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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 책의 새로운 점
그동안 한국사학계는 식민지 시대를 연구하면서 식민 정책 수립과 전개의 주체를 ‘일제’라는 용어로 지칭해왔다. 이 용어는 지배자 일본이 ‘단일한’ 주체로서 조선에 대한 이해와 통치방식을 추구했다는 관념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일제는 단일한 주체가 아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 양자는 ‘무엇으로 어떻게 조선을 통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과 지향을 지니고 있었고, 양자의 갈등과 조정 과정은 곧 식민 정책의 입안 및 전개 과정이 되었다. 저자는 식민 정책의 내용과 함께 식민 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다양한 주체와 의사결정의 프로세스를 미시적으로 파악해 들어가면서 ‘일제’에 대한 보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법 정책의 결정 과정을 미시적으로 분석한 결과,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우선 조선총독부의 독자적인 식민통치책인 성문법화 정책을 학계에 최초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또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추진된 한국 법전 편찬작업과 관습조사사업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일제가 한국 관습과 법령 체계를 이해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이 관습조사사업을 통해 획득된 ‘조선인식’이 이후 조선민사령을 비롯한 식민지 법령체제 구축에 밑바탕이 되었음을 밝혀냈다.
통감부 시기부터 식민지 초기까지
:일제의 한국병합, 그러나 법체계는 달랐다
일본정부는 한국병합을 단행했으면서도 조선을 일본 법령체계에 편입시키려 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조선에서의 입법사항을 조선총독의 입법명령(제령)으로 규정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의 법령이 조선에서 그대로 시행되지 못하도록 했다. 일본 본국 법령을 조선에서 시행하는 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법적 평등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조선민사령은 식민지 조선의 민사사건을 규율하는 일반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런데 조선민사령 제1조는 다수의 일본 민법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일본 민법 의용원칙’을 밝힘으로써 모순을 자초한다. 다만 조선인의 주요 권리.의무와 관련된 법률들, 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관련된 친족, 상속 및 호적에 관한 법규에 대해서는 일본 민법을 의용하지 않고 조선의 관습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내지인과 조선인의 차별에 합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1912년에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의 합의로 제정된 조선민사령은 향후 식민지 법령체계를 구성한 기본 구조였다.
식민지 조선의 모든 민사사건을 규율하는 일반법령으로 제정된 조선민사령은 제1조에서 민법을 비롯한 23종의 일본 법령을 의용(依用)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동화주의적 통치를 천명했다. 그러나 조선민사령 제1조에서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않은 일본 법령은 조선에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그 영역에 관해서 조선인은 무권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예컨대 중의원선거법.병역법.호적법 등 주요 권리.의무와 관련된 법률들은 조선에서 시행되지 않았고, 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관계된 조선민사령 제11조(친족 및 상속)와 호적에 관한 법규는 조선 관습으로 규율했다.
조선민사령이 이중적 구조로 제정된 것은, 조선에 대한 동화적 입장을 관철하면서도 조선인을 차별할 수 있는 합법적 기제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조선민사령 제11조에 대한 일제의 태도는 조선인 정책을 파악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될 수 있다.
―이승일,<책머리에>중에서
1910~20년대 조선민사령의 개정과 식민통치의 방향
: 조선총독부의 관습 성문화 정책과 일본정부의 허구적 동화 정책
조선민사령은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의 합의로 제정된 것임에도 매우 불안정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 민법(성문법)과 조선 관습(관습법)이 공존하는 조선민사령 자체의 모순적인 구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민사령의 개정 과정에서 향후 식민지 관습의 입법 방향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일본정부와는 다른 지향을 추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조선민사령에서 확립된 일본 민법-조선 관습법의 이원체제를 부정하고 조선 관습을 토대로 식민지만의 성문법을 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입안한 조선민사령 개정안은 일본정부 내각 법제국의 ‘내선 법제 일원화’ 주장과 부딪혀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는 동화주의가 일방적으로 관철된 결과로 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일본정부 스스로가 완전한 법제 일원화, 즉 조선법제 전 영역에 일본 법령을 관철하고자 하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정부가 원했던 것은 식민지에 일본 민법 이외의 성문법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을 일본 민법으로 통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조선 관습을 그대로 관습법으로 삼고자 했다.
