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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파상의 시대, 해답은 있는가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 일대는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과 함성으로 가득 차올랐다. 촛불이 밝혀졌다. 세종로 사거리, 서울시청 앞을 지나 종로와 을지로 일대, 그리고 숭례문까지.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통령 하야를 외쳤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어떤 것이 부서져내리고 있고, 새로운 무언가가 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던 지배의 블록이 어처구니없는 주술적 허상이었다는 믿기 힘든 현실에 대한 각성과 환멸이 분노로서 표출되고 있다.
21세기 들어 한국사회에는 신자유주의적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 민주주의의 후퇴,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 삶의 안전을 위협하는 각종 재난과 사건들이 닥쳐왔다. 세월호가 침몰했고, 백남기 농민이 사망했다.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해체되고 소멸해가고 있다는 시대적 감각이 우리 삶의 일상을 근원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가, 사회의 마음이 꿈꿔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파상破像의 시대. 사람들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 앞에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린다. 9·11 테러, 2008년 금융위기, 3·11 동일본 대진재, 이슬람 국가(IS)들의 등장 등, 파국적으로 엄습해오는 재난과 위협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어지러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파상의 시대는 문명사적으로 대변동의 시기이며, 대안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의 꿈들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문제화되는 시기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바로 그 ‘현장’에 발 딛고 서 있는 동시대의 증인이다. 『마음의 사회학』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이 책에서, 그는 우리 시대가 지난 100여 년간 사람들이 격렬하게 품었던 꿈들(문명개화, 해방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성취와 실패, 기억과 망각, 매혹과 환멸의 복잡다단한 퇴적층이자 미래를 당겨오는 다수의 몽상구성체들이 격돌하는 전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특히 과거의 꿈들이 부서져가면서 형성된 마음의 폐허에 집중하면서, 한 사회가 꿈을 통해 어떻게 공통의 미래를 생산하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구성된 미래의 꿈들이 고통스럽게 붕괴하면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희망이 움터나오는지를 섬세하게 점검하고 있다.
이는 50여 년 전 C. W. 밀스가 『사회학적 상상력』(1959)에서 보여준 낙관적 전망과는 큰 차이를 갖는다. 우리 시대의 상상력은 기업에서 훈련시키고, 자기계발 속에서 육성되고 실현되는 목적합리적 행위의 한 유형으로 전락했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 바우만의 액체근대성, 기든스의 재귀적 근대, 보드리야르의 사회적인 것의 종언 등 여러 학자들의 진단이 내려진 21세기의 맥락에서 보면, 밀스가 약속했던 ‘상상력想像力’은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상상력을 강조하고, 거기에 내포된 인간의 창조력을 중시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미래를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그래서 현실의 고통과 비참을 적확하게 포착할 수 없다. 상상력이 아닌 파상력破像力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몽상과 각성
제1부인 ‘몽상과 각성’에 실린 글들은 집합적 몽상이 허물어지면서 드러난 리얼리티의 참혹한 민낯에 대한 예민한 증언과 관찰들이다. 김홍중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핵 이후의 시대를 사는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가 묻는다. 7만 4000명이 죽고, 20만 명 이상이 부상당한 이 참사 이후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멸적인 것들의 유’의 위치에서 ‘사멸하는 유’의 위치로 바뀌었다. 원자력의 시대는 여러 시대들 중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들이 끝을 향해감에 있어 형성된 잠깐 동안의 ‘유예’에 가깝다.
