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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노태우 회고록
보도자료 (상)
제6장 유신과 윤필용 사건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실언한 것을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이 잘못 전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두환 공수특전1여단장도 같은 생각을 했다.
▶강창성 개인적 복수심에서 하나회를 과장 발표, 여론 오도했다.
나중에 박 대통령도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유능한 장교들 희생시키는 것 알고 조사 중단시키고 보안사령관 직에서 해임시켰다.
제7장 공수여단장 시절
▶공중낙하 합동결혼식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멋진 행사가 있었다. 1975년 4월19일에 치러진 28쌍의 공중낙하 합동결혼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사관들 중에는 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아이까지 낳고 사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부모와 친인척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이 일어날 소지가 없지 않았다. 나는 ‘이들에게 떳떳한 가정을 만들어 주자. 그러기 위해서는 만인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을 올려 주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대대장들에게 “해당 인원을 파악하고 여단장이 직접 주례를 서는 훌륭한 결혼식을 올릴 터이니 이 같은 취지를 당사자와 부모들에게도 설명하고 동의(同意)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파악해 본 결과 새로운 신랑·신부를 합해 모두 28쌍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결혼식을 생각해 냈다. 결혼식장을 행주나루 백사장에 마련하고 주례인 나를 비롯한 신랑 28명 전원이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백사장에 꽃다발을 안고 서 있는 신부에게로 날아가는 시나리오였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하늘이 우리들을 축복해 주리라 믿었다.
이색(異色) 결혼식이라는 소문이 퍼져 TV를 비롯한 언론사 기자들이 몰려오고 이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아침엔 날씨가 잔뜩 찌푸려 걱정을 했는데 오전 10시가 지나면서부터 날씨가 화창하게 개고 바람도 잔잔해졌다. 우리는 함께 비행기를 타고 결혼식장을 멀리 한 바퀴 돈 후 나를 선두로 해서 결혼식장을 향해 뛰어내렸다. 알록달록한 낙하산 29개가 나비처럼 꽃다발을 안고 있는 신부 쪽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제8장 경호실과 차지철
▶대통령 측근들
각 부처 장관이나 지방행정 책임자들이 보고하고 박 대통령이 지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 대통령은 조직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는 데다 18년간 국가를 통치해 온 관록이 있어서인지 보고자들보다 내용을 더 깊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실(不實)한 보고는 용납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의도를 제대로 받들고 인정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우수한 사람이 노력을 많이 해야 했다. 공무원 사회는 자연스레 엘리트 관료화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에 주도권을 잡았던 혁명주체들은 이제 2선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젊은 엘리트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다만 정치 분야에서는 전혀 그렇지를 않았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박 대통령을 만 1년간 모시면서 보니까, 국사(國事)를 야당 책임자와 만나 진지하게 논의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을 받드는 사람들도 박 대통령이 야당 당수와 만난다는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단정하고 있었다. 야당을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 역시 야당이 박 대통령의 업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이 나라 발전에 온몸을 바쳐 불철주야(不撤晝夜) 노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존경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당시 박 대통령의 신념은 ‘먹지 못하는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를 한단 말인가? 우선 배불리 먹고 세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율을 모르는 민주주의란, 말만 민주주의이지 혼란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김일성이 원하는 대로 나라가 흘러가게 된다. 나라를 그 꼴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어느 수준까지는 다소 인권(人權)을 희생시키더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권력 측근에 있는 인물들의 자세와 행동이었다. 박 대통령의 신념(信念)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아 그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과 야당 속에 몸을 던져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거의 없어 보였다.
많은 측근인사들이 박 대통령 앞에서는 “각하가 아니면 이 나라를 이끌 사람이 절대로 없습니다. 각하야말로 민족의 태양이십니다. 백성은 우매하고 야당은 한결같이 비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야당이나 국민과의 거리를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박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육군 소장의 계급, 또 경호실 작전차장보라는 직책으로 이런 생각들을 솔직히 말씀드릴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박 대통령이 추구한 정책 가운데 이 새마을운동만은 당리당략(黨利黨略)이라는 차원을 떠난 온 국민의 합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정치적인 이해득실(利害得失)로 따지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순수성을 의심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강한 집념은 순수한 애국심 그 자체였다.
제9장 9사단장
▶自由路 발상
원래 이 도로의 아이디어는 1979년에 내가 건의한 것이다. 군단장과 군사령관에게 보고해 동의(同意)까지 얻었었다. 문제는 예산이었는데 길을 지금 만들어진 것보다 강 쪽으로 400~500m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면 많은 한강 둔치를 조성할 수 있어 그것을 팔아 공사비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군에서는 나의 건의를 관계 부처에 넘겼다고 했는데 정부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 확인해 보니 이 건의서가 건설부에서 잠자고 있었다. 즉시 건설부 장관에게 검토를 시켜 타당성을 보고 받았다. 그래서 내 대통령 임기 중에 거의 완성된 것이다. 사단장 때의 아이디어가 대통령이 되어 실현된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自由路)를 칭찬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제10장 10·26사건에서 12·12까지
▶부대 출동 명령
간단하게 정리하면 12·12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 만일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서든지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상 어느 쿠데타도 병력을 동원하는 부대장이 부대를 이탈해 지휘할 수 없는 곳에 가 있은 예는 없었다.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제11장 수도경비사령관-보안사령관 시절
▶세 金씨
나는 계엄분소장으로 있으면서 유관기관장뿐만 아니라 언론계 간부와 교수·학자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김종필(金鍾泌) 씨= 정치적인 감각과 국가경영의 관록 등은 누구보다 잘 갖추고 있다는 평이었다. 그는 두 가지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제3공화국의 주요 국정(國政)책임자로서 유신(維新)과 장기집권에 대한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유신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유신을 반대했다고 변명하고 나선 자세였다.
그가 단호하게 ‘제3공화국과 관련해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다. 나는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잘잘못은 국민들의 심판에 따르겠다’는 자세를 보였다면 역사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군인의 입장에서 몹시 안타깝고 아쉽게 생각했다.
◇김영삼(金泳三) 씨=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인물로 손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언론계에서 기대를 거는 편이었다. 그러나 국가안보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고 군에 대한 친근감이나 인맥(人脈)이 두텁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金大中) 씨= 군 내부의 평가는 한마디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념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며 통일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김일성과 맥(脈)을 같이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론계·학계에서의 의견도 비슷한 편이었다. 국가에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가 배후인물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실제로 그에게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선동적이었다.
▶金大中 사형 만류
1981년 1월23일 내란음모죄로 재판을 받아온 김대중(金大中) 씨의 사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자 군 내부에서는 법대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나는 국내외적으로 볼 때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독재란 무엇인가. 정적(政敵)을 죽이고 장기집권을 하면 독재라는 레테르가 붙게 되는 것이다. 만일 김대중 씨를 사형집행한다면 내 동기(同期)이자 친구인 전 대통령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고 독재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전 대통령은 7년 단임으로 그만둘 사람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그에게 독재자라는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전 대통령에게 했더니 그 역시 공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12장 서울올림픽 유치 지휘
▶올림픽 유치 건의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기로 정부가 결정한 것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이었다.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주역(主役)이었던 대한사격연맹회장 박종규(朴鐘圭) 의원(전 경호실장)이 1979년 박(朴)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를 건의했다. 사회의 선진화, 남북관계에서의 우위(優位), 공산권 진출을 위한 국가 대전략으로서 올림픽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대통령 서거 직전인 1979년 10월8일 서울시가 올림픽 유치 계획을 공식선언했다. IOC(국제올림픽 위원회)에 유치신청서를 낸 것은 그로부터 1년 5개월 후인 1981년 2월26일이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선언하고 공식신청서까지 제출했으면서도 정부는 본격적인 유치활동을 벌이지 않고 있었다. 유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치한다 해도 우리의 경제력이 이를 뒷받침하기 어렵다는 것이 정부 관계기관의 지배적인 판단이었다. 그 사이 국가적 위기와 경제 불황(不況)이 겹쳐 아무도 올림픽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럴 때 내가 올림픽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내가 박종규(朴鐘圭) 씨, 노재원(盧載源) 대사 등으로부터 올림픽 유치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올림픽은 꼭 유치해야 하므로 대통령께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건의서를 올린 것은 9월2일이었다. 개최지 결정일을 28일 앞둔 날이었다.
제13장 2·12총선과 민정당 대표
▶청와대 ‘쓰리 許’
제5공화국 시절, 세간에서는 이들이 청와대 비서진들을 주무를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권력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이야기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실보다 과장된 점이 없지 않았다.
▶張玲子 사건
이 사건이 있고 난 후 스리 허에 대한 전(全) 대통령의 불신과 경계심은 갑작스레 커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도 허화평(許和平) 씨에 대한 불신이 더욱 심했다.
제14장 6·29선언―모든 것을 건 승부
▶두가지 지침: 직선제와 金大中 사면
1987년 6월 17일 안가 만찬,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후보,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 이춘구(李春九) 민정당 사무총장, 이치호(李致浩)·현경대(玄敬大) 의원, 박영수(朴英秀) 비서실장, 안현태(安賢泰) 경호실장, 김윤환(金潤煥) 정무1장관, 이종률(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 등
전두환: “우리가 지금 밀려가고 있는데,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 이제 없어. 정부에서 뭘 연구하더라도 이제는 전부 노(盧) 대표를 중심으로 해야 된다는 얘기야. 그래서 내가 안기부장을 오라고 한 것은 비서실과 긴밀히 협조해서 뭔가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나는 그날(6월 17일) 밤 연희동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언론에서 하자는 대로 해야겠지. 그게 바로 국민들의 뜻일 테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리드할게” 하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말을 받아 ‘노 후보가 시국수습의 전면에 주도적으로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나는 이날 밤 박철언(朴哲彦) 특보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심을 했다. 직선제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해달라”며 초안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 준 지침은 두 가지였다. 직선제를 한다는 것과 김대중 씨를 사면복권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박 특보가 몇 명의 참모들과 함께 초안을 잡으면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직선제 해도 이기지 않겠소?”
6월24일 오후 7시쯤 전(全)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로 올라갔다. 전 대통령이 내 천거(薦擧)에 따라 각계 인사들을 만난 직후였다. 서쪽 별관에서 만났는데 영식(令息)인 재국(宰國)군도 동석했다. 화제는 시국(時局)문제에서부터 시작되어 당내(黨內)문제, 특히 당의 단결과 국민의 신뢰 등으로 옮겨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전 대통령은 불쑥 “당의 신뢰도나 노(盧) 대표가 쌓아올린 이미지로 보아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하고 내 의중을 떠보았다. 나는 속으로 ‘옳지! 내가 의도했던 대로 일이 잘 풀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 대통령의 이야기는 이만섭 총재가 내게 한 말과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수긍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 당원들을 데리고 국민들에게 내각제를 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갑자기 직선제로 바꾸면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반문(反問)했다. 전 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왔으므로 이번에도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 대통령의 생각을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생각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반어법(反語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으로 해서 내가 직선제를 반대한 것으로 오해를 사게 된 듯하다.
여기서 잠시 덧붙이자면 이미 나의 지시를 받은 박철언(朴哲彦) 특보는 6월18일부터 직선제 수용 관련 선언문 기초 작업에 들어가, 20일과 22일 두 차례 보고를 하고 나의 보완 지시를 받아 수정 작업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6·29선언의 초안을 잡도록 지시한 후에도 박(朴) 특보를 비롯한 내 참모들은 ‘직선제’ 이야기가 나오면 “무슨 말이냐? 직선제 하면 나라 망한다. 올림픽을 치를 때까지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제18장 ‘5共 청산’이란 狂風
▶우리 민족의 슬픈 특성?
청산이라는 용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정부나 여당에서 한 것으로는 기억되지 않는다. 나는 ‘5공(共) 청산’이라는 말 자체가 5공화국을 말끔히 정리한다는 뜻이므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청산이라기보다 역사의 진전이라고 해야 옳다고 본다.
▶마녀 사냥
5공(共) 청문회도 그랬다. 정치재판, 여론재판, 사법재판 등이 뒤범벅되어 버렸다. 정부로서도 홍수처럼 흐르는 물줄기를 다스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규제에 묶여 있던 여러 분야가 ‘민주화’라는 역사적 명제(命題) 속에서 일시에 해방됨으로써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안 되겠다고 해서 다시 누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가만히 두게 되면 격렬한 왕복작용을 하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멈춰져 자율이라는 규범 속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위정자(爲政者)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떠올리며 용수철이 서서히 멈추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통령 친인척에게 공직을 맡기는 데 문제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민족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고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支柱)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나는 전경환(全敬煥) 씨를 새마을운동 본부장에 앉혀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까지는 고려될 수 있을지 몰라도 회장을 맡게 한 것은 잘못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전(全) 전 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李圭東) 옹에게 대한노인회 회장을 맡긴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이(李) 옹을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은 고결한 인품과 온유한 성품을 지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이었다. 우리 정규 육사 출신들은 그분을 존경했다. 그런 분에게 노인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하니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고, 급기야 순진한 분이 나라 일에 대해 이 걱정 저 걱정을 다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이 전혀 모르는 가운데 이상한 권력이 형성되고 말았다.
어쨌든 전(全) 대통령이 권좌(權座)에서 물러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일어나는 험악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친인척과 측근들을 비난하더니 급기야는 포위망을 압축시켜 비난의 화살을 전(全) 전 대통령에게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백담사行
국민들은 나의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무슨 변화의 돌파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항간에서는 “얼마간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원조(李源祚) 의원에게 전(全) 전 대통령 내외가 국내의 조용한 곳에 거처를 정해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 있는 것이 어떤가 하는 권유의 뜻을 전(全) 전 대통령 및 그의 참모들과 진지하게 논의해 보라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신변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한데 “해외로 도피하시오”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변화된 시대상황은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이해시켜 최선의 방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직접 나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수십 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상황에서 내가 앞장서서 설득하려고 했을 때 정치권과 국민들은 “둘이서 야합한다”고 나올 것이 뻔했다.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전(全) 전 대통령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데 당시 상황은 아닌 말로 폭동이 날 판이었다. 그래서 참모들과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했다. 참모들 역시 “우리가 살기 위해 저쪽을 일방적으로 죽일 수는 없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러던 중 전(全) 전 대통령과 참모들은 여러 날 논의를 거쳐 설악산(雪嶽山)에 있는 백담사(百潭寺)를 은둔처로 정했다고 알려왔다.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 등 몇 곳의 사찰을 검토했으나 이왕 국민들에게 속죄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서는 외지고 험준한 곳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이렇게 고통스러운지를 그토록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前夜의 전화
떠나기 전날 밤 전(全) 전 대통령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백담사 은둔에 대한 내 생각을 물었다. 자신이 백담사에 가는 것을 대통령인 나도 동의하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전임자의 신변을 안전하게 해주지 못해 부끄럽다. 그러나 현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잠시 동안 고생스럽더라도 그곳에서 참고 견디면 조속한 시일 내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상으로 회복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 뜻을 확인하고 싶었다면서 “6공화국에 도움이 된다면 더 큰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보고에 따르면 그들 내외가 기거할 백담사는 설악산의 중허리에 위치해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전깃불은 물론 화장실·목욕실도 없는 아주 초라한 곳이라고 했다. 나는 관계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야 없지 않느냐. 최소한의 불편은 덜어줘야 하지 않느냐”고 질책했다. 관계자들은 “불편을 덜기 위해 보수(補修)공사를 하면 기자들이 ‘편하게 지낸다’, ‘화려하다’는 등의 기사를 써댈 텐데 그러면 국민감정을 좋지 않게 할 염려가 있으므로 조금도 손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참겠다는 것이 그분들의 뜻”이라고 했다.
제19장 중간평가 유보
▶헌법 위반 소지, 유보
김종필 총재와 나는 “중간평가로 인해 정국(政局)이 극한 상황으로 치닫지 않게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에서 김 총재가 중간평가를 할 것이냐고 물은 데 대해 나는 “국민들과의 약속이니까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김 총재는 “중간평가를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인데 대통령이 어떻게 헌법을 위반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이전에는 중간평가에 대한 법률적 측면의 문제점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을 통해 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국민 앞에 선서하는 첫째 항목이 헌법을 지키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어기게 되는 셈이어서 나는 “검토해서 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김대중 총재와의 묵계설(默契說)과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까지 오갔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김 총재 측에서 위헌(違憲)이라고 하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뒷거래를 하겠는가.
중간평가를 하면 분명히 이긴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고, 나도 그런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헌(違憲)이라는 문제가 중간평가를 유보하기로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작용을 했다.
제20장 3당 合黨과 갈등
▶與小野大 타개의 필요성
정치지도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는 보수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김영삼 총재는 어려울 것이므로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YS는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단(豫斷)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정책보좌관(후에 정무장관)이 내게 진언을 했다.
“각하, 상심하실 것 없습니다. 위기(여소야대)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혁(保革)구도로 일대 개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민주세력을 대통합하고 각 당에 있는 급진 좌파세력을 분리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대통합을 하십시오. 그러려면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나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잇따른 ‘정계개편, 보수통합’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던 터라 박철언 보좌관에게 “그러면 자네가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특히 김영삼·김대중 두 총재의 의중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김종필(金鍾泌) 총재는 홍성철(洪性澈)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났는데, 예상대로 쉽게 동의해 주었다고 보고했다. 야당의 두 총재는 박 보좌관이 접촉했는데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할 듯 말 듯 애를 먹였고,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여러 번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협조할 일은 할 테지만 통합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金大中, 合黨에 부정적 반응
정치지도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는 보수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김영삼 총재는 어려울 것이므로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YS는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단(豫斷)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정책보좌관(후에 정무장관)이 내게 진언을 했다.
“각하, 상심하실 것 없습니다. 위기(여소야대)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혁(保革)구도로 일대 개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민주세력을 대통합하고 각 당에 있는 급진 좌파세력을 분리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대통합을 하십시오. 그러려면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나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잇따른 ‘정계개편, 보수통합’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던 터라 박철언 보좌관에게 “그러면 자네가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특히 김영삼·김대중 두 총재의 의중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김종필(金鍾泌) 총재는 홍성철(洪性澈)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났는데, 예상대로 쉽게 동의해 주었다고 보고했다. 야당의 두 총재는 박 보좌관이 접촉했는데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할 듯 말 듯 애를 먹였고,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여러 번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협조할 일은 할 테지만 통합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金泳三, ‘내각제 개헌’ 반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김영삼, 김종필 총재는 각각 자신들과만 합당(合黨)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통합 발표 2~3일 전에 이르러 박철언 정무장관이 김종필 총재에게 “내각제를 하려면 민주당에도 얘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운을 뗐다. 김영삼 총재에게도 “대통합을 하는 마당에 보수세력의 상징인 김종필 총재에게도 의견을 타진해 본인이 하겠다고 하면 끼워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고 의견을 묻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김영삼 총재가 “안 돼, 안 돼. JP를 넣으면 이미지가 나빠지므로 넣으면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박 장관의 끈질긴 설득에 “그러면 한번 이야기해 보고, 본인이 흔쾌히 하겠다고 하면 끼워 주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끼워 주는 것이지 주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양보했다고 한다.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김영삼 총재 측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면서 시간을 끌었다. “참모들에게 충분한 이야기가 안 됐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당 핵심 참모회의를 연 결과 ‘내각제 하면 큰일 난다’는 반대가 강하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초 내각제를 하게 되면 김영삼 총재가 총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각제를 하면 의석수에 비례해 장관자리를 나누게 되므로 사실상 의석수가 적은 민주계(民主系)로서는 총리 자리만 차지하고 나머지 요직은 전부 민정계(民正系)가 독식(獨食)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김영삼 총재의 스타일이 총리보다는 대통령이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을 내걸면서 ‘내각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걱정하지 말라. 내가 대통령인데 김 총재가 약속을 해놓고 배신할 수 있겠는가”며 그대로 추진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나는 박 장관이 내 뜻을 잘 설명해 김영삼 총재를 설득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이제는 방향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통합 원칙에 합의한 우리는 각각 민주당·공화당과 별도로 각서를 작성했다.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김영삼 총재 측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면서 시간을 끌었다. “참모들에게 충분한 이야기가 안 됐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당 핵심 참모회의를 연 결과 ‘내각제 하면 큰일 난다’는 반대가 강하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초 내각제를 하게 되면 김영삼 총재가 총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각제를 하면 의석수에 비례해 장관자리를 나누게 되므로 사실상 의석수가 적은 민주계(民主系)로서는 총리 자리만 차지하고 나머지 요직은 전부 민정계(民正系)가 독식(獨食)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김영삼 총재의 스타일이 총리보다는 대통령이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을 내걸면서 ‘내각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걱정하지 말라. 내가 대통령인데 김 총재가 약속을 해놓고 배신할 수 있겠는가”며 그대로 추진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나는 박 장관이 내 뜻을 잘 설명해 김영삼 총재를 설득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이제는 방향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통합 원칙에 합의한 우리는 각각 민주당·공화당과 별도로 각서를 작성했다.