또한 조선총독부 역시 겉으로는 일본정부의 입장에 동조하여 물러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조선민사령 11조 개정의 범위를 축소하고 관습법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일본 민법이 광범위하게 조선에 의용되는 상황을 막았다. 이는 총독부의 식민통치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고 조선총독의 권한을 방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독자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성문법 정책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1930~40년대 식민정책,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의 갈등
: 황국 신민화, 내선일체 슬로건의 실체
1930~40년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의 구현이라는 슬로건에서 잘 나타나듯이 ‘동화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대표적인 조선인 말살 정책으로 거론되는 것이 창씨개명과 서양자제도의 도입 등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정책들이 1930년대 말 전시동원체제와 함께 서둘러 도입된 것이 아니었으며, 1920년대 초반부터 조선총독부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법 정책이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조선민사령 제11조 개정에서는 ‘관습 성문화’라는 취지를 끝내 관철시키지 못했지만,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중반부터 후속작업으로 친족법 및 상속법 개정을 다시 추진했다. 조선총독부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조선민사령 제11조를 폐지하고 독자적인 조선친족령과 조선상속령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전시동원체제로 개편되면서 벽에 부딪혔다. 일본정부는 식민지 총독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확대하여 전시체제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와 함께 조선인의 정치적.사회적 처우를 일정부분 개선함으로써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전시동원에 협력하도록 했다. 그 방안으로 추진되었던 것이 ‘법역 통합화 정책’이었다. 전쟁에 적극 협력한 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고, 조선에도 중의원선거법을 실시하여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조선인이 제국의회에 직접 참여하게 하여 조선총독의 입법권을 박탈하고 조선을 일본 법역으로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정부의 법역 통합화 정책은 결국 194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친족령, 조선상속령 제정 구상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추진한 법역 통합화 정책을 ‘조선인과 일본인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는 사실상 종전에 조선총독이 행사하던 통치권을 일본 본국의 각 기관이 행사하도록 하겠다는 것에 불과했다. 조선인은 여전히 식민지 백성으로서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동안 한국사학계는 식민지 시대를 연구하면서 식민 정책 수립과 전개의 주체를 ‘일제’라는 용어로 지칭해왔다. 이 용어는 지배자 일본이 ‘단일한’ 주체로서 조선에 대한 이해와 통치방식을 추구했다는 관념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일제는 단일한 주체가 아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 양자는 ‘무엇으로 어떻게 조선을 통치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과 지향을 지니고 있었고, 양자의 갈등과 조정 과정은 곧 식민 정책의 입안 및 전개 과정이 되었다. 저자는 식민 정책의 내용과 함께 식민 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다양한 주체와 의사결정의 프로세스를 미시적으로 파악해 들어가면서 ‘일제’에 대한 보다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법 정책의 결정 과정을 미시적으로 분석한 결과,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우선 조선총독부의 독자적인 식민통치책인 성문법화 정책을 학계에 최초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또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추진된 한국 법전 편찬작업과 관습조사사업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일제가 한국 관습과 법령 체계를 이해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이 관습조사사업을 통해 획득된 ‘조선인식’이 이후 조선민사령을 비롯한 식민지 법령체제 구축에 밑바탕이 되었음을 밝혀냈다.
통감부 시기부터 식민지 초기까지
:일제의 한국병합, 그러나 법체계는 달랐다
일본정부는 한국병합을 단행했으면서도 조선을 일본 법령체계에 편입시키려 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조선에서의 입법사항을 조선총독의 입법명령(제령)으로 규정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의 법령이 조선에서 그대로 시행되지 못하도록 했다. 일본 본국 법령을 조선에서 시행하는 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법적 평등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조선민사령은 식민지 조선의 민사사건을 규율하는 일반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런데 조선민사령 제1조는 다수의 일본 민법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일본 민법 의용원칙’을 밝힘으로써 모순을 자초한다. 다만 조선인의 주요 권리.의무와 관련된 법률들, 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관련된 친족, 상속 및 호적에 관한 법규에 대해서는 일본 민법을 의용하지 않고 조선의 관습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내지인과 조선인의 차별에 합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1912년에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의 합의로 제정된 조선민사령은 향후 식민지 법령체계를 구성한 기본 구조였다.
식민지 조선의 모든 민사사건을 규율하는 일반법령으로 제정된 조선민사령은 제1조에서 민법을 비롯한 23종의 일본 법령을 의용(依用)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동화주의적 통치를 천명했다. 그러나 조선민사령 제1조에서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않은 일본 법령은 조선에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그 영역에 관해서 조선인은 무권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예컨대 중의원선거법.병역법.호적법 등 주요 권리.의무와 관련된 법률들은 조선에서 시행되지 않았고, 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관계된 조선민사령 제11조(친족 및 상속)와 호적에 관한 법규는 조선 관습으로 규율했다.
조선민사령이 이중적 구조로 제정된 것은, 조선에 대한 동화적 입장을 관철하면서도 조선인을 차별할 수 있는 합법적 기제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조선민사령 제11조에 대한 일제의 태도는 조선인 정책을 파악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될 수 있다.
