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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없는 판타지: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발행사항
서울 : 후마니타스, 2020
형태사항
600 p. ; 23 cm
ISBN
9788964373484
청구기호
337.2 오94ㅇ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8390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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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8390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의 변곡점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쉼 없이 양산되는 페미니즘 논의 속에서, 대중은 일종의 커밍아웃과 아웃팅을 반복하면서 더 정교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페미니스트 정체성(노선)을 업데이트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2018년의 강좌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서울시여성가족재단 공동 주관)는 2015년 메갈리아 현상과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및 ‘#◌◌계_내_성폭력’ 운동, 2017년 ‘#미투’ 운동을 거치며 “페미니즘이 문화비평의 핵심적인 인식틀로 부상”한 시기에 기획됐다. 총 10회로 이뤄진 강연은 여러 장르와 매체에 걸쳐 왕성히 활동해 온 작가, 비평가, 연구자가 강사로 참여해, 한국 현대문화사의 변곡점을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들춰내고 페미니즘의 최신 논의들과 접목해 내는 반가운 기획이었다.

『원본 없는 판타지』(부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는 이 강연을 바탕으로 다시 쓰인 10편의 글과 새롭게 더해진 4편의 글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 영화, 미술, 대중잡지, 대중가요, 로맨스소설, 순정만화, TV 드라마, 동인지, 소셜미디어, 팟캐스트, TV 예능, 디지털게임 등 온갖 장르와 매체를 넘나드는 14편의 글을 통해, 당대의 문화적 서사가 지금 이곳의 페미니즘 문화비평에 어떤 ‘말 걸기’를 시도하고 있는지, 때로 모순되고 상충했던 주체들의 욕망은 각자의 시대적 입지 조건 속에서 어떻게 진화하거나 탈화했는지, 들여다보게 된다.


‘불투명한 아카이브’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일,
낯선 ‘정황’들의 드러나지 않은 ‘맥락’을 끈기 있게 상상하는 일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인해 가능하고,
‘페미니스트 되기’의 실천이 되는 것들


이 책은 ‘한 권으로 읽는’ 류의 모든 것을 망라한 ‘문화사’라거나 한눈에 흐름을 꿰는 ‘정연한’ 문화사가 아니다. 책을 기획한 문학연구자 오혜진은 서문에서 이 책이 “문화‘사’의 언어와 규범으로 쉬이 포착·해석되지 않는 존재·사건·실천들의 흔적”을 보관한 “작은 서랍장”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그는 각 글의 주제와 소재, 방법론이 해당 분야에서 “학문적 시민권이 발부되지 않은 것들”임을 강조하면서, 기존 학계에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적 없는 ‘싸구려’ 콘텐츠와 범상한 일반명사”들을 “역사적·비평적 함의가 간직된 ‘텍스트’이자 ‘개념어’로 만드”는 과정 자체가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인해 가능했고, ‘페미니스트 되기’의 실천이 되었다고 말한다.

>> 이 책은 특정 목적과 체계, 방법론에 의해 서술되는 정연한 ‘문화사’는 아니다. 오히려 문화‘사’의 언어와 규범으로 쉬이 포착·해석되지 않는 존재·사건·실천들의 임의적·파편적·산발적인 흔적들이 보관된 작은 서랍장에 가깝다. 우리는 성별·성정체성·성적 선호, 공과 사, 상징과 실제, 가상과 현실, 윤리와 폭력의 경계들을 흐릿하게 만들거나 무화시키는 그 거듭된 ‘수행’(performance)의 장면들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확언’하지 않는다. 다만, 비규범적이고 묵시적인 실천의 자취들로 점철된 ‘역사 아닌 역사’, 이 불투명한 아카이브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일, 여기 부려진 낯선 ‘정황’들의 드러나지 않은 ‘맥락’을 끈기 있게 상상하는 일,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비로소 ‘페미니스트‒되기’를 실천하고 있었다는 점만은 명백하다. — 서문에서

