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상상된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
- 대등서명
- Imagined communities
- 개인저자
-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 서지원 옮김
- 발행사항
- 서울 :,길,,2018
- 형태사항
- 375 p. ; 23 cm
- 총서사항
- 우리 시대의 새로운 지적 대안 담론 ;. 프런티어 21
- ISBN
- 9788964451564
- 청구기호
- 340.21 A545i
- 일반주기
- 원저자명: Benedict R. O'G. Anderson
- 서지주기
- 참고문헌(p. 337-344)과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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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7239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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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00017239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민족 및 민족주의 연구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현대의 고전
민족은 상상되었다
제한적인 것으로, 주권을 가진 것으로, 그리고 공동체로
1983년 출간 이래 세계 수십 개국에서 25만 부가 넘게 판매되며(2006년 기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한국어판을 도서출판 길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내놓는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조차 ‘민족’은 근대 이후 역사적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된 공동체”라는 앤더슨의 핵심 주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만큼,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다. 2016년 런던정경대(LSE)의 한 연구자가 구글 학술검색 서비스를 활용해 가장 많이 인용된 사회과학도서의 순위를 집계한 바에 따르면, 『상상된 공동체』는 총 64,167회 인용되었으며, 이는 전체 사회과학도서 인용 순위 중 다섯 번째였다.(Elliott Green, 2018년 6월 현재까지의 통계는 88,813회 인용) 이번에 새롭게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번역은 앤더슨의 또 다른 주요 저술인 『세 깃발 아래서: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2009, 도서출판 길)을 번역 출간했으며,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태국․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정치를 연구하고 있는 서지원의 것이다. 앤더슨은 10여 개 언어의 탁월한 구사력, 동남아시아학에 대한 정통한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유럽만이 아니라 그 식민지들 및 다른 국가들의 경험까지 섭렵하고 있고, 그 국가들의 정치와 더불어 문학 또한 전거로 활용하는 탓에 그 글을 번역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이를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 옮긴이는 직접 지은이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번역을 다듬었다. 이제야말로 이 사회과학 고전을 제대로 읽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수평적-세속적이며 시간에 가로놓인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 ‘민족’
민족은 어떻게 “아득한 과거로부터 불거져 나와 무한한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되었는가. 조상으로 연결되고 후손으로 이어지며 영원의 힘을 가진 듯 보이는 민족의 힘은 마술적이다. 사람들이 민족의 이름 아래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고, 또 민족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음을 불사하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계화가 완료된 것으로 보이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민족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세계 도처에서 소수 민족들의 분리주의 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난민 문제 또한 민족 및 민족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의 역사 논쟁이나 분단과 정전 상태 해소에 관련해서도 이 주제는 예민하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민족주의는 현대 정치의 중심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없고 아마도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테니, 이 책의 부제가 명시하는 바,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의 과정을 되짚어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민족은 제한적(limited)인 것으로 상상된다. 10억가량의 살아 있는 인간들을 포괄하는 가장 큰 민족조차도 그 경계는 유연할지언정 유한하며,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들이 있다. 