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 대등서명
- Big Business and Hitler
- 개인저자
- 자크 파월 지음 ; 박영록 옮김
- 발행사항
- 파주 :,오월의봄,,2019
- 형태사항
- 430 p. ; 23 cm
- ISBN
- 9791187373988
- 청구기호
- 909.54 P336b
- 일반주기
- 원저자명: Jacques R. Pauwels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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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7521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7521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그들은 수익을 위해 히틀러를 고용했다”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기막힌 러브스토리
히틀러는 어떻게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는가?
* 독일의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를 전면에 내세웠는가?
* 미국의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와 파시즘에 호의적이었을까?
* 독일과 미국 재계는 어떻게 전쟁 중에 막대한 수익을 얻었는가?
* 나치 독재,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 강제노동, 노예노동에 시달린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 독일의 좌파들은 어떻게 몰락해갔는가?
* 독일은 과연 과거사를 철저히 반성하는 국가인가?
* 미국은 어떻게 전쟁지상주의 국가가 되었는가?
대자본과 히틀러 사이의 협력 관계
자크 파월은 전작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2017년 출간)에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유는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자본가들과 특권층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극히 호의적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구축했다. 파월은 이런 대자본가들의 행보를 통해 미국이 말한 ‘좋은 전쟁(Good War)’이란 미국의 ‘대기업(자본)’에게만 ‘좋은’ 것이었을 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또 다른 얼굴을 고발한 바 있다.
신간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에서 자크 파월은 전작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기막힌 밀착 관계를 파헤친다. 히틀러가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미국의 자본가들이 그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독일 지배층 중 한 명은 “우리가 히틀러를 고용했다!”고 의기양양하게 외치기도 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정치 경력 초기부터 그를 지원했고,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데 협력했다. 또 히틀러가 정복 전쟁을 벌이고 약탈을 저지르며 홀로코스트를 자행할 때 도움을 주었고, 그 과정에서 전례 없이 높은 수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몰락했을 때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이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에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와중에 자신들의 부와 권력, 특권까지 지켜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흔적까지 지울 수 있었다. 미국 정부와 독일 내 미국 점령군 당국의 주요 결정권자 대부분이 미국의 대기업과 은행의 대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용 역사학자를 고용해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삭제하기도 했다. 자신들은 히틀러가 집권하도록 돕지 않았고, 히틀러에게 협력하지 않았거나 협력했다고 해도 강요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었다. 히틀러를 희대의 악마로 포장하고,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히틀러는 자신들의 목표 달성을 가능케 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부자들이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 그로 인해 죽는 이들은 빈자”라고. 독일과 미국의 특권층과 자본가들의 선택 때문에 힘없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와 서민들이 전선에서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다. 수백만 명이 살해된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는 미국 및 독일 대자본과 히틀러 사이의 협력 관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책이다. 파월은 수많은 책과 자료를 참조해 나치즘과 파시즘이 어떻게 등장했으며, 자본주의와 어떻게 결탁했는지, 독일과 미국 및 기타 국가의 자본가들이 나치즘과 파시즘의 성장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낱낱이 밝혀낸다. “독일에서 나치즘과 자본주의의 역사는 친밀한 관계의 연대기이자 일종의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종으로 이익을 본 사람들은 히틀러를 뒤에서 떠받친 자본가들, 대기업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임러-벤츠, 베엠베, 바이엘, 도이체 방크, 드레스드너 방크, 코카콜라, 아이비엠, 포드, 스탠더드 오일, 싱어, 아이티티, 유니레버, 제너럴모터스, 듀폰, 코카콜라, 코닥 등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기업과 은행이 당시 수익을 위해 히틀러를 적극 지원했고, 전쟁으로 큰 수익을 올렸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 제너럴모터스의 회장이었던 앨프리드 P. 슬론, 아이비엠의 회장이었던 토머스 J. 왓슨, 언론계의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스탠더드 오일 책임자였던 월터 C. 티글, 듀폰의 창업자인 이레네 듀폰 등은 히틀러를 적극 지원했던 미국의 거물들이다.
