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강영훈 회고록
- 개인저자
- 강영훈 저
- 발행사항
- 서울 : 동아일보사, 2008
- 형태사항
- 587 p.; 24cm
- ISBN
- 9788970906232
- 청구기호
- 991.1 강646ㄴ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
이용 가능 (1) | ||||
1자료실 | 00010603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10603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1자료실
책 소개
소신대로 한평생
강영훈 前총리가 들려주는 한국 현대사
회고록을 쓰며
생각해보면, 나의 한평생은 나 혼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환경 속에서 여러 선생님의 가르침, 여러 조직체 상관의 지도, 수많은 동지들의 격려와 도움 덕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여곡절의 시련 속에서 오늘에 이른 나의 80평생을 돌아보니 회고록이란 것이 완전한 내 삶의 독점물이거나 집안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집필을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족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신 많은 분들에 대한 사은(謝恩)의 마음을 담아 이 회고록을 썼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다양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나만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광복된 뒤 북한에 공산체제가 들어서자, 나는 공산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옛 소련의 정책에 환멸을 느끼고 월남했다. 하지만 자유를 가장한 당시 남한의 무질서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면서 군인의 삶을 시작하여 육군 중장까지 승진했다. 그러다가 5.16군사혁명의 반혁명분자 1호로 지목되어 육사 교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어야만 했고, 1년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불혹(不惑)의 나이에 어렵게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정치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원장,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 등을 지내면서 한동안 교육.연구 분야에서 일하기도 했다.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는 주영(駐英), 주교황청 대사를 지내는 영예를 가졌고 짧지만 국회의원(전국구)도 경험했다. 1988년 말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2년간 재임하면서 역사적인 남북국무총리회담을 추진하기도 했다.(회고록 머리말 중에서)
청농의 인생에서 ‘소신(所信)’의 의미
“어떤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체 안에서 나를 반혁명분자라고 부르며 구속을 했다 해도, 나는 내 양심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럼이 없었고 그들은 내 정신의 자유를 한 치도 침범하지 못했다. 진실 앞에서 자유로이 죽음을 택할지언정 진실을 부인하면서 목숨을 부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5.16군사혁명 때 장교 구금 제1호가 되어)
왜 벽창우인가.
“창성(昌城)과 이웃 벽동(碧潼) 군에서 기르는 한우를 벽창우(碧昌牛)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이 소는 힘이 좋고 동시에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사람을 벽창호라고 부르게 되었다. 창성 출신인 나의 고집불통 성격도 어쩌면 벽창우를 키운 이 지역의 성격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평안북도 창성의 시골 소년)
주요 내용
1장 시골 소년, 세상과 만나다
영변농업학교 3학년 어느 날 조선어독본 강의시간이었다. 그날 따라 박병희 선생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오늘 이 시간이 조선어독본 마지막 수업이라고 하셨다. 한순간에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선 사람이 왜 조선어독본을 배울 수가 없단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2장 대한민국 군인
참모총장실에는 장도영 참모총장과 박정희 장군이 앉아 있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육군 사관생도를 정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기반을 확립한다는 군사혁명 구호에 어긋난다, 또한 장래의 군 간부 양성을 위한 교육상 견지로 보아서도 사관생도 시가행진은 온당치 못하다고 했다.
3장 학문 연구와 외교관의 길
나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사회에 민주정치 제도가 뿌리내리기를 염원하면서 군인생활을 한 나는, 군사혁명이 일어난 현실을 학문적인 차원에서 이해해보고자 했다. 만주 건국대학 시절은 나에게 민족을 위해 우선 배우고 알아야 하겠다는 막연한 배움의 길이었다. 반면에 불혹의 나이에 결행한 미국행은 달랐다. 우리 민족과 사회에 어떻게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질문을 가슴에 안고 떠난 배움의 길이었다.
4장 국무총리직과 나라 정치
군대 행정 외에 정부 행정에서는 이렇다 할 경험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더니 노태우 대통령은 “누구는 경험이 있어서 합니까. 하다보면 경험도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다. 1988년 12월 5일 나는 청와대로 들어가 국무총리 임명장을 받았다.
