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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한국개념사총서 2

국가·주권

개인저자
박상섭
발행사항
서울 : 소화, 2008
형태사항
269 p. ; 22 cm
ISBN
9788984103450
청구기호
341 박51국
서지주기
참고문헌: p. 249-262, 색인수록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1392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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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11392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구성원 사이의 유기적 연결성을 바탕으로 국가를 정의하는 작업은 독일에서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동아시아에 전달된 이러한 국가 개념의 전통은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유용성과 그 이론이 갖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가 개념과의 친화성 때문에 쉽게 수용되었다.
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족국가사상이었다. 한국사의 경우 신채호 등에서 나타나는 강력한 민족주의는 모두 서양에서의 진화론과 국가유기체설의 영향을 받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국가이론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론의 역할을 했을 때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일단 조직된 국가권력에 의해 사용되자 국가조직의 권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화하여 위험한 경향을 드러냈다.

1. 왜 한국에서는 국가의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체제의 국가라는 틀 속에 살고 있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서양에서 도입된 근대 국민국가이고, 구체적인 권력구조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따르고 있다. 이는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제국주의의 전 지구적 확장 과정에서 받아들인 서양식 국가 개념의 결과이다. 물론 서양적 개념이 소개되기 이전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도 서양에 비해 상당히 오래된 전통적 국가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과 달리 ‘국가 부재’를 경험했던 시기가 없었기에 우리는 국가라는 틀 자체에 대해서는 굳이 새로운 설명을 할 이유가 없었다. 기존 질서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다 타당하게 받아들이던 환경 속에서는 새로운 논의란 불필요한 것이다. 또한 경험과 이론 두 가지 면에서 기존 체제에 대한 아무런 대안이 의식되지 않았다는 점도 또 하나의 원인이다. 한국사 전통에서 대안적 국가질서에 관한 성찰이 약했다는 것은 기존 체제의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 대안적 세력의 성장이 없었다는 점을 의미하고, 이것은 다시 사회경제체제의 확대나 성장이 없었다는 점을 말한다. 따라서 새로운 국가의 틀이 논의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국가제도를 급속히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심각한 역사적 굴절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서양적 국가 개념이 우리의 전통적 국가 개념을 대신하는 새로운 개념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이론의 수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련의 정치적-사회적 가치, 규범 및 제도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진행된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새로운 제도와 전통적 사고 관습의 변화 속도 때문에 여러 혼란을 겪어 왔고, 아직도 그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책은 우리의 국가 관념이 상당 부분 서양적 개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만큼 먼저 서양적 국가 개념의 역사적 뿌리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가 서양에서 도입해 채택하고 있는 시장경제, 정당민주주의, 그리고 이와 관련되는 다양한 정치/사회/경제제도들 속에는 가족중심주의, 가부장주의, 온정주의 등의 전통적 유교식 관념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도입된 국가제도가 원래의 생산지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게끔 만든 전통적 정치문화의 실상을 이해할 필요성 또한 제기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2.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이성

라틴어 status에서 기원한 영어의 the state(이탈리아어의 stato, 프랑스어의 etat, 스페인어의 estados, 독일어의 der Staat)가 새로운 국가를 지칭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이다. 오랫동안 사용되던 polis, civitas, res publica, regnum 등 경합하는 단어들을 물리치고 the state가 국가를 지칭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그 역사적 배경에는 14세기 이후에 활발해진 정치문제와 관련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흥망성쇠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에서 stato는 기본적으로 정권 또는 집권자의 지위 등을 의미했는데, 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가져야만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stato에는 영토 또는 영토에 대한 지배력의 의미가 부가되었고, 이 점은 시간이 가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경험은 프랑스에도 전파되었다. 근대 국민국가는 바로 16세기 유럽에서 배타적 영토 관념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중앙집권적인 독특한 권력조직의 방식이었다.
stato 개념의 발전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7세기 초에 유행한 ‘국가이성’의 담론이었다. 이러한 국가이성 사상은 마키아벨리에게서 유래한다. 그리고 국가이성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여 ‘이익’이라는 명백한 개념을 제시한 이는 그의 후배인 귀차르디니였다. 그는 정치인들의 행동이 명예나 영광 또는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익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점차 유포되어 보테로는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로 자처하던 최대 강국 스페인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옹호하였다. 그가 1589년에 출간한 <국가이성론>에서는 국가의 이성은 결국 이익의 논리에 따르는 것, 즉 ‘이익의 이성’이었다.

