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의 사회학: 한국사회는 어떻게 자아성찰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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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민주주의_ 한국은 어떤 민주주의 나라인가?
성장주의_ 왜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성장을 갈망하는가?
민족주의_ 이주여성은 어떻게 한국사회에 편입되는가?
젠더주의_ 여자 말뚝이,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적 공연론을 통해 살펴본 한국사회의 네 가지 자아성찰
한국사회는 무엇을 어떻게 성찰했을까?
한국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경험이 많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인들 또한 ‘민주주의’를 들먹이며 늘 정쟁을 벌인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누구라도 최종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일반화된 상징으로 확고히 올라섰다. 문제는 그 상징이 지닌 의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한국은 어떤 민주주의 나라인가?
성장에 대한 한국인들의 믿음은 거의 절대적인 신앙에 가깝다. 시장 성장주의자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이어서 국가 성장주의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다는 문재인 정부마저도 국민 성장과 소득 주도 성장을 말한다. 도대체 왜 한국인은 이렇게나 성장하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왜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성장을 갈망하는가? 성장하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혈족적 민족주의는 일상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사회는 이주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주여성이 한국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을 분석해보면 그 답이 나온다. 결국 이주여성은 남성 가부장의 혈족 재생산 프로젝트와 연결되어야 한국사회에 편입될 수 있다. 이러한 혈족적 민족주의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고 그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 또 거기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몇 년 전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나는 꼼수다-가카 헌정 방송>은 어떻게 사라졌을까? 네 ‘잡놈’이 골방에서 시시덕거리던 이야기가 수많은 청취자들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급속도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여기에서는 ‘비키니 사건’을 분석해보며 나꼼수의 하락 원인을 살핀다. 비키니 사건은 공연 과정 중에 우발적으로 한국사회에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등장을 알렸다. 그 이전에는 이런 캐릭터가 등장한 적이 없었으니 한국사회에 여러 말들이 오갔다. 한국사회에서 생물학적 여성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여자 말뚝이’의 출현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사회적 공연론을 통해 분석한 한국사회의 네 가지 자아성찰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최종렬 교수의 신간 《공연의 사회학》은 ‘사회적 공연론’을 통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구조를 파헤치는 책이다. 특히 한국사회가 집합의례를 통해 수행한 네 가지 자아성찰을 다룬다. 민주주의, 성장주의, 민족주의, 젠더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외쳤던 2016년 촛불시위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명박 정부의 한미 쇠고기 협정에서 촉발된 2008년 촛불집회를 통해 한국의 성장주의 담론을, 이자스민이 한국 시민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을 통해 한국의 혈족적 민족주의를, 나꼼수의 ‘비키니 사건’을 통해 한국의 젠더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이 네 가지 자아성찰을 통해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공연론의 뿌리는 고전사회학의 아버지 중의 한 명인 뒤르케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르케임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시부족이 행하는 집합의례를 분석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속된 세계에서 일상을 살아가다가, 위기나 영광 같은 문제적 상황이 발생하면 같이 모여 집합의례를 행함으로써 이 상황을 해소한다. 