어떠한 민족도 스스로 인류라는 집합과 경계가 동일하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가장 메시아적인 민족주의자들조차도, 어떠한 시대에 이를테면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기독교도들만의 지구를 꿈꿀 수 있게 했던 그런 방식으로, 인류 구성원 모두가 그들의 민족에 참여할 날을 꿈꾸지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sovereign)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계몽 운동과 대혁명이 신이 하사한 계서적인 왕조령(dynastic realm)의 정통성을 파괴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났다. 어떠한 보편적 종교이든 간에 그 가장 독실한 추종자들조차도 그러한 종교들의 살아 있는 다원주의에, 그리고 신앙 각각의 존재론적인 주장들과 그 영역이 뻗어 있는 형태 간의 어긋남에 어쩔 도리 없이 맞닥뜨렸던 인류 역사의 단계에서 성숙에 이른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었으며, 신의 가호 아래 있을 것이라면 다른 누구를 통하지 않기를 바랐다. 주권 국가는 이러한 자유를 표상하는 도전장이자 휘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각의 민족 내에서 실제로 횡행하고 있을 법한 착취와 불평등과는 상관 없이, 민족은 언제나 깊은 수평적 동지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토록 제한적인 상상물을 위해 목숨을 빼앗는다기보다는 기꺼이 목숨을 던진 것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형제애(fraternity)가 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죽음들로써 우리는 민족주의가 제기하는 중심적 질문과 돌연 마주한다. 무엇이 얼마 되지 않은(기껏해야 두 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은) 역사의 오그라든 상상으로 하여금 그토록 거대한 희생을 일으키도록 했는가? 나는 해답의 출발점이 민족주의의 문화적 뿌리들에 있다고 생각한다.(본문 27~28쪽)
잘 알려진 대로, 앤더슨은 민족을 왕조 국가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난 “상상된 공동체”로 정의한다. 그 공동체는 종교 공동체의 붕괴, 그 종교 공동체 안에서 신으로부터 정당성을 끌어냈던 왕권의 약화와 맞물려 출현했다. 종교가 힘을 잃으면서 인간 삶의 영원성도 함께 사라져버렸으나, 이제 민족이라는 맞춤한 상상의 산물이 등장해 인간의 공허한 삶에 새로운 연속성과 영속성을 부여했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세속적인 일상어와 인쇄자본주의였다. 종교와 왕조 국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신성한 언어의 독점적인 지위가 일상어에 의해 무너졌고, 이 일상어는 인쇄술과 자본주의의 혁명적 공세 덕에 널리 힘을 얻게 되었다. 신문과 소설 지면에 인쇄된 언어, 활자화된 언어가 그 일상어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숙명과도 같은 공감과 유대를 형성하게끔 했다.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정서적이다. 운명공동체인 민족의 일원으로서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을 함께 헤쳐 나가려는 의지에 도달하려면, 그에 앞서 모어와 일상어로 경험하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정서적 충만감이 필요하다. 민족주의의 상상이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데에는 언어적 숙명 외에도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가 필요했다지만, 민족주의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핵심적인 자연적 유대는 역시 언어인 것이다.(서지원, 「옮긴이 해제」 중에서)
18세기에 꽃핀 두 가지 상상 형식인 소설과 신문은 또한 시간을 파악하는 방식에까지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소설의 구조 속에서 행위자들은 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독자들은 모든 행위자들의 모습을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볼 수 있다. 한 명의 한국인이 다른 동료 한국인들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를 만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거의 대부분 이름조차도 모를 것이다. 다른 한국인들이 어떤 한 순간에 뭘 하고 있는지 그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매일의 신문을 읽고 뉴스를 접하는 우리에게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 꾸준히 동시에 활동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상상된 공동체를 소환한다.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앤더슨의 발터 벤야민 인용)을 통해 달력을 따라 움직이는 사회적 유기체라는 관념이 바로 민족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민족 역시 역사를 타고 내려가며(또는 올라가며) 꾸준히 움직이는 견고한 공동체로 인식된다.
핵심적으로 나는 아주 오래된 세 가지 근본적인 문화적 관념이 사람들의 정신에 자명한 이치로서 행사하던 지배력을 잃었을 때에야, 그리고 지배력을 잃은 곳에서만 민족을 상상한다는 가능성 자체가 역사적으로 떠올랐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는 특정한 경전의 언어가 존재론적 진리의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언어가 진리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 〔…〕 두 번째는 사회란 당연히 높이 있는 중심, 즉 다른 인간들과 구분되는 인격이자 어떤 우주론적인(신성한) 섭리로써 통치하는 왕들을 둘러싸고, 그리고 그들의 아래에서 조직되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 세 번째는 우주론과 역사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시간성에 대한 관념이었다.