▶金泳三과 朴哲彦의 訪蘇 갈등
박 장관은 귀국(歸國) 후 이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매우 흥분해 있었다. 합당 당시에는 김 최고위원의 장점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정국(政局) 전망을 밝게 보던 그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모든 희망을 접은 듯했다.
나는 그를 달래면서 자중(自重)하라고 일렀다. 그가 비록 사리(事理) 판단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경험과 관록이 부족한 단점이 있었다. 머리가 우수한데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남의 잘못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많은 경험을 겪고 나서야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아량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김 최고위원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함께 갈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웬만한 것은 참고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당을 이끌어갈 수 있다. 이런 각오가 없다면 애당초 그와 합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인식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박 장관이 생각을 바꾸길 바랐다. 그에게 창당(創黨)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겸허한 자세로 처신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럼에도 박 장관은 내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귀국 후 김 최고위원이 박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고 박 장관이 김 최고위원을 비난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 불씨가 되어 김 최고위원이 청와대 당직자 회의에 불참하고 민정계(民正系)와 민주계(民主系)가 싸움을 벌일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박 장관의 사퇴로 결말 났지만, 그를 설득시키지 못한 나의 부덕(不德)함이 후회되는 한편, 그의 지나친 우월감과 부족한 자제력(自制力)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제21장 민자당 競選
▶全 대통령의 鄭周永 不信
이런 대화가 있은 지 한 달쯤 지나 전(全)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는 정(鄭) 회장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가 그 영감한테 크게 속았소. 그 사람 큰일 저지를 사람이야. 벌써 몇 개 기업이 그 사람으로 인해 넘어졌다고 하는군”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빨리 아셔서 다행입니다”하면서 그의 인간됨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민정당(民正黨) 대표위원이던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정(鄭) 회장을 만났더니 사공일(司空壹) 경제수석의 욕을 해댔다. 내가 알기로 사공(司空) 수석은 경제운영 및 실무에 밝은 우수한 참모임에도, 정 회장은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경제를 망치는 자’라고 매도했다.
국가경제가 정(鄭) 회장 개인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鄭) 회장은 이런 식으로 잦은 충돌이 일어나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정권을 잡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정치를 갑작스럽게 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 박(朴) 대통령 말기부터 준비를 해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가 이끄는 통일국민당은 1992년 1월10일 발기인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아무리 내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참모들이 건의한 ‘정주영(鄭周永) 씨 정계진출 저지 방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런 공작은 민주적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鄭) 회장의 정계(政界)투신이 적잖은 혼란과 불안을 야기할 것이라는 걱정은 들었다.
나는 측근 가운데서 정(鄭) 회장과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을 불러 “인간적인 입장에서 정(鄭) 회장의 정계투신을 막는 것이 좋겠다”뜻을 밝혔다. 그 측근은 나름대로 알아본 후 “정(鄭) 회장의 뜻을 돌리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습니다”라고 보고했다.
▶大選 후보 3원칙
나는 다음 대선(大選) 후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정한 원칙을 비공개적으로나마 밝혀놓고 있었다.
첫째, 군(軍) 출신은 대권(大權) 후보가 될 수 없다.
둘째, 내 친인척 중에서도 대권(大權) 후보가 나올 수 없다.
셋째, 여당 후보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자유로운 경선을 통해 결정된다.
이러한 나의 뜻은 1987년 대선(大選) 당시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바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었다. 정무수석은 이런 나의 원칙을 토대로 수개월에 걸쳐 민자당 내의 예상후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했다. 이 작업에는 많은 전문 인력이 동원됐으며, 여론조사 등 다양한 검증작업이 동반됐다.
▶金泳三의 돌출 행동과 李鍾贊의 반발
김 대표가 서둘러 후보경선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것은 경선(競選)을 조기 과열화시킬 뿐, 그에게 특별히 유리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면 아래 있던 민정·민주계 갈등이 표면화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가능한 한 대립을 피하고 원만한 타협을 통해 경선 절차에 따라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던 내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정한 원칙들은 적어도 그에게는 유리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치고 나온 것이었다. 나는 몹시 당혹스럽고 화가 났다. 이 일로 인해 당내(黨內)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대통령인 내가 1년 반 동안에 걸쳐 그를 믿고 정성을 다해 지도해왔는데 이렇게 당돌할 수 있는가. 대통령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청와대 비서진들도 “이럴 수 있느냐”면서 몹시 흥분했다. 과거 야당에 몸담고 있을 때처럼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치고 나와 기선(機先)을 제압하는 방법이 체질화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억지 이해를 하면서도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다. 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여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김 대표가 선언을 한 다음날 이종찬(李鍾贊) 의원이 긴급 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저는 각하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으니 승낙해 주십시오’하는 승인을 받으려고 뵙는 것이 아닙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후보 경선에 나섭니다’ 하고 통보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후배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YS가 제멋대로 치고 나오는데 난들 왜 못하겠느냐’는 배짱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나무랄 말을 찾지 못했다.
▶李漢東, 朴泰俊의 경우
박 최고위원이 대안(代案)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여러 검토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그 이유를 정리하면 이러했다.
첫째, 그는 유능하지만 군 출신이다.
둘째, 민정계(民正系)의 이종찬·이한동을 끌어안지 못했다.
셋째, 그가 나설 경우 이종찬 쪽에서는 그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점들이 얽혀 있는 상태에서 그를 후보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浦鐵의 명성을 보존하시기를”
나는 박(朴) 최고위원에게 “출마하지 마십시오”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말이 많았다. 내가 이중 플레이를 한다느니, 결단력이 약하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원래 남의 의견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내 의견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객관적인 상황을 인식시켜 상대방 스스로가 결론을 내리게 한다. 나는 박(朴) 최고위원에게 “박 선배께서는 포철(浦鐵)을 성공시킴으로써 우리나라 근대화에 이바지해 신화적인 명성(名聲)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경쟁자들이 온갖 약점을 과장해 상처를 입히려 할 텐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했다. 그는 ‘나름대로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민정계에서 단일후보가 나오지 않고 여러 명이 난립한다면 모양이 참으로 안 좋지 않습니까? 이한동은 몰라도 이종찬은 결코 물러설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박(朴) 최고위원도 이들을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란 점을 시인했다.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우니 잘 생각해 보세요. 박 선배에게 꼭 한 가지 바라는 것은, 쌓아올린 명예가 어떤 경우에든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나는 이 정도로 내 뜻을 이야기하면 그가 적당한 명분을 찾아 후보 출마를 철회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보고를 받고 보니 철회는커녕 그대로 밀고 나갈 태세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무수석 비서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를 시켰다. 결과는 나의 원래 생각과 다름이 없었다.
여당 내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일어나 온갖 추태가 벌어지고 결국에는 박(朴) 최고위원이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결론이었다. 이 문제를 정리해야만 애써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 나는 박(朴) 최고위원을 다시 만나려 했으나 마침 남부지방에 행사가 계획되어 있어 그냥 전화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박(朴) 최고위원에게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내 참모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시고 결정해 주십시오”하고 말한 후 그 참모에게 “그분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올바른 결심을 할 수 있게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지방에 있는 동안 전화 보고가 있었다. “그분에 관계되는 자료를 정리해 사실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심사숙고한 끝에 후보 철회를 결심했다”는 내용이었다.
▶李鍾贊의 경선 거부
하지만 나는 생애를 통해 운명을 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여러 번 봉착할 때마다 생명을 아껴 물러선 적은 결코 없었다. 다른 사람은 물러서더라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옳은 길이라고 판단이 서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친구들은 “노태우는 부드럽게 보이지만 무서운 사람”이라는 평을 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가 내게 맡겨 준 과제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결단을 해야 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결단의 모습과는 반대로 비치는 것이어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참아야 하는 결단, 관용해야 하는 결단, 기다려야 하는 결단…. 그 내용에 있어서는 더 어렵고 무서운 결단이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비치곤 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기에 대통령이 이렇게 약하고 무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하고 화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그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칼자루는 쥐었겠다, 수 틀리면 누군들 혼을 내지 못할까!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는 것쯤이야 얼마나 쉬운 일인가! 명분이야 나라를 위하고 정의(正義)를 위한다고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다. 그렇게 나아갔을 때 대통령이 참으로 힘 있고 속 시원하게 잘한다는 평을 받을 수는 있겠지….’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할 경우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거북하고 싫더라도 또 인기가 없더라도 ‘참고, 용서하고, 기다려야’(참·용·기)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입장에서 결단력이 약하고 우유부단하다는 빈축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제22장 중립내각으로 大選 관리
▶金大中 총재의 감사 표시
10월5일 오전 나는 민자당 당사(黨舍)를 방문해 정식으로 탈당계를 제출했다.
이날 저녁 나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표와 만찬을 함께 하면서 중립내각 구성과 향후 정국 방향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김 대표는 나의 결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었다”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의 대통령 당선 여부를 떠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고마움을 영원히 간직하겠노라고 했다. 표정으로 보아 자신의 대통령 당선에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金宇中 출마 포기 설득
나는 김 회장에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김 회장 주변 사람들이 김 회장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김 회장을 보는 눈,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김 회장을 보는 눈과 같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회장이 국제감각에 익숙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참신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정주영 회장이 이번 선거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어려운 처지인데 김 회장까지 정치에 뛰어든다면 김 회장과 대우가족, 나아가 국민들의 불행만 초래할 것이 내게는 훤히 보입니다. 그래도 출마할 작정입니까?”
내 말에 김 회장은 멈칫하면서 당황해했다. 그는 자신이 출마하지는 않더라도 “새로운 참신한 사람(정치인)을 기르는 당(黨)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한 걸음 후퇴했다.
나는 “근본적으로 정치라는 것을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김(金) 회장을 결코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고 당신 또한 뿌리칠 수 없을 것이오. 내 이야기는 대통령의 권위를 앞세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인 김우중 회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선배로서 충고하는 것이오.”
그는 깔끔한 성미였다. 구질구질하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저는 정치를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확실하게 밝혔다.
나는 “고맙소. 대우(大宇)를 훌륭하게 키워 세계의 대우로 성장해 나가기를 빕니다”라고 격려했다.
▶金大中의 당선 확신
김대중 후보는 선거 전인 10월5일 청와대에서 만찬 회동을 할 때에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취한 민자당 탈당과 중립내각 구성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내가 정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자신은 대통령의 탈당까지는 바라지 않고 중립내각만 구성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탈당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김 총재, 내가 6·29를 선언한 사람이 아닙니까? 김 총재를 비롯한 야권(野圈)에서 중립내각을 구성하라고 요구하는데 내가 당직을 가진 채 중립내각을 구성하면 그 결과에 대해 깨끗이 승복하겠습니까? 아마 승복하지 않았을 걸요. 그럼 중립내각의 의미는 사라지는 겁니다. 이왕 할 거면 깨끗이 하자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지켜온 정치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는 내 말에 매우 감동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승리를 확신하는 그의 표정을 읽으면서 나는 속으로 ‘그의 혜안에도 한계가 왔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대통령 재임 5년간 여러 차례 그를 만나 국정(國政) 전반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취임 초에 회동했을 때는 ‘역시 이분은 우수한 두뇌, 풍부한 경험,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갖추고 있구나’하고 느꼈었다. 재임 중반, 그리고 후반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총명함이 많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0월5일에 만났을 때는 선거정국을 보는 판단력이 전과는 많이 달라져 나의 중립 자세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부가 중립을 지킬 경우 국민들의 수준과 성향으로 보아 14대(代) 대선(大選)에서는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었다. 나 또한 그렇게 확신했다.
이런 판단을 못할 리 없는 김(金) 총재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연민(憐愍)의 정(情)마저 일었다.
대통령이란 인간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 하늘이 정하는 일이므로 그의 선전(善戰)을 당부했다.
노태우 회고록
보도자료 (하)
제23장 민주화와 자율화의 전면적 확산
▶“언론은 장악될 수 없다”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6·29선언 제5항만큼 내가 명심(銘心)했던 말도 없을 것이다. 언론인들과 야당에 대해서 최대의 자유를 준 것은 나였고 그들로부터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도 나였다. 나도 인간인 만큼 때때로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으나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약속을 떠올리면서 나를 다스렸다.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보장하면 그에 따른 책임과 신중함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5년 안에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날 순 없었다. 민주화는 장구한 시간이 걸리는 과정임을 새삼 깨닫고 나의 성급함을 반성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제도가 바뀌는 것보다 인간이 바뀌는 것은 더 더디다.
나는 언론자유가 민주화의 견인차(牽引車)라고 생각했다.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의 어머니라고 한다. 내 재임기간 중 언론의 자유는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기본권의 보장
나는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주투사가 아니고 민주화를 약속하고 이를 실천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민주화의 핵심적 의미는 언론자유와 기본적 인권의 보장이었다. 국민의 기본권은 선언적이어선 안 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민주사회에선 한 사람의 자유라도 억울하게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대(大)를 위하여 소(小)가 희생되어서도 안 된다. 한국은 반(反)인권적인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하면서 자유민주체제를 키우고 지켜가야 하는 2중의 고민을 안았다. 반공(反共)을 위하여 자유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분명 존재하였다. 6·29선언은 그런 단서(但書)도 폐기하고 선진국 수준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개발연대의 논리와 획을 그은 것이다. 나는 제13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이 점을 강조했다.
제24장 전환기의 經濟, 도전과 응전
▶북방정책으로 열린 한국 경제의 活路
소련 측에 제공한 경협자금에 대해 말이 많지만 실제로는 14억5000만 달러밖에 가지 않았다. 국제교역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한국은 북방외교를 통해 수교한 중국과 동구권에서만 흑자를 보고 다른 지역에서는 적자(赤子)를 보고 있다. 결론적으로 소련에―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빌려 준 차관은 이미 그 이상의 수익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다.
소련 및 중국과의 수교는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외교·국방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의 위상(位相)과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았다. 6공은 민주화와 공산권 붕괴라는 도전(挑戰)에 대해서 경제의 자율화와 북방정책이란 응전(應戰)을 했다. 그 승부의 결과는 대승(大勝)이었다.
▶경제正義와 민주화의 代價
6공화국을 출범시킨 나의 앞에는 ‘민주화’라는 절대적인 과제가 놓여 있었다. 정치적 민주화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단언할 수 없었지만 적잖은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민주화에 대한 욕구는 경제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6공화국은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 가면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경제정의(經濟正義)’는 6공화국 초기부터 강조되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18년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7년의 성장위주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의 분배구조는 이른바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6·29선언과 동시에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요구에 부응(副應)하다 보니 누구라도 경제정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을 만난 것이다.
기업인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당시 노동계(勞動界)의 요구가 우리 경제를 크게 손상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억압을 토대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다가 갑작스럽게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임금상승률도 우리가 선진국을 지향(志向)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싱가포르·대만 등 경쟁국들과 비교해도 크게 오른 것은 아니었다.
▶경제 전환기의 논리
정책의 비중이 민주주의와 경제정의(經濟正義)로 갈 수밖에 없고 가진 이들 쪽에 서 있는 한편이 어느 정도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성장일변도를 달릴 때처럼 노동자들만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경쟁력이 다소 떨어졌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대가(代價)였다. 경제의 효율만을 따지는 사람들은 그것이 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겨 민주화에 따른 코스트(Cost: 비용)를 계산하지 않으려 했다.
▶純外債는 반으로 줄다
5공이 끝나는 시점인 1987년 224억 달러였던 우리나라 순(純)외채가 6공이 끝나는 시점인 1992년에는 110억 달러로 절반으로 줄었다. 1987년 3200달러이던 1인당 국민총소득은 7200달러로 늘어나고 무역 규모도 이 기간 거의 두 배로 증대되었음에도 총 외채규모는 5년 전과 비슷한 428억 달러 수준이었던 것이다.
제25장 구조개혁과 200만호 건설
▶무노동 무임금
나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되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고수하라고 지시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 원칙을 비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비판 자체가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노동운동사를 보거나 미국·유럽·일본 등 어느 나라를 보아도 파업하고 월급 받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었다.
기본으로 돌아가 이야기하면, 노사관계는 계약이다. 노(勞)는 사(使)에게 근로를 제공하고, 사(使)는 노(勞)에게 근로의 대가로 임금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勞)가 사(使)에게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데 사(使)가 노(勞)에 임금을 준다는 것은 노사(勞使)관계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26장 KTX, 영종도 공항, 서해안 고속도로
▶外換위기가 6공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김영삼 정부가 외환(外換)위기로 국가를 부도 위기에까지 몰리게 한 것을 두고 그 원인을 6공화국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부당성은 수치를 비교해 보면 간단하게 밝혀진다.
6공 말의 총외채는 430억 달러, 순외채(純外債)는 100억 달러 내외였다. 그것이 김영삼 정부에 들어가 네 배 가까이 늘었다.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의 총외채는 1600억 달러 가까이 되었는데 나중에 기업들 것까지 합쳐 보니 2000억 달러에 이르렀다.
6공은 경제기반을 견고하게 다진다고 해서 외채(外債) 규모를 줄이는 등 재정(財政)을 건전 상태로 만들고 물가도 다음 정부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임기 말인 1992년에는 인상 요인을 최대한 흡수해 넘겨 주었다. 내 임기 5년간 재정적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1988~1991년에 물가가 크게 오른 것은 과거에 오르지 못했던 전력(電力)요금 등의 공공요금을 많이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들어 경제가 엉망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금융산업을 방만하게 관리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부채가 5년 동안 4~5배나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무턱대고 돈을 풀어 기업들이 멋대로 자금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1991년에 정부는 재벌기업들에 대해서도 핵심업종 3개 이외에는 대출 자체를 중단시켰는데, 김영삼 정부는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를 규제로만 생각해 풀어버림으로써 방만을 자초했던 것이다.
제27장 法질서 확립
▶良心囚는 없었다!
극좌파들을 잡아들인 데 대해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이나 머릿속에 있는 사상을 문제 삼아 처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사상이 밖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범법(犯法) 행위로 나타났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선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다. 제6공화국에선 양심만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양심수(良心囚)는 없었다는 뜻이다.