>> 각 글들이 다루는 주제와 소재, 방법론들이 그간 해당 분야에서 ‘아직’ 혹은 ‘결코’ 학문적 시민권이 발부되지 않은 것들이라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 그것들을 매혹적인 학적 대상으로 조명하는 일 자체가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인해 가능했다. 우리는 기존 학계에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적 없는 수많은 ‘싸구려’ 콘텐츠와 범상한 일반명사들을 고유의 역사적·비평적 함의가 간직된 ‘텍스트’이자 ‘개념어’로 만들어 ‘페미니스트 지성사’에 등재시키고자 했다. — 서문에서

또 기존 문화사의 성적 배치를 기계적으로 자리 바꾸는 것을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유일한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게으르고 편협한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원대한 야심”이라고 밝힌다. 이런 자리/위치 바꾸기는 필연적으로 기존 지배질서와 전통을 ‘원본’으로 상정하게 하고, 도리어 본질주의를 강화하는 당착에 빠진다. 이때 모든 비규범적 욕망과 실천들은 ‘원본’에 대한 모방으로 간주되거나, 아니면 기존 역사와 무관하게 창출된 원본 없는 ‘원본’으로 주장됨으로써 탈역사화·탈맥락화된다.

>> 이 책의 가장 원대한 야심 중 하나는 기존 문화사의 성적 배치, 즉 남자와 여자,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의 위치를 그저 기계적으로 뒤바꾸는 것을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유일한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게으르고 편협한 사고를 단호히 물리치는 것이다. 그런 인식은 가부장제는 물론, 제국주의, 국민/국가주의, 자본주의 등 지배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모든 기이하고 번역 불가능한 비규범적 실천들을 오직 반대정치의 산물로 치부해 버린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기존 지배질서와 전통을 ‘원본’(original)으로 상정한 채 본질주의를 승인·수호하게 되는 자가당착을 수반한다. 또한, 모든 비규범적 욕망과 실천들은 ‘원본’에 대한 ‘모방’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거나, 기존 역사와 무관하게 창출된 ‘원본’이라고 주장됨으로써 탈역사화·탈맥락화된다. — 서문에서


미러링, ‘차이’를 드러내는 ‘반복’


1937년 독일의 나치는 동시에 두 전시를 열었다. 히틀러와 나치스가 인정하고 추앙하는 작품들을 선보인 <위대한 독일미술전>과 비난하고 금기하는 작품들을 모은 <퇴폐미술전>. 아방가르드 예술이 다수 포함된 후자의 전시에는 노골적인 비난 문구가 함께 전시됐고, 전시 후 작품 다수가 소각되거나 경매를 통해 해외로 반출됐다. 미술기획자 안소현은 1937년 독일의 <퇴폐미술전>을 패러디한 2016년 한국의 <퇴폐미술전> 전시를 통해, ‘폭력을 흉내 내는’ 일련의 예술 작업이 작가, 관객, 큐레이터에게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작용했는지를 돌아본다. 그는 ‘폭력의 언어’와 폭력성을 고발하기 위해 고안된 ‘폭력을 흉내 내는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 고민한 끝에 단순히 혐오의 강도를 높여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전략으로 새로운 ‘차이’를 드러내는지가 ‘페미니스트 미러링’의 관건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글의 시작과 끝에 언급되는 룩셈부르크의 행위예술가 데보라 드로베르티의 <기원의 거울>(2014) 퍼포먼스는 저자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미러링의 한 예다. 여성의 성기를 그린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1866)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여성의 성기를 보인 드로베르티의 퍼포먼스는 여성의 것을 남성의 것으로 단순히 대체하는 방식이 아니라, 쿠르베 작업을 둘러싼 모순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인 내레이션과 음악을 배치해 자신의 메시지가 ‘읽히게’ 만들었다.