방사능에 의해 오염된 인간들에게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는 더이상 복음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누군가가 또 길고 치유할 수 없는, 사악한 고통의 세계에 던져졌다는 사실의 통보일 뿐이다. 그것은 더이상 미래의 새로움의 기약이 되지 못한다. 과거의 악한 씨앗이 피워낸 악한 과실일 뿐이다. 그렇게 태어난 한 아이는 더이상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환자이다. 미래의 화신이 아니라 한 희생자이다.(31~32쪽)
이는 자연스레 3·11 동일본 대진재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후쿠시마의 원전들은 여전히 현재 인간이 가진 과학기술과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내던져져 있다. 3·11의 충격은 근대성의 뿌리로 기능해온 기초적 사유범주들의 자명성을 흔들고 있다. 인간중심주의, 이성에 대한 신뢰, 과학주의, 생명과 자연에 대한 철학 등이 급진적으로 재고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도 있다. 세월호 이야기다. 김홍중은 이 사건을 목도한 국민들의 마음이 부서졌다고 말한다. 이 마음의 부서짐은 일반적인 우울이나 무기력과 같은 병증으로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주권적 우울’이다. 참사 후 우리는 모두 마음이 부서졌고, 그 결과 말이 부서졌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단 무기력의 상태에 빠졌다. 저자는 이를 ‘통감痛感의 해석학’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이어 골목길의 미학화 현상을 탐구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삶의 환경에 던져진 21세기의 한국인들이 골목길이라는 몽상공간을 통해 과거에 대한 자신들의 향수(노스탤지어)를 어떻게 육성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21세기 들어 크게 흥행하기 시작한 일련의 유괴영화들을 분석하며, 특히 납치된 아이의 의미에 대한 해명을 통해 위험사회로 접어든 한국사회에서 부모들이 어떻게 아이(자식)를 가장 소중한 존재(토템)인 동시에 합리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존재(리스크)로 구성해왔는지, 그 역설적 상황을 드러낸다. 신경숙 소설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사랑의 꿈이 환멸로 귀결되는 우리 시대의 친밀성의 파상에 다름아니다. 그에 의하면 신경숙 소설은 386세대가 사적 영역에서 어떻게 민주적 가족 관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징후다.
생존과 탈존
제2부는 ‘생존과 탈존’이라는 제목 아래 ‘서바이벌’이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세계의 비참을 다룬다. ‘저항’ ‘반항’ ‘자유’ ‘도전’의 상징이었던 이전 세대의 청년들과 달리 현재의 청년세대들은 ‘생존’을 하나의 ‘주의’로 삼아버렸다. 이들이 추구하는 ‘생존’은 목숨의 구제가 아니라 경쟁상황에서 잔존하여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에 가깝다.
생존주의란 당혹스런 개념이다. 왜냐하면, 생존은 그 본성상 주의主義와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은 주의 이전, 성찰 이전, 사고 이전의, 생명의 충동과 힘의 영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존재로서 생존에의 경향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존재는 없으며,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존재들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생존에의 열망은 자연적인 것이며, 선악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생존이, 조직된 주의가 될 때, 지향된 가치가 될 때, 집합적 마음의 짜임의 원리가 될 때이다. 생존이 주의로서 나타날 때, 그것은 무언가의 붕괴를 지시하고 있다.(291쪽)
「동아시아 생존주의 세대의 얼굴들」은 한국, 중국, 일본 청년들의 얼굴을 통해 바라본 사회상이다. 한국의 ‘88만원세대’, 중국의 ‘바링허우八十後세대’, 일본의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은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세대다. 중국의 한 젊은 화가의 자신만만해 보이는 얼굴사진과, 일본화가 이시다 테츠야의 그림에 나타난 우울의 얼굴들, 윤태호의 만화 『미생』에서 보여지는 장그래의 얼굴에 나타난 무표정과 체념을 설명하며, 김홍중은 이를 1980년대 만화의 주인공인 이현세의 까치(오혜성), 고행석의 구영탄, 박봉성의 최강타 등 이른바 ‘초인’이라고 할 만한 표상의 얼굴들, 어두운 시기지만 야망을 가질 수 있었고 ‘외인’이라 자처하며 판을 깰 수 있었던 세대와 대비한다.
생존生存과 더불어 부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탈존脫存은 생존의 반대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가거나 생존을 향한 마음의 동원이 불가능해져서 그 에너지가 자기파괴 또는 현실도피의 방향으로 흐르는 삶의 형식을 가리킨다. 이 우울한 마음의 풍경은 청년문화의 한 흐름이 되었으며 생존주의라는 시대적 꿈의 파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김홍중은 이를 탈존주의脫存主義라 부른다. 이어 생존과 탈존의 이분법으로 동시대 청년문화를 단순화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소박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함께 모여 시를 쓰는 아마추어 문학동인에 대한 현장연구를 시도하며 다양한 삶의 형식들에 대한 탐구를 예고한다.
