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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의 시선: 연대보다 강력한 느슨한 연결의 힘

개인저자
김민섭 지음
발행사항
서울 : 인물과사상사, 2019
형태사항
251 p. ; 21 cm
ISBN
9788959065424
청구기호
304 김39ㄱ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7519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7519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우리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를 넘나들며
개인과 사회에 물음표를 던지다”


2015년 ‘309동 1201호’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서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삶, 대학 사회의 적나라한 민낯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당시 ‘309동 1201호’는 현직 대학 시간강사였다. 저자는 자신이 대학에서 보낸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하고 우리 시대의 ‘각자도생’의 시간을 보내며 ‘노오력’하는 청춘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했다. 그 후 대학 바깥으로 나온 저자는 ‘김민섭’이라는 본명으로 『대리사회』를 썼다. 김민섭은 이 책에서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한다. 대리사회에서 우리는 신체와 언어의 주인이 아니고, 사유까지도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고 있었다. 타인의 운전석이라는 ‘을의 공간’에서 말과 행동이 통제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한국 사회의 천박한 욕망을 대리하고 있었다.
김민섭은 자기 자신을 경계인으로 규정한다. 2015년 당시 대학에서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로 있으면서 중심부도 주변부도 아닌 완전한 경계에 자리하고 있었다. 교수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자신을 노동자나 사회인으로 여기기에도 어려웠다. 그런 어중간하고 어정쩡한 자신이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필연적인 물음표에 도착하게 되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규정을 하며 삶의 의미를 획득해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과 닮은 타인의 삶을 살피고,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시스템이 가진 균열을 목도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개인 중에서 ‘청년’은 그 이름만으로도 가장 경계에 자리하는 경계인이다. 청년을 수식하는 단어는 꿈, 미래, 열정과 같은 설레는 것들이지만 동시에 모호하다. 청년은 미래를 선도하는 주체에서 과거에 견인되는 피주체로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N포 세대’가 된 이들의 결혼, 취업, 출산 등의 포기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구조적 저항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들은 개인적 문제에서 구조적 문제로서 자신들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김민섭은 『경계인의 시선』에서 연대보다 강력한 ‘느슨한 연결의 힘’을 말한다. 여기에서 연결은 기성세대가 감각하는 ‘연대’와는 결이 다르다. 청년들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기를 바란다.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구호를 외치고 어깨동무를 하는 연대가 아니라, 어느 한 가지를 매개로 이어져 있으면 그만이다. 취향이나 지향이 비슷한 타인과 만나고 그들의 개인 정보를 묻는 일을 금지한다. 하나의 깃발과 구호 아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으로서 자신과 타인을 감각하면서 하나의 실체가 없어 보이는 조직을 움직여나간다. 이것이 최근의 청년들이 보이는 가장 큰 세대적 특성이다. 사실 완벽한 중심도 주변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경계인이다.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우리는 경계인으로서 타인을 감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정의롭지 못한 대학을 고발하다

