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메디치 WEA 총서 1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일본의 사례, 1945-2012년
- 대등서명
- 戰後史の正體 1945-2012
- 개인저자
- 마고사키 우케루 지음 ; 양기호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메디치미디어,,2013
- 형태사항
- 390 p. : 삽화 ; 23 cm
- 총서사항
- 메디치 WEA 총서
- ISBN
- 9788994612584
- 청구기호
- 349.42013 마15ㅁ
- 일반주기
- 권두에 \"해제\" 수록 권말부록: 포츠담 선언 ; 항복문서 ; 전후사 연표 원저자명: 孫崎享 해제: 문정인
- 서지주기
- \"전후사 연표\"와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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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4586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4586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이 책은 1945년 패전 후의 현대 일본사를 미국에 대한 자주파와 친미파 간의 대립, 갈등, 대결 구도로 해석했다. 미국이 일본 내 친미파를 육성, 지원해 정·재·학 관계에서 헤게모니를 잡도록 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 36년간 일본 외무성 고위 관료로 재직하며 우즈베키스탄, 이란, 이라크, 캐나다 등 세계 곳곳에서 일본 대사 및 영사로 부임했던 저자, 마고사키 우케루가 『일본의 영토분쟁』에 뒤이어 다시 한 번 일본에서 금기시 되고 있는 위험한 이슈를 들고 돌아왔다. 신간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일본의 사례, 1945-2012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실질적으로 미국의 군사 식민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껏 미국을 추종하는 세력이 정·재계에 주류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일본의 국익보다는 미국의 국익에 봉사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매우 예민한 주제를 다룬 것으로, 2012년 출간 즉시, 정치와 시사를 다룬 책으로는 이례적으로 20만 부 이상 팔리며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
미국과의 굴욕적인 외교, 그 시작은 충격적인 패전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연합군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다시는 군사대국의 꿈조차 꾸지 않겠다는 천황의 맹세와 함께 연합국 총사령부의 일본 통치가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사실상 미군의 군사점령을 받은 것이다.
일본이 패전기념일을 종전일(終戰日)로 명명한 것은 “일본은 망했다. 무조건 항복했다.”라는 수치스러운 기억을 애써 무시하려는 자기 암시와 같았다. 패전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데서, 전후 새로운 일본은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고,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와 동아시아 지배 전략에 서서히 말려들면서, 미국 추종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 전후사는 “뼛속 깊이 친미”에 기반을 둔 요시다 노선과,
“자주적인 일본 우선”을 품은 이시바시의 대결로 점철된다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자!”를 주장한 점령 초기 요시다 시게루 외상. 그는 외무대신부터 수상으로서의 장기집권기까지 시종 일관 전후 일본을 미국 추종노선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다. 반면 미국에 저항하며 “우리의 주장이 맞다.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시바시 탄잔, 그의 계보를 잇는 자주적인 지도자들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자주노선을 주장하다가 미국과 틀어지게 된 거물급 정치인들이 권력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의문의 죽음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구체적인 사료와 외교 현장에서의 경험, 그리고 해박한 지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대미 자주파를 대미 추종파로 바꾸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미국이 일본의 자주파를 친미파로 바꾸는 시스템은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고, 대표적으로 일본의 검찰과 언론이 이를 담당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검찰과 언론을 통해 달갑지 않은 일본 수상을 제거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가동되는지 저자는 구체적인 사료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가령 미국 대통령이 일본 수상을 잘 만나주지 않고 주요 언론이 문제로 삼을 경우, 그것만으로도 정권 유지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시바시 탄잔은 패전처리비 삭감을 주장하다가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은 미군의 완전 철수를 주장하다가 의문의 급사를 당했다. 소련과의 국교 회복을 추진한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 또한 공직에서 추방당했고, 미군의 유사시 주둔 안을 주장했던 아시다 히토시는 쇼와전공 사건으로 정계에서 강제 은퇴 당했다. 미국보다 먼저 중일 국교 정상화를 주장한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 역시 록히드 사건으로 정계를 떠났다. 자위대 군사 협력을 거부했던 다케시타 노부루는 내각 총사직했고, 금융정책에서 독자 노선을 걸었던 하시모토 류타로 역시 일본치과연합회 사건으로 파벌회장직을 사임했다. 주일미군 감축을 추진했던 오자와 이치로도 리쿠잔카이 사건 등으로 강제 기소되었다.
