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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4

개인저자
손정목 지음
발행사항
파주 : 한울, 2019
형태사항
346 p. : 사진 ; 23 cm
ISBN
9788946066861
청구기호
911.6 손73ㅅ
서지주기
참고문헌 수록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7311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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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7311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한국전쟁 이후 현재의 모습이 있기까지 서울 도시계획 반세기에 대한 증언
7년간 200자 원고지 7,200매


서울시의 공간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66년부터 1980년까지의 15년간이었는데, 지은이는 격변하는 시기의 한가운데-1970년부터 1977년까지-서울시에서 도시계획국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수많은 아파트 단지와 고층빌딩이 난무하는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배경, 즉 도시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입안되고, 수정되고, 시행되는 과정과 뒷이야기를 엮었다. 서울시 최초의 도시계획 수립에서 최근 수서사건의 전말까지 신문, 국회속기록, 용역보고서, 재판소판결문 등의 자세한 자료 인용을 통한 고증과 관련인물에 대한 얘기, 비사까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아직 살아 있는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불쾌해할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저자는 오직 귀중한 역사이기 때문에 충실하게 후세에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써내려갔다. 7년간 23꼭지, 200자 원고지 7,200여 매의 방대한 분량으로 집필하면서 작업 막바지에 위암 수술도 한 차례 받았고, 교통사고도 있었다. 23꼭지 중 19꼭지는 국토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월간≪국토≫에 1996년 5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연재했던 내용이다. 군살을 뺀다고 했는데도 방대한 분량이다.
서울시나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부처에서처럼,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은 역사의 충실한 전달자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내용 소개
도쿄의 도시계획 120년의 역사를 ‘바람기가 전혀 없는 날의 남해바다’로 비유한다면 서울의 도시계획은 ‘태풍을 맞은 부산 앞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러한 격동의 서울 50년을 도시계획의 차원에서 재조명하여 오늘날의 도시 구조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증 유발과 함께 해답을 제시해준다. 그 내용을 여기에 요약해본다.

한국전쟁과 서울의 피해
서울에서만 9만 5천 명 이상 사망‧학살‧납치‧행방불명되었다. 보통의 사망이 2만 9,628명, 학살이 8,800명, 납치가 2만 738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일반주택의 피해 연건평 182만 358평, 서울시청 청사는 외형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내부는 거의 파괴 소실되었고, 당시 9개 구청 중 3개 구청은 본관이 완전 파괴, 나머지는 모두 반소파, 277개 동사무소 중 62개는 완전히 불타 없어졌고 나머지 215개는 모두 반소파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인적 피해와 함께 중요한 문화재의 피해를 눈앞에 두고 있던 서울은 주일대표부 김용주 공사의 노력으로 그나마 문화재의 폭격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워커힐 건설-군사정권 4대 의혹사건의 하나
1961년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과 김종필 정보부장의 대화를 발단으로 미군장병 3만 명의 휴가 유치를 위해 건설된 워커힐. 사단법인 워커힐이 60억 환으로 출발하여 1962년 1월 5일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나 토목공사는 그보다 앞서서 시작되었다. 이른바 4대 의혹사건 국회 감사로 1961년 9월부터 1962년 2월까지 각 군 공병감 휘하 각종 장비를 동원하고 연인원 2만 4,078명을 무상노역케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가 워커힐 건설 비용과 관련하여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모두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19만 평의 부지 중 사유지는 얼마나 되었으며 그 매수대금은 얼마였던가, 국유지‧시유지는 자동적으로 워커힐 소유로 전환되었는가. 둘째 건축위원 및 기타 자문위원‧고문 등에 대한 사례는 어떻게 얼마나 지급되었던가. 셋째 삼환‧대림‧동아 등의 건설회사와는 어떤 조건으로 시공계약이 이루어졌던가. 군장병의 노임은 무상이었겠지만 이들 시공업체가 어느 부분까지 자체 노동력을 동원했던가. 넷째 개관준비 요원 다수를 일본에 파견, 사전교육시켰는데 그 비용도 6억 4천만 원 중에 포함되었던가.

박흥식의 남서울 신도시계획안 전말
화신백화점, 그 후신 신신백화점 등 유통업으로 이 나라 최고의 부를 축적한 박흥식이 신도시계획을 처음 구상한 때는 화신백화점에 화재가 나던 1935년 봄이었다. 일제하에서 불광-수색 도시계획안을 수립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면서, 육군 소장 이주일이 “수도 서울 인구증가에 대비한 주택건설계획을 구상해보라”는 과제를 하나 주었는데 그것이 후일 「남서울 도시계획사업 인가신청서」가 되었다.