제28장 轉換期의 교육정책
▶全敎組 不法化
교원들이 노동 3권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관념상 수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교원들의 노조 활동은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며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점에서 학부모들의 비판이 높았다. 더욱이 이른바 ‘참교육’이라는 민중교육론에 입각한 좌경적이고 계급투쟁적인 교육개혁운동은 노동권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교원노조 결성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우리 정치·사회적 여건에 비추어 허용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자 많은 국민들의 여론이었다.
1987년 말 1만2000명에 달했던 교원노조(敎員勞組) 가입 교원수는 정부당국 및 학교 행정가들의 탈퇴 설득과 병행한 중징계방침 천명으로 1989년 말까지 152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탈퇴했다. 미탈퇴 교원들은 1990년 초기까지 전원 징계 해직함으로써 교원노조는 조직이 와해되었다. 정부는 교원노조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모임에 대하여는 그 활동을 지원했으며, 시·도별 교육정상화 촉구 학부모대회가 12개 교육위원회에서 15회 개최되어 1만 9380명의 학부모들이 참석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켜주었고,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전교조를 합법화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전교조의 친북반미(親北反美) 교육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국민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여러 모로 대응하고 있다. 내가 세운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더라면 불필요한 국론(國論)의 소모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30장 언론자유의 보장
▶언론자유의 피해자
율곡사업 역시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의혹을 제기해 놓기만 하고 매듭을 짓지 않는 바람에 아직도 비리(非理)가 있는 양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일과 관련해서는 언론뿐만 아니라 이회창(李會昌) 당시 감사원장 역시 당당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조사 결과 잘못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의식해서인지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제32장 靑瓦臺 생활
▶평범한 주부였는데…
그럼 여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모양이나 행동이 예쁘고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 둘째는 나서지 않고 겸손해야 한다. 셋째는 말이 적어야 한다. 넷째는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일게 하는 태도를 갖춘 여성이라야 한다.
여자들끼리는 잘난 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첫째, 남의 앞장을 서지 마시오.
둘째, 몸치장을 수수하게 하시오.
셋째, 말을 적게 하시오.
넷째,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마시오.
아내는 내 당부를 듣고는 “평소에도 그렇게 하려고 애쓰던 덕목(德目)들이므로 문제될 게 없으나, 대중 앞에 나서면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고 그저 가슴이 마구 떨리기만 하니 큰 일”이라고 했다.
▶內助의 원칙
하지만 대통령 부인에 대해서는 대통령처럼 명시된 조문이 거의 없었다. 제대로 확립된 관례가 없어 대통령 부인의 바람직한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적절한 원칙도 세워야 했다.
당사자인 아내는 훨씬 더 신경이 쓰였겠지만 원칙을 정하는 데는 대통령인 내 뜻이 가장 중요했다. 나는 이 사안이 매우 미묘하다고 생각했는데 전임자에게 물어보기도 어렵고 해서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했다.
첫째, 대통령 부인은 남편으로서의 대통령을 내조(內助)하는 것이지 별도의 독립된 기능은 갖지 않는다.
둘째, 별도 직책을 갖지 않는다.
셋째, 대통령과 분리된 별도의 공식 행사를 주최하지 않는다.
넷째, 공적(公的) 사항이 아닌,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일만 내조(內助)한다.
다섯째, 관저생활을 총괄한다.
▶아내의 싫은 소리
나는 저녁이 되면 심신(心身)이 피곤해져 이야기하고 싶은 의욕이 나질 않았다. 아내가 “오늘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제게 참고가 되는 이야기를 해 주세요”하면 나는 “오늘 별일 없었소. 이야기할 거리도 없어요”하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고 건성으로 흘려버리곤 했다.
내 경우에는 어떤 이야기건 진지하게 듣기 때문에 장관이나 비서관들이 듣기 싫은 보고도 서슴없이 하곤 했다. 신문에서도 언론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으므로 비판할 것은 모두 거리낌 없이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내에게만은 예외였다. ‘영부인은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내가 싫은 소리를 하면 가만히 듣지를 못했다. 저녁이 되면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싫은 얘기를 내게 전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 태도는 달라졌다.
나는 외부의 어떤 사람에게도 싫은 소리를 한다고 짜증을 내본 적이 없으나 집사람이 싫은 소리를 하면 짜증을 냈다.
“여보, 그런 좋지 않은 소리는 보고도 받고 신문에서도 보았소. 하루 종일 좋지 않은 것만 보고 들으니 머리가 터질 것 같소. 당신이나마 좋은 소리로 나를 위로해 줄 수 없겠소?”
그러면 아내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생활이란 게 이렇게 고달픈 것인가 하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따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술을 마시며 풀어 버리곤 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모든 고달픔과 스트레스를 혼자 삭여야 했다.
다행인 것은 처제(妻弟·금진호 전 장관 부인)가 성격이 부드럽고 원만한 데다가 재덕(才德)을 겸비해 언니인 아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처제가 없었다면 대통령 부인으로서 안게 되는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33장 통일을 위한 遠交近攻
▶‘개방=통일’이 나의 신념
나는 전쟁을 통하지 않고 북한을 개방시킬 수만 있다면 통일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믿었다. 어떤 공산주의 국가이건 개방되면 변하게 마련 아닌가. ‘개방=통일’이라는 것이 내가 추진한 대북(對北)전략의 기본 개념이었다.
▶公式채널, 幕後채널
나는 두 사람의 역할을 나누었는데,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외교·안보 사항은 김 수석이 관장하고, 특사를 보내거나 비밀접촉을 해야 하는 비공식적인 일들은 박 장관에게 시켰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인다면, 김 수석은 북방정책의 종합참모로서 나와 함께 북방외교의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따라서 김 수석은 박 보좌관의 역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후에 어떤 기사에는 북한과 동구권은 박 보좌관이 맡고, 그 외의 서방외교는 김 수석이 한 것으로 적고 있는데, 지역을 기준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가 안 되어 있었으므로 김 수석보다는 박 장관이 나서서 비밀리에 접촉을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북방외교의 시험대가 된 헝가리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박 장관이 수십 차례 비밀 회담을 한 끝에 그로스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수교에 합의한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면 북방정책 과정에서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김 수석과 박 장관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그 일에 관여한 경우가 많았다.
제34장 한국-헝가리 修交
▶東歐의 문이 열리다
보름 후인 (1988년) 8월26일 한국과 헝가리는 대사급 상주대표부 개설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때 우리가 보안을 유지하느라 이 사실을 공식발표 48시간 전에야 미국 측에 통보해 주었는데 이 때문에 미국 측은 섭섭해했다. 이 일이 과장되어 미국 측이 나의 북방외교를 못마땅해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 후 미국 측은 나의 북방외교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제35장 東歐 민주화 혁명의 현장에서
▶올림픽과 민주화가 외교 자산
북방외교를 뒷받침한 두 기둥은 서울올림픽의 성공과 한국의 민주화였다. 서울올림픽은 또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과격하게 치닫지 않게 한 제동장치였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나 정부 측이나, 서울올림픽을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일념이 민주화 운동 측에는 폭력적으로 흐르지 않게 했고, 정부 측에 대해서도 군대 동원과 같은 비상수단을 쓰지 않도록 했다.
▶브란트가 전해 준 고르바초프의 곤경
브란트: 그런데 각하께서 민주화를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데, 서독 출발 전에 예술인 몇 사람이 찾아와서 한국의 어느 화가가 보안법관계로 연루되어 있다면서, 선처를 당부해 달라는 말을 했는데, 국무총리하고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니, 그때 그 부탁을 드려도 될는지요?
나: 그렇게 하세요.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 한국에서 단순히 정치적 신념이나 이념 때문에 법의 제재를 가하는 경우는 없다는 점입니다. 확실히는 몰라도 말씀 들으신 그 화가란 사람도 그 작품이 폭력행위 현장에서 이용됐든지, 혹은 폭력행위를 유발하는 데 이용됐든지 하여, 법률 위반이 됐을 것입니다.
▶수많은 접촉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기까지는 여러 채널을 통해 수많은 접촉이 있었다. 우리 쪽에서는 김종휘 외교안보수석과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이끄는 두 파트에서 일을 나눠 했다. 두 사람이 역할을 놓고 다투었다는 말이 있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일만 하면 되니까 그럴 소지가 있을 수 없었다.
초기에는 박 보좌관이 도쿄 주재 잡지사 기자로 위장한 소련 정보부(KGB) 요원을 주로 접촉했고, 김 수석이 관여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관계가 깊어졌을 때부터였다. 내가 지시를 내리고 그에 대한 결과를 보고받으면 김종휘 수석에게 정리를 시켰다. 김 수석은 그것을 기초로 구상하고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곤 했다.
▶密使 도브리닌
회담이 있기 두 주일 전인 그해 5월 하순에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외교수석보좌관인 아나톨리 도브리닌 전 주미대사를 한국에 보내 비밀리에 나를 만나게 했다.
그는 이 같은 고르바초프의 결정이 당이나 군부, 외무부의 반대 속에 비밀리에 내려졌으므로 어떤 루트를 통해서건 확인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약 한국 측이 이를 어기고 확인하려고 들면 적잖은 파문이 일어나고 그렇게 될 경우 고르바초프는 부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희대의 사기극?
그래서 도브리닌이 전하는 고르바초프의 메시지 하나만을 믿고 한소(韓蘇) 정상회담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우리 측은 즉시 소련 측과 접촉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제의했는데 소련 측이 도브리닌을 보내 샌프란시스코가 더 좋겠다고 회답해 온 것이다.
▶화 난 셰바르드나제의 선물
코뮈니케의 원안에는 양국 수교일이 ‘1991년 1월1일’로 적혀 있던 것을 셰바르드나제가 양국 외무장관 회담 현장에서 펜으로 ‘1990년 9월30일’로 고쳐 쓴 것이다.
셰바르드나제는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영남(金永南) 외교부장 등을 만나 한국과의 수교 결정을 통보했다가 북한 당국자들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무례(無禮)를 당해 감정이 무척 상해 있었다고 한다.
▶韓蘇수교의 성과
숫자로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소련이 북한에 수출하는 석유가격을 공산권 특별가격에서 국제시세로 올림으로써 발생하는 추가 부담이 북한의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비행기·로켓 등 고도정밀무기의 지원 삭감이 우리 한국의 국방비를 절감해 주는 효과 등은 엄청난 것이다. 비행기 값만 하더라도 얼마나 되겠는가? 경협(經協) 이후 북한에 대한 소련의 전투기 공급은 즉각 중단되었다. 북한에 대한 무역특혜를 철폐하고 현금지불을 요구했다.
그 이후 소련에서는 미그 29기보다 최신형인 수호이 전투기를 북한에 보내기로 했다가 이를 중단했다. 기름과 최신무기의 공급도 거의 중단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내 퇴임 이후 한국 정부가 한-러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점이다. 어렵게 수교를 했는데 러시아가 고개를 돌리지 않게 했어야 했다. 러시아에 지원한 경협자금의 상환문제가 한국과 러시아 관계에 장애물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한국이 소련에 제공한 14억7000만 달러의 경협자금은 분명 큰돈이지만 그 돈의 상환이 지연된다 해도 우리와 러시아의 관계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돈독히 유지되도록 해야 했다. 극동 시베리아 쪽의 보고(寶庫)를 눈으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
고르바초프는 머리가 영민하고 순발력이 있었으며 지혜로운 안목을 지닌 지도자였다. 무엇보다도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동구권에서 공산당 정권이 밀려나도 소련 군대를 보내지 않았으며 소련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武力)으로 막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의 비극이었으나 소련 및 동구 공산체제가 무너질 때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공은 거의 전적으로 고르바초프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가 경제를 너무 몰랐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개혁을 하게 되면 경제발전도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정치개혁을 하면서도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 혼란을 가중시켰다. 만약 그가 시장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만 가졌더라도 소련 경제가 그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韓人동포들의 집단이주 문제
나는 정상회담 내내 옐친으로부터 오로지 러시아의 이익만을 추구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옐친 대통령과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韓人) 동포들의 집단이주 문제를 상의했다. 30만 명을 헤아리는 러시아 내 우리 동포들은 원래 연해주에 있다가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을 연해주의 한 지역으로 끌어 모으자는 것이 나의 기본 구상이었다.
▶미국의 적극 협조
미국이 내게 북방외교에 신중을 기할 것을 충고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미국은 나의 정책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믿고 지원해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미국은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제37장 北京으로 가는 길
▶金宗輝-朴哲彦이 큰 역할
소련과의 수교과정에서처럼 중국과의 관계개선 과정에서도 내가 직접 일을 시킨 사람은 김종휘(金宗輝) 외교안보수석과 박철언(朴哲彦) 장관뿐이었다. 공식적인 채널은 김 수석이 담당했다. 박 장관은 비공식 라인이었는데 헝가리와의 수교 때와 북한과의 비밀접촉 때 활약했다.
그런데 중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자칭 ‘특사’(特使)들이 상당히 많았다.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 친서를 전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는 중국을 상대하면서 청와대 수석이나 보좌관 이외의 사람을 통해 친서(親書)를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서를 작성할 때도 어떤 경우건 김종휘 수석의 손을 거치게 했다. “노 대통령이 취임한 지 8일 만에 중국 태생의 한의사 한 사람을 중국에 비공식 특사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와전(訛傳)된 것이다.
▶天安門 사태 비난에 부시와 대처 설득
1989년 6월4일 중국 베이징에서 천안문(天安門)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 영국의 대처 총리 등 여러 사람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다. 그들은 인권문제라는 차원에서 상당히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당시 미(美) 의회도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그들에게 중국의 역사와 문화·국민성 등을 설명하고 중국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제38장 韓中수교의 幕前幕後
▶“중국은 각하의 품안으로 걸어 들어올 것입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할 때에도 나는 적극적으로 중국을 지원했다.
그 해 10월17일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이 나를 찾아왔다.
“제가 보기에 한국이 중국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중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것이 더 큰 것 같으며 대(對)북한 관계도 각하의 뜻대로 풀려 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결국은 각하의 품안으로 걸어들어 오는 날이 올 것입니다.”
▶대만과 중국 사이의 선택
한중 수교는 중국 측이 먼저 제의한 것이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간절히 바라던 것을 중국 측이 제의해 왔는데 받아들이지 않거나 늦출 이유가 없었다.
▶중국 지도자들 속에 녹아 있는 역사의 무게
나는 10여 년간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은 모가 나지 않고 화합을 잘 이루며,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과 능력이 몸에 배어 있고, 국제적인 감각이 풍부한 사람들이 지도자군(群)을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는 과학기술계 출신이 많아서인지 선진화(先進化)에 중점을 두고 이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키우는 경향이 뚜렷해 보였다.
제39장 남북대화시대의 開幕
▶“한국의 양해 없이 북한과 상대하지 말라”
건국 이래 우리가 줄곧 지켜온 대북(對北)정책은 ‘남·북한 문제는 남북한이 해결한다’는 당사자 해결 원칙이었다. 나는 미국·일본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남북관계, 통일문제는 우리가 해결한다. 미국과 일본은 남북대화에 유리한 여건만 조성해 달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제쳐놓고 북한과 직접 협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내가 취임한 이후 우방(友邦) 가운데 어느 나라,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제쳐놓고 북한과 직접 협상하지 않았다. 북한이 제안한 남한·북한·미국의 3자회담이 성사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원칙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이후 무너지고 말았다.
제6공화국 시절에는 남북기본합의서뿐만 아니라 비핵화(非核化)공동선언까지 우리가 직접 주도했다. 그런데 다음 정부에 들어가 핵협상에서 우리는 빠지고 미국과 북한이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협의하기는커녕 단독으로 회담을 해놓고 몇 십억 달러에 이르는 청구서만 내밀었다.
내 재임 중에도 북한은 우리를 제외시키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려 했다.
이 기간 중 단 한 차례 미북(美北) 고위급회담이 있었는데 캔터 미 국무부 차관과 김용순(金容淳) 대남(對南)담당 비서의 회담이었다.
1991년 가을 미국은 캔터 차관과 북한 외교부 강석주(姜錫柱) 부부장의 회담을 갖고 싶다는 뜻을 우리 측 김종휘(金宗輝) 수석에게 타진해 왔다. 김 수석의 보고를 받고 우리는 “좋다, 단 한번이다. 그러나 상대는 강석주 부부장이 아닌 김용순 비서로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양해했다.
우리는 강석주 부부장보다는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김용순과 대화하게 함으로써 “미국이 단독으로 북한과 대화를 할 수 없다. 남북한 당사자 회담이 한반도 해결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김일성에게 확실하게 통보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미북 간 대화를 통해 북한에 ‘남한과 접촉하는 길밖에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려 했던 것이다.
▶6者회담 반대의 이유
제6공화국 시절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희망하면서 우리 쪽에 의견을 물어온 일이 있었다. 그는 한국 측의 동의를 받지 않고 그냥 가는 것이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측의 의사를 타진해 왔다. 우리 측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자 그는 방북(訪北) 의도를 철회했다.
▶“김일성은 유죄, 꼭 전하라”
나는 9월6일 오후 4시 연(延) 총리 등 북한 측 대표단 열 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남북한 문제 전반에 대한 우리 측 입장을 설명하고 남북 정상(頂上)회담의 조기(早期) 개최를 제안했다.
나는 연 총리와 개별면담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김일성 주석은 6·25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6·25는 우리 민족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 피를 흘리게 했으므로 그만큼 그 죄의 당사자다. 나는 당시 학생이었다. 나 자신 전쟁터로 나가 싸웠다.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죽었다. 나는 분명한 피해자다. 이 엄연한 비극이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지워지겠는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을 뉘우치고 무언가 죄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양극(兩極)으로 대립하고 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비극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남북한 간에 협력관계가 이루어져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긴다면 죄를 벗는 큰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김 주석이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나는 아직 젊다. 나는 앞으로 누구와도 만날 기회가 있다. 하지만 김 주석은 노령(老齡)이어서 그럴 기회가 별로 없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도 정상회담은 당신들 주석을 위해서도 백 번 좋은 일이다. 그러니 이 뜻을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 달라.”
연 총리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예, 알겠습니다. 꼭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본 연형묵은 착하고 무던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진실로 김일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김일성이야말로 이 엄청난 역사적 비극을 낳은 당사자가 아니던가. 결자해지(結者解之)를 해야 하는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김일성, “고려연방제 해야 한다” 되풀이
10월18일 오후에는 김일성 주석이 강(姜) 총리를 금수산 주석궁으로 초청해 20분간 단독면담을 한 후 대표 일행과 10분간 공동면담을 했다.
사실 우리측 대표들은 냉랭해진 회담 분위기를 감안할 때 김 주석과의 면담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회의적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북측은 예정대로 면담을 진행시켰다.
이날 나의 지시에 따라 강 총리가 고위급회담의 한계성을 거론하며 “두 정상께서 만나서 평화협정과 불가침선언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시면 좋겠다”고 하자 김 주석은 “총리회담에서 모든 것이 합의된 후에 노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해야 의미가 있지 그 전에 만나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 개의 지방정권을 두고 한 나라 한 민족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불쑥 고려연방제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제42장 南北 막후 ?話
▶김일성의 ‘이상한’ 남북 정상회담 제의
제6공화국 시절 남북 정상(頂上)회담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북한 측의 여건이 덜 갖춰졌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자신감이 생기고 무언가 플러스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와야 하는데 실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하자”는 원칙에만 동의하면서 자꾸 핑계를 댄 것이다.
