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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1999년 출간된 『종횡무진 서양사』의 개정판.
5천 년 서양 역사를 나무가 자라는 과정인 씨앗, 뿌리, 줄기, 꽃, 열매에 빗댄 지은이만의 독창적 시각으로 박진감 넘치게 풀어냈다. (상)권에는 ‘문명의 탄생에서 중세의 해체까지’, (하)권에는 ‘대항해 시대에서 냉전의 종식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번 개정판에서는 기존 책에 비해 더욱 풍부한 도판과 지도 자료가 추가되었고, 내용면에서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냉전 시대까지가 증보되었다.
빛나는 승리 뒤에 감춰진 험난한 서양사 읽기
― 교과서를 넘어 다양한 시각에서 보는 ‘종횡무진 서양사’
우리에게 서양은 진보 혹은 발전의 다른 이름이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 오랜 의회의 역사가 보여주는 잘 정비된 민주주의, 오늘날까지도 관광객의 발길을 잡아끄는 찬란한 문화유산 등, 서양의 모든 것은 경탄의 대상이자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서양의 역사는 결코 아름다운 순간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양 문명의 저변을 떠받치고 있는 로마의 역사는 로물루스가 형제 레무스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시작되었으며, 신의 은총이 가장 충만했던 중세에는 멀쩡한 사람이 마녀 재판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신대륙의 발견과 아프리카 정복이 서양의 부를 불려 주고 있을 때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잔인하게 살육당해야 했고, 신앙의 차이나 국가 간에 얽힌 이권의 문제가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런 영욕의 순간순간이 모여 서양사라는 나무의 씨앗, 뿌리, 줄기와 꽃, 열매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을 따라 읽다보면 문명이 처음 생겨났던 때부터 현재에 이르는 서양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허와 실이 무엇인지 극명히 드러난다.
‘씨앗-뿌리-줄기-꽃-열매’의 독특한 서양사
‘통사’라고 불리는 책의 차례는 고대-중세-근대-현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사관을 기준으로 해서 역사의 시간을 나눈다. 그러나 저자는 5천 년에 달하는 서양사의 시간을 씨앗에서부터 열매를 맺기까지의, 나무가 생장하는 과정에 비유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은 씨앗,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뿌리에, 게르만 문명이 로마 문명과 합쳐지는 중세를 줄기에, 대항해 시대와 르네상스?종교개혁을 꽃에,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오늘날에 이르는 세계 정복의 과정은 열매에 빗댄 것이다.
이런 비유가 단순한 수사가 아님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르네상스에 관한 서술 부분이다(하권 36쪽).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이 시대를 역사가들이 ‘르네상스’라고 명명한 이유는 그것을 고대의 ‘부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나 이행기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저자는 수천 년 동안 뿌리와 줄기를 키워온 서양 문명이 드디어 꽃을 피워낸 시기가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르네상스를 ‘개화’가 아닌 ‘부활’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성장 단계의 연속선상에서 르네상스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시대라는 것이다. 서양사를 나무의 생장에 비유한 이런 서술법은 기존의 꽉 막힌 교과서적 시대구분법을 탈피하여 역사를 새롭게 되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고대-중세-근대로 분절된 서양사의 빈틈을 자연스레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일방통행으로만 달린 서양사
서양사가 동양사와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은 중심의 유무이다. 천자가 이끌어가는 제국이 중심이 되어 별자리처럼 질서정연하게 복속되어 있는 제후국을 통솔하는 것, 그리하여 분열을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든 통일 제국을 이루어내는 과정의 연속이 동양사의 패턴이었다면 서양사는 그 지리적 특성상 통일을 이룰 수 없었고, 하여 끊임없이 중심이 이동하는 특징을 갖는다. 특이한 것은 일방통행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그 이동 방향이 서쪽으로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서양 문명의 씨앗인 오리엔트 문명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그리스?로마에 자리를 잡았고, 게르만족의 이동에 따라 문명은 다시 서유럽 대륙으로 옮겨간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서양 문명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식되며 또다시 서쪽으로 이동해 극동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극동 세계에까지 자본주의화와 서구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그러나 일방통행이라고 해서 중심이동의 역사가 순조롭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중심이동 과정에서 민족과 민족 간의 충돌이 불가피해지면서 전쟁이나 학살의 형태로 무수한 인명이 살상되기도 했다.
