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유재현 온더로드 02
느린 희망: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해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소장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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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천천히 걷는 사회만이 만날 수 있는 희망에 대한
새로운 포토다큐에세이!
자본주의체제는 밤을 낮으로, 길을 도로로, 자연을 자원으로 만들어 놓으며 인간에게 편리함과 속도와 이기심(인간중심주의)을 주었다. 그리고 편리함은 더 빠른 속도를 가져왔고 그렇게 빨라지는 속도만큼 인간의 자기애도 높아져 갔다. 간혹 너무 빠른 이 속도가 숨이 차서 혹은 어지러워, 속도를 늦추고 싶지만 그러기엔 모두가 너무 빨리 달리고 있다. 모두가 150킬로미터로 달리는 도로에서 50킬로미터의 주행은 설령 그것이 ‘법적’으로 허락된 것이라도 민폐이거나 자해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숨참과 어지러움을 없앨 방법은 모두가 천천히 달리거나 ‘도로’를 벗어나 ‘포장’ 없는 ‘길’로 들어서는 것뿐이다. 이 책 『느린 희망』은 그렇게 모두가 천천히 달릴 때만이 만날 수 있는 인간적인 사회, 혹은 ‘길’로 들어섰을 때만이 맞닥뜨릴 수 있는 희망을, 쿠바 사회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사진과 글에 담아온 포토다큐에세이다.
<이야기를 품은 사진, 사진을 넘어 말하는 글>
『느린 희망』의 저자 유재현은 쿠바의 맨서쪽 끝 과나아카비베스 반도에서부터 동쪽 끝까지, 그리고 동쪽 끝 관타나모 만에서 다시 수도 아바나까지 총 3,451킬로미터를 여행했다. 여행 내내 그는 부지런히 쿠바의 자연과 사람과 도시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나 그가 렌즈를 통해 보고 있었던 것은 혹은 보고자 했던 것은 지금 그의 카메라가 담고 있는 모습들을 만들어낸 구조와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정을 따라 배치한 사진들 옆에 그가 보았던 구조와 현실을 글로 풀어내었고, 그 글들은 사진에 대한 단순한 감상을 넘어선 다큐에세이가 되었다.
전문 사진작가가 아닌 유재현이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들은 능숙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진들에서는 따뜻한 친근함이 느껴진다. 그 친근함은 피사체의 특징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없앤 데서 오는 친근함이다. 그는 그만큼 쿠바의 자연이 되었고, 쿠바 사람이 되었으며, 쿠바의 거리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가 찍은, 사람 하나 없는 담배밭에서도 어둠이 내려깔린 산에서도 도시의 전경에서도 그토록 많은 인간의 냄새가 묻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적인 사진과 함께 그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열망과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등을 따뜻하지만 날카롭고 진지하지만 유머러스한 문장 속에 녹여내어 싣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진과 글의 조화는 이 책 『느린 희망』을 쿠바 사회에 대한 리포트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상에 대한 영감을 주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
<위기와 극복, 부작용과 새로운 세계로의 가능성, 그 모두를 보다>
?자연과 인간의 다툼없는 친화 ― 쿠바 서부지역
“농부가 밭을 갈 때 소가 끄는 쟁기는 나무를 엇갈려 만든 쟁기판의 밑에 쟁기날을 두어 개 붙인 꼴로 생겼다. 때문에 농부는 쟁기판에 올라타고 소를 몬다. 그 뒤를 분주하게 따르는 것들이 있으니, 닭들이다. 수탉, 암탉, 큰닭, 중닭, 작은닭 가릴 것 없이 모여든다. 땅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뒤집어진 흙 속에선 온갖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기회를 놓칠새라 모여든 닭들에게 밭은 훌륭한 모이터인 것이다. 아하, 유기농이란 간단한 것이다. 논을 갈고 밭을 갈면 새와 닭들이 모이는 농사가 유기농이다.” ― 본문 p.21
1990년대 중반 이후 쿠바에서는 38만 5천여 마리의 소가 4만 대의 트랙터를 대신해 논과 밭을 갈고 있으며, 도시에서는 주차장과 공터를 활용해 식량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오르가노포니코)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오르가노포니코는 도시농업과 유기농업을 대표하며 전세계 생태주의자들에게 그 명성이 높다. 저자가 오르가노포니코에서 얻은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도시는 개발과 계획, 투자와 투기의 이름으로 곳곳에 공휴지를 숨겨놓고 있다. 도시농업은 그 땅을 인민에게 돌려주는 농업이다. 우리가 잃을 것은 개발과 계획, 투자와 투기, 환경의 파괴, 땅의 물신화이며 얻을 것은 생산의 어머니인 땅과 녹색의 도시이다.”