이 외에도 미국의 뜻에 반했던 수상들이 정권은 물론 목숨까지 위태로운 경우가 많았다. 그 배후를 조종한 미국의 실체를 구체적인 사료와 고증으로 쉽게 풀어나간 저자의 탁월함이 본문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미국에 밉보인 지도자들의 잇단 실각과 죽음
미국에 의해 일본의 지도자들만 매장당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미국의 총애를 받던 지도자들이 하루아침에 이용가치가 사라지면서 권력에서 축출되고, 심지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경우는 세계 도처에 있다. 미국의 바뀐 세계전략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죄목이다.
친미파의 대부였던 요시다 수상이 일본의 재군비를 반대하다가 수상 직을 내려놓았고, 미국에 적극 협조했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 또한 미국에 의해 축출되었다. 2011년 이집트와 튀니지 독재자를 무너뜨린 ‘아랍의 봄’도 그런 경우였다. 패망한 월남 고딘디엠 대통령이 살해된 것이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처형된 것도 모두 미국이 개입된 사건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도 비슷한 시각에서 해석하며, 당시 한국 외교가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박정희는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는 등 미국에 협조적이었지만, 점차 민족주의 경향이 짙어지며 독자적으로 핵무기개발 계획 등을 추진하다가 미국의 미움을 산다. 박 대통령은 암살당하기 앞서, 카터와의 정상회담에서 카터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안보강의를 일방적으로 늘어놓았고, 미국이 청와대에 도청기를 설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대사관에 도청기를 설치함으로써 미국의 분노를 샀다.
일본의 학계가 친미파가 되기까지
…미국은 어떻게 이들을 조종했나?
교토대학이나 도쿄대학 등 일본 최고의 지성 가운데는 유난히 미국 추종주의가 만연해 있다. 전후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일본 국민은 가난과 기아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구체적인 데이터와 사료를 가지고 철저히 반박한다. 미국이 일본에 지원했던 생활안정 기금과 일본이 미군 주둔 경비로 지불했던 비용을 비교하면 오히려 일본이 미국에게 몇 배 더 경제적인 착취를 당했다는 것이다.
1996년 2월, 하시모토 수상이 뉴욕 강연에서 발언했던 대로, 일본 정부가 미국 국채를 팔기라도 한다면 미국은 언제 부도국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 왜 일본의 많은 학자들이 미국을 떠받들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그 뿌리를 점령기 일본을 원조한 GARIOA EROA 자금과 풀브라이트 장학금에서 찾는다. 미국이 지원한 생활자금이 대거 일본 엘리트들의 유학비용으로 사용되었고,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 후 미일 관계 강화를 위해서 움직였다. 특히 도쿄대학이나 교토대학 등 유명 대학에 미국학회를 만들어 자금을 지원하며 정신 교육을 한 것이 일본 학자들이 친미로 일관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원전 찬성파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는데
…지진 대국 일본에 원자력발전이 총 54기나 되는 이유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여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방사선이 누출되어 한때 도쿄를 포함한 동일본 전 지역이 거주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퍼져 있었다. 이렇게 위험한 원자력발전소가 지진 대국인 일본에 총 54기나 존재한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일본에 원자력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54년 제5 후쿠류마루 호 피폭 사건 이후였다. 미국이 비키니 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하던 중 참치조업을 하던 제5 후쿠류마루 호 선원들에게 방사능이 노출된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사회에서는 미국에 대한 비난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이를 무마하려는 미국과 이를 계기로 일본 사회에서 한몫을 잡으려는 일본인들이 손을 잡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운동을 벌임으로써 지진 위험국 일본이 원자력이라는 폭탄을 끌어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일본에는 원전 폐기는 좌익, 원전 찬성은 우익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친미와 자주 세력의 대립만큼이나 일본의 운명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주도한 미국,
…이번에는 TPP로 일본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일본 경제는 고도로 성장했지만, 그것은 결코 일본의 자립적인 성취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냉전과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의 대일 전략은 180도 바뀐다. 195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한 것은 미국의 냉전시대 전략의 일환이었다.