히틀러는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가?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게 하나 있다. 히틀러가 1934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일 유권자 다수의 표를 받은 적이 없었다. 1933년 내각의 수장 총리가 된 것도, 1934년 총리 겸 대통령이 되면서 무한한 권력을 누리게 된 것도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게 아니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은 1932년 총선에서 오히려 이전보다 의석을 잃었다. 히틀러를 지원했던 독일의 자본가와 권력층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권력층은 히틀러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3년 히틀러를 기어코 총리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집요하게 설득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한 보수 정치인은 “우리가 히틀러를 고용했다!”고 외친 바 있다. 1934년에 대통령이 된 것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군 장성들이 히틀러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히틀러가 그 자신의 힘으로 집권했다는 것은 당시 나치스가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었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은 ‘권력 위임’ 또는 ‘권력 양도’일 따름이었다.
“전직 ‘최전선 군인’이었던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에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배, 러시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 허약한 바이마르식 민주주의의 탄생을 비롯한 여러 충격적인 사건이 뒤섞여 있는 맥락에서였다.”
1923년 히틀러는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리고 1934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 꾸준히 독일의 권력층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의 기간이 길었고 그 과정에서 부침도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히틀러가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의 대기업과 대형 금융기관, 그리고 이들과 협력했던 경제적 특권층은 히틀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들이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부상해 마침내 권좌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이 대가로 독일 재계, 즉 대자본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수익이라는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 열매는 히틀러의 퇴행적인 정치, 대규모 재무장 프로그램, 정복 전쟁, 점령국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 그리고 유대인 재산 몰수 및 학살 등 각종 그로테스크한 범죄로 얼룩진 땅 위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를 지원했나?
그렇다면 독일의 권력층과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를 지원했을까? 사실 1920년대와 1930년대,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파시스트 또는 유사 파시스트 독재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비롯한 많은 서방 국가에서 출현했다. 즉 히틀러의 등장은 ‘독일에서 발생한 희한한 교통사고’ 같은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와 나치즘은 무솔리니, 프랑코, 피노체트 등 독재자들의 파시스트 정권과 더불어 독일, 유럽 전반, 그리고 나머지 서방세계의 역사 진행 방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치즘은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독일에서 자본주의가 그 근본 목표-수익의 극대화와 자본의 축적-를 실현하기 위해 취했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체제가 불러온 하나의 징후였던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는 서방세계의 중심에서 탄생했지만 불과 한두 세기 만에 진정한 ‘세계체제’로 변모해왔는데, 이 역사에서 그들은 전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나치즘, 더 나아가 파시즘은 사실 자본주의의 징후였다.
19세기 독일제국은 산업화를 이뤄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로 부상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많은 것을 잃었다.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기는커녕 상당한 규모의 영토와 해외 시장마저 잃게 되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벨기에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곳곳에서 대규모 혁명이 발발했다. 당시 시대정신은 좌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1929년 말에는 세계에 재앙과도 같은 경제 위기, 즉 대공황이 발생했다. 독일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무렵 위기감을 느낀 독일의 기업계와 금융계의 대표급 인사들이 히틀러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히틀러는 자신들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독일의 심각한 정치적·경제적 문제를 타개할 의지와 능력을 지닌 독재자가 될 만한 인물로 비쳤다. 또한 히틀러가 자신들의 적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을 파괴해줄 거라는 기대가 컸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줄 적임자로 보였다.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노동조합원→유대인
히틀러는 독일의 자본가들에게 거듭 자신의 정책을 홍보했다. 자신이 집권하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몰아낼 것이며, 노동조합을 무력화할 것이고, 소유주들은 다시 ‘자기 집의 주인’이 될 것이며, 임금을 올리지 않은 채 노동시간을 늘릴 것이고, 사회적 비용 또한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더불어 재무장 프로그램을 통해 강한 독일을 만들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업가와 은행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차츰 히틀러를 지원하는 자본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목사인 마르틴 니묄러의 유명한 시에 잘 나타나 있듯이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공산주의자를 탄압했고, 이어서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 유대인을 차례차례 탄압했다. ‘나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독일 재계는 좌파적인 모든 것, 즉 극좌파 공산주의자, 온건 좌파 사회주의자, 유사 좌파 나치당원, 그리고 좌파 노동조합 등이 제거된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해했다. 독일에서 한때 강력했던 노동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기업가와 은행가가 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었다. 기존 정당들이 실현해주지 못했던 이 꿈을 히틀러가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버렸던 것이다.