김일성은 단 한번 나를 북한에 초청한 적이 있었다. 1992년 봄 윤기복(尹基福) 조평통 위원장이 김일성의 특사로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 초청 시기가 김일성의 생일과 맞물려 있었다.
게다가 북한 측 비밀창구 역할을 해온 박철언(朴哲彦)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이야기로는 김일성의 초청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나는 정상(頂上)회담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모양새가 너무 나쁘다고 판단해 초청을 거절했다. 모양새를 구겨 가면서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밀창구
나는 북한의 오판(誤判)을 막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정상회담을 생각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전의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全斗煥) 대통령도 그랬을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단번에 합쳐지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북한이 우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했다. 김일성이 서울에 와서 이곳저곳을 보게 되면 감히 전쟁을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일성이 오판(誤判)을 해서 우리나라를 전쟁의 불바다로 만들어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만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나는 나라를 책임지면서 이 점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남북을 오간 사람들
그해 12월23일에는 스티븐 솔라즈 미 하원의원이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나를 예방했다. 그는 첫 인사부터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김영남 등과 7시간30분 동안 면담했는데 김일성 등 북한 측 인사와 대화를 하는 것이 마치 치과환자가 마취를 하지 않고 이를 뽑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합니다”라고 말했다.
▶남북교류의 窓口 단일화
대북(對北)관계에 있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나 정부가 하고 민간이 해야 할 일은 민간이 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민간도 정부를 거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란 위험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통일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아 모든 것을 안이하고 낭만스럽게 보는 경향이 강했다. 남한의 정치인·재야인사·학생·문인 등이 앞다퉈 ‘교류하자’, ‘대화하자’며 평양에 가겠다고 법석을 떠니까, 만날 사람을 고르고 만날 시기를 정하는 ‘칼자루’를 북한이 쥐게 된 것이다.
▶내가 만난 북한 인사들
내가 만난 북한사람 중에 특별히 ‘가능성이 있겠다’고 느낀 사람은 김달현 부총리였다. 김 부총리는 자신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을 줄 알았다. 나는 그의 그런 면모를 보면서 “채찍보다는 당근을 많이 주면 효과가 있겠구나”하고 느꼈다.
김종휘 수석 역시 그가 가장 개방적이고 상당히 실무적인 힘도 갖고 있다고 했다. 퇴임 후에 들으니, 김달현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 개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김정일한테 미움을 받고 한직(閒職)으로 밀려났고, 그 후 자살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산업 시설을 시찰하고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고 문제의식도 생겼을 것이다. 이것이 그에겐 비극의 단초가 된 셈이다.
▶조작은 없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북풍(北風)사건이 불거지자 “6공화국 말기에 일어났던 이선실 사건이 조작극이 아니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당시 여당의 대통령 후보인 김영삼 씨를 당선시키기 위한 선거용이 아니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115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KAL기 폭발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다.
이선실 사건은 여·야 할 것 없이 정치인이 많이 관련되었다고 하지만 정책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청와대에서 논의될 성질의 사안은 아니었다.
1992년 10월 당시 이현우(李賢雨) 안기부장이나 정형근(鄭亨根) 안기부 1차장 선에서 다뤄졌던 이 간첩 수사 사건에 대해서 김종휘(金宗輝) 수석이나 다른 청와대 참모들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했다.
제43장 한반도 非核化 선언
▶非核化 선언, 核不在 선언
그때 마침 김종휘 수석으로부터 “미국이 전(全)세계적으로 배치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한국 내 전술 핵무기도 곧 철수할 것 같다”는 정보 보고를 들었다. 나는 “그러면 됐다. 미군의 핵무기 철수 방침을 정책적으로 활용하자”고 결심했다. 나는 1991년 9월 부시 대통령이 ‘핵 군축 선언’을 하기 직전 두 차례에 걸친 정상(頂上)회담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밝히고 곧 바로 비핵화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언론은 핵무기가 여러 군데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한 군데뿐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나의 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협조를 해주었다. 북한의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먼저 주한미군에 배치된 핵무기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부시 미 대통령이 전(全) 세계적인 전술 핵무기 철수 방침을 추진하고 나섬으로써 절묘한 타이밍을 잡은 셈이었다. 미국 측은 내가 주도해서 비핵화 선언을 내놓을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노력 자체가 안보를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주한미군사령관, “전술핵이 있습니다”
미군의 한국 내 전술핵 배치는 과거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해외 핵무기 배치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NCND: Neither Confirm, Nor Deny)는 미국의 오랜 정책에 따라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사실을 공식으로 알게 된 것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며칠 안 되어서였다.
릴리 주한 미 대사와 메네트리 미 8군사령관이 “매우 중요한 사항에 대해 노 대통령께 보고하겠다. 여기에는 김종휘 수석이 통역을 하고 일절 다른 사람을 배석시키지 말아 달라”고 연락을 해왔다. 그 자리에서 메네트리 사령관은 “대한민국에 전술핵이 있습니다”라고 알려줬다. 미국 측은 한국 국방부 장관에게도 공식적으로 남한에 핵무기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았고 대통령인 내게만 직접 보고를 통해 확인해 주었다.
▶부시에게 “조건부 전술핵 철수 수락” 제안
주한미군이 한국 내에 갖고 있는 핵무기의 철수를 맨 처음 거론한 것은 나였다. 1991년 7월2일 오전(한국시간 2일 밤) 나는 부시 미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頂上)회담을 하면서 한반도 핵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식으로 제기했다.
제46장 북방외교의 철학
▶북방정책 추진의 원칙
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았다.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해결하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큰 틀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했다. 때문에 북방외교는 소련과 중국, 남북한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가면서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소련을 놓고도 단지 소련만이 아니라 중국·일본·미국·남북한 간의 관계를 모두 고려하면서 전략과 구상을 세웠다. 최고통치자로서 구체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그 효과까지도 철저하게 분석한 후에 큰 틀 안에서 결정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국 외교를 종래의 추종(追從)외교에서 자주(自主)외교로 전환시켰다. 나는 냉전 시절부터 ‘자유진영에 속한 나라들이 공산진영의 나라들과 마음대로 교류하고 수교하고 다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하고 생각했다. “남의 눈치 보고, 추종하고, 이게 무슨 자주 외교권을 가진 나라인가. 그러고도 민족의 자존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自問)하곤 했다. 북방외교에 내재(內在)된 나의 기본 철학은 바로 이것이었다.
제47장 退任과 歸鄕
▶인수인계할 기회 없었다
나는 그가 내 뜻에 대략적으로라도 동의하고 그렇게 따르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일어나는 현상은 내 기대와는 너무나 어긋난,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부터 취임할 때까지 석 달간 청와대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세부적으로 인계해야 할 일, 또 다짐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게 없었다.
물론 나 자신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 때까지 청와대를 방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때는 경우가 달랐다. 내 전임자가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나의 방문을 사절하는 대신 그가 우리 사저(私邸)를 방문했다.
어쨌든 김 당선자와는 2개월 반 동안 대화가 끊긴 채 1993년2월25일 대통령 취임식을 맞았다. 새 대통령 내외는 취임식 당일에야 청와대를 공식 방문했다. 그러나 극히 의례적인 방문에 지나지 않았다. 함께 앉아 차 한 잔 나누는 정도에 불과했다. 집무실과 별실을 소개하고 한두 가지 중요 사항을 인계하면서 몇 마디 담소한 것이 고작이었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전율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해 대한 자책감(自責感)을 느꼈다. 투쟁적 구호로 점철된 취임식이 끝날 무렵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수많은 관중들을 향해 양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나는 순간적이지만 그의 취임사를 듣고 불안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많은 관중들에게 안도감을 안겨 주고 싶은 생각에서 의식적으로 그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나는 김 대통령의 참 모습이 취임사와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아내와 함께 연희동 집으로 향했다.
▶무기도입 과정은 깨끗했다
나는 무기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티끌만 한 의혹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6공화국에서는, 국가안보를 위한 율곡 사업을 통해 비자금이나 통치자금을 조성하지 않았다. 나는 외국의 방위산업체 사람들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청와대가 무기 구입에 관여한 것처럼 보도하곤 했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군(軍)이 차세대 전투기 도입 시 F/A-18 전투기를 계속 건의했는데, 청와대가 반대해 F-16으로 번복 결정했다’는 식으로 보도한 적이 있는데 이 대목은 사실과 다르므로 여기에서 명백하게 해명하고자 한다.
▶F-16 선정의 진실
공군은 F-16의 공대공 미사일 장착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기 때문에 나는 외교안보수석실의 부정적인 검토 의견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틀림없는가, 기술이전 조건을 틀림없이 지킬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사항을 다짐받으면서 F/A-18로 결재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 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은 “그 조건들은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그 후에 “F-16의 문제점이 해결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가격에 이상이 없다는 두 번째 확인이 있은 한 달 후인 1990년 9월, 맥도널 더글러스 측에서 기종 결정 당시 총 50억 달러로 규정했던 F/A-18 구입 가격을 62억 달러로 높여 제시해 왔다. 이는 달러 베이스로는 24% 상승이지만 환율 변동까지 고려하면 원화의 국방예산상 약 50%가 늘어나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가격을 절충하고 기종(機種) 선정을 재검토한 것이다.
이종구 국방장관과 한주석 공군참모총장은 1990년 10월 내게 세 가지 대안을 보고했다.
첫째 전투기 대수를 120대에서 80대로 줄이는 안, 둘째 구매 기간을 늘리면서 도입을 지연시켜 예산을 확보하는 안, 셋째 국내 조립을 포기하고 완제품을 도입하는 안 등이었다.
나는 이(李) 장관에게 “3개 안 모두 문제가 있으므로 기종(機種) 선정, 획득 방법 등 모든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기종 선정 작업을 국방부와 공군에서만 하지 말고, 합참·국방과학연구소·국방연구원 등 관계부처의 전문가들도 참여시켜 광범위한 의견을 들으라고 당부했다.
그 결과 1991년 3월 국방부에서 ‘F-16을 들여와도 문제가 없다’는 수정 건의가 올라왔다. 얼마 전에 있었던 걸프전에서 F-16의 우수한 성능이 입증되고, F-16이 새로운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암람’을 장착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F-16은 가격 면에서 F/A-18보다 15억 달러가 적어 비용 대 효과 면에서 유리하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다시 그 건의를 받아들여 F-16으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F/A-18은 훌륭한 최첨단 전투기이고, 만약 맥도널 더글러스가 가격을 인상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도입했을 것이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치적 흑심이나 리베이트에 관심이 있어 F-16을 결정하려 했다면 당초부터 F-16을 택하지 무엇 때문에 복잡하게 바꾸려 했겠는가.
율곡사업과 관련한 해외 발주에서 과거에는 리베이트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그러나 5공화국 시절 전두환 대통령은 “국제관례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관례가 있다면 그 돈을 받지 말고 그만큼 원가를 낮추라”고 지시했다.
나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참으로 전(全) 대통령이 잘한 조치’라고 생각하고, 참모들에게도 여러 차례 그 같은 말을 했다.
그 후 김영삼 대통령 정부에서 율곡사업에 의혹이 있다며 강도 높은 감사, 수사를 했지만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다.
▶“(YS,) 권력 잡자마자 TK 사냥”
"YS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내 가슴에 비수(匕首)를 꽂겠는가. 그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바라지는 않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30년간 군부(軍部) 출신들에게 억눌려 온 정치세력이 권력을 잡고 보니 그간에 억눌렸던 분노가 터진 것이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피해를 입고 있는 당사자가 김영삼 정권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선다는 것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48장 國政 리더십에 대하여
▶德이 있는 지도자
시대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 있다. 평상시에는 덕(德)을 갖춘 지도자가 바람직하지만, 전시(戰時)에는 유능한 군사전략가를 요구하고, 혼란기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
나는 어떤 시대건 지도자에게 있어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바로 덕(德)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강성(强性)은 아니었다. 남을 누르고 앞서 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럭비를 예로 들어도 개인 플레이가 아닌 팀 플레이에 그 정수(精髓)가 있질 않은가. 리더일수록 팀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믿어 왔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내가 속한 조직이 발전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간단히 정리하면 ‘화합’과 ‘인내’가 내 인생의 대표적인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화합에서 양보가 나오고, 인내에서 포용이 나온다고 믿는다.
민주화의 출발점이 된 6·29선언, 야당과의 연합을 꾀한 3당 합당, 그리고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한 노사정책, 적대(敵對)관계에 있어 온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나로부터 이뤄진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은 바로 이 ‘화합’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것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할머니와 어머니의 공력(功力)으로 태어났다는 출생의 의미에서 얻어진 ‘베풂’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만난 스님들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라. 그리 하면 채워질 것이다”는 말씀을 자주 들려 주셨다.
나의 이런 뜻을 담아 어느 참모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 ‘참·용·기’, 즉 ‘참고, 용서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친인척 관리
내가 언제나 미안함을 금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친인척과 친지(親知), 그리고 학교 동기와 선후배, 고향 사람들이다.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제대로 챙겨 주기는커녕 관심조차 기울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불이익을 당한 사례까지 있었다. 친인척 가운데 능력 없이 어떤 직책을 받거나 큰 돈을 번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부할 수 있다.
처남인 김복동(金復東·육사11기·육사교장·예비역중장·광업진흥공사 사장), 동서인 금진호(琴震鎬·5공화국 상공부 장관) 같은 이들은 능력이 출중한 데도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직(公職)에 중용하지 못했다.
그러면 “박철언(朴哲彦)은 왜 등용했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나는 측근들에게 “박철언은 친인척 개념에 넣지 말라”고 이해를 시켰다.
굳이 따지자면 처가쪽으로 먼 친척(처고종사촌)이긴 해도 그보다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시절부터 공직에 기용되었던 사람이다.
제49장 정치자금
▶原罪
나는 1995년 11월 수감 직전에 발표한 ‘국민에 드리는 말씀’을 통해 “나 혼자 모든 책임을 지고 어떤 처벌도 나 혼자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이후 정치자금과 관련해서는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다. 인터뷰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이제 회고록을 작성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는 마당에 사실관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언급하는 내용으로 인해 또 다른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역사와 국민 앞에 내 인생과 철학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남겨 놓는 진실된 술회라고 믿어주었으면 한다.
▶정치자금 모집의 원칙들
5공화국 시절 통치자금은 집권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지 않았나 싶다. 나 자신 5공화국에서 공직(公職)을 맡고 있는 동안 자금조성에 관여한 일은 없다. 내가 느낀 분위기가 그렇다는 점을 기술할 따름이다. 5공화국 시절의 자금조성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 이권(利權)을 전제로 한 자금은 받지 않는다.
2. 제공되는 자금에는 조건을 달지 않는다.
3. 외국기업인이 수주(受注) 대가로 제공하는 커미션은 받지 않는다(대신 원가에서 그 액수만큼을 깎게 한다).
이런 원칙은 과거에 비해 진일보(進一步)한 것으로 보인다. 제5공화국은, 외국기업의 자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가 말썽을 빚은 일본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았다.
나는 6공화국에 들어서서는 앞의 원칙에 몇 가지를 추가했다.
1. 재무제표(財務諸表)가 나쁜 기업
2.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기업
3. 정치자금 헌납으로 기업운영에 지장을 초래하는 기업
이런 기업들로부터는 정치자금을 일절 받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런 뜻을 몇몇 측근들에게 주지(周知)시켰다.
<<이하 49장은 발췌 생략. 全文 참조>>
제50장 따뜻한 눈으로 역사를 보자
▶과거 부정, 자기 부정
우리 사회풍조 가운데 ‘어용(御用) 기피증’이라는 병이 있는 것이었다.
교수 언론인 등 식자(識者)들은 ‘저 사람은 어용’이라는 낙인(烙印)이 찍혀버리면 사회적 생명이 끊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잘못된 것은 비판하고, 옳은 정책은 밀어 주고, 그 정책이 시행 과정에서 차질을 빚는다면 그것을 지적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학자와 식자(識者)들의 도리요 사명이거늘, ‘어용’이라는 낙인을 두려워해 몸을 사리거나 비판만 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産母를 부정한 金泳三 정권
이런 감정이 복 바쳐 오를 때도 있었다.
‘오호라, 국민들이여! 특히 식자들이여!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 위대한 일을 이룩한 기성세대를 매도하고 부정하고 죄인시(罪人視)하는가! 서글프고 슬프도다.’
위대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말년(末年)에 측근의 잘못으로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해서 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바지한 업적, 광복 후 혼란기를 극복하며 건국한 업적, 그리고 투철한 반공이념으로 김일성의 남침(南侵)을 좌절시킨 업적을 없었던 일처럼 역사에서 지워 버릴 작정인가?
4·19 이후에 1년간이란 단명(短命)으로 끝난 장면(張勉) 내각을 무능한 정권이라고 해서 버릴 것인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군사혁명, 독재, 장기집권을 했다고 해서 국민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조국 근대화에 불을 붙여 경제발전을 성공시켜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진 업적을 없애 버릴 수 있는가?
10·26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난국(難局)을 극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약속대로 단임(單任)만 하고 물러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군사반란이라는 죄목으로 역사에서 지워 버릴 셈인가?
제6공화국은 6·29선언의 약속에 따라 여야 합의로 국민투표에 부쳐 개정된 헌법에 의해 출범했다. 그 헌법에 따라 국민들이 나를 대통령으로 직접 선택했다.
그럼에도 집권당인 6공화국의 민정당(民正黨)과 합당해 민자당을 만들고 그것을 모체(母體)로 출범한 김영삼(金泳三) 정권이 산모(産母) 역할을 한 나를 군사반란이란 죄목을 뒤집어씌워 단죄(斷罪)해 역사의 표면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가?
▶美化도 自虐도 필요 없다
우리가 이룩한 일들은 너무나 많다. 그것들을 차곡차곡 챙겨서 우리가 쌓아올린 탑을 확인하자. 그것을 이룩한 우리, 서로에게 참으로 수고했노라고 위로하자. 성취한 보람을 함께 나누자. 후세들에게 우리가 이룩한 것이 이것이라고 떳떳하게 물려주자.
보도자료 (상)
제6장 유신과 윤필용 사건
▶윤필용 수경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실언한 것을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이 잘못 전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두환 공수특전1여단장도 같은 생각을 했다.
▶강창성 개인적 복수심에서 하나회를 과장 발표, 여론 오도했다.
나중에 박 대통령도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유능한 장교들 희생시키는 것 알고 조사 중단시키고 보안사령관 직에서 해임시켰다.
제7장 공수여단장 시절
▶공중낙하 합동결혼식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멋진 행사가 있었다. 1975년 4월19일에 치러진 28쌍의 공중낙하 합동결혼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사관들 중에는 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아이까지 낳고 사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부모와 친인척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이 일어날 소지가 없지 않았다. 나는 ‘이들에게 떳떳한 가정을 만들어 주자. 그러기 위해서는 만인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을 올려 주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대대장들에게 “해당 인원을 파악하고 여단장이 직접 주례를 서는 훌륭한 결혼식을 올릴 터이니 이 같은 취지를 당사자와 부모들에게도 설명하고 동의(同意)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파악해 본 결과 새로운 신랑·신부를 합해 모두 28쌍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결혼식을 생각해 냈다. 결혼식장을 행주나루 백사장에 마련하고 주례인 나를 비롯한 신랑 28명 전원이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백사장에 꽃다발을 안고 서 있는 신부에게로 날아가는 시나리오였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하늘이 우리들을 축복해 주리라 믿었다.