서로 연관된 이 확실성들은 경제적 변화, (사회적·과학적) ‘발견’들, 점점 빨라지는 커뮤니케이션 발달의 효과로 처음에는 서유럽에서, 그 후에는 다른 곳에서 서서히, 고르지 않게 몰락하면서 우주론과 역사 사이에 거친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형제애와 권력, 시간을 서로 의미 있게 엮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말하자면, 탐색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빠르게 숫자가 불어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원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관계지을 수 있도록 한 인쇄자본주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게 이러한 탐색을 촉진했으며, 더 큰 결실을 선사했다.(본문 66~67쪽)
식민지에서 백인 이주민들의 자손이 발명해 낸 민족주의
앤더슨은 민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민족국가․공화제․공민권․인민주권․국기와 국가 등의 상상된 현실과 민족주의가 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에서 발명되었다고 말한다. 식민지로 이주한 백인들의 자손(크리올)은 혈통상 유럽인이면서도 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받으며 식민지의 행정 단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그는 돌이킬 수 없이 크리올이었다.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이상 그는 진정한 스페인인이 될 수 없다.”) 그러자 크리올들은 점차 식민 행정 단위를 독립된 공동체로 간주하고 원주민들과 노예들까지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인민 민족주의(popular nationalism)의 토대를 마련한다. 그들은 “유럽의 공동체들에 평행하고 비교할 만한 공동체들로서 자신을 상상”하고자 했다. 아메리카인들의 심원한 우애를 바탕으로 근대적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민족주의의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반식민주의 민족주의, 즉 국가(state) 없는 민족(nation)에게서 민족주의의 봄날, 청춘, 기원을 찾는 그의 관점은 민족주의가 영국·프랑스로 대표되는 ‘전 세계적인 의미를 가지는 민족국가들’ 간의 갈등에서 비로소 시작되었고, 반식민주의 민족주의는 후대의 일탈 내지는 변종이라는 유럽중심주의적인 사고와는 전혀 다른 출발점에 서 있다. 또한 최초의 민족주의를 일궈낸 주역이 남·북 아메리카의 크리올, 즉 대서양을 건너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식민자들의 후예라는 그의 주장은 배타적인 영토에 뿌리박은 배타적인 언어, 문화, 종족성을 민족주의의 전제로 삼는 낭만주의적 경향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옮긴이 해제」 중에서)
모듈화되어 이식되고 표절과 변형을 거쳐 마침내 규범이 된 민족주의
이렇게 태어난 민족주의는 상상되자마자 표절되고 변형되었다. 제정 러시아, 헝가리, 영국, 일본, 태국 등의 왕조 국가들은 신성이 아니라 민족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가져오기 위해 신대륙의 민족주의를 표절했다. “관제 민족주의”(official nationalism)가 등장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왕조적 원리를 침식했고,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모든 왕조에게 자체 귀화를 부추겼다. “이러한 ‘관제 민족주의’들은 왕조 권력의 유지를 귀화와 결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짧고 꽉 끼는 민족의 피부를 제국의 거인 같은 몸통에 늘여 씌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관제 민족주의’, 즉 의지를 품고 이루어진 민족과 왕조 제국의 합병의 위치를 고려하는 데 대한 열쇠는 이것이 1820년대부터 유럽에서 왕성히 자라나고 있던 인민적 민족 운동들 이후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발달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 영토에서 민족주의의 ‘마지막 물결’이 일어나는데, 이는 그 기원에 있어 산업자본주의의 성취로 인해 가능해진 새로운 스타일의 지구적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제국들은 몇몇 국민이 지배하기에는 너무 크고 널리 퍼져 있었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발을 맞추어 국가는 본국에서나 식민지에서나 그 기능을 빠르게 다양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력들이 결합되면서 국가와 기업 관료제에 필요한 하급 간부들을 생산하려는 의도도 있고 하여 발생한 것이 ‘러시아화’하는 학교 체계였다. 