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그들이 세계를 돕는 이유
- 대등서명
- Thin blue line
- 개인저자
- 카너 폴리 지음 ; 노시내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 마티, 2010
- 형태사항
- 320 p. : 지도 ; 22 cm
- ISBN
- 9788992053358
- 청구기호
- 361.5 F663t
- 일반주기
- 색인수록 원저자명: Conor Foley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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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불량한 인도주의의 불편한 진실, 식량이 넘쳐나도 분쟁은 계속된다!
‘동정’과 ‘책임’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도주의’
폐허가 된 골목을 배경으로 눈물 흘리며 서 있는 흑인 아이의 얼굴이나 몇 조각의 생필품을 머리에 이고 국경을 넘나드는 난민의 뒷모습, 참혹한 테러나 살해로 폐허만 남은 사막 한복판의 도시…. 슬프고 잔인한 이 이미지들은-어디선가 벌어지는 일이겠지만 당장 우리 현실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듯-마치 ‘흑백 사진’처럼 유통된다. ‘흑백 사진’들은 죄책감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로 하여금 ‘뭔가 행동할 책임’을 느끼도록 촉구한다. 구호품 전달과 학교, 병원 설립에서부터 농사짓기에 이르기까지 구호활동은 점점 더 광범위해진다. 하지만 이 동정과 책임의 경계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인도주의의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굶어죽는 아이’와 ‘총칼을 든 반란군’
1999년 3월 ‘국군부대의 동티모르 다국적군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해, 그해 10월부터 4년간 한국의 상록수부대는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평화 유지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한국도 국제사회의 한 일원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에 동참해오고 있다(올해 2010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의 2차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강대국의 인도주의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국군을 파견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구호품 전달과 집짓기, 농사짓기의 차원을 넘어섰다.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 털모자를 짜거나 식빵 모양의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 보내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굶어죽는 아이’에 관한 문제와 ‘총칼을 든 반란군’에 관한 문제가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사실 이 두 이미지는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똑같은 문제이다. 끊이지 않는 민족 분쟁이나 평화적 정권 이양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이 많은 가난한 나라를 위해 유엔(UN), 나토(NATO), 이유(EU)를 비롯한 세계의 인도주의 기구들은 보다 ‘직접적이고 명쾌한 해답’을 주고 싶어 했고, 그리하여 일찌감치 구호품보다는 ‘군대’를 파견하는 일에 관심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정치에 중립적이었던 인도주의가 정치적 색깔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향유해야 한다고 믿는 인권과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는 국제사회의 개입이 교묘히 결합한 것이다.
1960년대 말 비아프라 분쟁에서 그 조짐이 보인 인도주의의 정치화는 90년대 보스니아 전쟁과 르완다 집단학살 사건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어, 코소보 전쟁을 전환점으로 거치며 9?11 테러 후 미국과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점령으로 절정을 맞기에 이른다.
이 책은 19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분쟁지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무력 개입과 정치적 목적을 둘러싼 논란의 배경, 그리고 구호 활동가들이 겪는 아이러니한 현실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의 핵심을 드러낸다.
중립적 인도주의의 한계(1장)
그저 식량이 부족한 곳에 인도주의 활동가가 상주할 리 만무하다. 난민이나 집단 살해, 아사는 언제나 첨예한 정치적 문제, 민족 문제가 대립하는 곳에서 벌어지게 마련이고, 그런 곳으로 활동가들이 투입된다. 저자 카너 폴리는 진솔한 고민으로 1장을 시작한다. “군사적 행동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국제앰네스티의 방향에 우리는 여러 번 좌절했다”(50쪽)면서도, “인도주의 위기에 개입하는 정부를 ‘위선, 이중기준, 선택적 조처’ 등의 이유로 비난하려면, 우선 앰네스티부터 명확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법이다. 인권이라는 대의를 위해 용기 있는 행동을 취하라고 각국 정부에 다그치면서 정작 우리는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솔직할 용기가 없었다”(51쪽)고 고백한다. “1990년대에 인도주의 활동이 급속하게 확대됨과 동시에 인도주의 기구가 떠맡은 구호품 배급자로서의 준공무원적 역할로 인해, 인도적 개입의 정당화 요건과 개입의 시점에 관한 인도주의 기구의 잠재적 영향력은 폭발적으로 커졌다. 몇몇 분쟁국에서는 구호기구가 보건, 교육, 복지 행정까지 도맡는 등 거의 정부의 기능을 담당”(57쪽)한 현실을 거론하며, “인권에 관한 잔소리가 선교행위를 닮아간다”(60쪽)고 털어놓았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이 과연 현실 가능할까? 1장에서는 정부보다 강력해지는 인도주의 기구와 소속 활동가들의 현실적인 사례가 등장한다.
