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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료실 | 00019584 | 대출중 | 2023.04.15 |
지금 이용 불가 (1)
- 등록번호
- 00019584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중
- 2023.04.15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혐오시대, 인문학의 대응
혐오는 현실로부터 던져진 문제이다. 혐오시대로 불릴 만큼 사회의 다방면에 불거지고 있는 혐오는 그에 상응하는 관심과 대처를 요구한다. 혐오의 심각성은 혐오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문제를 드러내고 경고하는 징후이자 증상이라는 데 있다. 최근으로 올수록 혐오와 관련된 사건들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위험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혐오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혐오 문제는 학술적으로도 접근하기가 간단치 않다. 그 이유는 혐오의 정의와 개념이 생각보다 복잡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세부적인 학문 분야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혐오시대에 적절히 대응하려면 기본적인 정의부터 다양한 접근법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혐오는 감정을 표현하는 개념어이다. 찰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혐오를 공포, 놀람, 분노, 슬픔, 행복과 함께 인간의 기본 감정 중 하나로 분류한다. 『인간다움의 조건』을 쓴 스튜어트 월턴(Stuart Walton) 같은 평자는 다윈의 분류에 질투, 경멸, 수치, 당황을 덧붙여 10개의 감정을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기본’ 감정이라는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혐오는 쉽게 사라지거나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진화의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습득하게 된 감정 중 하나가 혐오이다.
그러나 진화의 산물이라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인간 본능에 속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혐오는 인간이 태어날 때, 혹은 그 이전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진 본성(nature)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혐오스러운 것의 범위와 내용을 정하는 것은 “문화와 훈육(nurture)”이지 본성이 아니다. 혐오는 자기 보호와 생존의 수단이되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기보다는 어떤 대상에 대한 느낌, 감각, 반응, 지각, 인지로서의 감정을 가리킨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으나 사회문화적으로 매개되고 형성되는 것이기에 혐오에는 문화적 차이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말에서 혐오의 정의는 생각처럼 단일하지 않다. 대개는 ‘싫어하고 미워함’[嫌惡]의 뜻으로 정의하지만, 그것은 혐오의 절반에 해당한다. 국립국어원과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혐오에는 그것 외에도 ‘미워하고 꺼림’[嫌?]의 뜻이 있다. 각각의 뜻에 따라 한자 표기도 다르다. 전자가 공격적인 감정이라면, 후자는 방어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어떤 평자는 둘을 합쳐서 혐오를 “역겨울 정도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으로 정의한다.
한국에서는 혐오라는 어휘가 과잉이다 싶을 만큼 혼란스럽게 쓰이고 있다. 왜일까. 여기에는 최근의 여성혐오 관련 사건들에 의해 촉발된 한국 출판업계의 마케팅 전략이라든가, 관련 사건들을 보도하는 언론매체의 선정주의, 혹은 증오 표현과 소수자 차별에 관한 법제화 과정에서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되는 증오라는 단어 대신에 그것보다 더 광범위한 혐오라는 단어를 택한 법조계의 판단 등을 그 이유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눈에 보이는 것들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혐오 감정 자체의 복합성과 어째서 다른 감정이 아닌 혐오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을 만큼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지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혐오는 역겨움(혐오, disgust)과 증오(hatred)와 두려움(혐오증, phobia) 등의 서로 관련된 감정들을 포괄하는 복합체이다. 혐오가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대상을 뱉어 내거나 그로부터 움츠림으로써 피하려 한다면, 증오는 그것을 파괴하여 없애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지려 한다. 반면에 공포는 혐오나 증오처럼 대상을 의식하지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언젠가 나타날지 모르는 위협이다. 즉 대상의 잠재성이 공포의 원천이 된다.
혐오, 증오, 두려움이 유사 감정들로서 혐오의 복합체를 형성한다면, 혐오는 또한 특정 시대에 따라 다른 감정들과 서로 절합하거나 중첩된다. 혐오는 특정 시공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감정과 서로 뭉쳤다 분리되었다 하는 과정들 속에서 특정한 발화와 효과로 연결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혐오의 효과성이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쓰인다는 사실이다. 혐오에 의한 감정 정치, 즉 혐오 정치가 위력적인 것은 일련의 발화 효과를 연속해서 낳는 혐오의 수행성 때문이다. 원래부터 혐오스럽거나 증오스러운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혐오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은 어떤 집단 또는 그것이 길러 낸 어떤 사람의 인지 때문이다. 그런데 혐오의 원인과 대상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불일치가 생길 때 혐오는 그것이 닿으려는 대상이나 위치를 바꾼다. 즉, 다른 대상, 다른 위치로 옮겨 가는 차이와 전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감정의 정치경제에서 혐오는 유통될수록 더 많은 잉여가치, 더 많은 부수 효과를 낳는다.
