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어크로스 페미니즘: 세계 여성 지성과의 대화
- 개인저자
- 안희경 지음
- 발행사항
- 서울: 글항아리, 2017
- 형태사항
- [16], 242 p. : 천연색삽화 ; 20 cm
- ISBN
- 9788967354749
- 청구기호
- 337.2 안98ㅇ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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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7931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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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17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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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계속 발언하는 겁니다.
더 우아하게, 더 복합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벼려진
여성의 언어들
“차별 속에 있으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것이 바로 ‘존엄’입니다.”
_쥘리에트 비노슈·영화배우
“최고의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조차 하찮은 존재로,
폭력의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마찬가지로 최고의 특권층에 속한 백인 여성도 끔찍한 대우를 받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_리베카 솔닛·작가, 역사가
“생활에 대한 불안이 깊을수록,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더 많이 걱정합니다.
스스로의 사회적 위치와 처지에 대해 더 걱정하게 되죠.”
_케이트 피킷·사회역학자
“'우리에게 사랑을 발견하고 유지할 문화적 자원이 있는가.' 저는 없다고 생각해요.
평등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관계의 안정성은 그만큼 줄어들죠.”
_에바 일루즈·사회학자
“미국의 남성성은 힘세고, 지배적으로 군림하는 데 대한 엄청난 강박이 있어요.
용감하고 자립적인 상태에 집착하죠. (…) 사실 연약함이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임에도, 헤테로 남성들은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_마사 누스바움·법철학자
“정치에서 여성성을 이야기할 때 성주류화 개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죠.
우리 정치에서는 ‘여성성’이라는 것이 1차적으로는 차별로 다가옵니다.
여성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나 여성의 존재론적 조건이
남성의 그것과 동등하게 배려받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죠.”
_심상정·정치가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이냐 남성이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에코페미니즘은 우리가 가진 마음의 종류입니다.”
_반다나 시바·물리학자, 환경운동가
‘세계 여성 지성과의 대화’로 기획된 『어크로스 페미니즘』은
영화배우부터 법철학자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세계적 명성과 권위를 성취한 여성들의 언어로 쓰였다.
삶, 정의, 건강과 불평등, 사랑, 혐오, 정치, 환경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다.
그러나 독자는 ‘세계’와 ‘지성’ 사이에 낀.
‘여성’이라는 기획의 조건에서 그 언어들을 만날 것이다.
바로 그 조건이 이들의 언어를
단지 탁월하고 위대한 지성의 가르침이 아닌,
변화를 만들어온 개인들의 증언으로 읽히게끔 한다.
그들의 삶과 시대는 그렇게 젠더와 계급, 장애와 인종을 교차하며
모두의 언어가 되고, 모두에게 연결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포기되는 것’들은 무엇일까? 『어크로스 페미니즘』은 어쩌면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대담이다. 그 포기되는 것들을 다시 조명하고, 우리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드는 이 세계의 구조를 정치, 사회, 보건(사회역학), 법학,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들과 함께 들여다보고자 했다. ‘진정한 우리 자신’ ‘정의의 가능성’ ‘건강과 안녕’ ‘사랑과 신뢰’ ‘존엄과 품격’ ‘어연번듯한 정치’ ‘자연과의 조화’. 이처럼 중요해 보이는 것들은 어떻게 공동체 차원에서 어렵지 않게 포기되고, 개개인의 삶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게 되었을까? 그 가운데서 특히 ‘여성’이라는 젠더적 조건은 여성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더 주변화되고 대상화되어왔으며, 바로 그 맥락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쥘리에트 비노슈, 리베카 솔닛, 케이트 피킷, 에바 일루즈, 마사 누스바움, 심상정, 반다나 시바 등 각자의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경험을 세밀하게 구성하고, 그로부터 언어를 교연撟然하게 벼려온 일곱 명의 여성과 우리의 삶과 시대를 이야기한다.