>> …… 이 모든 반복을 수행하는 일에 예술, 특히 동시대 미술이 특권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간 예술가에게 혐오의 언어가 ‘예술적 자유’라는 미명하게 손쉽게 허용돼 왔다는 부정적인 면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지만, 동시대 미술에서 비규범적이고 반체제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예찬의 대상으로 읽힐 만큼 강한 선재적 맥락이 작동하고 있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이 두 가지는 항상 동시에 작동해 왔다. 우리는 예술이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가정된 하나의 장(場)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관객은 ‘동시대 미술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제스처를 통해 발언한다’라는 암묵적 전제에 동의한 상태에서 전시장으로 들어간다. ‘예술’이라는 장에서 행해지는 ‘모방된 폭력’은 바로 이런 가정하에 허용돼 왔고, 그로 인해 좀 더 섬세한 발언의 맥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글 서두에 언급한 행위예술가 드 로베르티의 동작이 단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간 미술관이 얼마나 남성 편향적인 관점을 신화화해 왔는지를 단번에 드러내는 선명한 메시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배치한 장치들을 읽어 낼 준비가 이미 관객에게 충분히 돼 있었기 때문이다. — “‘예술에 대한 폭력’과 ‘폭력을 흉내 내는 예술’”에서


퀴어링,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한 도전과 실천

1980년대 가수 ‘이선희 신드롬’과 ‘톰보이’ 여성가수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한국 사회를 퀴어링했는지 살피는 퀴어문화운동 활동가 한채윤의 글은 무대 안팎에서 ‘치마를 입지 않는 이유’를 끊임없이 질문 받았던 가수 이선희의 황당한 순간들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성=치마’ ‘남성=바지’ 라는 공식에 따라 거듭되는 이 질문은 ‘자기다움’을 유지하려는 가수에게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통념에 순응하라는 압력으로 작동한다. 한채윤은 이선희, 이상은 등이 당대의 성별규범을 어기고도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에게 ‘성인이 되지 않은 소년’ ‘건전한 소녀’로 여겨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근래까지도 가수 엠버의 외모를 두고 성별 논란을 운운한 것은 ‘진짜’ 여성이 남성처럼 보이는 외모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가 남자라고 착각하는 ‘가짜’ 남성이거나, 다른 여성에게 어필하려는 동성애자의 ‘전략’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라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2010년대 비규범적 스타일을 고수하는 가수에게 그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괴롭히는 세간의 모습은 1980년대 당대 최고의 자리에 오른 가수에게 ‘언제 치마를 입을 거냐’는 질문을 반복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한채윤은 ‘톰보이’ 여성가수들의 ‘퀴어’한 욕망과 실천이 ‘(이성애자) 남성’에 대한 ‘모방’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하며, ‘퀴어링’이란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자기다움’에 두고,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한 도전과 실천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 ‘퀴어’(queer)는 단지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 더 등의 정체성을 규정하거나 이 정체성들을 하나로 묶어 호명하는 단어가 아니다. 퀴어는 이분법적 성별규범에 맞춰 살라고 강제하는 사회적 요구에 순순히 따르지 않고, 삶의 가장 중요한 기준을 ‘자기다움’에 두는 것, 좀 이상하다고, 남들과 다르다고 끊임없이 지적을 받아도 굴하지 않는 것, 즉 세상을 다르게 보는 시각이자 행동, 그리고 힘이다. — “‘톰보이’와 ‘언니부대’의 퀴어링”에서


