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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발간물

단행본

시정신과 영화의 길: 영화평론가 김종원 회고록

개인저자
김종원 지음
발행사항
서울 : 한상언영화연구소, 2023
형태사항
612 p. : 천연색삽화 ; 20 cm
ISBN
9791193408018
청구기호
688.04 김75ㅅ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5202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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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5202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제주 출신 첫 등단 시인 김종원

전쟁을 피해 제주로 온 계용묵 등 저명 문학, 예술인들의 영향으로 4.3으로 피폐해진 제주 문화계에 새로운 싹이 트기 시작했다. 1952년 12월 《학원》잡지를 통해 그 이름을 전국에 알린 학생문사 김종원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수학하며 《문학예술》(1957.5.)과 《사상계》(1959.2.)를 통해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였다. 제주 출신 1호 등단 시인이라는 영예를 지닌 그는 중학시절 제주 최초의 학생잡지《별무리》(1953.12.)를 편집하였고, 제주 최초의 시전문지 《시작업》(1959)의 발간을 주도하며 1950년대 제주 문화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이뿐만 아니라 엔솔로지 시집 『신풍토』(1959) 동인 및 “60년대사회집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강냉이사설』(1970)과 『광화문행』(1988), 『시네마천국』(2023) 등 세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이 책은 제주 출신 시인 김종원의 문학 인생을 살펴 볼 수 있다.

1950~60년대 명동 시대의 주역

1950-60년대 명동은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문화의 거리였다. 전후의 피폐한 거리에 들어선 수많은 다방과 음악감상실에는 저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물론 서울 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 젊음을 꽃피웠다. 이곳 명동은 전후 우리 문화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각종 신문과 잡지의 원고청탁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연극, 영화가 기획되었고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 시기 명동을 거쳐 간 수많은 인물 중에 김종원도 있었다. 그는 공초 오상순 선생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청동문학”의 중심인물로 오상순 선생의 추천으로 잡지《녹원》(1957)을 편집하였으며, 동성영화사에서 일을 하며 영화를 기획했다. 이 책에서는 명동을 중심으로 모여든 수많은 인물들을 김종원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

격동의 현장을 몸으로 겪다 : 4.19 혁명과 조선투위 참여

김종원은 1947년 제주 3.1절 행사를 비롯해 6.25전쟁, 4.19혁명, 유신과 80년 서울의 봄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으로 겪었다. 이 책에서는 제주 4.3 당시 제주민전 위원장 안세훈을 만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부터 목포에서 겪은 6.25 당시 상황, 시위대의 한복판에서 활약했던 4.19혁명 전후의 이야기,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부르짖다 해직된 “조선투위” 활동, 1980년 태창문화사에 근무하던 당시 재야의 거두 김대중의 자서전을 출판하려던 일 등 우리 현대사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영원한 현역”이고 싶은 영화평론가

1959년 종합잡지 《자유공론》에 실은 “한국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를 시작으로 60여 년의 세월을 영화평론가로 활약한 그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1965)를 조직하여 3대 회장(1981)을 역임하였으며 《씨나리오문예》, 《씨네팬》, 《실버스크린》, 《영화예술》 등 여러 영화 관련 잡지의 발간에 관여하였으며 1964년에는 시인 김규동이 발행하던 《영화잡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86년 손석희와 공동으로 진행했던 《퀴즈,명화여행》을 비롯해 영화평론가로서 다수의 방송매체에 출연하여 영화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맡아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이 책에는 영화평론가로 영화잡지 발간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영화평론가협회의 운영에 관한 이야기, 영화의 등급을 매기는 심의 활동에 관한 사항 등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영화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준다.

영화사가에서 이제는 한국영화사의 증언자로

1990년 무렵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영화사 연구의 길에 들어선 김종원은 『우리영화 100년』 등 저명한 영화사 서적과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영화사 연구의 권위 있는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영화 도래에 관한 사항, 한국영화의 기점에 관한 사항, 춘사 나운규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이끌면서 한국영화사 연구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이뿐 아니라 이제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제작현장과 평론계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가 후학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제공하는 등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영화사의 재료이며 그의 글은 중요한 참고문헌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그가 겪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관한 디테일한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목차