총을 짊어진 구호활동이 시작되다(2장)
2장에서는 ‘어떻게 구호활동이 총을 짊어지게 되었는가’에 관해 얘기한다. 주로 소말리아 내전과 르완다 내전을 예로 드는데, 수십 년간 이어져 왔다는 점과 무력 개입이 실패를 거듭해 ‘유엔의 개입 방식에 큰 교훈’을 남겼다는 점 때문이다. “엔지오는 박해받는 소수를 지원한다는 점에서 군을 동지로 인식했다”(71쪽)는 지적은, 이전에 구호활동가들과 병사들이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장 상황이 상당히 변모했음을 말해 준다. 어떤 경우에는 적십자 스스로 구호물자를 보호하기 위해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무장 경비원을 고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력을 빌린 보호는 총격전으로 이어졌고, 강력한 유엔 군사개입으로 확대됐다(76쪽). 실제로 소말리아에서는 구호물자의 20퍼센트가 수혜 대상자에게 도달하지 않는데, 구호활동이 ‘전시 경제를 지탱한다’는 비판은 1992년 유엔의 무력 개입을 지지하는 주요한 논거였다(75쪽).
르완다 내전 또한 비슷한 양상이었다. 자국 동맹세력을 지원하려는 당파적 의도를 갖고 있던 프랑스의 ‘인도적 개입’은 집단살해의 직접적 가담자의 대부분을 피신시키는 데 기여했다(85쪽). “소말리아를 구하려면 소말리아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라든가 “살인자들만 보호해 준다”는 비난은 인도주의가 ‘무력 개입’을 시작한 후 당연한 꼬리표가 되고 말았다.
관료조직으로 변모한 인도주의 기구(3장)
코소보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유엔의 무력 개입은 완전히 무력했다. 무력 개입뿐만 아니라 이후의 평화지원 사업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소규모 임시파견단으로 시작했던 유렵안보협력기구는 유럽과 북미 직원들로 구성된 관료조직으로 확대되었고, 사기업과 똑같은 조직 문제들로 삐그덕거렸다(115~116쪽). 코소보보호단 대원들은 소수민족에 대한 위협과 폭력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코소보임시행정기구’ 역시 유엔파견단 사상 최대의 비용이 투입되었지만, 별다른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지역 마피아에 의해 변사체로 발견되기 시작했다(115~117쪽). 뿐만 아니라 대거 투입된 구호 활동가들로 인해 주택 문제가 발생하는 한편, 나토의 개입은 전쟁범죄와 인종청소를 방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극적으로 증가시켰다(11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어는 노동당 연설대회에서 같은 주제를 되뇌인다. “르완다 사태가 또다시 벌어진다면 우리는 이에 대응할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허기와 무지와 곤궁과 더러움 속에 살아가는 불쌍한 이들, 이들 또한 우리의 대의명분입니다.”(122쪽) 하지만 “유엔은 인권과 법치를 보장하는 다민족사회의 건설을 위해 효과적인 임시행정기구를 설치하겠노라고 약속했지만 오늘날 코소보는 부정부패가 창궐하고 국제원조에만 의지하는 단일민족사회가 되고 말았다.(119쪽)” 3장에서는 코소보, 유고슬라비아 내전들을 중심으로 무력 개입과 그 이후에 진행되는 현실적인 상황을 지적한다.
