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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100년 전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개인저자
이승원 지음
발행사항
서울 :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09
형태사항
339 p., 접지 1매(지도) : 삽화 ; 23 cm
ISBN
9788958622963
청구기호
909 이58ㅅ
서지주기
참고문헌: p. 331-339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1자료실00012090대출가능-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00012090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1자료실
책 소개
100년 전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 조선의 지식인들이 본 세계


현대인은 일로, 여가로, 세계를 향해 익숙한 발걸음을 옮긴다. 직접적 체험에 의해서든 시청각적 정보에 의한 것이든 우리에게 타국으로 떠나는 여정은 예상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대 조선 지식인들에게 조선 바깥의 세상은 그야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였다. 그들이 신세계로 떠났던 시기는 세계사적으로 격변기였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열이 넘쳐나던 시기였고, 세계대공황과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기였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자본주의의 아성과 사회주의 왕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광기에 찬 나치즘과 파시즘이 횡행하던 나라와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양으로 전락한 나라도 여행했다. 조선의 해외여행자들은 때론 5대양을 횡단하여 외국으로 떠났고, 때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미지의 세계로 떠났다. 저자 이승원은 바로 그들이 인식한 세계의 모습을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에 담아냈다. 신세계로 행군한 조선의 오디세우스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의 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는 조선 지식인들이 남긴 기행문을 통해서 그들의 눈에 비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조선 지식인들의 다양한 시선을 공유하고, 그들의 면면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수록된 많은 자료와 기록은 100여 년 전 우리의 모습과 타자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조선 지식인들과 동일한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들과 어긋나는 시선 속에서는 격세지감의 새로움으로 또 한 번 놀란다.

근대 초기 기행문을 연구한 나에게 해외여행은 100여 년 전 조선 지식인들이 남긴 흔적을 더듬어가는 일이기도 했다. … 조선 지식인들이 해외여행에서 맛보았던 느낌을 나 역시 느끼고 싶었다. … 1876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탄생한 조선인들의 외국 여행기를 분석하는 것은 힘겹지만 즐거운 작업이었다. 이후 내 관심은 식민지 조선에서 해방기까지로 확장되었다. 100여 년 전에 그토록 많은 여행기가 쏟아졌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 「지은이의 말」에서

그리고 책에 실린 50여 컷의 사진과 조선인의 세계 여행 경로 지도, 150편이 넘는 참고 자료와 문헌들은 100여 년 전 조선과 세계의 현장을 보여준다. 유학 전통이 흔들리던 과도기적 근대인 식민지 조선, 서구문명의 총화였던 일본, 일본 제국주의 실험실이었던 광활한 만주, 자본주의 근대의 거대 도시 상하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있던 꿈과 혁명의 러시아, 제국주의가 난무했던 원시의 동남아시아, 예의와 교양 속에 숨겨진 인종차별의 근대 국가 영국, 예술과 낭만의 나라이자 환락적인 서구 문화가 만연했던 프랑스, 맥주와 규율의 나라였던 히틀러의 독일, 제국주의 문명의 중심인 장대한 미국. 그리고 이들 문명 사이를 유람하며 방황하고 고민했던 조선 지식인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때로는 서구 문명에 대한 반발을 송신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구 문명에 대한 매혹을 수신하기도 했다. 또한 그 수신된 메시지를 다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송신했다. … 100여 년 전 지식인들에게 여행은 과거의 시공간 속에 웅크리고 있는 타자와의 대화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여행은 미래 세계와의 낯선 조우였다. … 문화적 정의(正義)란 타자의 문화를 인식한다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해서, 타자의 문화에 대해서 완전하게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로운 것은 아닐까.
- 본문 321~328쪽, 「꿈과 욕망의 신세계 기행」에서