냉전시대가 끝난 1991년 이후부터, 미국의 적이 소련에서 일본으로 바뀜에 따라 CIA의 대일 공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미국의 상징인 록펠러센터나 컬럼비아 픽처스 등을 일본 기업이 싹쓸이하면서 위험을 느낀 미국은 일본의 경제를 끌어내리려는 계획에 돌입했다. 걸프전쟁에 인적, 물적 공헌을 요구하며 일본에게서 13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챙겨간 것도 모자라 자위대 파견까지 강요했다.
고이즈미 정권이 추진한 우정민영화도 실은 미국 국채를 사라는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고, 현재 추진 중인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 또한 일본 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TPP는 일본의 중국 접근을 막으려는 전략이자, 동시에 미국의 심각한 경제 부진을 해결하고자 서비스 부문을 일본에 개방하려는 속셈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미국의 대일 공작이 얼마나 장기적으로 집요하게 진행돼 왔다는 증거를 저자는 충분히 들고 있다. 오히라 집권 시절에는 미일 동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스즈키 수상은 새로운 군사적 노력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나카소네 수상은 스스로 방위 분담을 하겠다고 표명했다. 수상들의 이런 노선은 결코 일본의 목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한미 관계는 미일 관계보다 훨씬 더 긴박한 순간이 많았다.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젊은 미군들이 피를 흘렸다. 미군이 참가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미국으로서는 한국 문제에 일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고, 미국이 한국 내정에 개입한 사례는 일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_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저자는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일본의 전후사를 통해 우리도 한미 관계의 교훈을 얻기를 촉구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의 자주외교를 추구할 때 두 가지 사안에서 반대하는데, 하나는 주일미군 기지 축소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과의 관계 강화이다. 2013년 한미 동맹 60주년을 맞는 우리 역시 자주외교의 현안이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저자인 마고사키 우케루의 시각은 이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 36년간 일본 외무성 고위 관료로 재직하며 우즈베키스탄, 이란, 이라크, 캐나다 등 세계 곳곳에서 일본 대사 및 영사로 부임했던 저자, 마고사키 우케루가 『일본의 영토분쟁』에 뒤이어 다시 한 번 일본에서 금기시 되고 있는 위험한 이슈를 들고 돌아왔다. 신간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일본의 사례, 1945-2012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실질적으로 미국의 군사 식민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껏 미국을 추종하는 세력이 정·재계에 주류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 일본의 국익보다는 미국의 국익에 봉사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매우 예민한 주제를 다룬 것으로, 2012년 출간 즉시, 정치와 시사를 다룬 책으로는 이례적으로 20만 부 이상 팔리며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
미국과의 굴욕적인 외교, 그 시작은 충격적인 패전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연합군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다시는 군사대국의 꿈조차 꾸지 않겠다는 천황의 맹세와 함께 연합국 총사령부의 일본 통치가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사실상 미군의 군사점령을 받은 것이다.
일본이 패전기념일을 종전일(終戰日)로 명명한 것은 “일본은 망했다. 무조건 항복했다.”라는 수치스러운 기억을 애써 무시하려는 자기 암시와 같았다. 패전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데서, 전후 새로운 일본은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고,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와 동아시아 지배 전략에 서서히 말려들면서, 미국 추종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 전후사는 “뼛속 깊이 친미”에 기반을 둔 요시다 노선과,
“자주적인 일본 우선”을 품은 이시바시의 대결로 점철된다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자!”를 주장한 점령 초기 요시다 시게루 외상. 그는 외무대신부터 수상으로서의 장기집권기까지 시종 일관 전후 일본을 미국 추종노선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다. 반면 미국에 저항하며 “우리의 주장이 맞다.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시바시 탄잔, 그의 계보를 잇는 자주적인 지도자들도 적지 않았다. 저자는 자주노선을 주장하다가 미국과 틀어지게 된 거물급 정치인들이 권력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의문의 죽음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구체적인 사료와 외교 현장에서의 경험, 그리고 해박한 지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대미 자주파를 대미 추종파로 바꾸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미국이 일본의 자주파를 친미파로 바꾸는 시스템은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고, 대표적으로 일본의 검찰과 언론이 이를 담당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검찰과 언론을 통해 달갑지 않은 일본 수상을 제거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가동되는지 저자는 구체적인 사료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가령 미국 대통령이 일본 수상을 잘 만나주지 않고 주요 언론이 문제로 삼을 경우, 그것만으로도 정권 유지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시바시 탄잔은 패전처리비 삭감을 주장하다가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은 미군의 완전 철수를 주장하다가 의문의 급사를 당했다. 소련과의 국교 회복을 추진한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 또한 공직에서 추방당했고, 미군의 유사시 주둔 안을 주장했던 아시다 히토시는 쇼와전공 사건으로 정계에서 강제 은퇴 당했다. 미국보다 먼저 중일 국교 정상화를 주장한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 역시 록히드 사건으로 정계를 떠났다. 자위대 군사 협력을 거부했던 다케시타 노부루는 내각 총사직했고, 금융정책에서 독자 노선을 걸었던 하시모토 류타로 역시 일본치과연합회 사건으로 파벌회장직을 사임했다. 주일미군 감축을 추진했던 오자와 이치로도 리쿠잔카이 사건 등으로 강제 기소되었다.