10달러짜리 천막에 100만 달러짜리 미사일을 떨어뜨리다니!(4장)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실제 문제는 침공 자체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던 콜린 파월이 인도주의 엔지오를 가리켜, ‘전투부대의 중요한 일환으로 우리의 힘을 몇 배로 보강시켜 주는 존재’라 일컬었을 정도로 이 전쟁을 계기로 인도주의 기구는 완전히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이조차 그다지 문제될 게 없다. 현실의 진짜 문제는, “안보리결의가 복구와 재건사업 지원을 아프간 임시행정부와 그 후임자들이 주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후임에도, 미국 정부가 기존 아프간 정치세력과 그들의 후원조직을 체제 내로 흡수하기로 의식적인 결정을 내려 군벌 100명이 대표로 참가하도록 허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2005년 선출될 의원후보 가운데 심각한 인권침해범이나 마약밀매범을 제외하는 작업이 실패로 돌아갔다”(129~130쪽)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서구의 도움을 얻어 세워진 신정부의 관료들이 토지 강탈, 재물 착취,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국제사회가 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실패는 놀랄 만큼 닮았다. 과도한 자신감, 허술한 준비, 부실한 실행, 타성에 젖은 태도, 허송세월, 패닉, 자기기만을 똑같이 순서대로 거치고 있다. 두 나라에 대한 서구의 개입은 주민의 고통을 덜겠다는 것이 공식적으로조차 일차적 동기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인도적 견지에서 이루어진 개입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부시와 블레어는 인도주의의 수사법을 사용함으로써 미래에 생길 수 있는 개입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경험은 인도주의 활동가들로 하여금 중립성과 독립성의 원칙에 양보란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숙고하도록 다시 한번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152쪽).”
식량이 넘쳐나는데도 학살은 계속된다(5장)
쓰나미로 수십 만의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한 스리랑카,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이전의 상황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미 내전으로 국명마저 바뀐 스리랑카와 아체와 동티모르 분쟁으로 오래 전부터 평화 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던 인도네시아가 치명적인 자연재해를 입자, 모든 것이 재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구호물자가 쏟아져 들어왔고, 구호 활동은 서구 암체어 지식인들의 조소와 어마어마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특이한 현상은, 똑같은 상황의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모했다(159~173쪽)는 것이다. 특히 나오미 클라인의 현실과 다른 평가(159쪽)와 현실 이해(168쪽)는 고약한 프로파간다를 살포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동티모르의 경우 “전적으로 유엔 책임”(176쪽)으로 몰아가는 서구 철학자들의 비난에 “분쟁이나 재해 발생 후 구호활동이 펼쳐지는 방식에 관해 물론 비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특정 분쟁의 전개 양태에 구호활동이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임을 인식해야 한다”(181쪽)고 저자는 답하며,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비판에 활동가들조차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고 시인했다.
동티모르는 이제 아시아에서 가장 비싼 곳이다. 주민 대다수는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 갈 엄두도 못 낸다. 이 음식점들은 동티모르 평균 급료의 200배가 넘는 월급을 받는 국제구호요원들을 상대로 한다. … 코소보의 수도에서 국제직원들을 태우는 운전사들이 버는 돈은 그 나라 대학교수 월급의 10배에 달한다. 전쟁이 끝난 지 3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유엔이 행정명령으로 코소보를 다스린다는 기사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렸다. 우표, 여권, 운전면허증도유엔이 발행하며, 의회가 내린 결정은 유엔 행정가의 서명이 없으면 무효다. (181~182쪽)
전쟁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못한다(6장, 7장)
저자는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은 유엔을 통한 인도주의적 개입이 지닌 정당성을 크게 훼손했다고 지적한다.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자 영국과 미국의 정치인들이 내세운 침공의 법적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유엔이 드러내놓고 이를 비판하기도 힘들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유엔과 같은 다자기구의 권위를 무시하고 약화시키려는 이들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이 이라크 국민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국가 내의 인권을 문제 삼아 인간의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전쟁을 일으키는 무력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북한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도 북한 국민의 인권이니까 말이다.
개별 사안마다 한시적으로 운용되던 방식에서 벗어나 상설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에 반대하는 미국의 주장은 놀랍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전임 클린턴 대통령의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서명을 철회했을 뿐 아니라 미국 병사의 “100퍼센트 기소 면제”를 요구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미국이 한 명이라도 헤이그에 기소될 경우 네덜란드에 대한 군사공격을 승인하는 법까지 통과시켰다.(215쪽) 저자는 인도주의적 개입의 책임과 의무만큼 그 개입에 뒤따르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까다로운 딜레마(8장, 에필로그)
복잡한 현실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국제법 전문가들과 일부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여전히 정치적 인도주의를 옹호한다. 이들은 2003년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발생한 학살을 ‘집단살해’로 선언하지 않고 국제사회의 적극 개입을 독려하지 않은 유엔을 ‘대량살육 방조범’으로 규정했다. 반면에 이런 비판도 공존한다. “백인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충동을 안고 랜드 크루저와 위성전화와 신판 자유주의·제국주의적 신념으로 중무장한 일군의 엔지오가 모가디슈, 고마, 사라예보로 행진했다. 현지 정부는 뒤로 물러나고 이들 지역은 순식간에 인도주의 군단의 통제를 받는 사실상의 점령지로 변했다”(266쪽). 이런 비판에는 좌파·우파가 따로 없고, 인도주의 운동 내부에도 이 같은 견해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인도주의 활동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저자 역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 세계가 추구해온 인류의 ‘보편적 정의’를 믿는다. “60년대 비아프라, 80년대 에티오피아, 90년대 초 소말리아 구호식량 호송작전 등은 모두 순수하게 이타적이었다”(267쪽). 그렇다면 저자는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인가’ 아니면 ‘인도주의의 전통적인 중립성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양쪽의 저울질이 아닌, 개입에 관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른 담론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며(283쪽), 하루빨리 “서구 자유주의가 고안하고 정제해서 수출용으로 포장한 인권 개념을 버리라”(284쪽)고 호소한다.