소녀시장, ‘시장’이자 ‘광장’이 되다

여성학연구자 김애라는 패션·뷰티 상품을 중심으로 형성된 10대 여성들의 ‘소녀시장’이 ‘페미니즘’이라는 언어의 공유를 통해 ‘광장적 공간’이 되어 간 과정에 주목한다. ‘#스쿨미투’, 혜화역 시위, 탈코르셋 운동 등에 참여한 10대 여성들은 각종 고발거리를 찾아 인증하고, 이를 온라인에서 유통하며, 특정 이슈를 공론화한다. 또 자신의 운동 참여를 다양한 미디어 재현을 통해 인증함으로써 또래들이 참여하도록 홍보하고, ‘화력’ ‘총공’이라는 그들만의 유례없는 운동방식을 동원한다. 김애라는 10대 여성들의 “인플루언서를 만들고, 팬덤을 형성하고, 다양한 소비상품을 ‘대세’로 만들어 본 경험”이 온라인 담론장에서 어떻게 이슈를 공론화하고 유통시키고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지를 학습하는 과정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한편에서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전시하거나 이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상품 정보를 또래 인플루언서에게 요청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페미니스트 언어로 무장한 10대 여성들이 ‘탈코르셋’ 인증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일이 동시에 벌어진다. ‘SNS’라는 시장이자 광장.” 이제 관건은 디지털자본주의의 문법을 일찌감치 터득하고 경제적 주체로 등장한 10대 여성들의 ‘시장’과 ‘광장’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능력 담론에 함몰되지 않고 계속해서 페미니즘과 접속하며 그들만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이다.

>> 놀이와 노동, 공과 사의 경계를 뒤흔드는 디지털자본주의는 적어도 10대 여성들에게 ‘소녀’라는 역할의 다양성을 제시하고, 극단의 정보들과 모순되는 의견들을 모두 청취할 수 있게 했다. 이런 디지털자본주의의 문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10대 여성들은 소녀시장을 거쳐 경제적 주체로 등장했고, 곧이어 광장적 공간을 창조하며 정치적 주체로 부상했다. 소녀들의 시장과 광장은 ‘10대 여성’ ‘소녀’라는 그들 존재와 의미를 공적 공간에서 어떻게 드러낼지 스스로 결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디지털자본주의의 인터넷 플랫폼은 특정 정체성 혹은 주체성의 치열한 대립과 공존을 빠르게 드러내고 있고, 소녀들은 이를 활용해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고 있다.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소녀’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하고, 그 내용
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 김애라, “SNS, ‘소녀’들의 시장 혹은 광장”에서


무대, ‘완전한 여성’은 아니지만 ‘분명한 여성’들의 드문 공간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한국에서 유행한 고고댄스와 소울·사이키 음악의 인기를 견인한 주체들은 소위 ‘시스터즈’로 불리던 여성그룹들이다. 이들의 주무대는 성매매와 ‘접객’ 문화, 그로 인한 성적 낙인이 교차하던 다양한 형태의 유흥업소였고, 그 문화와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대의 규범적 여성성을 강요받았던 여성가수들은 여성성을 과잉 재현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무대를 이어나갔고, 규범을 위반할 경우에는 여지없이 가십과 스캔들의 공세를 받았다. 업소와 무대에는 비규범적 성애·성별 실천자들 또한 존재했는데, 이들은 성매매여성들과 유사한 성격의 낙인을 경험하면서 여성성 수행의 당사자가 되었다. 역사학자 김대현은 당대 대중오락잡지와 신문 기사 등을 풍성하게 인용하며, 유흥업소 무대와 무대 바깥의 업소에서 활동했던 당대 여성들과 비규범적 성애·성별 실천자들의 궤적을 다각적으로 쫓는다.
흥미로운 몇 가지 장면. 가령 해외에서 활동한 여성그룹들에게는 “부디 성공하여 결혼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과 하라”는 모친의 말이 기사화되거나(김시스터즈), “아무래도 한국 남자들이 훨씬 미덥”다고 말한 인터뷰가 “한국 남성이 제일 좋다”는 제목으로 기사화되는(펄시스터즈) 등, 해외에서 활동하더라도 그들을 성적 대상화할 수 있는 것은 ‘한국 남성’이어야 한다는 발상이 따라다녔다. 또 1960년대 후반 크게 유행한 고고댄스, “노 터치 댄스”는 기존의 사교댄스에 비해, 파트너 없이(업소의 여성과 ‘터치’ 없이) 혼자 출 수 있는 춤이라는 이유로 건전한 춤으로 취급됐고, 열풍에 힘입어 1970년MBC 전속 안무가 김완률에 의해 창안된 국산 ‘노 터치 댄스’는 “굿거리(Good girl, 착한 여자) 춤”으로 명명됐다. 그러나 그해 12월 국가비상상태가 선포되면서 고고클럽은 문화공보부·내무부·법무부·보건사회부·문교부와 서울시 합동단속반의 대대적인 퇴폐풍조 단속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유흥 문화에 얽힌 성적 낙인들은 종종 냉전 체제의 심급으로까지 확장됐는데, ‘성매매 집결지’를 가리키는 “적선지대”(赤線池帶)라는 말은 홍등가의 풍경을 묘사하는 말이자 ‘빨갱이’와 연결되는 이미지였고, 워커힐 호텔 근처를 배회하는 성매매여성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를 의미하는 “유격창녀군”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김대현이 두 번에 걸쳐 소환하는 특별한 풍경 하나는 1965년 6월 25일 시민회관 무대에 오른 24세 “이영길 양”에 관한 것이다. 어릴 때 미군 상사의 양자로 입양돼 미국으로 간 이영길은 스스로 “전혀 남성임을 느끼지 못”해 “줄곧 여자 행세”를 한 것을 빌미로 양부로부터 버림받았다. 그녀는 스트립쇼에 출연해 돈을 벌다가 지정성별이 발각됐고, 현지 경찰에게 연행돼 한국으로 송환됐다. ‘그녀’를 시민회관이라는 큰 무대에 세운 것은 당대 인기 코미디언 서영춘. 영화 <여자가 더 좋아>(1965)에서 여장남자를 연기한 서영춘은 “완전한 여자”가 될 수 있도록 성전환 수술을 받는 것이 소원인 이영길에게 연민을 느껴 함께 무대에 올랐다. 공연이 끝난 후, 서영춘은 관객들에게 “이 아가씨는 완전한 여성은 아니지만 보시는 바와 같이 분명한 여성입니다. 이 아가씨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했다.

