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사진으로 읽는 세계사 시리즈
사진으로 읽는 세계사. 1: 공산주의
- 대등서명
- Storia illustrata del comunismo
- 개인저자
- 마르첼로 플로레스 지음; 김선아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플래닛,,2008
- 형태사항
- 185 p. : 삽화(주로천연색), 도표, 천연색지도, 초상 ; 27 cm
- 총서사항
- 사진으로 읽는 세계사 시리즈
- ISBN
- 9788991972131 (1) 9788991972148 (2) 9788991972186 (4) 9788991972216 (3) 9788991972124(세트)
- 청구기호
- 909 F634s
- 일반주기
- 원저자명: Marcello Flores
- 서지주기
- 연표와 색인수록
- 주제
- 세계사[世界史]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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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1476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1476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
식민주의는 특정 시기에 국지적으로 일어난 정복과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식민주의는 수 세기에 걸쳐 서양과 그 나머지 세계가 연루된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다시 말해 식민주의를 빼 놓고는 근대 세계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책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단정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또한 식민주의는 한낱 옛날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식민주의는 여전히 언제든 다시 타오를 불씨를 내포하고 있는 현재의 현상이다. 예를 들어, 1884년 강대국들이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유럽 강대국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개최한 베를린 회의가 그렇다. 베를린 회의가 내린 결정의 결과들 가운데 국경선의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설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오래전부터 공존해 온 인종적?문화적?제도적?언어적 현실을 분리시킴으로써 20세기 후반에 폭발하게 될 수많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정복은 그쳤을지라도 그 유산은 후대에게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상 낙원에서부터 백인의 짐까지
16세기에 ‘신세계’라 일컬어지게 될 지역은 유럽인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유럽인들은 자신의 환상을 거기에 투영했다. 자크 르 고프가 정의했듯이, 그 ‘몽상적 지평’ 위에 중세 문화는 고전과 기독교 전통을 재구성하여 신화와 전설로 이루어진 지리적 상상의 세계를 형성했다. 그들은 아틀란티스나 아마조네스 같은 그리스 로마 신화, 고대의 전설, 구약성서의 예언, 엘도라도를 그곳에서 찾으려 했다. 그것은 ‘행운의 섬’ 또는 ‘지상 낙원’으로, 중세 사람들이 주저 없이 지도 위에 표시했던 경이로운 것들이 쌓여 있는 종말론적 공간이었다.
그리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후 유럽인들은 식민지 원주민들을 유럽의 ‘타자’로 만들었다. 그로써 유럽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폭력적인 정복을 정당화했다. ‘미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가치를 표현한다기보다는 가치의 부재와 거부로 간주되었다. ‘신세계’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당대의 이데올로기와 가치들의 뒤집어진 모습을 바라보는 거울이 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원시성과 자연 상태를 찬양하다가도 이내 그들의 열등함을 강조했다. 그러한 인식은 가공할 폭력으로 이어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정복에 나섰을 때 스페인 인구의 절반에 달했던 앤틸리스 제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25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고, 1530년에 1,000만 명에 이르렀던 안데스 고원의 주민은 불과 30년 후 250만으로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식민 제국들에 지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땅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서양의 식민 제국들은 식민지 정복을 단지 군사적 정복이나 경제적, 기술적 우위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정점에 도달해 있다는 확신하에 식민지 정복에 도덕적 임무를 부과했다. 즉 ‘열등한’ 문명은 앞선 문명의 지도하에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영국 작가이자 <정글 북>의 저자로 유명한 러디어드 키플링은 <백인의 짐>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백인의 짐을 져라 ―
그대가 부양한 최고를 내보내라
그대의 아들을 유배에 보내라
그대의 포로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불안정하고 야만적인 사람들 ―
그대가 새로 붙잡은 부루퉁한 사람들,
절반은 악마이고 절반은 어린애 같은 사람들에게
아주 힘겹게 시중들기 위해
이처럼 불쾌한 시어에는 과학적 합리성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뒤섞여 있었다. 서양인들은 문명의 선택과 발전에 대한 사회적 다윈주의 이론들을 앞세워 백인이 아닌 민족들에게 동등한 존엄성과 고유의 역사 발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했던 것이다.