×쥘리에트 비노슈―진정한 자신‘들’의 공존
첫 대담자인 영화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의 인터뷰가 있었던 건 2016년 11월. 한국에서는 극에 달한 정권의 부정과 비리를 규탄하는 시민이 한창 광장을 가득 채웠을 무렵이다. 비노슈는 68혁명의 기억을 더듬으며 성찰되지 못한 혁명의 불완전성과 반동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왕을 단죄하고, 그 자리에 더한 절대 권력인 황제를 앉힌 프랑스 혁명의 아이러니는 제도 및 체제의 정비는 존재론적 성찰이 동반될 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맥락으로, 시민사회에서 얼마간 미화되어온 ‘분노’에 대해서도 비노슈는 선을 긋는다. “우리가 분노에 갇혀버리면, 이때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동합니다. 다른 무언가로 승화시켜야죠.” 분노를 이용해 반지성주의를 내세우며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에 대한 비판도 이어진다. “다들 위대한 국가가 되려고 하죠. 넌센스라고 생각해요. 위대해본 적 없는 우리가 위대함을 ‘되찾는’ 데 집착하다니요.” 이들 ‘위대한’ 국가들은 식민지 개척에 앞장서며 아프리카 대륙을 조각냈다. 비노슈는 지금의 이민자 문제가 제국주의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도 강대국에 의해 수탈이 자행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민자들이 전쟁과 재해가 반복되는 삶터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것, 이민사회에 관심을 보일 것을 촉구한다. 인류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될 이민 문제를 생각할 때, 다문화 사회를 맞이하며 우리에게는 관용이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리고 관용을 가능케 하는 ‘존재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거기에 다가설 방법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사랑’이다. 비록 모두 서로 다른 모습일지라도 그 각각의 사랑을 존중하면서 우리는 공존할 수 있다. 또 공존을 위해서는 과거사를 정리하고, 트라우마를 휘두르지 않은 채 한 걸음씩 겸손히 나아가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렇게 “너무 많은 환상”을 추구하기보다, 살아가는 매순간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의 ‘그들 자신’을 인정하면서 공존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리베카 솔닛―싸움에 임할 때 기억해야 할 것
“어떻게 대통령을 탄핵했나요?” 인터뷰를 위해 테이블에 마주앉자, 리베카 솔닛이 저자에게 건넨 말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리베카 솔닛은 누구보다 사회 참여적인 인터뷰이였던 만큼, 현장에서의 목소리로 현실을 단순화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직시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솔닛의 말들이 뛰어난 현실 감각에 의해 뒷받침되고, 그로부터 진실성을 갖는 것은 그가 강조한 바가 그의 생활과 언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거 기간 내내 트럼프 저지에 집중하던 그는, “승리를 예상하지 않았다”고 담담히 밝히면서, 선거인단 제도의 위법성을 대중적으로 환기한 데서 활동의 의의를 찾았다. 사실 많은 사회운동이 성공이냐 실패냐, 승리냐 패배냐로 분석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시도는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고, 결과는 확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순화를 경계/거부하고, 불확실성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유일한 목표에 매몰되고,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실패를 단정하며 낙망하는 일이 얼마나 게으르고 안일한 태도인지를 알 수 있다. 또 “젠더가 아니라 계급이다” 같은 차원 없는 접근이 얼마나 무지하고―그럼에도 숱하게 반복된다는 점에서―악하기까지 한지도 직면하게 된다.
송유관 사업을 백지화하고, 젠더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불합리한 질서에 균열을 내온 그간의 결과들은 그가 “어둠 속의 희망hope in the dark”이라고 부른, 이 같은 ‘싸움의 자세’ 덕분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솔닛이 인용한 아인슈타인과 푸코의 말은 단순화를 거부하고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이 겸허한 자세를 대단히 적절하게 뒷받침한다. 그들의 말대로, “모든 것은 가능한 한 단순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단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그 일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희망에 대한 솔닛의 견해는 이런 맥락 속에서 구체성을 갖는다. “희망은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전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아는 게 바로 희망이죠. 그리고 세상에는 싸울 가치가 있는 일이 있습니다.” 차이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뭉뚱그려진 일일 수 없다. ‘트럼프를 대통령에 당선시킨 백인 남성 노동자의 분노’ 같은 프레이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의 분노가 아니라 오로지 백인 남성―백인 여성조차 배제된―의 분노에만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이 사회의 구조다. 그럼으로써 계급이라는 산업화시대의 철지난 논의에서 벗어나 ‘부유한 배관공’과 ‘가난한 시간강사’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최고위층 여성’ 같은 이들을 아우를 수 있게 된다.
×케이트 피킷―몸이 사회에 관해 말해주는 것
역학자인 케이트 피킷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인 우리의 몸, 건강의 문제를 사회구조라는 조건 안에서 들여다본다. 문명화, 산업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기본적인 현대식 생활환경이 갖춰진 국가들에서는 영양실조나 병원균에 의한 감염보다 사회구조적 요인, 불평등이나 불안정성 등이 개인의 건강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처한 사회적 위치, 우리가 연결되고 소속된 사회적 관계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 회복력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을 제공받지 못해 질병의 고통과 경제적 위기로 동시에 내몰리는 이들도 많다. 영국 지하철 노선인 주빌리선 지역들의 경제 격차에 따라 그 지역 주민의 기대수명을 관측한 ‘주빌리선 기대수명 지도’는 동쪽으로 한 정거장씩 갈수록 수명이 줄어든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주거 환경이나 영양 상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생활 여건 등의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피킷은 우리가 맺는 ‘관계’에서 결정적 요인을 찾는다. 사람들과 함께할 때 느끼는 지지, 안정감, 우정 같은 것들은 우리의 사회적 기분에 작용하고, 건강에 관여한다. 불평등은 소외감과 우울감, 열등의식, 혐오감 등을 낳는다. 회사생활에서는 막중한 책임과 고된 업무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보상과 생활에 대한 통제력, 안정감 등을 가진 ‘사장님’이 보통의 사원들보다 더 건강하다. 결혼생활에서는 보살핌을 받고, 사랑을 받는 쪽에 속하는 ‘남성’이, 결혼과 동시에 사회생활에 제약이 생기고, 가사 노동과 육아의 부담까지 떠안는 여성에 비해 더 건강하다. 싱글맘과 그 아이들은 싱글맘에 대한 사회적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지원책이 비교적 확실한 북유럽 복지국가들에서 더 건강하다.