나치 독재,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히틀러의 나치즘, 그리고 파시즘은 미국 자본가들에게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이것이 1945년 이후에도 그들이 계속해서 프랑코, 수하르토, 피노체트 등이 이끌었던 파시스트 (그리고 다른 형태의) 독재 정권을 선호했던 이유이다. 그런데 파시즘보다 자본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전쟁이었다. 전쟁이 미국의 대기업과 대형 은행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라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래서 미국은 1945년 이후에도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최근 자신의 이력서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내용을 추가한 대통령하에서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나치 독재’로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경제 위기가 닥치자 수요와 공급 사이에 불균형이 생겼고, 이 문제는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보다 독일에서 더 심하게 나타났다. 사실 독일 산업계는 생산성이 매우 높았지만, 식민지가 없었기 때문에 값싼 원료 공급처나 수출품과 투자자본을 위한 시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히틀러가 제안한 해결책은 재무장 프로그램이었다. 이는 기업가와 은행가가 꿈꿔왔던 방식이기도 했다. 자본가들은 재무장이 국제사회에서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재무장 프로그램이 자신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자본가들도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재무장 프로그램에 주목했고, 거기에 차츰 투자를 하게 된다. 또한 히틀러를 직접 만난 언론계의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소유한 통신사와 신문사의 기사, 출판사의 출판물 등에서 히틀러는 지속적으로 우상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곧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자본가들에게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과 미국의 재계는 전쟁에 적극 협력했고, 그 덕에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히틀러를 지원한 미국의 기업과 자본가들
“미국에서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미 민주주의가 단단히 뿌리를 내려, 파시즘이 발흥할 기회가 없었을 거라고 너무 쉽게 추정하고들 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미국 기득권층도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이 촉발하고 대공황이 악화시킨 예의 문제들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었다. 파시즘의 싹은 미국 땅에도 퍼지고 있었고, 미국 권력층 일부는 실제로 자국의 파시스트 조직을 지원하고 해외의 파시스트와 교분을 나누며 ‘파시스트 옵션’을 고민하기도 했다.”
미국 자본 역시 초기 단계부터 히틀러를 지원했다. 그리고 독일에 수많은 지사 공장을 세워 나치 정권이 사용할 무기와 기타 전쟁 물자를 생산하고, 나치스에 엄청난 양의 연료와 고무, 기타 전략 원료를 공급해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미국 기업들의 이러한 공급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무시무시한 전격전을 결코 실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에도, 심지어 진주만 공격 이후에도, 미국 재계는 나치 독일과 중요한 거래를 지속했다. 그 거래로부터 엄청난 수익이 창출되었다. 그리고 이 수익은 점령국에서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과 수용소 수감자 등을 활용한 강제노동을 통해 극대화되었다.