〔…〕 특정한 교육 순례와 행정 순례 간의 연동은 토착민들이 그들 자신을 ‘국민’(national)으로 보게 될 새로운 ‘상상된 공동체’에 영토적 기초를 제공했다. 말하자면 식민지 국가의 팽창이 ‘토착민’들을 학교와 사무실로 초대해 들”인 것이다. 스위스, 인도네시아 등‘마지막 물결’에 속하는 민족주의의 경우 민족 구성원들이 구사하는 모어가 다수인 상황에서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인텔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중언어 구사 인텔리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세기 초반의 인텔리로서 그들은 교실 안팎에서 아메리카와 유럽 역사가 한 세기 이상 거쳐온 사납고 혼란스러운 경험들로부터 증류된 민족과 민족됨, 민족주의의 모델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모델들은 이제 천 개의 피어오르는 꿈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했다. 다양하게 결합된 크리올 민족주의와 일상어 민족주의, 관제 민족주의의 교훈들은 복사·각색·개량되었다. 마지막으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가 신체적·지적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변모시킴에 따라 인텔리들은 인쇄물을 우회하여 단지 문맹인 대중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읽는 비문맹 대중에게조차 상상된 공동체를 퍼뜨릴 방법을 찾아냈다.(본문 209~210쪽)
이 단계에 이르자 민족국가는 이미 규범이 되었고, 이제는 일상어의 공유 없이도 민족이 상상될 수 있는 정도에 도달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고귀한 왕조주의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1922년 즈음에는 합스부르크가, 호엔촐레른가, 로마노프가, 오스만가가 모두 사라졌다. 베를린 회의의 자리에 민족들의 연맹, 즉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들어섰으며, 여기에서는 비유럽인들도 배제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정당성 있는 국제 규범은 민족국가였고, 그렇기에 국제연맹에는 살아남아 있는 제국주의 세력들조차 제국의 제복이 아닌 민족의 의상을 입고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변동 이후 민족국가의 조류는 만조에 이르렀다.(본문 175쪽)
민족주의가 인종주의와 타자에 대한 적대를 낳는다는 혐의에 대한 반박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종종 민족주의의 병리를 지적하곤 한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 그리고 인종주의와의 친화성을 그 근거로 드는데, 앤더슨은 민족주의는 인종주의와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에게 민족은 사랑을, 그리고 때로는 심원하게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고취한다.”(본문 213쪽)
사실을 말하자면 민족주의는 역사적 운명의 언어로 사고하는 반면 인종주의는 역사의 바깥에서 혐오스러운 교미의 끝없는 연속을 통해 시간의 근원으로부터 전달되는 영원한 오염이라는 꿈을 꾼다. 〔…〕 인종주의의 꿈은 사실 그 기원을 민족 이데올로기보다는 계급 이데올로기, 무엇보다 지배자들의 신성성과 ‘푸른’ 피, ‘하얀’ 피에 대한 주장 및 귀족 가문 간의 ‘교배’에 두고 있다.(본문 225~226쪽)
인종주의(적 증오)는 민족이 태어나기 전부터 꾸준히 존재해 온 계급적, 귀족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자라난 것이므로 족보부터 전혀 다르다는 논리이다. 또한 그는 ‘역(逆)인종주의’가 반식민지 운동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목하라고 말한다.
요컨대, 앤더슨이 주장하는 바, “민족을 이루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수평적인 동지애 위에 세워진, 주권을 가진 공동체를 향한 ‘상상’이라는 정치적 행위이다.”(「옮긴이 해제」 중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인종주의, 국수주의 또는 자민족중심주의, 이른바 “국뽕”을 정당화하지 않기 위해, 민족주의의 기원과 본성을 이해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 앤더슨의 이 책은 중요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민족은 기억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특권과 같은 유산이 아니라, 운명과 미래를 공유하는 형제애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헌신하는 공동체의 이름이어야 하는 것이다.