물론 쿠바가 이렇게 ‘생태’와 ‘유기농업’의 학교가 된 시작점에는 미국의 봉쇄가 있다. 미국은 1950년대까지 경제의 대미의존도가 80%에 이르던 쿠바에 대해 봉쇄를 가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90년대 동구권과 소련의 몰락으로 쿠바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더욱 봉쇄를 강화하여 거의 모든 교역과 원조를 중단했다. 그렇자 쿠바는 농업에 있어 ‘자급’의 원칙을 정하고 개혁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쿠바의 서부지역에서 봉쇄 때문에 시작된 어쩔 수 없는 농업개혁이 아니라 ‘전진’이 아닌 ‘후퇴’가 가져온 인간과 자연의 친화, 땅과 인민의 하나됨을 우리에게 펼쳐보인다.
인종간의 평등, 경쟁하지 않는 학교 ― 쿠바 중부지역
“상크티 스피리투스 주의 UBPC협동농장에 들렀을 때에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마침 쿠바의 세 인종을 대표하는 여성조합원 3총사를 부엌에서 만났다. 뮬라토(Mulato, 백인과 흑인의 제1대 혼혈아)와 흑인 그리고 백인. 평등 중의 하나는 인종간의 평등이고 쿠바에서 그것은 대체로 관철되고 있었다. 흑인에 대한 호칭은 ‘니그로’이다. 미국이라면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금기의 그 말이 쿠바에서는 스스럼없이 사용되고 있었다. ” ― 본문 p.110
어떤 하나의 얼굴색이 정치적·사회적 특권을 갖고 그 특권으로 인하여 남들보다 많은 부(富)를 축적할 수 있는 구조의 사회가 아니라면 그곳이 어디든 얼굴색에 따른 차별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재현은 쿠바 곳곳에서 아무 경계 없이 어울리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수학시간에 졸고 있는 쿠바학생들의 모습에 “역시 수학은 수학이로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한국과 쿠바 교육의 차이를 짚고 넘어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한국도 쿠바도 9년의 의무교육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의무교육이라면 최소한 교복과 학용품 그리고 급식 정도는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쿠바라는 나라에서는 그렇게 한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에서 교사 한 명이 32.2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쿠바에서는 12명을 가르친다. 한국의 중학교에서는 교사 한 명이 21.9명을 가르친다. 쿠바의 중학교에서는 10명을 가르친다. 또 하나. 쿠바에는 학생 수가 10명 이하인 학교가 2천 개가 넘는다. 한국의 농촌에는 폐교가 널려가고 있지만 쿠바에서는 가르칠 학생이 있는 한, 산꼭대기에도 학교를 짓고 교사를 보낸다.”(본문 p.293)
저항과 혁명의 산실 ― 쿠바 동부지역
“1511년 침략자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던 인디오의 지도자 하투에이(Hatuey)를 잡은 스페인 원정대는 하투에이를 처형하기 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꼬드김으로 개종을 강요했다. 하투에이가 물었다. ‘천국은 당신 같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난 지옥으로 가겠다.’ 침략자들은 하투에이를 산 채로 불에 태웠다.” ― 본문 p.175
쿠바의 동부는 콜럼버스가 최초로 상륙한 이래 스페인 식민지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쿠바 최초의 도시가 건설된 지역이다. 스페인에 대한 인디오들의 독립전쟁이나 쿠바혁명도 모두 이 지역에서 시작된 일들이었다. 또 말 많고 탈 많은 미군의 해군기지, 관타나모 기지가 있는 곳도 바로 이 지역이다.