중심이동의 일방통행만큼이나 위험했던 것은 사상의 일방통행이었다.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사람을 잡는 일에 더 많이 이용되었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할라치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는 일이 예사였고, 십자군 원정 자체는 물론 그 과정에서의 살생도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되었다. 종교적인 입장 차이로 신?구교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가 30년 전쟁이라는 긴 싸움을 마친 후에야 서양 세계에 비로소 종교적 평화가 찾아왔고 관용이라는 가치를 얻게 되었다. 관용과 같이 우리가 서양에서 받아들인 덕목들은 원래부터 서양사회에 내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서양사의 쓰라린 경험 속에서 탄생한 것임을『종횡무진 서양사』를 통해 깨닫게 된다.
동양사와 함께 보는 서양사
역사는 저 혼자 굴러가는 법이 없다. 서양사라고 해서 모든 역사가 서양의, 서양을 위한, 서양에 의한 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던 게르만족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갑작스러운 결심이나 변덕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게르만 족은 당시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훈족의 압박을 받아 대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인데 이 훈족이 바로 동양의 흉노족이다. 재미있는 것은 훈족이 게르만족을 압박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한 무제(武帝)의 흉노 정벌책에 기인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동양과 서양의 ‘합작’이라고 표현한 지은이의 표현 역시 재미있다.
또한 합작은 아니지만 18세기에는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백과사전 편찬 붐이 일어난다. 1772년 프랑스에서는 『백과전서』가 완간되었고 중국 청나라의 강희제, 건륭제 연간에는 각각 『고금도서집성』과『사고전서』가 편찬되는 우연의 일치가 벌어진다. 이에 저자는 18세기 후반이 세계적으로 지식 운동이 활성화되는 시기였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비극적인 사건은 15세기의 조선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는 리처드 3세가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왕위를 빼앗고 조카 형제를 런던탑에 가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차이가 있다면 세조는 왕위에 올라 그 나름의 업적을 쌓아가며 왕위를 유지했지만 리처드 3세는 헨리 튜더에게 결국 왕위를 빼앗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또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이자 앤 불린과의 스캔들로 종교개혁까지 일으킨 헨리 8세가 형수 캐서린과 결혼했던 일은 부여와 고구려의 형사취수제와 닮아 있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형사취수제는 전 세계적인 결혼 풍습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본문은 물론이고 페이지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면서 서양사를 세밀히 읽어내는 데 도움을 주는 도판이나 각주 속에서 위와 같은 동서양의 비슷한 사건이나 제도들을 만나게 되는 것 또한 『종횡무진 서양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다. 이밖에도 로마의 5현제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양자 상속 제도와 청나라 황제 옹정제의 황태자 밀건법을 비교하거나, 카이사르의 루비콘 강 도강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두고 카이사르를 이성계의 ‘선배’로 칭하는 등 이 책에는 동서양이 필연 혹은 우연으로 만나는 지점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곳곳에 숨어 있어 세계사적 시각에서 서양사를 이해하게끔 해준다.
빛에 가려진 그늘을 읽는 서양사
우리는 대개 서양의 축적된 국부와 안정된 정치 질서, 합리적인 사회 제도 등을 부러워한다. 그리하여 서양사를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건들에 주목하고 그것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다.
1848년 2월 혁명의 결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50년 만에 프랑스는 다시 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황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었다. 큰아버지를 좇아 프랑스 제국을 추구했던 그는 결국 임기 말에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자신의 행위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프랑스 국민들(정확히는 프랑스 남성들)이 그에게 몰표를 주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고 결국 프랑스는 또다시 제국으로 타락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왕의 목을 내려치는 장면보다 공화국이 다시 제국으로 퇴보하고 마는 바로 이 장면이다. 또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국가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주체하지 못하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더 많은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국제전까지 불사한 장면보다는 과학과 산업의 발달이 가져온 환경오염 문제나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발생시킨 사회적 폐단 등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제도적인 면에서의 민주주의라든가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의 수준이라면 이제 우리 역시 서양이 부럽지 않을 만큼은 누리고 있지만 그것은 씨앗, 뿌리, 줄기가 빠진 꽃과 열매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우리에게는 ‘서양화(化)’가 지나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서양사의 빛나는 승리는 서양이 씨앗에 불과했던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노력, 희생이 빚어낸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후발주자의 이득은 승리의 역사를 그대로 모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는 것을『종횡무진 서양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5천 년 서양 역사를 나무가 자라는 과정인 씨앗, 뿌리, 줄기, 꽃, 열매에 빗댄 지은이만의 독창적 시각으로 박진감 넘치게 풀어냈다. (상)권에는 ‘문명의 탄생에서 중세의 해체까지’, (하)권에는 ‘대항해 시대에서 냉전의 종식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번 개정판에서는 기존 책에 비해 더욱 풍부한 도판과 지도 자료가 추가되었고, 내용면에서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냉전 시대까지가 증보되었다.