일례로 헨리 포드의 가족기업인 포드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헨리 포드는 널리 존경받던 미국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지만, 히틀러만큼이나 과격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포드는 나치 독일에 트럭과 광범위한 전쟁 물자를 공급해 돈을 벌었다. 그중 일부는 미국에서 수출되었지만, 대부분은 쾰른에 위치한 포드-베르케라는 이름의 자회사에서 생산되었다. 포드의 독일 내 투자는 전쟁 기간 동안 노예노동을 활용한 덕분에 더욱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제너럴모터스의 회장이었던 앨프리드 P. 슬론도 히틀러를 찬양한 미국의 많은 거물 중 한 사람이다. 제너럴모터스의 독일 지사 공장인 오펠은 나치 군대가 사용할 트럭, 비행기, 기타 전쟁 물자를 생산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아이비엠의 회장이었던 토머스 J. 왓슨 또한 히틀러 숭배자였다. 그 또한 공업 생산 자동화를 가능케 한 펀치 카드를 제공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 밖에 언론계의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스탠더드 오일 책임자였던 월터 C. 티글, 본인과 이름이 같은 트러스트의 창업자인 이레네 듀폰 등 산업계의 거물도 히틀러의 숭배자들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 그리고 노예노동에 시달린 사람들
“나치즘은 노동의 자유를 억압해서, 즉 독일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 들의 부자유를 극대화해서 자본의 자유를 극대화한 술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파르벤, 지멘스 운트 할스케, 데베엠, 다임러-벤츠, 베엠베, 메서슈미트, 클뢰크너 등 전쟁 물자를 만들던 공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예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코카콜라, 포드, 코닥 등 미국 기업들도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을 활용해 수익을 올렸다. 대기업의 뒤에는 푼돈을 받고 그 대가로 규율을 강제해주던 친위대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문자 그대로 죽도록 일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동유럽 사람들과 유대인들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유대인과 동유럽인이 노예노동과 기아로 또는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동유럽의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과 13세 이하 어린이들도 노예노동에 시달렸다. 전쟁 기간 동안에 유럽 내 유대인 수백만 명이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등의 절멸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그들은 죽기 전까지 노예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한 예로, 바이엘, 회흐스트, 바스프 등 대기업들로 구성된 트러스트 이게파르벤을 들 수 있다. 이 트러스트는 히틀러의 집권에 도움을 주었고, 재무장 프로그램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에는 자사 공장, 특히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 바로 옆에 지은 거대한 시설에서 노예노동을 악용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다. 게다가 이게파르벤은 데게슈라는 지사를 통해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 등의 절멸수용소 가스실에서 사용한 독가스 치클론 베Zyklon-B를 공급하기도 했다.
수감자들은 대부분 거칠고 위험한 일에 투입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부실한 식사를 했고, 겨울에는 추위에 여름에는 더위에 노출되었으며, 매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지내면서 혹사를 당했기 때문에 매달 약 5분의 1 정도가 죽음을 맞이했다. 노예처럼 일할 만큼 건강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살해되었다. 하지만 사망한 이들조차 나치스와 나치스를 도운 기업과 은행에겐 쓰임새가 있었다. 시신에서 옷, 현금, 보석, 시계,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을 약탈하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심지어 금니까지 수거했다. 죽음이 예정된 사람들마저도 수익 창출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독일 산업계의 이익을 위해 진행되었던 생체 실험 및 기타 연구 실험에 기니피그 같은 실험동물로 쓰였던 것이다.
이런 노예노동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의 최신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비엠이 홀러리스 계산기 등 여러 장비를 제공했기 때문에 나치스에서 유대인 등의 희생자 명단을 만들 수 있었고, 수감자를 등록하고 노예노동을 관리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모든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에는 홀러리스 부서라고 불렸던 아이비엠 사무소가 있었다.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기막힌 러브스토리
히틀러는 어떻게 세계사에 등장하게 되었는가?
* 독일의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를 전면에 내세웠는가?
* 미국의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와 파시즘에 호의적이었을까?
* 독일과 미국 재계는 어떻게 전쟁 중에 막대한 수익을 얻었는가?
* 나치 독재,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 강제노동, 노예노동에 시달린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 독일의 좌파들은 어떻게 몰락해갔는가?
* 독일은 과연 과거사를 철저히 반성하는 국가인가?
* 미국은 어떻게 전쟁지상주의 국가가 되었는가?