인디오 저항이나 쿠바혁명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을 지나 관타나모에 온 저자는 쿠바혁명 당시 게릴라로 활동했던 뮬라토와 중국인의 혼혈인 할머니를 만났다. 근로영웅 표창도 받은 이 할머니는 손녀딸과 둘이서만 살고 있는데, 그 할머니의 연금은 겨우 150페소(약 6,000원)에 불과했다.
저자는 동부지역에서 혁명이란 ‘잠깐의 전복’이 아니라 ‘변함없는 끈기와 신념’을 가지지 않는 한 달성하기 어려운 ‘건설’임을, 혁명의 유적지와 관타나모 만 그리고 혁명전사였던 할머니의 오늘을 통해 말하고 있다.
쿠바‘인’의 수도 아바나
“아바나. 그 문턱을 앞두고 줄곧 보아왔던 탓에 이제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선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시경계 표지판이다. ‘어서 오세요. 서울입니다.’ 이런 말인 셈인데, 정확하게는 이렇게 씌여 있다. ‘모든 쿠바인들의 수도에 오셨습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가 아니라 ‘쿠바인’들의 수도에 온 것이다. 국가가 아니라 사람을 앞세운 발상이 신선하다. 자유, 조국, 혁명과 사회주의가 난무하는 쿠바에 또 하나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인간’이다. 현실에서는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은 단어들이다. 인간적 자유, 인간적 조국(국가), 인간적 혁명, 인간적 사회주의.” ― 본문 p.205
1900년대 초반 미국의 지배 아래 미국인들의 위락과 환락을 위한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아바나는 식민지 시대와 독재정권, 혁명, 구소련 영향하의 사회주의 체제, 소련의 몰락과 위기의 극복까지 쿠바 현대사의 모든 흔적을 오롯이 담고 있는 도시이다.
이곳에서 저자는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연주하고 춤추며 말레콘 해변 방파제에서 낮잠을 즐기는 아바나 사람들과 손님에게 아무 관심없는 상점의 직원들, 국영상점에서 훔쳐온 물건을 암거래하는 사람들, 유럽산 수입품이 즐비한 달러상점에서 로레알 염색약을 만지작거리는 젊은 여인들을 가감없이 만난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면서 저자는 카스트로가 한 “우리는 좀 더 잘 살게 되겠지만 소비사회로 가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쿠바사회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전한다.
하지만 그가 아바나의 끝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레닌의 석상 뒤 돌틈에 뿌리를 내린 작은 싹 하나이다. “빛바랜 역사의 조각이 된 그의 석상 뒤 틈새로 씨 하나가 날아와 자리를 잡고 싹을 틔웠다. 나무가 되어 그늘을 드리우라.”(본문 p.297)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해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근대사회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들이 곳곳에서 드러나자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도 ‘속도’에 대한 반성과 함께 ‘느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어쩌면 우리가 느리게 걷는 법을 알게 될 때 혹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해 걷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때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 『느린 희망』이 ‘쿠바’라는 거울을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유재현이 쿠바의 서부에서 만난 화초 키우는 청년은 화초 판매대 뒤에 이런 글을 붙여놓았다고 한다. “현명한 당신, 알아두세요. 홀수날에는 사랑을, 짝수날에는 우정을.” 청년의 사진과 함께 이 문구를 소개하며 뒤이어 저자는 말한다. “꽃을 키우려면 모쪼록 이렇게 키우십시오. 인간을 대하려면 모쪼록 이렇게 대하십시오. 정치도 개혁도 혁명도 이렇게 하십시오. 그럼, 우린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홀수날에는 서로를 사랑하고 짝수날에는 서로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회로 우리 사회를 만들어갈 하나의 영감을, 작은 상상력을, 저자는 쿠바 사회의 모습을 빌려 지금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새로운 포토다큐에세이!