>> 유흥업소 무대와 무대 바깥의 업소에서 활동했던 당대 여성들과 비규범적 성애·성별 실천 당사자들은 성산업의 광범위한 저변과 성적 대상화, 섹스어필에 대한 냉전적 시선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여성성을 과잉 재현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지라도, 그녀들에게 ‘무대’는 모든 사회적 악조건과 소문들 가운데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서 우뚝 설 수 있는 드문 순간을 제공했다. 무대에서 느낀 ‘무언가가 해소되는 듯한 감동’은 무대 바깥의 온갖 억압의 중층들과 분리될 수 없었겠으나, 그 억압의 조건들은 거꾸로 그녀들의 무대를 더욱 절박하고 소중한 것으로 만들었다. — “워커힐의 ‘디바’에게 무대란 어떤 곳이었을까”에서


판타지, ‘현실로서의 판타지’ ‘판타지로서의 현실’


최근 페미니즘을 전제한 논의 안에서 ‘BL’(Boy’s Love, 보이즈 러브) 문화에 대한 입장이 옹호와 비판으로 나뉘고 있다. 옹호하는 이들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창작·소비하는 거의 유일한 장르이자 여성 중심의 출판시장이 형성돼 있다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반면 비판하는 쪽은 BL이 여성인물을 배제하고 남성인물에게 이입하게 만들며 현실 사회의 여성혐오를 반영한다는 점을 꼽는다. 문화인류학자 김효진은 이런 ‘탈BL’ 담론의 면면을 살핀다. 그는 콘텐츠 ‘소비자’인 독자의 입장만 있을 뿐, ‘창작자’인 작가의 동기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점을 우려하고, ‘표상’ ‘현실’ ‘판타지’의 관계를 단순하게 파악하는 논리의 위험을 지적하면서 과연 ‘표상을 바꾸는 것’이 ‘현실을 바꾸는 것’과 온전히 대응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무엇보다 한국 여성들이 지난 30여 년간 동인지‒상업출판‒팬픽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며 유례 없는여성 중심의 팬 문화를 이룬, 그 모든 역사의 의의가 단박에 지워지는 것을 경계한다. 과연 여성작가가 창조한 ‘BL’의 남성서사는 여성인물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서사가 아니며, 남성서사의 여성혐오를 똑같이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까?
“‘문화’는, 현실을 반영하며 그로 인해 촉발되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현실을 구성하는 강력한 요인인 ‘환상’fantasy, 그것의 적절한 형식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의지와 실천의 이름이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문화’를 읽는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페미니스트’ 정체성이 우선된 나머지, ‘문화’라는, “‘현실로서의 판타지’ ‘판타지로서의 현실’을 발명하려는 모든 의지와 실천들”의 범위가 한없이 협소해지는 것이다.

