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흔들리는 동맹: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
- 대등서명
- Uncertain partners
- 발행사항
- 서울 :,일조각,,2011
- 형태사항
- 546 p. : 삽화 ; 23 cm
- ISBN
- 9788933706114
- 청구기호
- 349.11 곤811ㅎ
- 일반주기
- 원저자명: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薛理泰
- 서지주기
- 참고문헌(p. 513-534)과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
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3327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3327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1945년부터 한국전쟁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이 책에 서술된 시기는 1945년부터 한국전쟁까지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미 알고 있듯 이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반면, 중국에서는 제2차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굳혀가던 중국공산당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세계적으로는 미·소 대립의 이른바 냉전이 시작되었으며, 한반도에서는 남북이 분단되어 결국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즉 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가 수립되어가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중국과 소련은 두 차례의 동맹을 맺게 되는데, 그 첫 번째는 1945년 소련과 중국국민당 사이에 맺어진 동맹이고, 두 번째는 1950년 소련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맺어진 동맹이다.
소련과 중국국민당 사이에 맺어진 1945년 중소 동맹
먼저 소련은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열린 비밀회의(1945년 2월 4~11일)의 협정(얄타협정)에 따라 중국국민당 정부와 1945넌 8월 14일 동맹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첫 번째 중소 동맹을 맺었다. 이 첫 번째 중소 동맹은 1차(1945년 6월 30일~7월 13일)와 2차(8월 7~14일)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1차 협상 때 소련의 스탈린이 가졌던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는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문제였는데, 소련의 대일 전쟁 참전이 미국의 피해를 줄이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국민당 정부에 소련 측 조건을 수용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2차 협상 때는 원자폭탄의 등장―2차 협상이 시작되기 전날인 8월 6일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으로 파괴되었다―으로 소련의 대일 전쟁 참전의 전제는 약화되었지만, 8월 9일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한 소련이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는 것은 거의 확실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8월 14일 맺어진 중소 협정(중소우호동맹조약)은 소련에게 지나치게 유리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국민당 정부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한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의 국민투표 결과에 꼼짝 못 했을 뿐 아니라, 30년에 걸쳐 다롄大連 항을 소련에 임대해줄 것과 뤼순旅順을 중·소 군대가 독점적으로 해군기지로 사용하는 것, 그리고 나중에 중국 창춘선이라고 불리는 만주철도를 중국과 소련이 공동 소유하는 것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는 그 이후 1950년의 중소 동맹 때에도 중국의 발목을 잡는 내용이었다.
이 당시 스탈린에게 소련의 안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는데, 스탈린에게 소련의 안보를 유지하는 상태란 중국을 포함한 약소국의 이익을 강대국인 소련의 이익에 종사시키면서 세계의 전략 지역을 세력범위별로 나누어 소련 주변에 비무장 중립(완충)지대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련이 미국과 직접 맞닥치는 경우를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이는 1950년 맺은 중소 동맹 때와 한국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련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맺어진 1950년 중소 동맹
중국과 소련의 두 번째 동맹은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굳힌 중국공산당과 소련 사이에 1950년 2월 14일 체결되었다.
1949년 1월의 미코얀Anastas Mikoyan(당시 소련 각료 회의 부의장)의 중국 방문과 8월의 류사오치劉少奇(당시 중국공산당 서열 2위)의 모스크바 방문을 통해 소련과 중국은 서로의 이해관계와 서로가 처한 상황들을 확인하면서 1950년에 체결될 중소 동맹의 일정 부분을 사전 조율했지만, 1949년 12월에 시작된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의 비밀 협상은 여전히 조율되지 않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의 ‘밀고 당기기’ 식의 미묘한 협상 과정은 이 책의 3장에 자세하고 흥미롭게 설명되어 있다.
마오쩌둥에게는 1949년 10월 1일 새로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 확실한 우방이 필요했고, 스탈린에게는 미국과의 직접 대립을 막는 중간지대로서 중국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두 나라가 처한 상황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이는 1949년 12월 16일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이후 1950년 1월 말까지 여러 차례 계속된 회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1950년 2월 14일 중소 협정(중소우호동맹조약)은 체결되어 공식적으로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友好同盟互助條約)’으로 명명되었다. 이 조약과 함께 창춘철도, 뤼순, 다롄에 관한 협정, 중국에 대한 차관 대부 승인에 대한 협정 등의 여러 협정과 암시만 있었을 뿐 1989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추가 협정이 체결되었다.