이색(異色) 결혼식이라는 소문이 퍼져 TV를 비롯한 언론사 기자들이 몰려오고 이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아침엔 날씨가 잔뜩 찌푸려 걱정을 했는데 오전 10시가 지나면서부터 날씨가 화창하게 개고 바람도 잔잔해졌다. 우리는 함께 비행기를 타고 결혼식장을 멀리 한 바퀴 돈 후 나를 선두로 해서 결혼식장을 향해 뛰어내렸다. 알록달록한 낙하산 29개가 나비처럼 꽃다발을 안고 있는 신부 쪽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제8장 경호실과 차지철
▶대통령 측근들
각 부처 장관이나 지방행정 책임자들이 보고하고 박 대통령이 지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 대통령은 조직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는 데다 18년간 국가를 통치해 온 관록이 있어서인지 보고자들보다 내용을 더 깊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부실(不實)한 보고는 용납될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의도를 제대로 받들고 인정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우수한 사람이 노력을 많이 해야 했다. 공무원 사회는 자연스레 엘리트 관료화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에 주도권을 잡았던 혁명주체들은 이제 2선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젊은 엘리트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제와 행정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다만 정치 분야에서는 전혀 그렇지를 않았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박 대통령을 만 1년간 모시면서 보니까, 국사(國事)를 야당 책임자와 만나 진지하게 논의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박 대통령을 받드는 사람들도 박 대통령이 야당 당수와 만난다는 자체를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단정하고 있었다. 야당을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 역시 야당이 박 대통령의 업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이 나라 발전에 온몸을 바쳐 불철주야(不撤晝夜) 노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존경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당시 박 대통령의 신념은 ‘먹지 못하는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를 한단 말인가? 우선 배불리 먹고 세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율을 모르는 민주주의란, 말만 민주주의이지 혼란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바로 김일성이 원하는 대로 나라가 흘러가게 된다. 나라를 그 꼴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어느 수준까지는 다소 인권(人權)을 희생시키더라도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권력 측근에 있는 인물들의 자세와 행동이었다. 박 대통령의 신념(信念)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아 그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과 야당 속에 몸을 던져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거의 없어 보였다.
많은 측근인사들이 박 대통령 앞에서는 “각하가 아니면 이 나라를 이끌 사람이 절대로 없습니다. 각하야말로 민족의 태양이십니다. 백성은 우매하고 야당은 한결같이 비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야당이나 국민과의 거리를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박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육군 소장의 계급, 또 경호실 작전차장보라는 직책으로 이런 생각들을 솔직히 말씀드릴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박 대통령이 추구한 정책 가운데 이 새마을운동만은 당리당략(黨利黨略)이라는 차원을 떠난 온 국민의 합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정치적인 이해득실(利害得失)로 따지려는 사람들이야말로 순수성을 의심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강한 집념은 순수한 애국심 그 자체였다.
제9장 9사단장
▶自由路 발상
원래 이 도로의 아이디어는 1979년에 내가 건의한 것이다. 군단장과 군사령관에게 보고해 동의(同意)까지 얻었었다. 문제는 예산이었는데 길을 지금 만들어진 것보다 강 쪽으로 400~500m 안쪽으로 들어가게 하면 많은 한강 둔치를 조성할 수 있어 그것을 팔아 공사비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군에서는 나의 건의를 관계 부처에 넘겼다고 했는데 정부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 확인해 보니 이 건의서가 건설부에서 잠자고 있었다. 즉시 건설부 장관에게 검토를 시켜 타당성을 보고 받았다. 그래서 내 대통령 임기 중에 거의 완성된 것이다. 사단장 때의 아이디어가 대통령이 되어 실현된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自由路)를 칭찬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제10장 10·26사건에서 12·12까지
▶부대 출동 명령
간단하게 정리하면 12·12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 만일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서든지 들어본 적이 없다. 역사상 어느 쿠데타도 병력을 동원하는 부대장이 부대를 이탈해 지휘할 수 없는 곳에 가 있은 예는 없었다. 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제11장 수도경비사령관-보안사령관 시절
▶세 金씨
나는 계엄분소장으로 있으면서 유관기관장뿐만 아니라 언론계 간부와 교수·학자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김종필(金鍾泌) 씨= 정치적인 감각과 국가경영의 관록 등은 누구보다 잘 갖추고 있다는 평이었다. 그는 두 가지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제3공화국의 주요 국정(國政)책임자로서 유신(維新)과 장기집권에 대한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유신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유신을 반대했다고 변명하고 나선 자세였다.
그가 단호하게 ‘제3공화국과 관련해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다. 나는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잘잘못은 국민들의 심판에 따르겠다’는 자세를 보였다면 역사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군인의 입장에서 몹시 안타깝고 아쉽게 생각했다.
◇김영삼(金泳三) 씨= 장래를 내다볼 수 있는 인물로 손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언론계에서 기대를 거는 편이었다. 그러나 국가안보에 대한 신념이 부족하고 군에 대한 친근감이나 인맥(人脈)이 두텁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金大中) 씨= 군 내부의 평가는 한마디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이념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며 통일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김일성과 맥(脈)을 같이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론계·학계에서의 의견도 비슷한 편이었다. 국가에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가 배후인물일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실제로 그에게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선동적이었다.
▶金大中 사형 만류
1981년 1월23일 내란음모죄로 재판을 받아온 김대중(金大中) 씨의 사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자 군 내부에서는 법대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나는 국내외적으로 볼 때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독재란 무엇인가. 정적(政敵)을 죽이고 장기집권을 하면 독재라는 레테르가 붙게 되는 것이다. 만일 김대중 씨를 사형집행한다면 내 동기(同期)이자 친구인 전 대통령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고 독재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전 대통령은 7년 단임으로 그만둘 사람인데 어떤 일이 있어도 그에게 독재자라는 말을 듣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전 대통령에게 했더니 그 역시 공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12장 서울올림픽 유치 지휘
▶올림픽 유치 건의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기로 정부가 결정한 것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이었다.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주역(主役)이었던 대한사격연맹회장 박종규(朴鐘圭) 의원(전 경호실장)이 1979년 박(朴)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를 건의했다. 사회의 선진화, 남북관계에서의 우위(優位), 공산권 진출을 위한 국가 대전략으로서 올림픽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대통령 서거 직전인 1979년 10월8일 서울시가 올림픽 유치 계획을 공식선언했다. IOC(국제올림픽 위원회)에 유치신청서를 낸 것은 그로부터 1년 5개월 후인 1981년 2월26일이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선언하고 공식신청서까지 제출했으면서도 정부는 본격적인 유치활동을 벌이지 않고 있었다. 유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치한다 해도 우리의 경제력이 이를 뒷받침하기 어렵다는 것이 정부 관계기관의 지배적인 판단이었다. 그 사이 국가적 위기와 경제 불황(不況)이 겹쳐 아무도 올림픽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럴 때 내가 올림픽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내가 박종규(朴鐘圭) 씨, 노재원(盧載源) 대사 등으로부터 올림픽 유치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에게 “올림픽은 꼭 유치해야 하므로 대통령께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건의서를 올린 것은 9월2일이었다. 개최지 결정일을 28일 앞둔 날이었다.
제13장 2·12총선과 민정당 대표
▶청와대 ‘쓰리 許’
제5공화국 시절, 세간에서는 이들이 청와대 비서진들을 주무를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권력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이야기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실보다 과장된 점이 없지 않았다.
▶張玲子 사건
이 사건이 있고 난 후 스리 허에 대한 전(全) 대통령의 불신과 경계심은 갑작스레 커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도 허화평(許和平) 씨에 대한 불신이 더욱 심했다.
제14장 6·29선언―모든 것을 건 승부
▶두가지 지침: 직선제와 金大中 사면
1987년 6월 17일 안가 만찬,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후보,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 이춘구(李春九) 민정당 사무총장, 이치호(李致浩)·현경대(玄敬大) 의원, 박영수(朴英秀) 비서실장, 안현태(安賢泰) 경호실장, 김윤환(金潤煥) 정무1장관, 이종률(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 등
전두환: “우리가 지금 밀려가고 있는데, 나는 카드를 다 썼어요. 이제 없어. 정부에서 뭘 연구하더라도 이제는 전부 노(盧) 대표를 중심으로 해야 된다는 얘기야. 그래서 내가 안기부장을 오라고 한 것은 비서실과 긴밀히 협조해서 뭔가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나는 그날(6월 17일) 밤 연희동 집으로 돌아와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언론에서 하자는 대로 해야겠지. 그게 바로 국민들의 뜻일 테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리드할게” 하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말을 받아 ‘노 후보가 시국수습의 전면에 주도적으로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나는 이날 밤 박철언(朴哲彦) 특보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심을 했다. 직선제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해달라”며 초안을 만들라고 했다.
그때 준 지침은 두 가지였다. 직선제를 한다는 것과 김대중 씨를 사면복권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박 특보가 몇 명의 참모들과 함께 초안을 잡으면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직선제 해도 이기지 않겠소?”
6월24일 오후 7시쯤 전(全)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로 올라갔다. 전 대통령이 내 천거(薦擧)에 따라 각계 인사들을 만난 직후였다. 서쪽 별관에서 만났는데 영식(令息)인 재국(宰國)군도 동석했다. 화제는 시국(時局)문제에서부터 시작되어 당내(黨內)문제, 특히 당의 단결과 국민의 신뢰 등으로 옮겨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전 대통령은 불쑥 “당의 신뢰도나 노(盧) 대표가 쌓아올린 이미지로 보아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하고 내 의중을 떠보았다. 나는 속으로 ‘옳지! 내가 의도했던 대로 일이 잘 풀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 대통령의 이야기는 이만섭 총재가 내게 한 말과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선뜻 수긍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 당원들을 데리고 국민들에게 내각제를 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갑자기 직선제로 바꾸면 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반문(反問)했다. 전 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왔으므로 이번에도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 대통령의 생각을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생각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반어법(反語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으로 해서 내가 직선제를 반대한 것으로 오해를 사게 된 듯하다.
여기서 잠시 덧붙이자면 이미 나의 지시를 받은 박철언(朴哲彦) 특보는 6월18일부터 직선제 수용 관련 선언문 기초 작업에 들어가, 20일과 22일 두 차례 보고를 하고 나의 보완 지시를 받아 수정 작업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6·29선언의 초안을 잡도록 지시한 후에도 박(朴) 특보를 비롯한 내 참모들은 ‘직선제’ 이야기가 나오면 “무슨 말이냐? 직선제 하면 나라 망한다. 올림픽을 치를 때까지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제18장 ‘5共 청산’이란 狂風
▶우리 민족의 슬픈 특성?
청산이라는 용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정부나 여당에서 한 것으로는 기억되지 않는다. 나는 ‘5공(共) 청산’이라는 말 자체가 5공화국을 말끔히 정리한다는 뜻이므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청산이라기보다 역사의 진전이라고 해야 옳다고 본다.
▶마녀 사냥
5공(共) 청문회도 그랬다. 정치재판, 여론재판, 사법재판 등이 뒤범벅되어 버렸다. 정부로서도 홍수처럼 흐르는 물줄기를 다스리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규제에 묶여 있던 여러 분야가 ‘민주화’라는 역사적 명제(命題) 속에서 일시에 해방됨으로써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안 되겠다고 해서 다시 누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가만히 두게 되면 격렬한 왕복작용을 하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동적으로 멈춰져 자율이라는 규범 속으로 가라앉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위정자(爲政者)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떠올리며 용수철이 서서히 멈추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대통령 친인척에게 공직을 맡기는 데 문제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민족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고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支柱)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나는 전경환(全敬煥) 씨를 새마을운동 본부장에 앉혀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까지는 고려될 수 있을지 몰라도 회장을 맡게 한 것은 잘못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전(全) 전 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李圭東) 옹에게 대한노인회 회장을 맡긴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이(李) 옹을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은 고결한 인품과 온유한 성품을 지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이었다. 우리 정규 육사 출신들은 그분을 존경했다. 그런 분에게 노인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하니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런 말 저런 말을 하고, 급기야 순진한 분이 나라 일에 대해 이 걱정 저 걱정을 다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이 전혀 모르는 가운데 이상한 권력이 형성되고 말았다.
어쨌든 전(全) 대통령이 권좌(權座)에서 물러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일어나는 험악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친인척과 측근들을 비난하더니 급기야는 포위망을 압축시켜 비난의 화살을 전(全) 전 대통령에게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백담사行
국민들은 나의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무슨 변화의 돌파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항간에서는 “얼마간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원조(李源祚) 의원에게 전(全) 전 대통령 내외가 국내의 조용한 곳에 거처를 정해 민심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 있는 것이 어떤가 하는 권유의 뜻을 전(全) 전 대통령 및 그의 참모들과 진지하게 논의해 보라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신변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한데 “해외로 도피하시오”하고 말할 수는 없었다. 변화된 시대상황은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이해시켜 최선의 방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직접 나서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수십 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상황에서 내가 앞장서서 설득하려고 했을 때 정치권과 국민들은 “둘이서 야합한다”고 나올 것이 뻔했다.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전(全) 전 대통령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데 당시 상황은 아닌 말로 폭동이 날 판이었다. 그래서 참모들과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했다. 참모들 역시 “우리가 살기 위해 저쪽을 일방적으로 죽일 수는 없다”는 의견들이었다.
그러던 중 전(全) 전 대통령과 참모들은 여러 날 논의를 거쳐 설악산(雪嶽山)에 있는 백담사(百潭寺)를 은둔처로 정했다고 알려왔다.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 등 몇 곳의 사찰을 검토했으나 이왕 국민들에게 속죄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서는 외지고 험준한 곳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이렇게 고통스러운지를 그토록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前夜의 전화
떠나기 전날 밤 전(全) 전 대통령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백담사 은둔에 대한 내 생각을 물었다. 자신이 백담사에 가는 것을 대통령인 나도 동의하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전임자의 신변을 안전하게 해주지 못해 부끄럽다. 그러나 현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잠시 동안 고생스럽더라도 그곳에서 참고 견디면 조속한 시일 내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원상으로 회복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 뜻을 확인하고 싶었다면서 “6공화국에 도움이 된다면 더 큰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보고에 따르면 그들 내외가 기거할 백담사는 설악산의 중허리에 위치해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전깃불은 물론 화장실·목욕실도 없는 아주 초라한 곳이라고 했다. 나는 관계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야 없지 않느냐. 최소한의 불편은 덜어줘야 하지 않느냐”고 질책했다. 관계자들은 “불편을 덜기 위해 보수(補修)공사를 하면 기자들이 ‘편하게 지낸다’, ‘화려하다’는 등의 기사를 써댈 텐데 그러면 국민감정을 좋지 않게 할 염려가 있으므로 조금도 손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참겠다는 것이 그분들의 뜻”이라고 했다.
제19장 중간평가 유보
▶헌법 위반 소지, 유보
김종필 총재와 나는 “중간평가로 인해 정국(政局)이 극한 상황으로 치닫지 않게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에서 김 총재가 중간평가를 할 것이냐고 물은 데 대해 나는 “국민들과의 약속이니까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김 총재는 “중간평가를 국민투표의 방법으로 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인데 대통령이 어떻게 헌법을 위반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이전에는 중간평가에 대한 법률적 측면의 문제점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대중 총재와의 회담을 통해 그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국민 앞에 선서하는 첫째 항목이 헌법을 지키겠다는 것인데 그것을 어기게 되는 셈이어서 나는 “검토해서 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김대중 총재와의 묵계설(默契說)과 중간평가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까지 오갔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김 총재 측에서 위헌(違憲)이라고 하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뒷거래를 하겠는가.
중간평가를 하면 분명히 이긴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고, 나도 그런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헌(違憲)이라는 문제가 중간평가를 유보하기로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작용을 했다.
제20장 3당 合黨과 갈등
▶與小野大 타개의 필요성
정치지도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는 보수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김영삼 총재는 어려울 것이므로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YS는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단(豫斷)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정책보좌관(후에 정무장관)이 내게 진언을 했다.
“각하, 상심하실 것 없습니다. 위기(여소야대)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혁(保革)구도로 일대 개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민주세력을 대통합하고 각 당에 있는 급진 좌파세력을 분리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대통합을 하십시오. 그러려면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나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잇따른 ‘정계개편, 보수통합’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던 터라 박철언 보좌관에게 “그러면 자네가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특히 김영삼·김대중 두 총재의 의중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김종필(金鍾泌) 총재는 홍성철(洪性澈)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났는데, 예상대로 쉽게 동의해 주었다고 보고했다. 야당의 두 총재는 박 보좌관이 접촉했는데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할 듯 말 듯 애를 먹였고,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여러 번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협조할 일은 할 테지만 통합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金大中, 合黨에 부정적 반응
정치지도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는 보수성향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민정·민주·공화 3당이 합당하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김영삼 총재는 어려울 것이므로 공화당만이라도 합당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YS는 들어올 사람이 아니다’라고 예단(豫斷)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정책보좌관(후에 정무장관)이 내게 진언을 했다.
“각하, 상심하실 것 없습니다. 위기(여소야대)가 오히려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보혁(保革)구도로 일대 개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민주세력을 대통합하고 각 당에 있는 급진 좌파세력을 분리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 대통합을 하십시오. 그러려면 3김씨와의 통합을 꾀하는 큰 정치를 구상해야 합니다.”
나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잇따른 ‘정계개편, 보수통합’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던 터라 박철언 보좌관에게 “그러면 자네가 비밀리에 접촉해 보라. 특히 김영삼·김대중 두 총재의 의중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김종필(金鍾泌) 총재는 홍성철(洪性澈) 청와대 비서실장이 만났는데, 예상대로 쉽게 동의해 주었다고 보고했다. 야당의 두 총재는 박 보좌관이 접촉했는데 김영삼(金泳三) 총재는 할 듯 말 듯 애를 먹였고,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여러 번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협조할 일은 할 테지만 통합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金泳三, ‘내각제 개헌’ 반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김영삼, 김종필 총재는 각각 자신들과만 합당(合黨)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통합 발표 2~3일 전에 이르러 박철언 정무장관이 김종필 총재에게 “내각제를 하려면 민주당에도 얘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운을 뗐다. 김영삼 총재에게도 “대통합을 하는 마당에 보수세력의 상징인 김종필 총재에게도 의견을 타진해 본인이 하겠다고 하면 끼워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고 의견을 묻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김영삼 총재가 “안 돼, 안 돼. JP를 넣으면 이미지가 나빠지므로 넣으면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박 장관의 끈질긴 설득에 “그러면 한번 이야기해 보고, 본인이 흔쾌히 하겠다고 하면 끼워 주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끼워 주는 것이지 주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양보했다고 한다.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김영삼 총재 측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면서 시간을 끌었다. “참모들에게 충분한 이야기가 안 됐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당 핵심 참모회의를 연 결과 ‘내각제 하면 큰일 난다’는 반대가 강하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초 내각제를 하게 되면 김영삼 총재가 총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각제를 하면 의석수에 비례해 장관자리를 나누게 되므로 사실상 의석수가 적은 민주계(民主系)로서는 총리 자리만 차지하고 나머지 요직은 전부 민정계(民正系)가 독식(獨食)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김영삼 총재의 스타일이 총리보다는 대통령이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을 내걸면서 ‘내각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걱정하지 말라. 내가 대통령인데 김 총재가 약속을 해놓고 배신할 수 있겠는가”며 그대로 추진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나는 박 장관이 내 뜻을 잘 설명해 김영삼 총재를 설득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이제는 방향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통합 원칙에 합의한 우리는 각각 민주당·공화당과 별도로 각서를 작성했다.