사회와 마음
제3부는 이와 같은 연구들의 바탕을 이루는 문화사회학의 이론적 점검에 할애되고 있다. 김홍중은 막스 베버의 ‘이해사회학’을 자신이 시도하는 ‘마음의 사회학’의 범례로 내세우면서, 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상호침투에 주목한 여러 이론들을 통합하여 인지, 감정, 욕망/의지의 복합적 능력으로서의 ‘마음’에 대한 이론을 심화시키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나’의 자리가 없는 사회의 상상이다. 그것은 사회 그 자체의 끊임없는 전개와 연속의 섭리에 집중한다. 그러나 말하는 입들은 ‘내’가 메시아로 태어난 세계, 세계가 ‘나’를 메시아로 인지하고, ‘나’에게서 어떤 공적 행위를 기대하는 바로 그런 사회, ‘내’가 말하고, 행위하고, 참여해야 하는, ‘나’의 행위에 이 사회의 명운이 걸려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사회의 상상이다. 양자의 첨예한 대립은 표면상으로는 개념의 대립인 듯이 보이지만, 궁극적 수준으로 내려가면 두 상이한 신들의 싸움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신(운명)과 내 안에 깃들여 있는 미약하지만 생생한 신(행위) 사이의 싸움이다. 그것은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사이의 전쟁이다.(459~460쪽)
이런 작업들을 관통하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스탠스’의 이름이 바로 파상력이다. 파상력은 부재하는 것을 현존시키는 능력인 상상력과 반대로 현존하는 것들의 환각성을 깨닫는 힘, 혹은 그와 연관된 체험을 가리킨다. 김홍중에 의하면 우리 시대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그려내는 힘인 상상력이 아니라, 미래의 부재나 결손 혹은 비관과 진실하게 대면하면서, 그 고통과 맞서고, 그로부터 시효가 지난 몽상들을 가차 없이 떠나보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함께 모색하는, 고뇌의 공통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몰락,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환태평양 주요국가들의 우경화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대두…… 파상의 시대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엘리엇의 시구처럼, 세상은 “폭발이 아니라 흐느낌으로not with a bang but a whimper” 끝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어두운 꿈에서 깨어나려는 절박한 마음들이 존재할 때, 우리는 머리를 흔들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발버둥을 치면서 이 ‘가위눌림’을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과거의 꿈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꿈 사이의 긴 ‘환멸’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힘, 그리고 그 파편들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파상력으로써, 우리는 책의 표지로 사용된 장민승의 작품 속 어두운 바다와 같은 세계에서 ‘희미하게’ 부서지는 미광 너머로 날아가는 새처럼, 새로운 세계를 다시 만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
상상력은 미래를 약속하는 힘이지만, 파상력은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한다. 예언하지도, 계몽하지도, 도덕적 훈계를 가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혹은 그것 속에서 우리는, 파괴되어가는 것들과 새로이 생성되는 것들을 사회적 가시권과 가청권으로 끌어내어, 고뇌의 공통공간을 만들 수 있다. 파상력은, 사회적인 것이 끓어오르며 새로운 길을 뚫는 장소, 그 어딘가에서 예기치 않은 희망의 씨앗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성되는 곳을 증언하기를 소망한다. 이런 점에서, 파상의 체험 속에서 수행된 이 연구들은 현장증언의 성격을 띤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동시대의 증인이다. 모든 증인들이 그러하듯이, 그 또한 증언의 말들이 누군가의 삶에, 어떤 순간에, 결정적인 힘이 되기를 희망한다. _‘프롤로그’에서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 일대는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과 함성으로 가득 차올랐다. 촛불이 밝혀졌다. 세종로 사거리, 서울시청 앞을 지나 종로와 을지로 일대, 그리고 숭례문까지.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통령 하야를 외쳤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어떤 것이 부서져내리고 있고, 새로운 무언가가 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던 지배의 블록이 어처구니없는 주술적 허상이었다는 믿기 힘든 현실에 대한 각성과 환멸이 분노로서 표출되고 있다.