민족은 상상되었다
제한적인 것으로, 주권을 가진 것으로, 그리고 공동체로
1983년 출간 이래 세계 수십 개국에서 25만 부가 넘게 판매되며(2006년 기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한국어판을 도서출판 길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내놓는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조차 ‘민족’은 근대 이후 역사적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된 공동체”라는 앤더슨의 핵심 주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만큼,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다. 2016년 런던정경대(LSE)의 한 연구자가 구글 학술검색 서비스를 활용해 가장 많이 인용된 사회과학도서의 순위를 집계한 바에 따르면, 『상상된 공동체』는 총 64,167회 인용되었으며, 이는 전체 사회과학도서 인용 순위 중 다섯 번째였다.(Elliott Green, 2018년 6월 현재까지의 통계는 88,813회 인용) 이번에 새롭게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번역은 앤더슨의 또 다른 주요 저술인 『세 깃발 아래서: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2009, 도서출판 길)을 번역 출간했으며,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태국․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정치를 연구하고 있는 서지원의 것이다. 앤더슨은 10여 개 언어의 탁월한 구사력, 동남아시아학에 대한 정통한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유럽만이 아니라 그 식민지들 및 다른 국가들의 경험까지 섭렵하고 있고, 그 국가들의 정치와 더불어 문학 또한 전거로 활용하는 탓에 그 글을 번역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이를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 옮긴이는 직접 지은이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번역을 다듬었다. 이제야말로 이 사회과학 고전을 제대로 읽을 기회를 얻은 것이다.
수평적-세속적이며 시간에 가로놓인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 ‘민족’
민족은 어떻게 “아득한 과거로부터 불거져 나와 무한한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되었는가. 조상으로 연결되고 후손으로 이어지며 영원의 힘을 가진 듯 보이는 민족의 힘은 마술적이다. 사람들이 민족의 이름 아래 서로를 증오하고 죽이고, 또 민족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음을 불사하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계화가 완료된 것으로 보이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민족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세계 도처에서 소수 민족들의 분리주의 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난민 문제 또한 민족 및 민족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의 역사 논쟁이나 분단과 정전 상태 해소에 관련해서도 이 주제는 예민하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민족주의는 현대 정치의 중심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없고 아마도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테니, 이 책의 부제가 명시하는 바,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의 과정을 되짚어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민족은 제한적(limited)인 것으로 상상된다. 10억가량의 살아 있는 인간들을 포괄하는 가장 큰 민족조차도 그 경계는 유연할지언정 유한하며,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들이 있다. 어떠한 민족도 스스로 인류라는 집합과 경계가 동일하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가장 메시아적인 민족주의자들조차도, 어떠한 시대에 이를테면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기독교도들만의 지구를 꿈꿀 수 있게 했던 그런 방식으로, 인류 구성원 모두가 그들의 민족에 참여할 날을 꿈꾸지 않는다.