새서울 백지계획, 도시기본계획과 8‧15전시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불쑥 “인구 150만 명을 수용하는 새 행정수도를 만들어내겠다”는 말을 내뱉은 것은 그가 시장으로 부임한 지 약 50일이 지난 1966년 5월 27일이었다. 김 시장은 8월 15일을 기해서 도시계획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 마련해야 할 것이 새서울 백지계획과 도시기본계획이었다. ‘4천만 평 정도의 넓이와 상주인구 100만 내지 150만 명 규모, 그리고 도시의 외곽을 무궁화형으로 해달라’는 것이 새서울 백지계획의 작업 조건이었다. 이 그림의 작가는 1992년인가 93년에 밝혀졌는데 바로 저자와 허물없이 지내던 박병주였다. 그는 이 그림이 당시 엄청난 언론의 비판을 받아 부끄러움이 앞서 비밀에 부쳤다고 회술했다. 또한 도시기본계획안에 대해서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고무풍선”이니 “기술‧과학성은 전혀 생각도 않고 세워졌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으나 저자는 그것이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둘째 이 계획에서 처음으로 도심부재개발이니 고도지구‧미관지구니 하는 개념이 도입되고 일반에 공개되었다는 점, 셋째는 불완전하나마 20년 장기계획이라는 것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을 평가한다.

아 세운상가여!
전쟁 때 소이탄의 투하로 화재가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공터, 속칭 ‘소개도로’라 불렸던 길게 뻗은 빈터에 세운상가라는 기막힌 건물이 들어서기까지.
소개도로 조성 당시 조선총독부가 그에 저촉된 토지‧건물 보상비를 경성부 예산에서 지급하였다. 그 토지소유권은 당연히 경성부 즉 서울특별시에 있어야 했으나 일본인 소유토지의 등기를 경성부로 고치기 이전에 일본이 패전하고 광복을 맞았다. 이 종묘 앞-필동 간 50m 광로의 절반을 재무부 관재국은 민간인에게 불하해버렸다. 그리고 이 일대에는 ‘종삼’이라 불리는 나라 안 최대규모의 사창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 일대 무허가 판잣집촌을 본 중구청 6급주사 이을삼 계장의 행정연구서 「대한극장 앞­ 청계천 4가 간 계획도로 정비방안」을 본 김현옥 시장은 과히 불도저라 할 만한 추진력으로 이 일대 무허가건물을 철거하고, 중앙도시계획위원회의 반대에도 재개발지구로 지정하고 ‘세운상가’라 통칭하게 된 8개의 대형건물이 만들어내게 되는데...

여의도 건설과 시가지가 형성되는 과정
세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여의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20년 5월 로마를 출발하여 도쿄로 가던 2대의 이탈리아 공군 비행기가 로마를 떠난 지 104일 만에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하면서다. 그리고 1922년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이 고국방문비행하면서 여의도의 군용비행장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당시 여의도의 중심부를 대부분 공군이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 외는 대개가 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66년 서울에 큰 홍수가 나면서, 그해 부임한 김현옥 시장에게는 하수도 정비는 등한시하고 도로 만들기에만 광분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그해에 김 시장이 몰두하던 일은 세운상가, 낙원상가, 청량리 대왕코너 등 민자유치에 의한 재개발계획이었으므로 한강정비는 뒷전이었다. 그러다가 67년 제1한강교 남단에서 영등포 입구까지의 제방도로가 모습을 갖추어갈 무렵 김 시장은 강변도로 북쪽의 여의도가 눈에 들어왔다. “저 섬을 개발하면 엄청난 넓이의 택지가 새로 생기”고 그것을 팔면 무허가건물 거주자들에게 아파트를 지어 제공할 수도 있고, 평소에 하고 싶던 여러 가지 복지시설에 투자도 가능하다는 ‘경영행정’적 발상이 떠오르게 된다. 서울시는 당장 한강개발계획을 수립하였고, 김현옥 시장은 건설부의 여의도 건설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냈다. 건설부와 서울시는 샛강을 두는 윤중제 축조, 한강 본류의 강 넓이 1,300m 유지, 윤중제의 높이는 강바닥에서 15.5m, 택지의 높이는 강바닥에서 13m로 하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1967년 12월 27 기공식, 1968년 2월 10일 밤섬 폭파가 있었다. 밤섬이 폭파된 다음날 100일 작전이라는 것을 세우고, 김현옥 시장은 여의도에 이동시청까지 두면서 거의 반 미쳐서 진두지휘한다. 그때부터 110일간의 혈투가 펼쳐진다.
김 시장은 김수근에게 새로 조성된 여의도 도시계획안을 의뢰한다. 김수근 휘하에는 윤승중‧박성규‧김규오‧김원‧김석철‧김환‧김문규 등 20대 후반의 인재들이 모여있었고, 그들이 만들어낸 여의도 도시설계는 ‘꿈’과 같은 것이었다. 「여의도 및 한강연안 개발계획」이란 제목의 용역보고서에는 이 계획을 완성하는 데 20년이 걸리며 이 기간에 1천억 원을 넘는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망하고 있다. 김수근 팀이 그린 여의도개발계획은 당시의 서울시 재정형편으로는 실현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김 시장은 이상하게도 수정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이미 그의 관심은 시민아파트 건설구상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1970년 4월 8일 와우산 시민아파트 붕괴 사건으로 4월 17일 김현옥은 시장자리에서 물러난다.
김 시장의 후임 양택식 시장 앞에 놓인 것은 반쯤 뚫린 남산1‧2호터널, 반쯤밖에 안 된 한강강변도로, 허허벌판인 여의도, 남서울(강남)과 광주대단지 계획, 그리고 엄청난 재정난이었다. 양 시장은 부임 직후 얼마 안 되어 중앙공무원교육원에 있던 손정목을 서울시 기획관리관으로 불러들인다.
1970년 10월 말 여의도 중앙부 요지 12만 평을 나무 한 그루 없는 아스팔트 포장의 광장을 지으라는 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김수근 팀의 여의도계획은 그 뿌리가 무너져내린다...