회고록을 시작하며

제1장 유년기
제주 칠성통에서 보낸 유년 시절 / 인분 밟고 본 조일구락부의 첫 영화 / 기억 속에 남은 해방 전후의 제주 / 해방의 감격과 <자유만세> 관람 / 무근성 집과 아버지의 귀국 / 1947년 3월 1일의 관덕정 광장 / 무근성 집에서 뵌 제주민전 위원장 안세훈 / 제주에 불어 닥친 검거 선풍 / 잿더미가 되어버린 할아버지의 집과 한서적 / 목격한 형틀의 시신과 잘린 가마니의 죽음 / 선무공작대의 활동과 4.3사건의 본질 / 초등학교 졸업 전야에 벌어진 일

제2장 소년기
6.25 전쟁이 막아버린 목포상업학교의 수업 / 한밤중 돛배를 타고 영암으로 피란 / 제주농중으로의 전학과 한국보육원의 학생들 / 바라던 인문계 중학으로 전학하다 / 동문통 운주당 골목의 아이들 / 노랑 국화 사건과 양중해 교사 / 박목월 시인과 무관한 「떠나가는 배」/ 민간요법에 의존한 투병과 치유 / 보이스카우트 입단과 운동, 그리고 가톨릭 / 우생당 서점에서 처음 본 학생 잡지 《학원》/ 문학의 꿈 키워준 계용묵 선생 / 필경사 노릇도 한 오현고등학교 시절 / 제주 하늘에 뜬 ‘별무리’/ 서부두 등대 앞에서 만난 첫사랑 / 종합예술제 2관왕과 교지 편집 / ‘학원파’ 3인의 학생시집 『생명의 장』 / 영남예술제 참가와 남강변의 호국사 / 150여 명이 모여든 한글 시 백일장 풍경

제3장 청년기
서라벌예술대학 입학 전후 / 원효로까지 걸어가서 뵌 박목월 선생 / 문예창작과 동기생 정규남 / 신문원 동인의 발족과 돌체음악감상실 / 조효송과 『슬픔은 강물처럼』의 최희숙 / 청동다방과 공초 오상순 선생 / 문인들의 사랑방 갈채다방 / 문예창작과의 스승 서정주 선생 / 《문학예술》을 통한 첫 추천 / 청각을 이미지화한 「종」 / 사라진 문단 진출의 교두보 / 해프닝으로 끝난 이제하의 장례식 / 펜팔 친구와의 만남 / 제주에서 만난 안종화 선생 / 제주에서 기획된 간행물 《시작업》 / 《사상계》로의 등단과 동국대학 편입 / 데뷔 이후의 시단 활동 /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방 엠프레스다방 / 놓칠 수 없었던 재개봉관의 영화들 / 영화인들의 단골다방 찾아가기 / 영화 관련 첫 글 「한국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 / 《씨나리오문예》와의 인연 / 4월 혁명 하루 전에 있었던 일 / 친구에게 제지당해 끌려간 다방 / 거리에서 맞은 4.19의 함성 / 서먹했던 아버지와의 화해 / 《사월공론》의 무산과 찬조 연설 제의 / 신취영과 신봉승 / 이영일과의 만남과 영화비평가협회의 창립 / 「두고 온 산하」의 상금으로 맞춰 입은 양복 / 차지철의 결혼식과 육군본부 강당 / 대학 시절의 또 다른 여자 친구들 / 학사주점과의 인연 / 군사 정변 이후 영평의 해산과 네오드라마 동인회 발족 / 시나리오 대신 맡게 된 동성영화공사의 일 / 시인들이 휩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 《씨네팬》과의 인연 / 한국영화의 변화 보인 유현목과 김기영 / <오발탄>이 나올 무렵 /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과의 인연 / 《영화잡지》의 창간과 겸임 편집장 / 출판 도매업자에게 넘어간 《사랑》의 판권 / 문여송 감독과의 인연 / 술과 관련된 일화 / 학원사 입사와 《농원》 잡지 창간 / 이서구 사진소설 「어머니의 애인」에 얽힌 일화 / 양주동 선생의 원고료와 출연료 / 《학원》 편집부로 옮기다 / 아역배우들과의 인연 / 《실버스크린》 창간과 객원 역할 / 《영화예술》의 창간과 영화평론가협회의 재건 / 앙드레김과 박문자의 패션 화보 / 《주부생활》의 우수영화 시사회 / 학원사에서 만난 사람들 / 박목월 시인 주례로 올린 결혼식 / 인쇄 지식 습득하고 학원사 퇴사