조선의 오디세우스들, 신세계로 행군하다
― 조선 지식인들의 신세계 여정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경계 밖으로 떠남으로써 비로소 ‘주체-타자’가 되는 경험을 한다. … ‘서구세계’로 떠나는 것만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최초의 인간들이 탄생한 것은 근대 전환기였다. 식민지 시기에 이르면 서구세계는 물론이고 그동안 조선인 스스로 ‘야만의 세계’로 불렀던 곳까지 여행의 장소는 확장되었다. ‘야만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식민지 조선인들도 생겨났다. 공무(公務)를 통해서든 유학을 통해서든 여행을 통해서든 간에 조선의 지도 밖으로 행군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조선인들이 등장했다. 그들이 ‘상상-표상’했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대체 그들에게 여행이란, 서구세계란, 신세계란 무엇이었을까.
- 본문 21쪽, 「조선의 오디세우스들, 신세계로 행군하다」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식민지 조선인들이 조선의 경계 밖으로 떠났다. 유길준, 민영환, 윤치호, 서재필, 박승철, 이순탁, 나혜석, 최영숙, 박인덕 등등. 과연 그들에게 여행 혹은 유학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그 경험은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을까. 최영숙과 나혜석과 윤치호 등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여행은 일반적인 해외 ‘관광’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여행은 운명을 바꾸는 모험이었고,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세계를 향한 도전이었으며, 자신의 정체성과 대면하는 일이었다.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여정을 통해 근대 여행의 과정과 그 의미를 보여준다.
아직 문명의 ‘혜택’을 완벽하게 받지 못한 시베리아를 역마차로 횡단했던 민영환에게 러시아는 역마차의 더딘 속도와 지루하게 흘러가는 시베리아의 시간만큼이나 광대한 대륙으로 다가왔다. 반면 1930년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완전하게 개통됨으로써 나혜석과 손기정 같은 식민지 조선인들은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대륙인 러시아를 횡단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세계 최장거리 열차였다. 그것은 장대한 거리만큼이나 모험과 낭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또 프랑스에는 여행자들이 말만 들어도 마음이 들떴던 마르세유가 있었다. 그곳은 조선인들이 유럽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르세유는 지중해 항로를 따라 여행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꼭 통과해야만 하는 항구였다. 그곳에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뤘고, 조선 지식인들에게 가히 인종박물관 같아 보였다.

100년 전 그들에게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세계를 바라보는 조선 지식인들의 다양한 시선


조선 지식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부러움으로 그들을 바라봤고, 다른 이들은 모방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혹자는 퇴폐와 환락의 서구 도시 문화를 비난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시선을 내재화하여 조선이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열강이 되기를 꿈꾸는 이들도 있었다.
우선 문명부강의 서구를 부러워하면서 지향했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서구 신세계에는 기차, 증기선, 전신, 공원, 박물관, 학교, 공장, 활동사진, 무도회 등 문명의 산물들이 넘쳐났다. 특히 증기기관을 비롯한 기계공업은 그동안 조선의 유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가치체계를 흔들어놓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던 허헌은 서구의 기계공업에 대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구의 근대화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인식지평 너머에 있었다.

내가 외국에서 제일 경탄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기계공업이었습니다. 미국이나 독일 같은 데서는 참말 놀랐습니다. 어쩌면 화학적, 전력적 기계공업이 그렇게 발달되었습니까. 그 세계적 대기계공장을 보고는 누구나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고도 알지 못하겠고, 알고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 본문 61쪽, 「일본,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더불어 서구 문명 중에서도 영국의 ‘신사도’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본받아야할 정신이었으며, ‘신사’라는 말은 교양과 예절을 잘 지키는 ‘문명인’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근대 전환기로 한정한다면, 영국은 새롭게 떠오르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한때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었다면, 이제 영국이 그 위상을 대신했다. 유길준은 태평양을 횡단해서 약 1년 정도 유럽을 유람했다. 그는 서구적 근대화를 따라잡는 것이야말로 조선 지식인들의 마땅한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189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년 하례식 특명공사로 임명되어 영국으로 떠났던 민영환은 영국 사람들을 서구 세계의 으뜸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서구는 모방의 대상이었다. 서구식 매너와 조선식 매너의 간극은 어떤 면에서 보면 ‘문명과 야만’의 간극으로 보일 수 있었다.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조선식의 행동은 ‘야만스러운’ 행동이 된다. 가령 민영환의 개인비서이자 서기로 러시아 사행에 동참한 김득련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김득련은 자신의 발가벗겨진 몸뚱어리를 서구인들이 낱낱이 훑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욱이 그는 조선에서 파견된 사신의 일행인 자신의 위치, 자신의 행동이 곧 조선인 전체의 모습으로 표상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구경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린 김득련이 이 난처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타인을 모방’하는 방법이었다.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 ‘타인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이런 김득련의 행동은 어떤 면에서 조선의 근대화 과정과 닮았다. ‘타인의 모방’을 통해서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려다 더욱 큰 시련에 봉착한 김득련의 모습-커피에 설탕 대신 소금을 넣고 곤혹스러워하거나, 팬케이크에 소금과 후추와 겨자 소스를 듬뿍 친 것-은 서구를 모방하려다 더욱더 큰 수렁에 빠졌던 조선의 시대 상황과 유사하다.