빛나는 승리 뒤에 감춰진 험난한 서양사 읽기
― 교과서를 넘어 다양한 시각에서 보는 ‘종횡무진 서양사’
우리에게 서양은 진보 혹은 발전의 다른 이름이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가져다준 물질적 풍요, 오랜 의회의 역사가 보여주는 잘 정비된 민주주의, 오늘날까지도 관광객의 발길을 잡아끄는 찬란한 문화유산 등, 서양의 모든 것은 경탄의 대상이자 승리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서양의 역사는 결코 아름다운 순간들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양 문명의 저변을 떠받치고 있는 로마의 역사는 로물루스가 형제 레무스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시작되었으며, 신의 은총이 가장 충만했던 중세에는 멀쩡한 사람이 마녀 재판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신대륙의 발견과 아프리카 정복이 서양의 부를 불려 주고 있을 때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잔인하게 살육당해야 했고, 신앙의 차이나 국가 간에 얽힌 이권의 문제가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인명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런 영욕의 순간순간이 모여 서양사라는 나무의 씨앗, 뿌리, 줄기와 꽃, 열매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을 따라 읽다보면 문명이 처음 생겨났던 때부터 현재에 이르는 서양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허와 실이 무엇인지 극명히 드러난다.
‘씨앗-뿌리-줄기-꽃-열매’의 독특한 서양사
‘통사’라고 불리는 책의 차례는 고대-중세-근대-현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사관을 기준으로 해서 역사의 시간을 나눈다. 그러나 저자는 5천 년에 달하는 서양사의 시간을 씨앗에서부터 열매를 맺기까지의, 나무가 생장하는 과정에 비유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은 씨앗,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뿌리에, 게르만 문명이 로마 문명과 합쳐지는 중세를 줄기에, 대항해 시대와 르네상스?종교개혁을 꽃에,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오늘날에 이르는 세계 정복의 과정은 열매에 빗댄 것이다.
이런 비유가 단순한 수사가 아님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르네상스에 관한 서술 부분이다(하권 36쪽).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이 시대를 역사가들이 ‘르네상스’라고 명명한 이유는 그것을 고대의 ‘부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나 이행기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저자는 수천 년 동안 뿌리와 줄기를 키워온 서양 문명이 드디어 꽃을 피워낸 시기가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르네상스를 ‘개화’가 아닌 ‘부활’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성장 단계의 연속선상에서 르네상스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시대라는 것이다. 서양사를 나무의 생장에 비유한 이런 서술법은 기존의 꽉 막힌 교과서적 시대구분법을 탈피하여 역사를 새롭게 되돌아보게 할 뿐 아니라, 고대-중세-근대로 분절된 서양사의 빈틈을 자연스레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일방통행으로만 달린 서양사
서양사가 동양사와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은 중심의 유무이다. 천자가 이끌어가는 제국이 중심이 되어 별자리처럼 질서정연하게 복속되어 있는 제후국을 통솔하는 것, 그리하여 분열을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든 통일 제국을 이루어내는 과정의 연속이 동양사의 패턴이었다면 서양사는 그 지리적 특성상 통일을 이룰 수 없었고, 하여 끊임없이 중심이 이동하는 특징을 갖는다. 특이한 것은 일방통행 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그 이동 방향이 서쪽으로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서양 문명의 씨앗인 오리엔트 문명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그리스?로마에 자리를 잡았고, 게르만족의 이동에 따라 문명은 다시 서유럽 대륙으로 옮겨간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서양 문명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식되며 또다시 서쪽으로 이동해 극동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극동 세계에까지 자본주의화와 서구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그러나 일방통행이라고 해서 중심이동의 역사가 순조롭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중심이동 과정에서 민족과 민족 간의 충돌이 불가피해지면서 전쟁이나 학살의 형태로 무수한 인명이 살상되기도 했다.