제4장 장년기
뜻밖의 태창흥업 기획실장 자리 / <일본인>과 여배우 선발 콘테스트 / 태창흥업의 김태수 사장 / 하길종과 영평의 관계 / 현대영화비평가그룹과 ‘영상시대’의 탄생 배경 / 신문기자들의 참여로 활기 띤 영평 / 공수표가 된 《사상계》의 스카우트 / 조선일보사 입사, 《주간조선》 근무 / 공들인 ‘모녀 대담’ 시리즈와 ‘라이벌 스토리’ / 최덕교와 『세계명배우100선』 출간 / 3회로 머문 《주간조선》의 좋은 영화 보기 / 기억나는 문화예술계 사람들 / 제주 출신 연예인 은희와 고려진 / 선거 열풍 일으킨 김동리와 조연현의 대결 / 《주간조선》의 동료 기자들 / 유신정권의 언론탄압과 고생길 / 회유와 복직의 갈림길, 《주간조선》의 폐간 / 출판사 예문관의 최해운 사장

제5장 중년기
약업신문사 재직 시절 / 안옥희 배우와의 인연 / 《한겨레신문》 창간 전후 / 상영 불발된 신상옥의 <골리아스> / 태창흥업과 맺은 두 번째 인연 / 태창흥업 시절 기획한 영화들 / 태창문화사의 출판과 대형 광고 / 신간의 판매 금지와 김대중 자서전의 불발 / 한림영화사와 『시네마 에로티시즘』의 출간 / 한국영화 60주년 행사와 지속된 심포지엄 / 15년 만에 바뀐 영평의 체제 / 심사 점수까지 공개한 영평상의 출발 / 윤용구 회장의 회고록 집필과 일동제약 / 직장 생활의 마감 / 영화평론가로서의 빈번한 방송 출연 / 영화 저널리즘의 황금기 80년대 /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와 옹호 / <애마부인>과 사이비 관능 영화의 범람 / 의욕적으로 출발한 예술평론가협의회 / 공연예술비평가들의 이탈과 빛바랜 예평 / 영평의 세대교체와 여성회원의 증가 / 주목했던 후배 영화평론가들 / 영평과 함께 보낸 60여 년 세월 / 공윤의 영화심의위원으로 위촉되다 / 무사한 <바보선언>과 기관 파견원 / 영화심의냐, 검열이냐 / <생도의 분노>와 한형모 감독 / <하얀 전쟁> 그리고 <크라잉 게임> / 가위 쥔 자들의 손목을 부러뜨리자! / 영화 사전심의의 위헌 판결과 영등위 / 도중하차한 대종상 심사 / 백상예술대상과 이해랑 / <티켓>에 맞선 <이브의 건넌방>의 로비 / 백상예술대상 심사 이후 / 《스포츠조선》의 「김종원의 배우 탐험」 연재 / 상금도 있었던 청룡영화상의 심사 / 부산국제영화제와 ‘회고전의 밤’ 진행 / 인연 깊은 부산국제영화제 / 국제영화비평가연맹 지부의 창설 배경 / 시낭송 모임과 시집 장정 / 《심상》과 해변시인학교의 3박4일 / 해변시인학교의 정주영 회장 / 명동의 ‘토요일 오후와 시’ 행사 / 시낭송대회의 심사와 『화사집』 발간 행사 / ‘시사랑 모임’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방문 / 청와대의 시낭송과 제주도의 시인축제 / 『한국영화측면비사』 재발간 돕기 / ‘인하금요명화감상회’와 인하대학의 출강 / 한국영화사 강의와 집중 연구 / 초창기 한국영화사에 대한 논쟁 / 서둔 것이 실책 된 『우리 영화 100년』 / 영화사 연구의 오류와 교훈 / 나운규와 <아리랑>에 대한 연구 / 『한국영화감독사전』 발간의 전후 과정 / 유현목 감독과 장례에 얽힌 이야기

제6장 노년기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과 칠순맞이 출판기념회 / 감회 깊은 일제강점기의 영화 발굴 / ‘발굴된 과거’와 시모가와 마사하루 / 벳부에서 만난 한국 영화인들 / 한일차세대교류영화제 운영에 대한 논의 / 영평과의 제휴와 인적 교류 / 미국에서 만난 초기 영평 회원들 / 해외여행과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안병원과 김유미 그리고 헤밍웨이 / 노익장과 서울의 고향 사람들 / 제주국제협의회와 고향 출신의 문우들 / 제주를 지킨 외지인들 / <아리랑> 필름과 방계 예술과의 교유 / 『영화와 시대정신』 출간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