이 책은, 굶주림으로 지쳐 흐느끼는 흑인 아이의 흑백사진 그 이면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자못 낯설었던 분쟁 지역과 당사자들 간의 이야기는 2, 3장을 넘기면서 의외로 쉽고 익숙하게 눈에 들어온다. 작은 단신으로 소개되거나 한 차례 이슈를 일으켰다 사그라지는 국제 분쟁들이 사실은 국내 정치와 경제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의 발달이 일어나 가장 많은 이들이 혜택을 입은 세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많은 이들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의 개념이 확대되고 평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와중에 전쟁 또한 급속하게 성장, 발달한다. 저자는 ‘정치적으로 희생당하는 인권과 인도주의의 현실’을 드러내지만, 각각의 사건과 진행 과정을 추적하는 저자의 의식은 늘 위태롭고 조심스럽다. 어쩌면, ‘도와야 한다’, ‘돕지 말아야 한다’라는 일방적 논의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되려 끝없는 고민을 안겨주는 한 권의 묵직하고 깊은 고민과 숙제가 될 공산이 클 것이다.
‘동정’과 ‘책임’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도주의’
폐허가 된 골목을 배경으로 눈물 흘리며 서 있는 흑인 아이의 얼굴이나 몇 조각의 생필품을 머리에 이고 국경을 넘나드는 난민의 뒷모습, 참혹한 테러나 살해로 폐허만 남은 사막 한복판의 도시…. 슬프고 잔인한 이 이미지들은-어디선가 벌어지는 일이겠지만 당장 우리 현실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듯-마치 ‘흑백 사진’처럼 유통된다. ‘흑백 사진’들은 죄책감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로 하여금 ‘뭔가 행동할 책임’을 느끼도록 촉구한다. 구호품 전달과 학교, 병원 설립에서부터 농사짓기에 이르기까지 구호활동은 점점 더 광범위해진다. 하지만 이 동정과 책임의 경계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인도주의의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굶어죽는 아이’와 ‘총칼을 든 반란군’
1999년 3월 ‘국군부대의 동티모르 다국적군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해, 그해 10월부터 4년간 한국의 상록수부대는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의 평화 유지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한국도 국제사회의 한 일원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에 동참해오고 있다(올해 2010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의 2차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강대국의 인도주의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국군을 파견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구호품 전달과 집짓기, 농사짓기의 차원을 넘어섰다.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 털모자를 짜거나 식빵 모양의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 보내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굶어죽는 아이’에 관한 문제와 ‘총칼을 든 반란군’에 관한 문제가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만, 사실 이 두 이미지는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똑같은 문제이다. 끊이지 않는 민족 분쟁이나 평화적 정권 이양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이 많은 가난한 나라를 위해 유엔(UN), 나토(NATO), 이유(EU)를 비롯한 세계의 인도주의 기구들은 보다 ‘직접적이고 명쾌한 해답’을 주고 싶어 했고, 그리하여 일찌감치 구호품보다는 ‘군대’를 파견하는 일에 관심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정치에 중립적이었던 인도주의가 정치적 색깔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향유해야 한다고 믿는 인권과 내정간섭의 소지가 있는 국제사회의 개입이 교묘히 결합한 것이다.
1960년대 말 비아프라 분쟁에서 그 조짐이 보인 인도주의의 정치화는 90년대 보스니아 전쟁과 르완다 집단학살 사건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어, 코소보 전쟁을 전환점으로 거치며 9?11 테러 후 미국과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점령으로 절정을 맞기에 이른다.