▶“내각제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
발표 막바지에 이르러 김영삼 총재 측이 “며칠만 여유를 달라”면서 시간을 끌었다. “참모들에게 충분한 이야기가 안 됐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당 핵심 참모회의를 연 결과 ‘내각제 하면 큰일 난다’는 반대가 강하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초 내각제를 하게 되면 김영삼 총재가 총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내각제를 하면 의석수에 비례해 장관자리를 나누게 되므로 사실상 의석수가 적은 민주계(民主系)로서는 총리 자리만 차지하고 나머지 요직은 전부 민정계(民正系)가 독식(獨食)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김영삼 총재의 스타일이 총리보다는 대통령이 낫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을 내걸면서 ‘내각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걱정하지 말라. 내가 대통령인데 김 총재가 약속을 해놓고 배신할 수 있겠는가”며 그대로 추진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나는 박 장관이 내 뜻을 잘 설명해 김영삼 총재를 설득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이제는 방향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통합 원칙에 합의한 우리는 각각 민주당·공화당과 별도로 각서를 작성했다.
▶金泳三과 朴哲彦의 訪蘇 갈등
박 장관은 귀국(歸國) 후 이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매우 흥분해 있었다. 합당 당시에는 김 최고위원의 장점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정국(政局) 전망을 밝게 보던 그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모든 희망을 접은 듯했다.
나는 그를 달래면서 자중(自重)하라고 일렀다. 그가 비록 사리(事理) 판단이 정확하다 하더라도 경험과 관록이 부족한 단점이 있었다. 머리가 우수한데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남의 잘못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많은 경험을 겪고 나서야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아량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박 장관의 보고를 받고 김 최고위원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함께 갈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웬만한 것은 참고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당을 이끌어갈 수 있다. 이런 각오가 없다면 애당초 그와 합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인식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박 장관이 생각을 바꾸길 바랐다. 그에게 창당(創黨)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겸허한 자세로 처신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럼에도 박 장관은 내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귀국 후 김 최고위원이 박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고 박 장관이 김 최고위원을 비난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 불씨가 되어 김 최고위원이 청와대 당직자 회의에 불참하고 민정계(民正系)와 민주계(民主系)가 싸움을 벌일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박 장관의 사퇴로 결말 났지만, 그를 설득시키지 못한 나의 부덕(不德)함이 후회되는 한편, 그의 지나친 우월감과 부족한 자제력(自制力)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제21장 민자당 競選
▶全 대통령의 鄭周永 不信
이런 대화가 있은 지 한 달쯤 지나 전(全)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는 정(鄭) 회장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가 그 영감한테 크게 속았소. 그 사람 큰일 저지를 사람이야. 벌써 몇 개 기업이 그 사람으로 인해 넘어졌다고 하는군”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빨리 아셔서 다행입니다”하면서 그의 인간됨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민정당(民正黨) 대표위원이던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정(鄭) 회장을 만났더니 사공일(司空壹) 경제수석의 욕을 해댔다. 내가 알기로 사공(司空) 수석은 경제운영 및 실무에 밝은 우수한 참모임에도, 정 회장은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경제를 망치는 자’라고 매도했다.
국가경제가 정(鄭) 회장 개인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鄭) 회장은 이런 식으로 잦은 충돌이 일어나자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정권을 잡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정치를 갑작스럽게 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 박(朴) 대통령 말기부터 준비를 해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가 이끄는 통일국민당은 1992년 1월10일 발기인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다.
아무리 내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참모들이 건의한 ‘정주영(鄭周永) 씨 정계진출 저지 방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런 공작은 민주적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鄭) 회장의 정계(政界)투신이 적잖은 혼란과 불안을 야기할 것이라는 걱정은 들었다.
나는 측근 가운데서 정(鄭) 회장과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을 불러 “인간적인 입장에서 정(鄭) 회장의 정계투신을 막는 것이 좋겠다”뜻을 밝혔다. 그 측근은 나름대로 알아본 후 “정(鄭) 회장의 뜻을 돌리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습니다”라고 보고했다.
▶大選 후보 3원칙
나는 다음 대선(大選) 후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정한 원칙을 비공개적으로나마 밝혀놓고 있었다.
첫째, 군(軍) 출신은 대권(大權) 후보가 될 수 없다.
둘째, 내 친인척 중에서도 대권(大權) 후보가 나올 수 없다.
셋째, 여당 후보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자유로운 경선을 통해 결정된다.
이러한 나의 뜻은 1987년 대선(大選) 당시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바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었다. 정무수석은 이런 나의 원칙을 토대로 수개월에 걸쳐 민자당 내의 예상후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했다. 이 작업에는 많은 전문 인력이 동원됐으며, 여론조사 등 다양한 검증작업이 동반됐다.
▶金泳三의 돌출 행동과 李鍾贊의 반발
김 대표가 서둘러 후보경선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것은 경선(競選)을 조기 과열화시킬 뿐, 그에게 특별히 유리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면 아래 있던 민정·민주계 갈등이 표면화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가능한 한 대립을 피하고 원만한 타협을 통해 경선 절차에 따라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던 내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정한 원칙들은 적어도 그에게는 유리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치고 나온 것이었다. 나는 몹시 당혹스럽고 화가 났다. 이 일로 인해 당내(黨內)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대통령인 내가 1년 반 동안에 걸쳐 그를 믿고 정성을 다해 지도해왔는데 이렇게 당돌할 수 있는가. 대통령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청와대 비서진들도 “이럴 수 있느냐”면서 몹시 흥분했다. 과거 야당에 몸담고 있을 때처럼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치고 나와 기선(機先)을 제압하는 방법이 체질화되다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억지 이해를 하면서도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다. 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여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김 대표가 선언을 한 다음날 이종찬(李鍾贊) 의원이 긴급 면담을 요청해 왔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저는 각하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으니 승낙해 주십시오’하는 승인을 받으려고 뵙는 것이 아닙니다.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후보 경선에 나섭니다’ 하고 통보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후배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YS가 제멋대로 치고 나오는데 난들 왜 못하겠느냐’는 배짱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를 나무랄 말을 찾지 못했다.
▶李漢東, 朴泰俊의 경우
박 최고위원이 대안(代案)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여러 검토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그 이유를 정리하면 이러했다.
첫째, 그는 유능하지만 군 출신이다.
둘째, 민정계(民正系)의 이종찬·이한동을 끌어안지 못했다.
셋째, 그가 나설 경우 이종찬 쪽에서는 그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점들이 얽혀 있는 상태에서 그를 후보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浦鐵의 명성을 보존하시기를”
나는 박(朴) 최고위원에게 “출마하지 마십시오”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말이 많았다. 내가 이중 플레이를 한다느니, 결단력이 약하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원래 남의 의견을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내 의견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객관적인 상황을 인식시켜 상대방 스스로가 결론을 내리게 한다. 나는 박(朴) 최고위원에게 “박 선배께서는 포철(浦鐵)을 성공시킴으로써 우리나라 근대화에 이바지해 신화적인 명성(名聲)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경쟁자들이 온갖 약점을 과장해 상처를 입히려 할 텐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했다. 그는 ‘나름대로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민정계에서 단일후보가 나오지 않고 여러 명이 난립한다면 모양이 참으로 안 좋지 않습니까? 이한동은 몰라도 이종찬은 결코 물러설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박(朴) 최고위원도 이들을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란 점을 시인했다.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우니 잘 생각해 보세요. 박 선배에게 꼭 한 가지 바라는 것은, 쌓아올린 명예가 어떤 경우에든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 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나는 이 정도로 내 뜻을 이야기하면 그가 적당한 명분을 찾아 후보 출마를 철회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보고를 받고 보니 철회는커녕 그대로 밀고 나갈 태세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무수석 비서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를 시켰다. 결과는 나의 원래 생각과 다름이 없었다.
여당 내에서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일어나 온갖 추태가 벌어지고 결국에는 박(朴) 최고위원이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결론이었다. 이 문제를 정리해야만 애써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 나는 박(朴) 최고위원을 다시 만나려 했으나 마침 남부지방에 행사가 계획되어 있어 그냥 전화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박(朴) 최고위원에게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내 참모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시고 결정해 주십시오”하고 말한 후 그 참모에게 “그분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올바른 결심을 할 수 있게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지방에 있는 동안 전화 보고가 있었다. “그분에 관계되는 자료를 정리해 사실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그분이 심사숙고한 끝에 후보 철회를 결심했다”는 내용이었다.
▶李鍾贊의 경선 거부
하지만 나는 생애를 통해 운명을 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여러 번 봉착할 때마다 생명을 아껴 물러선 적은 결코 없었다. 다른 사람은 물러서더라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옳은 길이라고 판단이 서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래서 나를 아는 친구들은 “노태우는 부드럽게 보이지만 무서운 사람”이라는 평을 하는 것이다.
나는 역사가 내게 맡겨 준 과제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결단을 해야 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결단의 모습과는 반대로 비치는 것이어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참아야 하는 결단, 관용해야 하는 결단, 기다려야 하는 결단…. 그 내용에 있어서는 더 어렵고 무서운 결단이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으로 비치곤 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기에 대통령이 이렇게 약하고 무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 하고 화가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그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칼자루는 쥐었겠다, 수 틀리면 누군들 혼을 내지 못할까!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는 것쯤이야 얼마나 쉬운 일인가! 명분이야 나라를 위하고 정의(正義)를 위한다고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다. 그렇게 나아갔을 때 대통령이 참으로 힘 있고 속 시원하게 잘한다는 평을 받을 수는 있겠지….’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할 경우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거북하고 싫더라도 또 인기가 없더라도 ‘참고, 용서하고, 기다려야’(참·용·기)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입장에서 결단력이 약하고 우유부단하다는 빈축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제22장 중립내각으로 大選 관리
▶金大中 총재의 감사 표시
10월5일 오전 나는 민자당 당사(黨舍)를 방문해 정식으로 탈당계를 제출했다.
이날 저녁 나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표와 만찬을 함께 하면서 중립내각 구성과 향후 정국 방향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김 대표는 나의 결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었다”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의 대통령 당선 여부를 떠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 고마움을 영원히 간직하겠노라고 했다. 표정으로 보아 자신의 대통령 당선에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金宇中 출마 포기 설득
나는 김 회장에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김 회장 주변 사람들이 김 회장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김 회장을 보는 눈,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김 회장을 보는 눈과 같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회장이 국제감각에 익숙하다는 생각은 하지만 참신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정주영 회장이 이번 선거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어려운 처지인데 김 회장까지 정치에 뛰어든다면 김 회장과 대우가족, 나아가 국민들의 불행만 초래할 것이 내게는 훤히 보입니다. 그래도 출마할 작정입니까?”
내 말에 김 회장은 멈칫하면서 당황해했다. 그는 자신이 출마하지는 않더라도 “새로운 참신한 사람(정치인)을 기르는 당(黨)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한 걸음 후퇴했다.
나는 “근본적으로 정치라는 것을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김(金) 회장을 결코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고 당신 또한 뿌리칠 수 없을 것이오. 내 이야기는 대통령의 권위를 앞세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인 김우중 회장을 아끼고 사랑하는 선배로서 충고하는 것이오.”
그는 깔끔한 성미였다. 구질구질하지 않았다. “잘 알겠습니다. 저는 정치를 하지 않겠습니다”하고 확실하게 밝혔다.
나는 “고맙소. 대우(大宇)를 훌륭하게 키워 세계의 대우로 성장해 나가기를 빕니다”라고 격려했다.
▶金大中의 당선 확신
김대중 후보는 선거 전인 10월5일 청와대에서 만찬 회동을 할 때에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취한 민자당 탈당과 중립내각 구성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내가 정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자신은 대통령의 탈당까지는 바라지 않고 중립내각만 구성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탈당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김 총재, 내가 6·29를 선언한 사람이 아닙니까? 김 총재를 비롯한 야권(野圈)에서 중립내각을 구성하라고 요구하는데 내가 당직을 가진 채 중립내각을 구성하면 그 결과에 대해 깨끗이 승복하겠습니까? 아마 승복하지 않았을 걸요. 그럼 중립내각의 의미는 사라지는 겁니다. 이왕 할 거면 깨끗이 하자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지켜온 정치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는 내 말에 매우 감동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승리를 확신하는 그의 표정을 읽으면서 나는 속으로 ‘그의 혜안에도 한계가 왔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대통령 재임 5년간 여러 차례 그를 만나 국정(國政) 전반에 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취임 초에 회동했을 때는 ‘역시 이분은 우수한 두뇌, 풍부한 경험,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갖추고 있구나’하고 느꼈었다. 재임 중반, 그리고 후반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총명함이 많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0월5일에 만났을 때는 선거정국을 보는 판단력이 전과는 많이 달라져 나의 중립 자세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부가 중립을 지킬 경우 국민들의 수준과 성향으로 보아 14대(代) 대선(大選)에서는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었다. 나 또한 그렇게 확신했다.
이런 판단을 못할 리 없는 김(金) 총재가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연민(憐愍)의 정(情)마저 일었다.
대통령이란 인간의 힘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일, 하늘이 정하는 일이므로 그의 선전(善戰)을 당부했다.
노태우 회고록
보도자료 (하)
제23장 민주화와 자율화의 전면적 확산
▶“언론은 장악될 수 없다”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6·29선언 제5항만큼 내가 명심(銘心)했던 말도 없을 것이다. 언론인들과 야당에 대해서 최대의 자유를 준 것은 나였고 그들로부터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도 나였다. 나도 인간인 만큼 때때로 울컥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으나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약속을 떠올리면서 나를 다스렸다.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보장하면 그에 따른 책임과 신중함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5년 안에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날 순 없었다. 민주화는 장구한 시간이 걸리는 과정임을 새삼 깨닫고 나의 성급함을 반성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제도가 바뀌는 것보다 인간이 바뀌는 것은 더 더디다.
나는 언론자유가 민주화의 견인차(牽引車)라고 생각했다.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의 어머니라고 한다. 내 재임기간 중 언론의 자유는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기본권의 보장
나는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주투사가 아니고 민주화를 약속하고 이를 실천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민주화의 핵심적 의미는 언론자유와 기본적 인권의 보장이었다. 국민의 기본권은 선언적이어선 안 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민주사회에선 한 사람의 자유라도 억울하게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대(大)를 위하여 소(小)가 희생되어서도 안 된다. 한국은 반(反)인권적인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하면서 자유민주체제를 키우고 지켜가야 하는 2중의 고민을 안았다. 반공(反共)을 위하여 자유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분명 존재하였다. 6·29선언은 그런 단서(但書)도 폐기하고 선진국 수준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개발연대의 논리와 획을 그은 것이다. 나는 제13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이 점을 강조했다.
제24장 전환기의 經濟, 도전과 응전
▶북방정책으로 열린 한국 경제의 活路
소련 측에 제공한 경협자금에 대해 말이 많지만 실제로는 14억5000만 달러밖에 가지 않았다. 국제교역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한국은 북방외교를 통해 수교한 중국과 동구권에서만 흑자를 보고 다른 지역에서는 적자(赤子)를 보고 있다. 결론적으로 소련에―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빌려 준 차관은 이미 그 이상의 수익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다.
소련 및 중국과의 수교는 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외교·국방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의 위상(位相)과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았다. 6공은 민주화와 공산권 붕괴라는 도전(挑戰)에 대해서 경제의 자율화와 북방정책이란 응전(應戰)을 했다. 그 승부의 결과는 대승(大勝)이었다.
▶경제正義와 민주화의 代價
6공화국을 출범시킨 나의 앞에는 ‘민주화’라는 절대적인 과제가 놓여 있었다. 정치적 민주화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가 어떤 영향을 받게 될지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단언할 수 없었지만 적잖은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1987년 6·29선언 이후 민주화에 대한 욕구는 경제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6공화국은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 가면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천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있었다.
‘경제정의(經濟正義)’는 6공화국 초기부터 강조되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18년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7년의 성장위주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의 분배구조는 이른바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6·29선언과 동시에 터져 나온 노동자들의 요구에 부응(副應)하다 보니 누구라도 경제정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을 만난 것이다.
기업인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당시 노동계(勞動界)의 요구가 우리 경제를 크게 손상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억압을 토대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다가 갑작스럽게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임금상승률도 우리가 선진국을 지향(志向)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싱가포르·대만 등 경쟁국들과 비교해도 크게 오른 것은 아니었다.
▶경제 전환기의 논리
정책의 비중이 민주주의와 경제정의(經濟正義)로 갈 수밖에 없고 가진 이들 쪽에 서 있는 한편이 어느 정도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성장일변도를 달릴 때처럼 노동자들만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경쟁력이 다소 떨어졌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대가(代價)였다. 경제의 효율만을 따지는 사람들은 그것이 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겨 민주화에 따른 코스트(Cost: 비용)를 계산하지 않으려 했다.
▶純外債는 반으로 줄다
5공이 끝나는 시점인 1987년 224억 달러였던 우리나라 순(純)외채가 6공이 끝나는 시점인 1992년에는 110억 달러로 절반으로 줄었다. 1987년 3200달러이던 1인당 국민총소득은 7200달러로 늘어나고 무역 규모도 이 기간 거의 두 배로 증대되었음에도 총 외채규모는 5년 전과 비슷한 428억 달러 수준이었던 것이다.
제25장 구조개혁과 200만호 건설
▶무노동 무임금
나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되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고수하라고 지시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이 원칙을 비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비판 자체가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노동운동사를 보거나 미국·유럽·일본 등 어느 나라를 보아도 파업하고 월급 받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었다.
기본으로 돌아가 이야기하면, 노사관계는 계약이다. 노(勞)는 사(使)에게 근로를 제공하고, 사(使)는 노(勞)에게 근로의 대가로 임금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勞)가 사(使)에게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데 사(使)가 노(勞)에 임금을 준다는 것은 노사(勞使)관계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제26장 KTX, 영종도 공항, 서해안 고속도로
▶外換위기가 6공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김영삼 정부가 외환(外換)위기로 국가를 부도 위기에까지 몰리게 한 것을 두고 그 원인을 6공화국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부당성은 수치를 비교해 보면 간단하게 밝혀진다.
6공 말의 총외채는 430억 달러, 순외채(純外債)는 100억 달러 내외였다. 그것이 김영삼 정부에 들어가 네 배 가까이 늘었다.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의 총외채는 1600억 달러 가까이 되었는데 나중에 기업들 것까지 합쳐 보니 2000억 달러에 이르렀다.
6공은 경제기반을 견고하게 다진다고 해서 외채(外債) 규모를 줄이는 등 재정(財政)을 건전 상태로 만들고 물가도 다음 정부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임기 말인 1992년에는 인상 요인을 최대한 흡수해 넘겨 주었다. 내 임기 5년간 재정적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1988~1991년에 물가가 크게 오른 것은 과거에 오르지 못했던 전력(電力)요금 등의 공공요금을 많이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들어 경제가 엉망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금융산업을 방만하게 관리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부채가 5년 동안 4~5배나 늘어난 데서 알 수 있듯이 무턱대고 돈을 풀어 기업들이 멋대로 자금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1991년에 정부는 재벌기업들에 대해서도 핵심업종 3개 이외에는 대출 자체를 중단시켰는데, 김영삼 정부는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를 규제로만 생각해 풀어버림으로써 방만을 자초했던 것이다.
제27장 法질서 확립
▶良心囚는 없었다!
극좌파들을 잡아들인 데 대해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이나 머릿속에 있는 사상을 문제 삼아 처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사상이 밖으로 표출되는 과정에서 범법(犯法) 행위로 나타났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선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공권력을 동원한 것이다. 제6공화국에선 양심만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양심수(良心囚)는 없었다는 뜻이다.