대자본과 히틀러 사이의 협력 관계
자크 파월은 전작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2017년 출간)에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유는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의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자본가들과 특권층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극히 호의적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막대한 부를 구축했다. 파월은 이런 대자본가들의 행보를 통해 미국이 말한 ‘좋은 전쟁(Good War)’이란 미국의 ‘대기업(자본)’에게만 ‘좋은’ 것이었을 뿐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또 다른 얼굴을 고발한 바 있다.
신간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에서 자크 파월은 전작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기막힌 밀착 관계를 파헤친다. 히틀러가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미국의 자본가들이 그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독일 지배층 중 한 명은 “우리가 히틀러를 고용했다!”고 의기양양하게 외치기도 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정치 경력 초기부터 그를 지원했고,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데 협력했다. 또 히틀러가 정복 전쟁을 벌이고 약탈을 저지르며 홀로코스트를 자행할 때 도움을 주었고, 그 과정에서 전례 없이 높은 수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몰락했을 때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이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에도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 와중에 자신들의 부와 권력, 특권까지 지켜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흔적까지 지울 수 있었다. 미국 정부와 독일 내 미국 점령군 당국의 주요 결정권자 대부분이 미국의 대기업과 은행의 대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용 역사학자를 고용해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삭제하기도 했다. 자신들은 히틀러가 집권하도록 돕지 않았고, 히틀러에게 협력하지 않았거나 협력했다고 해도 강요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었다. 히틀러를 희대의 악마로 포장하고,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히틀러는 자신들의 목표 달성을 가능케 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 “부자들이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 그로 인해 죽는 이들은 빈자”라고. 독일과 미국의 특권층과 자본가들의 선택 때문에 힘없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와 서민들이 전선에서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다. 수백만 명이 살해된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는 미국 및 독일 대자본과 히틀러 사이의 협력 관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책이다. 파월은 수많은 책과 자료를 참조해 나치즘과 파시즘이 어떻게 등장했으며, 자본주의와 어떻게 결탁했는지, 독일과 미국 및 기타 국가의 자본가들이 나치즘과 파시즘의 성장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낱낱이 밝혀낸다. “독일에서 나치즘과 자본주의의 역사는 친밀한 관계의 연대기이자 일종의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종으로 이익을 본 사람들은 히틀러를 뒤에서 떠받친 자본가들, 대기업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임러-벤츠, 베엠베, 바이엘, 도이체 방크, 드레스드너 방크, 코카콜라, 아이비엠, 포드, 스탠더드 오일, 싱어, 아이티티, 유니레버, 제너럴모터스, 듀폰, 코카콜라, 코닥 등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기업과 은행이 당시 수익을 위해 히틀러를 적극 지원했고, 전쟁으로 큰 수익을 올렸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 제너럴모터스의 회장이었던 앨프리드 P. 슬론, 아이비엠의 회장이었던 토머스 J. 왓슨, 언론계의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스탠더드 오일 책임자였던 월터 C. 티글, 듀폰의 창업자인 이레네 듀폰 등은 히틀러를 적극 지원했던 미국의 거물들이다.
히틀러는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가?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게 하나 있다. 히틀러가 1934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일 유권자 다수의 표를 받은 적이 없었다. 1933년 내각의 수장 총리가 된 것도, 1934년 총리 겸 대통령이 되면서 무한한 권력을 누리게 된 것도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게 아니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은 1932년 총선에서 오히려 이전보다 의석을 잃었다. 히틀러를 지원했던 독일의 자본가와 권력층의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권력층은 히틀러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3년 히틀러를 기어코 총리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집요하게 설득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한 보수 정치인은 “우리가 히틀러를 고용했다!”고 외친 바 있다. 1934년에 대통령이 된 것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군 장성들이 히틀러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히틀러가 그 자신의 힘으로 집권했다는 것은 당시 나치스가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었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은 ‘권력 위임’ 또는 ‘권력 양도’일 따름이었다.