5장 민주사회운동의 꿈
군인으로, 학문 연구자로, 외교관으로, 국무총리로 평생을 산 나에게 봉사단체 수장직(대한적십자사 총재)은 내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아주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6장 내가 보고 만난 세상과 사람들
-민족의 현실을 깨우쳐주신 박병희 선생
-영원한 스승 육당 최남선선생
-단애 윤세복 선생과 대종교
-공사를 구분한 원칙주의자 이응준 장군
-뛰어난 능력과 인품, 이승만 대통령
-4.19와 이기붕 의장 가족
-뛰어난 기품, 엘리자베스 여왕
-커다란 평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나의 가족들
강영훈 前총리가 들려주는 한국 현대사
회고록을 쓰며
생각해보면, 나의 한평생은 나 혼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환경 속에서 여러 선생님의 가르침, 여러 조직체 상관의 지도, 수많은 동지들의 격려와 도움 덕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여곡절의 시련 속에서 오늘에 이른 나의 80평생을 돌아보니 회고록이란 것이 완전한 내 삶의 독점물이거나 집안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집필을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족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신 많은 분들에 대한 사은(謝恩)의 마음을 담아 이 회고록을 썼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다양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 나만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광복된 뒤 북한에 공산체제가 들어서자, 나는 공산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옛 소련의 정책에 환멸을 느끼고 월남했다. 하지만 자유를 가장한 당시 남한의 무질서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면서 군인의 삶을 시작하여 육군 중장까지 승진했다. 그러다가 5.16군사혁명의 반혁명분자 1호로 지목되어 육사 교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어야만 했고, 1년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불혹(不惑)의 나이에 어렵게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정치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원장,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 등을 지내면서 한동안 교육.연구 분야에서 일하기도 했다.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는 주영(駐英), 주교황청 대사를 지내는 영예를 가졌고 짧지만 국회의원(전국구)도 경험했다. 1988년 말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2년간 재임하면서 역사적인 남북국무총리회담을 추진하기도 했다.(회고록 머리말 중에서)
청농의 인생에서 ‘소신(所信)’의 의미
“어떤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체 안에서 나를 반혁명분자라고 부르며 구속을 했다 해도, 나는 내 양심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럼이 없었고 그들은 내 정신의 자유를 한 치도 침범하지 못했다. 진실 앞에서 자유로이 죽음을 택할지언정 진실을 부인하면서 목숨을 부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5.16군사혁명 때 장교 구금 제1호가 되어)
왜 벽창우인가.
“창성(昌城)과 이웃 벽동(碧潼) 군에서 기르는 한우를 벽창우(碧昌牛)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이 소는 힘이 좋고 동시에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사람을 벽창호라고 부르게 되었다. 창성 출신인 나의 고집불통 성격도 어쩌면 벽창우를 키운 이 지역의 성격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평안북도 창성의 시골 소년)
주요 내용
1장 시골 소년, 세상과 만나다
영변농업학교 3학년 어느 날 조선어독본 강의시간이었다. 그날 따라 박병희 선생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오늘 이 시간이 조선어독본 마지막 수업이라고 하셨다. 한순간에 교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선 사람이 왜 조선어독본을 배울 수가 없단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2장 대한민국 군인
참모총장실에는 장도영 참모총장과 박정희 장군이 앉아 있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육군 사관생도를 정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민주정치의 기반을 확립한다는 군사혁명 구호에 어긋난다, 또한 장래의 군 간부 양성을 위한 교육상 견지로 보아서도 사관생도 시가행진은 온당치 못하다고 했다.
3장 학문 연구와 외교관의 길
나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사회에 민주정치 제도가 뿌리내리기를 염원하면서 군인생활을 한 나는, 군사혁명이 일어난 현실을 학문적인 차원에서 이해해보고자 했다. 만주 건국대학 시절은 나에게 민족을 위해 우선 배우고 알아야 하겠다는 막연한 배움의 길이었다. 반면에 불혹의 나이에 결행한 미국행은 달랐다. 우리 민족과 사회에 어떻게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질문을 가슴에 안고 떠난 배움의 길이었다.
4장 국무총리직과 나라 정치
군대 행정 외에 정부 행정에서는 이렇다 할 경험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더니 노태우 대통령은 “누구는 경험이 있어서 합니까. 하다보면 경험도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다. 1988년 12월 5일 나는 청와대로 들어가 국무총리 임명장을 받았다.
5장 민주사회운동의 꿈
군인으로, 학문 연구자로, 외교관으로, 국무총리로 평생을 산 나에게 봉사단체 수장직(대한적십자사 총재)은 내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아주 즐겁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6장 내가 보고 만난 세상과 사람들
-민족의 현실을 깨우쳐주신 박병희 선생
-영원한 스승 육당 최남선선생
-단애 윤세복 선생과 대종교
-공사를 구분한 원칙주의자 이응준 장군
-뛰어난 능력과 인품, 이승만 대통령
-4.19와 이기붕 의장 가족
-뛰어난 기품, 엘리자베스 여왕
-커다란 평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나의 가족들
목차
1장 시골 소년, 세상과 만나다
2장 대한민국 군인
3장 학문 연구와 외교관의 길
4장 국무총리직과 나라 정치
5장 민주사회운동의 꿈
6장 내가 보고 만난 세상과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