특히 이 추가 협정의 비밀 조항은 중소 양 당사국에 동일한 제약을 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련에 유리한 조항이었다. 이 조약의 비준을 위해 1950년 4월에 열린 중국 중앙인민정부위원회 회의의 찬성투표에서 마오쩌둥 자신은 정작 손을 들지 않은 것으로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조약은 영토 안보에 대한 스탈린의 개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소련 국경의 상당한 지역에 완충(중간)지대를 강화하고 크렘린이 선호하는 비밀외교의 성향에 잘 맞는 것이었다.
중소 동맹은 한국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중소 동맹의 체결 이후 채 다섯 달도 안 돼 일어난 한국전쟁은 중소 동맹의 시험 무대였다. 이 책의 저자들은 스탈린, 김일성, 마오쩌둥 등의 상부 정치에 중심을 두고 한국전쟁이 결정되는 과정과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 처음 몇 년간 김일성은 전적으로 소련에 의지했고,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불려도 괜찮았다. 그리고 김일성의 집권과 북한 정권의 형성에 소련이 직접 개입한 것은 스탈린이 한반도 내에 전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게 했다. 김일성은 교묘하게 소련이 자신의 정권에 대해 확고한 개입을 하도록 만들었고, 항상 냉엄한 미소의 국제적 적대 관계를 이용해 한반도의 상황을 작위적으로 모스크바에 전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주로 관심이 있었던 스탈린에게 김일성은 거대한 장기판에 놓인 하나의 졸에 불과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소련이 직접 행동을 취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마오쩌둥이 북한을 지원하도록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1950년 3월 20일에서 4월 25일 사이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했던 김일성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두려워한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이유를 들어 남침에 대한 스탈린의 승낙을 얻어냈다. “결정적인 기습전이며 전쟁은 3일 안에 승리로 끝날 것이고, 남조선의 20만 당원이 봉기할 것이며, 남조선 남부에 유격대가 있고, 미국은 참전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과 김일성 둘 다 전쟁의 전체적인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전쟁에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전쟁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다. 소련 방문 때 김일성은 ‘남반부 폭동’이 일어날 거라는 예측이 잘못될 경우를 우려해 남한 상황에 관한 스탈린의 질문에 대해 박헌영에게 대답하게 했다. 박헌영은 전쟁이 끝난 후 3년이 채 되지 않아 사형되었는데, 그의 공식적인 죄목은 남한의 혁명 역량에 대한 김일성의 판단에 악영향을 끼쳐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중국인들에게 의무를 지우기 위해 북한 측이 마오쩌둥과 논의하도록 했다.
스탈린의 계산은 중국의 타이완 침공과는 달리 서방이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한반도에서 취할 중국의 군사행동은 중국과 서방 간의 대립을 더 확실히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김일성의 계획을 승인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마오쩌둥이 모든 결정을 맡았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5월 13일에서 16일 사이 마오쩌둥을 만나기 위해 평양을 떠났다.
한편 마오쩌둥은 이 당시 타이완 점령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소련의 지원 약속을 얻어낸 상태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이완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과 같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으로부터의 원조를 위험하게 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결정에 대한 스탈린의 확답은 전쟁 준비를 감독하기 위해 보낸 소련 고문단으로 대신했고, 이 고문단과 북한군은 조직을 구성했으며, 이 조직의 회의 과정에서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최종 결의를 선언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저자들은 보고 있다.
드디어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의 결정에 따라 남침은 국경분쟁이 빈발했던 한반도 서쪽의 옹진반도에서 시작되어 38선을 따라 확대되었다.