이 책은 19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분쟁지역에 대한 인도주의적 무력 개입과 정치적 목적을 둘러싼 논란의 배경, 그리고 구호 활동가들이 겪는 아이러니한 현실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문제의 핵심을 드러낸다.
중립적 인도주의의 한계(1장)
그저 식량이 부족한 곳에 인도주의 활동가가 상주할 리 만무하다. 난민이나 집단 살해, 아사는 언제나 첨예한 정치적 문제, 민족 문제가 대립하는 곳에서 벌어지게 마련이고, 그런 곳으로 활동가들이 투입된다. 저자 카너 폴리는 진솔한 고민으로 1장을 시작한다. “군사적 행동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국제앰네스티의 방향에 우리는 여러 번 좌절했다”(50쪽)면서도, “인도주의 위기에 개입하는 정부를 ‘위선, 이중기준, 선택적 조처’ 등의 이유로 비난하려면, 우선 앰네스티부터 명확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법이다. 인권이라는 대의를 위해 용기 있는 행동을 취하라고 각국 정부에 다그치면서 정작 우리는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솔직할 용기가 없었다”(51쪽)고 고백한다. “1990년대에 인도주의 활동이 급속하게 확대됨과 동시에 인도주의 기구가 떠맡은 구호품 배급자로서의 준공무원적 역할로 인해, 인도적 개입의 정당화 요건과 개입의 시점에 관한 인도주의 기구의 잠재적 영향력은 폭발적으로 커졌다. 몇몇 분쟁국에서는 구호기구가 보건, 교육, 복지 행정까지 도맡는 등 거의 정부의 기능을 담당”(57쪽)한 현실을 거론하며, “인권에 관한 잔소리가 선교행위를 닮아간다”(60쪽)고 털어놓았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이 과연 현실 가능할까? 1장에서는 정부보다 강력해지는 인도주의 기구와 소속 활동가들의 현실적인 사례가 등장한다.
총을 짊어진 구호활동이 시작되다(2장)
2장에서는 ‘어떻게 구호활동이 총을 짊어지게 되었는가’에 관해 얘기한다. 주로 소말리아 내전과 르완다 내전을 예로 드는데, 수십 년간 이어져 왔다는 점과 무력 개입이 실패를 거듭해 ‘유엔의 개입 방식에 큰 교훈’을 남겼다는 점 때문이다. “엔지오는 박해받는 소수를 지원한다는 점에서 군을 동지로 인식했다”(71쪽)는 지적은, 이전에 구호활동가들과 병사들이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장 상황이 상당히 변모했음을 말해 준다. 어떤 경우에는 적십자 스스로 구호물자를 보호하기 위해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무장 경비원을 고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력을 빌린 보호는 총격전으로 이어졌고, 강력한 유엔 군사개입으로 확대됐다(76쪽). 실제로 소말리아에서는 구호물자의 20퍼센트가 수혜 대상자에게 도달하지 않는데, 구호활동이 ‘전시 경제를 지탱한다’는 비판은 1992년 유엔의 무력 개입을 지지하는 주요한 논거였다(75쪽).
르완다 내전 또한 비슷한 양상이었다. 자국 동맹세력을 지원하려는 당파적 의도를 갖고 있던 프랑스의 ‘인도적 개입’은 집단살해의 직접적 가담자의 대부분을 피신시키는 데 기여했다(85쪽). “소말리아를 구하려면 소말리아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라든가 “살인자들만 보호해 준다”는 비난은 인도주의가 ‘무력 개입’을 시작한 후 당연한 꼬리표가 되고 말았다.