이 외에도 미국의 뜻에 반했던 수상들이 정권은 물론 목숨까지 위태로운 경우가 많았다. 그 배후를 조종한 미국의 실체를 구체적인 사료와 고증으로 쉽게 풀어나간 저자의 탁월함이 본문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미국에 밉보인 지도자들의 잇단 실각과 죽음
미국에 의해 일본의 지도자들만 매장당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미국의 총애를 받던 지도자들이 하루아침에 이용가치가 사라지면서 권력에서 축출되고, 심지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경우는 세계 도처에 있다. 미국의 바뀐 세계전략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죄목이다.
친미파의 대부였던 요시다 수상이 일본의 재군비를 반대하다가 수상 직을 내려놓았고, 미국에 적극 협조했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 또한 미국에 의해 축출되었다. 2011년 이집트와 튀니지 독재자를 무너뜨린 ‘아랍의 봄’도 그런 경우였다. 패망한 월남 고딘디엠 대통령이 살해된 것이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처형된 것도 모두 미국이 개입된 사건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도 비슷한 시각에서 해석하며, 당시 한국 외교가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박정희는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는 등 미국에 협조적이었지만, 점차 민족주의 경향이 짙어지며 독자적으로 핵무기개발 계획 등을 추진하다가 미국의 미움을 산다. 박 대통령은 암살당하기 앞서, 카터와의 정상회담에서 카터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안보강의를 일방적으로 늘어놓았고, 미국이 청와대에 도청기를 설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대사관에 도청기를 설치함으로써 미국의 분노를 샀다.
일본의 학계가 친미파가 되기까지
…미국은 어떻게 이들을 조종했나?
교토대학이나 도쿄대학 등 일본 최고의 지성 가운데는 유난히 미국 추종주의가 만연해 있다. 전후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일본 국민은 가난과 기아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구체적인 데이터와 사료를 가지고 철저히 반박한다. 미국이 일본에 지원했던 생활안정 기금과 일본이 미군 주둔 경비로 지불했던 비용을 비교하면 오히려 일본이 미국에게 몇 배 더 경제적인 착취를 당했다는 것이다.
1996년 2월, 하시모토 수상이 뉴욕 강연에서 발언했던 대로, 일본 정부가 미국 국채를 팔기라도 한다면 미국은 언제 부도국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 왜 일본의 많은 학자들이 미국을 떠받들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그 뿌리를 점령기 일본을 원조한 GARIOA EROA 자금과 풀브라이트 장학금에서 찾는다. 미국이 지원한 생활자금이 대거 일본 엘리트들의 유학비용으로 사용되었고,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 후 미일 관계 강화를 위해서 움직였다. 특히 도쿄대학이나 교토대학 등 유명 대학에 미국학회를 만들어 자금을 지원하며 정신 교육을 한 것이 일본 학자들이 친미로 일관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후쿠시마 대지진 이후 원전 찬성파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는데
…지진 대국 일본에 원자력발전이 총 54기나 되는 이유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하여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방사선이 누출되어 한때 도쿄를 포함한 동일본 전 지역이 거주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퍼져 있었다. 이렇게 위험한 원자력발전소가 지진 대국인 일본에 총 54기나 존재한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일본에 원자력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54년 제5 후쿠류마루 호 피폭 사건 이후였다. 미국이 비키니 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하던 중 참치조업을 하던 제5 후쿠류마루 호 선원들에게 방사능이 노출된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사회에서는 미국에 대한 비난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이를 무마하려는 미국과 이를 계기로 일본 사회에서 한몫을 잡으려는 일본인들이 손을 잡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운동을 벌임으로써 지진 위험국 일본이 원자력이라는 폭탄을 끌어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일본에는 원전 폐기는 좌익, 원전 찬성은 우익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친미와 자주 세력의 대립만큼이나 일본의 운명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주도한 미국,
…이번에는 TPP로 일본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일본 경제는 고도로 성장했지만, 그것은 결코 일본의 자립적인 성취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냉전과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의 대일 전략은 180도 바뀐다. 195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한 것은 미국의 냉전시대 전략의 일환이었다.