민족은 주권을 가진(sovereign) 것으로 상상된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계몽 운동과 대혁명이 신이 하사한 계서적인 왕조령(dynastic realm)의 정통성을 파괴하고 있던 시대에 태어났다. 어떠한 보편적 종교이든 간에 그 가장 독실한 추종자들조차도 그러한 종교들의 살아 있는 다원주의에, 그리고 신앙 각각의 존재론적인 주장들과 그 영역이 뻗어 있는 형태 간의 어긋남에 어쩔 도리 없이 맞닥뜨렸던 인류 역사의 단계에서 성숙에 이른 민족들은 자유롭기를 꿈꾸었으며, 신의 가호 아래 있을 것이라면 다른 누구를 통하지 않기를 바랐다. 주권 국가는 이러한 자유를 표상하는 도전장이자 휘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각의 민족 내에서 실제로 횡행하고 있을 법한 착취와 불평등과는 상관 없이, 민족은 언제나 깊은 수평적 동지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토록 제한적인 상상물을 위해 목숨을 빼앗는다기보다는 기꺼이 목숨을 던진 것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형제애(fraternity)가 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죽음들로써 우리는 민족주의가 제기하는 중심적 질문과 돌연 마주한다. 무엇이 얼마 되지 않은(기껏해야 두 세기 정도밖에 되지 않은) 역사의 오그라든 상상으로 하여금 그토록 거대한 희생을 일으키도록 했는가? 나는 해답의 출발점이 민족주의의 문화적 뿌리들에 있다고 생각한다.(본문 27~28쪽)
잘 알려진 대로, 앤더슨은 민족을 왕조 국가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난 “상상된 공동체”로 정의한다. 그 공동체는 종교 공동체의 붕괴, 그 종교 공동체 안에서 신으로부터 정당성을 끌어냈던 왕권의 약화와 맞물려 출현했다. 종교가 힘을 잃으면서 인간 삶의 영원성도 함께 사라져버렸으나, 이제 민족이라는 맞춤한 상상의 산물이 등장해 인간의 공허한 삶에 새로운 연속성과 영속성을 부여했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세속적인 일상어와 인쇄자본주의였다. 종교와 왕조 국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신성한 언어의 독점적인 지위가 일상어에 의해 무너졌고, 이 일상어는 인쇄술과 자본주의의 혁명적 공세 덕에 널리 힘을 얻게 되었다. 신문과 소설 지면에 인쇄된 언어, 활자화된 언어가 그 일상어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숙명과도 같은 공감과 유대를 형성하게끔 했다.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정서적이다. 운명공동체인 민족의 일원으로서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을 함께 헤쳐 나가려는 의지에 도달하려면, 그에 앞서 모어와 일상어로 경험하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정서적 충만감이 필요하다. 민족주의의 상상이 역사적으로 등장하는 데에는 언어적 숙명 외에도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가 필요했다지만, 민족주의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핵심적인 자연적 유대는 역시 언어인 것이다.(서지원, 「옮긴이 해제」 중에서)
18세기에 꽃핀 두 가지 상상 형식인 소설과 신문은 또한 시간을 파악하는 방식에까지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소설의 구조 속에서 행위자들은 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독자들은 모든 행위자들의 모습을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볼 수 있다. 한 명의 한국인이 다른 동료 한국인들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를 만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거의 대부분 이름조차도 모를 것이다. 다른 한국인들이 어떤 한 순간에 뭘 하고 있는지 그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런데도 매일의 신문을 읽고 뉴스를 접하는 우리에게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 꾸준히 동시에 활동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상상된 공동체를 소환한다.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앤더슨의 발터 벤야민 인용)을 통해 달력을 따라 움직이는 사회적 유기체라는 관념이 바로 민족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민족 역시 역사를 타고 내려가며(또는 올라가며) 꾸준히 움직이는 견고한 공동체로 인식된다.
핵심적으로 나는 아주 오래된 세 가지 근본적인 문화적 관념이 사람들의 정신에 자명한 이치로서 행사하던 지배력을 잃었을 때에야, 그리고 지배력을 잃은 곳에서만 민족을 상상한다는 가능성 자체가 역사적으로 떠올랐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는 특정한 경전의 언어가 존재론적 진리의 떼어놓을 수 없는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언어가 진리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 〔…〕 두 번째는 사회란 당연히 높이 있는 중심, 즉 다른 인간들과 구분되는 인격이자 어떤 우주론적인(신성한) 섭리로써 통치하는 왕들을 둘러싸고, 그리고 그들의 아래에서 조직되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 세 번째는 우주론과 역사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시간성에 대한 관념이었다.