피킷은 이런 관계적 요인들을 분석하면서, 오랜 연구를 통해 내린 결론은 “소득 불평등이 줄어들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사회적 조건은 우리가 늙었건 젊었건, 남성이건 여성이건, 백인이건 소수 인종이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간에 모두에게 적용된다. 평등한 사회는 모든 이의 건강에 더 이롭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 우리의 젠더가 무엇이고, 나이, 인종 또는 사회계급, 배경, 부모의 교육 수준이 어떠하든” 같은 기회를 누리는 사회. 보건을 연구하는 역학자가 말하는 정의로운 사회다.
×에바 일루즈―사랑의 가능성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그동안 주로 심리학의 영역에서 분석되어온 ‘사랑’의 문제를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라는 현대사회의 조건 위에서 이야기한다.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에게 가서 “우리에게 사랑을 발견하고 유지할 문화적 자원이 있는가”가 된다. 그의 대답은 회의적이다. 성적 선택의 기회가 많아지고, 평등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오늘날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우리의 역량은 오히려 약해졌다. 젠더 역할이 견고하게 유지되었던 과거의 연인관계에서는 평등이 필요하지 않았다. 역할 분배는 확실했고, 한쪽 젠더는 다른 쪽 젠더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 이익을 누렸다. 그러나 평등한 관계에서는 더 많은 양보와 조율이 필요하다. 언제든 관계를 끝낼 수 있다는 가능성은 관계의 안정성을 그만큼 줄어들게 만들고, 파트너십을 일종의 계약관계로 여기도록 구조화한다. 여기에 더해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의 지위 상승은 노동 시장에서 허물어지는 젠더 규범과 여전히 견고한 결혼 시장에서의 젠더 규범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발하고, 혼란을 가중시킨다.
일루즈는 이런 사회에서 사랑을 해나갈 방법으로 기업과 국가가 바뀌어야 함을 강조한다. 가정의 유지와 안정을 위해서는 기업 내 가부장적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고, 더 많은 보육시설 등 양육을 위한 공공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동시에 개인들에게는 “참을성”을 가질 것, 그리고 “함께 묶여 있다는 감각”을 기억할 것, “지루함, 성가심, 귀찮음을 지탱할 수 있는 성격을 만들어갈 것”을 제안한다. 현대사회에서 사랑의 가능성은 기업, 국가 등 사회적 차원에서 또 개인의 삶 속에서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기억할 때 비로소 기약될 수 있을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혐오를 직시하고, 전방위적으로 싸우기
불안정성이 커진 현대사회에서 혐오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여성, 소수 인종, 장애인, 무슬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부터 ‘나이 듦’에 대한 혐오까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는 혐오에 관해 마사 누스바움은 오랜 연구를 통해 분석한 사실들을 이야기한다. 특히 그는 인터뷰에서 인간 심리가 반영된 문화적 차원의 혐오로서 ‘투사 혐오’에 주목한다. 인간의 동물성을 부정하고, 약한 집단을 종속시키기 위해 악용되는 투사 혐오의 양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잔인하고 포악한 ‘육식동물’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인종 혐오에서부터 자신보다 더 강한 남성에게 “관통당하리라는” 헤테로 남성들의 게이 혐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또한 충격적이다. 동물성, 나약함 등 인간의 당연한 특성들은 성서를 원문 그대로 해석해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맹신하는 기독교 원문주의, 그리고 마초적 남성(성)만을 바람직한, 존중받을 만한 인간상으로 간주하는 남성 우월주의 등 혐오를 조장하는 프레이밍에 의해 배척된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아동 성추행이 늘어날 것이다”라며 동성 결혼에 반대하거나, “장애인들은 재해가 발생하면 대피하기 어렵다”면서 장애인 시설 설립을 격렬히 반대하는 이들, 이민자/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 같은 프레임이 곳곳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만연한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문화적 변화다. 노인에 대한 혐오는 일터에서, 생활 속에서 나이 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낼 때, 그들의 ‘나이’가 아닌 그들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줄어든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역시 게이는 괴물이라고 여겼던 부모 세대가, 동성애 인권운동과 대중매체의 기여로 자신의 아들이 게이임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평범한 인간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 받아들여질 때 줄어든다. 동시에 혐오의 양상이 각기 다양한 만큼, 그 대안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고 싸워 나가야 한다고 누스바움은 강조한다.