제28장 轉換期의 교육정책
▶全敎組 不法化
교원들이 노동 3권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관념상 수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교원들의 노조 활동은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며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점에서 학부모들의 비판이 높았다. 더욱이 이른바 ‘참교육’이라는 민중교육론에 입각한 좌경적이고 계급투쟁적인 교육개혁운동은 노동권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으로 교원노조 결성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우리 정치·사회적 여건에 비추어 허용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자 많은 국민들의 여론이었다.
1987년 말 1만2000명에 달했던 교원노조(敎員勞組) 가입 교원수는 정부당국 및 학교 행정가들의 탈퇴 설득과 병행한 중징계방침 천명으로 1989년 말까지 152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탈퇴했다. 미탈퇴 교원들은 1990년 초기까지 전원 징계 해직함으로써 교원노조는 조직이 와해되었다. 정부는 교원노조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모임에 대하여는 그 활동을 지원했으며, 시·도별 교육정상화 촉구 학부모대회가 12개 교육위원회에서 15회 개최되어 1만 9380명의 학부모들이 참석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켜주었고,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전교조를 합법화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전교조의 친북반미(親北反美) 교육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국민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여러 모로 대응하고 있다. 내가 세운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더라면 불필요한 국론(國論)의 소모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제30장 언론자유의 보장
▶언론자유의 피해자
율곡사업 역시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 의혹을 제기해 놓기만 하고 매듭을 짓지 않는 바람에 아직도 비리(非理)가 있는 양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일과 관련해서는 언론뿐만 아니라 이회창(李會昌) 당시 감사원장 역시 당당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조사 결과 잘못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의식해서인지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제32장 靑瓦臺 생활
▶평범한 주부였는데…
그럼 여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모양이나 행동이 예쁘고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 둘째는 나서지 않고 겸손해야 한다. 셋째는 말이 적어야 한다. 넷째는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일게 하는 태도를 갖춘 여성이라야 한다.
여자들끼리는 잘난 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첫째, 남의 앞장을 서지 마시오.
둘째, 몸치장을 수수하게 하시오.
셋째, 말을 적게 하시오.
넷째,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마시오.
아내는 내 당부를 듣고는 “평소에도 그렇게 하려고 애쓰던 덕목(德目)들이므로 문제될 게 없으나, 대중 앞에 나서면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고 그저 가슴이 마구 떨리기만 하니 큰 일”이라고 했다.
▶內助의 원칙
하지만 대통령 부인에 대해서는 대통령처럼 명시된 조문이 거의 없었다. 제대로 확립된 관례가 없어 대통령 부인의 바람직한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적절한 원칙도 세워야 했다.
당사자인 아내는 훨씬 더 신경이 쓰였겠지만 원칙을 정하는 데는 대통령인 내 뜻이 가장 중요했다. 나는 이 사안이 매우 미묘하다고 생각했는데 전임자에게 물어보기도 어렵고 해서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했다.
첫째, 대통령 부인은 남편으로서의 대통령을 내조(內助)하는 것이지 별도의 독립된 기능은 갖지 않는다.
둘째, 별도 직책을 갖지 않는다.
셋째, 대통령과 분리된 별도의 공식 행사를 주최하지 않는다.
넷째, 공적(公的) 사항이 아닌, 대통령이 필요로 하는 일만 내조(內助)한다.
다섯째, 관저생활을 총괄한다.
▶아내의 싫은 소리
나는 저녁이 되면 심신(心身)이 피곤해져 이야기하고 싶은 의욕이 나질 않았다. 아내가 “오늘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제게 참고가 되는 이야기를 해 주세요”하면 나는 “오늘 별일 없었소. 이야기할 거리도 없어요”하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고 건성으로 흘려버리곤 했다.
내 경우에는 어떤 이야기건 진지하게 듣기 때문에 장관이나 비서관들이 듣기 싫은 보고도 서슴없이 하곤 했다. 신문에서도 언론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으므로 비판할 것은 모두 거리낌 없이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내에게만은 예외였다. ‘영부인은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내가 싫은 소리를 하면 가만히 듣지를 못했다. 저녁이 되면 아내는 어디서 들었는지 싫은 얘기를 내게 전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 태도는 달라졌다.
나는 외부의 어떤 사람에게도 싫은 소리를 한다고 짜증을 내본 적이 없으나 집사람이 싫은 소리를 하면 짜증을 냈다.
“여보, 그런 좋지 않은 소리는 보고도 받고 신문에서도 보았소. 하루 종일 좋지 않은 것만 보고 들으니 머리가 터질 것 같소. 당신이나마 좋은 소리로 나를 위로해 줄 수 없겠소?”
그러면 아내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생활이란 게 이렇게 고달픈 것인가 하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따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술을 마시며 풀어 버리곤 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모든 고달픔과 스트레스를 혼자 삭여야 했다.
다행인 것은 처제(妻弟·금진호 전 장관 부인)가 성격이 부드럽고 원만한 데다가 재덕(才德)을 겸비해 언니인 아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처제가 없었다면 대통령 부인으로서 안게 되는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33장 통일을 위한 遠交近攻
▶‘개방=통일’이 나의 신념
나는 전쟁을 통하지 않고 북한을 개방시킬 수만 있다면 통일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믿었다. 어떤 공산주의 국가이건 개방되면 변하게 마련 아닌가. ‘개방=통일’이라는 것이 내가 추진한 대북(對北)전략의 기본 개념이었다.
▶公式채널, 幕後채널
나는 두 사람의 역할을 나누었는데,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외교·안보 사항은 김 수석이 관장하고, 특사를 보내거나 비밀접촉을 해야 하는 비공식적인 일들은 박 장관에게 시켰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인다면, 김 수석은 북방정책의 종합참모로서 나와 함께 북방외교의 큰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따라서 김 수석은 박 보좌관의 역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후에 어떤 기사에는 북한과 동구권은 박 보좌관이 맡고, 그 외의 서방외교는 김 수석이 한 것으로 적고 있는데, 지역을 기준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다만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가 안 되어 있었으므로 김 수석보다는 박 장관이 나서서 비밀리에 접촉을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북방외교의 시험대가 된 헝가리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박 장관이 수십 차례 비밀 회담을 한 끝에 그로스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수교에 합의한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 덧붙이면 북방정책 과정에서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는 김 수석과 박 장관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그 일에 관여한 경우가 많았다.
제34장 한국-헝가리 修交
▶東歐의 문이 열리다
보름 후인 (1988년) 8월26일 한국과 헝가리는 대사급 상주대표부 개설 협정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때 우리가 보안을 유지하느라 이 사실을 공식발표 48시간 전에야 미국 측에 통보해 주었는데 이 때문에 미국 측은 섭섭해했다. 이 일이 과장되어 미국 측이 나의 북방외교를 못마땅해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 후 미국 측은 나의 북방외교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제35장 東歐 민주화 혁명의 현장에서
▶올림픽과 민주화가 외교 자산
북방외교를 뒷받침한 두 기둥은 서울올림픽의 성공과 한국의 민주화였다. 서울올림픽은 또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과격하게 치닫지 않게 한 제동장치였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나 정부 측이나, 서울올림픽을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일념이 민주화 운동 측에는 폭력적으로 흐르지 않게 했고, 정부 측에 대해서도 군대 동원과 같은 비상수단을 쓰지 않도록 했다.
▶브란트가 전해 준 고르바초프의 곤경
브란트: 그런데 각하께서 민주화를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데, 서독 출발 전에 예술인 몇 사람이 찾아와서 한국의 어느 화가가 보안법관계로 연루되어 있다면서, 선처를 당부해 달라는 말을 했는데, 국무총리하고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니, 그때 그 부탁을 드려도 될는지요?
나: 그렇게 하세요.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 한국에서 단순히 정치적 신념이나 이념 때문에 법의 제재를 가하는 경우는 없다는 점입니다. 확실히는 몰라도 말씀 들으신 그 화가란 사람도 그 작품이 폭력행위 현장에서 이용됐든지, 혹은 폭력행위를 유발하는 데 이용됐든지 하여, 법률 위반이 됐을 것입니다.
▶수많은 접촉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기까지는 여러 채널을 통해 수많은 접촉이 있었다. 우리 쪽에서는 김종휘 외교안보수석과 박철언 정책보좌관이 이끄는 두 파트에서 일을 나눠 했다. 두 사람이 역할을 놓고 다투었다는 말이 있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일만 하면 되니까 그럴 소지가 있을 수 없었다.
초기에는 박 보좌관이 도쿄 주재 잡지사 기자로 위장한 소련 정보부(KGB) 요원을 주로 접촉했고, 김 수석이 관여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관계가 깊어졌을 때부터였다. 내가 지시를 내리고 그에 대한 결과를 보고받으면 김종휘 수석에게 정리를 시켰다. 김 수석은 그것을 기초로 구상하고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곤 했다.
▶密使 도브리닌
회담이 있기 두 주일 전인 그해 5월 하순에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외교수석보좌관인 아나톨리 도브리닌 전 주미대사를 한국에 보내 비밀리에 나를 만나게 했다.
그는 이 같은 고르바초프의 결정이 당이나 군부, 외무부의 반대 속에 비밀리에 내려졌으므로 어떤 루트를 통해서건 확인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약 한국 측이 이를 어기고 확인하려고 들면 적잖은 파문이 일어나고 그렇게 될 경우 고르바초프는 부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희대의 사기극?
그래서 도브리닌이 전하는 고르바초프의 메시지 하나만을 믿고 한소(韓蘇) 정상회담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우리 측은 즉시 소련 측과 접촉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제의했는데 소련 측이 도브리닌을 보내 샌프란시스코가 더 좋겠다고 회답해 온 것이다.
▶화 난 셰바르드나제의 선물
코뮈니케의 원안에는 양국 수교일이 ‘1991년 1월1일’로 적혀 있던 것을 셰바르드나제가 양국 외무장관 회담 현장에서 펜으로 ‘1990년 9월30일’로 고쳐 쓴 것이다.
셰바르드나제는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북한 평양을 방문해 김영남(金永南) 외교부장 등을 만나 한국과의 수교 결정을 통보했다가 북한 당국자들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무례(無禮)를 당해 감정이 무척 상해 있었다고 한다.
▶韓蘇수교의 성과
숫자로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지만 소련이 북한에 수출하는 석유가격을 공산권 특별가격에서 국제시세로 올림으로써 발생하는 추가 부담이 북한의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비행기·로켓 등 고도정밀무기의 지원 삭감이 우리 한국의 국방비를 절감해 주는 효과 등은 엄청난 것이다. 비행기 값만 하더라도 얼마나 되겠는가? 경협(經協) 이후 북한에 대한 소련의 전투기 공급은 즉각 중단되었다. 북한에 대한 무역특혜를 철폐하고 현금지불을 요구했다.
그 이후 소련에서는 미그 29기보다 최신형인 수호이 전투기를 북한에 보내기로 했다가 이를 중단했다. 기름과 최신무기의 공급도 거의 중단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내 퇴임 이후 한국 정부가 한-러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점이다. 어렵게 수교를 했는데 러시아가 고개를 돌리지 않게 했어야 했다. 러시아에 지원한 경협자금의 상환문제가 한국과 러시아 관계에 장애물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한국이 소련에 제공한 14억7000만 달러의 경협자금은 분명 큰돈이지만 그 돈의 상환이 지연된다 해도 우리와 러시아의 관계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돈독히 유지되도록 해야 했다. 극동 시베리아 쪽의 보고(寶庫)를 눈으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
고르바초프는 머리가 영민하고 순발력이 있었으며 지혜로운 안목을 지닌 지도자였다. 무엇보다도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동구권에서 공산당 정권이 밀려나도 소련 군대를 보내지 않았으며 소련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武力)으로 막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의 비극이었으나 소련 및 동구 공산체제가 무너질 때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공은 거의 전적으로 고르바초프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가 경제를 너무 몰랐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개혁을 하게 되면 경제발전도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정치개혁을 하면서도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 혼란을 가중시켰다. 만약 그가 시장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만 가졌더라도 소련 경제가 그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韓人동포들의 집단이주 문제
나는 정상회담 내내 옐친으로부터 오로지 러시아의 이익만을 추구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옐친 대통령과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韓人) 동포들의 집단이주 문제를 상의했다. 30만 명을 헤아리는 러시아 내 우리 동포들은 원래 연해주에 있다가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을 연해주의 한 지역으로 끌어 모으자는 것이 나의 기본 구상이었다.
▶미국의 적극 협조
미국이 내게 북방외교에 신중을 기할 것을 충고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미국은 나의 정책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믿고 지원해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미국은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제37장 北京으로 가는 길
▶金宗輝-朴哲彦이 큰 역할
소련과의 수교과정에서처럼 중국과의 관계개선 과정에서도 내가 직접 일을 시킨 사람은 김종휘(金宗輝) 외교안보수석과 박철언(朴哲彦) 장관뿐이었다. 공식적인 채널은 김 수석이 담당했다. 박 장관은 비공식 라인이었는데 헝가리와의 수교 때와 북한과의 비밀접촉 때 활약했다.
그런데 중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자칭 ‘특사’(特使)들이 상당히 많았다.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 친서를 전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는 중국을 상대하면서 청와대 수석이나 보좌관 이외의 사람을 통해 친서(親書)를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친서를 작성할 때도 어떤 경우건 김종휘 수석의 손을 거치게 했다. “노 대통령이 취임한 지 8일 만에 중국 태생의 한의사 한 사람을 중국에 비공식 특사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와전(訛傳)된 것이다.
▶天安門 사태 비난에 부시와 대처 설득
1989년 6월4일 중국 베이징에서 천안문(天安門)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 영국의 대처 총리 등 여러 사람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다. 그들은 인권문제라는 차원에서 상당히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당시 미(美) 의회도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그들에게 중국의 역사와 문화·국민성 등을 설명하고 중국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제38장 韓中수교의 幕前幕後
▶“중국은 각하의 품안으로 걸어 들어올 것입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할 때에도 나는 적극적으로 중국을 지원했다.
그 해 10월17일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이 나를 찾아왔다.
“제가 보기에 한국이 중국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중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것이 더 큰 것 같으며 대(對)북한 관계도 각하의 뜻대로 풀려 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결국은 각하의 품안으로 걸어들어 오는 날이 올 것입니다.”
▶대만과 중국 사이의 선택
한중 수교는 중국 측이 먼저 제의한 것이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간절히 바라던 것을 중국 측이 제의해 왔는데 받아들이지 않거나 늦출 이유가 없었다.
▶중국 지도자들 속에 녹아 있는 역사의 무게
나는 10여 년간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은 모가 나지 않고 화합을 잘 이루며,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과 능력이 몸에 배어 있고, 국제적인 감각이 풍부한 사람들이 지도자군(群)을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는 과학기술계 출신이 많아서인지 선진화(先進化)에 중점을 두고 이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키우는 경향이 뚜렷해 보였다.
제39장 남북대화시대의 開幕
▶“한국의 양해 없이 북한과 상대하지 말라”
건국 이래 우리가 줄곧 지켜온 대북(對北)정책은 ‘남·북한 문제는 남북한이 해결한다’는 당사자 해결 원칙이었다. 나는 미국·일본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남북관계, 통일문제는 우리가 해결한다. 미국과 일본은 남북대화에 유리한 여건만 조성해 달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제쳐놓고 북한과 직접 협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내가 취임한 이후 우방(友邦) 가운데 어느 나라,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제쳐놓고 북한과 직접 협상하지 않았다. 북한이 제안한 남한·북한·미국의 3자회담이 성사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원칙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이후 무너지고 말았다.
제6공화국 시절에는 남북기본합의서뿐만 아니라 비핵화(非核化)공동선언까지 우리가 직접 주도했다. 그런데 다음 정부에 들어가 핵협상에서 우리는 빠지고 미국과 북한이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협의하기는커녕 단독으로 회담을 해놓고 몇 십억 달러에 이르는 청구서만 내밀었다.
내 재임 중에도 북한은 우리를 제외시키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려 했다.
이 기간 중 단 한 차례 미북(美北) 고위급회담이 있었는데 캔터 미 국무부 차관과 김용순(金容淳) 대남(對南)담당 비서의 회담이었다.
1991년 가을 미국은 캔터 차관과 북한 외교부 강석주(姜錫柱) 부부장의 회담을 갖고 싶다는 뜻을 우리 측 김종휘(金宗輝) 수석에게 타진해 왔다. 김 수석의 보고를 받고 우리는 “좋다, 단 한번이다. 그러나 상대는 강석주 부부장이 아닌 김용순 비서로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양해했다.
우리는 강석주 부부장보다는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김용순과 대화하게 함으로써 “미국이 단독으로 북한과 대화를 할 수 없다. 남북한 당사자 회담이 한반도 해결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김일성에게 확실하게 통보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미북 간 대화를 통해 북한에 ‘남한과 접촉하는 길밖에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려 했던 것이다.
▶6者회담 반대의 이유
제6공화국 시절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희망하면서 우리 쪽에 의견을 물어온 일이 있었다. 그는 한국 측의 동의를 받지 않고 그냥 가는 것이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측의 의사를 타진해 왔다. 우리 측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자 그는 방북(訪北) 의도를 철회했다.
▶“김일성은 유죄, 꼭 전하라”
나는 9월6일 오후 4시 연(延) 총리 등 북한 측 대표단 열 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남북한 문제 전반에 대한 우리 측 입장을 설명하고 남북 정상(頂上)회담의 조기(早期) 개최를 제안했다.
나는 연 총리와 개별면담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김일성 주석은 6·25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6·25는 우리 민족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 피를 흘리게 했으므로 그만큼 그 죄의 당사자다. 나는 당시 학생이었다. 나 자신 전쟁터로 나가 싸웠다. 많은 친구와 동료들이 죽었다. 나는 분명한 피해자다. 이 엄연한 비극이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지워지겠는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을 뉘우치고 무언가 죄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양극(兩極)으로 대립하고 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비극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남북한 간에 협력관계가 이루어져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긴다면 죄를 벗는 큰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김 주석이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나는 아직 젊다. 나는 앞으로 누구와도 만날 기회가 있다. 하지만 김 주석은 노령(老齡)이어서 그럴 기회가 별로 없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라기보다도 정상회담은 당신들 주석을 위해서도 백 번 좋은 일이다. 그러니 이 뜻을 솔직하게 그대로 전해 달라.”
연 총리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예, 알겠습니다. 꼭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본 연형묵은 착하고 무던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진실로 김일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김일성이야말로 이 엄청난 역사적 비극을 낳은 당사자가 아니던가. 결자해지(結者解之)를 해야 하는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김일성, “고려연방제 해야 한다” 되풀이
10월18일 오후에는 김일성 주석이 강(姜) 총리를 금수산 주석궁으로 초청해 20분간 단독면담을 한 후 대표 일행과 10분간 공동면담을 했다.
사실 우리측 대표들은 냉랭해진 회담 분위기를 감안할 때 김 주석과의 면담이 제대로 이루어질지 회의적이었으나 어쩐 일인지 북측은 예정대로 면담을 진행시켰다.
이날 나의 지시에 따라 강 총리가 고위급회담의 한계성을 거론하며 “두 정상께서 만나서 평화협정과 불가침선언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시면 좋겠다”고 하자 김 주석은 “총리회담에서 모든 것이 합의된 후에 노 대통령을 만나 악수를 해야 의미가 있지 그 전에 만나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 개의 지방정권을 두고 한 나라 한 민족을 만들어 가야 한다”며 불쑥 고려연방제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제42장 南北 막후 ?話
▶김일성의 ‘이상한’ 남북 정상회담 제의
제6공화국 시절 남북 정상(頂上)회담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북한 측의 여건이 덜 갖춰졌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자신감이 생기고 무언가 플러스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와야 하는데 실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하자”는 원칙에만 동의하면서 자꾸 핑계를 댄 것이다.