서로 연관된 이 확실성들은 경제적 변화, (사회적·과학적) ‘발견’들, 점점 빨라지는 커뮤니케이션 발달의 효과로 처음에는 서유럽에서, 그 후에는 다른 곳에서 서서히, 고르지 않게 몰락하면서 우주론과 역사 사이에 거친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면 형제애와 권력, 시간을 서로 의미 있게 엮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말하자면, 탐색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빠르게 숫자가 불어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원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관계지을 수 있도록 한 인쇄자본주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게 이러한 탐색을 촉진했으며, 더 큰 결실을 선사했다.(본문 66~67쪽)
식민지에서 백인 이주민들의 자손이 발명해 낸 민족주의
앤더슨은 민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민족국가․공화제․공민권․인민주권․국기와 국가 등의 상상된 현실과 민족주의가 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에서 발명되었다고 말한다. 식민지로 이주한 백인들의 자손(크리올)은 혈통상 유럽인이면서도 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받으며 식민지의 행정 단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그는 돌이킬 수 없이 크리올이었다.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이상 그는 진정한 스페인인이 될 수 없다.”) 그러자 크리올들은 점차 식민 행정 단위를 독립된 공동체로 간주하고 원주민들과 노예들까지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인민 민족주의(popular nationalism)의 토대를 마련한다. 그들은 “유럽의 공동체들에 평행하고 비교할 만한 공동체들로서 자신을 상상”하고자 했다. 아메리카인들의 심원한 우애를 바탕으로 근대적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민족주의의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반식민주의 민족주의, 즉 국가(state) 없는 민족(nation)에게서 민족주의의 봄날, 청춘, 기원을 찾는 그의 관점은 민족주의가 영국·프랑스로 대표되는 ‘전 세계적인 의미를 가지는 민족국가들’ 간의 갈등에서 비로소 시작되었고, 반식민주의 민족주의는 후대의 일탈 내지는 변종이라는 유럽중심주의적인 사고와는 전혀 다른 출발점에 서 있다. 또한 최초의 민족주의를 일궈낸 주역이 남·북 아메리카의 크리올, 즉 대서양을 건너와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식민자들의 후예라는 그의 주장은 배타적인 영토에 뿌리박은 배타적인 언어, 문화, 종족성을 민족주의의 전제로 삼는 낭만주의적 경향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옮긴이 해제」 중에서)
모듈화되어 이식되고 표절과 변형을 거쳐 마침내 규범이 된 민족주의
이렇게 태어난 민족주의는 상상되자마자 표절되고 변형되었다. 제정 러시아, 헝가리, 영국, 일본, 태국 등의 왕조 국가들은 신성이 아니라 민족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가져오기 위해 신대륙의 민족주의를 표절했다. “관제 민족주의”(official nationalism)가 등장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왕조적 원리를 침식했고,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모든 왕조에게 자체 귀화를 부추겼다. “이러한 ‘관제 민족주의’들은 왕조 권력의 유지를 귀화와 결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짧고 꽉 끼는 민족의 피부를 제국의 거인 같은 몸통에 늘여 씌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관제 민족주의’, 즉 의지를 품고 이루어진 민족과 왕조 제국의 합병의 위치를 고려하는 데 대한 열쇠는 이것이 1820년대부터 유럽에서 왕성히 자라나고 있던 인민적 민족 운동들 이후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발달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 영토에서 민족주의의 ‘마지막 물결’이 일어나는데, 이는 그 기원에 있어 산업자본주의의 성취로 인해 가능해진 새로운 스타일의 지구적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제국들은 몇몇 국민이 지배하기에는 너무 크고 널리 퍼져 있었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발을 맞추어 국가는 본국에서나 식민지에서나 그 기능을 빠르게 다양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력들이 결합되면서 국가와 기업 관료제에 필요한 하급 간부들을 생산하려는 의도도 있고 하여 발생한 것이 ‘러시아화’하는 학교 체계였다. 〔…〕 특정한 교육 순례와 행정 순례 간의 연동은 토착민들이 그들 자신을 ‘국민’(national)으로 보게 될 새로운 ‘상상된 공동체’에 영토적 기초를 제공했다. 