×심상정―정치에서의 여성성과 정당정치의 비전
기획 막바지에 한국의 정치인으로서 인터뷰이로 섭외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가부장적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경험, 그리고 학생운동, 노동운동, 정치활동을 해온 경험이 자신을 ‘존재론적’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집안에서, 학내에서, 운동권에서, 정치권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여성이라는 젠더적 맥락 속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도록 만들었다. 서울대에서 총학생회와 별개로 총여학생회를 꾸린 것, 노동운동에서, 정치활동에서 조직하고 행동하는 여성으로서 활동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정치에서의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한다. 선거제도, 정치제도가 남성 중심으로 짜여 있는 정치권에서 ‘여성성’이란 일차적으로 차별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성 정당에서 어엿한 여성 의원들조차 외모나 여성이라는 ‘약한 존재’의 이미지를 앞세워 소비되고, 당내 정치나 상임위 활동에서도 일종의 형님 문화에 의해 여성은 기술적 자원을 제한적으로 누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 지배를 부정하는 민주주의는 없다”는 샤츠 슈나이더의 원칙에 따라, 절반의 다수인 여성을 배제하고 달성될 수 있는 민주 정치의 과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한다. 우리 정치가 많은 국민으로부터 불신받는 이유도, 여성의 삶이 정치의 중심 의제로서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 최고의 저출산-고령화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출산과 육아는 지금까지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한편 그는 아직 법치주의를 확립하지 못한 채 ‘캠프 정당’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정당정치 문화 또한 바로 세워야 할 주요 과제로 꼽는다.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정치는, 싸워서 상대를 꺾고 이기는 혁명과 달리, 국민을 골고루 대변하고, 타협을 통해 “보통의 승리”를 일궈가면서 동시에 확실한 국가 비전을 갖고 그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따위에 당이 갈리고, 파당과 창당이 거듭되는 정당, 소수만을 과대 대표하는 정당은 캠프 정당이고 이익집단이지 제대로 된 정당이라 할 수 없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생명과 인간의 존엄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이나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장애를 등급 나누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답은 여성은 여성을 위해,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를 위해, 계급은 계급을 위해 싸우되 서로 연대하면서, 연대가 어긋날 때는 정치적 타협을 통해 공통의 이익을 실현하는 최선책을 모색해야 한다. ‘차이’를 ‘차별’로 등급화해 개인을 압박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우선 목소리를 내야 한다. 발언하고 논쟁하면서, 우리의 언어를 못미더운 것으로 치부하는 사회에 대항하여, “우리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려내는 만큼, 미래는 반드시 바뀐다”는 그의 생각을 한 번쯤 믿어볼 필요가 있다.
×반다나 시바―에코페미니즘: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에코페미니즘과 지구민주주의를 창시한 물리학자이자 농부,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지구는 한 가족’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인도 데라둔에서 ‘나브다냐 생물다양성 보존 농장’을 주축으로 지구민주주의 운동을 해나가고 있다. 생물다양성과 식량주권,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전 세계적인 연대를 통해 자연의 질서를 알리고, 농민의 삶을 보호해온 시바는 오늘날의 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한다. 전쟁을 통해 몸을 불리고 시장을 장악해온 군수 자본은, 바이오산업과 금융을 무기로 또다시 전 지구적인 파괴를 일삼으면서 거대 시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과 토양을 파괴하고 지구 생명을 죽이고, 종국에는 인간과 인간의 미래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른바 ‘독성 카르텔’은, 겉으로 보기에 혁신적이고 과학적인 듯 보이는 기술과 시스템을 앞세워 지구를 점점 인간과 자연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로 돈을 번 빌 게이츠는 ‘자선사업가’로 알려져 있지만 국제연합UN 등에 거액의 돈을 기부함으로써 개발도상국의 바이오산업과 금융시스템을 잠식해가는 우리 시대 최악의 식민주의자이며, 바이엘-몬산토, 듀폰, 신젠타 등 거대 화학 기업들 역시 화학비료로 토양을 황폐화하고 농업을 장악하며 식량 주권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점에서 전범 기업의 연장이다. 기술 발전에 힘입어 변화하는 듯 보이는 세계는, 사실 수천 년간 당연했던 권리를 빼앗고 범죄화하는 암울한 전개 속에 있는 것이다. 씨앗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화폐를 가졌다는 이유로 평범하고 성실한 이들이 고소당하고 처벌받는 동안 이들 기업은 품종을 일원화하며 농업 자본을 독점하고 생명으로부터 사용료를 거둬들이고, 화폐 거래를 막음으로써 은행 거래당 발생하는 소프트웨어 로열티를 통해 막대한 부를 거둬들인다. 반다나 시바는 이를 ‘임대 경제’라고 일컬으며, 일하지 않는 자본이 플랫폼만으로 돈을 거둬가는 우버, 에어비앤비 등도 진정한 ‘공유 경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공유 경제의 답은 에코 페미니즘에 있다. 여성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타의에 의해 ‘돌봄’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먹을 것을 기르고, 어린아이들과 아픈 이를 돌보는 이들의 노동, 몸으로 나무를 껴안고 숲을 지켜낸 이들의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유와 공존을 가능케 하며, 그것이 자비로운 마음이자, 다르마(정법正法)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또한 에코 페미니즘은 그러한 존재로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맥락’에 의해서 실천되는 것이지, 여성/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구분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우리가 서로, 또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평화로이 공존하려는 마음을 의미한다. 또 그 길이 쉽지 않은 듯 보이고, 때로 실패인 듯 보일지라도 “결코 그대의 행동이 맺을 열매를 바라보지 마라. 오직 행동을 보아라”라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조금씩, 그러나 필요한 싸움을 해나가는 일, 그럼으로써 모든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을 구하고, 세계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태는 일은 그래서 어쩌면 에코페미니스트의 작은 실천에 머무는 게 아니라, 끝나지 않은 전쟁을 끝내고, 지구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기약할 수 있게 만드는 위대한 인간들의 역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더 우아하게, 더 복합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벼려진
여성의 언어들
“차별 속에 있으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것이 바로 ‘존엄’입니다.”
_쥘리에트 비노슈·영화배우
“최고의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조차 하찮은 존재로,
폭력의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마찬가지로 최고의 특권층에 속한 백인 여성도 끔찍한 대우를 받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_리베카 솔닛·작가, 역사가
“생활에 대한 불안이 깊을수록,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를 더 많이 걱정합니다.
스스로의 사회적 위치와 처지에 대해 더 걱정하게 되죠.”