자본주의체제는 밤을 낮으로, 길을 도로로, 자연을 자원으로 만들어 놓으며 인간에게 편리함과 속도와 이기심(인간중심주의)을 주었다. 그리고 편리함은 더 빠른 속도를 가져왔고 그렇게 빨라지는 속도만큼 인간의 자기애도 높아져 갔다. 간혹 너무 빠른 이 속도가 숨이 차서 혹은 어지러워, 속도를 늦추고 싶지만 그러기엔 모두가 너무 빨리 달리고 있다. 모두가 150킬로미터로 달리는 도로에서 50킬로미터의 주행은 설령 그것이 ‘법적’으로 허락된 것이라도 민폐이거나 자해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숨참과 어지러움을 없앨 방법은 모두가 천천히 달리거나 ‘도로’를 벗어나 ‘포장’ 없는 ‘길’로 들어서는 것뿐이다. 이 책 『느린 희망』은 그렇게 모두가 천천히 달릴 때만이 만날 수 있는 인간적인 사회, 혹은 ‘길’로 들어섰을 때만이 맞닥뜨릴 수 있는 희망을, 쿠바 사회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사진과 글에 담아온 포토다큐에세이다.
<이야기를 품은 사진, 사진을 넘어 말하는 글>
『느린 희망』의 저자 유재현은 쿠바의 맨서쪽 끝 과나아카비베스 반도에서부터 동쪽 끝까지, 그리고 동쪽 끝 관타나모 만에서 다시 수도 아바나까지 총 3,451킬로미터를 여행했다. 여행 내내 그는 부지런히 쿠바의 자연과 사람과 도시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나 그가 렌즈를 통해 보고 있었던 것은 혹은 보고자 했던 것은 지금 그의 카메라가 담고 있는 모습들을 만들어낸 구조와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정을 따라 배치한 사진들 옆에 그가 보았던 구조와 현실을 글로 풀어내었고, 그 글들은 사진에 대한 단순한 감상을 넘어선 다큐에세이가 되었다.
전문 사진작가가 아닌 유재현이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들은 능숙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진들에서는 따뜻한 친근함이 느껴진다. 그 친근함은 피사체의 특징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없앤 데서 오는 친근함이다. 그는 그만큼 쿠바의 자연이 되었고, 쿠바 사람이 되었으며, 쿠바의 거리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가 찍은, 사람 하나 없는 담배밭에서도 어둠이 내려깔린 산에서도 도시의 전경에서도 그토록 많은 인간의 냄새가 묻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적인 사진과 함께 그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열망과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등을 따뜻하지만 날카롭고 진지하지만 유머러스한 문장 속에 녹여내어 싣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진과 글의 조화는 이 책 『느린 희망』을 쿠바 사회에 대한 리포트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상에 대한 영감을 주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있다.
<위기와 극복, 부작용과 새로운 세계로의 가능성, 그 모두를 보다>
?자연과 인간의 다툼없는 친화 ― 쿠바 서부지역
“농부가 밭을 갈 때 소가 끄는 쟁기는 나무를 엇갈려 만든 쟁기판의 밑에 쟁기날을 두어 개 붙인 꼴로 생겼다. 때문에 농부는 쟁기판에 올라타고 소를 몬다. 그 뒤를 분주하게 따르는 것들이 있으니, 닭들이다. 수탉, 암탉, 큰닭, 중닭, 작은닭 가릴 것 없이 모여든다. 땅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뒤집어진 흙 속에선 온갖 벌레들이 꿈틀거리고 기회를 놓칠새라 모여든 닭들에게 밭은 훌륭한 모이터인 것이다. 아하, 유기농이란 간단한 것이다. 논을 갈고 밭을 갈면 새와 닭들이 모이는 농사가 유기농이다.” ― 본문 p.21
1990년대 중반 이후 쿠바에서는 38만 5천여 마리의 소가 4만 대의 트랙터를 대신해 논과 밭을 갈고 있으며, 도시에서는 주차장과 공터를 활용해 식량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오르가노포니코)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오르가노포니코는 도시농업과 유기농업을 대표하며 전세계 생태주의자들에게 그 명성이 높다. 저자가 오르가노포니코에서 얻은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도시는 개발과 계획, 투자와 투기의 이름으로 곳곳에 공휴지를 숨겨놓고 있다. 도시농업은 그 땅을 인민에게 돌려주는 농업이다. 우리가 잃을 것은 개발과 계획, 투자와 투기, 환경의 파괴, 땅의 물신화이며 얻을 것은 생산의 어머니인 땅과 녹색의 도시이다.”