관료조직으로 변모한 인도주의 기구(3장)
코소보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유엔의 무력 개입은 완전히 무력했다. 무력 개입뿐만 아니라 이후의 평화지원 사업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소규모 임시파견단으로 시작했던 유렵안보협력기구는 유럽과 북미 직원들로 구성된 관료조직으로 확대되었고, 사기업과 똑같은 조직 문제들로 삐그덕거렸다(115~116쪽). 코소보보호단 대원들은 소수민족에 대한 위협과 폭력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코소보임시행정기구’ 역시 유엔파견단 사상 최대의 비용이 투입되었지만, 별다른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지역 마피아에 의해 변사체로 발견되기 시작했다(115~117쪽). 뿐만 아니라 대거 투입된 구호 활동가들로 인해 주택 문제가 발생하는 한편, 나토의 개입은 전쟁범죄와 인종청소를 방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극적으로 증가시켰다(11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어는 노동당 연설대회에서 같은 주제를 되뇌인다. “르완다 사태가 또다시 벌어진다면 우리는 이에 대응할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허기와 무지와 곤궁과 더러움 속에 살아가는 불쌍한 이들, 이들 또한 우리의 대의명분입니다.”(122쪽) 하지만 “유엔은 인권과 법치를 보장하는 다민족사회의 건설을 위해 효과적인 임시행정기구를 설치하겠노라고 약속했지만 오늘날 코소보는 부정부패가 창궐하고 국제원조에만 의지하는 단일민족사회가 되고 말았다.(119쪽)” 3장에서는 코소보, 유고슬라비아 내전들을 중심으로 무력 개입과 그 이후에 진행되는 현실적인 상황을 지적한다.
10달러짜리 천막에 100만 달러짜리 미사일을 떨어뜨리다니!(4장)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실제 문제는 침공 자체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던 콜린 파월이 인도주의 엔지오를 가리켜, ‘전투부대의 중요한 일환으로 우리의 힘을 몇 배로 보강시켜 주는 존재’라 일컬었을 정도로 이 전쟁을 계기로 인도주의 기구는 완전히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이조차 그다지 문제될 게 없다. 현실의 진짜 문제는, “안보리결의가 복구와 재건사업 지원을 아프간 임시행정부와 그 후임자들이 주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후임에도, 미국 정부가 기존 아프간 정치세력과 그들의 후원조직을 체제 내로 흡수하기로 의식적인 결정을 내려 군벌 100명이 대표로 참가하도록 허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2005년 선출될 의원후보 가운데 심각한 인권침해범이나 마약밀매범을 제외하는 작업이 실패로 돌아갔다”(129~130쪽)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서구의 도움을 얻어 세워진 신정부의 관료들이 토지 강탈, 재물 착취,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국제사회가 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실패는 놀랄 만큼 닮았다. 과도한 자신감, 허술한 준비, 부실한 실행, 타성에 젖은 태도, 허송세월, 패닉, 자기기만을 똑같이 순서대로 거치고 있다. 두 나라에 대한 서구의 개입은 주민의 고통을 덜겠다는 것이 공식적으로조차 일차적 동기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인도적 견지에서 이루어진 개입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데도 부시와 블레어는 인도주의의 수사법을 사용함으로써 미래에 생길 수 있는 개입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경험은 인도주의 활동가들로 하여금 중립성과 독립성의 원칙에 양보란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숙고하도록 다시 한번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152쪽).”
식량이 넘쳐나는데도 학살은 계속된다(5장)
쓰나미로 수십 만의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한 스리랑카,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이전의 상황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미 내전으로 국명마저 바뀐 스리랑카와 아체와 동티모르 분쟁으로 오래 전부터 평화 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던 인도네시아가 치명적인 자연재해를 입자, 모든 것이 재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구호물자가 쏟아져 들어왔고, 구호 활동은 서구 암체어 지식인들의 조소와 어마어마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특이한 현상은, 똑같은 상황의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모했다(159~173쪽)는 것이다. 특히 나오미 클라인의 현실과 다른 평가(159쪽)와 현실 이해(168쪽)는 고약한 프로파간다를 살포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동티모르의 경우 “전적으로 유엔 책임”(176쪽)으로 몰아가는 서구 철학자들의 비난에 “분쟁이나 재해 발생 후 구호활동이 펼쳐지는 방식에 관해 물론 비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특정 분쟁의 전개 양태에 구호활동이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임을 인식해야 한다”(181쪽)고 저자는 답하며,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비판에 활동가들조차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고 시인했다.
