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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세종연구소 세종정책총서 2024-1NEW

우리가 모르는 김정은: 그의 정치와 전략

개인저자
정성장 지음
발행사항
파주:,한울(한울아카데미),,2024
형태사항
374 p. : 삽화 ; 23 cm
ISBN
9788946075627
청구기호
340.911 정54ㅇ
서지주기
참고문헌: p. 365-367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20158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20158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김정은의 출생 장소에 대한 최초의 공개
출생지는 평양시 북동쪽에 위치한 삼석구역 초대소
1986년에 평양 중심부로 이사해 김정일과 같이 거주


김정은의 출생 장소에 대해 통일부 발간 「북한 주요 인물정보」 책자는 아예 언급하지 못하고 있고, 일부 언론들은 김정은이 원산 초대소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미국으로 망명한 김정은의 이모부 리강과 이모 고용숙을 2021년 3월에 직접 만나 확인한 바에 의하면, 김정은의 출생지는 대동강 북안(北岸)의 평양시 북동쪽에 위치한 삼석구역 초대소(2호집)이고, 초대소에 진료실과 분만실이 있었다고 한다. 김정남의 이모 성혜랑이 수기에서 김정은의 모친 고용희에 대해 ‘철봉리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고, 삼석구역에 ‘철봉리초대소’가 있으므로 리강 선생이 말한 삼석구역 초대소(2호집)는 ‘철봉리초대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지역정보넷’에 의하면 삼석구역 ‘철봉리’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삼석구역 ‘문영동’에 통합되었다.
김정은은 1984년에 ‘2호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1986년경에 평양 중심부의 ‘1호집’으로 옮겨 살았다. 김정은이 평양 중심부로 옮기게 되는 1986년은 (황장엽 전 북한 당중앙위원회 비서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의 권력이 김일성의 권력을 사실상 넘어선 시점이었다.
고용희가 아버지 고경택에게 김정일과 결혼해 산다고 말한 것은 김정은이 3~4살 된 후였다. 그때까지 고경택조차 딸 고용희가 시집도 안 간 줄 알고 있었으니 김정일과 고용희의 동거가 얼마나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8세 생일날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은
1992년에 김정은은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
1995년경에 중앙당 비서급 간부들도 후계자 내정 파악


김정은은 외부 세계에서 막연하게 추정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김정일에 의해 그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다. 리강과 고용숙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은의 8세 생일날(1992년, 김정일이 50세 때, 고용희가 40세 때) 그의 찬양가요인 <발걸음>이 김정일의 술자리에 참석하는 핵심 측근들(중앙당의 간부들) 앞에서 공연되었다. 그때 리강은 김정일이 “앞으로 내 후계자는 정은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들었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느냐’는 김정은 이모부의 지적에 대해 김정일은 “나를 닮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김정일은 김정은의 배짱을 계속 강조했고, 김정철은 온순해서 후계자감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리강의 증언에 의하면, 1995년경에 이미 중앙당의 비서급 간부들 대부분은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1997년에 한국에 망명한 황장엽 비서가 그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그가 성격이 차가워서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고 김정일이 측근들과 가지는 파티 행사에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정일 생시에 현지지도와 단독지도를 시작한 김정은
김정일의 뇌혈관계 이상 이후인 2008년 11월부터 현지지도 시작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전에 단독지도도 시작


국내 한 통신사의 특종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는 김정일이 2009년 1월에 김정은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이 같은 결정을 당의 간부들에게 통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저자는 고위급 탈북자의 증언과 북한이 나중에 공개한 사진 등을 통해 김정일이 2008년 8월에 뇌혈관계 이상으로 쓰러졌다가 회복되면서 공개활동을 시작하는 같은 해 11월부터 김정은이 그를 수행하면서 ‘현지지도’를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은은 2008년 11월 자강도 군수공업 부문에 대한 김정일의 현지지도에 동행하여 군수공장과 군부대를 시찰했고, 12월에는 김정일의 자강도 희천청년연합기업소 차조립장 현지지도와 사리원 미곡협동농장 현지지도에 동행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김정일 생시인 2010년 12월 22일 공개한 희천청년전기련합기업소 시찰 사진에는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께서 현지지도하신 차조립장. 주체97(2008년) 12월 20일’이라고 적혀 있는 현판도 있어 김정은이 2008년 말부터 ‘현지지도’를 시작했다는 정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09년부터 김정은이 어떻게 북한의 파워 엘리트 인사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군부와 공안 기관을 장악했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김정은이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전에 이미 다른 파워 엘리트들보다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단독지도도 실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급 정보와 북한이 김정일 사후에 공개한 동영상을 캡처해 설득력 있게 밝히고 있다.