21세기 들어 한국사회에는 신자유주의적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 민주주의의 후퇴, 지도층의 무능과 부패, 삶의 안전을 위협하는 각종 재난과 사건들이 닥쳐왔다. 세월호가 침몰했고, 백남기 농민이 사망했다.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해체되고 소멸해가고 있다는 시대적 감각이 우리 삶의 일상을 근원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가, 사회의 마음이 꿈꿔온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파상破像의 시대. 사람들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 앞에 속수무책으로 맞닥뜨린다. 9·11 테러, 2008년 금융위기, 3·11 동일본 대진재, 이슬람 국가(IS)들의 등장 등, 파국적으로 엄습해오는 재난과 위협이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어지러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파상의 시대는 문명사적으로 대변동의 시기이며, 대안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의 꿈들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며 문제화되는 시기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바로 그 ‘현장’에 발 딛고 서 있는 동시대의 증인이다. 『마음의 사회학』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이 책에서, 그는 우리 시대가 지난 100여 년간 사람들이 격렬하게 품었던 꿈들(문명개화, 해방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성취와 실패, 기억과 망각, 매혹과 환멸의 복잡다단한 퇴적층이자 미래를 당겨오는 다수의 몽상구성체들이 격돌하는 전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특히 과거의 꿈들이 부서져가면서 형성된 마음의 폐허에 집중하면서, 한 사회가 꿈을 통해 어떻게 공통의 미래를 생산하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구성된 미래의 꿈들이 고통스럽게 붕괴하면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희망이 움터나오는지를 섬세하게 점검하고 있다.
이는 50여 년 전 C. W. 밀스가 『사회학적 상상력』(1959)에서 보여준 낙관적 전망과는 큰 차이를 갖는다. 우리 시대의 상상력은 기업에서 훈련시키고, 자기계발 속에서 육성되고 실현되는 목적합리적 행위의 한 유형으로 전락했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 바우만의 액체근대성, 기든스의 재귀적 근대, 보드리야르의 사회적인 것의 종언 등 여러 학자들의 진단이 내려진 21세기의 맥락에서 보면, 밀스가 약속했던 ‘상상력想像力’은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상상력을 강조하고, 거기에 내포된 인간의 창조력을 중시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미래를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그래서 현실의 고통과 비참을 적확하게 포착할 수 없다. 상상력이 아닌 파상력破像力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몽상과 각성
제1부인 ‘몽상과 각성’에 실린 글들은 집합적 몽상이 허물어지면서 드러난 리얼리티의 참혹한 민낯에 대한 예민한 증언과 관찰들이다. 김홍중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핵 이후의 시대를 사는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가 묻는다. 7만 4000명이 죽고, 20만 명 이상이 부상당한 이 참사 이후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멸적인 것들의 유’의 위치에서 ‘사멸하는 유’의 위치로 바뀌었다. 원자력의 시대는 여러 시대들 중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들이 끝을 향해감에 있어 형성된 잠깐 동안의 ‘유예’에 가깝다.