식민주의의 유산
서양의 세계 침투는 다양한 요인들과 여러 가지 영향들에 의해 가능해졌다. 예컨대 기술과 자원(키니네와 개틀링 기관총), 경제(천연 자원의 착취와 상품 판매를 위한 새로운 시장), 금융(환전, 환율, 주식시장), 외교와 권력(상대방의 강화 저지), 문화(모든 수단을 통해 세계의 후진 지역들에 수출할 우수한 도덕적·정치적·종교적 가치들과 발전의 개념)의 영향들이 동기가 되었다. 이런 다양한 동기들이 뒤섞이면서 식민지 경험은 다면적인 양상을 띠었다. 또한 그에 따라 정복과 예속, 동화의 양상들이 달라졌고, 식민지화된 사회들과의 관계와 수행된 폭력의 정도가 달라졌다. 서양의 근대적 정체성은 식민주의와 그것이 정치적·경제적·문화적·사회적 관계에 남긴 무거운 유산들을 통해서도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식민주의는 예속된 민족들의 정체성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영향은 수많은 지역에서 지울 수 없는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식민주의는 특정 시기에 국지적으로 일어난 정복과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식민주의는 수 세기에 걸쳐 서양과 그 나머지 세계가 연루된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다시 말해 식민주의를 빼 놓고는 근대 세계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책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단정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또한 식민주의는 한낱 옛날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식민주의는 여전히 언제든 다시 타오를 불씨를 내포하고 있는 현재의 현상이다. 예를 들어, 1884년 강대국들이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 유럽 강대국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개최한 베를린 회의가 그렇다. 베를린 회의가 내린 결정의 결과들 가운데 국경선의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설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오래전부터 공존해 온 인종적?문화적?제도적?언어적 현실을 분리시킴으로써 20세기 후반에 폭발하게 될 수많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정복은 그쳤을지라도 그 유산은 후대에게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상 낙원에서부터 백인의 짐까지
16세기에 ‘신세계’라 일컬어지게 될 지역은 유럽인들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유럽인들은 자신의 환상을 거기에 투영했다. 자크 르 고프가 정의했듯이, 그 ‘몽상적 지평’ 위에 중세 문화는 고전과 기독교 전통을 재구성하여 신화와 전설로 이루어진 지리적 상상의 세계를 형성했다. 그들은 아틀란티스나 아마조네스 같은 그리스 로마 신화, 고대의 전설, 구약성서의 예언, 엘도라도를 그곳에서 찾으려 했다. 그것은 ‘행운의 섬’ 또는 ‘지상 낙원’으로, 중세 사람들이 주저 없이 지도 위에 표시했던 경이로운 것들이 쌓여 있는 종말론적 공간이었다.
그리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후 유럽인들은 식민지 원주민들을 유럽의 ‘타자’로 만들었다. 그로써 유럽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폭력적인 정복을 정당화했다. ‘미개인’의 정체성은 다른 가치를 표현한다기보다는 가치의 부재와 거부로 간주되었다. ‘신세계’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당대의 이데올로기와 가치들의 뒤집어진 모습을 바라보는 거울이 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원시성과 자연 상태를 찬양하다가도 이내 그들의 열등함을 강조했다. 그러한 인식은 가공할 폭력으로 이어졌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정복에 나섰을 때 스페인 인구의 절반에 달했던 앤틸리스 제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25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고, 1530년에 1,000만 명에 이르렀던 안데스 고원의 주민은 불과 30년 후 250만으로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식민 제국들에 지배되지 않고 남아 있는 땅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서양의 식민 제국들은 식민지 정복을 단지 군사적 정복이나 경제적, 기술적 우위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정점에 도달해 있다는 확신하에 식민지 정복에 도덕적 임무를 부과했다. 즉 ‘열등한’ 문명은 앞선 문명의 지도하에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영국 작가이자 <정글 북>의 저자로 유명한 러디어드 키플링은 <백인의 짐>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백인의 짐을 져라 ―
그대가 부양한 최고를 내보내라
그대의 아들을 유배에 보내라
그대의 포로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불안정하고 야만적인 사람들 ―
그대가 새로 붙잡은 부루퉁한 사람들,
절반은 악마이고 절반은 어린애 같은 사람들에게
아주 힘겹게 시중들기 위해
이처럼 불쾌한 시어에는 과학적 합리성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뒤섞여 있었다. 서양인들은 문명의 선택과 발전에 대한 사회적 다윈주의 이론들을 앞세워 백인이 아닌 민족들에게 동등한 존엄성과 고유의 역사 발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했던 것이다.
식민주의의 유산
서양의 세계 침투는 다양한 요인들과 여러 가지 영향들에 의해 가능해졌다. 예컨대 기술과 자원(키니네와 개틀링 기관총), 경제(천연 자원의 착취와 상품 판매를 위한 새로운 시장), 금융(환전, 환율, 주식시장), 외교와 권력(상대방의 강화 저지), 문화(모든 수단을 통해 세계의 후진 지역들에 수출할 우수한 도덕적·정치적·종교적 가치들과 발전의 개념)의 영향들이 동기가 되었다. 이런 다양한 동기들이 뒤섞이면서 식민지 경험은 다면적인 양상을 띠었다. 또한 그에 따라 정복과 예속, 동화의 양상들이 달라졌고, 식민지화된 사회들과의 관계와 수행된 폭력의 정도가 달라졌다. 서양의 근대적 정체성은 식민주의와 그것이 정치적·경제적·문화적·사회적 관계에 남긴 무거운 유산들을 통해서도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식민주의는 예속된 민족들의 정체성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영향은 수많은 지역에서 지울 수 없는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목차
1.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념
2. 동양의 제국들
3. 유럽의 세계 정복
4. 금, 하느님 그리고 영광
5. 식민주의의 정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