3. 국가는 괴물인가, 사랑의 대상인가

근대 국가 이론은 곧 주권의 이론이었기에 국가 개념의 역사는 곧 주권 개념의 역사와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근대적 주권 개념을 확립한 장 보댕은 국가의 개념 안에 이미 절대적 주권의 관념이 상정되어 있는 것으로 취급했으며, 국가는 ‘폭력’ 속에서 기원했다는 관점에 동의했다.
국가의 개념을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한 이는 홉스였다. 그는 기독교의 권위가 붕괴되고 혁명과 내란이라는 이중적 혼란을 극복할 새로운 힘의 주체를 국가에서 찾았다. 그가 ‘괴물’ 즉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고 이름 붙인 국가는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였다. 이러한 홉스의 기계론적 국가 개념을 비판한 이는 루소였다. 루소는 오조지 물적 이해관계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홉스의 인간관을 비판하며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강력한 유대의 요소인 조국애를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의 <사회계약론>에서는 올바른 사회계약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조국애가 생긴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소에 의해 설정된 국가는 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도시국가 규모의 조국이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도시국가 수준을 넘어서는 근대 영토 국가 수준의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계급을 묶어 ‘국민nation’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탄생했고, 이로써 근대 국가는 곧 국민국가로서 그 성격이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뒤에 국민주권설로 발전한다. 이후 국가의 문제는 국민 또는 민족과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독일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4. 독일의 유기체적 국가관을 받아들인 동아시아 국가들

개인의 이익 관념에 기반한 홉스의 결사체 이론은 다시 독일의 역사주의이론에 의해 비판되었다. 독일인들은 국가의 결합은 단순한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국가는 윤리적 실체로서 인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론은 헤르더에 와서 유기체로서의 인간집단, 특히 민족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초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란 계약 같은 인위적 제작에 의한 일시적인 단체가 아니라 성장의 결과로 이루어진 유기체로 보아야 한다는 신념이 제시되었다. 그가 유기체로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비록 국가가 아니라 민족이었지만,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국가를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규정하려는 민족주의 이론의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했다. 이후 헤르더의 민족이론은 독일을 통일국가로 이끄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독일 침공으로 국가 부재를 경험한 독일에서는 국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이루어졌고, 이는 헤겔을 포함한 많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을 국가중심의 현실주의적 민족주의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19세기 독일의 국가학자들 중에서 블룬칠리는 일찍이 그의 국제법 저서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널리 알렸는데, 헤르더와 헤겔의 논지를 계승한 그의 유기체적 국가론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양식 국제질서에 편입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고유한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 그것과 친화성이 있는 독일에서 성장한 유기체적 국가관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5. 한국에서 국가 개념의 논객들

동아시아에 전달된 이러한 국가 개념의 전통은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유용성과 그 이론이 갖는 동아시아 전통적 국가 개념과의 친화성 때문에 쉽게 수용되었고, 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족주의 색채를 강력하게 드러내는 민족국가사상이었다.
한국에서는 국가의 문제를 정치문제에 관한 담론의 핵심주제로 삼게 된 첫 번째 계기는 1876년 일본과 체결했던 강화도조약이었다. 한국 최초의 국제조약인 강화도 조약은 당시까지 중국의 속방屬邦으로서 존재하던 한국을 국제법상의 독립국으로 인정한 최초의 국제문서이기도 했다.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조선에서는 대 중국관계의 와해에 대한 우려를 보인 개화반대파와 일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개화파로 나누어 새로운 국가 개념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에 유길준은 조선과 중국의 전통적 관계를 설명하기 우해 증공국贈貢國과 수공국受貢國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두 나라 모두 다른 독립국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주권국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유길준의 논의는 서양식 공법질서하에서의 국가를 다른 최초의 한국인의 논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국가의 틀을 갖는 중요성이 절박한 문제가 된 것은 일본의 국권침탈이 거의 목전에 다가오던 1905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이른바 ‘애국계몽기’라고 불리는 5년간이었다. 국가의 중요성을 근대 민족주의의 사상적 흐름과 연결시킨 가장 중요한 인물로 신채호를 들 수 있다. 그는 국가와 가족을 동일시하는 전통적 유교 관념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국가를 ‘민족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라는 사실을 빨리 인식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한국에서의 국가 개념은 신채호를 통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식 국민국가의 간념을 바탕으로 발전할 계기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한국개념사총서> 발간사
저자의 말

서론-국가 개념의 다의성과 연구의 의의

Part 1 국가

1. 서양에서 국가 개념의 변화
Status/Stato의 기원|국가이성|근대적 국가 개념의 성장|독일에서의 국가 개념의 형성과 발전
2. 한자 문명권에서 국가의 개념
중국에서의 국가 개념|일본에서의 국가 개념
3. 한국사 전통에서 국가의 개념
고구려/고려(<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조의 기록물|새로운 국가 개념의 시작|
취약한 국가 전통과 국가지상주의의 위험

Part 2 주권

4. 근대 유럽사에서 주권 개념의 형성 과정
서양 주권이론의 전사|근대적 주권 개념을 위한 준비|
근대 주권이론의 탄생-보댕과 홉스|대외적 주권|근대 국제정치질서에서 최고 규범으로서의 주권
5. 주권 개념의 조선 전래
주권 개념 전래의 의미|김윤식과 양편론/양득론|유길준과 양절체제|유길준 이후|
주권 현실의 부재와 주권 개념 확립의 지연

결론

문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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