한국의 수많은 대학에서 대학생과 대학원생은 여러 공간에서 노동을 한다. 각 부처에서 ‘근로장학생’이나 ‘조교’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단 행정노동자로 존재한다. 그런데 노동하는 학생들에게 임금이 제대로 지급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 대신 등록금의 일부가 감면되거나 근로장학금 명목으로 돈이 지급된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사회적 안전망, 즉 최저시급?주휴수당?4대 보험?퇴직금 등 세상의 상식은 무시된다. 이것은 위법은 아닐지라도 편법이다. 법의 느슨한 지점을 이용해 그 경계를 넘나들며 벌이는 비열한 행위다. 모든 학생은 강의실에서는 학생이고 노동의 현장에서는 노동자다. 배움의 주체로서 학업에 필요한 아낌없는 지원을 받는 동시에 노동의 주체로서 온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대학은 이들을 학생으로도, 노동자로도 바로 설 수 없는 유령으로 만들고 있다.
시간강사법은 2011년 12월 국회를 통과하고서도 그 시행이 몇 차례에 걸쳐 유예되다가, 2019년 8월부터 시행되었다. 이것은 1년 이상 고용 보장, 건강보험 보장, 방학 중 임금과 퇴직금 지급 등 시간강사의 처우 개선을 담은 법이다. 그 취지는 좋으나, 결과적으로 시간강사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악법으로 전락했다. 전국 420개 대학·전문대학 가운데 약 20퍼센트인 76곳이 2018년보다 교원이 50명 이상 감소한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학들은 시간강사들을 대학의 유령으로 만들어버렸다. 시간강사는 대학이라는 구조 안에서 절대적 약자이자 ‘법이 버린 존대’다. 한국의 대학들은 오랫동안 시간강사들을 구조적으로 착취해왔는데,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위하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면서 안타까운 현실이다.
2018년 2월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대학원생노조)이 출범했다. 대한민국에 대학원생 제도가 생긴 이래 가장 상징적이고 급진적인 사건이다. 당사자들은 “우리는 학생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다”라고 선언하고, 대학 측과 단체교섭이 가능한 조직체를 만들었다. 몇 년 전부터 교수와 대학원생의 ‘갑을관계’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2015년 인분 교수 사건, 2017년 서울대 팔만대장경 스캔 노예 사건 등 대중의 공분을 산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대학원생노조가 가진 가장 큰 힘은 당사자성에 있다. 현직 대학원생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든 전국 단위의 조직이기에 당위성이나 진정성도 강력하다. 당사자가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이지 않으면, 그를 둘러싼 문제들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대학원생노조는 대학원생들의 삶을 변혁시킬 수 있는 거점으로 거듭날 것이다.

청년을 이해한다는 것

웹툰에는 오늘을 읽어내는 힘이 있다. 더불어 웹툰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직접 창작자이자 향유자로 나서고, 자신들이 바라보는 사회를 그대로 그려낸다. 웹툰은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적합한 읽을거리가 되었고, 한국 사회의 가장 젊은 감각과 실재를 촘촘히 드러낼 수밖에 없다. 웹툰은 젊은 세대들에게 하나의 ‘생활’로 자리 잡았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생활 텍스트’로 자연스럽게 곁에 두고 읽게 되었다. 2012년 <미생>이 그랬고, 2017년 <팀장님 만화>가 그랬다. <미생>도 <팀장님 만화>도 그 시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동시대를 실시간으로 반영하거나 다가올 시대를 예비했다. 웹툰을 비롯한 서브컬처 장르들이 시대적으로 갖는 가장 큰 가치는 그것이 젊은 세대를 이해하게 해준다는 데 있다.
수많은 청년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취업이 잘 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취업을 포기하기에 연쇄적으로 연애, 결혼, 출산, 육아, 주택 등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88만원 세대’를 넘어서 무급 인턴마저 스펙이 되는 시대가 왔다. 누가 취업했다고 하면 인턴인지, 비정규직인지, 정규직인지 확인해야 한다. 취업을 앞둔 청년들의 간절함, 두려움, 조급함의 크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취준생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혹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어느 세대보다도 빨리 ‘꼰대’가 된다. 성장이 정체된 한국 사회에서 취업과 생존을 위한 가혹한 경쟁을 해온 지금의 청년세대는 거기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어떤 보상 심리를 간직하게 된다. 지금의 청년세대는 그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아재’와 ‘꼰대’가 될 사회적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