이처럼 혐오는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서든, 혹은 다른 이웃 감정들과 연합하여 다니는 감정 복합체로서든, 혹은 인간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관계망을 관류하며 효과를 수행하는 정동으로서든, 한두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현실에서 발생하는 혐오의 양상은 단순하지 않아서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혐오시대에 대한 인문학적 대응이 혐오에 관한 기본 연구에 충실하면서도 다양한 관점들의 횡단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혐오는 현실로부터 던져진 문제이다. 혐오시대로 불릴 만큼 사회의 다방면에 불거지고 있는 혐오는 그에 상응하는 관심과 대처를 요구한다. 혐오의 심각성은 혐오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문제를 드러내고 경고하는 징후이자 증상이라는 데 있다. 최근으로 올수록 혐오와 관련된 사건들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위험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혐오시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혐오 문제는 학술적으로도 접근하기가 간단치 않다. 그 이유는 혐오의 정의와 개념이 생각보다 복잡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세부적인 학문 분야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혐오시대에 적절히 대응하려면 기본적인 정의부터 다양한 접근법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혐오는 감정을 표현하는 개념어이다. 찰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혐오를 공포, 놀람, 분노, 슬픔, 행복과 함께 인간의 기본 감정 중 하나로 분류한다. 『인간다움의 조건』을 쓴 스튜어트 월턴(Stuart Walton) 같은 평자는 다윈의 분류에 질투, 경멸, 수치, 당황을 덧붙여 10개의 감정을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기본’ 감정이라는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혐오는 쉽게 사라지거나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진화의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에 적응하기 위해 습득하게 된 감정 중 하나가 혐오이다.
그러나 진화의 산물이라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인간 본능에 속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혐오는 인간이 태어날 때, 혹은 그 이전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진 본성(nature)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혐오스러운 것의 범위와 내용을 정하는 것은 “문화와 훈육(nurture)”이지 본성이 아니다. 혐오는 자기 보호와 생존의 수단이되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기보다는 어떤 대상에 대한 느낌, 감각, 반응, 지각, 인지로서의 감정을 가리킨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으나 사회문화적으로 매개되고 형성되는 것이기에 혐오에는 문화적 차이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말에서 혐오의 정의는 생각처럼 단일하지 않다. 대개는 ‘싫어하고 미워함’[嫌惡]의 뜻으로 정의하지만, 그것은 혐오의 절반에 해당한다. 국립국어원과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혐오에는 그것 외에도 ‘미워하고 꺼림’[嫌?]의 뜻이 있다. 각각의 뜻에 따라 한자 표기도 다르다. 전자가 공격적인 감정이라면, 후자는 방어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어떤 평자는 둘을 합쳐서 혐오를 “역겨울 정도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으로 정의한다.
한국에서는 혐오라는 어휘가 과잉이다 싶을 만큼 혼란스럽게 쓰이고 있다. 왜일까. 여기에는 최근의 여성혐오 관련 사건들에 의해 촉발된 한국 출판업계의 마케팅 전략이라든가, 관련 사건들을 보도하는 언론매체의 선정주의, 혹은 증오 표현과 소수자 차별에 관한 법제화 과정에서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되는 증오라는 단어 대신에 그것보다 더 광범위한 혐오라는 단어를 택한 법조계의 판단 등을 그 이유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눈에 보이는 것들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혐오 감정 자체의 복합성과 어째서 다른 감정이 아닌 혐오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을 만큼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지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혐오는 역겨움(혐오, disgust)과 증오(hatred)와 두려움(혐오증, phobia) 등의 서로 관련된 감정들을 포괄하는 복합체이다. 혐오가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대상을 뱉어 내거나 그로부터 움츠림으로써 피하려 한다면, 증오는 그것을 파괴하여 없애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지려 한다. 반면에 공포는 혐오나 증오처럼 대상을 의식하지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언젠가 나타날지 모르는 위협이다. 즉 대상의 잠재성이 공포의 원천이 된다.
혐오, 증오, 두려움이 유사 감정들로서 혐오의 복합체를 형성한다면, 혐오는 또한 특정 시대에 따라 다른 감정들과 서로 절합하거나 중첩된다. 혐오는 특정 시공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감정과 서로 뭉쳤다 분리되었다 하는 과정들 속에서 특정한 발화와 효과로 연결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혐오의 효과성이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쓰인다는 사실이다. 혐오에 의한 감정 정치, 즉 혐오 정치가 위력적인 것은 일련의 발화 효과를 연속해서 낳는 혐오의 수행성 때문이다. 원래부터 혐오스럽거나 증오스러운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혐오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은 어떤 집단 또는 그것이 길러 낸 어떤 사람의 인지 때문이다. 그런데 혐오의 원인과 대상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불일치가 생길 때 혐오는 그것이 닿으려는 대상이나 위치를 바꾼다. 즉, 다른 대상, 다른 위치로 옮겨 가는 차이와 전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감정의 정치경제에서 혐오는 유통될수록 더 많은 잉여가치, 더 많은 부수 효과를 낳는다.
이처럼 혐오는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서든, 혹은 다른 이웃 감정들과 연합하여 다니는 감정 복합체로서든, 혹은 인간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관계망을 관류하며 효과를 수행하는 정동으로서든, 한두 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현실에서 발생하는 혐오의 양상은 단순하지 않아서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혐오시대에 대한 인문학적 대응이 혐오에 관한 기본 연구에 충실하면서도 다양한 관점들의 횡단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목차
1.▼t학제적 접근 = Interdisciplinary appro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