김일성은 단 한번 나를 북한에 초청한 적이 있었다. 1992년 봄 윤기복(尹基福) 조평통 위원장이 김일성의 특사로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 초청 시기가 김일성의 생일과 맞물려 있었다.
게다가 북한 측 비밀창구 역할을 해온 박철언(朴哲彦)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이야기로는 김일성의 초청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나는 정상(頂上)회담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모양새가 너무 나쁘다고 판단해 초청을 거절했다. 모양새를 구겨 가면서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밀창구
나는 북한의 오판(誤判)을 막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정상회담을 생각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전의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全斗煥) 대통령도 그랬을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단번에 합쳐지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북한이 우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했다. 김일성이 서울에 와서 이곳저곳을 보게 되면 감히 전쟁을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일성이 오판(誤判)을 해서 우리나라를 전쟁의 불바다로 만들어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만은 절대로 막아야 했다. 나는 나라를 책임지면서 이 점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남북을 오간 사람들
그해 12월23일에는 스티븐 솔라즈 미 하원의원이 북한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나를 예방했다. 그는 첫 인사부터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김영남 등과 7시간30분 동안 면담했는데 김일성 등 북한 측 인사와 대화를 하는 것이 마치 치과환자가 마취를 하지 않고 이를 뽑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합니다”라고 말했다.
▶남북교류의 窓口 단일화
대북(對北)관계에 있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나 정부가 하고 민간이 해야 할 일은 민간이 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민간도 정부를 거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란 위험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통일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아 모든 것을 안이하고 낭만스럽게 보는 경향이 강했다. 남한의 정치인·재야인사·학생·문인 등이 앞다퉈 ‘교류하자’, ‘대화하자’며 평양에 가겠다고 법석을 떠니까, 만날 사람을 고르고 만날 시기를 정하는 ‘칼자루’를 북한이 쥐게 된 것이다.
▶내가 만난 북한 인사들
내가 만난 북한사람 중에 특별히 ‘가능성이 있겠다’고 느낀 사람은 김달현 부총리였다. 김 부총리는 자신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을 줄 알았다. 나는 그의 그런 면모를 보면서 “채찍보다는 당근을 많이 주면 효과가 있겠구나”하고 느꼈다.
김종휘 수석 역시 그가 가장 개방적이고 상당히 실무적인 힘도 갖고 있다고 했다. 퇴임 후에 들으니, 김달현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 개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김정일한테 미움을 받고 한직(閒職)으로 밀려났고, 그 후 자살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산업 시설을 시찰하고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고 문제의식도 생겼을 것이다. 이것이 그에겐 비극의 단초가 된 셈이다.
▶조작은 없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북풍(北風)사건이 불거지자 “6공화국 말기에 일어났던 이선실 사건이 조작극이 아니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당시 여당의 대통령 후보인 김영삼 씨를 당선시키기 위한 선거용이 아니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115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KAL기 폭발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다.
이선실 사건은 여·야 할 것 없이 정치인이 많이 관련되었다고 하지만 정책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청와대에서 논의될 성질의 사안은 아니었다.
1992년 10월 당시 이현우(李賢雨) 안기부장이나 정형근(鄭亨根) 안기부 1차장 선에서 다뤄졌던 이 간첩 수사 사건에 대해서 김종휘(金宗輝) 수석이나 다른 청와대 참모들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했다.
제43장 한반도 非核化 선언
▶非核化 선언, 核不在 선언
그때 마침 김종휘 수석으로부터 “미국이 전(全)세계적으로 배치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한국 내 전술 핵무기도 곧 철수할 것 같다”는 정보 보고를 들었다. 나는 “그러면 됐다. 미군의 핵무기 철수 방침을 정책적으로 활용하자”고 결심했다. 나는 1991년 9월 부시 대통령이 ‘핵 군축 선언’을 하기 직전 두 차례에 걸친 정상(頂上)회담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밝히고 곧 바로 비핵화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언론은 핵무기가 여러 군데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한 군데뿐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나의 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협조를 해주었다. 북한의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먼저 주한미군에 배치된 핵무기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부시 미 대통령이 전(全) 세계적인 전술 핵무기 철수 방침을 추진하고 나섬으로써 절묘한 타이밍을 잡은 셈이었다. 미국 측은 내가 주도해서 비핵화 선언을 내놓을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노력 자체가 안보를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주한미군사령관, “전술핵이 있습니다”
미군의 한국 내 전술핵 배치는 과거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해외 핵무기 배치에 대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NCND: Neither Confirm, Nor Deny)는 미국의 오랜 정책에 따라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사실을 공식으로 알게 된 것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며칠 안 되어서였다.
릴리 주한 미 대사와 메네트리 미 8군사령관이 “매우 중요한 사항에 대해 노 대통령께 보고하겠다. 여기에는 김종휘 수석이 통역을 하고 일절 다른 사람을 배석시키지 말아 달라”고 연락을 해왔다. 그 자리에서 메네트리 사령관은 “대한민국에 전술핵이 있습니다”라고 알려줬다. 미국 측은 한국 국방부 장관에게도 공식적으로 남한에 핵무기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았고 대통령인 내게만 직접 보고를 통해 확인해 주었다.
▶부시에게 “조건부 전술핵 철수 수락” 제안
주한미군이 한국 내에 갖고 있는 핵무기의 철수를 맨 처음 거론한 것은 나였다. 1991년 7월2일 오전(한국시간 2일 밤) 나는 부시 미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頂上)회담을 하면서 한반도 핵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식으로 제기했다.
제46장 북방외교의 철학
▶북방정책 추진의 원칙
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시적이거나 즉흥적이지 않았다.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해결하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큰 틀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했다. 때문에 북방외교는 소련과 중국, 남북한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가면서 전개되었다. 예를 들면 소련을 놓고도 단지 소련만이 아니라 중국·일본·미국·남북한 간의 관계를 모두 고려하면서 전략과 구상을 세웠다. 최고통치자로서 구체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그 효과까지도 철저하게 분석한 후에 큰 틀 안에서 결정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국 외교를 종래의 추종(追從)외교에서 자주(自主)외교로 전환시켰다. 나는 냉전 시절부터 ‘자유진영에 속한 나라들이 공산진영의 나라들과 마음대로 교류하고 수교하고 다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하고 생각했다. “남의 눈치 보고, 추종하고, 이게 무슨 자주 외교권을 가진 나라인가. 그러고도 민족의 자존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自問)하곤 했다. 북방외교에 내재(內在)된 나의 기본 철학은 바로 이것이었다.
제47장 退任과 歸鄕
▶인수인계할 기회 없었다
나는 그가 내 뜻에 대략적으로라도 동의하고 그렇게 따르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일어나는 현상은 내 기대와는 너무나 어긋난,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부터 취임할 때까지 석 달간 청와대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세부적으로 인계해야 할 일, 또 다짐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게 없었다.
물론 나 자신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 때까지 청와대를 방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때는 경우가 달랐다. 내 전임자가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나의 방문을 사절하는 대신 그가 우리 사저(私邸)를 방문했다.
어쨌든 김 당선자와는 2개월 반 동안 대화가 끊긴 채 1993년2월25일 대통령 취임식을 맞았다. 새 대통령 내외는 취임식 당일에야 청와대를 공식 방문했다. 그러나 극히 의례적인 방문에 지나지 않았다. 함께 앉아 차 한 잔 나누는 정도에 불과했다. 집무실과 별실을 소개하고 한두 가지 중요 사항을 인계하면서 몇 마디 담소한 것이 고작이었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전율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해 대한 자책감(自責感)을 느꼈다. 투쟁적 구호로 점철된 취임식이 끝날 무렵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수많은 관중들을 향해 양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나는 순간적이지만 그의 취임사를 듣고 불안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많은 관중들에게 안도감을 안겨 주고 싶은 생각에서 의식적으로 그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었다. 나는 김 대통령의 참 모습이 취임사와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아내와 함께 연희동 집으로 향했다.
▶무기도입 과정은 깨끗했다
나는 무기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티끌만 한 의혹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6공화국에서는, 국가안보를 위한 율곡 사업을 통해 비자금이나 통치자금을 조성하지 않았다. 나는 외국의 방위산업체 사람들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청와대가 무기 구입에 관여한 것처럼 보도하곤 했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군(軍)이 차세대 전투기 도입 시 F/A-18 전투기를 계속 건의했는데, 청와대가 반대해 F-16으로 번복 결정했다’는 식으로 보도한 적이 있는데 이 대목은 사실과 다르므로 여기에서 명백하게 해명하고자 한다.
▶F-16 선정의 진실
공군은 F-16의 공대공 미사일 장착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기 때문에 나는 외교안보수석실의 부정적인 검토 의견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틀림없는가, 기술이전 조건을 틀림없이 지킬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사항을 다짐받으면서 F/A-18로 결재했다. 이에 대해 국방부 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은 “그 조건들은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그 후에 “F-16의 문제점이 해결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가격에 이상이 없다는 두 번째 확인이 있은 한 달 후인 1990년 9월, 맥도널 더글러스 측에서 기종 결정 당시 총 50억 달러로 규정했던 F/A-18 구입 가격을 62억 달러로 높여 제시해 왔다. 이는 달러 베이스로는 24% 상승이지만 환율 변동까지 고려하면 원화의 국방예산상 약 50%가 늘어나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가격을 절충하고 기종(機種) 선정을 재검토한 것이다.
이종구 국방장관과 한주석 공군참모총장은 1990년 10월 내게 세 가지 대안을 보고했다.
첫째 전투기 대수를 120대에서 80대로 줄이는 안, 둘째 구매 기간을 늘리면서 도입을 지연시켜 예산을 확보하는 안, 셋째 국내 조립을 포기하고 완제품을 도입하는 안 등이었다.
나는 이(李) 장관에게 “3개 안 모두 문제가 있으므로 기종(機種) 선정, 획득 방법 등 모든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기종 선정 작업을 국방부와 공군에서만 하지 말고, 합참·국방과학연구소·국방연구원 등 관계부처의 전문가들도 참여시켜 광범위한 의견을 들으라고 당부했다.
그 결과 1991년 3월 국방부에서 ‘F-16을 들여와도 문제가 없다’는 수정 건의가 올라왔다. 얼마 전에 있었던 걸프전에서 F-16의 우수한 성능이 입증되고, F-16이 새로운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암람’을 장착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F-16은 가격 면에서 F/A-18보다 15억 달러가 적어 비용 대 효과 면에서 유리하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다시 그 건의를 받아들여 F-16으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F/A-18은 훌륭한 최첨단 전투기이고, 만약 맥도널 더글러스가 가격을 인상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도입했을 것이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치적 흑심이나 리베이트에 관심이 있어 F-16을 결정하려 했다면 당초부터 F-16을 택하지 무엇 때문에 복잡하게 바꾸려 했겠는가.
율곡사업과 관련한 해외 발주에서 과거에는 리베이트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그러나 5공화국 시절 전두환 대통령은 “국제관례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관례가 있다면 그 돈을 받지 말고 그만큼 원가를 낮추라”고 지시했다.
나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참으로 전(全) 대통령이 잘한 조치’라고 생각하고, 참모들에게도 여러 차례 그 같은 말을 했다.
그 후 김영삼 대통령 정부에서 율곡사업에 의혹이 있다며 강도 높은 감사, 수사를 했지만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다.
▶“(YS,) 권력 잡자마자 TK 사냥”
"YS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내 가슴에 비수(匕首)를 꽂겠는가. 그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바라지는 않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30년간 군부(軍部) 출신들에게 억눌려 온 정치세력이 권력을 잡고 보니 그간에 억눌렸던 분노가 터진 것이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피해를 입고 있는 당사자가 김영삼 정권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선다는 것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48장 國政 리더십에 대하여
▶德이 있는 지도자
시대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 있다. 평상시에는 덕(德)을 갖춘 지도자가 바람직하지만, 전시(戰時)에는 유능한 군사전략가를 요구하고, 혼란기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
나는 어떤 시대건 지도자에게 있어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바로 덕(德)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강성(强性)은 아니었다. 남을 누르고 앞서 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럭비를 예로 들어도 개인 플레이가 아닌 팀 플레이에 그 정수(精髓)가 있질 않은가. 리더일수록 팀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믿어 왔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내가 속한 조직이 발전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간단히 정리하면 ‘화합’과 ‘인내’가 내 인생의 대표적인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화합에서 양보가 나오고, 인내에서 포용이 나온다고 믿는다.
민주화의 출발점이 된 6·29선언, 야당과의 연합을 꾀한 3당 합당, 그리고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한 노사정책, 적대(敵對)관계에 있어 온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나로부터 이뤄진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은 바로 이 ‘화합’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것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신 할머니와 어머니의 공력(功力)으로 태어났다는 출생의 의미에서 얻어진 ‘베풂’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만난 스님들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라. 그리 하면 채워질 것이다”는 말씀을 자주 들려 주셨다.
나의 이런 뜻을 담아 어느 참모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 ‘참·용·기’, 즉 ‘참고, 용서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친인척 관리
내가 언제나 미안함을 금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친인척과 친지(親知), 그리고 학교 동기와 선후배, 고향 사람들이다.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제대로 챙겨 주기는커녕 관심조차 기울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히려 불이익을 당한 사례까지 있었다. 친인척 가운데 능력 없이 어떤 직책을 받거나 큰 돈을 번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자부할 수 있다.
처남인 김복동(金復東·육사11기·육사교장·예비역중장·광업진흥공사 사장), 동서인 금진호(琴震鎬·5공화국 상공부 장관) 같은 이들은 능력이 출중한 데도 친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직(公職)에 중용하지 못했다.
그러면 “박철언(朴哲彦)은 왜 등용했느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나는 측근들에게 “박철언은 친인척 개념에 넣지 말라”고 이해를 시켰다.
굳이 따지자면 처가쪽으로 먼 친척(처고종사촌)이긴 해도 그보다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시절부터 공직에 기용되었던 사람이다.
제49장 정치자금
▶原罪
나는 1995년 11월 수감 직전에 발표한 ‘국민에 드리는 말씀’을 통해 “나 혼자 모든 책임을 지고 어떤 처벌도 나 혼자 달게 받겠다”고 밝혔다.
이후 정치자금과 관련해서는 어떤 발언도 하지 않았다. 인터뷰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이제 회고록을 작성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는 마당에 사실관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언급하는 내용으로 인해 또 다른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역사와 국민 앞에 내 인생과 철학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남겨 놓는 진실된 술회라고 믿어주었으면 한다.
▶정치자금 모집의 원칙들
5공화국 시절 통치자금은 집권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지 않았나 싶다. 나 자신 5공화국에서 공직(公職)을 맡고 있는 동안 자금조성에 관여한 일은 없다. 내가 느낀 분위기가 그렇다는 점을 기술할 따름이다. 5공화국 시절의 자금조성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 이권(利權)을 전제로 한 자금은 받지 않는다.
2. 제공되는 자금에는 조건을 달지 않는다.
3. 외국기업인이 수주(受注) 대가로 제공하는 커미션은 받지 않는다(대신 원가에서 그 액수만큼을 깎게 한다).
이런 원칙은 과거에 비해 진일보(進一步)한 것으로 보인다. 제5공화국은, 외국기업의 자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가 말썽을 빚은 일본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았다.
나는 6공화국에 들어서서는 앞의 원칙에 몇 가지를 추가했다.
1. 재무제표(財務諸表)가 나쁜 기업
2.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기업
3. 정치자금 헌납으로 기업운영에 지장을 초래하는 기업
이런 기업들로부터는 정치자금을 일절 받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런 뜻을 몇몇 측근들에게 주지(周知)시켰다.
<<이하 49장은 발췌 생략. 全文 참조>>
제50장 따뜻한 눈으로 역사를 보자
▶과거 부정, 자기 부정
우리 사회풍조 가운데 ‘어용(御用) 기피증’이라는 병이 있는 것이었다.
교수 언론인 등 식자(識者)들은 ‘저 사람은 어용’이라는 낙인(烙印)이 찍혀버리면 사회적 생명이 끊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잘못된 것은 비판하고, 옳은 정책은 밀어 주고, 그 정책이 시행 과정에서 차질을 빚는다면 그것을 지적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학자와 식자(識者)들의 도리요 사명이거늘, ‘어용’이라는 낙인을 두려워해 몸을 사리거나 비판만 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産母를 부정한 金泳三 정권
이런 감정이 복 바쳐 오를 때도 있었다.
‘오호라, 국민들이여! 특히 식자들이여!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 위대한 일을 이룩한 기성세대를 매도하고 부정하고 죄인시(罪人視)하는가! 서글프고 슬프도다.’
위대한 건국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말년(末年)에 측근의 잘못으로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해서 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이바지한 업적, 광복 후 혼란기를 극복하며 건국한 업적, 그리고 투철한 반공이념으로 김일성의 남침(南侵)을 좌절시킨 업적을 없었던 일처럼 역사에서 지워 버릴 작정인가?
4·19 이후에 1년간이란 단명(短命)으로 끝난 장면(張勉) 내각을 무능한 정권이라고 해서 버릴 것인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군사혁명, 독재, 장기집권을 했다고 해서 국민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조국 근대화에 불을 붙여 경제발전을 성공시켜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진 업적을 없애 버릴 수 있는가?
10·26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난국(難局)을 극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약속대로 단임(單任)만 하고 물러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군사반란이라는 죄목으로 역사에서 지워 버릴 셈인가?
제6공화국은 6·29선언의 약속에 따라 여야 합의로 국민투표에 부쳐 개정된 헌법에 의해 출범했다. 그 헌법에 따라 국민들이 나를 대통령으로 직접 선택했다.
그럼에도 집권당인 6공화국의 민정당(民正黨)과 합당해 민자당을 만들고 그것을 모체(母體)로 출범한 김영삼(金泳三) 정권이 산모(産母) 역할을 한 나를 군사반란이란 죄목을 뒤집어씌워 단죄(斷罪)해 역사의 표면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가?
▶美化도 自虐도 필요 없다
우리가 이룩한 일들은 너무나 많다. 그것들을 차곡차곡 챙겨서 우리가 쌓아올린 탑을 확인하자. 그것을 이룩한 우리, 서로에게 참으로 수고했노라고 위로하자. 성취한 보람을 함께 나누자. 후세들에게 우리가 이룩한 것이 이것이라고 떳떳하게 물려주자.
목차
노태우 회고록 上 -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머리글
제1장 나의 어린 시절
제2장 陸士 생도 시절
제3장 국군 將校의 길
제4장 5ㆍ16혁명과 방첩대 생활
제5장 베트남 戰線
제6장 維新과 尹必鏞
제7장 空輸여단장 시절
제8장 경호실과 車智澈
제9장 9사단장
제10장 10ㆍ26사건에서 12ㆍ12까지
제11장 수도경비사령관-보안사령관 시절
제12장 서울올림픽 유치 지휘
제13장 2ㆍ12총선과 민정당 대표
제14장 6ㆍ29선언-모든 것을 건 승부
제15장 13代 대통령선거
제16장 취임 前後
제17장 서울올림픽-祖國이 가장 빛났던 순간
제18장 '5共 청산'?風
제19장 중간평가 유보
제20장 3당 合黨과 갈등
제21장 민자당 競選과 金泳三
제22장 중립내각으로 大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