타인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들

개인의 분노는 글쓰기로 전이될 때 무척 큰 힘을 가진다. 고백이나 고발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은 독자들에게 쉽게 분노를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그 파급력은 엄청나서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공론화에 이르지 못하고 개인의 분노에 머물게 된다면, 그 분노는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 대신 증오로 발전하고, 개인들에게 단절·폐쇄·고립 등의 근거를 제공하게 된다. 우리는 개인의 분노를 사회적 분노로 확장시키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해야 한다. 증오는 모든 자리를 폐허로 만든다. 모든 문제를 현상으로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고 격리시킨다. 분노사회는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되지만, 증오사회는 사회를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어느 공간에나 발화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 직위, 성별, 세대 등이 그것을 결정하기 마련이어서, ‘성실하게’ 살아온 한국 사회의 50대 남성들은 대개 대화의 지분을 조절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독점할 것인지, 적절히 분배할 것인지, 완전히 양보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도,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도, 평범한 술자리나 독서모임 같은 데서도 자주 벌어지는 모습이다. 어느 공간에서 ‘말’을 점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욕구와 연결된다. 그들은 자기 서사를 강요하면서 타인들을 대리기사 같은 주변적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아재들은 자신의 권력에 대해 조금 더 검열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금껏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온 세대는 별로 없다. 이제 아재들도 타인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타인의 말을 듣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2017년 8월 최영미 시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월세 계약이 만기되어 집을 비워야 할 처지가 되었고, 그래서 “방 하나를 1년간 사용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홍보대사가 되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서교동의 아만티호텔에 보냈다. 그러면서 “그냥 호텔이 아니라 특급호텔이어야 한다. 수영장 있음 더 좋겠다. 아무 곳에서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라는 내용을 덧붙이기도 했다. 최영미 시인은 가난하다. 그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고 다른 전업 작가들은 더욱 가난하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시인과 소설가뿐만 아니라 번역가, 연구자, 저술가, 음악을 하는 이들도 미술을 하는 이들도 대개는 가난하다. 이름 없는 창작자들이나 젊은 연구자들의 생계는 가혹하다. 그들은 ‘가난을 강요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천주희 작가는 ‘느슨한 연대’를 주장했다. 평소에는 잘 알 수 없지만 어떤 일이 있어 잡아당기면 비로소 팽팽해지는, 느슨하지만 결국 연결되어 있는, 그래서 곧 만날 수 있는 그러한 관계가 있다. 그는 연구자뿐 아니라 모든 독립예술가가 4대 보험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국가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로든 ‘조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자를 비롯한 독립 예술가들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뿐만 아니라 비슷한 부류의 집단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우선은 기준을 만들고 합리적인 제도를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은 적어도 여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외침이 될 것이다. 결국 인식과 제도의 문제다. 굳이 선행과 후행을 따지자면, 제도가 그 앞에 와야 할 것이다. 제도라는 것은 가장 위부터 아래까지 균등하게 닿아야 한다.
최영미 시인은 ‘아만티호텔’ 사건을 통해 우리시대 시인의 가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어쩌면 그는 ‘아만티호텔’이라는 신작시를 발표한 것이다. 그 시는 그가 혼자 쓴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자가 되고 나아가 저자가 된 평범한 우리가 함께 써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 모이면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무엇과도 경쟁할 수 있겠다는 자존감, 그러한 감각들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나’에서 ‘너’로, ‘너’에서 ‘우리’로, 그러니까 개인에서 사회로 자연스럽게 물음표가 확장되는 것이다. 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게 된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함께 이 사회를 바꾸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무엇을 바꾸기 위한, 오늘 혁명을 하기 위한 투쟁이어서는 안 된다. 오늘만 광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면, 자신의 광장에서 이미 N개의 촛불을 켜고 기다려온 사람들이 있음을 쉽게 잊게 된다. 청소년이, 여성이, 성소수자가, 장애인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리고 소외의 언어조차 부여받지 못한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저마다의 광장에 존재한다. 우리가 상상해야 할 ‘우리’는 아직도 너무나 많다. 연대는 그러한 이들을 기억하는 것,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한 느슨한 형태의 지속적인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목차

추천사 ․ 6
머리말 ․ 8

제1장 대학은 정의로운가? : 위법과 편법의 경계에서

대학과 교수와 조교 ․ 17
위법과 편법 | “총장과 이사장을 고발하고 싶습니다” | 조교라는 정체불명의 직함 | 을과 을의 싸움 | “왜 교수들은 침묵하는 겁니까?”