동티모르는 이제 아시아에서 가장 비싼 곳이다. 주민 대다수는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 갈 엄두도 못 낸다. 이 음식점들은 동티모르 평균 급료의 200배가 넘는 월급을 받는 국제구호요원들을 상대로 한다. … 코소보의 수도에서 국제직원들을 태우는 운전사들이 버는 돈은 그 나라 대학교수 월급의 10배에 달한다. 전쟁이 끝난 지 3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유엔이 행정명령으로 코소보를 다스린다는 기사가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렸다. 우표, 여권, 운전면허증도유엔이 발행하며, 의회가 내린 결정은 유엔 행정가의 서명이 없으면 무효다. (181~182쪽)
전쟁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못한다(6장, 7장)
저자는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은 유엔을 통한 인도주의적 개입이 지닌 정당성을 크게 훼손했다고 지적한다.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자 영국과 미국의 정치인들이 내세운 침공의 법적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유엔이 드러내놓고 이를 비판하기도 힘들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유엔과 같은 다자기구의 권위를 무시하고 약화시키려는 이들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이 이라크 국민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국가 내의 인권을 문제 삼아 인간의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전쟁을 일으키는 무력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북한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도 북한 국민의 인권이니까 말이다.
개별 사안마다 한시적으로 운용되던 방식에서 벗어나 상설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에 반대하는 미국의 주장은 놀랍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전임 클린턴 대통령의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서명을 철회했을 뿐 아니라 미국 병사의 “100퍼센트 기소 면제”를 요구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미국이 한 명이라도 헤이그에 기소될 경우 네덜란드에 대한 군사공격을 승인하는 법까지 통과시켰다.(215쪽) 저자는 인도주의적 개입의 책임과 의무만큼 그 개입에 뒤따르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까다로운 딜레마(8장, 에필로그)
복잡한 현실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국제법 전문가들과 일부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여전히 정치적 인도주의를 옹호한다. 이들은 2003년 수단의 다르푸르에서 발생한 학살을 ‘집단살해’로 선언하지 않고 국제사회의 적극 개입을 독려하지 않은 유엔을 ‘대량살육 방조범’으로 규정했다. 반면에 이런 비판도 공존한다. “백인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충동을 안고 랜드 크루저와 위성전화와 신판 자유주의·제국주의적 신념으로 중무장한 일군의 엔지오가 모가디슈, 고마, 사라예보로 행진했다. 현지 정부는 뒤로 물러나고 이들 지역은 순식간에 인도주의 군단의 통제를 받는 사실상의 점령지로 변했다”(266쪽). 이런 비판에는 좌파·우파가 따로 없고, 인도주의 운동 내부에도 이 같은 견해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인도주의 활동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저자 역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 세계가 추구해온 인류의 ‘보편적 정의’를 믿는다. “60년대 비아프라, 80년대 에티오피아, 90년대 초 소말리아 구호식량 호송작전 등은 모두 순수하게 이타적이었다”(267쪽). 그렇다면 저자는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인가’ 아니면 ‘인도주의의 전통적인 중립성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양쪽의 저울질이 아닌, 개입에 관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른 담론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며(283쪽), 하루빨리 “서구 자유주의가 고안하고 정제해서 수출용으로 포장한 인권 개념을 버리라”(284쪽)고 호소한다.
이 책은, 굶주림으로 지쳐 흐느끼는 흑인 아이의 흑백사진 그 이면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자못 낯설었던 분쟁 지역과 당사자들 간의 이야기는 2, 3장을 넘기면서 의외로 쉽고 익숙하게 눈에 들어온다. 작은 단신으로 소개되거나 한 차례 이슈를 일으켰다 사그라지는 국제 분쟁들이 사실은 국내 정치와 경제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의 발달이 일어나 가장 많은 이들이 혜택을 입은 세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많은 이들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의 개념이 확대되고 평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와중에 전쟁 또한 급속하게 성장, 발달한다. 저자는 ‘정치적으로 희생당하는 인권과 인도주의의 현실’을 드러내지만, 각각의 사건과 진행 과정을 추적하는 저자의 의식은 늘 위태롭고 조심스럽다. 어쩌면, ‘도와야 한다’, ‘돕지 말아야 한다’라는 일방적 논의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되려 끝없는 고민을 안겨주는 한 권의 묵직하고 깊은 고민과 숙제가 될 공산이 클 것이다.
목차
주요 분쟁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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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정치적 인도주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도사리나
1 정부보다 강력해지는 인도주의 기구
2 총을 든 구호 활동, 인도적 개입
3 코소보, 부작용을 일으킨 무력 개입
4 아프가니스탄, 명백한 정치적 목표
5 스리랑카.인도네시아, 구호품이 넘쳐나도 학살은 계속된다
6 보호책임, 어디까지 가능한가
7 보편적 정의와 평화 사이의 딜레마
8 중립과 책임의 경계
나오며: 수출용 인권은 어떻게 전쟁으로 치닫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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