물론 쿠바가 이렇게 ‘생태’와 ‘유기농업’의 학교가 된 시작점에는 미국의 봉쇄가 있다. 미국은 1950년대까지 경제의 대미의존도가 80%에 이르던 쿠바에 대해 봉쇄를 가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90년대 동구권과 소련의 몰락으로 쿠바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더욱 봉쇄를 강화하여 거의 모든 교역과 원조를 중단했다. 그렇자 쿠바는 농업에 있어 ‘자급’의 원칙을 정하고 개혁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쿠바의 서부지역에서 봉쇄 때문에 시작된 어쩔 수 없는 농업개혁이 아니라 ‘전진’이 아닌 ‘후퇴’가 가져온 인간과 자연의 친화, 땅과 인민의 하나됨을 우리에게 펼쳐보인다.
인종간의 평등, 경쟁하지 않는 학교 ― 쿠바 중부지역
“상크티 스피리투스 주의 UBPC협동농장에 들렀을 때에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마침 쿠바의 세 인종을 대표하는 여성조합원 3총사를 부엌에서 만났다. 뮬라토(Mulato, 백인과 흑인의 제1대 혼혈아)와 흑인 그리고 백인. 평등 중의 하나는 인종간의 평등이고 쿠바에서 그것은 대체로 관철되고 있었다. 흑인에 대한 호칭은 ‘니그로’이다. 미국이라면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금기의 그 말이 쿠바에서는 스스럼없이 사용되고 있었다. ” ― 본문 p.110
어떤 하나의 얼굴색이 정치적·사회적 특권을 갖고 그 특권으로 인하여 남들보다 많은 부(富)를 축적할 수 있는 구조의 사회가 아니라면 그곳이 어디든 얼굴색에 따른 차별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재현은 쿠바 곳곳에서 아무 경계 없이 어울리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수학시간에 졸고 있는 쿠바학생들의 모습에 “역시 수학은 수학이로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한국과 쿠바 교육의 차이를 짚고 넘어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한국도 쿠바도 9년의 의무교육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의무교육이라면 최소한 교복과 학용품 그리고 급식 정도는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쿠바라는 나라에서는 그렇게 한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에서 교사 한 명이 32.2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쿠바에서는 12명을 가르친다. 한국의 중학교에서는 교사 한 명이 21.9명을 가르친다. 쿠바의 중학교에서는 10명을 가르친다. 또 하나. 쿠바에는 학생 수가 10명 이하인 학교가 2천 개가 넘는다. 한국의 농촌에는 폐교가 널려가고 있지만 쿠바에서는 가르칠 학생이 있는 한, 산꼭대기에도 학교를 짓고 교사를 보낸다.”(본문 p.293)
저항과 혁명의 산실 ― 쿠바 동부지역
“1511년 침략자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던 인디오의 지도자 하투에이(Hatuey)를 잡은 스페인 원정대는 하투에이를 처형하기 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꼬드김으로 개종을 강요했다. 하투에이가 물었다. ‘천국은 당신 같은 사람들이 가는 곳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난 지옥으로 가겠다.’ 침략자들은 하투에이를 산 채로 불에 태웠다.” ― 본문 p.175
쿠바의 동부는 콜럼버스가 최초로 상륙한 이래 스페인 식민지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쿠바 최초의 도시가 건설된 지역이다. 스페인에 대한 인디오들의 독립전쟁이나 쿠바혁명도 모두 이 지역에서 시작된 일들이었다. 또 말 많고 탈 많은 미군의 해군기지, 관타나모 기지가 있는 곳도 바로 이 지역이다.
인디오 저항이나 쿠바혁명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을 지나 관타나모에 온 저자는 쿠바혁명 당시 게릴라로 활동했던 뮬라토와 중국인의 혼혈인 할머니를 만났다. 근로영웅 표창도 받은 이 할머니는 손녀딸과 둘이서만 살고 있는데, 그 할머니의 연금은 겨우 150페소(약 6,000원)에 불과했다.