김정은의 공포정치에 대한 엄밀한 팩트 체크
‘운구차 7인방’ 전원 숙청 보도는 사실과 달라
김정일 집권 초기에 비해 김정은 집권 초기 숙청 규모는 7% 정도


김정은의 공포정치에 대해 국내의 상당수 언론들은 “거듭된 숙청으로 김정일 사망 당시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점쳐졌던 총참모장 리영호,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등 이른바 ‘운구차 7인방’은 모두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김정은과 함께 영구차를 호위했던 7인(장성택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김기남 당중앙위원회 비서, 최태복 당중앙위원회 비서, 리영호 총참모장,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의 활동과 운명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이들 중에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과 리영호 총참모장을 제외하고는 김정은의 1인 지배체제 강화를 위해 숙청된 인물은 없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김정은이 공포정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 대한 국내 언론의 보도 중에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은 것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즉흥적’인 결정에 의해 김정일 시대보다 더 많은 간부들이 숙청되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지만, 이 같은 주장도 사실과 차이가 있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이 2016년에 발간한 『김정은 집권 5년 실정 백서』에 따르면 김정은 집권 이후 총살·처형된 간부들은 2016년 기준 총 140여 명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김일성 사망 후인 1997년부터 1999년까지 김정일 시대 초기의 약 3년 동안 이른바 ‘심화조사건’을 통해 숙청된 간부들은 적어도 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김정은 집권 이후 5년간 140여 명의 간부가 숙청되었다면 그 숫자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이는 ‘심화조사건’으로 3년간 숙청된 간부들의 약 7% 정도이다.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김정은 체제가 공포정치에만 의존해 매우 불안정한 것처럼 실제와 다르게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김정은의 인사 스타일과 용인술에 대한 새로운 해석
김정일은 ‘영화감독’, 김정은은 ‘농구감독’ 스타일
김정은 시대에는 간부들이 충성심을 성과로 증명해야


저자는 김정일의 인사 스타일을 ‘영화감독’에 그리고 김정은의 인사 스타일을 ‘농구감독’에 비유하고 있다. 영화감독은 한 번 주연이나 조연을 결정하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도중에 바꾸지 않는다. 반면 농구감독은 경기를 진행하면서 선수가 잘하면 계속 끝까지 가고, 부진하면 그 선수를 끌어내고 다른 선수로 교체한다.
과거 김정일은 충성심이 검증된 고위 간부들에 대해서는 사망할 때까지 그의 직책을 보장하는 매우 보수적인 인사 스타일을 보였다. 그래서 다수의 고위 간부들은 최고지도자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만 인정받으면 중병으로 장기간 업무를 수행할 수 없어도 그들의 직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김정은은 특정 간부가 기대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면 그 간부에게 책임을 물어 곧바로 강등시키거나 해임함으로써 그의 집권 이후 북한 지도부에서 수시로 인사 변동이 발생했다.
김정일 시대에는 간부들의 능력보다 충성심을 더 중시했는데, 김정은 시대에는 간부들이 자신의 충성심을 업무에서의 성과로 증명해야 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김정일 시대에 비해 간부들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해진 반면 당과 국가 조직은 현저하게 활성화되었다.

김정은의 핵·미사일 강국 건설과 현상타파 전략
핵 개발을 통해 적은 비용으로 남한에 대한 전략적 우위 확보
생존이나 협상에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서 핵전력 강화


김정은은 2012년부터 핵과 미사일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정책 목표를 제시하고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발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5년 동안 네 차례의 핵실험과 세 차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강행한 후, 2017년에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는 강한 목표 의식과 대담성 및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국제사회의 반발과 제재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매달린 것은 재래식 무기를 현대화하기 위해 투입하는 비용에 비해 핵개발을 통해 훨씬 적은 비용으로 한국에 대해 전략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이 핵무기와 ICBM 개발을 완성하면 남북 무력 충돌 시 미군의 군사적 개입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과의 핵전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고, 단지 생존용이나 협상용으로 핵무기를 보유하려 한다면 50~60개의 핵무기 보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생존이나 협상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핵전력을 강화하고 있으므로 한·미는 북한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현상을 타파하고, 미국의 핵우산을 약화시키면서 그들의 요구를 강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에 대한 치밀한 분석
김정은의 대미정책은 초강경에서 초유화로, 다시 초강경으로 전환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 변경 불가 선언