방사능에 의해 오염된 인간들에게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는 더이상 복음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누군가가 또 길고 치유할 수 없는, 사악한 고통의 세계에 던져졌다는 사실의 통보일 뿐이다. 그것은 더이상 미래의 새로움의 기약이 되지 못한다. 과거의 악한 씨앗이 피워낸 악한 과실일 뿐이다. 그렇게 태어난 한 아이는 더이상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환자이다. 미래의 화신이 아니라 한 희생자이다.(31~32쪽)
이는 자연스레 3·11 동일본 대진재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후쿠시마의 원전들은 여전히 현재 인간이 가진 과학기술과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내던져져 있다. 3·11의 충격은 근대성의 뿌리로 기능해온 기초적 사유범주들의 자명성을 흔들고 있다. 인간중심주의, 이성에 대한 신뢰, 과학주의, 생명과 자연에 대한 철학 등이 급진적으로 재고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도 있다. 세월호 이야기다. 김홍중은 이 사건을 목도한 국민들의 마음이 부서졌다고 말한다. 이 마음의 부서짐은 일반적인 우울이나 무기력과 같은 병증으로 구분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주권적 우울’이다. 참사 후 우리는 모두 마음이 부서졌고, 그 결과 말이 부서졌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단 무기력의 상태에 빠졌다. 저자는 이를 ‘통감痛感의 해석학’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이어 골목길의 미학화 현상을 탐구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삶의 환경에 던져진 21세기의 한국인들이 골목길이라는 몽상공간을 통해 과거에 대한 자신들의 향수(노스탤지어)를 어떻게 육성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21세기 들어 크게 흥행하기 시작한 일련의 유괴영화들을 분석하며, 특히 납치된 아이의 의미에 대한 해명을 통해 위험사회로 접어든 한국사회에서 부모들이 어떻게 아이(자식)를 가장 소중한 존재(토템)인 동시에 합리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존재(리스크)로 구성해왔는지, 그 역설적 상황을 드러낸다. 신경숙 소설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사랑의 꿈이 환멸로 귀결되는 우리 시대의 친밀성의 파상에 다름아니다. 그에 의하면 신경숙 소설은 386세대가 사적 영역에서 어떻게 민주적 가족 관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징후다.
생존과 탈존
제2부는 ‘생존과 탈존’이라는 제목 아래 ‘서바이벌’이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세계의 비참을 다룬다. ‘저항’ ‘반항’ ‘자유’ ‘도전’의 상징이었던 이전 세대의 청년들과 달리 현재의 청년세대들은 ‘생존’을 하나의 ‘주의’로 삼아버렸다. 이들이 추구하는 ‘생존’은 목숨의 구제가 아니라 경쟁상황에서 잔존하여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에 가깝다.
생존주의란 당혹스런 개념이다. 왜냐하면, 생존은 그 본성상 주의主義와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존은 주의 이전, 성찰 이전, 사고 이전의, 생명의 충동과 힘의 영역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존재로서 생존에의 경향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존재는 없으며,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존재들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생존에의 열망은 자연적인 것이며, 선악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생존이, 조직된 주의가 될 때, 지향된 가치가 될 때, 집합적 마음의 짜임의 원리가 될 때이다. 생존이 주의로서 나타날 때, 그것은 무언가의 붕괴를 지시하고 있다.(291쪽)
「동아시아 생존주의 세대의 얼굴들」은 한국, 중국, 일본 청년들의 얼굴을 통해 바라본 사회상이다. 한국의 ‘88만원세대’, 중국의 ‘바링허우八十後세대’, 일본의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은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는 세대다. 중국의 한 젊은 화가의 자신만만해 보이는 얼굴사진과, 일본화가 이시다 테츠야의 그림에 나타난 우울의 얼굴들, 윤태호의 만화 『미생』에서 보여지는 장그래의 얼굴에 나타난 무표정과 체념을 설명하며, 김홍중은 이를 1980년대 만화의 주인공인 이현세의 까치(오혜성), 고행석의 구영탄, 박봉성의 최강타 등 이른바 ‘초인’이라고 할 만한 표상의 얼굴들, 어두운 시기지만 야망을 가질 수 있었고 ‘외인’이라 자처하며 판을 깰 수 있었던 세대와 대비한다.
생존生存과 더불어 부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탈존脫存은 생존의 반대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가거나 생존을 향한 마음의 동원이 불가능해져서 그 에너지가 자기파괴 또는 현실도피의 방향으로 흐르는 삶의 형식을 가리킨다. 이 우울한 마음의 풍경은 청년문화의 한 흐름이 되었으며 생존주의라는 시대적 꿈의 파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김홍중은 이를 탈존주의脫存主義라 부른다. 이어 생존과 탈존의 이분법으로 동시대 청년문화를 단순화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소박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함께 모여 시를 쓰는 아마추어 문학동인에 대한 현장연구를 시도하며 다양한 삶의 형식들에 대한 탐구를 예고한다.