을지로 1가 롯데타운 형성과정
일제가 원구단의 석축을 헐어 이곳에 근대적 호텔을 지었으니 이것이 조선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일본인과 구미인 귀빈들을 위한 숙박시설에서, 광복 후 미군사령관의 거처, 한국전쟁 때 장병의 휴양소와 미8군 장교숙소로 쓰이다 1961년 한국정부에 반환된다. 그리고 1963년 한국관광공사가 정부로부터 인수하였을 때는 이미 시설이 낡을 대로 낡은 상태였다. 시설의 노후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호텔의 개축이 결정되고 새 조선호텔은 17층의 대형호텔로 다시 태어난다. 이 조선호텔의 신축은 그후 소공동‧을지로1~3가 일대 건축물 고층화를 선도했다. 1970년대 관광정책이 전환하면서 국영호텔이 민영화되기 시작하는데, 워커힐은 선경개발에, 영빈관은 삼성에 넘어가면서 호텔재벌들이 탄생한다.
신격호가 시게미쓰 다케오로 개명하고 일본에 건너간 게 1940년이었다. 그는 와세다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여기서 만든 빨래비누‧세숫비누‧포마드‧크림 등이 불티나게 팔려나가 주식회사 롯데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본 모리나가 제과와 메이지 제과가 양분하던 제과시장에 롯데껌과 가나밀크초콜릿으로 그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신격호가 국내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주)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설립하여 껌‧캔디‧라면류 등을 생산‧판매하기 시작했다. 66년 동방알루미늄공업(주), 67년 롯데제과(주)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한국진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정부 요인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신격호(시게미쓰 다케오)가 일본에서 모은 막대한 재산을 모국에 투자하게 하고 특히 부동산의 상태로 남겨두고 싶어했다.
저자는 당시 김종필 총리실에 양 시장과 함께 불려가서 호텔롯데 건설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 것을 지시받았다고 한다. 김 총리가 ‘모국에의 재산반입’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야지 결코 일개 기업을 지원한다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워낙 강조했기 때문에 저자는 한참을 신격호가 일본에 귀화한 줄로 착각했었다고 한다.
반도호텔과 함께 국립도서관이 롯데에 불하되고 외자유치라는 미명 아래 각종 특혜조치가 베풀어진다. 1966년 제정된 외자도입법은 한국에 자본을 투자하는 외국인에 대하여 엄청난 세자상의 특혜를 주고, 또 ‘대한민국 국민과 동일한 대우를’ 보장한다. 또한 제2조는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는 자연인일지라도 외국에 10년 이상 영주하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외국인에 대한 조항’도 적용된다”고 규정하고 있어 신격호는 외자도입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전액 출자한 (주)호텔롯데는 엄청난 부동산을 취득했음에도 부동산취득세, 재산세도 부과되지 않았고 외국제품을 비롯한 모든 비품, 장치에 관세도 물품세도 물지 않았다. ‘특정가구정비지구’라는 제도를 신설하고 ‘특정지구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까지 제정해 납부한 세금까지 되돌려주는 등 엄청난 특혜가 계속되었다.
호텔롯데는 처음에는 세계 최고의 설계수준을 자랑하던 일본 가지마건설에서 기본설계를 맡기로 했지만, 신격호 회장과의 잦은 의견대립 때문에 결국 도다건설로 넘어갔다. 신격호는 길이 후세에 남을 건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철골구조공법을 고집했다. 또한 법률을 고쳐서라도 45층은 되어야 한다는 김종필 국무총리의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지하3층, 지상37층으로 낙찰되었다.
목차

황야의 무법자-3대공간 확충정책
1. 3대공간 확충정책을 표방하는 과정
2. 도로공간의 확충
3. 주차공간.녹지공간 확충

신무기 개발기지가 서울대공원으로
1. 입지결정과정-박 대통령과 김재춘
2. 공원계획의 내용
3.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인구집중방지책과 행정수도 전말
1. 서울인구 격증과 인구집중방지책의 전개
2. 수도권 인구재배치계획과 과천 신도시 건설
3. 행정수도-1977년 말까지
4. KIST 지역개발연구소에서의 작업
5. 행정수도의 종말과 유산

주택 5백만 호 건설과 목동 신시가지 개발
1. 전두환 대통령과 주택 5백만 호 건설 발표
2. 택지개발촉진법의 시행과 결과
3. 서울에서의 공영개발과 목동지구 설계
4. 생존권(주거권)이라는 이름의 저항
5. 서부지구의 핵이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