말하자면 식민지 국가의 팽창이 ‘토착민’들을 학교와 사무실로 초대해 들”인 것이다. 스위스, 인도네시아 등‘마지막 물결’에 속하는 민족주의의 경우 민족 구성원들이 구사하는 모어가 다수인 상황에서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인텔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중언어 구사 인텔리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세기 초반의 인텔리로서 그들은 교실 안팎에서 아메리카와 유럽 역사가 한 세기 이상 거쳐온 사납고 혼란스러운 경험들로부터 증류된 민족과 민족됨, 민족주의의 모델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모델들은 이제 천 개의 피어오르는 꿈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했다. 다양하게 결합된 크리올 민족주의와 일상어 민족주의, 관제 민족주의의 교훈들은 복사·각색·개량되었다. 마지막으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가 신체적·지적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을 변모시킴에 따라 인텔리들은 인쇄물을 우회하여 단지 문맹인 대중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를 읽는 비문맹 대중에게조차 상상된 공동체를 퍼뜨릴 방법을 찾아냈다.(본문 209~210쪽)
이 단계에 이르자 민족국가는 이미 규범이 되었고, 이제는 일상어의 공유 없이도 민족이 상상될 수 있는 정도에 도달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고귀한 왕조주의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1922년 즈음에는 합스부르크가, 호엔촐레른가, 로마노프가, 오스만가가 모두 사라졌다. 베를린 회의의 자리에 민족들의 연맹, 즉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들어섰으며, 여기에서는 비유럽인들도 배제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정당성 있는 국제 규범은 민족국가였고, 그렇기에 국제연맹에는 살아남아 있는 제국주의 세력들조차 제국의 제복이 아닌 민족의 의상을 입고 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변동 이후 민족국가의 조류는 만조에 이르렀다.(본문 175쪽)
민족주의가 인종주의와 타자에 대한 적대를 낳는다는 혐의에 대한 반박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종종 민족주의의 병리를 지적하곤 한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 그리고 인종주의와의 친화성을 그 근거로 드는데, 앤더슨은 민족주의는 인종주의와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에게 민족은 사랑을, 그리고 때로는 심원하게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고취한다.”(본문 213쪽)
사실을 말하자면 민족주의는 역사적 운명의 언어로 사고하는 반면 인종주의는 역사의 바깥에서 혐오스러운 교미의 끝없는 연속을 통해 시간의 근원으로부터 전달되는 영원한 오염이라는 꿈을 꾼다. 〔…〕 인종주의의 꿈은 사실 그 기원을 민족 이데올로기보다는 계급 이데올로기, 무엇보다 지배자들의 신성성과 ‘푸른’ 피, ‘하얀’ 피에 대한 주장 및 귀족 가문 간의 ‘교배’에 두고 있다.(본문 225~226쪽)
인종주의(적 증오)는 민족이 태어나기 전부터 꾸준히 존재해 온 계급적, 귀족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자라난 것이므로 족보부터 전혀 다르다는 논리이다. 또한 그는 ‘역(逆)인종주의’가 반식민지 운동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목하라고 말한다.
요컨대, 앤더슨이 주장하는 바, “민족을 이루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수평적인 동지애 위에 세워진, 주권을 가진 공동체를 향한 ‘상상’이라는 정치적 행위이다.”(「옮긴이 해제」 중에서)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인종주의, 국수주의 또는 자민족중심주의, 이른바 “국뽕”을 정당화하지 않기 위해, 민족주의의 기원과 본성을 이해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 앤더슨의 이 책은 중요한 참고서가 될 것이다. 민족은 기억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특권과 같은 유산이 아니라, 운명과 미래를 공유하는 형제애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헌신하는 공동체의 이름이어야 하는 것이다.
목차
감사의 말
제2판 서문
제1장 서론
제2장 문화적 뿌리들
제3장 민족의식의 기원
제4장 크리올 선구자들
제5장 오래된 언어, 새로운 모델
제6장 관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제7장 마지막 물결
제8장 애국주의와 인종주의
제9장 역사의 천사
제10장 센서스, 지도, 박물관
제11장 기억과 망각
여행과교통:『 상상된공동체』의지리적전기에관하여
참고 문헌
옮긴이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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