저자는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 이후 김정은의 대미정책이 초강경에서 초유화 정책으로 이행했다가 다시 절제된 강경정책으로, 그리고 초강경 정책으로 바뀌는 과정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북미 정상 간에 어떠한 대화가 오갔는지 그리고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왜 노딜로 끝났는지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2024년 11월 대선에서 재당선된 트럼프가 다시 김정은과의 정상외교를 추진하고 있는데, 북미 협상이 성공하려면 과거 양국 간의 협상 내용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과의) 향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엄청난 돈을 절약할 수 있는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의 이 발언은 이후 한미가 연합훈련을 재개했을 때 트럼프가 스스로 한 약속을 어겼다고 북한이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약속을 어긴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김정은은 싱가포르에서 트럼프에게 ‘조선반도(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확약했다. 하지만 그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제시한 것은 ‘부분적 비핵화’ 방안 또는 ‘스몰딜’이었다.
결국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노딜로 끝났고, 김정은은 2023년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을 통해 “우리 공화국이 사회주의국가로 존재하는 한, 자주와 사회주의를 말살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의 폭제의 핵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핵보유국의 현 지위를 절대로 변경시켜서도, 양보하여서도 안 되며 오히려 핵무력을 지속적으로 더욱 강화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당과 정부가 내린 엄정한 전략적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이처럼 비타협적 입장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 비핵화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북미 정상외교의 재개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김정은의 장녀 김주애의 4대 권력세습 전망
김주애는 현재 ‘후계자 내정 및 수업 단계’
김정은에게 딸만 둘 있고 김주애가 첫째 자식


2022년 11월부터 김정은이 자신의 딸 김주애를 ICBM 시험발사 현장과 열병식 등 중요 행사에 자주 대동하고 등장하면서 김주애가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주애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저자는 김주애의 후계자 내정 가능성을 지적했지만, 당시 정부와 전문가들 대부분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와 전문가들의 의견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해, 2024년 1월에는 국정원도 김주애를 마침내 ‘유력한 후계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북한 후계 문제를 깊이 있게 연구해 온 저자는 북한의 후계체계 구축 과정을 ‘내정(內定) → 대내적 공식화 → 대외적 공식화’의 3단계로 나누어 분석한다. 그리고 김주애는 현재 ‘후계자 내정 및 후계 수업’ 단계에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김주애가 갓난아이였을 때 그를 직접 안아본 외국 인사들을 포함해 김정은을 직접 만났던 다수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김정은에게 아들이 없고, 김주애가 김정은의 첫째 자식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밝히고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의 회고록을 통해 김정은에게 딸만 둘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의 북한 전문가들 대부분이 과거에 김정일의 후계 문제와 관련해 부정확한 평가를 내렸던 데에는 그들의 ‘희망적 사고’나 장남만이 권력을 승계할 수 있다는 유교적 고정관념이 크게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한국의 전문가들이 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김주애가 어린 나이이고 딸이라는 사실에 기초한 선입견과 편견을 넘어서서 김주애가 어떠한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북한 언론매체가 그에 대해 어떻게 선전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편향을 넘어선 초당적 대북정책 모색
대북 압박 정책과 비핵·평화정책 모두 실패
자체 핵 보유를 통해 남북 핵균형을 실현해야
초당적인 대전략이 수립되어야 김정은의 셈법을 바꿀 수 있어


핵과 미사일 능력의 고도화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파괴하고 현상타파를 추구해 온 김정은에게 한국 보수 정부의 대응은 희망적 사고에 기초해 북한 ‘급변사태’를 대비하거나 대북 압박정책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 진보 정부의 대응 방식은 ‘북한에 체제 안전을 보장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다른 유형의 희망적 사고에 기초해 선의를 가지고 북한이 큰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은 ‘종전선언’을 추진하면서 비핵·평화정책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두 가지 방식의 대북정책이 모두 실패했다면 한국의 정치지도자는 남북한 간의 힘의 균형을 회복하고 한반도에 지속가능한 안정과 평화를 가져올 새로운 대북·안보 정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대북·안보 정책에서 핵심은 한국이 자체 핵 보유를 통해 남북 핵균형을 이루고, 한반도 문제의 주인이 되며, 한·미·일 또는 한·미·일·영·호 안보협력 확대로 동북아시아에서 더욱 안정적인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의 의도와 전략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은 보수 정부와 진보 정부 모두 각기 다른 희망적 사고를 가지고 북한에 대해 보고 싶은 부분만을 보려 했기 때문이었다. 여야가 5년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대통령제하에서 일관성 있는 중장기적 대북정책과 초당적 협력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향후 단임제 대통령제의 중임제로의 개편이나 여소야대가 없는 의원내각제로의 개편 및 초당적 대북정책의 수립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문가 그룹에서의 지속가능한 초당적 대북정책과 대전략 수립을 위한 진지한 모색도 매우 중요하다. 북한의 의도와 전략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고 한국 정부의 초당적인 대북정책 및 대전략(大戰略)이 수립되어야 비로소 김정은의 셈법을 바꾸고 북한과 평화 공존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목차