그리고 7월 7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 사령관이 지휘하는 UN군 사령부의 창설을 승인했다. 이때 소련 대표는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했는데, 기존의 소련, 중국, 한국의 연구자들이 소련의 불참을 실수라고 하지만 이는 무심코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저자들은 소련 대표가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한 이유를 두 가지 들고 있다. 첫 번째로, 스탈린은 이 시점에서 전쟁이 승인된 작전 계획에 따라 진행될 것으로 믿고 있었고, 그럴 경우 UN의 이런 결정은 부적절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중소 조약과 관계되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바로 그날,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는데 소련과 미국의 직접 충돌은 피한다는 것은 스탈린의 오랜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미군이 UN군의 깃발 아래 움직이는 한 선전포고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환영했다. 왜냐하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면 중국이나 미국 어느 한쪽이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를 선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소 조약에 따라 ‘즉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지원과 다른 원조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에 개입한 UN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에 반격을 가하고, 이에 마오쩌둥은 10월 13일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하게 되며,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종결되었다.
동안 몰랐던 사건들의 숨겨진 모습들이 드러나다
밖으로 드러난 현상만으로 일어난 사건을 볼 때 그 사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과거의 사실일 경우는 더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과 한국전쟁에 대해 그동안 몰랐던 숨겨진 면들을 1990년대에 새롭게 공개된 자료들을 통해 드러내줌으로써 이 사건들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준다.
그리고 이 책은 소련과 중국의 대외 정책에 관해 연구하는 연구자뿐 아니라 국제 관계와 냉전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물론, 이 부분에 관심 있는 이들이 한 번쯤은 꼭 읽어봐야 할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부록에 실린 중소 동맹과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이 대표적이다. 물론 원서의 출간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번역, 출간됨으로써 중소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숨겨진 면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에 서술된 시기는 1945년부터 한국전쟁까지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미 알고 있듯 이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반면, 중국에서는 제2차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굳혀가던 중국공산당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세계적으로는 미·소 대립의 이른바 냉전이 시작되었으며, 한반도에서는 남북이 분단되어 결국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였다. 즉 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가 수립되어가던 때였다. 이런 시기에 중국과 소련은 두 차례의 동맹을 맺게 되는데, 그 첫 번째는 1945년 소련과 중국국민당 사이에 맺어진 동맹이고, 두 번째는 1950년 소련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맺어진 동맹이다.
소련과 중국국민당 사이에 맺어진 1945년 중소 동맹
먼저 소련은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열린 비밀회의(1945년 2월 4~11일)의 협정(얄타협정)에 따라 중국국민당 정부와 1945넌 8월 14일 동맹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첫 번째 중소 동맹을 맺었다. 이 첫 번째 중소 동맹은 1차(1945년 6월 30일~7월 13일)와 2차(8월 7~14일)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1차 협상 때 소련의 스탈린이 가졌던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는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문제였는데, 소련의 대일 전쟁 참전이 미국의 피해를 줄이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국민당 정부에 소련 측 조건을 수용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2차 협상 때는 원자폭탄의 등장―2차 협상이 시작되기 전날인 8월 6일 히로시마가 원자폭탄으로 파괴되었다―으로 소련의 대일 전쟁 참전의 전제는 약화되었지만, 8월 9일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한 소련이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는 것은 거의 확실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8월 14일 맺어진 중소 협정(중소우호동맹조약)은 소련에게 지나치게 유리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국민당 정부는 전통적으로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한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의 국민투표 결과에 꼼짝 못 했을 뿐 아니라, 30년에 걸쳐 다롄大連 항을 소련에 임대해줄 것과 뤼순旅順을 중·소 군대가 독점적으로 해군기지로 사용하는 것, 그리고 나중에 중국 창춘선이라고 불리는 만주철도를 중국과 소련이 공동 소유하는 것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는 그 이후 1950년의 중소 동맹 때에도 중국의 발목을 잡는 내용이었다.
이 당시 스탈린에게 소련의 안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는데, 스탈린에게 소련의 안보를 유지하는 상태란 중국을 포함한 약소국의 이익을 강대국인 소련의 이익에 종사시키면서 세계의 전략 지역을 세력범위별로 나누어 소련 주변에 비무장 중립(완충)지대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소련이 미국과 직접 맞닥치는 경우를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이는 1950년 맺은 중소 동맹 때와 한국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련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맺어진 1950년 중소 동맹
중국과 소련의 두 번째 동맹은 국공 내전에서 승리를 굳힌 중국공산당과 소련 사이에 1950년 2월 14일 체결되었다.