―이승일,<책머리에>중에서
1910~20년대 조선민사령의 개정과 식민통치의 방향
: 조선총독부의 관습 성문화 정책과 일본정부의 허구적 동화 정책
조선민사령은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의 합의로 제정된 것임에도 매우 불안정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 민법(성문법)과 조선 관습(관습법)이 공존하는 조선민사령 자체의 모순적인 구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민사령의 개정 과정에서 향후 식민지 관습의 입법 방향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일본정부와는 다른 지향을 추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조선민사령에서 확립된 일본 민법-조선 관습법의 이원체제를 부정하고 조선 관습을 토대로 식민지만의 성문법을 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입안한 조선민사령 개정안은 일본정부 내각 법제국의 ‘내선 법제 일원화’ 주장과 부딪혀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는 동화주의가 일방적으로 관철된 결과로 볼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일본정부 스스로가 완전한 법제 일원화, 즉 조선법제 전 영역에 일본 법령을 관철하고자 하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정부가 원했던 것은 식민지에 일본 민법 이외의 성문법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조선을 일본 민법으로 통치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조선 관습을 그대로 관습법으로 삼고자 했다.
또한 조선총독부 역시 겉으로는 일본정부의 입장에 동조하여 물러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조선민사령 11조 개정의 범위를 축소하고 관습법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일본 민법이 광범위하게 조선에 의용되는 상황을 막았다. 이는 총독부의 식민통치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고 조선총독의 권한을 방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독자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성문법 정책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1930~40년대 식민정책,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의 갈등
: 황국 신민화, 내선일체 슬로건의 실체
1930~40년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의 구현이라는 슬로건에서 잘 나타나듯이 ‘동화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대표적인 조선인 말살 정책으로 거론되는 것이 창씨개명과 서양자제도의 도입 등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정책들이 1930년대 말 전시동원체제와 함께 서둘러 도입된 것이 아니었으며, 1920년대 초반부터 조선총독부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법 정책이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조선민사령 제11조 개정에서는 ‘관습 성문화’라는 취지를 끝내 관철시키지 못했지만,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 중반부터 후속작업으로 친족법 및 상속법 개정을 다시 추진했다. 조선총독부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조선민사령 제11조를 폐지하고 독자적인 조선친족령과 조선상속령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전시동원체제로 개편되면서 벽에 부딪혔다. 일본정부는 식민지 총독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확대하여 전시체제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와 함께 조선인의 정치적.사회적 처우를 일정부분 개선함으로써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전시동원에 협력하도록 했다. 그 방안으로 추진되었던 것이 ‘법역 통합화 정책’이었다. 전쟁에 적극 협력한 조선인이 일본 국적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고, 조선에도 중의원선거법을 실시하여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조선인이 제국의회에 직접 참여하게 하여 조선총독의 입법권을 박탈하고 조선을 일본 법역으로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정부의 법역 통합화 정책은 결국 1940년대 조선총독부의 조선친족령, 조선상속령 제정 구상을 무산시켰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추진한 법역 통합화 정책을 ‘조선인과 일본인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는 사실상 종전에 조선총독이 행사하던 통치권을 일본 본국의 각 기관이 행사하도록 하겠다는 것에 불과했다. 조선인은 여전히 식민지 백성으로서 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목차
서론
제1장 조선민사령의 연구현황과 문제점
제2장 연구방법과 책의 구성
제1부 일제의 식민지 법 정책과 조선민사령의 제정
제1장 일제의 한국침략과 사법제도 정비
제2장 법전조사국의 관습조사사업과 한국 법전 편찬 구상
제3장 식민지 조선의 입법제도와 조선민사령
제4장 조선민사령 제11조 '관습'의 법인과 관습조사사업
제2부 조선총독부의 관습 성문화 정책과 조선민사령 제11조 개정
제1장 일본 식민지 법 체제의 모순과 법적 정비
제2장 조선총독부의 관습 성문화 정책과 일본정부의 대응
제3장 조선민사령 제11조 개정안과 조선총독부의 관습법 정책
제4장 한국 호적에서 일본식 호적으로의 개편
제3부 조선총독부의 조선친족령·상속령 제정 구상과 법제 일원화
제1장 1920·30년대 조선총독부의 관습 성문화 정책과 창씨개명
제2장 미나미 지로의 식민 정책과 조선친족령·상속령 구상
제3장 내외지 행정 일원화와 조선총독의 입법권
제4장 일본 본국정부의 법역 통합화 정책
결론
부록
주요 법령 소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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