반면, 제국주의 국가의 시선을 답습한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더 약한 나라를 야만으로 규정짓고, 그들을 지배하여 열강이 되고 싶어 했다. 식민지 조선 시기에 만주를 중심으로 한 북방과 남방은 무진장한 자원의 보고로 새롭게 발견된 지역이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의 금광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효석은 오지의 세계, 야만의 세계를 근대화의 물결로 덮고 싶다는 욕망으로 남양의 조그만 섬의 추장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는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인도양에 위치한 나라들에 대한 이런 조선인들의 인식은 과연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비해 얼마나 다른 것일까. 동남아시아 나라들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은 사실상 제국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토인(土人)은 모두 추하고 더럽고 빛이 검은데, 남녀가 모두 머리를 기르고 발을 벗으며, 위에는 붉은 보자기를 가리고 아래는 붉은 포목 두어 자를 두른다. 혹은 왼쪽 코에 구멍을 뚫어 고리를 꿰고 여자는 귓바퀴에 구멍을 뚫고 정강이에도 역시 금고리를 낀다.
- 본문 172쪽, 「동남아시아, 원시림에 대동아의 깃발을 꽂다」에서

‘추하고 더러운 사람들!’ 19세기 말 민영환의 시선에 붙들린 싱가포르 원주민들의 모습이다. 이는 서구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조선인들을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과 일치한다. 민영환이 싱가포르의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하게 타자의 문화와 습속을 자신의 입장에서 구별 짓는 방식인데, 이러한 시선 속에는 일종의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문명과 야만의 도식 속에서 베트남을 비롯한 남방국가들을 파악했다. 남방을 야만으로 규정함으로써 조선은 곧 문명이라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강한 국가가 없는 열대지방을 점령하는 것이 곧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라는 제국주의의 논리를 무의식으로 답습한 식민지 조선인들의 남방 판타지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의 목표인 상상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
- 본문 189쪽, 「동남아시아, 원시림에 대동아의 깃발을 꽂다」에서

그러나 정반대로 서구 문명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조선 지식인들도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 조선인들은 사행의 목적이 아닌, 유학이나 여행을 빌미로 서구를 방문한다. 그들이 보았던 미국과 유럽은 단순히 부강한 나라의 상징만은 아니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그 속에서 자본주의를 보고, 거대 도시화의 본질을 보고, 자본주의의 이면인 퇴폐와 향락을 보았다. 가령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는 동서양 문명의 접촉지인 동시에 살풍경의 술 취한 무뢰한들의 소굴이었고, 매음의 거리였으며, 밀항자와 탈선자들의 천국이었고, 갱단과 키드냅(kidnap)의 온상지였다.

최남선이 근대식 공원을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갈망했다면, 나혜석은 “공원은 전부 돈덩어리”라고 비판했다. 박승철이 영국의 부강함에 넋을 놓고 있을 때, 나혜석은 영국의 넉넉한 살림이 모두 식민지에서 착취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들이 영국을, 제국주의 문명국가를 보고 느낀 생각의 낙차는 ‘지금-여기’에서도 지속되는 일이 아닐지.
- 본문 218쪽, 「영국, 예의와 교양 속에 감춰진 근대의 이면」에서

