국의 로켓 ‘창정’은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를 탄생시켰다. 양리웨이는 며칠 후 무사 귀환했다. 이번 우주개발의 성과는 다분히 중국인들에게 다시 찾은 국가적인 영광을 보여주고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서구인들, 특히 지금까지 우주정복의 선두에 있던 미국인들은 갑자기 우주개발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재추진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1980년대 초부터 비용이 많이 드는 우주개발에 대한 투자를 중단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부터는 딱히 미국의 경쟁자도 없었기 때문이다. <’06 중국 방식의 세계 평화> p.403-404

홍콩 반환: ‘위대한 붉은 용’의 보호를 받는 홍콩
찰스 왕세자는 굴하지 않고 6백만 홍콩 인구를 향해 연설문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여러분은 새로운 역사의 배를 타겠지만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경계의 눈길 또한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왕세자의 나머지 말은 수천 개의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가려 들리지도 않았다. 사방으로 흐르는 물이 그의 연설을 뒤덮어버렸고 연설문에서는 푸른 잉크가 흘러내렸다 ……. 영국 왕실의 후계자는 완전히 흠뻑 젖었지만 연단에서 연설을 잘 마무리했다. 유니언잭이 내려가고 홍콩기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기가 올라갔다. 이로써 새로운 ‘홍콩특별행정구’가 들어섰다. 크리스 패튼 총독은 영국기를 거두어 만감이 교차하는 듯 가슴에 꼭 품었다. 장쩌민 국가주석이 나서서 평화롭고 원만한 이행을 준수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한 덩샤오핑의 부인을 생각해서 덩샤오핑을 추억하고 홍콩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고 했다. 또한 홍콩의 새 헌법이 홍콩인들의 권리와 생활양식을 전적으로 보호할 것이며, 자신은 홍콩이 여전히 국제 적인 번영의 도시, 자유 항구로 남기를 바란다고 했다. <’97 장쩌민 시대> p.267

인민들의 삶: 성장 우선 정책과 독재, 그럼에도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_확대되는 인민들의 권리

‘부자 되기’ 열풍이 휘몰아쳐서 부동산·주식 투기가 성행하고 신흥 중산층이 늘어나는 등 일부 인민들은 경제성장의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그러나 중국이 겪은 성장통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이들도 바로 인민이었다. 저임금에 시달리고 구조조정에 희생된 노동자들은 처우 개선과 복지 제도 마련 등을 요구하며 쟁의를 일으켰다. 중국공산당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 혼란을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주동자들을 처벌하는 데는 엄격하다. 그러나 권력은 결국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인민들의 기본적인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일례로 노사분규가 일어나면 지방정부는 외국 기업, 국내 기업을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하자‘라는 메시지를 보내 임금협상을 타결시킨다. 또한 정책적으로도 처우가 좋지 않은 육체노동자이 대부분인 민공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인민대표(국회의원)로 민공들을 뽑는다.
또한 사스 사태, 멜라민 분유 파동 등 보건·위생과 관련된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 정부의 늑장 대처를 비난한 피해자들을 잡아들이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즉시 실시하고 정부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물어 해임시켰다.

중국 정부는 노조 편?
이미 중국 남부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 문제에 점점 더 자주 부딪치고 있었다. 중국 지도부는 외국 기업들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예측하여 임금을 조금씩 올려주거나 노동 조건을 개선하도록 조심스럽게 압박했다. 광저우에서 사업을 하는 익명을 요구한 프랑스인 사업가는 이렇게 말했다.
“지방 정부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시끄러워지지 않게 일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10 G2 시대> p.552

경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도 중국공산당은 민심의 변화를 주의 깊게 따라가며 이에 대한 장기적인 대비를 하고 있다. 인민들이 갖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톈안먼 사태로 영원히 꺾여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지 중국도 공산당 1당 독재체제를 넘어 민주주의를 향해 가리라는 것을 개혁·개방 초기에 예측했다. 현재 중국에서는 총리를 위시한 개혁파들이 정치개혁에 대한 논의들을 시작하고 있다.
중국, 집단 우울증에 빠지다
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은 새로운 세대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참지 못했다. […]청년층은 톈안먼 사태 유혈 진압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1991년 6월 4일 자정, 톈안먼 사태 2주기에 수백 개의 맥주병이 베이징대 기숙사에서 창문으로 떨어졌다. 여전히 삼엄한 감시에 시달리던 대학생들이 절망에 못 이겨 저지른 행동이었다. ‘작은 병(‘작은 병小甁’의 중국어 발음이 바로 ‘샤오핑’이기 때문에)’은 한때 그들을 꿈꾸게 했으나 지금은 말을 잃게 만든 중국 지도자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으니……. <’91 공산주의, 이대로 사라지는 것인가?> p.184