집합의례를 통해 집단은 자신이 처한 문제적 상황을 정의하고 해명한 뒤 다시 일상의 질서로 돌아간다. 뒤르케임의 뒤를 이어 빅터 터너, 제프리 알렉산더 등은 현대에 와서도 사람들이 ‘사회적 공연’을 한다는 것을 밝혔다. 사회적 공연론은 현대사회가 아무리 상품화, 탈성화, 탈주술화된다고 해도 의례와 상징이 사회적 삶에서 행하는 의의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사회가 고도로 분화될수록 사회적 삶은 의례와 상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적 공연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개인에게 자아가 있듯이 사회에도 자아가 있다. 일상에서 사회의 자아는 먹고사는 경제 문제나 집합적으로 의사결정하는 정치 문제에 지향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를 근본적인 위기에 빠트리는 문제적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사회의 자아도 가치론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정녕 무엇인가?” 문제적 상황에 맞닥뜨린 한국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성찰했을까? “여기 펼쳐진 네 가지 사회적 공연은 한국사회가 공동으로 준거하는 공적 상징체계의 모습을 드러내줄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너무나 추레하고 비루해서 깜짝 놀랄 수도 있다. 한국사회의 자아가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나 자괴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쉽게 좌절하거나 혐오와 냉소에 빠질 필요는 없다. 사회적 공연을 거듭하다보면 더 많은 타자를 끌어안을 수 있는 더 보편적인 대본이 다듬어지고 배우와 관객도 한층 성숙해지기 마련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한국인 모두 잠깐만이라도 일상의 삶을 멈추고 한국사회의 자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계기가 되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민주주의: 한국은 어떤 민주주의 나라인가
2016년 촛불집회 때 수백만의 한국 시민들은 광장으로 뛰어나와 한목소리를 냈다. “이게 나라냐?” 계급, 젠더, 나이, 지역, 교육, 직업, 지위, 종교, 몸, 섹슈얼리티 등 지금까지 한국인들을 갈라놓았던 온갖 사회적 범주들을 뛰어넘어 너 나 할 것 없이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뛰쳐나온 것일까?
1장은 2016년 촛불집회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찰한다. 극도로 세속화되고 고도로 분화된 한국사회를 가치 차원에서 결속시키는 성스러운 중심은 시민 영역이다. 시민 영역은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 성과 속의 담론구조로서 보편적 연대를 가능하게 만든다. 2016년 촛불집회는 시민 영역의 성스러운 상징의 구체적인 아이콘인 대통령 박근혜를 중심으로 벌어진 사회적 공연이다. 이 공연은 보편적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주의 코드를 대본으로 해서 벌어졌는가? 2016년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담론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일상의 삶에 깊이 새겨져 있는 유교주의 담론까지 활용하여 벌어진 사회적 공연이다.
한국인들은 상황에 따라 어떨 때는 민주주의 담론을 또 다른 때는 유교주의 담론을 활용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러다가 두 담론이 충돌하게 되면 민주주의와 유교주의의 대동사회 이상이 모두 해를 입는다. 특히 군사주의로 왜곡된 유교주의 담론이 민주주의 담론을 무력화시키면 그 폐해가 막대하다. 반대로 민주주의 담론과 유교주의 담론이 서로를 강화하여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기도 한다.
시민사회의 제도에 대한 불신이 극심한 한국사회에서 제도를 민주적으로 조절하는 힘은 두 담론의 시너지 효과에서 나온다. 민주주의 담론과 유교주의 담론은 각 담론이 지닌 이상적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 현실을 교정하는 ‘초월적 윤리 언어’로 만난다. 한국인들이 이러한 초월적 윤리 언어를 사용하여 행위의 ‘동기’를 정당화할 경우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해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발전한다. 이 경우 민주주의 담론이 유교주의의 대동사회 이상을 더욱 민주적으로 만들고, 유교주의 담론이 한국 민주주의를 더욱 대동사회의 이상에 근접하도록 만든다.
성장주의: 왜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성장을 갈망하는가
2008년 4월 17일 이명박 정부가 미국 정부와 맺은 한미 쇠고기 협정에서 촉발된 촛불집회는 그해 초여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당시 2개월 동안 총 200여만 명이 참여하는 총 59회의 촛불집회가 열리리라는 걸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한국인들은 왜 광장에 나왔고, 무엇을 주장했는가?