_케이트 피킷·사회역학자
“'우리에게 사랑을 발견하고 유지할 문화적 자원이 있는가.' 저는 없다고 생각해요.
평등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관계의 안정성은 그만큼 줄어들죠.”
_에바 일루즈·사회학자
“미국의 남성성은 힘세고, 지배적으로 군림하는 데 대한 엄청난 강박이 있어요.
용감하고 자립적인 상태에 집착하죠. (…) 사실 연약함이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임에도, 헤테로 남성들은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_마사 누스바움·법철학자
“정치에서 여성성을 이야기할 때 성주류화 개념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죠.
우리 정치에서는 ‘여성성’이라는 것이 1차적으로는 차별로 다가옵니다.
여성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나 여성의 존재론적 조건이
남성의 그것과 동등하게 배려받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죠.”
_심상정·정치가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이냐 남성이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에코페미니즘은 우리가 가진 마음의 종류입니다.”
_반다나 시바·물리학자, 환경운동가
‘세계 여성 지성과의 대화’로 기획된 『어크로스 페미니즘』은
영화배우부터 법철학자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세계적 명성과 권위를 성취한 여성들의 언어로 쓰였다.
삶, 정의, 건강과 불평등, 사랑, 혐오, 정치, 환경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다.
그러나 독자는 ‘세계’와 ‘지성’ 사이에 낀.
‘여성’이라는 기획의 조건에서 그 언어들을 만날 것이다.
바로 그 조건이 이들의 언어를
단지 탁월하고 위대한 지성의 가르침이 아닌,
변화를 만들어온 개인들의 증언으로 읽히게끔 한다.
그들의 삶과 시대는 그렇게 젠더와 계급, 장애와 인종을 교차하며
모두의 언어가 되고, 모두에게 연결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포기되는 것’들은 무엇일까? 『어크로스 페미니즘』은 어쩌면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대담이다. 그 포기되는 것들을 다시 조명하고, 우리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드는 이 세계의 구조를 정치, 사회, 보건(사회역학), 법학, 환경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들과 함께 들여다보고자 했다. ‘진정한 우리 자신’ ‘정의의 가능성’ ‘건강과 안녕’ ‘사랑과 신뢰’ ‘존엄과 품격’ ‘어연번듯한 정치’ ‘자연과의 조화’. 이처럼 중요해 보이는 것들은 어떻게 공동체 차원에서 어렵지 않게 포기되고, 개개인의 삶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게 되었을까? 그 가운데서 특히 ‘여성’이라는 젠더적 조건은 여성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더 주변화되고 대상화되어왔으며, 바로 그 맥락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쥘리에트 비노슈, 리베카 솔닛, 케이트 피킷, 에바 일루즈, 마사 누스바움, 심상정, 반다나 시바 등 각자의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경험을 세밀하게 구성하고, 그로부터 언어를 교연撟然하게 벼려온 일곱 명의 여성과 우리의 삶과 시대를 이야기한다.
×쥘리에트 비노슈―진정한 자신‘들’의 공존
첫 대담자인 영화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의 인터뷰가 있었던 건 2016년 11월. 한국에서는 극에 달한 정권의 부정과 비리를 규탄하는 시민이 한창 광장을 가득 채웠을 무렵이다. 비노슈는 68혁명의 기억을 더듬으며 성찰되지 못한 혁명의 불완전성과 반동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왕을 단죄하고, 그 자리에 더한 절대 권력인 황제를 앉힌 프랑스 혁명의 아이러니는 제도 및 체제의 정비는 존재론적 성찰이 동반될 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맥락으로, 시민사회에서 얼마간 미화되어온 ‘분노’에 대해서도 비노슈는 선을 긋는다. “우리가 분노에 갇혀버리면, 이때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동합니다. 다른 무언가로 승화시켜야죠.” 분노를 이용해 반지성주의를 내세우며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에 대한 비판도 이어진다. “다들 위대한 국가가 되려고 하죠. 넌센스라고 생각해요. 위대해본 적 없는 우리가 위대함을 ‘되찾는’ 데 집착하다니요.” 이들 ‘위대한’ 국가들은 식민지 개척에 앞장서며 아프리카 대륙을 조각냈다. 비노슈는 지금의 이민자 문제가 제국주의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도 강대국에 의해 수탈이 자행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민자들이 전쟁과 재해가 반복되는 삶터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것, 이민사회에 관심을 보일 것을 촉구한다. 인류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될 이민 문제를 생각할 때, 다문화 사회를 맞이하며 우리에게는 관용이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리고 관용을 가능케 하는 ‘존재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거기에 다가설 방법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사랑’이다. 비록 모두 서로 다른 모습일지라도 그 각각의 사랑을 존중하면서 우리는 공존할 수 있다. 또 공존을 위해서는 과거사를 정리하고, 트라우마를 휘두르지 않은 채 한 걸음씩 겸손히 나아가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렇게 “너무 많은 환상”을 추구하기보다, 살아가는 매순간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의 ‘그들 자신’을 인정하면서 공존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리베카 솔닛―싸움에 임할 때 기억해야 할 것
“어떻게 대통령을 탄핵했나요?” 인터뷰를 위해 테이블에 마주앉자, 리베카 솔닛이 저자에게 건넨 말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리베카 솔닛은 누구보다 사회 참여적인 인터뷰이였던 만큼, 현장에서의 목소리로 현실을 단순화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직시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솔닛의 말들이 뛰어난 현실 감각에 의해 뒷받침되고, 그로부터 진실성을 갖는 것은 그가 강조한 바가 그의 생활과 언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거 기간 내내 트럼프 저지에 집중하던 그는, “승리를 예상하지 않았다”고 담담히 밝히면서, 선거인단 제도의 위법성을 대중적으로 환기한 데서 활동의 의의를 찾았다. 사실 많은 사회운동이 성공이냐 실패냐, 승리냐 패배냐로 분석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시도는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고, 결과는 확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단순화를 경계/거부하고, 불확실성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유일한 목표에 매몰되고,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실패를 단정하며 낙망하는 일이 얼마나 게으르고 안일한 태도인지를 알 수 있다. 또 “젠더가 아니라 계급이다” 같은 차원 없는 접근이 얼마나 무지하고―그럼에도 숱하게 반복된다는 점에서―악하기까지 한지도 직면하게 된다.