중국공산당은 민주주의를 대비하고 있다
덩샤오핑조차도 공산주의 체제 백 주년, 그러니까 2049년에는 16억 5천만 명의 중국인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해져서 능히 민주주의 체제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그런 민주주의가 어떤 유형의 것인지 명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원자바오 총리를 위시한 체제 내 자유파들은 이제 차근차근 정치개혁을 시작할 때가 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치개혁은 당 내에서 차츰 선거로 선출되는 직위를 늘리는 것,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나누고 중국에 지금까지 심각하게 결여되었던 “계몽시대”를 여는 표현의 자유, 법치국가의 발전 등을 세 축으로 삼고 있다. <결론: 중국의 향후 30년은 세계를 바꿀 것이다> p.575-576
목차
들어가는 글 앞으로의 세계질서는 지난 세기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서문 중국을 이해하는 첫걸음: 역사를 통해 중국인들의 본심을 꿰뚫다 1부 덩샤오핑, 100년 후 중국을 기획하다 (1980-1991) ’80 덩샤오핑, 시장경제를 중국에 초대하다 덩샤오핑, 그는 과연 대가였다 농촌 자본주의, 인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다 최초의 중국-외국 합작회사, 맥심 그룹 개방의 실험장, 경제특구 5개 도시 ’81 ‘마오쩌둥주의’ 정체성은 여전히 지킨다 문화대혁명의 과오, ‘4인방’이 뒤집어쓰다 시장경제로 간 군인들 ’82 시야가 열리다 ‘코쟁이’들이 돌아오다 중국인들이 해외유학을 가다 ‘탱탱’, 장과 재회하다! 누구나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시대 ’83 이데올로기는 포기할 수 없다 “닭 몇 마리의 목을 따야 원숭이들을 겁줄 수 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정신 오염 척결 운동 ’84 허가된 자유 도시에 좌판이 놓이고 야시장이 열리다 자본주의 외국계 은행들이 돌아오다∴ 베이징 캠퍼스를 거니는 프랑스 학생들 치욕의 19세기를 넘어 ’85 사회의 각성 개혁파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세력이 커지다 배급 말고 쇼핑! 대담한 자영업자들의 등장 금기였던 전통이 다시 나타나다 중국의 신미술운동 난투극, 시위, 불매 운동 ’86 최초의 학생 운동 후야오방에 대한 보수파의 공격이 거세지다 모든 금기, 섹스와 돈과 정치 최초의 학생 시위 주동자들, 공산당에서 제명되다 ’87 보수파, 부활하다 후야오방의 사임과 단속의 고삐 꼭두각시극 같은 기이한 정치조직 ’88 개혁의 여파, 심각한 인플레이션 생필품 보조금은 더 이상 없다 개혁파 자오쯔양의 실각 보수파 리펑의 부상 ’89 톈안먼의 허상과 트라우마 중국에 민주주의를 어떻게 심을 것인가?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끌어낸 변화의 기운 후야오방과 함께 자유도 가버린 것인가? 끈끈하고 무더운 대륙의 여름 톈안먼 광장에서의 단식 농성 혼란한 베이징, 고르바초프를 맞이하다 하지만 약간의 피는 반드시 봐야 한다 6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 카나리아 작전 외부 세계와의 완벽한 단절 ’90 침체의 수렁에 빠지다 청년층의 두려움과 좌절 그리고 우울 아무도 중국에 투자하지 않다 ’91 공산주의, 이대로 사라지는 것인가? 베를린, 티라나, 모스크바…… 베이징마저? 중국, 집단 우울증에 빠지다 최초의 예술인 마을 화교 큰손들의 귀환 2부 중국, 세계 자본주의와 충돌하다 (1992-1999) ’92 경제개혁은 백 년간 계속되어야 한다 덩샤오핑의 외침, ‘부자가 됩시다!’ 식민지 폐허 상하이의 재탄생 그림자 싸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국가주석 양상쿤 일가의 몰락 세대교체를 위한 사전 작업 정치적 견해가 무엇이든 간에 중국으로 돌아오라! 