“전직 ‘최전선 군인’이었던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에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배, 러시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 허약한 바이마르식 민주주의의 탄생을 비롯한 여러 충격적인 사건이 뒤섞여 있는 맥락에서였다.”
1923년 히틀러는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했다. 그리고 1934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 꾸준히 독일의 권력층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의 기간이 길었고 그 과정에서 부침도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히틀러가 집권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의 대기업과 대형 금융기관, 그리고 이들과 협력했던 경제적 특권층은 히틀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들이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부상해 마침내 권좌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이 대가로 독일 재계, 즉 대자본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수익이라는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 열매는 히틀러의 퇴행적인 정치, 대규모 재무장 프로그램, 정복 전쟁, 점령국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 그리고 유대인 재산 몰수 및 학살 등 각종 그로테스크한 범죄로 얼룩진 땅 위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를 지원했나?
그렇다면 독일의 권력층과 자본가들은 왜 히틀러를 지원했을까? 사실 1920년대와 1930년대,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파시스트 또는 유사 파시스트 독재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비롯한 많은 서방 국가에서 출현했다. 즉 히틀러의 등장은 ‘독일에서 발생한 희한한 교통사고’ 같은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와 나치즘은 무솔리니, 프랑코, 피노체트 등 독재자들의 파시스트 정권과 더불어 독일, 유럽 전반, 그리고 나머지 서방세계의 역사 진행 방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나치즘은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독일에서 자본주의가 그 근본 목표-수익의 극대화와 자본의 축적-를 실현하기 위해 취했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체제가 불러온 하나의 징후였던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는 서방세계의 중심에서 탄생했지만 불과 한두 세기 만에 진정한 ‘세계체제’로 변모해왔는데, 이 역사에서 그들은 전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나치즘, 더 나아가 파시즘은 사실 자본주의의 징후였다.
19세기 독일제국은 산업화를 이뤄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로 부상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많은 것을 잃었다.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기는커녕 상당한 규모의 영토와 해외 시장마저 잃게 되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벨기에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곳곳에서 대규모 혁명이 발발했다. 당시 시대정신은 좌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1929년 말에는 세계에 재앙과도 같은 경제 위기, 즉 대공황이 발생했다. 독일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무렵 위기감을 느낀 독일의 기업계와 금융계의 대표급 인사들이 히틀러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히틀러는 자신들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독일의 심각한 정치적·경제적 문제를 타개할 의지와 능력을 지닌 독재자가 될 만한 인물로 비쳤다. 또한 히틀러가 자신들의 적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을 파괴해줄 거라는 기대가 컸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줄 적임자로 보였다.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노동조합원→유대인
히틀러는 독일의 자본가들에게 거듭 자신의 정책을 홍보했다. 자신이 집권하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몰아낼 것이며, 노동조합을 무력화할 것이고, 소유주들은 다시 ‘자기 집의 주인’이 될 것이며, 임금을 올리지 않은 채 노동시간을 늘릴 것이고, 사회적 비용 또한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더불어 재무장 프로그램을 통해 강한 독일을 만들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업가와 은행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차츰 히틀러를 지원하는 자본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사회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목사인 마르틴 니묄러의 유명한 시에 잘 나타나 있듯이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공산주의자를 탄압했고, 이어서 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 유대인을 차례차례 탄압했다. ‘나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독일 재계는 좌파적인 모든 것, 즉 극좌파 공산주의자, 온건 좌파 사회주의자, 유사 좌파 나치당원, 그리고 좌파 노동조합 등이 제거된 것에 대해 매우 만족해했다. 독일에서 한때 강력했던 노동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기업가와 은행가가 꽤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었다. 기존 정당들이 실현해주지 못했던 이 꿈을 히틀러가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버렸던 것이다.