송유관 사업을 백지화하고, 젠더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불합리한 질서에 균열을 내온 그간의 결과들은 그가 “어둠 속의 희망hope in the dark”이라고 부른, 이 같은 ‘싸움의 자세’ 덕분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솔닛이 인용한 아인슈타인과 푸코의 말은 단순화를 거부하고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이 겸허한 자세를 대단히 적절하게 뒷받침한다. 그들의 말대로, “모든 것은 가능한 한 단순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단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그 일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희망에 대한 솔닛의 견해는 이런 맥락 속에서 구체성을 갖는다. “희망은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전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아는 게 바로 희망이죠. 그리고 세상에는 싸울 가치가 있는 일이 있습니다.” 차이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뭉뚱그려진 일일 수 없다. ‘트럼프를 대통령에 당선시킨 백인 남성 노동자의 분노’ 같은 프레이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의 분노가 아니라 오로지 백인 남성―백인 여성조차 배제된―의 분노에만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이 사회의 구조다. 그럼으로써 계급이라는 산업화시대의 철지난 논의에서 벗어나 ‘부유한 배관공’과 ‘가난한 시간강사’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최고위층 여성’ 같은 이들을 아우를 수 있게 된다.
×케이트 피킷―몸이 사회에 관해 말해주는 것
역학자인 케이트 피킷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인 우리의 몸, 건강의 문제를 사회구조라는 조건 안에서 들여다본다. 문명화, 산업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기본적인 현대식 생활환경이 갖춰진 국가들에서는 영양실조나 병원균에 의한 감염보다 사회구조적 요인, 불평등이나 불안정성 등이 개인의 건강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처한 사회적 위치, 우리가 연결되고 소속된 사회적 관계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 회복력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을 제공받지 못해 질병의 고통과 경제적 위기로 동시에 내몰리는 이들도 많다. 영국 지하철 노선인 주빌리선 지역들의 경제 격차에 따라 그 지역 주민의 기대수명을 관측한 ‘주빌리선 기대수명 지도’는 동쪽으로 한 정거장씩 갈수록 수명이 줄어든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주거 환경이나 영양 상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생활 여건 등의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피킷은 우리가 맺는 ‘관계’에서 결정적 요인을 찾는다. 사람들과 함께할 때 느끼는 지지, 안정감, 우정 같은 것들은 우리의 사회적 기분에 작용하고, 건강에 관여한다. 불평등은 소외감과 우울감, 열등의식, 혐오감 등을 낳는다. 회사생활에서는 막중한 책임과 고된 업무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보상과 생활에 대한 통제력, 안정감 등을 가진 ‘사장님’이 보통의 사원들보다 더 건강하다. 결혼생활에서는 보살핌을 받고, 사랑을 받는 쪽에 속하는 ‘남성’이, 결혼과 동시에 사회생활에 제약이 생기고, 가사 노동과 육아의 부담까지 떠안는 여성에 비해 더 건강하다. 싱글맘과 그 아이들은 싱글맘에 대한 사회적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지원책이 비교적 확실한 북유럽 복지국가들에서 더 건강하다.
피킷은 이런 관계적 요인들을 분석하면서, 오랜 연구를 통해 내린 결론은 “소득 불평등이 줄어들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사회적 조건은 우리가 늙었건 젊었건, 남성이건 여성이건, 백인이건 소수 인종이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간에 모두에게 적용된다. 평등한 사회는 모든 이의 건강에 더 이롭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 우리의 젠더가 무엇이고, 나이, 인종 또는 사회계급, 배경, 부모의 교육 수준이 어떠하든” 같은 기회를 누리는 사회. 보건을 연구하는 역학자가 말하는 정의로운 사회다.
×에바 일루즈―사랑의 가능성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그동안 주로 심리학의 영역에서 분석되어온 ‘사랑’의 문제를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라는 현대사회의 조건 위에서 이야기한다.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에게 가서 “우리에게 사랑을 발견하고 유지할 문화적 자원이 있는가”가 된다. 그의 대답은 회의적이다. 성적 선택의 기회가 많아지고, 평등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오늘날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우리의 역량은 오히려 약해졌다. 젠더 역할이 견고하게 유지되었던 과거의 연인관계에서는 평등이 필요하지 않았다. 역할 분배는 확실했고, 한쪽 젠더는 다른 쪽 젠더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 이익을 누렸다. 그러나 평등한 관계에서는 더 많은 양보와 조율이 필요하다. 언제든 관계를 끝낼 수 있다는 가능성은 관계의 안정성을 그만큼 줄어들게 만들고, 파트너십을 일종의 계약관계로 여기도록 구조화한다. 여기에 더해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의 지위 상승은 노동 시장에서 허물어지는 젠더 규범과 여전히 견고한 결혼 시장에서의 젠더 규범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발하고, 혼란을 가중시킨다.