1949년 1월의 미코얀Anastas Mikoyan(당시 소련 각료 회의 부의장)의 중국 방문과 8월의 류사오치劉少奇(당시 중국공산당 서열 2위)의 모스크바 방문을 통해 소련과 중국은 서로의 이해관계와 서로가 처한 상황들을 확인하면서 1950년에 체결될 중소 동맹의 일정 부분을 사전 조율했지만, 1949년 12월에 시작된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의 비밀 협상은 여전히 조율되지 않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의 ‘밀고 당기기’ 식의 미묘한 협상 과정은 이 책의 3장에 자세하고 흥미롭게 설명되어 있다.
마오쩌둥에게는 1949년 10월 1일 새로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 확실한 우방이 필요했고, 스탈린에게는 미국과의 직접 대립을 막는 중간지대로서 중국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두 나라가 처한 상황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이는 1949년 12월 16일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이후 1950년 1월 말까지 여러 차례 계속된 회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1950년 2월 14일 중소 협정(중소우호동맹조약)은 체결되어 공식적으로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友好同盟互助條約)’으로 명명되었다. 이 조약과 함께 창춘철도, 뤼순, 다롄에 관한 협정, 중국에 대한 차관 대부 승인에 대한 협정 등의 여러 협정과 암시만 있었을 뿐 1989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추가 협정이 체결되었다.
특히 이 추가 협정의 비밀 조항은 중소 양 당사국에 동일한 제약을 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련에 유리한 조항이었다. 이 조약의 비준을 위해 1950년 4월에 열린 중국 중앙인민정부위원회 회의의 찬성투표에서 마오쩌둥 자신은 정작 손을 들지 않은 것으로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조약은 영토 안보에 대한 스탈린의 개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소련 국경의 상당한 지역에 완충(중간)지대를 강화하고 크렘린이 선호하는 비밀외교의 성향에 잘 맞는 것이었다.
중소 동맹은 한국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중소 동맹의 체결 이후 채 다섯 달도 안 돼 일어난 한국전쟁은 중소 동맹의 시험 무대였다. 이 책의 저자들은 스탈린, 김일성, 마오쩌둥 등의 상부 정치에 중심을 두고 한국전쟁이 결정되는 과정과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 처음 몇 년간 김일성은 전적으로 소련에 의지했고,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불려도 괜찮았다. 그리고 김일성의 집권과 북한 정권의 형성에 소련이 직접 개입한 것은 스탈린이 한반도 내에 전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게 했다. 김일성은 교묘하게 소련이 자신의 정권에 대해 확고한 개입을 하도록 만들었고, 항상 냉엄한 미소의 국제적 적대 관계를 이용해 한반도의 상황을 작위적으로 모스크바에 전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주로 관심이 있었던 스탈린에게 김일성은 거대한 장기판에 놓인 하나의 졸에 불과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소련이 직접 행동을 취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마오쩌둥이 북한을 지원하도록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1950년 3월 20일에서 4월 25일 사이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했던 김일성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두려워한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이유를 들어 남침에 대한 스탈린의 승낙을 얻어냈다. “결정적인 기습전이며 전쟁은 3일 안에 승리로 끝날 것이고, 남조선의 20만 당원이 봉기할 것이며, 남조선 남부에 유격대가 있고, 미국은 참전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과 김일성 둘 다 전쟁의 전체적인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전쟁에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전쟁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다. 소련 방문 때 김일성은 ‘남반부 폭동’이 일어날 거라는 예측이 잘못될 경우를 우려해 남한 상황에 관한 스탈린의 질문에 대해 박헌영에게 대답하게 했다. 박헌영은 전쟁이 끝난 후 3년이 채 되지 않아 사형되었는데, 그의 공식적인 죄목은 남한의 혁명 역량에 대한 김일성의 판단에 악영향을 끼쳐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중국인들에게 의무를 지우기 위해 북한 측이 마오쩌둥과 논의하도록 했다.