교수님들의 자화상 ․ 30
교수와 대학원생의 ‘갑을관계’ | 24시간 풀로 대기해야 하는 조교 | 교수님 대리운전 하는 노동자 | ‘괴물’이 된 대한민국의 교수들

대학에 인권과 민주주의는 없다 ․ 45
대학의 전횡에 맞선 싸움들 | 대학, 촛불을 들다 | 투기 자본과 대학의 ‘판돈’이 된 학생들 | “기업화라도 제대로 하라” | 법이 버린 존재, 시간강사

대학원생은 왜 노조를 설립했는가? ․ 59
대학원생은 학생이면서 노동자다 | 조명탑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한 대학원생 | 월 48만 원을 받는 ‘TA 제도’ | 대학원생과 시간강사는 절대적 약자 | 자신의 삶을 변혁시킬 수 있는 거점

사과하지 않는 선배들 ․ 74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 | “당신은 왜 여기에 있어요?” | “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합니다” |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다 | ‘추억’하지 않고 ‘기억’하기

염치를 아는 대학이 되기를 ․ 86

제2장 청년에게 말걸기 : 청년과 아재의 경계에서

몸으로 쓰는 언어의 힘 ․ 93
글은 스터디가 아니라 삶이다 | ‘공부 잘하는 놈’의 고백 | ‘그냥’ 버스기사의 고백 | 우리는 만나게 된다

오늘을 읽어내는 힘 ․ 105
주류를 지탱하는 무수한 비주류 | 생활 텍스트가 된 웹툰 | 동시대를 반영하거나, 미래를 예비하거나 | 고백은 손짓이다

젊은 꼰대의 탄생 ․ 119
‘취준생’을 마주한다는 것 | 정규직에 목숨 거는 신입사원 | “언제부터 꼰대가 되었습니까?” | 누구나 어제보다 꼰대가 된다 | 조직의 논리에 동화되는 괴물

어른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 133
어른이 된다는 건 너무나 피곤한 일 | 재능 기부라는 언어 권력 | “더치페이하는 게 편해요” | “제발 꼰대가 되어주세요”

광장과 월드컵 ․ 146
내가 겪은 한국 현대사 | 거리에서 응원을 한다니 | “제가 술을 한잔 사도 될까요?” | 500만 명이 모이다 | 몸에 새겨진 역사

살아보니 돈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더라 ․ 161

제3장 연대하는 사회 : 느슨함과 긴밀함의 경계에서

분노의 글쓰기, 증오의 글쓰기 ․ 167
증오사회를 고찰하다 | 분노인가, 증오인가? | 숭고한 애도 | 증오는 모든 자리를 폐허로 만든다

타인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 182
타인의 운전석에 앉는다는 것 | 발화 권력을 가진 존재들 | 젊은 대리기사를 찾는 손님들 | “연탄가스 마셔 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않겠다” | 타인의 말을 듣는 연습

작가는 왜 가난한가? ․ 199
최영미 시인은 가난하다 | 가난을 강요받는 삶 | 느슨한 연대 | 우리시대 시인의 가격

책을 둘러싼 모험 ․ 216
책은 ‘쓰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 초보 작가와 편집자 | 작가와 편집자,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까? | 독자는 작가의 삶의 궤적을 좇는다 | 사람들아, 책 좀 사라

그해 겨울, 우리는 광장에 있었다 ․ 236
100만 명의 나와 만나는 심정 | ‘산책’에 자괴감이 든 사람들 | 누군가에게는 이미 일상이 ‘식민지’다 | N개의 촛불을 들고 광장에 서다 | “우리, 여기에 있다”

참담한, 자본의 애도 ․ 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