제1장 김정은의 성장환경과 후계자로 내정된 배경
1. 김정은의 가족관계
2. 김정은의 출생 연도와 장소
3.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시기와 배경
4.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과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

제2장 김정일의 건강 이상과 김정은 후계체계의 출범
1. 2008년 김정일의 건강 이상과 후계자 조기 결정
2. 후계자 결정 사실의 대내적 공개와 김정은의 정책 관여
3. 김정은의 군부와 공안 기관 장악
4. 제3차 당대표자회와 ‘후계자 김정은’의 대외 공개
5. 김정은 영향력의 급속한 확대

제3장 김정은의 유일영도체계 확립 과정: 김일성·김정일의 후광 의존에서 탈피로
1. ‘선대 수령들’의 후광을 이용한 유일영도체계 구축(2011~2017)
2. 독자적 정통성 구축 및 ‘수령 김정은’ 본격 강조(2017~현재)
3. 김일성·김정일과의 차별성 확대 및 ‘수령 김정은’ 강조

제4장 김정은의 공포정치, 장성택 처형과 김정남 암살 배경
1. 김정은이 김정일보다 공포정치에 더 의존하고 있는가?
2. 장성택 숙청의 배경과 평가
3.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의 처형 배경
4. 김정남 암살 이유

제5장 김정은의 인사 스타일과 위임정치
1. 김정은의 인사 스타일
2. 항일 빨치산 2세의 대표 주자 최룡해의 위상과 역할
3. 경제개혁과 박봉주의 역할
4. 리병철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중용과 부침
5. 백두혈통 김여정의 특별한 위상과 역할

제6장 김정은의 정책결정 방식과 집체적 협의기구 활성화
1. 노동당의 정책결정기구 활성화
2.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위상 강화와 역할 확대

제7장 김정은의 통치담론과 현지지도
1. ‘선군정치’에서 ‘인민대중제일주의정치’로
2. ‘우리국가제일주의’의 강조 배경과 의미
3. 김정은의 현지지도와 ‘애민정치’

제8장 핵·미사일 강국 건설과 현상타파 전략
1. 2013년 제3차 핵실험과 ‘핵보유국’ 지위 선전
2. 2016년 제4차 핵실험 배경과 성과
3. 2016년 제5차 핵실험과 2017년 제6차 핵실험 평가
4. 2017년 ICBM 시험발사와 ‘국가핵무력 완성’ 선포
5. 2019년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정면돌파 노선 채택
6. 2022년 핵무력정책 법령 채택과 핵 선제공격의 정당화
7. 신형 전술핵탄두 공개와 제7차 핵실험 전망
8. 핵무력강화정책 기조의 헌법 반영과 비핵화 거부 입장 재확인
9. 북한 핵무기의 ‘기하급수적’ 증가 전망과 한국 안보 위협

제9장 김정은의 대(對)미국 정상외교
1. 2018년 북미정상회담 추진 이전의 대미정책
2. 김정은의 비핵화 협상 추진 배경과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3. 2019년 하노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 추진 과정
4.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진행 과정과 결렬 이유
5.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의 북미 관계와 판문점 회동
6. 2019년 스톡홀름 북미실무회담 결렬 이후 김정은의 대미정책

제10장 김주애의 위상과 4대 권력세습 전망
1. 김주애의 위상에 대해 부정확한 평가가 나온 이유
2. 수령후계자론과 후계체계 구축의 3단계
3. 김주애가 김정은의 첫째 자식이라고 보아야 하는 이유
4. 북한 선전을 통해 본 김주애의 위상
5. 4대 세습 전망과 남북 관계에의 함의

제11장 김정은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1. 김정은의 리더십에 대한 과소평가와 대북 압박 정책의 실패
2.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오판과 한반도 비핵·평화 정책의 파탄
3. 김정은의 셈법을 바꾸기 위한 한국의 선택

제12장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