스탈린의 계산은 중국의 타이완 침공과는 달리 서방이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한반도에서 취할 중국의 군사행동은 중국과 서방 간의 대립을 더 확실히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김일성의 계획을 승인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마오쩌둥이 모든 결정을 맡았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5월 13일에서 16일 사이 마오쩌둥을 만나기 위해 평양을 떠났다.
한편 마오쩌둥은 이 당시 타이완 점령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소련의 지원 약속을 얻어낸 상태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미국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이완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과 같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으로부터의 원조를 위험하게 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결정에 대한 스탈린의 확답은 전쟁 준비를 감독하기 위해 보낸 소련 고문단으로 대신했고, 이 고문단과 북한군은 조직을 구성했으며, 이 조직의 회의 과정에서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최종 결의를 선언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저자들은 보고 있다.
드디어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의 결정에 따라 남침은 국경분쟁이 빈발했던 한반도 서쪽의 옹진반도에서 시작되어 38선을 따라 확대되었다.
그리고 7월 7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 사령관이 지휘하는 UN군 사령부의 창설을 승인했다. 이때 소련 대표는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했는데, 기존의 소련, 중국, 한국의 연구자들이 소련의 불참을 실수라고 하지만 이는 무심코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저자들은 소련 대표가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한 이유를 두 가지 들고 있다. 첫 번째로, 스탈린은 이 시점에서 전쟁이 승인된 작전 계획에 따라 진행될 것으로 믿고 있었고, 그럴 경우 UN의 이런 결정은 부적절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중소 조약과 관계되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된 바로 그날,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는데 소련과 미국의 직접 충돌은 피한다는 것은 스탈린의 오랜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미군이 UN군의 깃발 아래 움직이는 한 선전포고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환영했다. 왜냐하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면 중국이나 미국 어느 한쪽이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를 선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소 조약에 따라 ‘즉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지원과 다른 원조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쟁에 개입한 UN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에 반격을 가하고, 이에 마오쩌둥은 10월 13일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하게 되며,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종결되었다.
동안 몰랐던 사건들의 숨겨진 모습들이 드러나다
밖으로 드러난 현상만으로 일어난 사건을 볼 때 그 사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과거의 사실일 경우는 더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과 한국전쟁에 대해 그동안 몰랐던 숨겨진 면들을 1990년대에 새롭게 공개된 자료들을 통해 드러내줌으로써 이 사건들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준다.
그리고 이 책은 소련과 중국의 대외 정책에 관해 연구하는 연구자뿐 아니라 국제 관계와 냉전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물론, 이 부분에 관심 있는 이들이 한 번쯤은 꼭 읽어봐야 할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부록에 실린 중소 동맹과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이 대표적이다. 물론 원서의 출간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번역, 출간됨으로써 중소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숨겨진 면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목차
서문
1장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중국 국공 내전(1945~1948년)
첫 번째 중ㆍ소 동맹
종전 직후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전략
지도자, 중재인, 조언자
마오쩌둥의 목표와 스탈린의 반응
스탈린, 티토주의, 마오쩌둥
2장 담판의 서막
1949년 미코얀의 중국 방문
한쪽 진영으로 기울기
전술
전쟁과 국제적 균형의 변동
류사오치의 모스크바 방문
3장 동맹의 결성
스탈린의 근심과 마오쩌둥의 행동
준비
첫 번째 무대: 원칙, 비밀, 그리고 중국의 청중들
두 번째 무대: 협상이 시작되다
세 번째 무대: 한계 긋기
국제적 배경
4장 최종 단계
공개된 합의
추가 협정과 다른 비밀 조항
5장 한국전쟁의 결정
소련과 한반도
전쟁을 위한 협의
마오쩌둥의 목표: 타이완
결정
전쟁이 시작되다
베이징의 전쟁 준비
6장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워싱턴의 계산
마오쩌둥의 우발 계획
최초의 결정, 10월 2일
정치국 내부의 토론들
중국인민지원군의 창설
스탈린의 반칙
최종 결정, 10월 13일
전쟁과 동맹
7장 결론
동반자 관계가 되다
동맹 관계를 되돌아보며
부록: 중소ㆍ동맹과 한국전쟁 관련 문서
참고문헌
역자후기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