2장은 2008년 쇠고기 촛불집회를 통해 성장주의에 대해 성찰한다. 한국인은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모두 성장을 열렬히 갈망한다. 촛불집회에서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성장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장을 추구하는 방식을 조절하는 규범을 위반했기 때문에 광장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 전체를 위해 성장을 이끈다고 했지만, 대통령이 된 후 그가 성장을 추구하는 ‘방식’은 국민들이 보기에 자신들을 무시하는 오만한 것으로 보였다. 강력한 평등주의를 지닌 한국인들은 이명박 대통령마저도 굴곡 많은 한국사를 함께 통과해온 한 명의 동등한 동료로 본다. 그런 그가 한국사회의 온 열망인 성장을 가져온다고 했을 때 한국인들은 모두 열광하며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 이명박이 성장의 과실이 일부 소수자의 것인 양 오만하게 행동한다. 그러니 성장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해 혼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운동론의 관점으로 보면 촛불집회의 결과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이루어낸 실질적 성과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협정문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은 채 민간 자율로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을 막는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광우병 특정 위험물질(SRM)에 대한 안전권도, 검역 주권도 해결된 것이 없었다. 민영화도, 대운하 사업도 막지 못했다. 민영화는 선진화로, 대운하 사업은 4대강 살리기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실행되었다. 그럼에도 이 싸움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도대체 한국사회가 성장하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성장하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나 성장에 매달려서 고작 생존하고 유용성을 축적하기 위해서인가? 그러다가 죽어 사라지면 그만인가? 그것이 두려워 자식이 필연성의 노예로 떨어지지 않도록 또는 유용성을 충분히 누리도록 가진 모든 것을 혈족에게 세습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인가? 쇠고기 촛불집회는 이 질문을 던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성장하는 이유는 필연성과 유용성의 세계를 벗어나와 탁월성의 세계로 가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그 세계에서 행위하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을. 조만간 한국인은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물을지도 모른다. “한국사회는 이미 충분히 성장했다. 그런데도 행위하는 자유인이 보편화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민족주의: 이주여성은 어떻게 한국사회에 편입되는가
한국사회에 이주자가 급증하면서 이주자 사회 통합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이주여성은 한국 국민의 재생산 도구로서 가부장적 핵가족 안에서 살아가야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에스닉 섹슈얼리티라는 저열한 ‘사회적 형식’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한국사회의 성원으로 살 수 있다.
3장은 이주자가 한국사회에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민족주의를 성찰한다. 이주여성 이자스민은 에스닉 섹슈얼리티라는 저열한 사회적 형식을 뚫고 멜로드라마 장르의 사회적 공연을 통해 한국 시민사회에 진입했다. 시민사회의 제도 중 하나인 미디어에 등장한 이자스민은 전통적인 코드를 통해 성스러워진다. 자신보다 공동체를 먼저 고려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려 하며, 생산적으로 활동하면서 공동체를 보존하려 한다. 이때 이자스민에게 최고의 공동체는 가족이다. 시민사회로 나왔음에도 여전히 비시민사회인 가족의 성원으로서 평가받는 것이다. 이자스민은 또한 가부장적 한국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지니는 환상, 즉 ‘지적이고, 성적이며, 희생적인 여성상’을 모두 충족시킨다. 이주여성이 한국사회의 시민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모두 비시민사회적 속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셈이다. 국민국가는 남편을 잃고 열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이자스민에게 보상함으로써 작게는 이주여성 전체, 크게는 한국 여성 모두에게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국민을 재생산하는 데 쓰라고 부추긴다.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이자스민은 결국 국회의원으로 보상받는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된 후 이자스민은 한국의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보편적 연대를 추구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 관객으로부터 민족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찍히지만 역설적으로 민족과 국가의 자연적 연계를 흩뜨려놓는다. 이러한 이자스민의 삶의 행로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열녀의 희생을 토대로 해서 완결성을 보장받는 ‘남성 혈족적 민족주의’라는 점을 명확히 드러내준다. 이자스민의 사례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친밀성 영역에서 효를 실천하는 것이 곧 국민국가에 대한 충의 실천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효는 가부장의 혈족을 재생산하는 것이며, 이는 곧 국민국가의 성원을 재생산하는 것과 같다. 이자스민은 혼인을 통해 법적으로 한국의 국민이 되었지만, 가부장의 혈족을 재생산하는 효를 실천해야만 비로소 시민사회에 진정한 국민으로 편입될 수 있다. 대한민국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남성 혈족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 민족주의의 본모습이다.