저자는 동부지역에서 혁명이란 ‘잠깐의 전복’이 아니라 ‘변함없는 끈기와 신념’을 가지지 않는 한 달성하기 어려운 ‘건설’임을, 혁명의 유적지와 관타나모 만 그리고 혁명전사였던 할머니의 오늘을 통해 말하고 있다.
쿠바‘인’의 수도 아바나
“아바나. 그 문턱을 앞두고 줄곧 보아왔던 탓에 이제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선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시경계 표지판이다. ‘어서 오세요. 서울입니다.’ 이런 말인 셈인데, 정확하게는 이렇게 씌여 있다. ‘모든 쿠바인들의 수도에 오셨습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가 아니라 ‘쿠바인’들의 수도에 온 것이다. 국가가 아니라 사람을 앞세운 발상이 신선하다. 자유, 조국, 혁명과 사회주의가 난무하는 쿠바에 또 하나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인간’이다. 현실에서는 조화를 이루기 쉽지 않은 단어들이다. 인간적 자유, 인간적 조국(국가), 인간적 혁명, 인간적 사회주의.” ― 본문 p.205
1900년대 초반 미국의 지배 아래 미국인들의 위락과 환락을 위한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아바나는 식민지 시대와 독재정권, 혁명, 구소련 영향하의 사회주의 체제, 소련의 몰락과 위기의 극복까지 쿠바 현대사의 모든 흔적을 오롯이 담고 있는 도시이다.
이곳에서 저자는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연주하고 춤추며 말레콘 해변 방파제에서 낮잠을 즐기는 아바나 사람들과 손님에게 아무 관심없는 상점의 직원들, 국영상점에서 훔쳐온 물건을 암거래하는 사람들, 유럽산 수입품이 즐비한 달러상점에서 로레알 염색약을 만지작거리는 젊은 여인들을 가감없이 만난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면서 저자는 카스트로가 한 “우리는 좀 더 잘 살게 되겠지만 소비사회로 가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쿠바사회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전한다.
하지만 그가 아바나의 끝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레닌의 석상 뒤 돌틈에 뿌리를 내린 작은 싹 하나이다. “빛바랜 역사의 조각이 된 그의 석상 뒤 틈새로 씨 하나가 날아와 자리를 잡고 싹을 틔웠다. 나무가 되어 그늘을 드리우라.”(본문 p.297)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해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근대사회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들이 곳곳에서 드러나자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도 ‘속도’에 대한 반성과 함께 ‘느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어쩌면 우리가 느리게 걷는 법을 알게 될 때 혹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해 걷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때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 『느린 희망』이 ‘쿠바’라는 거울을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유재현이 쿠바의 서부에서 만난 화초 키우는 청년은 화초 판매대 뒤에 이런 글을 붙여놓았다고 한다. “현명한 당신, 알아두세요. 홀수날에는 사랑을, 짝수날에는 우정을.” 청년의 사진과 함께 이 문구를 소개하며 뒤이어 저자는 말한다. “꽃을 키우려면 모쪼록 이렇게 키우십시오. 인간을 대하려면 모쪼록 이렇게 대하십시오. 정치도 개혁도 혁명도 이렇게 하십시오. 그럼, 우린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홀수날에는 서로를 사랑하고 짝수날에는 서로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회로 우리 사회를 만들어갈 하나의 영감을, 작은 상상력을, 저자는 쿠바 사회의 모습을 빌려 지금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목차
머리말
서부
비냘레스|피나르 델 리오|산디노|과나아카비베스 반도|마리엘
쿠바 리포트 1_ 생태환경 / 배급
중부
코치노스 만(피그스 만)|시엔푸에고스|트리니다드|시에라 델 에스캄브라이|상크티 스피리투스|카마구에이
쿠바 리포트 2_ 농업 / 교육
동부
시에라 마에스트라|산티아고 데 쿠바|관타나모|바라코아|모아
쿠바 리포트 3_ 미국의 봉쇄
아바나
아바나
쿠바 리포트 4_ 의료