나치 독재,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히틀러의 나치즘, 그리고 파시즘은 미국 자본가들에게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바로 이것이 1945년 이후에도 그들이 계속해서 프랑코, 수하르토, 피노체트 등이 이끌었던 파시스트 (그리고 다른 형태의) 독재 정권을 선호했던 이유이다. 그런데 파시즘보다 자본에 더 유리하게 작용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전쟁이었다. 전쟁이 미국의 대기업과 대형 은행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라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래서 미국은 1945년 이후에도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최근 자신의 이력서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내용을 추가한 대통령하에서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나치 독재’로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경제 위기가 닥치자 수요와 공급 사이에 불균형이 생겼고, 이 문제는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보다 독일에서 더 심하게 나타났다. 사실 독일 산업계는 생산성이 매우 높았지만, 식민지가 없었기 때문에 값싼 원료 공급처나 수출품과 투자자본을 위한 시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히틀러가 제안한 해결책은 재무장 프로그램이었다. 이는 기업가와 은행가가 꿈꿔왔던 방식이기도 했다. 자본가들은 재무장이 국제사회에서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재무장 프로그램이 자신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자본가들도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재무장 프로그램에 주목했고, 거기에 차츰 투자를 하게 된다. 또한 히틀러를 직접 만난 언론계의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소유한 통신사와 신문사의 기사, 출판사의 출판물 등에서 히틀러는 지속적으로 우상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곧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자본가들에게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과 미국의 재계는 전쟁에 적극 협력했고, 그 덕에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히틀러를 지원한 미국의 기업과 자본가들
“미국에서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미 민주주의가 단단히 뿌리를 내려, 파시즘이 발흥할 기회가 없었을 거라고 너무 쉽게 추정하고들 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미국 기득권층도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이 촉발하고 대공황이 악화시킨 예의 문제들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었다. 파시즘의 싹은 미국 땅에도 퍼지고 있었고, 미국 권력층 일부는 실제로 자국의 파시스트 조직을 지원하고 해외의 파시스트와 교분을 나누며 ‘파시스트 옵션’을 고민하기도 했다.”
미국 자본 역시 초기 단계부터 히틀러를 지원했다. 그리고 독일에 수많은 지사 공장을 세워 나치 정권이 사용할 무기와 기타 전쟁 물자를 생산하고, 나치스에 엄청난 양의 연료와 고무, 기타 전략 원료를 공급해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미국 기업들의 이러한 공급이 없었다면, 히틀러는 무시무시한 전격전을 결코 실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 기간 동안에도, 심지어 진주만 공격 이후에도, 미국 재계는 나치 독일과 중요한 거래를 지속했다. 그 거래로부터 엄청난 수익이 창출되었다. 그리고 이 수익은 점령국에서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과 수용소 수감자 등을 활용한 강제노동을 통해 극대화되었다.
일례로 헨리 포드의 가족기업인 포드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헨리 포드는 널리 존경받던 미국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지만, 히틀러만큼이나 과격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포드는 나치 독일에 트럭과 광범위한 전쟁 물자를 공급해 돈을 벌었다. 그중 일부는 미국에서 수출되었지만, 대부분은 쾰른에 위치한 포드-베르케라는 이름의 자회사에서 생산되었다. 포드의 독일 내 투자는 전쟁 기간 동안 노예노동을 활용한 덕분에 더욱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제너럴모터스의 회장이었던 앨프리드 P. 슬론도 히틀러를 찬양한 미국의 많은 거물 중 한 사람이다. 제너럴모터스의 독일 지사 공장인 오펠은 나치 군대가 사용할 트럭, 비행기, 기타 전쟁 물자를 생산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아이비엠의 회장이었던 토머스 J. 왓슨 또한 히틀러 숭배자였다. 그 또한 공업 생산 자동화를 가능케 한 펀치 카드를 제공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 밖에 언론계의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스탠더드 오일 책임자였던 월터 C. 티글, 본인과 이름이 같은 트러스트의 창업자인 이레네 듀폰 등 산업계의 거물도 히틀러의 숭배자들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 그리고 노예노동에 시달린 사람들