일루즈는 이런 사회에서 사랑을 해나갈 방법으로 기업과 국가가 바뀌어야 함을 강조한다. 가정의 유지와 안정을 위해서는 기업 내 가부장적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고, 더 많은 보육시설 등 양육을 위한 공공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동시에 개인들에게는 “참을성”을 가질 것, 그리고 “함께 묶여 있다는 감각”을 기억할 것, “지루함, 성가심, 귀찮음을 지탱할 수 있는 성격을 만들어갈 것”을 제안한다. 현대사회에서 사랑의 가능성은 기업, 국가 등 사회적 차원에서 또 개인의 삶 속에서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기억할 때 비로소 기약될 수 있을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혐오를 직시하고, 전방위적으로 싸우기
불안정성이 커진 현대사회에서 혐오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여성, 소수 인종, 장애인, 무슬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부터 ‘나이 듦’에 대한 혐오까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나는 혐오에 관해 마사 누스바움은 오랜 연구를 통해 분석한 사실들을 이야기한다. 특히 그는 인터뷰에서 인간 심리가 반영된 문화적 차원의 혐오로서 ‘투사 혐오’에 주목한다. 인간의 동물성을 부정하고, 약한 집단을 종속시키기 위해 악용되는 투사 혐오의 양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잔인하고 포악한 ‘육식동물’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인종 혐오에서부터 자신보다 더 강한 남성에게 “관통당하리라는” 헤테로 남성들의 게이 혐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또한 충격적이다. 동물성, 나약함 등 인간의 당연한 특성들은 성서를 원문 그대로 해석해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맹신하는 기독교 원문주의, 그리고 마초적 남성(성)만을 바람직한, 존중받을 만한 인간상으로 간주하는 남성 우월주의 등 혐오를 조장하는 프레이밍에 의해 배척된다. “동성애를 허용하면 아동 성추행이 늘어날 것이다”라며 동성 결혼에 반대하거나, “장애인들은 재해가 발생하면 대피하기 어렵다”면서 장애인 시설 설립을 격렬히 반대하는 이들, 이민자/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 같은 프레임이 곳곳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만연한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문화적 변화다. 노인에 대한 혐오는 일터에서, 생활 속에서 나이 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낼 때, 그들의 ‘나이’가 아닌 그들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줄어든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역시 게이는 괴물이라고 여겼던 부모 세대가, 동성애 인권운동과 대중매체의 기여로 자신의 아들이 게이임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평범한 인간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 받아들여질 때 줄어든다. 동시에 혐오의 양상이 각기 다양한 만큼, 그 대안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고 싸워 나가야 한다고 누스바움은 강조한다.
×심상정―정치에서의 여성성과 정당정치의 비전
기획 막바지에 한국의 정치인으로서 인터뷰이로 섭외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가부장적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경험, 그리고 학생운동, 노동운동, 정치활동을 해온 경험이 자신을 ‘존재론적’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집안에서, 학내에서, 운동권에서, 정치권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여성이라는 젠더적 맥락 속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도록 만들었다. 서울대에서 총학생회와 별개로 총여학생회를 꾸린 것, 노동운동에서, 정치활동에서 조직하고 행동하는 여성으로서 활동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정치에서의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한다. 선거제도, 정치제도가 남성 중심으로 짜여 있는 정치권에서 ‘여성성’이란 일차적으로 차별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성 정당에서 어엿한 여성 의원들조차 외모나 여성이라는 ‘약한 존재’의 이미지를 앞세워 소비되고, 당내 정치나 상임위 활동에서도 일종의 형님 문화에 의해 여성은 기술적 자원을 제한적으로 누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 지배를 부정하는 민주주의는 없다”는 샤츠 슈나이더의 원칙에 따라, 절반의 다수인 여성을 배제하고 달성될 수 있는 민주 정치의 과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한다. 우리 정치가 많은 국민으로부터 불신받는 이유도, 여성의 삶이 정치의 중심 의제로서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 최고의 저출산-고령화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출산과 육아는 지금까지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한편 그는 아직 법치주의를 확립하지 못한 채 ‘캠프 정당’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정당정치 문화 또한 바로 세워야 할 주요 과제로 꼽는다.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정치는, 싸워서 상대를 꺾고 이기는 혁명과 달리, 국민을 골고루 대변하고, 타협을 통해 “보통의 승리”를 일궈가면서 동시에 확실한 국가 비전을 갖고 그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따위에 당이 갈리고, 파당과 창당이 거듭되는 정당, 소수만을 과대 대표하는 정당은 캠프 정당이고 이익집단이지 제대로 된 정당이라 할 수 없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생명과 인간의 존엄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이나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장애를 등급 나누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답은 여성은 여성을 위해,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를 위해, 계급은 계급을 위해 싸우되 서로 연대하면서, 연대가 어긋날 때는 정치적 타협을 통해 공통의 이익을 실현하는 최선책을 모색해야 한다. ‘차이’를 ‘차별’로 등급화해 개인을 압박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우선 목소리를 내야 한다. 발언하고 논쟁하면서, 우리의 언어를 못미더운 것으로 치부하는 사회에 대항하여, “우리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려내는 만큼, 미래는 반드시 바뀐다”는 그의 생각을 한 번쯤 믿어볼 필요가 있다.