>> 탈BL의 논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전제가 있다. ‘표상’과 ‘판타지’, 그리고 ‘현실’을 모두 같은 것으로 간주한 채, 표상은 현실의 반영이고, 작가의 메시지는 콘텐츠에 직접적으로 표현되며, 그것은 해석의 여지없이 곧바로 독자에게 도달해 독자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규정한다는 전제다. 물론 콘텐츠의 힘, 그리고 표상과 판타지의 영향력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과 판타지, 표상의 관계를 단순하게 파악하는 논리의 위험도 매우 크다. 특히 탈BL 논의에서 핵심적인 것은 BL의 표상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주목인데, 이 과정에서 작가와 독자의 의지 및 욕망은 전혀 고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과연 ‘표상을 바꾸는 것’은 ‘현실을 바꾸는 것’과 일대일로 대응하는가? 문화산업으로서 자본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대중문화 콘텐츠에 대해 이런 판단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와 여성차별이 BL을 소비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근절되는가? 가장 중요한 이 질문들에 대해 탈BL 담론은 아무런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 “보이즈 러브의 문화정치와 ‘여성서사’의 발명”에서

>> ‘문화’는, 현실을 반영하며 그로 인해 촉발되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현실을 구성하는 강력한 요인인 ‘환상’fantasy, 그것의 적절한 형식을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의지와 실천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의지와 실천은 ‘페미니스트’(혹은 다른 무엇)로서 스스로를 의식(정체화)·선언하는 일보다 언제나 ‘먼저’ 이뤄졌다. 요컨대, 이 책에서 ‘문화’는 근대에 기능주의적으로 분류된 좁은 의미의 ‘문화’를 넘어, 그보다 항상 선재해 온, ‘현실로서의 판타지’ ‘판타지로서의 현실’을 발명하려는 모든 역사적 의지와 실천을 아우른다. — 서문에서


답이 아니라 질문을 구함
이 책의 ‘관심’ ‘실천’ ‘야심’ ‘제안’


『원본 없는 판타지』는 ‘모두를 위한’과 ‘지극히 사적인’이라는 페미니즘의 단선적 구호 앞에서 서성이는, 무엇이 혐오이고 무엇이 아닌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독자에게 그 모든 시끄러운 질문들을 “좀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바꿔 보기를 제안하는 책”이다. “우리는 어떤 욕망과 실천들이 …… ‘안정적’ ‘통합적’ ‘정상적’인 것으로 상정되는 모든 견고한 지평들을 필연적·우발적으로 ‘이탈’하고 ‘초과’하는 순간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이 ‘이탈’과 ‘초과’가 만들어 낸 한국 현대문화사의 변곡점들이 지금 이곳의 페미니스트 지경을 조금씩 넓히고 있다고 믿는다. 보다 정교하게 또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게’를 모색하는 과정이 또 다른 억압과 혐오, 퇴보를 낳지 않기를. 책은 정연하게 매듭지어진 ‘답’이 아니라 더 복잡한 ‘질문’의 타래를 끄집어낸다. 이 질문들의 주인은 독자이며, “우리는 질문을 좀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바꿔 보기를 제안한다.”