“나치즘은 노동의 자유를 억압해서, 즉 독일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 들의 부자유를 극대화해서 자본의 자유를 극대화한 술책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파르벤, 지멘스 운트 할스케, 데베엠, 다임러-벤츠, 베엠베, 메서슈미트, 클뢰크너 등 전쟁 물자를 만들던 공장에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예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코카콜라, 포드, 코닥 등 미국 기업들도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을 활용해 수익을 올렸다. 대기업의 뒤에는 푼돈을 받고 그 대가로 규율을 강제해주던 친위대가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문자 그대로 죽도록 일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동유럽 사람들과 유대인들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유대인과 동유럽인이 노예노동과 기아로 또는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동유럽의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과 13세 이하 어린이들도 노예노동에 시달렸다. 전쟁 기간 동안에 유럽 내 유대인 수백만 명이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등의 절멸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그들은 죽기 전까지 노예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한 예로, 바이엘, 회흐스트, 바스프 등 대기업들로 구성된 트러스트 이게파르벤을 들 수 있다. 이 트러스트는 히틀러의 집권에 도움을 주었고, 재무장 프로그램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에는 자사 공장, 특히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 바로 옆에 지은 거대한 시설에서 노예노동을 악용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다. 게다가 이게파르벤은 데게슈라는 지사를 통해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 등의 절멸수용소 가스실에서 사용한 독가스 치클론 베Zyklon-B를 공급하기도 했다.
수감자들은 대부분 거칠고 위험한 일에 투입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부실한 식사를 했고, 겨울에는 추위에 여름에는 더위에 노출되었으며, 매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지내면서 혹사를 당했기 때문에 매달 약 5분의 1 정도가 죽음을 맞이했다. 노예처럼 일할 만큼 건강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살해되었다. 하지만 사망한 이들조차 나치스와 나치스를 도운 기업과 은행에겐 쓰임새가 있었다. 시신에서 옷, 현금, 보석, 시계,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을 약탈하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심지어 금니까지 수거했다. 죽음이 예정된 사람들마저도 수익 창출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독일 산업계의 이익을 위해 진행되었던 생체 실험 및 기타 연구 실험에 기니피그 같은 실험동물로 쓰였던 것이다.
이런 노예노동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의 최신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비엠이 홀러리스 계산기 등 여러 장비를 제공했기 때문에 나치스에서 유대인 등의 희생자 명단을 만들 수 있었고, 수감자를 등록하고 노예노동을 관리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모든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에는 홀러리스 부서라고 불렸던 아이비엠 사무소가 있었다.
목차
서문 7
제1부 독일 재계와 히틀러
1장 제국, 전쟁, 그리고 혁명 21
2장 산업, 민주주의, 그리고 독재 36
3장 경제적·정치적 위기 48
4장 “우리가 히틀러를 고용했다” 61
5장 좌파 숙청 69
6장 나치 독재: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80
7장 제3제국: 복지국가였나? 106
8장 1939~1945년: 히틀러의 전쟁? 124
9장 끝까지 함께! 142
10장 만족하지 못했던 수혜자들 161
막간
다른 곳에서는?: 그들 또한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169
제2부 미국 재계와 나치 독일
11장 달러의 독일 공세 203
12장 미국 내 히틀러의 지지자와 동업자 217
13장 ‘로젠펠트’보다 히틀러 237
14장 ‘미국산’ 전격전 258
15장 진주만 공격 이후: ‘평시와 다름없이’ 280
16장 전쟁=수익 294
17장 은행가와 정보요원의 역할 306
18장 폭격, 피해와 보상 315
19장 모겐소와 모스크바 사이 326
20장 나치의 과거, 미국의 미래 334
결론: 파시즘과 1945년 이후의 전쟁 348
후기: 역사는 ‘허풍’인가? 355
옮긴이의 말 369
주 373
참고문헌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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