경제 먼저, 이데올로기는 나중에 프랑스, 대만에 무기를 수출하다 ’93 온 중국을 사로잡은 ‘부자 되기’ 열병 신세대의 투신 축첩 습속이 살아나다 군인들의 비즈니스 농민 폭동 ‘맹류 인구’의 출현 리펑의 와병 ’94 새로운 도전과 인민들의 기쁨 포스트 덩샤오핑 시대의 시작 떠오르는 상하이방 중국 외교의 황금시대 경제 개발의 4대 암초 반체제 투사들을 ‘보이지 않게’ 하다 인민들, 여가를 발견하다 베이징 최초의 바 돈, 섹스, 노래방 ’95 성공적인 개혁, 어지러운 사회 중산층이 나타나다 작업실을 나온 예술가들 방방쥔, 대나무 막대기 짐꾼 집단 에이즈 감염을 불러온 매혈 늘어난 사회 범죄 세계여성대회 베이징 시장의 대규모 부패 스캔들 ’96 대만과의 사정거리 대만 및 미국과의 심리전 대만을 향한 중국 군인들의 위험한 도발 군사적 긴장 대만 독립주의자들의 집권 ‘미국을 압박하는 것은 어렵다’ 새롭게 공표된 공산당의 윤리 규범: 정신문명 ’97 장쩌민 시대 덩샤오핑 ‘동지’의 죽음 전술가 장쩌민 ‘위대한 붉은 용’ 홍콩을 구하다 마오쩌둥식 계획경제를 탈피하다 ’98 주룽지의 분투 중국의 고르바초프, 주룽지 총리 아시아 금융위기, 중국을 비켜가다 정신적인 해일, 국유 기업 민영화 역사의 희생양, 홍위병 세대 클린턴과의 ‘건설적 대화’ 수해라는 공공의 적 민주당을 설립하려는 시도 정부가 반체제 인사들을 망명시키다? ’99 공산주의 체제 50년을 맞다 톈안먼 10주년 파룬궁 탄압 사건 베오그라드 중국 대사관에 떨어진 미사일 세 발 세 번째 천년을 이끄는 강대국 마카오 반환 3부: 화평굴기(和平?起) (2000-2010) ’00 강대국을 향한 노골적 야망 세 번째 천년의 첫 날 대만의 도전 ‘연차’가 생기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의 대중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인구조사 중국 서부대개발 ’01 올림픽, WTO 그리고 중국의 세계화 힘센 놈이 이기는 법! 노동자와 농민의 당, 자본가들에게 문을 열다 베이징이 2008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다 중국인들이 축구 세계에 등장하다 ‘고급 두뇌’들이여, 돌아오라 WTO 가입, 자본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다 ’02 권력 제4세대 지방의 요직 나눠 먹기 행정부 공무원들, 평가를 받다 분노한 노동자들 평화적인 정권 이양, 후진타오의 등장 ’03 베이징 사스 사태 영문 모를 병에 걸린 사람들이 죽어나가다 ‘돈 보다 사람 목숨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는 건 처음 무책임한 지도자는 경질될 수도 있다 심판대에 오른 중국의 외교력 ’04 세계의 공장 중국에는 모든 브랜드가 있다 서부대개발: 우한과 우루무치 통제되지 않는 변방: 신장, 홍콩, 대만 프랑스와의 문화 외교 ’05 예기치 않은 탈선은 모조리 피할 것 자오쯔양의 서거, 사그라든 불꽃 원전 기술 도입 프로젝트 마구잡이 개발 불만이 싹트다 체포된 ‘사이버 반체제 투사들’ 아무르 강 벤젠 유출 사건 ’06 중국 방식의 세계 평화 “우리는 더 이상 국제적인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하이 병’에 걸린 대만인들 일본과의 경제협력 그리고 외교적 마찰 유럽이 버린 땅, 아프리카를 공략하다 미국의 앞마당, 라틴아메리카로 미국을 긴장시킨 중국의 우주정복 계획 전 세계에 중국어 열풍이 불다 중국으로 몰려드는 외국인들 ’07 터져나오는 성장통 인민을 달래야 한다: 사유재산 인정 인민을 통제하다 부자 되기 열풍, 주식 투기 중국 GDP의 4분의 1, 부동산 새로운 황금 거위, 중국 현대미술 작품 ‘세계의 공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중국식의 ‘소프트 파워’ ’08 올림픽 대장정 유례없는 악천후 물가냐, 성장이냐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 티베트를 덮친 심란한 봄 올림픽 성화 봉송 소동 쓰촨 성 대지진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8분, 베이징 올림픽의 막이 오르다 멜라민 분유 파동과 인터넷 닳고 닳은 자본주의자들의 박수를 받는 중국 총리 미국발 경제위기, 중국에 도착하다 ’09 글로벌 경제위기, 역사의 가속화 꺾이지 않는 믿음 위안화가 달러를 대체한다? 글로벌 경기 부양의 견인차 목이 마르다고 독약을 들이킨다?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충돌 다시 찾은 대국의 위상 오바마의 중국 방문 ’10 G2 시대 교묘한 금융 외교로 10년의 시간을 벌다 중국식 동거 정부 희토류 수출 제한, 중국의 부를 보호하다 세계 언론들, 중국을 ‘또 다른’ 강대국으로 대우하기 시작하다 중국과 미국의 힘겨루기 서구 기업들의 불만 제1회 세계미디어 정상회의 상하이 만국박람회: 중국이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것 ‘젊은 민공들을 자기 자식처럼 생각해달라’ 거대한 나라에서 안정을 유지한다는 것 정치개혁을 향하여? 결론 중국의 향후 30년은 세계를 바꿀 것이다 나가는 글 중국을 바꾸어놓은 30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