>> 우리는 질문을 좀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바꿔 보기를 제안한다. 과연 치마 입기를 거부하거나 여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여성, 혹은 그 둘 다인 여성의 욕망은 (이성애자) 남성의 그것을 ‘모방’한 것인가? 여성에 의해 창작됐으나 여성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서사는 남성서사의 여성혐오를 ‘반복’하는가?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의 로맨스를 재현하는 서사는 어떤 에누리도 없이 오직 독자의 이성애 판타지에만 성실하게 복무하는가? 여성상징을 통해 암시되는 미래는 남성의 전유물로 젠더화된 역사서사에서 ‘충분히’ 대안적인가? 여성성의 표지가 소거된 인물은 여성성과 함께 ‘인간성’도 상실하는가? 현실의 속물적 욕망을 ‘뻔한’ 서사를 통해 반복 재생산하는 온갖 ‘삼류’ 로맨스소설과 ‘막장’ 드라마들은 정녕 페미니스트들에게조차 구원될 여지가 없는 ‘문화의 적’인가? 화장과 패션을 통해 아름다운 여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꾸밈노동’을 거부함으로써 페미니스트로 주체화하려는 의지와 반드시 ‘배치’되는가?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지 않은 이의 삶에서 페미니즘의 비전과 전략을 읽어 내는 일은 그저 비평가의 ‘월권’일 뿐인가? 폭력의 언어를 차용해 폭력을 재현하는 전략은 의심할 바 없이 폭력의 구조로 ‘환원’되는가? 식민지 여성이 제국 여성의 옷을 입을 때와 그 반대의 경우가 갖는 정치적 효과는 ‘동등’한가? 출연진 전원을 여성으로 구성한 여성국극은 근대 가부장적·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연극사의 전통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되거나 혹은 그것에 기입함으로써 역사적 지위를 ‘인정’받아야 하는가? 그래야만 오늘날의 페미니스트들에게 교훈적 ‘효용’을 지니는가? — 서문에서
목차

1부
친밀성과 범죄, 그리고 병리학
—1939년 ‘동성연애’ 살인 사건과 ‘정신병학’의 영토 | 박차민정

‘기모노’를 입은 여인
—식민지 말기 문학과 영화의 에스닉 크로스드레싱 | 이화진

틀린 색인
—‘여성국극 프로젝트’와 타자들의 기억술 | 정은영

워커힐의 ‘디바’에게 무대란 어떤 곳이었을까
—1960~70년대 유흥업과 냉전시대의 성문화 | 김대현

2부
‘톰보이’와 ‘언니부대’의 퀴어링
—1980년대 ‘이선희 신드롬’과 ‘치마가 불편한 여자들’ | 한채윤

할리퀸, 󰡔여성동아󰡕, 박완서
—1980년대 여성독서사와 ‘타자’들의 책읽기 | 오혜진

한없이 투명하지만은 않은, <블루>
—이은혜와 1990년대 ‘순정만화 읽는 여자들’ | 허윤

3부
‘한국적 신파’ 영화와 ‘막장’ 드라마의 젠더
—2000년대 전후 ‘통속’의 두 경로 | 이승희

촛불혁명의 브로맨스
—2010년대 한국 역사영화의 젠더와 정치적 상상력 | 손희정

‘예술에 대한 폭력’과 ‘폭력을 흉내 내는 예술’
—<퇴폐미술전>의 반복과 ‘미러링’ | 안소현

보이즈 러브의 문화정치와 ‘여성서사’의 발명
—‘야오이’의 수용부터 ‘탈BL’ 논쟁까지 | 김효진

4부
SNS, ‘소녀’들의 시장 혹은 광장
—2010년대 소셜미디어 문화와 10대 여성주체성 | 김애라

뉴트로 셀럽, ‘신新 영자의 전성시대’
—‘예능 판’의 지각변동과 웃음의 젠더학 | 심혜경

마더‒컴퓨터‒레즈비언
—‘걸 파워’ 시대의 디지털게임과 페미니즘 서사 | 조혜영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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