중심이동의 일방통행만큼이나 위험했던 것은 사상의 일방통행이었다.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사람을 잡는 일에 더 많이 이용되었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할라치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는 일이 예사였고, 십자군 원정 자체는 물론 그 과정에서의 살생도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되었다. 종교적인 입장 차이로 신?구교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가 30년 전쟁이라는 긴 싸움을 마친 후에야 서양 세계에 비로소 종교적 평화가 찾아왔고 관용이라는 가치를 얻게 되었다. 관용과 같이 우리가 서양에서 받아들인 덕목들은 원래부터 서양사회에 내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서양사의 쓰라린 경험 속에서 탄생한 것임을『종횡무진 서양사』를 통해 깨닫게 된다.
동양사와 함께 보는 서양사
역사는 저 혼자 굴러가는 법이 없다. 서양사라고 해서 모든 역사가 서양의, 서양을 위한, 서양에 의한 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로마 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던 게르만족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갑작스러운 결심이나 변덕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게르만 족은 당시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훈족의 압박을 받아 대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인데 이 훈족이 바로 동양의 흉노족이다. 재미있는 것은 훈족이 게르만족을 압박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한 무제(武帝)의 흉노 정벌책에 기인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동양과 서양의 ‘합작’이라고 표현한 지은이의 표현 역시 재미있다.
또한 합작은 아니지만 18세기에는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백과사전 편찬 붐이 일어난다. 1772년 프랑스에서는 『백과전서』가 완간되었고 중국 청나라의 강희제, 건륭제 연간에는 각각 『고금도서집성』과『사고전서』가 편찬되는 우연의 일치가 벌어진다. 이에 저자는 18세기 후반이 세계적으로 지식 운동이 활성화되는 시기였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비극적인 사건은 15세기의 조선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영국에서는 리처드 3세가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왕위를 빼앗고 조카 형제를 런던탑에 가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차이가 있다면 세조는 왕위에 올라 그 나름의 업적을 쌓아가며 왕위를 유지했지만 리처드 3세는 헨리 튜더에게 결국 왕위를 빼앗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또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이자 앤 불린과의 스캔들로 종교개혁까지 일으킨 헨리 8세가 형수 캐서린과 결혼했던 일은 부여와 고구려의 형사취수제와 닮아 있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형사취수제는 전 세계적인 결혼 풍습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본문은 물론이고 페이지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면서 서양사를 세밀히 읽어내는 데 도움을 주는 도판이나 각주 속에서 위와 같은 동서양의 비슷한 사건이나 제도들을 만나게 되는 것 또한 『종횡무진 서양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다. 이밖에도 로마의 5현제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양자 상속 제도와 청나라 황제 옹정제의 황태자 밀건법을 비교하거나, 카이사르의 루비콘 강 도강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두고 카이사르를 이성계의 ‘선배’로 칭하는 등 이 책에는 동서양이 필연 혹은 우연으로 만나는 지점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곳곳에 숨어 있어 세계사적 시각에서 서양사를 이해하게끔 해준다.
빛에 가려진 그늘을 읽는 서양사
우리는 대개 서양의 축적된 국부와 안정된 정치 질서, 합리적인 사회 제도 등을 부러워한다. 그리하여 서양사를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건들에 주목하고 그것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다.