냉전시대가 끝난 1991년 이후부터, 미국의 적이 소련에서 일본으로 바뀜에 따라 CIA의 대일 공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미국의 상징인 록펠러센터나 컬럼비아 픽처스 등을 일본 기업이 싹쓸이하면서 위험을 느낀 미국은 일본의 경제를 끌어내리려는 계획에 돌입했다. 걸프전쟁에 인적, 물적 공헌을 요구하며 일본에게서 13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챙겨간 것도 모자라 자위대 파견까지 강요했다.
고이즈미 정권이 추진한 우정민영화도 실은 미국 국채를 사라는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고, 현재 추진 중인 TPP(Trans-Pacific Partnership,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 또한 일본 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TPP는 일본의 중국 접근을 막으려는 전략이자, 동시에 미국의 심각한 경제 부진을 해결하고자 서비스 부문을 일본에 개방하려는 속셈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미국의 대일 공작이 얼마나 장기적으로 집요하게 진행돼 왔다는 증거를 저자는 충분히 들고 있다. 오히라 집권 시절에는 미일 동맹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스즈키 수상은 새로운 군사적 노력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나카소네 수상은 스스로 방위 분담을 하겠다고 표명했다. 수상들의 이런 노선은 결코 일본의 목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한미 관계는 미일 관계보다 훨씬 더 긴박한 순간이 많았다.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젊은 미군들이 피를 흘렸다. 미군이 참가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미국으로서는 한국 문제에 일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고, 미국이 한국 내정에 개입한 사례는 일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_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저자는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일본의 전후사를 통해 우리도 한미 관계의 교훈을 얻기를 촉구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의 자주외교를 추구할 때 두 가지 사안에서 반대하는데, 하나는 주일미군 기지 축소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과의 관계 강화이다. 2013년 한미 동맹 60주년을 맞는 우리 역시 자주외교의 현안이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저자인 마고사키 우케루의 시각은 이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
목차
한국 독자를 위한 저자 서문 / 해제 / 들어가는 말
제1부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일본 점령
| 제1장 | 왜 읽기 쉬운 일본 전후사인가?
| 제2장 | 패전과 함께 미국의 군사점령이 시작되다
| 제3장 | 점령기 미국은 어떻게 일본을 통치했나?
| 제4장 | 일본의 신헌법체제가 미국의 손에서 열리다
제2부 냉전冷戰시대의 서막과 일본의 경제성장
| 제5장 | 공산당의 전쟁 방파제로 일본을 이용하다
| 제6장 | 불평등한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
| 제7장 | 독립과 함께 밀려온 미국 종속의 파도
| 제8장 | 자주노선의 기치를 내건 정권들
제3부 일본의 정권 교체와 미국의 음모
| 제9장 | 보수 합동과 안보조약 개정
| 제10장 | 진보 세력을 이용했던 미국의 과감한 획책
| 제11장 | 자민당과 경제성장의 시대
| 제12장 | 오키나와 반환에서 중일 국교 회복까지
| 제13장 | 미국을 향한 자주와 종속의 치열한 싸움
제4부 냉전이 종결되고 미국에게 일본이 최대 위협으로 떠오르다
| 제14장 | 냉전 종결과 미국의 변용
| 제15장 |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 후 세계
나오는 말 / 역자 후기 / 부록 (포츠담 선언 | 항복문서 | 전후사 연표) /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