젠더주의: 여자 말뚝이, 어떻게 할 것인가
4장은 2012년 벌어졌던 ‘나꼼수 비키니 사건’을 통해 젠더주의를 성찰한다. 나꼼수 비키니 사건은 서울 구치소에 수감된 정봉주 전 의원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던 중 우발적으로 한국사회의 젠더주의를 전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보수와 진보 모두 여성이 공적 영역에 성적 대상으로 출현해서는 안 된다는 젠더주의를 공유한다. 하지만 관능을 희화화하고 풍자의 도구로 사용하는 여자 말뚝이가 출현함으로써 이러한 젠더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여자 말뚝이는 섹슈얼리티는 남성 혈족의 재생산을 위해 가족 안에만 있어야 한다는 성기 중심의 이성애적 가족주의를 해체시킨다. 성장하려고 해도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시대에 이성애 중심의 섹슈얼리티에 갇혀 있던 에로티시즘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번져나가고 있다. 에로티시즘에 빠지는 순간 일상의 삶에서 합리적 자아로 나뉘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의 융합된 세계로 소멸되는 체험을 한다. 이는 신성의 체험이기도 하지만 두려운 체험이기도 하다. 자신의 합리적 자아를 타자와의 연속성 속에서 소멸시키는 엄청난 에너지 소모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꼼수 비키니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회적 공연은 여자 말뚝이가 남성 성기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던 에로티시즘을 풀어헤쳐 다양한 형태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는 선구자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여자 말뚝이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에로티시즘과 성聖이 하나라는 인간 실존의 진실과 마주치게 만든다. 여자 말뚝이가 남성 성기 중심의 섹슈얼리티를 탈본질화시켜 실존적 상황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여자 말뚝이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성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를 넘어서 인간의 실존과 마주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목차
프롤로그
1장. 민주주의: 한국은 어떤 민주주의 나라인가
촛불집회는 시민 영역으로 진입하는 탑돌이다
대통령은 성스러운 상징의 구체적 아이콘이다
시민사회의 담론구조는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나
멸사봉공 정신으로 국정에 임하다
“대통령이 아바타라네요”
아랫것들이 없으면 꼼짝도 못한다
“최씨 집안밖에 없죠”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제도를 불신하는데도 어떻게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이름을 바로잡다
2장. 성장주의: 왜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성장을 갈망하는가
새로운 주체가 출현했다고?
보수와 진보는 코드를 공유한다
생각대로 하면 되고
“어른들이 너무 밉습니다”
“미친 소는 청와대로!”
“쥐를 잡자, 찍찍찍”
국민 MT, 6월항쟁으로 프레임되다
비극 장르가 지배하다
한국인은 왜 성장에 목매는가
3장. 민족주의: 이주여성은 어떻게 한국사회에 편입되는가
이주여성, 시민사회에 편입될 수 있나
멜로드라마, 이주여성을 품다
나는 가족인이다
“첫눈에 반했어요”
“엄마가 달라졌어요”
열녀, 셀럽이 되다
에스닉 섹슈얼리티, 국회의원이 되다
이방인, 국민국가를 이지러트리다
효와 충은 하나다
4장. 젠더주의: 여자 말뚝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꼼수다
“양반의 새끼는 개새끼도 욕 안 할랍니다”
나꼼수는 현실 질서 밖으로 밀려난 루저다
여성, 적극적인 관객으로 나서다
팟캐스트는 감성 공론장이다
“가슴이 터지도록 나와라, 정봉주”
성의 대상화는 성의 착취다
여자 말뚝이가 나타났다
섹슈얼리티는 가족 안에 있어야 한다
에로티시즘과 성聖은 하나다
에필로그
보론: 사회적 공연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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