1848년 2월 혁명의 결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50년 만에 프랑스는 다시 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황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었다. 큰아버지를 좇아 프랑스 제국을 추구했던 그는 결국 임기 말에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자신의 행위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프랑스 국민들(정확히는 프랑스 남성들)이 그에게 몰표를 주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고 결국 프랑스는 또다시 제국으로 타락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왕의 목을 내려치는 장면보다 공화국이 다시 제국으로 퇴보하고 마는 바로 이 장면이다. 또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국가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주체하지 못하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더 많은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국제전까지 불사한 장면보다는 과학과 산업의 발달이 가져온 환경오염 문제나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발생시킨 사회적 폐단 등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제도적인 면에서의 민주주의라든가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의 수준이라면 이제 우리 역시 서양이 부럽지 않을 만큼은 누리고 있지만 그것은 씨앗, 뿌리, 줄기가 빠진 꽃과 열매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우리에게는 ‘서양화(化)’가 지나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서양사의 빛나는 승리는 서양이 씨앗에 불과했던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노력, 희생이 빚어낸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후발주자의 이득은 승리의 역사를 그대로 모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는 것을『종횡무진 서양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 : 서양사를 시작하면서
씨앗
1 두 차례의 혁명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강에서 일어난 사람들
2 충돌하는 두 문명
신국의 역사|초승달의 양끝이 만났을 때|인류 최초의 국제 사회|새로운 지각 변동|무승부로 끝난 대결
3 새로운 판 짜기
수수께끼의 해적들|지중해로 퍼져나간 오리엔트 문명|수난의 여왕
4 통일 그리고 중심 이동
고대의 군국주의|열매를 주운 페르시아|빛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뿌리 1
1 그리스 문명이 있기까지
서쪽으로 향하는 문명의 빛|오리엔트와 그리스의 중매|크레타를 대신한 그리스|신화와 역사의 경계|암흑을 가져온 민족2 폴리스의 시대
폴리스의 성립|폴리스의 형질 변경|실패한 개혁은 독재를 부른다|스파르타라는 새로운 전통
3 전란의 시대
최초로 맞붙은 동양과 서양|최종 목표는 아테네|마라톤의 결전|최후의 승부|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전후의 새 질서|분쟁의 싹|공멸을 가져온 전쟁
4 사상의 시대
권위의 공백에서 생겨난 철학|이오니아에서 탄생한 철학|그리스로 옮겨온 철학|서양 사상의 골격이 생기다
5 땅끝까지 가본 알렉산드로스
폴리스 체제의 종말|왕국에 접수된 폴리스 체제|땅끝을 보지 못한 알렉산드로스|그리스 + 오리엔트 = 헬레니즘
뿌리 2
1 로마가 있기까지
늑대 우는 언덕에서|조연들이 튼튼해야 주연이 산다|대가 센 로마의 평민들|고난 끝의 통일|귀족정 + 민주정 + 왕정 = 로마 공화정
2 지중해 세계를 향해
숙명의 대결|예기치 않았던 승리|영웅의 출편|또 하나의 영웅
3 제국의 탄생
팽창하는 영토와 누적되는 모순|고대의 군사독재|과두 시대 :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대권 후보의 등장|권력과 죽음을 함께 가져다준 주사위│정답은 제정
4 로마의 평화
더 이상의 정복은 없다|내실 다지기|초기 황제들|평화와 번영의 준비|팍스 로마나|서양 문명의 뿌리
5 제국의 몰락과 고대 세계의 종말
몰락의 시작|위기는 위기를 부르고|수명 연장 조치|두번째 의사|제국과 더불어 성장한 그리스도교|제국의 최후
줄기
1 유럽 세계의 원형
포스트 로마 시대|갈리아의 판도|홀로 남은 로마
2 또 하나의 세계 종교
사막의 바람|제국이 된 공동체|이슬람의 공격과 그리스도교의 방어|중동 세계의 형성|부활한 오리엔트
3 원시 서유럽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립|서유럽의 탄생|중세의 원형|원시 프랑스|환생한 샤를마뉴|기본형과 활용형|원시 영국
4 하늘 하나에 땅 여럿
그리스도교 대 그리스도교|게르만 전통이 낳은 봉건제|장원의 왕과 세 가지 신분|분권적 질서의 시작
5 십자가 없는 십자군
땅에 내려온 교회|대결과 타협|그리스도교의 ‘지하드’|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해체의 시작
6 국민국가의 원형
서유럽의 확대 : 이베리아의 변화|서유럽의 확대 : 영국의 편입|대륙의 봉건 왕국 : 프랑스|서유럽의 그늘 : 독일과 이탈리아| 오지에서 차세대 주자로 : 스칸디나비아
7 해체되는 중세
변방 : 새로운 정치 제도의 등장|중심 : 절대왕권의 시작|변방과 중심의 대결|영광을 가져온 상처|조연들의 사정
8 중세적인, 너무나 중세적인
세계의 중심은 교회|대학과 학문|중세 경제를 굴린 도시
서유럽 왕계표 ① : 프랑크 왕국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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