사회와 마음
제3부는 이와 같은 연구들의 바탕을 이루는 문화사회학의 이론적 점검에 할애되고 있다. 김홍중은 막스 베버의 ‘이해사회학’을 자신이 시도하는 ‘마음의 사회학’의 범례로 내세우면서, 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상호침투에 주목한 여러 이론들을 통합하여 인지, 감정, 욕망/의지의 복합적 능력으로서의 ‘마음’에 대한 이론을 심화시키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나’의 자리가 없는 사회의 상상이다. 그것은 사회 그 자체의 끊임없는 전개와 연속의 섭리에 집중한다. 그러나 말하는 입들은 ‘내’가 메시아로 태어난 세계, 세계가 ‘나’를 메시아로 인지하고, ‘나’에게서 어떤 공적 행위를 기대하는 바로 그런 사회, ‘내’가 말하고, 행위하고, 참여해야 하는, ‘나’의 행위에 이 사회의 명운이 걸려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사회의 상상이다. 양자의 첨예한 대립은 표면상으로는 개념의 대립인 듯이 보이지만, 궁극적 수준으로 내려가면 두 상이한 신들의 싸움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신(운명)과 내 안에 깃들여 있는 미약하지만 생생한 신(행위) 사이의 싸움이다. 그것은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사이의 전쟁이다.(459~460쪽)
이런 작업들을 관통하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스탠스’의 이름이 바로 파상력이다. 파상력은 부재하는 것을 현존시키는 능력인 상상력과 반대로 현존하는 것들의 환각성을 깨닫는 힘, 혹은 그와 연관된 체험을 가리킨다. 김홍중에 의하면 우리 시대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그려내는 힘인 상상력이 아니라, 미래의 부재나 결손 혹은 비관과 진실하게 대면하면서, 그 고통과 맞서고, 그로부터 시효가 지난 몽상들을 가차 없이 떠나보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함께 모색하는, 고뇌의 공통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몰락,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환태평양 주요국가들의 우경화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대두…… 파상의 시대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엘리엇의 시구처럼, 세상은 “폭발이 아니라 흐느낌으로not with a bang but a whimper” 끝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어두운 꿈에서 깨어나려는 절박한 마음들이 존재할 때, 우리는 머리를 흔들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발버둥을 치면서 이 ‘가위눌림’을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과거의 꿈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꿈 사이의 긴 ‘환멸’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힘, 그리고 그 파편들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려는 파상력으로써, 우리는 책의 표지로 사용된 장민승의 작품 속 어두운 바다와 같은 세계에서 ‘희미하게’ 부서지는 미광 너머로 날아가는 새처럼, 새로운 세계를 다시 만들어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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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미래를 약속하는 힘이지만, 파상력은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한다. 예언하지도, 계몽하지도, 도덕적 훈계를 가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혹은 그것 속에서 우리는, 파괴되어가는 것들과 새로이 생성되는 것들을 사회적 가시권과 가청권으로 끌어내어, 고뇌의 공통공간을 만들 수 있다. 파상력은, 사회적인 것이 끓어오르며 새로운 길을 뚫는 장소, 그 어딘가에서 예기치 않은 희망의 씨앗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성되는 곳을 증언하기를 소망한다. 이런 점에서, 파상의 체험 속에서 수행된 이 연구들은 현장증언의 성격을 띤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동시대의 증인이다. 모든 증인들이 그러하듯이, 그 또한 증언의 말들이 누군가의 삶에, 어떤 순간에, 결정적인 힘이 되기를 희망한다. _‘프롤로그’에서
목차
프롤로그
1부 몽상과 각성
1장 미래의 미래
2장 마음의 부서짐: 세월호 참사와 주권적 우울
3장 몽상공간론: 골목길 풍경과 노스탤지어
4장 리스크-토템: 위험사회에서 아이의 의미론
5장 사랑의 꿈과 환멸: 신경숙 문학에서 ‘빈집’의 테마
6장 꿈과 사회
2부 생존과 탈존
7장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
8장 동아시아 생존주의 세대의 얼굴들
9장 탈존의 극장
10장 진정성의 수행과 창조적 자아에의 꿈
3부 사회와 마음
11장 소명으로서의 분열
12장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13장 사회적인 것의 합정성
14장 마음의 사회학을 이론화하기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