신세계로 간 그들에게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까?
― 신세계에서 벌어진 흥미로운 사건들을 통해서 보는 조선 지식인들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에는 김관, 김기수, 김득련, 나혜석, 도유호, 민영환, 유길준, 윤치호, 이광수, 이순탁, 정경원, 최남선, 최영숙, 허정숙, 허헌, 홍종인, 김경재, 박대양, 이정섭, 정석태 등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신세계로 향한 조선 지식인들의 이력이 다양한 만큼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도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그 일화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조선 지식인의 면면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통신사 박대양이 아닌 유학자 박대양, 화가 나혜석이 아닌 인간 나혜석, 의학박사 정석태가 아닌 조선인 정석태를 발견한다.
박대양은 주자학의 시선으로 일본 로쿠메이칸의 연회를 바라보았고, 주자학적 예법으로 일본인들의 행동을 판단했다. 그러므로 그가 일본에서 마주친 서구화의 양식들을 모두 “사람을 현혹(眩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한편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로쿠메이칸의 연회가 시작되자 일본 해군 군악대가 연주하는 음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초대장을 들고 온 내외국인들은 모두 서구식 복장을 착용했다. 도포와 갓을 쓴 박대양 일행의 복장만 유독 눈에 뜨이게 튀었다. 더군다나 박대양에게 서구의 음악은 그동안 자신이 신봉했던 성리학적 예악관(禮樂觀)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협화음이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부둥켜안고’ 춤을 추고 있었다. 왈츠였다. 당시에 유행했던 프랑스풍의 왈츠는 프랑스 식민지 정책과 한 몸이 되어 국제적 ‘사교댄스’로 각광받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왈츠 앞에서 박대양은 기함했다. 뿐만 아니었다. 육군경 오야마 이와오의 부인이 그를 급습했다. 평생 “창부나 주모의 손”도 잡아본 적이 없는 박대양의 손을 오야마 이와오의 부인이 덥석 잡은 것이다. 육군경의 부인인 오야마 스테마츠는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모던 걸의 상징이었다. 육군경의 부인은 박대양에게 서양식 에티켓인 ‘악수’를 청하였던 것인데, 박대양은 그런 행동에 기겁하고 말았다. … 박대양은 로쿠메이칸의 연회에 적응할 수 없었다. … 그는 엄청난 혼란을 경험했다.
- 본문 47~49쪽, 「일본,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한편, 세계일주를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한 나혜석에게 해외여행은 세계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을 획득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혜석은 여행을 통해 세계도 조선도 객관화할 수 있는 힘을 길렀다.

평면과 입체를 통하여 용기화에 나타나는 무수한 선이 보이는 것 같이, 눈을 감고 있으려면 서양에 있을 때는 서양의 입체만 보이고 조선의 평면이 보였던 것이 조선 오니 조선의 입체가 보이고 서양의 평면이 보인다. 평면과 입체가 합하여 한 물체가 된 것 같이 평면, 즉 외면과 입체, 즉 내부가 합하여 한 사회가 성립된 것이니 어느 것을 따로따로 떼어 볼 수가 없다. … 그러면 구미인의 사는 것은 어떠하며 우리 사는 것은 어떠한가. 한 말씀 말하면 그들은 꼭꼭 씹어서 단맛, 신맛, 짠맛을 다 알아가지고 삼켜서 소화하는 것이오, 우리는 된 대로 꿀떡꿀떡 삼켜 아무 맛을 모르는 것이다. 결국 대변되기는 일반이나 대변될 동안에 경로가 얼마나 다른가.
- 본문 327~328쪽, 「꿈과 욕망의 신세계 기행」에서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한 의학박사인 정석태는 프랑스 클뤼니 박물관에서 정조대 사진엽서 두 장을 샀다. 그것을 산 이유는 조선으로 돌아간 후 화젯거리로 삼기 위해서였다. 중세시대의 정조대를 처음 본 정석태에게 그것은 “우리 동양의 도덕으로서는 보기에 드문 바이고 듣기에도 처음 되는 일”이라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나고 자란 정석태에게 서구의 문명이란 섹슈얼리티의 면에서는 ‘청결’과 ‘위생’, 그리고 일부일처제의 순결함이었을 것이고, 문화 전반에서는 고상한 취미의 발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포르노그래피와 관음증을 즐기는 프랑스 문화가 그에게는 ‘과연 문명국이 표방하는 문화일까’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을 것이다. 정석태는 프랑스의 성문화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려기보다는 지금까지 자신을 붙들어 매고 있는 조선적 문화 정체성으로 프랑스의 문화와 거리두기를 한다.
- 본문 240~241쪽, 「프랑스, 사랑과 예술의 유토피아」에서
목차
0 조선의 오디세우스들, 신세계로 행군하다 01 일본,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02 만주, 광활한 벌판에서 '제국'을 꿈꾸다 03 상하이, 자본주의 근대의 미추선악을 보다 04 러시아, 상상할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대륙? 05 동남아시아, 원시림에 대동아의 깃발을 꽂다 06 영국, 예의와 교양 속에 감춰진 근대의 이면 07 프랑스, 사랑과 예술의 유토피아 08 독일, 맥주와 규율, 그리고 히틀러 09 미국, 장대한 스펙터클의 문화 제국주의 10 꿈과 욕망의 신세계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