×반다나 시바―에코페미니즘: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에코페미니즘과 지구민주주의를 창시한 물리학자이자 농부,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지구는 한 가족’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인도 데라둔에서 ‘나브다냐 생물다양성 보존 농장’을 주축으로 지구민주주의 운동을 해나가고 있다. 생물다양성과 식량주권,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전 세계적인 연대를 통해 자연의 질서를 알리고, 농민의 삶을 보호해온 시바는 오늘날의 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한다. 전쟁을 통해 몸을 불리고 시장을 장악해온 군수 자본은, 바이오산업과 금융을 무기로 또다시 전 지구적인 파괴를 일삼으면서 거대 시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과 토양을 파괴하고 지구 생명을 죽이고, 종국에는 인간과 인간의 미래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른바 ‘독성 카르텔’은, 겉으로 보기에 혁신적이고 과학적인 듯 보이는 기술과 시스템을 앞세워 지구를 점점 인간과 자연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로 돈을 번 빌 게이츠는 ‘자선사업가’로 알려져 있지만 국제연합UN 등에 거액의 돈을 기부함으로써 개발도상국의 바이오산업과 금융시스템을 잠식해가는 우리 시대 최악의 식민주의자이며, 바이엘-몬산토, 듀폰, 신젠타 등 거대 화학 기업들 역시 화학비료로 토양을 황폐화하고 농업을 장악하며 식량 주권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점에서 전범 기업의 연장이다. 기술 발전에 힘입어 변화하는 듯 보이는 세계는, 사실 수천 년간 당연했던 권리를 빼앗고 범죄화하는 암울한 전개 속에 있는 것이다. 씨앗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화폐를 가졌다는 이유로 평범하고 성실한 이들이 고소당하고 처벌받는 동안 이들 기업은 품종을 일원화하며 농업 자본을 독점하고 생명으로부터 사용료를 거둬들이고, 화폐 거래를 막음으로써 은행 거래당 발생하는 소프트웨어 로열티를 통해 막대한 부를 거둬들인다. 반다나 시바는 이를 ‘임대 경제’라고 일컬으며, 일하지 않는 자본이 플랫폼만으로 돈을 거둬가는 우버, 에어비앤비 등도 진정한 ‘공유 경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공유 경제의 답은 에코 페미니즘에 있다. 여성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타의에 의해 ‘돌봄’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먹을 것을 기르고, 어린아이들과 아픈 이를 돌보는 이들의 노동, 몸으로 나무를 껴안고 숲을 지켜낸 이들의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유와 공존을 가능케 하며, 그것이 자비로운 마음이자, 다르마(정법正法)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또한 에코 페미니즘은 그러한 존재로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맥락’에 의해서 실천되는 것이지, 여성/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구분과는 무관하다고 설명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우리가 서로, 또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평화로이 공존하려는 마음을 의미한다. 또 그 길이 쉽지 않은 듯 보이고, 때로 실패인 듯 보일지라도 “결코 그대의 행동이 맺을 열매를 바라보지 마라. 오직 행동을 보아라”라는 크리슈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조금씩, 그러나 필요한 싸움을 해나가는 일, 그럼으로써 모든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을 구하고, 세계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태는 일은 그래서 어쩌면 에코페미니스트의 작은 실천에 머무는 게 아니라, 끝나지 않은 전쟁을 끝내고, 지구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기약할 수 있게 만드는 위대한 인간들의 역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목차
서문
1장 쥘리에트 비노슈
혁명의 재구성, 개인의 경험들
세계에 참여하기
인간다움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실천하는 몸짓
2장 리베카 솔닛
우리가 이긴다는 사실
싸움의 기억
분노를 넘어서기
단순화로부터 거리두기
트럼프 이후의 세계에서 희망을 말하기
싸울 가치가 있는 일
3장 케이트 피킷
사회 속의 사회역학자
몸이 말해주는 몸 밖의 세계
여성의 몸에 관하여
불평등은 최상위 계층에게도 해롭다
더 많은 이에게 더 다양한 가치를
여성의 위치를 돌보는 일
4장 에바 일루즈
자본주의와 사랑의 불안
남성(성)의 세계
사랑할 역량을 키운다는 것
사랑의 새로운 가능성
5장 마사 누스바움
혐오의 양상들
내재된 두려움
평등에서부터 시작하기
실재하는 혐오의 맥락들
전방위적으로 싸워나가기
모두를 위한 법적 정의
6장 심상정
실존적 페미니스트
정치에서 유리천장 깨기
민주주의와 여성의 목소리
정치 ―가능성의 예술
정당정치의 비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더 조밀한 연대의 결
7장 반다나 시바
끝나지 않은 전쟁
임대경제와 잠식되는 시장
올바른 행동은 실패하지 않는다
에코페미니즘 ―온 생명과 연결된 우리
유기농이 보여주는 오래된 미래
감사의 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